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7-주후(시편23:1-6)
목자와 양된 관계2014-12-08조회 331추천 27
20141207 주후
시편 23편:1-6
하나님이 우리 목자가 되신 것은 우리 사람의 소원으로 혹은 사람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또 우리들이 태어나서 어떻게 된 것이 아니고 우리들이 나기 전에 알기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목자가 되어 계셨습니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의 양으로, 이거 하나에 비유겠는데, 목자와 양은 비유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그렇게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예를 들자면 물이면 그 물에서 살아야 되는 물고기는 우리 사람들 피조물이겠고, 하나님이 흙이라면 그 흙속에 뿌리 박아야 되는 것이 모든 식물이니까 우리는 모든 식물처럼 그런 예를 들자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다시 말하면 물에 사는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생존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물이 흐리다든지 환경이 열악하다던지 물속에 살면서 좀 사는게 부족하다, 먹을 게 적다, 또 불편하다, 불행하다 이런 차원이 아니고 물을 떠나면 아예 죽어버립니다. 또 식물이 땅을 떠나면 마찬가지로 죽는 것처럼 피조물은 하나님을 떠나면 살 수 없고 또 우리 인생은 그중에서 더욱이 하나님을 떠나면 살 수 없도록 지으신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놓으셨습니다. 이거는 지음 받은 피조물이 이의를 제기할 수 없고 무슨 토를 달 수가 없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아예 없는 겁니다. 이거는 절대성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지음 받은 인생은, 그래서 원래부터 하나님은 우리 목자가 되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양인데, 그러니까 그렇게 관계를 가지고 살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에 원래 그 관계를 지키면서 사람이 하나님께 뿌리박아서 하나님과 연결 되어서 하나님으로 인해서 오는 모든 은혜를 받아 살면 인간은 행복하고 또 평안하고 존영해지고 또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도록 그렇게 되게 되어있는 그것이 타락 전 에덴동산에 생활이었고, 그리 살 때 인간은 만물의 영장의 그 지위를 가질 수 있었고, 그래서 에덴동산에 있던 모든 존재가 전부 하나님께 뿌리 박은 아담 하와에게 모든 존재는 다 복종을 하고 아담 하와는 에덴 동산의 주인이고 통치자가 되어져 있었던 것이고, 가정적으로 그게 타락하지 않고 그대로 계속 내려왔다면 오늘 우리도 그리 되어졌을 겁니다. 이것을 원래 이 모습을 본지위를 회복시켜 나가는게 오늘 우리의 구원인데, 그리된 인생이 하나님과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끊어졌기 때문에, 말하자면은 물고기가 물에서 떠난 것이고 식물이 흙에서 뿌리를 뽑혀 나와서 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말라 죽고 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도록 지음 받았고 그리 된 인간을 다시 예수님이 대속의 공로를 베푸셔서 이 기본적인 본지위를 회복시켜 주셨기 때문에 우리 소원과 상관 없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어져 있습니다. 이미 목자가 되어져있는데 그 목자되어진 그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떠냐, 어느 정도냐에 따라서 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 되신 것은 계약으로 목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계약으로. 그러면 계약으로 목자가 되었기 때문에 계약은 조건이고 그 조건적인 그 계약에 의해서 기본적으로 목자되신 하나님과 양된 우리의 관계가 그 계약 이행의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은 불변하신 분이고 완전자기 때문에 약속을 어김이 없고 어길 수 없는 분인데,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 관계에 계약 이행 여부는 하나님에게 있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있는 것이고 우리들이 그 계약을 얼마만큼 어떻게 이행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대응으로 그 계약을 우리에 대해서 지키느냐가 결정이 되어진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목자되신 하나님과 양된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성립이 된 이 상태에서 우리는 말하자면은 택함 받았고 때가 되니까 중생이 되었고 부르심을 받아서 신앙생활 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러면 기본적인 이런 목자와 양의 관계가 되어있는 상태에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고 오늘까지 하고 내려왔고 현재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각도로 말할 수 있지만은 오늘 본문으로 말하면 목자되신 하나님과 양된 우리의 목자와 양의 관계를 좀 더 돈독하게, 좀 더 튼튼하게 맺어져 가는, 말하자면 우리가 더욱 더 주님의 양다운 그런 양이 되고 그리 되어질때 주님은 우리에게 더욱 더 목자로써의 역할을 하실 수 있도록 우리들이 그렇게 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라 그렇게 말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은 오전에 말씀드린대로 가보면 안다는 말이고, 또 먹어보면 안다는 말이고 행해보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실상이라는 말은, 약속하신 실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니까 약속하신 모든 실상은 우리의 구원의 실상은 크게 말하면 두 가지인데, 하나는 나 자체가 변화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게 어떤 면에서는 전부인데 또 하나는 내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지는, 내 소유적인 그런게 내게 만들어지는 그런 것이 실상이 되어진 건데, 내가 말씀대로 순종하는 생활을 하면,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그 말씀처럼 우리들이 말씀대로 순종해서 살면 그 사는만큼 첫째는 내가 아는 것이 되고 그 말씀에 대해서 알게 되고 그다음 아는 것을 실행을 했으니까 자기라는 사람이 그 말씀의 사람으로 그만큼 변화가 되어진 겁니다. 사과에 대해서 맛을 모르던 사람이 남의 말을 들으면 지식을 가져도 ‘사과는 맛이 달다, 시다, 새콤달콤하다’는 그 말을 들어볼때 들으면 지식은 알지만은 그 지식은 자기 지식은 아니고, 남의 지식으로 일단 그냥 지식적인 그런 걸로 알고 있다가 그 사과를 입으로 직접 먹어보면 그때는 사과 맛을 알게 되고, 그다음 또 하나는 뭐가 됩니까? 사과를 먹어보면 그 사과 맛을 알게 되고 사과의 맛에 대한 지식을 가졌지요. 먹어보니까 그러하다. 이런 종류의 사과는 시고, 이런 종류의 사과는 달고, 이런 종류의 사과는 새콤달콤하고, 사과를 몇 개 먹어보니까 사과에 대한 맛을 아는 사람이 되고 알게 되고 또 하나는 그 사과의 맛을 아는 사람이 됐다는 말입니다. 두 가지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살아보면, 말씀 순종으로 살아보면 첫째는 그 말씀에 대해서 깨달아 아는 사람이 되어지고, 안다는 말은 봤다는 말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은 본다는 말의 의미는, 빛은 바로 보게 하는 것이고, 본다는 말은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사람이 눈으로 본다는 말은 어떻다는 말입니까? 보는 것과 안 보는 것의 차이가 뭡니까? 어떤 물건이 있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과 안 본 사람의 차이는 어떤 결과로 나타납니까? 본 사람은 어떻고, 안 본 사람은 어떻습니까? 본 사람은 그것에 대해서 알게 되고 안 본 사람은 모르게 되는 겁니다. 본다는 말은 안다는 말입니다.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볼 수 없다는 말은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게 뭔지 모른다 그말이지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은 믿음으로 살아보면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그래서 알 수 없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고 천국에 대해서 알게 되고 구원의 모든 세계를 자기가 알 수 있게 되고 그것을 실상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자기라는 사람이 그 말씀의 사람으로 변화가 되고 또 자기 것으로 천국의 모든 활동 무대가 마련이 되어지는 걸 가리켜서 실상으로 되어진다는 걸 말씀하신 겁니다. 하나님을 우리 목자로 삼아서, 우리 양으로 되어서 내가 계약으로 목자되신 그분의 양이 되어서 조건부인 이 계약의 말씀, 목자와 양의 관계가 맺어진 조건이 되어진 이 계약, 이 계약 조건의 말씀 신구약 성경 말씀을 내게 주신 현실에서 하나 하나 순종해서 그 말씀대로 실행을 해나가면 나는 주님의 양으로 사는 것이 되고, 주님은 우리 목자로서의 관계가 더 돈독해지게 되고, 목자의 역할을 더 계약대로 이행하시는 그런 분이 되어지고. 그러면 그렇게 해본만큼 주님과 우리 관계, 목자와 양의 관계는 돈독해지고, 다시 말하면, 계약의 말씀대로 이행해서 살아보니까 주님이 나를 책임지시더라, 목자로서의 내 모든 것 다 책임지시고 나는 그분의 양으로서 아무 염려할 것이 없는 사람이 되어지더라. 그말은 다시 말하면 맺어진 계약,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은 목자와 양으로 맺은 이 계약은 결코 변하지 않더라는 것을 살아본 사람은 그만큼 자기가 깨달아 알게 되고 느끼게 되고 그 계약의 이행의 사람으로 점점 자기라는 사람이 변화가 되어져 간다 그말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거는 정리하면 두 가지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 목자 되신 것은 우리들이 알기 전에 우리 의지와 소원과 상관없이 하나님 편에서 이렇게 맺어놨습니다. 이걸 가리켜서 은혜라 그럽니다. 하나님의 전적 은혜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모든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어떠한지 상관없이 궁극에 들어가면 전부 하나님의 은혜고, 인간의 노력까지도 전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것이지, 인간의 소원과 노력으로 되는 것은 알고 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 가지를 이 근래에 생각을 했는데, 다윗이 왕이 되고 난다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다윗의 군대가 막강한 군대가 되었고 사울 집안이 점점 기울어지고 다윗쪽으로 기울어지고 다윗이 왕이 돼서 강성한 나라가 되어질때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셔서 자기를 그렇게 높이고 강성한 그런 나라와 그런 왕이 되도록 만드신 것을 다윗이 아니라 간단하게 그렇게 기록되있는데, 그게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사람이 안되면 조상탓이고, 잘되면 제가 잘해 된 것이고,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하고 나올 때 마음하고 달라진다는 것처럼, 되기 전에는 뭔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기도하고 애를 쓰고 막 하다가 막상 그 일이 자기 원하는대로 이루어지고 나면 그다음에는 내가 잘해서 된 것처럼 그렇게 되기 쉬운 것이 모든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다 그말입니다. 사울이 대표적입니다. 그렇게 겸손했던 사울이 왕이 되니까 하나님이 왕으로 세워놨고 그렇게 되게 해주셨는데 왕이 되고 나니까, 일이 이루어지고 나니까, 목표 달성이 되고 나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간 곳이 없고 제가 잘 나서, ‘내가 키가 이 백성보다 어깨 위나 더하지, 내가 준수하지, 내가 용맹하지, 내가 언변도 좋지, 잘났지, 이러니까 내 실력으로 됐지’ 그것만 머릿속에 남아있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은혜는 머릿속에 다 지워져버리니까 교만한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이 떠나니까 비참한 사울이 되고 말았는데, 다윗은 마지막까지, 순간에 한순간 잊어버렸지만은 마지막까지 그 사실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기억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람이 다 되다가 말고 된 줄 알다가 다 교만해서 넘어지기 때문에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래서 믿는 사람은 언제든지 평생을 두고 지난 공과에서 사람이 우리가 훈련하는 것은 몇 가지 훈련 연습입니까? 믿는 사람의 연습 훈련이 몇 가지입니까? 주일 학교 반사 선생님들 몇 가지지요? 믿는 사람의 훈련은 몇 가지입니까? 000 선생님, 몇 가지요? 믿는 사람의 훈련은 몇 가지? 뭐, 뭐 입니까? 종 되는 것 하고, 같은 말이지요 복종 하는 것 하고. 그게 믿는 사람의 평생을 두고 연습하는 겁니다. 나는 종이고 복종하는 것이고. 머리 되겠다는 순간, 자기가 주인이 되겠다는 그때부터 하나님이 되겠다는 소리기 때문에 버림 받고 마는 겁니다. 사람이 대개 다 그리 되기가 쉽습니다. 대단히 쉽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일을 달성하고 나면 내가 한 것처럼 그렇게 사람은 느껴집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내가 밤낮 가리지 않고 공부해서, 내가 밤잠 안자고 공부해서, 머리 싸매고 해서 그래서 내가 이런 좋은 대학도 갔고 이 일도 이루어졌고.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란 것은 표가 안 나거든요. 사람이 잊어버리기 쉽다 그말입니다. 뭔가 달성하고 나면 그리 되기 쉬운데 이걸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아시고 자기는 압니다. 고로 시간 지나고나면 다른 사람이 알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나면 그때부터 서서히 떨어져 내려오고 그사람의 가치는 점점 떨어지게 되는 겁니다. 인생의 가치는 여러군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집안에서 아주 대우받는데 밖에 나가면 온갖 손가락질 다 받는 사람, 직장에서는 대우 받는데 집에 오면은 가족들에게는 골칫거리인 사람, 좁은 곳에서는 대우받는데 조금 넓은 곳 가면은 아무 것도 아닌 사람, 어떤 면의 세계에서는 대우 받는데 어떤 세계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 그래서 사람은 전부다 제 잘난 맛에 산다 그러지요. 각각 전부 자기 잘난 맛으로 사는게 사람인데, 믿는 사람은 넓게 봐야 된다 그럽니다. 뭐든 넓게. 사람이란 것은 내가 아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고 내가 보고 있는 세계가 전부가 아닌 겁니다. 넓게 봐야 되고 멀리 봐야 되고 전체를 봐서, 그러기 때문에 늘 말하는 것이 인생이 지금이 전부가 아니고 살아 생전이 전부가 아니고 평생을 생각해야 되고 또 부활 너머 심판 너머 무궁세계까지 생각하면서 거기까지를 다 계산해서 그러기 때문에 우물 안에 개구리라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겁니다. 사람이 젊은 사람들은 보면은 힘도 있고 머리도 잘 돌아가고 활동성 있으니까 자기들 아는 것이 전부인 줄 아는데, 그래서 우리나라도 민주화 운동하는 그런 사람들이 젊을때 반정부 대모를 민주화운동을 그렇게 모두 기를 쓰고 하는데 그 사람들이 대개 보면은 서른 살이 넘어가면 전부다 여당이 다 되어버립니다, 거의 대개는. 나이 사십, 오십 되어서도 아주 반정부 투쟁하는 그 사람들은 그만 대책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 있고. 지금 여당에 있는 그런 사람들 보면 옛날에 아주 빨갱이라 할만큼 반정부 투쟁하던 그런 사람들이 여당에 중심된 사람들 많습니다. 늦게 철이 드는 거지요. 그건 세상일이지만은.
그래서 첫째는, 하나님은 내가 알기전, 나기 전부터 우리 목자가 되어 계십니다. 우리의 소원과 상관없이 그분 우리 목자가 되셨습니다. 그다음 두 번째, 목자가 된 이 관계는 기본적인 목자인데, 기본적으로 목자와 양의 관계된 우리들의,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날때부터 택함이라는 목자와 양의 관계로 났고, 또 중생이라는 그 관계로 좀 더 두꺼워졌고 실질적이 되어졌고, 부르심을 받았다는 여기서 이제는 본격적으로 목자와 양의 관계로 맺어져서 내려왔는데, 그래서 오늘 여기 있는 우리는 전부 이런 택함과 중생과 부르심까지 다 받아서 오늘까지 목자와 양으로 내려온 우리들이기 때문에 이 관계면에 있어서 이 관계가 얼마만큼 돈독해지느냐, 얼마만큼 두꺼워지느냐, 얼마만큼 실질적이 되어지느냐는 내가 주님의 양으로 살아본만큼 자기가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이 주님의 양으로 살아본만큼 주님이 내 목자가 되셔서 나의 모든 의식주라든지 안보라든지 인도라든지 내 모든 성장이나 번식 전부를 다 책임진다는 그 사실을 자기가 주님의 양으로 살아본만큼 알게 되고 경험하고 체험하게 되고, 그래서 더욱 더 주님 양으로 사는 그런 사람이 되어지는데, 주님 양으로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겁니까? 계약을 지키는 거지요. 계약 조건이니까. 성경에 선포하신 이 말씀대로 살아본만큼 우리는 내가 주님의 양이며 주님은 내 목자되심을 자기가 실감할 수 있다, 경험 체험 할 수가 있다는 것을 지금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각각 기본적으로 주님이 우리 목자고, 우리는 주님의 양이라는 기본적인 관계는 모든 사람이 같으나 그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은 하우하박의 하나님이 아니고 공평된 하나님이신데 다같이 꼭 같은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지만은 그 사랑이 우리 개인들에게 적용되어질때 올때는 다 각각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들의 어떠함에 따라, 우리들의 계약 조건을 어떻게 지키느냐는 정도에 따라서 대응하시는 하나님의 대응이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목자의 그 모든 책임과 역사가 참 목자다운 그런 면으로 가는 그런 양도 있고, 어떤 양은 목자의 그 은혜와 보호와 모든 그 축복이 별로 없는 그런 양도 있는 것은 목자되신 주님에게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양된 우리들에게 그 모든 원인이 있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믿어본 사람, 목자와 양으로써 계약을 지키며 살아본 사람, 그 양만큼 이 사실은 알 수 있게 되는 것을 말씀을 하는 겁니다.
본문 한번 보시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여호와는 아는대로 계약의 하나님, 계약을 선포하시고 그 계약대로 이행하시는 하나님. 제가 여호와라는 이 표현이 성경에 몇 백 번 나오는가 하고 검색으로 찾아보니까, 몇 번쯤 나올 것 같습니까, 여호와라는 글자가?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여호와라는 이 글자가 몇 번쯤 나올 것 같습니까? 그게 검색이 맞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이렇게 많나 싶을만큼 의문인데, 오천 몇 번이 나옵니다, 오천 몇 번이. 여호와라는 그게 숫자적으로. 오천 몇 군데 여호와라는 게 나온다고 숫자에 뜹니다. 이렇게 많나 싶을만큼.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이름은 전부 알고보면 우리들과 관계된 이름 전부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이름과 모든 역사는 알고보면 전부 성부 하나님이 계시는데, 알고보면 그 역할은 전부 성자 역할, 우리 인간의 구원과 관계된 그런 이름으로 다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성경에는. 우리와 관계된 모든 기록이기 때문에. 그래서 많은 이름이 있는 중에서. 그래서 성부는 구원을 전체를 다 총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성자는 우리 대속을 실제 이루신 2위 말씀이신 그리스도 그 분, 성령은 성자의 이루신 구원을 마무리 짓는 그 역할, 그다음 그리스도는 직분, 제사장, 선지자, 왕의 기름 부음 받은 그 직분. 또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당신의 구원 역사를 우리에게 전부 설명해주고 가르쳐주시는 그 하나님의 이름을 말씀. 그래서 말씀은 둘이지요. 하나는 2위 성자의 이름이 말씀이고, 또 하나는 뭡니까? 말씀이 둘인데, 말씀 하나는 하나님의 이름이 말씀이고 또 하나는요? 말씀, 이 기록된 말, 말의 경어, 말씀. 그래서 진리인 말씀, 이치인 말씀은 이거는 무인격 존재고 이거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말씀이고 진리이고 이치지.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 말씀하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 말씀은 하나님을 가리켜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그 하나님의 이름을 말씀이라고 표현할 때, 그 이름은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것, 하나님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우리들에게 알려주시는, 그래서 말을, 말씀을 글로 쓰면 글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말씀은 기록된 모든 말씀, 이치라는 말이지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모든 구원 역사를 알려주시는, 나타내 설명해주시는 그 하나님의 이름을 말씀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말씀, 그리스도, 또 만군의 여호와 이런 것. 하나님 이름인데 많은 이름 중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삼위일체가 성경에 그대로 나타나지 않듯이,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에 가깝도록 삼위일체를 그렇게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성경은 아닌데도. 마찬가지로, 여호와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계약의 하나님이라는 뜻이 성경에는 사전적인 풀이로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르는데, 백목사님께서 또 다른 분이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는데, 성경을 달통을 하고 성령으로 깨달은 그분이 정의하기를 여호와는 성경 전체를 앞뒤로 찾아볼때 하나님이 사람들로 더불어 계약을 맺은 그 면에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한다고 그렇게 정의를 내려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그분만큼 알지 못하는 이상, 그것을 그대로 또, 이걸 듣고 따져볼때 아무리 따져봐도 이게 틀렸다고 반박할 수 없는 이상 그대로 믿는 거지요. 받아들이고. 찾아보면 또 그러니까. 그래서 계약이란 것은 약속이고, 하나님이 우리들로 더불어 맺은 약속인데 이 약속은 알고보면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계약은 일방적인 계약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강제적인 계약입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달라 그랬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계약을 맺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까, 소원을 했습니까, 간구 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노력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맺어놨습니다. 그런데 그 맺은 계약이 우리들에게 대한 계약이고 우리를 복되게 유익되게 구원하기 위한 그런 계약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 계약을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복되게 하기 위한 그 계약이고 그 계약을 지키면 우리들이 복되는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맺어놨지만은 그 맺어놓은 계약을 지키는 준수 여부는 우리들의 자유 의지에 달려있기 때문에 쌍방 계약이라고 표현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맺어놔도. 그 계약의 당사자가 우리들이고, 우리를 복되게 구원하기 위한 계약이고 그 계약의 준수 여부는 순전히 우리들의 자유의지에 맡겨놓으셨기 때문에 쌍방계약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계약은 예를 들어서 한 달란트 받았던 자가 당신은 엄한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흩어 헤치지 않은데서 모은 줄 알았기 때문에 하고 한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놔도 제 마음입니다. 제 자유 의지고. 주인의 그 뜻을 져버리고 제 마음대로 해도 제 의지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고 내가 또 주인의 원하시는대로 이만큼 남겼나이다 하는 것도 제 의지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원하시는 것은 약속을 했기 때문에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처럼 그만큼 남기니까 그만큼 복을 더 받는 것이고, 너는 너 자유 의지로 내 뜻을 저버리고 나와 상관없이 했으니까 너 자유의지대로 내가 너에게 너 말한 그대로 갚아주겠다고 한 달란트까지 빼앗아버리고 갚아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계약이란 것은 쌍방 계약인데, 따지고 보면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계약이고 그러나 그 일방적인 하나님의 계약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우리를 사랑한 그 계약이고 준수여부는 순전히 우리 자유의지에 달려있기 때문에 이 계약은 쌍방 계약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겁니다. 이 계약에 의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셨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거부해서 ‘나는 하나님이 내 목자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내 목자 되지 않습니다. ‘싫으면 관둬’. 받아들이면 받는 것이고 안 받아들이면 당신은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기본적인 그런 건 있지만은.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목자가 되신 것. ‘목자’라는 말의 의미는, 목자라는 그 ‘목’자가 무슨 ‘목’자입니까? ‘목회자’라는 ‘목’자와 같은 뜻입니다, 목회자. ‘목’자는 ‘기를 목’자지요. 양을 기른다. 기른다는 말은, 먹이고, 양이니까 입히는 건 없겠지만은 예를 들면 입히고, 또 잠 재워주고, 병들면 치료해주고 보살펴주고 비바람 피해주고, 이리한테서 맹수한테서 지켜주고, 인도해주고 보살펴주고, 또 젖 나게 해주고, 새끼 낳도록 해주고 어쨌든 그 양에 관한 모든 전부다를 총괄해서 전부다 하나부터 마지막까지 총책임, 세밀한 전부다를 책임지는게 목자의 위치고 역할입니다. 그러면 양은, 그 목자의 양이 되어있을때, 선한 목자의 양이 됐을때 그 양이 할 일은, 양으로써의 그냥 목자만 믿고, 목자에게만 다 맡기고 목자가 주는 것 먹고 인도하면 따라가고 보호하면 보호받고 또 약주면 약 먹고, 목자가 해주는대로만 받아들이면 그것만 하면 양의 할 일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목자가 알아서 책임을 다 지는 겁니다. 우리가 평소 배운 말씀하고 같지 않습니까? 무엇을 먹을가,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마라. 누가 하는 겁니까? 이 염려는 누가 염려하는 겁니까? 이방인들인데, 그 이방인은 비유로 말하면 어떤 사람입니까? 여기 본문에 비유로 말하면. 목자의 양이 아닌 양들, 아닌 사람. 목자의 양이라면 그 양은, 양이 ‘오늘 저녁은 어디가서 풀을 먹을꼬, 물은 어디가서 먹을까, 이리가 오면 어떻게 할까, 비가 오면 어떻게 하지?’ 그런 걸 염려할 게 없다는 겁니다. 양이기 때문에. 그거는 목자가 알아서 다하고, 양은 그런 걸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해봐야. 그래서 누가복음 15장 비유에 잃은 양 한 마리가, 백 마리 중에 한 마리가 목자를 떠나서 도망갔는데 목자가 양을 찾아서 데려올때는 안고 왔습니다. 안고 오니까 평안하지요. 목자를 떠났을때는 먹을 것도 제가 찾아야 되고, 물도 제가 찾아 먹어야 되고 또 가시덤불 있으면 제가 피해 나가야 되고, 이리 만나면 도망쳐야 되는데. 하다보면 나중엔 상처투성이 되고 굶어죽든지 이리한테 잡혀 죽고 말지 제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게 양이지요. 양이라는 말은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순진한 것, 순수한 것. 이게 양이지 않습니까. 힘 없고 연약하고 순수한 그게 양인데, 목자는 그 양을 책임지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 목자가 되셨고, 우리는 그분의 양이니까 주님은 내 목자가 되셨는데 그분은 변하지 않는 분인데다가 전지전능자니까 책임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분이고, 문제는 내가 그분의 양만 되어 있으면 된다 그래서 목자의 슬하에만 있으면, 주님 품안에만 있으면 믿는 사람은 아무런 염려할 게 없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40년 세월에 문제 되는 것은, 그들에게 문제점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인도자 모세를 믿지 않는 그게 문제였고, 말씀을 거역해서 우상 섬기고 죄 지어 원망 불평한 그게 늘 문제였지, 그냥 하나님 믿고 인도자 모세 인도 따라 믿고 따라가기만 하면 그들에게 의식주라든지 대적 문제라든지 병이라든지 신발 문제나 아무 염려가 없었습니다, 광야 40년에. 이것이 믿는 사람들의 생활인데 이렇게 살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양이 목자를 떠나는 것은 제가 알아서 해보겠다는 것인 것처럼, 믿는 사람이 양의 위치를 떠나서 믿음을 떠나는 것은 제가 뭔가 해보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목자는 여호와 목자라서 계약으로 목자가 됐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목자가 되실 때 계약으로 목자 되신 그 이유는, 이것 역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헤아려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도 높고 높은 곳에 계시고 너무도 크고 두려우신 분이라서 마치 태양의 물질이 가까이 가면 다 타버리는 것처럼, 그래서 태양빛으로 와서 식물을 살리게 그렇게 해놓은 것처럼 하나님은 너무도 완전하신 분이고 크고 두려우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에게 가까이 가면 사람이 다 타서 죽으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품으로 당신에게 인도하실 그때, 인도하실 때 사람이 알 수 있고 또 안전하게 될 수 있도록 그래서 내놓으신 그 방법이 바로 말씀이다 그말이죠. 그러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본체에까지 우리가 영원토록 소망을 가지고 가도 그분의 본체에는 갈 수가 없을 것이고 우리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지 않을까,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영원한 소망이니까. 영원토록 그분을 향해서 가까이 가고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 소망이라. 그 방법이 바로 말씀이고, 그 말씀은 계약이다. 그러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 말씀은 전부 하나님의 계약이고 이 계약은 조건이고, 이 말씀 계약이 바로 목자와 양된 우리 사이를 맺어주는 계약서다 그말이고. 그러기 때문에 왕이 편지를 보냈는데, 왕이 사신을 보내서 특사에게 친서를 전달했는데 그 친서를 받아본 사람이 왕의 편지를 읽어보고 찢어버립니다. 무슨 뜻입니까? 왕이 직접 쓴 편지를 사신을 통해서 특사에게 편지를 왕이 글을 써서 다른 나라에 보냈는데, 받아보는 사람이 편지를 보더니 ‘편지 이게 뭐야? 아무것도 아닌 종이쪼가리 글인데’ 하고 찢어버립니다. 잘못하면 전쟁 나겠지요. 편지를 찢었습니다. 글자를 불태웠고, 그런데 그게 뭐 그리 대수입니까? 그게 누가 보낸 편지입니까? 왕이 보낸 편지이기 때문에 그 왕의 편지를 가져간 사람은 왕의 일을 대신하는 사람이고 그 편지는 왕의 생각과 왕의 뜻과 왕의 마음과 왕의 모든 것이 그 편지 속에 들어있다 그말이지요. ‘이렇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그 편지를 찢어버리고 무시하는 것은, 예를 들면 그 편지를 읽고 ‘알았다, 이렇게 하지.’ 하고 난 다음에 뒤에 처분하는 것은 다른데, 말 자체, 전달된 그 말 자체, 글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막바로 왕을 무시하는 것하고 같은 겁니다. 선생님의 말씀은, 선생님의 가르침은 그 선생님이 내게 시키는 것은, 그 시키는 하는 말이 말인데 그 말이 바로 선생님 입에서 나온 말이니까 그 선생님만큼 말은 권위가 있는 것이니까 선생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누구를 거역하는 겁니까? 선생님을 거역하는게 되는 겁니다. 부모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그 말씀을 어기는 것인데 부모님을 거역하는 것이 된다 그말이지요. 편지를 쓰든, 말을 하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다가 하나님의 뜻을 기록해서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 성경 말씀을 어기는 것은 막바로 하나님을 어기는 것과 같고, 성경을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과 바로 하나라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 속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목자의 품 안에, 목자의 슬하에 들어가는 것이고, 말씀을 떠나는 것은 목자를 떠나는 것하고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은 계약은 계약이고, 말씀은 말씀이지 목자가 아니지만은, 목자가 양에게 목자의 조건으로 양의 관계 조건으로 계약을 써놨기 때문에 이 계약이 막바로 목자가 내 목자가 된다는 것이고 나는 목자의 양이 된다는 그런 뜻이기 때문에 이 계약을 어기는 것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목자된 주님이 우리와 상관이 없는 그런 게 되어지고, 내가 이 계약을 지킬때는 어떤 경우도 목자된 주님은 그 책임을 지고 계약을 지켜야 되는 것이 목자의 책임이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하나님이 안 보여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워서 이 말씀대로 지켜 순종하는 것은 막바로 목자의 슬하에 들어가는 것이고, 목자의 모든 은혜와 보호를, 인도를 받는 것이다 그말입니다. 이게 여호와 목자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물론 그 속에 우리가 말씀이 있고 그 말씀 속에는 영감이 있고 그 안에 또 하나님이 계시고 이리 되지만은, 그래서 말씀은 이치고 영감은 성령의 역사고 하나님은 본체에 계시는데, 그 하나님은 너무도 우리와 거리 멀고 높지만은 그분이 당신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그 증거로 역사하시는게 영감이고 그 영감을 말씀으로 나타내셨기 때문에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달아 지켜 순종해나가면, 바른 중심으로 말씀을 순종해나가면 영감 하나님의 역사를 자기가 느껴 알 수가 있게 되고, 하나님의 영감 역사를 알게 되면은 볼 수 없는 본체 하나님을 자기가 보는 만큼이나 알게 되고, 알게 된다는 말은 그분의 심성인데, 그분의 모든 사랑도 진실도 또 신실함도, 그분의 거룩함도, 그분의 크심도 이런 것도 눈으로 보지 않았지만은, 내가 말씀대로 살아보면은 영감이 역사해서 나로 하여금 그 사실을 깨달아 알게 하신다 그말입니다. 아는 만큼 그 사람은 그분의 본체와 점점 가까워지는 그런게 되어지는데, 그분이 너무도 크신 분이고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영원토록 자라가는 것이니까 거리 멀지만은 그리 되어지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은 이치지만은, 무인격의 존재지만은 그 말씀을 지킬때는 언제나 그 속에 영감 역사를 살피고 그 영감 역사 이면에 하나님의 본체를 생각하는데 그 본체를 우리가 모르지만은 그 하나님 본체는 무인격의 이치를 넘어서는 지정리의 격위를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은 감정 희로애락이 있다 그말입니다, 역사가. 이걸 생각하면 그 희로애락 역사가 영감을 통해서 내게 나타난다 이걸 생각하면서, 이걸 늘 살피면서 믿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해야 된다는 그말이지요. 이해가 되십니까? 너무 어렵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믿음이란 것은, 기본적인 믿음이 있고 건설적인 믿음이 있는데, 이 기본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고, 건설믿음이란 것은 말 그대로 ‘세울 건’자. 이걸 건설해 쌓아서 나가야 되는 거니까 궁극의 하나님의 은혜인데 나로써는, 오늘 주일학교 가르치는 것 보니까 그렇게 가르치데요. 기도할때는 어떻게 하라고요? ‘이 일은 하나님이 안 도와주시면 절대 안됩니다. 이거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해주셔야만 되는 겁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또 자기가 일할때는 어떻게 하라고요? ‘이거는 내가 하지 않으면 절대 안된다, 반드시 내가 있는 힘 다해서 해야된다’ 그렇게 하고 일을 해야 된다고. 그게 정답입니다. 믿는 사람의 신앙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라야 되는데, 그 은혜가, 그래서 내가 하는 모든 전부다가 겉으로는 내가 하는 것인데, 알미니안 주의라든지 율법주의라는 이걸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우리 복음도 오해하는 것이 사람의 노력이라는 말을 쓸때 그 노력이라는 이면에는 노력 하나하나 전부다가 하나님의 은혜라야 된다는 것이 그 속에 전제가 되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노력을 커녕 숨도 쉴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눈동자 하나 돌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안되는 것이고, 밥을 떠서 입으로 올리는 것도 하나님 은혜가 아니면 안되는 것이고, 입에 넣어서 소화시키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숨 쉬는 것 하나까지 전부 하나님의 은혜기 때문에 이런 은혜라는 것을 알고 내가 노력하니까 된다는 그런 오판을 가지면 안되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모든 건 하나님의 은혜라. 내가 나 된 것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절절이 그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계약을 지키는 여기서 우리가 목자되는, 그러기 때문에 지키는 만큼, 계약을 준수하는 만큼 이 관계는 이렇게 되어진다는 것.
그런데 여호와는 목자인데 나의 목자라고, 이거는 우리가 잘 아는데로 우리 목자가 아니고 주기도문엔 전부 우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 우리라는 것은 나 외에 다른 사람 같이 하는 이게 우리고, 나라는 것은 단수인데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한 것은 계약의 하나님의 계약 적용은 이거는 반드시 개개인적으로 적용된다는 걸 말씀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약은 개인적으로, 개적으로 적용시키지 단체적으로 적용 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롯이 비록 그런 불쌍한 사람이었지만은 그래도 나름대로 의인이었기 때문에 소돔 고모라 성을 불태우면서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논하시고 롯을 거기서 끄집어내서 구원해내신 겁니다. 너희가 예루살렘 거리를 다녀보고 진리와 공의를 찾는 자 한사람이 있으면 성을 멸하지 않겠다 그랬는데, 한 사람 있으면 한사람을 끄집어 냅니다. 전인류를 다 멸망 시키면서 그 인구가 말하자면 몇 프로 되겠습니까? 일억만명 중에서 여덟 명이면 몇 프로입니까? 일억명중에서 한명이면, 0.0001프로겠지요. 전인류를 멸망시키는 그 중에서도 여덟 명 식구를 구출해 낸 것이고. 그래서 천인이 내 곁에서, 만인이 내 우편에 엎드러져도 내게는 이 재앙이 가까이 오지 못하는 그 내게는 이 계약을 지키는 그 사람은 거기서 건져 내겠다는 겁니다. 반대로 아무리 온 집안이 전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님, 누나, 동생 전부다 의인이니까 나 하나쯤 죄 지어도,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신앙 때문에, 부모님 신앙 때문에, 형님 동생 아우 신앙 때문에 나도 죄인이지만은 함께 구원받지 않을까? 어림도 없는 말입니다. 다 구원받아도 너 하나는 꼭 집어서 멸망으로 던지겠다는 말입니다. 이게 ‘나’라는 ‘나의 목자’라는 그 계약입니다.
그다음에, 여덟 가지 말씀인데 이거는 좀 시간이. 그래서 본문을 잠깐만 보십시다.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목자의 양으로 되어있으니까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겠습니다. 이거는 자연 이치를 생각하면 압니다. 참된 목자 밑에 진실한 양이 되어있으면 아무런 부족함이 없습니다. 좋은 부모님 밑에 착한 그런 자녀로 있으면, 그 자녀도 부족한 것이 없겠지요. 그다음,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푸른 초장이라는 말은, 초장이 무슨 뜻이지요? 초장은 한자입니다. 우리 말로 풀면 풀밭이라는 뜻입니다, 풀밭. 푸른 풀밭에.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신다.’, 양에게 푸른 초장이니까 전신에 뭡니까? 양에게 먹을 양식입니다. 온 사방 천지가 양의 양식입니다. 목자가 되어있으면 우리를 그리 인도하시는데 어떤 면일까? 쉴만한 물가. 이 양식은 고깃덩어리 양식을 말하는게 아니겠지요. 푸른 초장이란 것은. 그래서 사람들은 육적으로 모든 것 생각해서 푸른 초장도, 양에게 푸른 초장은 먹을 것이 걱정없는 온 그런 환경인데, 양된 우리들에게 목자된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들이 먹을 양식이 무엇일까? 이 세상 고깃덩어리 의식주겠는가? 우리에 있는 새사람의 양식, 그 양식으로 충족한, 그 양식으로 가득찬 그런 환경으로 인도하신다 그런 말이겠지요. 진리와 영감으로 충만할 수 있는 그런 환경으로 인도하시니까 그 환경이 세상 조건으로는 어떤 환경이 될지 생각해보면 압니다. 쉴만한 물 가. 물이란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갈급을 다 면해주는. 늘 우리 속에 성령으로 충만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영과 마음을 늘 새롭게 살려서 소생 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주님 구원 역사를 위해서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어떤 곳이겠습니까? 사망이 있는 곳은, 원인은? 죽음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이느니라. 사망이 있는 곳에는 뭐가 있다는 말입니까? 죄악이 가득찬 그런 환경 속에, 말세지말 온 세상에 죄악이 가득차고 하늘까지 죄악이 가득찬 그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그 죄악의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목자가 지키니까.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의 지팡이 막대기는 모든 양을 보호하는 그런 무기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섭리 역사, 하나님의 모든 섭리 역사는 전부 나에게 유익되도록만 하십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내 원수 죄, 사망, 마귀, 미혹하는 온갖 신앙의 원수 그 원수에게서 내게 상을 베푸셨는데, 이 상은 무슨 상이라 그랬습니까? 이 상은 말하자면 책걸상 할때 그 ‘상’자인데, 밥상할 때 그 ‘상’자. 잔치상입니다, 말하자면. 상급이 아닙니다, 상급이 아니고 승리해서 잔치하는 그 상. 그래서 원수의 눈 앞에서 내게 승리하셔서 잔치 베푸는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다, 장립한다는 말이지요. 제사장, 선지, 왕. 내 잔이 넘치나이다. 잔은 고난의 쓴 잔인데, 믿는 사람의 이 제사장 선지 왕, 주님의 그 잔을 넘치게 마실 수 있는, 넘치게 마시는 거니까 할 일이 넘치게 많다는 말이겠고 주를 위한 제사장 선지 왕의 직분을 위한 그 고난, 그 수고가 넘치게 많다는 거니까 상급이 그만큼 크다는 말이겠지요. ‘나의 평생에 선하심(하나님 중심)과 인자하심’, 주님이 날 사랑하심 같이 나도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계약의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첫째 하나님은 내 목자가 되어있다는 것, 두 번째 이 목자와 양의 관계에서 이미 되어있는데 우리들의 계약 준수 여부에 따라서 목자와 양의 관계의 정도는 오늘까지 그렇게 되어왔고, 지금도 그리 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리 되고 있고. 이게 되어진 만큼 그 사람의 믿음은 생겨지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중요한 것은, 뭔가 일을 했으면 그 일의 결과를 살피는게 중요하듯이 시험을 쳤으면 그 점수, 결과에 따라서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원인 분석을 해보고 살펴보는게 중요하듯이, 시험을 쳐놓고 빵점을 맞았는지 백점 맞았는지 관심도 없이 던져 놓는 것 안되겠지요. 또 장사하고 오늘 손익계산이 어떠했는지 던져놓는 것도 안될 것이고, 일을 했으면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무관심하면 안되겠지요. 그게 뭐냐면은 살펴보는 것이고 챙겨보는 겁니다. 관심을 가지고. 믿음이란 것은, 여기서 생겨지는 겁니다. 믿는 사람이 믿음 생활, 말씀대로 사는 생활 그 생활을 하고 난 다음에 내가 기도했는데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어찌 됐느냐? 내가 말씀대로 이만큼 살았는데 말씀대로 산 것에 대한 계약의, 나는 양으로써 이만큼 살았는데 목자되신 주님은 양된 내가 지킨 계약 준수에 대하여 어떻게 보응을, 보답을 하셨느냐? 내가 계약을 어기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에게 보응하시고 징계를 하셨는가? 이걸 살펴보는 것이 신앙생활에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걸 살피는 것에 따라서 믿음이 자라고 안 자라고, 생기고 안 생기는 것이 크게 좌우가 되어집니다. 여기 관심 두지 않으면 믿음이란 것은 있어도 있는 줄 모르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셔도 하는 줄 모르기 때문에 큰 손해를 보게 된다 그말입니다. 이게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계약을 지킨 여부에 따라서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졌느냐가, 자기가 거기 대해서 알아지는 것, 느껴지는 것, 관계 맺어지는 것이 이미 되어있는데 살피는게 중요하니까 살펴봐야 되겠고, 그런데 이 하나님은 목자는 우리에게 목자가 되셨고, 목자는 계약의 여호와 목자고, 나의 목자니까 개인적인 계약이고, 그리고 이 목자 되셨을때 우리에게 주신 본문에 기록된 여덞 가지를 생각하면서 어쨌든 오늘 말씀의 결론은 그겁니다. 하나님은 계약의 목자기 때문에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 내가 계약만 지키면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이 사실을 믿고, 목자를 믿고 계약을 믿고 계약을 준수하는 순전한 주님의 양으로 사는 우리들이 되어야 되겠다, 이걸 결론으로 말씀 드리는 겁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이 본문의 말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외우고 있으니까 시편 23편을 다 외울 수 있도록 노력을 하십시다.
시편 23편:1-6
하나님이 우리 목자가 되신 것은 우리 사람의 소원으로 혹은 사람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또 우리들이 태어나서 어떻게 된 것이 아니고 우리들이 나기 전에 알기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목자가 되어 계셨습니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의 양으로, 이거 하나에 비유겠는데, 목자와 양은 비유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그렇게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예를 들자면 물이면 그 물에서 살아야 되는 물고기는 우리 사람들 피조물이겠고, 하나님이 흙이라면 그 흙속에 뿌리 박아야 되는 것이 모든 식물이니까 우리는 모든 식물처럼 그런 예를 들자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다시 말하면 물에 사는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생존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물이 흐리다든지 환경이 열악하다던지 물속에 살면서 좀 사는게 부족하다, 먹을 게 적다, 또 불편하다, 불행하다 이런 차원이 아니고 물을 떠나면 아예 죽어버립니다. 또 식물이 땅을 떠나면 마찬가지로 죽는 것처럼 피조물은 하나님을 떠나면 살 수 없고 또 우리 인생은 그중에서 더욱이 하나님을 떠나면 살 수 없도록 지으신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놓으셨습니다. 이거는 지음 받은 피조물이 이의를 제기할 수 없고 무슨 토를 달 수가 없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아예 없는 겁니다. 이거는 절대성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지음 받은 인생은, 그래서 원래부터 하나님은 우리 목자가 되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양인데, 그러니까 그렇게 관계를 가지고 살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에 원래 그 관계를 지키면서 사람이 하나님께 뿌리박아서 하나님과 연결 되어서 하나님으로 인해서 오는 모든 은혜를 받아 살면 인간은 행복하고 또 평안하고 존영해지고 또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도록 그렇게 되게 되어있는 그것이 타락 전 에덴동산에 생활이었고, 그리 살 때 인간은 만물의 영장의 그 지위를 가질 수 있었고, 그래서 에덴동산에 있던 모든 존재가 전부 하나님께 뿌리 박은 아담 하와에게 모든 존재는 다 복종을 하고 아담 하와는 에덴 동산의 주인이고 통치자가 되어져 있었던 것이고, 가정적으로 그게 타락하지 않고 그대로 계속 내려왔다면 오늘 우리도 그리 되어졌을 겁니다. 이것을 원래 이 모습을 본지위를 회복시켜 나가는게 오늘 우리의 구원인데, 그리된 인생이 하나님과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끊어졌기 때문에, 말하자면은 물고기가 물에서 떠난 것이고 식물이 흙에서 뿌리를 뽑혀 나와서 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말라 죽고 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도록 지음 받았고 그리 된 인간을 다시 예수님이 대속의 공로를 베푸셔서 이 기본적인 본지위를 회복시켜 주셨기 때문에 우리 소원과 상관 없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어져 있습니다. 이미 목자가 되어져있는데 그 목자되어진 그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떠냐, 어느 정도냐에 따라서 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 되신 것은 계약으로 목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계약으로. 그러면 계약으로 목자가 되었기 때문에 계약은 조건이고 그 조건적인 그 계약에 의해서 기본적으로 목자되신 하나님과 양된 우리의 관계가 그 계약 이행의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은 불변하신 분이고 완전자기 때문에 약속을 어김이 없고 어길 수 없는 분인데,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 관계에 계약 이행 여부는 하나님에게 있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있는 것이고 우리들이 그 계약을 얼마만큼 어떻게 이행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대응으로 그 계약을 우리에 대해서 지키느냐가 결정이 되어진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목자되신 하나님과 양된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성립이 된 이 상태에서 우리는 말하자면은 택함 받았고 때가 되니까 중생이 되었고 부르심을 받아서 신앙생활 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러면 기본적인 이런 목자와 양의 관계가 되어있는 상태에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고 오늘까지 하고 내려왔고 현재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각도로 말할 수 있지만은 오늘 본문으로 말하면 목자되신 하나님과 양된 우리의 목자와 양의 관계를 좀 더 돈독하게, 좀 더 튼튼하게 맺어져 가는, 말하자면 우리가 더욱 더 주님의 양다운 그런 양이 되고 그리 되어질때 주님은 우리에게 더욱 더 목자로써의 역할을 하실 수 있도록 우리들이 그렇게 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라 그렇게 말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은 오전에 말씀드린대로 가보면 안다는 말이고, 또 먹어보면 안다는 말이고 행해보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실상이라는 말은, 약속하신 실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니까 약속하신 모든 실상은 우리의 구원의 실상은 크게 말하면 두 가지인데, 하나는 나 자체가 변화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게 어떤 면에서는 전부인데 또 하나는 내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지는, 내 소유적인 그런게 내게 만들어지는 그런 것이 실상이 되어진 건데, 내가 말씀대로 순종하는 생활을 하면,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그 말씀처럼 우리들이 말씀대로 순종해서 살면 그 사는만큼 첫째는 내가 아는 것이 되고 그 말씀에 대해서 알게 되고 그다음 아는 것을 실행을 했으니까 자기라는 사람이 그 말씀의 사람으로 그만큼 변화가 되어진 겁니다. 사과에 대해서 맛을 모르던 사람이 남의 말을 들으면 지식을 가져도 ‘사과는 맛이 달다, 시다, 새콤달콤하다’는 그 말을 들어볼때 들으면 지식은 알지만은 그 지식은 자기 지식은 아니고, 남의 지식으로 일단 그냥 지식적인 그런 걸로 알고 있다가 그 사과를 입으로 직접 먹어보면 그때는 사과 맛을 알게 되고, 그다음 또 하나는 뭐가 됩니까? 사과를 먹어보면 그 사과 맛을 알게 되고 사과의 맛에 대한 지식을 가졌지요. 먹어보니까 그러하다. 이런 종류의 사과는 시고, 이런 종류의 사과는 달고, 이런 종류의 사과는 새콤달콤하고, 사과를 몇 개 먹어보니까 사과에 대한 맛을 아는 사람이 되고 알게 되고 또 하나는 그 사과의 맛을 아는 사람이 됐다는 말입니다. 두 가지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살아보면, 말씀 순종으로 살아보면 첫째는 그 말씀에 대해서 깨달아 아는 사람이 되어지고, 안다는 말은 봤다는 말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은 본다는 말의 의미는, 빛은 바로 보게 하는 것이고, 본다는 말은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사람이 눈으로 본다는 말은 어떻다는 말입니까? 보는 것과 안 보는 것의 차이가 뭡니까? 어떤 물건이 있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과 안 본 사람의 차이는 어떤 결과로 나타납니까? 본 사람은 어떻고, 안 본 사람은 어떻습니까? 본 사람은 그것에 대해서 알게 되고 안 본 사람은 모르게 되는 겁니다. 본다는 말은 안다는 말입니다.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볼 수 없다는 말은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게 뭔지 모른다 그말이지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은 믿음으로 살아보면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그래서 알 수 없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고 천국에 대해서 알게 되고 구원의 모든 세계를 자기가 알 수 있게 되고 그것을 실상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자기라는 사람이 그 말씀의 사람으로 변화가 되고 또 자기 것으로 천국의 모든 활동 무대가 마련이 되어지는 걸 가리켜서 실상으로 되어진다는 걸 말씀하신 겁니다. 하나님을 우리 목자로 삼아서, 우리 양으로 되어서 내가 계약으로 목자되신 그분의 양이 되어서 조건부인 이 계약의 말씀, 목자와 양의 관계가 맺어진 조건이 되어진 이 계약, 이 계약 조건의 말씀 신구약 성경 말씀을 내게 주신 현실에서 하나 하나 순종해서 그 말씀대로 실행을 해나가면 나는 주님의 양으로 사는 것이 되고, 주님은 우리 목자로서의 관계가 더 돈독해지게 되고, 목자의 역할을 더 계약대로 이행하시는 그런 분이 되어지고. 그러면 그렇게 해본만큼 주님과 우리 관계, 목자와 양의 관계는 돈독해지고, 다시 말하면, 계약의 말씀대로 이행해서 살아보니까 주님이 나를 책임지시더라, 목자로서의 내 모든 것 다 책임지시고 나는 그분의 양으로서 아무 염려할 것이 없는 사람이 되어지더라. 그말은 다시 말하면 맺어진 계약,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은 목자와 양으로 맺은 이 계약은 결코 변하지 않더라는 것을 살아본 사람은 그만큼 자기가 깨달아 알게 되고 느끼게 되고 그 계약의 이행의 사람으로 점점 자기라는 사람이 변화가 되어져 간다 그말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거는 정리하면 두 가지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 목자 되신 것은 우리들이 알기 전에 우리 의지와 소원과 상관없이 하나님 편에서 이렇게 맺어놨습니다. 이걸 가리켜서 은혜라 그럽니다. 하나님의 전적 은혜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모든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어떠한지 상관없이 궁극에 들어가면 전부 하나님의 은혜고, 인간의 노력까지도 전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것이지, 인간의 소원과 노력으로 되는 것은 알고 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 가지를 이 근래에 생각을 했는데, 다윗이 왕이 되고 난다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다윗의 군대가 막강한 군대가 되었고 사울 집안이 점점 기울어지고 다윗쪽으로 기울어지고 다윗이 왕이 돼서 강성한 나라가 되어질때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셔서 자기를 그렇게 높이고 강성한 그런 나라와 그런 왕이 되도록 만드신 것을 다윗이 아니라 간단하게 그렇게 기록되있는데, 그게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사람이 안되면 조상탓이고, 잘되면 제가 잘해 된 것이고,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하고 나올 때 마음하고 달라진다는 것처럼, 되기 전에는 뭔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기도하고 애를 쓰고 막 하다가 막상 그 일이 자기 원하는대로 이루어지고 나면 그다음에는 내가 잘해서 된 것처럼 그렇게 되기 쉬운 것이 모든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다 그말입니다. 사울이 대표적입니다. 그렇게 겸손했던 사울이 왕이 되니까 하나님이 왕으로 세워놨고 그렇게 되게 해주셨는데 왕이 되고 나니까, 일이 이루어지고 나니까, 목표 달성이 되고 나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간 곳이 없고 제가 잘 나서, ‘내가 키가 이 백성보다 어깨 위나 더하지, 내가 준수하지, 내가 용맹하지, 내가 언변도 좋지, 잘났지, 이러니까 내 실력으로 됐지’ 그것만 머릿속에 남아있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은혜는 머릿속에 다 지워져버리니까 교만한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이 떠나니까 비참한 사울이 되고 말았는데, 다윗은 마지막까지, 순간에 한순간 잊어버렸지만은 마지막까지 그 사실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기억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람이 다 되다가 말고 된 줄 알다가 다 교만해서 넘어지기 때문에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래서 믿는 사람은 언제든지 평생을 두고 지난 공과에서 사람이 우리가 훈련하는 것은 몇 가지 훈련 연습입니까? 믿는 사람의 연습 훈련이 몇 가지입니까? 주일 학교 반사 선생님들 몇 가지지요? 믿는 사람의 훈련은 몇 가지입니까? 000 선생님, 몇 가지요? 믿는 사람의 훈련은 몇 가지? 뭐, 뭐 입니까? 종 되는 것 하고, 같은 말이지요 복종 하는 것 하고. 그게 믿는 사람의 평생을 두고 연습하는 겁니다. 나는 종이고 복종하는 것이고. 머리 되겠다는 순간, 자기가 주인이 되겠다는 그때부터 하나님이 되겠다는 소리기 때문에 버림 받고 마는 겁니다. 사람이 대개 다 그리 되기가 쉽습니다. 대단히 쉽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일을 달성하고 나면 내가 한 것처럼 그렇게 사람은 느껴집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내가 밤낮 가리지 않고 공부해서, 내가 밤잠 안자고 공부해서, 머리 싸매고 해서 그래서 내가 이런 좋은 대학도 갔고 이 일도 이루어졌고.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란 것은 표가 안 나거든요. 사람이 잊어버리기 쉽다 그말입니다. 뭔가 달성하고 나면 그리 되기 쉬운데 이걸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아시고 자기는 압니다. 고로 시간 지나고나면 다른 사람이 알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나면 그때부터 서서히 떨어져 내려오고 그사람의 가치는 점점 떨어지게 되는 겁니다. 인생의 가치는 여러군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집안에서 아주 대우받는데 밖에 나가면 온갖 손가락질 다 받는 사람, 직장에서는 대우 받는데 집에 오면은 가족들에게는 골칫거리인 사람, 좁은 곳에서는 대우받는데 조금 넓은 곳 가면은 아무 것도 아닌 사람, 어떤 면의 세계에서는 대우 받는데 어떤 세계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 그래서 사람은 전부다 제 잘난 맛에 산다 그러지요. 각각 전부 자기 잘난 맛으로 사는게 사람인데, 믿는 사람은 넓게 봐야 된다 그럽니다. 뭐든 넓게. 사람이란 것은 내가 아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고 내가 보고 있는 세계가 전부가 아닌 겁니다. 넓게 봐야 되고 멀리 봐야 되고 전체를 봐서, 그러기 때문에 늘 말하는 것이 인생이 지금이 전부가 아니고 살아 생전이 전부가 아니고 평생을 생각해야 되고 또 부활 너머 심판 너머 무궁세계까지 생각하면서 거기까지를 다 계산해서 그러기 때문에 우물 안에 개구리라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겁니다. 사람이 젊은 사람들은 보면은 힘도 있고 머리도 잘 돌아가고 활동성 있으니까 자기들 아는 것이 전부인 줄 아는데, 그래서 우리나라도 민주화 운동하는 그런 사람들이 젊을때 반정부 대모를 민주화운동을 그렇게 모두 기를 쓰고 하는데 그 사람들이 대개 보면은 서른 살이 넘어가면 전부다 여당이 다 되어버립니다, 거의 대개는. 나이 사십, 오십 되어서도 아주 반정부 투쟁하는 그 사람들은 그만 대책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 있고. 지금 여당에 있는 그런 사람들 보면 옛날에 아주 빨갱이라 할만큼 반정부 투쟁하던 그런 사람들이 여당에 중심된 사람들 많습니다. 늦게 철이 드는 거지요. 그건 세상일이지만은.
그래서 첫째는, 하나님은 내가 알기전, 나기 전부터 우리 목자가 되어 계십니다. 우리의 소원과 상관없이 그분 우리 목자가 되셨습니다. 그다음 두 번째, 목자가 된 이 관계는 기본적인 목자인데, 기본적으로 목자와 양의 관계된 우리들의,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날때부터 택함이라는 목자와 양의 관계로 났고, 또 중생이라는 그 관계로 좀 더 두꺼워졌고 실질적이 되어졌고, 부르심을 받았다는 여기서 이제는 본격적으로 목자와 양의 관계로 맺어져서 내려왔는데, 그래서 오늘 여기 있는 우리는 전부 이런 택함과 중생과 부르심까지 다 받아서 오늘까지 목자와 양으로 내려온 우리들이기 때문에 이 관계면에 있어서 이 관계가 얼마만큼 돈독해지느냐, 얼마만큼 두꺼워지느냐, 얼마만큼 실질적이 되어지느냐는 내가 주님의 양으로 살아본만큼 자기가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이 주님의 양으로 살아본만큼 주님이 내 목자가 되셔서 나의 모든 의식주라든지 안보라든지 인도라든지 내 모든 성장이나 번식 전부를 다 책임진다는 그 사실을 자기가 주님의 양으로 살아본만큼 알게 되고 경험하고 체험하게 되고, 그래서 더욱 더 주님 양으로 사는 그런 사람이 되어지는데, 주님 양으로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겁니까? 계약을 지키는 거지요. 계약 조건이니까. 성경에 선포하신 이 말씀대로 살아본만큼 우리는 내가 주님의 양이며 주님은 내 목자되심을 자기가 실감할 수 있다, 경험 체험 할 수가 있다는 것을 지금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각각 기본적으로 주님이 우리 목자고, 우리는 주님의 양이라는 기본적인 관계는 모든 사람이 같으나 그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은 하우하박의 하나님이 아니고 공평된 하나님이신데 다같이 꼭 같은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지만은 그 사랑이 우리 개인들에게 적용되어질때 올때는 다 각각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들의 어떠함에 따라, 우리들의 계약 조건을 어떻게 지키느냐는 정도에 따라서 대응하시는 하나님의 대응이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목자의 그 모든 책임과 역사가 참 목자다운 그런 면으로 가는 그런 양도 있고, 어떤 양은 목자의 그 은혜와 보호와 모든 그 축복이 별로 없는 그런 양도 있는 것은 목자되신 주님에게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양된 우리들에게 그 모든 원인이 있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믿어본 사람, 목자와 양으로써 계약을 지키며 살아본 사람, 그 양만큼 이 사실은 알 수 있게 되는 것을 말씀을 하는 겁니다.
본문 한번 보시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여호와는 아는대로 계약의 하나님, 계약을 선포하시고 그 계약대로 이행하시는 하나님. 제가 여호와라는 이 표현이 성경에 몇 백 번 나오는가 하고 검색으로 찾아보니까, 몇 번쯤 나올 것 같습니까, 여호와라는 글자가?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여호와라는 이 글자가 몇 번쯤 나올 것 같습니까? 그게 검색이 맞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이렇게 많나 싶을만큼 의문인데, 오천 몇 번이 나옵니다, 오천 몇 번이. 여호와라는 그게 숫자적으로. 오천 몇 군데 여호와라는 게 나온다고 숫자에 뜹니다. 이렇게 많나 싶을만큼.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이름은 전부 알고보면 우리들과 관계된 이름 전부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이름과 모든 역사는 알고보면 전부 성부 하나님이 계시는데, 알고보면 그 역할은 전부 성자 역할, 우리 인간의 구원과 관계된 그런 이름으로 다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성경에는. 우리와 관계된 모든 기록이기 때문에. 그래서 많은 이름이 있는 중에서. 그래서 성부는 구원을 전체를 다 총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성자는 우리 대속을 실제 이루신 2위 말씀이신 그리스도 그 분, 성령은 성자의 이루신 구원을 마무리 짓는 그 역할, 그다음 그리스도는 직분, 제사장, 선지자, 왕의 기름 부음 받은 그 직분. 또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당신의 구원 역사를 우리에게 전부 설명해주고 가르쳐주시는 그 하나님의 이름을 말씀. 그래서 말씀은 둘이지요. 하나는 2위 성자의 이름이 말씀이고, 또 하나는 뭡니까? 말씀이 둘인데, 말씀 하나는 하나님의 이름이 말씀이고 또 하나는요? 말씀, 이 기록된 말, 말의 경어, 말씀. 그래서 진리인 말씀, 이치인 말씀은 이거는 무인격 존재고 이거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말씀이고 진리이고 이치지.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 말씀하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 말씀은 하나님을 가리켜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그 하나님의 이름을 말씀이라고 표현할 때, 그 이름은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것, 하나님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우리들에게 알려주시는, 그래서 말을, 말씀을 글로 쓰면 글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말씀은 기록된 모든 말씀, 이치라는 말이지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모든 구원 역사를 알려주시는, 나타내 설명해주시는 그 하나님의 이름을 말씀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말씀, 그리스도, 또 만군의 여호와 이런 것. 하나님 이름인데 많은 이름 중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삼위일체가 성경에 그대로 나타나지 않듯이,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에 가깝도록 삼위일체를 그렇게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성경은 아닌데도. 마찬가지로, 여호와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계약의 하나님이라는 뜻이 성경에는 사전적인 풀이로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르는데, 백목사님께서 또 다른 분이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는데, 성경을 달통을 하고 성령으로 깨달은 그분이 정의하기를 여호와는 성경 전체를 앞뒤로 찾아볼때 하나님이 사람들로 더불어 계약을 맺은 그 면에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한다고 그렇게 정의를 내려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그분만큼 알지 못하는 이상, 그것을 그대로 또, 이걸 듣고 따져볼때 아무리 따져봐도 이게 틀렸다고 반박할 수 없는 이상 그대로 믿는 거지요. 받아들이고. 찾아보면 또 그러니까. 그래서 계약이란 것은 약속이고, 하나님이 우리들로 더불어 맺은 약속인데 이 약속은 알고보면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계약은 일방적인 계약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강제적인 계약입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달라 그랬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계약을 맺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까, 소원을 했습니까, 간구 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노력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맺어놨습니다. 그런데 그 맺은 계약이 우리들에게 대한 계약이고 우리를 복되게 유익되게 구원하기 위한 그런 계약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 계약을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복되게 하기 위한 그 계약이고 그 계약을 지키면 우리들이 복되는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맺어놨지만은 그 맺어놓은 계약을 지키는 준수 여부는 우리들의 자유 의지에 달려있기 때문에 쌍방 계약이라고 표현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맺어놔도. 그 계약의 당사자가 우리들이고, 우리를 복되게 구원하기 위한 계약이고 그 계약의 준수 여부는 순전히 우리들의 자유의지에 맡겨놓으셨기 때문에 쌍방계약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계약은 예를 들어서 한 달란트 받았던 자가 당신은 엄한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흩어 헤치지 않은데서 모은 줄 알았기 때문에 하고 한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놔도 제 마음입니다. 제 자유 의지고. 주인의 그 뜻을 져버리고 제 마음대로 해도 제 의지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고 내가 또 주인의 원하시는대로 이만큼 남겼나이다 하는 것도 제 의지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원하시는 것은 약속을 했기 때문에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처럼 그만큼 남기니까 그만큼 복을 더 받는 것이고, 너는 너 자유 의지로 내 뜻을 저버리고 나와 상관없이 했으니까 너 자유의지대로 내가 너에게 너 말한 그대로 갚아주겠다고 한 달란트까지 빼앗아버리고 갚아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계약이란 것은 쌍방 계약인데, 따지고 보면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계약이고 그러나 그 일방적인 하나님의 계약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우리를 사랑한 그 계약이고 준수여부는 순전히 우리 자유의지에 달려있기 때문에 이 계약은 쌍방 계약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겁니다. 이 계약에 의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셨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거부해서 ‘나는 하나님이 내 목자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내 목자 되지 않습니다. ‘싫으면 관둬’. 받아들이면 받는 것이고 안 받아들이면 당신은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기본적인 그런 건 있지만은.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목자가 되신 것. ‘목자’라는 말의 의미는, 목자라는 그 ‘목’자가 무슨 ‘목’자입니까? ‘목회자’라는 ‘목’자와 같은 뜻입니다, 목회자. ‘목’자는 ‘기를 목’자지요. 양을 기른다. 기른다는 말은, 먹이고, 양이니까 입히는 건 없겠지만은 예를 들면 입히고, 또 잠 재워주고, 병들면 치료해주고 보살펴주고 비바람 피해주고, 이리한테서 맹수한테서 지켜주고, 인도해주고 보살펴주고, 또 젖 나게 해주고, 새끼 낳도록 해주고 어쨌든 그 양에 관한 모든 전부다를 총괄해서 전부다 하나부터 마지막까지 총책임, 세밀한 전부다를 책임지는게 목자의 위치고 역할입니다. 그러면 양은, 그 목자의 양이 되어있을때, 선한 목자의 양이 됐을때 그 양이 할 일은, 양으로써의 그냥 목자만 믿고, 목자에게만 다 맡기고 목자가 주는 것 먹고 인도하면 따라가고 보호하면 보호받고 또 약주면 약 먹고, 목자가 해주는대로만 받아들이면 그것만 하면 양의 할 일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목자가 알아서 책임을 다 지는 겁니다. 우리가 평소 배운 말씀하고 같지 않습니까? 무엇을 먹을가,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마라. 누가 하는 겁니까? 이 염려는 누가 염려하는 겁니까? 이방인들인데, 그 이방인은 비유로 말하면 어떤 사람입니까? 여기 본문에 비유로 말하면. 목자의 양이 아닌 양들, 아닌 사람. 목자의 양이라면 그 양은, 양이 ‘오늘 저녁은 어디가서 풀을 먹을꼬, 물은 어디가서 먹을까, 이리가 오면 어떻게 할까, 비가 오면 어떻게 하지?’ 그런 걸 염려할 게 없다는 겁니다. 양이기 때문에. 그거는 목자가 알아서 다하고, 양은 그런 걸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해봐야. 그래서 누가복음 15장 비유에 잃은 양 한 마리가, 백 마리 중에 한 마리가 목자를 떠나서 도망갔는데 목자가 양을 찾아서 데려올때는 안고 왔습니다. 안고 오니까 평안하지요. 목자를 떠났을때는 먹을 것도 제가 찾아야 되고, 물도 제가 찾아 먹어야 되고 또 가시덤불 있으면 제가 피해 나가야 되고, 이리 만나면 도망쳐야 되는데. 하다보면 나중엔 상처투성이 되고 굶어죽든지 이리한테 잡혀 죽고 말지 제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게 양이지요. 양이라는 말은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순진한 것, 순수한 것. 이게 양이지 않습니까. 힘 없고 연약하고 순수한 그게 양인데, 목자는 그 양을 책임지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 목자가 되셨고, 우리는 그분의 양이니까 주님은 내 목자가 되셨는데 그분은 변하지 않는 분인데다가 전지전능자니까 책임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분이고, 문제는 내가 그분의 양만 되어 있으면 된다 그래서 목자의 슬하에만 있으면, 주님 품안에만 있으면 믿는 사람은 아무런 염려할 게 없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40년 세월에 문제 되는 것은, 그들에게 문제점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인도자 모세를 믿지 않는 그게 문제였고, 말씀을 거역해서 우상 섬기고 죄 지어 원망 불평한 그게 늘 문제였지, 그냥 하나님 믿고 인도자 모세 인도 따라 믿고 따라가기만 하면 그들에게 의식주라든지 대적 문제라든지 병이라든지 신발 문제나 아무 염려가 없었습니다, 광야 40년에. 이것이 믿는 사람들의 생활인데 이렇게 살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양이 목자를 떠나는 것은 제가 알아서 해보겠다는 것인 것처럼, 믿는 사람이 양의 위치를 떠나서 믿음을 떠나는 것은 제가 뭔가 해보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목자는 여호와 목자라서 계약으로 목자가 됐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목자가 되실 때 계약으로 목자 되신 그 이유는, 이것 역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헤아려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도 높고 높은 곳에 계시고 너무도 크고 두려우신 분이라서 마치 태양의 물질이 가까이 가면 다 타버리는 것처럼, 그래서 태양빛으로 와서 식물을 살리게 그렇게 해놓은 것처럼 하나님은 너무도 완전하신 분이고 크고 두려우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에게 가까이 가면 사람이 다 타서 죽으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품으로 당신에게 인도하실 그때, 인도하실 때 사람이 알 수 있고 또 안전하게 될 수 있도록 그래서 내놓으신 그 방법이 바로 말씀이다 그말이죠. 그러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본체에까지 우리가 영원토록 소망을 가지고 가도 그분의 본체에는 갈 수가 없을 것이고 우리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지 않을까,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영원한 소망이니까. 영원토록 그분을 향해서 가까이 가고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 소망이라. 그 방법이 바로 말씀이고, 그 말씀은 계약이다. 그러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 말씀은 전부 하나님의 계약이고 이 계약은 조건이고, 이 말씀 계약이 바로 목자와 양된 우리 사이를 맺어주는 계약서다 그말이고. 그러기 때문에 왕이 편지를 보냈는데, 왕이 사신을 보내서 특사에게 친서를 전달했는데 그 친서를 받아본 사람이 왕의 편지를 읽어보고 찢어버립니다. 무슨 뜻입니까? 왕이 직접 쓴 편지를 사신을 통해서 특사에게 편지를 왕이 글을 써서 다른 나라에 보냈는데, 받아보는 사람이 편지를 보더니 ‘편지 이게 뭐야? 아무것도 아닌 종이쪼가리 글인데’ 하고 찢어버립니다. 잘못하면 전쟁 나겠지요. 편지를 찢었습니다. 글자를 불태웠고, 그런데 그게 뭐 그리 대수입니까? 그게 누가 보낸 편지입니까? 왕이 보낸 편지이기 때문에 그 왕의 편지를 가져간 사람은 왕의 일을 대신하는 사람이고 그 편지는 왕의 생각과 왕의 뜻과 왕의 마음과 왕의 모든 것이 그 편지 속에 들어있다 그말이지요. ‘이렇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그 편지를 찢어버리고 무시하는 것은, 예를 들면 그 편지를 읽고 ‘알았다, 이렇게 하지.’ 하고 난 다음에 뒤에 처분하는 것은 다른데, 말 자체, 전달된 그 말 자체, 글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막바로 왕을 무시하는 것하고 같은 겁니다. 선생님의 말씀은, 선생님의 가르침은 그 선생님이 내게 시키는 것은, 그 시키는 하는 말이 말인데 그 말이 바로 선생님 입에서 나온 말이니까 그 선생님만큼 말은 권위가 있는 것이니까 선생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누구를 거역하는 겁니까? 선생님을 거역하는게 되는 겁니다. 부모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그 말씀을 어기는 것인데 부모님을 거역하는 것이 된다 그말이지요. 편지를 쓰든, 말을 하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다가 하나님의 뜻을 기록해서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 성경 말씀을 어기는 것은 막바로 하나님을 어기는 것과 같고, 성경을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과 바로 하나라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 속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목자의 품 안에, 목자의 슬하에 들어가는 것이고, 말씀을 떠나는 것은 목자를 떠나는 것하고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은 계약은 계약이고, 말씀은 말씀이지 목자가 아니지만은, 목자가 양에게 목자의 조건으로 양의 관계 조건으로 계약을 써놨기 때문에 이 계약이 막바로 목자가 내 목자가 된다는 것이고 나는 목자의 양이 된다는 그런 뜻이기 때문에 이 계약을 어기는 것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목자된 주님이 우리와 상관이 없는 그런 게 되어지고, 내가 이 계약을 지킬때는 어떤 경우도 목자된 주님은 그 책임을 지고 계약을 지켜야 되는 것이 목자의 책임이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하나님이 안 보여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워서 이 말씀대로 지켜 순종하는 것은 막바로 목자의 슬하에 들어가는 것이고, 목자의 모든 은혜와 보호를, 인도를 받는 것이다 그말입니다. 이게 여호와 목자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물론 그 속에 우리가 말씀이 있고 그 말씀 속에는 영감이 있고 그 안에 또 하나님이 계시고 이리 되지만은, 그래서 말씀은 이치고 영감은 성령의 역사고 하나님은 본체에 계시는데, 그 하나님은 너무도 우리와 거리 멀고 높지만은 그분이 당신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그 증거로 역사하시는게 영감이고 그 영감을 말씀으로 나타내셨기 때문에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달아 지켜 순종해나가면, 바른 중심으로 말씀을 순종해나가면 영감 하나님의 역사를 자기가 느껴 알 수가 있게 되고, 하나님의 영감 역사를 알게 되면은 볼 수 없는 본체 하나님을 자기가 보는 만큼이나 알게 되고, 알게 된다는 말은 그분의 심성인데, 그분의 모든 사랑도 진실도 또 신실함도, 그분의 거룩함도, 그분의 크심도 이런 것도 눈으로 보지 않았지만은, 내가 말씀대로 살아보면은 영감이 역사해서 나로 하여금 그 사실을 깨달아 알게 하신다 그말입니다. 아는 만큼 그 사람은 그분의 본체와 점점 가까워지는 그런게 되어지는데, 그분이 너무도 크신 분이고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영원토록 자라가는 것이니까 거리 멀지만은 그리 되어지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은 이치지만은, 무인격의 존재지만은 그 말씀을 지킬때는 언제나 그 속에 영감 역사를 살피고 그 영감 역사 이면에 하나님의 본체를 생각하는데 그 본체를 우리가 모르지만은 그 하나님 본체는 무인격의 이치를 넘어서는 지정리의 격위를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은 감정 희로애락이 있다 그말입니다, 역사가. 이걸 생각하면 그 희로애락 역사가 영감을 통해서 내게 나타난다 이걸 생각하면서, 이걸 늘 살피면서 믿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해야 된다는 그말이지요. 이해가 되십니까? 너무 어렵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믿음이란 것은, 기본적인 믿음이 있고 건설적인 믿음이 있는데, 이 기본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고, 건설믿음이란 것은 말 그대로 ‘세울 건’자. 이걸 건설해 쌓아서 나가야 되는 거니까 궁극의 하나님의 은혜인데 나로써는, 오늘 주일학교 가르치는 것 보니까 그렇게 가르치데요. 기도할때는 어떻게 하라고요? ‘이 일은 하나님이 안 도와주시면 절대 안됩니다. 이거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해주셔야만 되는 겁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또 자기가 일할때는 어떻게 하라고요? ‘이거는 내가 하지 않으면 절대 안된다, 반드시 내가 있는 힘 다해서 해야된다’ 그렇게 하고 일을 해야 된다고. 그게 정답입니다. 믿는 사람의 신앙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라야 되는데, 그 은혜가, 그래서 내가 하는 모든 전부다가 겉으로는 내가 하는 것인데, 알미니안 주의라든지 율법주의라는 이걸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우리 복음도 오해하는 것이 사람의 노력이라는 말을 쓸때 그 노력이라는 이면에는 노력 하나하나 전부다가 하나님의 은혜라야 된다는 것이 그 속에 전제가 되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노력을 커녕 숨도 쉴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눈동자 하나 돌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안되는 것이고, 밥을 떠서 입으로 올리는 것도 하나님 은혜가 아니면 안되는 것이고, 입에 넣어서 소화시키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숨 쉬는 것 하나까지 전부 하나님의 은혜기 때문에 이런 은혜라는 것을 알고 내가 노력하니까 된다는 그런 오판을 가지면 안되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모든 건 하나님의 은혜라. 내가 나 된 것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절절이 그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계약을 지키는 여기서 우리가 목자되는, 그러기 때문에 지키는 만큼, 계약을 준수하는 만큼 이 관계는 이렇게 되어진다는 것.
그런데 여호와는 목자인데 나의 목자라고, 이거는 우리가 잘 아는데로 우리 목자가 아니고 주기도문엔 전부 우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 우리라는 것은 나 외에 다른 사람 같이 하는 이게 우리고, 나라는 것은 단수인데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한 것은 계약의 하나님의 계약 적용은 이거는 반드시 개개인적으로 적용된다는 걸 말씀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약은 개인적으로, 개적으로 적용시키지 단체적으로 적용 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롯이 비록 그런 불쌍한 사람이었지만은 그래도 나름대로 의인이었기 때문에 소돔 고모라 성을 불태우면서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논하시고 롯을 거기서 끄집어내서 구원해내신 겁니다. 너희가 예루살렘 거리를 다녀보고 진리와 공의를 찾는 자 한사람이 있으면 성을 멸하지 않겠다 그랬는데, 한 사람 있으면 한사람을 끄집어 냅니다. 전인류를 다 멸망 시키면서 그 인구가 말하자면 몇 프로 되겠습니까? 일억만명 중에서 여덟 명이면 몇 프로입니까? 일억명중에서 한명이면, 0.0001프로겠지요. 전인류를 멸망시키는 그 중에서도 여덟 명 식구를 구출해 낸 것이고. 그래서 천인이 내 곁에서, 만인이 내 우편에 엎드러져도 내게는 이 재앙이 가까이 오지 못하는 그 내게는 이 계약을 지키는 그 사람은 거기서 건져 내겠다는 겁니다. 반대로 아무리 온 집안이 전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님, 누나, 동생 전부다 의인이니까 나 하나쯤 죄 지어도,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신앙 때문에, 부모님 신앙 때문에, 형님 동생 아우 신앙 때문에 나도 죄인이지만은 함께 구원받지 않을까? 어림도 없는 말입니다. 다 구원받아도 너 하나는 꼭 집어서 멸망으로 던지겠다는 말입니다. 이게 ‘나’라는 ‘나의 목자’라는 그 계약입니다.
그다음에, 여덟 가지 말씀인데 이거는 좀 시간이. 그래서 본문을 잠깐만 보십시다.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목자의 양으로 되어있으니까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겠습니다. 이거는 자연 이치를 생각하면 압니다. 참된 목자 밑에 진실한 양이 되어있으면 아무런 부족함이 없습니다. 좋은 부모님 밑에 착한 그런 자녀로 있으면, 그 자녀도 부족한 것이 없겠지요. 그다음,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푸른 초장이라는 말은, 초장이 무슨 뜻이지요? 초장은 한자입니다. 우리 말로 풀면 풀밭이라는 뜻입니다, 풀밭. 푸른 풀밭에.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신다.’, 양에게 푸른 초장이니까 전신에 뭡니까? 양에게 먹을 양식입니다. 온 사방 천지가 양의 양식입니다. 목자가 되어있으면 우리를 그리 인도하시는데 어떤 면일까? 쉴만한 물가. 이 양식은 고깃덩어리 양식을 말하는게 아니겠지요. 푸른 초장이란 것은. 그래서 사람들은 육적으로 모든 것 생각해서 푸른 초장도, 양에게 푸른 초장은 먹을 것이 걱정없는 온 그런 환경인데, 양된 우리들에게 목자된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들이 먹을 양식이 무엇일까? 이 세상 고깃덩어리 의식주겠는가? 우리에 있는 새사람의 양식, 그 양식으로 충족한, 그 양식으로 가득찬 그런 환경으로 인도하신다 그런 말이겠지요. 진리와 영감으로 충만할 수 있는 그런 환경으로 인도하시니까 그 환경이 세상 조건으로는 어떤 환경이 될지 생각해보면 압니다. 쉴만한 물 가. 물이란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갈급을 다 면해주는. 늘 우리 속에 성령으로 충만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영과 마음을 늘 새롭게 살려서 소생 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주님 구원 역사를 위해서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어떤 곳이겠습니까? 사망이 있는 곳은, 원인은? 죽음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이느니라. 사망이 있는 곳에는 뭐가 있다는 말입니까? 죄악이 가득찬 그런 환경 속에, 말세지말 온 세상에 죄악이 가득차고 하늘까지 죄악이 가득찬 그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그 죄악의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목자가 지키니까.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의 지팡이 막대기는 모든 양을 보호하는 그런 무기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섭리 역사, 하나님의 모든 섭리 역사는 전부 나에게 유익되도록만 하십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내 원수 죄, 사망, 마귀, 미혹하는 온갖 신앙의 원수 그 원수에게서 내게 상을 베푸셨는데, 이 상은 무슨 상이라 그랬습니까? 이 상은 말하자면 책걸상 할때 그 ‘상’자인데, 밥상할 때 그 ‘상’자. 잔치상입니다, 말하자면. 상급이 아닙니다, 상급이 아니고 승리해서 잔치하는 그 상. 그래서 원수의 눈 앞에서 내게 승리하셔서 잔치 베푸는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다, 장립한다는 말이지요. 제사장, 선지, 왕. 내 잔이 넘치나이다. 잔은 고난의 쓴 잔인데, 믿는 사람의 이 제사장 선지 왕, 주님의 그 잔을 넘치게 마실 수 있는, 넘치게 마시는 거니까 할 일이 넘치게 많다는 말이겠고 주를 위한 제사장 선지 왕의 직분을 위한 그 고난, 그 수고가 넘치게 많다는 거니까 상급이 그만큼 크다는 말이겠지요. ‘나의 평생에 선하심(하나님 중심)과 인자하심’, 주님이 날 사랑하심 같이 나도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계약의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첫째 하나님은 내 목자가 되어있다는 것, 두 번째 이 목자와 양의 관계에서 이미 되어있는데 우리들의 계약 준수 여부에 따라서 목자와 양의 관계의 정도는 오늘까지 그렇게 되어왔고, 지금도 그리 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리 되고 있고. 이게 되어진 만큼 그 사람의 믿음은 생겨지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중요한 것은, 뭔가 일을 했으면 그 일의 결과를 살피는게 중요하듯이 시험을 쳤으면 그 점수, 결과에 따라서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원인 분석을 해보고 살펴보는게 중요하듯이, 시험을 쳐놓고 빵점을 맞았는지 백점 맞았는지 관심도 없이 던져 놓는 것 안되겠지요. 또 장사하고 오늘 손익계산이 어떠했는지 던져놓는 것도 안될 것이고, 일을 했으면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무관심하면 안되겠지요. 그게 뭐냐면은 살펴보는 것이고 챙겨보는 겁니다. 관심을 가지고. 믿음이란 것은, 여기서 생겨지는 겁니다. 믿는 사람이 믿음 생활, 말씀대로 사는 생활 그 생활을 하고 난 다음에 내가 기도했는데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어찌 됐느냐? 내가 말씀대로 이만큼 살았는데 말씀대로 산 것에 대한 계약의, 나는 양으로써 이만큼 살았는데 목자되신 주님은 양된 내가 지킨 계약 준수에 대하여 어떻게 보응을, 보답을 하셨느냐? 내가 계약을 어기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에게 보응하시고 징계를 하셨는가? 이걸 살펴보는 것이 신앙생활에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걸 살피는 것에 따라서 믿음이 자라고 안 자라고, 생기고 안 생기는 것이 크게 좌우가 되어집니다. 여기 관심 두지 않으면 믿음이란 것은 있어도 있는 줄 모르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셔도 하는 줄 모르기 때문에 큰 손해를 보게 된다 그말입니다. 이게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계약을 지킨 여부에 따라서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졌느냐가, 자기가 거기 대해서 알아지는 것, 느껴지는 것, 관계 맺어지는 것이 이미 되어있는데 살피는게 중요하니까 살펴봐야 되겠고, 그런데 이 하나님은 목자는 우리에게 목자가 되셨고, 목자는 계약의 여호와 목자고, 나의 목자니까 개인적인 계약이고, 그리고 이 목자 되셨을때 우리에게 주신 본문에 기록된 여덞 가지를 생각하면서 어쨌든 오늘 말씀의 결론은 그겁니다. 하나님은 계약의 목자기 때문에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 내가 계약만 지키면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이 사실을 믿고, 목자를 믿고 계약을 믿고 계약을 준수하는 순전한 주님의 양으로 사는 우리들이 되어야 되겠다, 이걸 결론으로 말씀 드리는 겁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이 본문의 말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외우고 있으니까 시편 23편을 다 외울 수 있도록 노력을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