230101주후
김동민2023-01-01조회 245추천 23
날짜: 2023년 1월 1일 주일 오후
찬송가: 5장, 46장
본문: 고린도전서 11장 26절
떡을 먹으며 잔을 마실 때마다 겉으로 먹는 것을 하는 것은 일 년에 한 번입니다. 실제로 느끼는 것, 느낌이라는 것은 감정에 속하는 것인데 인간의 감정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하는 것이고 그 지식과 실감과 생각은 시공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 먹고 마시는 것은 일년에 한 번 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주일마다 먹고 마시고 모든 현실에서 살아갈때마다 먹고 마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게 순간순간 주님과 함께 호흡하고 일보일보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고 이렇게 계속하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점점 하나님을 가까이가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가까이 갈수록 하나님을 알게 되고 가까이 갈수록 알게되고 모르게 되는 것이 하나님입니다. 무한이고 완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장난이 아니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사람으로 오셨고 실제 생활으로 아버지가 동행하는 것이었던 것처럼 주님은 갓난아기로 나셨습니다. 갓난아기로 나셨는데 그 차원에서 아버지와 동행입니다.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차원에서 아버지와 동행입니다. 그래야 우리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많이 사람들이 예수님이라고 너무 좋게 포장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교리적으로 어릴 때 죄를 지었으면 하나님과 끊어집니다. 자의사가 없다고 하고 그 차원에서 아버지와 동행입니다. 갓난아기 차원에서 죄가 없는 상태로. 그래야지 대속이 이루어집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웁니다. 그 우는 소리가 일반적으로 자기 중심이라고 합니다. 자기 중심은 악이고 악은 죄입니다. 예수님은 안 우셨을까 그런데 찬송가에는 울지 않는다고 되어있습니다. 만약에 자기 중심으로 울었다면 자기 중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다윗도 울었고 모두 다 웁니다. 울어도 죄가 아닌 것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갓난아기는 자기와 맞지 않으니 우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능은 자기 중심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본능은 죄라고 하기 곤란합니다. 둘째 아담으로 새로 오셨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들으실 때 논리적으로 너무 좋게 포장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교리적으로 맞춰보면 됩니다. 예수님이 자기 중심이 먼지만큼 들어가든지 1초라도 죄를 짓는다면 주님은 사망이고 대속은 실패입니다. 인정하셨으니까 결과를 볼 때 예수님은 죄가 1초 동안도 없으신 분입니다. 100% 아버지와 동행입니다. 살아가면서 떨어져있다가 믿으니까 가까이 있고 한번씩 동행도하고 음성도 들어보고 점점 가까워져서 그 동행이 잦아지고 많아지고 돈독해지고 일보일보 동행하는 게 우리의 신앙 생활입니다. 우리 구원이 이루어져야합니다. 실제 신앙 생활이 그리 되어야 신앙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성찬을 오늘 먹었습니다. 주님 몸과 피를 먹고 마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심해야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힘이 있을 때는 건들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빈틈과 약점을 노립니다. 그래야 이깁니다. 마귀는 우리보다 한 수 위에 있습니다. 마귀는 영물이고 시공을 초월합니다. 언제 우리 속에 들어올지 모릅니다. 내 모든 생활에 틈만나면 들어옵니다. 성찬을 준비할 때는 마귀가 함부로 못 들어옵니다. 노아가 방주 만들 때는 못 건들였습니다. 온 세상과 마찰되고 반대되는 그때 마귀는 노아를 건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홍수가 다 끝났을 때 노아가 넘어졌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개가 토했던 것을 도로 먹고 돼지가 씻었다고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뱉는다고 하였습니다. 개는 개니까 그렇고 사람이 하면 안되는 짓이었다가 개가 토했다는 것처럼 사람이 했던 짓 하면 안되는 짓을 하면 그게 바로 견과 같은 짓이 되는겁니다. 우리가 그러면 안되는데 그런 요소가 우리 속에 다 있습니다. 죄를 끊었다가 죄를 지으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와 돼지같은 무리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전에 성찬과 관련하여 성찬은 그냥 음식이고 식사라는 뜻이고 신령한 것을 구원도리를 알아듣기 쉽게 한 것입니다. 먹고 마셨는데 그 성찬은 주님의 몸이고 피인데 주님 피는 주님의 죽으심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력이 남고 흔적이 남습니다. 살고 마지막에 죽는 것은 연결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대속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기억한다 생각한다 되새긴다 중단되지 않도록 이어간다는 뜻입니다. 성찬이란 무엇을 공부하는 것입니까? 사활의 대속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느낌이 생깁니다. 생각하면 감정이 생기고 여러 가지 작용이 생겨집니다. 지식과 지식을 가지고 사고하는 것입니다. 평가 비판 이것이 다 생각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구름잡는 것처럼 그러면 곤란합니다. 논리적으로 이치적으로 이해는 잘 안될지라도 실제 자기 생활에 적응되는 것이 되어야합니다. 내가 사는 것과 직접 연결이 되어야하는데, 네 가지로 생각해봤습니다. 대속의 사랑이라고 그랬는데 동기입니다. 원동,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은 베풀 대상이 있어야하고 그 대상에 마음이 괴롭고 슬픕니다. 부모와 자녀는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건져내서 복되게 하는 것이 부모의 본능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의 대상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사랑을 다 쏟아부어줄 사랑하는 하나님을 알아줄, 그 대상을 만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자존자 완전자 영혼 불변자, 혼자 있으면 기쁨도 없고 만족도 없습니다. 사랑이란 줄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듣기 거북할지 모르겠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나이가 차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서 길러야 나라도 좋고 사회도 좋고 가정도 좋고 자기도 좋습니다. 아이를 안 낳고 강아지를 유모차에 끌고다니고 젊은 처녀가 강아지 온 입혀가지고 비닐 장갑끼고 개가 똥을 싸면 젊은 처녀가 치워줍니다. 아이들끼리 말장난을 하는데 반려견인지 애완견인지 그럽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국어사전에 반려는 짝이라고 합니다. 남편이자 아내에게 반려라고 합니다. 개가 아냅니까? 자식입니까? 배웠다는 그 사람들이 망치고 있습니다. 받을 심판이 클겁니다.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주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왜 강아지에게 줍니까. 그것이 무책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반려견이라는 그것을 왜 갖다버립니까? 반려견을 왜 갖다 버립니까? 개는 개니까 좋을 때는 반려견하다가 갖다 버리기 쉽기 때문에 반려견을 키웁니다. 다 그렇지 아닙니다. 백목사님도 물고기나 새를 키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돌은 갖다놓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것들은 물고리도 잉꼬도 전부 저것들대로 고집이 있습니다. 주인 뜻대로 안 움직여둡니다. 그런데 돌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돌을 갖다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베풀어주고 싶습니다. 억만금을 가져도 마지막에는 그 사람의 불행입니다. 적어도 작아도 사랑의 대상이 있는 것인 행복합니다. 그 사랑이 사활의 대속의 원인입니다. 그것이 알고보면 무한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무한하시니까, 그 사람은 순전합니다. 완전하고 동기가 되어서 사랑의 결과물인데 그 결과물은 모두 희생입니다. 그 수많은 우주적인 고난을 받게 만든 원동력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대속의 동기, 사랑입니다. 대속을 공부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크고 넓고 깊고 높은 사람인지 알아야하고 생각해봐야하는데 그 희생을 보면 됩니다. 어떤 희생이냐 무한히 높은 그분은 한없이 고난받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희생의 정도를 알아야 사랑의 깊이를 압니다. 이것이 대속의 사랑입니다. 이런 존귀하신 분이 한없이 낮아져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사랑으로 감싸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세상에서 고통받는 모든 몸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입니다. 애가 끊어집니다. 애가 끊어진다는 것은 마음의 고통입니다. 연세 많은 90이나 100세 되는 어른들은 사실만큼 사시고 호상이라는 말이 있으면 이것을 가지고 슬프지만 그렇게 슬퍼하지는 압니다. 살 수 있는데 갑자기 간다든지, 가족들은 못 견딥니다. 그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못 느끼는 겁니다. 지옥의 고통 모습 중에 하나입니다. 그것들이 천 배 만 배 억만 배의 죄값의 고통인데 그 고통을 주님이 다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천국은 무한한 세계입니다. 상상을 초월하고 이 세상은 영이 죽은 불신자들은 영계를 전혀 짐작을 못합니다. 영이 중심된 사람은 영계를 진작합니다. 말로 표현 못합니다. 이 세상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 온 세상을 다 뒤집어놔도 모릅니다. 죽은자의 세계를 산자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세계는 신비한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신비한 곳에서 어떻게 역사를 합니까. 생명까지 다 바쳐줄 것입니다. 어떤 죄로 어디까지 빠진 우리를 어떻게 구하신 그것을 깨달을 때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대속의 범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금이라는 말은 지극히 거룩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꼭같이 적응된다는 것입니다. 같이 적응시켜주고 공산주의자들이 평등하다, 그것은 저것들 기준이고 하나님의 기준은 전부 평등한데 만물의 자유입니다. 벼를 방아에 찧어서 삶아먹습니다. 쌀은 원래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삶아서 먹습니다. 그 생명 있는 것 하나하나 하나님께 할 말이 있다 그것입니다. 그것이 관계로 사람들이 한 평생 살아가면서 상대하는 숫자도 많고 종류도 많고 굉장히 다양합니다. 상대하며 사는데, 그 모든 것이 그냥 지나가지 않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잘한 것은 상이 있고 잘못한 것은 형벌이 있습니다.
닭은 닭을 좋아하고 강아지는 강아지를 좋아하고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 좋아합니다. 끼리끼리 사귑니다. 그래서 안 봐도 딱 압니다. 저 아이는 저 아이하고 사귀겠다 합니다. 이걸로 편을 가르면 안되는데, 위치가 그렇습니다. 오리는 어디놔도 물있는 곳을 찾아갑니다. 바퀴벌레는 어두운 곳을 찾아갑니다. 여우는 썩은 것만 찾아간답니다. 그 성향에 따라 됨됨이에 따라서 사람을 찾아갑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안되는 것입니다. 타락을 좋아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지옥에서 지옥을 좋아하는, 마귀를 좋아하는, 마귀가 우리에게 올 때는 사탄도 자기를 하나님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올 때는 천사의 모습으로 옵니다. 그런데 죄가 그런 종류가 되면 속습니다. 속는 사람은 속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하는 사람은 당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진실한 사람은 잘 안 속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좋아한다, 사모한다. 우리같은 타락한 인간들이 내 자식도 아니고 핏줄도 아니고 난생 처음보는 학생인데 힘들면 하고 울면 달래주고 그럽니다.
주의 대속을 입은 사람은 자기도 그런 사람이 되어버리고 다른 사람이 그런 사람을 만듭니다. 이 대속을 돕는 것을 가치가 있는지 생각하면 이 대속을 돕는 이가 성령입니다. 하나님이 대속을 전파하고 하나님이 대속을 사람에게 입혀주고 지켜줍니다. 진리가 그렇게 합니다. 성령과 진리가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사활의 대속의 도고 화칭의 도고 소망의 도입니다. 이거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예수믿고 부자되십시오, 젖먹이 아이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런 것은 아무리 해봐야 헛일입니다. 넓이와 깊이가 얼마나 영원하고 완전한지 순전한지 알아가야하고, 생각해야하고 느낌이 오고 그 사랑에 빠져들어야합니다. 공로의 효력, 어디까지 하는 건지 크게하는 건지 알아야하고 생각해야하고 느껴야합니다. 아이들이 나쁜 친구를 사귀면 걱정이 됩니다. 우리 아이가 모범생처럼 됐으면 좋겠는데 그 아이하고 놀고 있습니다. 그러면 안심이 됩니다. 이것이 아이를 구별하고 차별하면 안되는데 쟤하고 떨어지면 좋겠다 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양심으로, 우리들이 타락한 우리들이 하나님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서 이 대속을 성령하나님과 진리역사 그것이 주님의 사활의 대속입니다. 성찬이 바로 이런것입니다. 이런 것을 느끼고 생각하고 이러는 것이 성찬을 먹는 것입니다.
찬송가: 5장, 46장
본문: 고린도전서 11장 26절
떡을 먹으며 잔을 마실 때마다 겉으로 먹는 것을 하는 것은 일 년에 한 번입니다. 실제로 느끼는 것, 느낌이라는 것은 감정에 속하는 것인데 인간의 감정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하는 것이고 그 지식과 실감과 생각은 시공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 먹고 마시는 것은 일년에 한 번 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주일마다 먹고 마시고 모든 현실에서 살아갈때마다 먹고 마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게 순간순간 주님과 함께 호흡하고 일보일보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고 이렇게 계속하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점점 하나님을 가까이가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가까이 갈수록 하나님을 알게 되고 가까이 갈수록 알게되고 모르게 되는 것이 하나님입니다. 무한이고 완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장난이 아니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사람으로 오셨고 실제 생활으로 아버지가 동행하는 것이었던 것처럼 주님은 갓난아기로 나셨습니다. 갓난아기로 나셨는데 그 차원에서 아버지와 동행입니다.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차원에서 아버지와 동행입니다. 그래야 우리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많이 사람들이 예수님이라고 너무 좋게 포장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교리적으로 어릴 때 죄를 지었으면 하나님과 끊어집니다. 자의사가 없다고 하고 그 차원에서 아버지와 동행입니다. 갓난아기 차원에서 죄가 없는 상태로. 그래야지 대속이 이루어집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웁니다. 그 우는 소리가 일반적으로 자기 중심이라고 합니다. 자기 중심은 악이고 악은 죄입니다. 예수님은 안 우셨을까 그런데 찬송가에는 울지 않는다고 되어있습니다. 만약에 자기 중심으로 울었다면 자기 중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다윗도 울었고 모두 다 웁니다. 울어도 죄가 아닌 것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갓난아기는 자기와 맞지 않으니 우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능은 자기 중심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본능은 죄라고 하기 곤란합니다. 둘째 아담으로 새로 오셨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들으실 때 논리적으로 너무 좋게 포장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교리적으로 맞춰보면 됩니다. 예수님이 자기 중심이 먼지만큼 들어가든지 1초라도 죄를 짓는다면 주님은 사망이고 대속은 실패입니다. 인정하셨으니까 결과를 볼 때 예수님은 죄가 1초 동안도 없으신 분입니다. 100% 아버지와 동행입니다. 살아가면서 떨어져있다가 믿으니까 가까이 있고 한번씩 동행도하고 음성도 들어보고 점점 가까워져서 그 동행이 잦아지고 많아지고 돈독해지고 일보일보 동행하는 게 우리의 신앙 생활입니다. 우리 구원이 이루어져야합니다. 실제 신앙 생활이 그리 되어야 신앙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성찬을 오늘 먹었습니다. 주님 몸과 피를 먹고 마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심해야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힘이 있을 때는 건들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빈틈과 약점을 노립니다. 그래야 이깁니다. 마귀는 우리보다 한 수 위에 있습니다. 마귀는 영물이고 시공을 초월합니다. 언제 우리 속에 들어올지 모릅니다. 내 모든 생활에 틈만나면 들어옵니다. 성찬을 준비할 때는 마귀가 함부로 못 들어옵니다. 노아가 방주 만들 때는 못 건들였습니다. 온 세상과 마찰되고 반대되는 그때 마귀는 노아를 건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홍수가 다 끝났을 때 노아가 넘어졌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개가 토했던 것을 도로 먹고 돼지가 씻었다고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뱉는다고 하였습니다. 개는 개니까 그렇고 사람이 하면 안되는 짓이었다가 개가 토했다는 것처럼 사람이 했던 짓 하면 안되는 짓을 하면 그게 바로 견과 같은 짓이 되는겁니다. 우리가 그러면 안되는데 그런 요소가 우리 속에 다 있습니다. 죄를 끊었다가 죄를 지으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와 돼지같은 무리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전에 성찬과 관련하여 성찬은 그냥 음식이고 식사라는 뜻이고 신령한 것을 구원도리를 알아듣기 쉽게 한 것입니다. 먹고 마셨는데 그 성찬은 주님의 몸이고 피인데 주님 피는 주님의 죽으심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력이 남고 흔적이 남습니다. 살고 마지막에 죽는 것은 연결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대속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기억한다 생각한다 되새긴다 중단되지 않도록 이어간다는 뜻입니다. 성찬이란 무엇을 공부하는 것입니까? 사활의 대속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느낌이 생깁니다. 생각하면 감정이 생기고 여러 가지 작용이 생겨집니다. 지식과 지식을 가지고 사고하는 것입니다. 평가 비판 이것이 다 생각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구름잡는 것처럼 그러면 곤란합니다. 논리적으로 이치적으로 이해는 잘 안될지라도 실제 자기 생활에 적응되는 것이 되어야합니다. 내가 사는 것과 직접 연결이 되어야하는데, 네 가지로 생각해봤습니다. 대속의 사랑이라고 그랬는데 동기입니다. 원동,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은 베풀 대상이 있어야하고 그 대상에 마음이 괴롭고 슬픕니다. 부모와 자녀는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건져내서 복되게 하는 것이 부모의 본능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의 대상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사랑을 다 쏟아부어줄 사랑하는 하나님을 알아줄, 그 대상을 만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자존자 완전자 영혼 불변자, 혼자 있으면 기쁨도 없고 만족도 없습니다. 사랑이란 줄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듣기 거북할지 모르겠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나이가 차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서 길러야 나라도 좋고 사회도 좋고 가정도 좋고 자기도 좋습니다. 아이를 안 낳고 강아지를 유모차에 끌고다니고 젊은 처녀가 강아지 온 입혀가지고 비닐 장갑끼고 개가 똥을 싸면 젊은 처녀가 치워줍니다. 아이들끼리 말장난을 하는데 반려견인지 애완견인지 그럽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국어사전에 반려는 짝이라고 합니다. 남편이자 아내에게 반려라고 합니다. 개가 아냅니까? 자식입니까? 배웠다는 그 사람들이 망치고 있습니다. 받을 심판이 클겁니다.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주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왜 강아지에게 줍니까. 그것이 무책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반려견이라는 그것을 왜 갖다버립니까? 반려견을 왜 갖다 버립니까? 개는 개니까 좋을 때는 반려견하다가 갖다 버리기 쉽기 때문에 반려견을 키웁니다. 다 그렇지 아닙니다. 백목사님도 물고기나 새를 키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돌은 갖다놓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것들은 물고리도 잉꼬도 전부 저것들대로 고집이 있습니다. 주인 뜻대로 안 움직여둡니다. 그런데 돌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돌을 갖다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베풀어주고 싶습니다. 억만금을 가져도 마지막에는 그 사람의 불행입니다. 적어도 작아도 사랑의 대상이 있는 것인 행복합니다. 그 사랑이 사활의 대속의 원인입니다. 그것이 알고보면 무한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무한하시니까, 그 사람은 순전합니다. 완전하고 동기가 되어서 사랑의 결과물인데 그 결과물은 모두 희생입니다. 그 수많은 우주적인 고난을 받게 만든 원동력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대속의 동기, 사랑입니다. 대속을 공부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크고 넓고 깊고 높은 사람인지 알아야하고 생각해봐야하는데 그 희생을 보면 됩니다. 어떤 희생이냐 무한히 높은 그분은 한없이 고난받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희생의 정도를 알아야 사랑의 깊이를 압니다. 이것이 대속의 사랑입니다. 이런 존귀하신 분이 한없이 낮아져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사랑으로 감싸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세상에서 고통받는 모든 몸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입니다. 애가 끊어집니다. 애가 끊어진다는 것은 마음의 고통입니다. 연세 많은 90이나 100세 되는 어른들은 사실만큼 사시고 호상이라는 말이 있으면 이것을 가지고 슬프지만 그렇게 슬퍼하지는 압니다. 살 수 있는데 갑자기 간다든지, 가족들은 못 견딥니다. 그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못 느끼는 겁니다. 지옥의 고통 모습 중에 하나입니다. 그것들이 천 배 만 배 억만 배의 죄값의 고통인데 그 고통을 주님이 다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천국은 무한한 세계입니다. 상상을 초월하고 이 세상은 영이 죽은 불신자들은 영계를 전혀 짐작을 못합니다. 영이 중심된 사람은 영계를 진작합니다. 말로 표현 못합니다. 이 세상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 온 세상을 다 뒤집어놔도 모릅니다. 죽은자의 세계를 산자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세계는 신비한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신비한 곳에서 어떻게 역사를 합니까. 생명까지 다 바쳐줄 것입니다. 어떤 죄로 어디까지 빠진 우리를 어떻게 구하신 그것을 깨달을 때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대속의 범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금이라는 말은 지극히 거룩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꼭같이 적응된다는 것입니다. 같이 적응시켜주고 공산주의자들이 평등하다, 그것은 저것들 기준이고 하나님의 기준은 전부 평등한데 만물의 자유입니다. 벼를 방아에 찧어서 삶아먹습니다. 쌀은 원래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삶아서 먹습니다. 그 생명 있는 것 하나하나 하나님께 할 말이 있다 그것입니다. 그것이 관계로 사람들이 한 평생 살아가면서 상대하는 숫자도 많고 종류도 많고 굉장히 다양합니다. 상대하며 사는데, 그 모든 것이 그냥 지나가지 않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잘한 것은 상이 있고 잘못한 것은 형벌이 있습니다.
닭은 닭을 좋아하고 강아지는 강아지를 좋아하고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 좋아합니다. 끼리끼리 사귑니다. 그래서 안 봐도 딱 압니다. 저 아이는 저 아이하고 사귀겠다 합니다. 이걸로 편을 가르면 안되는데, 위치가 그렇습니다. 오리는 어디놔도 물있는 곳을 찾아갑니다. 바퀴벌레는 어두운 곳을 찾아갑니다. 여우는 썩은 것만 찾아간답니다. 그 성향에 따라 됨됨이에 따라서 사람을 찾아갑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안되는 것입니다. 타락을 좋아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지옥에서 지옥을 좋아하는, 마귀를 좋아하는, 마귀가 우리에게 올 때는 사탄도 자기를 하나님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올 때는 천사의 모습으로 옵니다. 그런데 죄가 그런 종류가 되면 속습니다. 속는 사람은 속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하는 사람은 당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진실한 사람은 잘 안 속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좋아한다, 사모한다. 우리같은 타락한 인간들이 내 자식도 아니고 핏줄도 아니고 난생 처음보는 학생인데 힘들면 하고 울면 달래주고 그럽니다.
주의 대속을 입은 사람은 자기도 그런 사람이 되어버리고 다른 사람이 그런 사람을 만듭니다. 이 대속을 돕는 것을 가치가 있는지 생각하면 이 대속을 돕는 이가 성령입니다. 하나님이 대속을 전파하고 하나님이 대속을 사람에게 입혀주고 지켜줍니다. 진리가 그렇게 합니다. 성령과 진리가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사활의 대속의 도고 화칭의 도고 소망의 도입니다. 이거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예수믿고 부자되십시오, 젖먹이 아이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런 것은 아무리 해봐야 헛일입니다. 넓이와 깊이가 얼마나 영원하고 완전한지 순전한지 알아가야하고, 생각해야하고 느낌이 오고 그 사랑에 빠져들어야합니다. 공로의 효력, 어디까지 하는 건지 크게하는 건지 알아야하고 생각해야하고 느껴야합니다. 아이들이 나쁜 친구를 사귀면 걱정이 됩니다. 우리 아이가 모범생처럼 됐으면 좋겠는데 그 아이하고 놀고 있습니다. 그러면 안심이 됩니다. 이것이 아이를 구별하고 차별하면 안되는데 쟤하고 떨어지면 좋겠다 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양심으로, 우리들이 타락한 우리들이 하나님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서 이 대속을 성령하나님과 진리역사 그것이 주님의 사활의 대속입니다. 성찬이 바로 이런것입니다. 이런 것을 느끼고 생각하고 이러는 것이 성찬을 먹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