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0-주후(마24:42-51)
깨어서 양식주는 자가 되자2014-12-01조회 436추천 55
20141130 주후
마태복음 24:42-51
여기 본문에 보면은, 비유가 있고 또 실상이 있습니다. 42절에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이거는 비유가 아니라 실상입니다. 실제 그렇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그다음, 그 가운데 43절 조금 밑에 ‘너희도 아는바니’ 이거는 비유입니다.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어느날에 주님이 오실런지 알지 못한다 그말이지요. 주님이 오시기는 오시는데 오시는 그 날과 시를 모르게 해놨습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6절에 한번 보시지요.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리고 37절에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노아시대때 120년 세월을 정해놨지만은 그 때가 언제인지 몰랐고, 노아는 알고 대략 짐작을 하고 배를 만들었는데, 배를 홍수가 온다고 모든 사람에게 노아를 통해서 알렸지만은, 그래서 노아는 정확한 날짜와 시는 모르고 홍수가 온다는 것을 알고 믿고 준비를 했으나 그러나 노아 식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들어도 몰랐고 세상을 전멸시키는 비가 내리고 있는데도 ‘비는 원래 오는거니까’ 비는 항상 해마다 오는 것이고, 또 철마다 오는 것이 비니까 의례히 그런 비인줄 알았지 온 세상을 전멸시킬 그런 비인줄은 몰랐겠지요. 그런데 노아는 알았습니다. 주님 재림은 언제인지 모르지만은 반드시 있기는 있고, 개인의 죽음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그 때가 준비하는 사람들은 짐작을 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마지막도 그러하고. 백목사님 같은 분도 당신이 자의식으로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뒤에 가서 들어보면은 당신의 임종이 임박한 것을, 임종이라기보다 순교가 임박한 것을 아는 그런 행동을 다, 일처리 다 하셨거든요. 주님 재림도 정확하게 몰라도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아는 것과 마찬가지인 그런 사람이 된다 그리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전체적으로 그 날과 그 때는 모릅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데, 오기는 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언제 올지 모르니까 항상 깨어서 준비를 해야 됩니다. 어디로 올지 모르니까 모든 곳을 다 지켜야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놓고 비유하기를, 만일 집 주인이 도둑놈이 언제 올지 알았다면 실컷 자고 있다가 오는 그 시간에 딱 일어나서 막으면 되는데,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됩니까? 밤새도록 잠을 안 자고 지키는 수 밖에 없습니다. 안그러면 도둑 맞을 수 밖에 없으니까 그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기는 오시는데 언제 올지는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됩니까? 깨어 있어야 됩니다. 예를 들자면 도적이 어느 시점에 올 줄을 알면은 자고 있다가 그때 막으면 되는데, 도둑이 초저녁에 올런지 한밤중에 올런지 새벽에 올런지 심지어 낮에 올런지 알 수 없으니까, 밤에 오긴 오겠는데, 어느 시점에 올 지 모르니까 밤새도록 깨어서 도적을 막아야 되는 것처럼 주님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깨어있어야 된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도적에 대한 것은 비유입니다. 또 44절에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예비라는 말하고 같은 말이 무슨 말입니까? 앞에 나온 말 중에서 예비하고 있는다는 말하고 같은 말은 깨어 있는다는 말이겠지요.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이게 실제고, 그다음 45절부터 또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악’이란 것은 악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악의 정의는 자기 중심, 자기 위주라는 건데, 쉽게 말하면 자기가 왕이고 자기가 하나님이고, 뭐든지 자기대로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어찌 생각한다고요?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누구 생각입니까? 누구 생각입니까? 자기 생각입니다, 자기 생각. 주님은 언제 올지 모른다고 했는데, 이 종은 ‘설마 오늘 오겠어? 내일 오겠어? 나 살아생전에 주님 오겠어? 내가 오늘 세상을 떠날까? 이 건강한 몸이. 금년까지야 못 살겠어?’ 그게 전부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바로 그 생각이고 그 판단입니다. 자기 주관입니다. 그래서 그게 악입니다.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는 그 생각이 악한 생각인데, 악한 생각이라 말은 무슨 생각이라는 뜻입니까? 자기 생각이라. 자기 주관대로의, 자기 판단, 자기대로의 판단이고 생각이지 오실 주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그래서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시험을 치면, 수능 시험을 치면은 시험 출제 위원들은 어떻게 시험을 내겠습니까? 학생들이 빠트릴 수 있는 것, 생각지 못할 수 있는 것만 찾아가지고 시험 문제를 냅니다. 면접을 보면은, 면접 보는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그런 걸 찾아서 문제 내는게 시험 출제 위원들이 하는 일입니다. 학생들은요? 그런 것을 최대한 안 빠트리고 다 챙기는게 학생들의 준비입니다. 그러니까 이 악한 종이 자기 생각대로 생각지 않은 날, 모든 날을 다 생각하면 생각지 않은 날이 없을 건데 자기 생각대로 ‘설마 오늘은’, 오늘은 이런 날이니까 또 이게 바쁜 날이니까, 좋은 날이니까, 슬픈 날이니까, 이게 있으니까 저게 있으니까 다 빠트려 놓는데 자기 생각 속에 지워버리는데, 주님은 그날들에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엄히 때린다 그말은, 엄하다 그말은 엄격하다는 말의 의미를 파고 들어가보면, 엄하다 엄격하다 그말은 원칙대로다 그말이고, 원칙대로라는 말을 또 다른 말로 말하면 뭐라 말입니까? 원칙대로라는 그 말은 법대로라 그말입니다, ‘법’대로.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서 정해놓으신 미리 선포해놓으신, 미리 알려놓으신 말씀의 법을 따라서 그 법대로 조금도 가감없이 엄히, 거기 기준하여 때리고 ‘외식 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본문의 내용을 몇 가지를 정리해보면, 첫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는 겁니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고 끝이 있고, 또 그 세상에 사는 인생살이도 무병장수라 하지만은 길어봐야 100년이고 7-80년이 보통입니다. 요즘 많이 길어져봐야 8-90년, 이게 좀 오래 살면 그렇고.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세월이란 것은 길면 길고 짧으면 짧아서 어린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세월이 지루하게 안 가는데, 젊은 사람들은 좀 더 빨리 가고 나이 많은 사람들은 세월이 엄청 빨리 갑니다. 나이가 70된 사람의 세월은 시속 몇 키로라 하던가요? 70키로고, 열 살 먹는 사람의 세월은 시속 10키로고, 어느게 빠릅니까? 이거는 나이가 들어봐서 실제 겪어봐야 압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물론 경우에 따라 다를 수 있는데, 하루하루가 얼마나 빨리 가는지. 우리에게 주시는 날이 신속히 가니, 어떻게 한다고요? 날아가나이다. 그 날아가는 속도가 얼마만큼 빠르겠습니까? 살 같이 빠른 세월. 요즘 살은 뭡니까? 옛날의 살은 뭘 살이라 그럽니까? 살 같이 빠른 세월은, 화살을 말하거든요 화살. 그런데 요즘은 뭡니까? 요즘 화살은요? 총알입니다, 총알. 총알만큼 빠른 세월. 얼마나 세월이 빨리 가는지. 그만큼 세월이 빨리 갑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전체적인데,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이 전부고 그 밖에 것을 모르니까 그래서 제가 잘은 모르겠는데, 한글에 띄어쓰기나 문법에 보면 ‘세상 밖’ 이라는 말을 한글에서 쳐보면 아마 틀렸다고 빨간 줄이 나오지 않을까. 세상 밖이라는 단어는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세상 밖이라는 것은. 세상 안이 전부지.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세상 바깥이 있거든요.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에겐 세상이 전부고, 세상 너머 세상 밖이란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그러기 때문에 세상이 언제까지든지 오늘까지 인간들에 의해서 세상은 발전되어왔고 발달되어왔고 점점 좋아져왔고, 이런 세상이 되어졌는데 이것처럼 앞으로도 세상은 점점 변해가면서 발달이 되어질 것이고, 아니면 다시 뭐 어떻게 되었을지라도 다시 또 사람 사는 세상으로 생기게 될 것이라. 여러 가지 면으로 추측 추론하고 그러면서 세상은 계속 될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은 심지어 멀리 보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과거에 의해서 세상이 어떻게 되고 인류가 다 멸망을 하고, 세상이 다 어떻게 되도 또다시 거기서 진화론에 의해서 뭐가 생겨져서 또 다시 새로 뭐가 시작될 것이고, 별에 별 추츤 추론 하지만은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은 끝이 있고, 그 끝이 언제냐? 구원 받을 사람들의 구원의 양과 멸망 받을 사람들의 멸망의 양이 다 차면,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은 간수해두신 목적이 뭐냐? 이 세상을 두신 목적은 불 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않은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두시고 그게 차고 나면 세상은 다 불에 타서 없어진다고 말씀을 하신 게 성경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은 말하자면은, 침몰되어가는 배와 같은 것이고 망해가는 회사와 같은 것이고 망해가는 나라와 같은 것이 이 세상이라. 이 세상은 점점 없어져 가는 겁니다. 마지막에 다 불 타 없어질 세상. 그래서 침몰해가는 그 배에 탈 정신 나간 사람은 없을 것이고, 망해가는 회사에 투자할 그런 정신 나간 사람도 없을 것이고, 나라가 점점 망해져가면 그 나라에 이민을 가거나 투자할 그런 사람도 없을 겁니다. 빠져나오지요, 전부 다. 사람의 몸이 죽어가면 사람 몸에 있던 이가 도망쳐 나온다 그러지요? 백목사님 전기에 보면 나오지요, 설교록에 나오고. 옛날에 그러더랍니다. 우리 젊은 사람들, 학생들은 이가 뭔지 모를건데, 이. 아마 여기 한 40대도 이 잘, 000샘 이 봤습니까? 보기는 봤습니까? 이 별로 잡아보지는 않았겠지요. 저희들 어릴때 시골에 살면 머리고 옷이고, 저도 많이 그랬습니다. 가난하게 사니까 옷에 막 이가 기어다니면 막 손톱으로 찍어서 이를 잡아 죽이는, 이가 말하자면 흡혈 그걸 곤충이라 해도 됩니까? 그런 사람 피 빨아먹고 사는건데. 그게 머리에도 있고 아주 가난한 사람들은 옷에도 기어다니고 그랬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를, 그 이가 사람 몸에 있으면 그 사람이 건강하다는 뜻이고 그 사람이 점점 병들어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몸에 있는 이가 그 사람 몸에서 다 나온답니다. 다 빠져나와 버린답니다. 병이 들어서 죽어가는 사람의 이가 기어나오는 걸 잡아다가 그 사람 몸에 도로 넣으면 또 다시 나온답니다. 목사님이 그렇게 해보셨다 그러지요. 직접 들은 말이 있고, 실제 그런가 싶어서 그럴 일이 있어서 해보니까 이가 죽어가는 사람 몸에서는 기어 나오더랍니다. 안다 그말이지요. 곤충들, 그런 짐승들도 보면은 지진나거나 사고 날 때 되면은 느끼고 도망을 다 친다 그러지요.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기울어져 가는 배에서는 탈출하는 것이고, 또 망해가는 회사에서는 자기 자본을 빼낼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망해가는 나라는 떠나는 겁니다. 그게 정상적인 사람들의 생각이고 당연한 사고 방식이지요. 이 세상은 침몰해가는 배와 같고, 망해가는 회사와 같고, 망해가는 나라와 같은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니까 거기 투자도 하고 심기도 하고 다 바쳐 살지만은, 이 사실을 성경으로 들어서 아는 믿는 사람들은 이걸 깨닫고 이 세상에 자기 것을 투자하고 기울일 것이 아니고 세상을 빠져 나가서 안전한 곳에 투자하고 그리 갈 생각을 해야 되는데 믿음이 없으니까 그리 하지를 않는다 그말이지요. 우리가 그런 사람들 아닙니까? 이 세상은 끝나는 세상이고,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날 인생들이란 것을, 그래서 하룻밤 나그네 세상, 이 세상에 있는 집은 우리는 장막집이지 영주처가 아니다 그말입니다. 이거는 논리적으로 따지면, 세상이 끝난다는 것은 사람들이 이해를 잘 못할지 몰라도, 인생이 끝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알고 있지만은 의례히 그런 것이고, 그 너머는 없는 것으로 사람들이 생각을 하고 사람이 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그런 인간 이상의 일이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는 건 줄 알고 다 포기하고 살지만은 성경은 그 너머를 생각을 하고 대비하는 방법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끝나고 인생도 끝이 있다 이걸 첫째 기억을 하고, 그다음 두 번째는 끝나면 그것으로 전부가 아니고 그 너머에 새로운 시작이 영원한 시작이 새롭게 시작된다는 것도 같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새로 시작이 되면 그때는 뭐냐? 그때가 바로 주님을 만나는 날인데, 세상 끝나는 날이고 내가 세상을 떠나는 그날이, 이 세상의 주인이시고 나를 세상에 보내신 그 주님을 만나는 날이다 그말입니다. 여기서 정리하면, 세상이 있고, 말하자면 주인의 집이 있고, 주인이 있고, 주인의 집이 있고, 주인의 집 사람들이 있고, 또 뭐가 있습니까? 본문을 정리하면, 주인이 있고, 주인의 집이 있고, 주인의 집 사람들이 있고 또 뭐가 있습니까? 종들이 있고, 그 종들에게 부탁한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주인이 집을 떠나서 멀리 일 보러 여행을 가면서, 일 보러 가면서 남아있는 종들에게 주인의 집 사람들을 부탁을 했지요? 부탁을 했습니다. 본문에 비유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이 말씀 가지고 하면은, 주님 재림을 말씀하고 그 재림이 언제인지 모르니까 깨어 있으라는 말씀 속에, 그 속에 주인이 있고 그 주인이 집을 떠나서 먼 길을 가면서 남아 있는 주인의 집 종들에게 주인의 집 사람들을 부탁을 했다 그말입니다. ‘내가 갔다 올 동안에 나의 사람들을 잘 보살펴달라. 챙겨 먹여주고 병 안 걸리게 해주고 나쁜 짓 못하게 하고 잘 보살펴 달라’고 종들에게 부탁을 하고 떠났습니다. 내가 다시 오기는 오는데 언제 올지 모르겠다고 떠났습니다. 말하자면은 주인이신 하나님 주님이 주님의 집인 이 세상에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 구속하신 성도들을 이 세상에 두시고 그 중에서 세우신 종들 먼저 믿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택한 백성들 구속하신 성도들을 부탁을 다 그말입니다. 이 사람들을 보살펴달라.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누가 누구에게 부탁했습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복음 21장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먹이라’ 또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그게 뭐냐하면은 주님이 당신의 사람들을 먼저 된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신 겁니다. 그러면 오늘 여기 있는 우리들은 믿는 사람들이고 복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정도는 다 달라도. 그러면 주님이 오늘 우리들에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집이고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가, 하늘에 계시지 않습니까? 아버지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부탁을 하신 겁니다. 우리를 종으로 세워놓고 우리들에게 주님의 당신의 양떼 사람들을 우리에게 부탁을 하신 겁니다. 그들을 먹이고 잘 치고 길러서 그들 잘 양육해달라고 부탁을 하셨는데, 그런데 그중에서 두 종류의 종이 있었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이걸 다시 한번 정리해봅시다. 주인은 누구라고요? 주인은 하나님이신 주님이고 주인의 집은 이 세상이고, 이거는 알겠고 맡은 종은 우리들이고 우리는 다 맡은 두 종류의 종 중에 있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좀 어려운 것은, 주인되신 주님이 종된 우리에게 맡겨놓으신 주인의 집 사람들이 누구냐 그말인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누구냐 그말인데, 그들은 각자 자기 자신에 있는 위치와 정도에 따라서 주인의 집 사람들이 달라지게 됩니다. 대상이. 서로 서로 그렇게 되는 수도 있고, 간단하게 쉽게 말하면 반사 선생님에게 주인의 집 사람들은 전도한 주일학생들입니다. 중간반 학생들이고 구역 식구들이고 교역자에게는 교인들이고. 이들이 주인되신 주님이 맡기신 주인의 집 사람들이고, 믿음의 부모님에게 자기 자녀들은 하나님이 맡기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또, 믿음의 조상들에게 살아있는 후손들도 그러합니다. 또, 회사에 나가서 내가 다니는 회사에 내 주변 아랫 사람이나 동류나 상급자가 있는데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 내가 근무하는 현장에 나와 직접 간접으로 관련된 나를 알고 내가 나와 접하고 나와 관계를 가지는 여러 종류 여러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속에는 택자도 있고 불택자도 있고, 믿는 사람도 있고 안 믿는 사람도 있는데 믿는 사람은 표가 나고 또 택자 불택자는 표가 안나는데, 누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은 그들 속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있습니다. 택자라면 그들은 내게 맡기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가정에도 그런 사람은 있고, 학생들 다니는 학교 교실에도 있고, 우리 이웃집에도 있고 회사에도 있고 내 거래처에도 있고 교회안에도 있고, 어쨌든 나를 기준해서 나와 관계 맺는 많은 사람들, 나를 아는 사람들, 나와 접하는 사람들, 내 영향을 직접 간접으로 받고 있는 사람들,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이면 전부다 누구라는 말입니까? 누굽니까, 전부다? 주인의 집 사람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면 아시겠지요 누군지? 자녀가 있는 분들은, 자녀들입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그리 될 수 있습니다. 형제간끼리도 서로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믿음 없는 부모님에게 믿음 있는 자녀는 부모님이지만은 믿음 있는 자녀에게 하나님께서 그 부모님을 주인의 집 사람으로 맡겨 놓을수도 있습니다. 또, 교회 안에 교인들 관계에서도 그러합니다. 식구들. 또 회사에도 그렇고, 이웃에, 거래처 다 곳곳에. 어쨌든 이 세상에서 내가 살아가는, 내가 활동하는 내 활동 곳곳에 하나님의 사람들, 택한 백성들이고 구속 받은 성도들이고 그들이 곳곳에 있다 그말이지요. 이게 주인의 집 사람들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주인의 집 사람들? 그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부산에 살던 사람이 서울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러면 부산에 살던 사람인데, 부산에서 접하다가 있던 주인의 집 사람들이 가까이 있다가 내가 서울로 이사를 가면은 그러면 그때는 부산에 살던 사람들은 주인의 집 사람들이었지만은 좀 거리가 멀어지게 되고, 서울에서 새롭게 주인의 집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연결시켜 주시는 그런 사람들이 새로 생기겠지요. 거기 살다가 미국가면은 거기서 또 생길 수 있습니다. 어쨌든 내 몸이 가는 곳, 내 몸이 가면서 나하고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맺고, 나의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 교역자로 말하면, 저로 말하면 설교를 합니다. 이 설교를 실시간으로 듣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가 아는 분도 있고 모르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들은 제가 몰라도 이 설교를 실시간으로 다른 지역에서 들으면 그 분들은 저와 관계된 주인의 집 사람들입니다. 저로 인해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누군가 나는 모르는데 그 사람이 나를 알아서 나의 신앙 모습이나 평소 생활을 보고 그가 신앙에 자기 생활에 영향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주인의 집 사람들이 될 수 있다 그말입니다. 그런데 전혀 상관없는 그런 사람들도 있잖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나와 상관이 없는데, 따지고 보면 상당히 범위가 넓어집니다. 가까이에서 멀리까지. 이런 관계가 다 주인의 집 사람들을 내게 맡겨주신 겁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때를 따라서 양식을 나눠주는 것이 뭔가? 때를 따라 그말은, 그때 그때 필요한 것 따라서 양식을 나눠 주는 것인데, 양식을 나눠준다는 그말은, 양식이라는 것은 먹고 배부른게 양식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양식은 입으로 먹는 육의 양식을 말하는게 아니겠고, 믿음의 양식, 신앙의 양식, 영의 양식을 말씀하는 건데, 성경이 말씀하시는 믿음의 양식, 영의 양식은 무엇입니까? 첫째, 성경이 말씀하시는 양식은 첫째 뭡니까? 알기 쉽게 말하면? 때를 따라서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뇨. 내가 내 주변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눠줘야 되는데, 성경에 말씀하시는 대표적인 양식이 뭡니까, 첫째?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육의 양식보다도 믿음의 양식인데 그 양식은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 이 말씀이 양식이 되겠고, 또 두 번째는 양식이 뭐겠습니까? 양식이란 것은 먹는 것이고 먹고 배부르고 먹고 힘을 내는게 양식입니다. 그러면 첫째 말씀, 두 번째 양식은 이 말씀대로 실행하는 행함이, 실행하는 것이 양식입니다. 실행하지 않으면 자기도 다른 사람도 양식을 주지 못합니다. 말씀 자체, 두 번째는 말씀을 실행하는 것. 세 번째 양식은,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 주님의 살과 피, 주님 대속의 역사를 생각을 하고 그 대속을 입고 사는게 양식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주님 양식, 내가 먹을 양식은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과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뜻을 행하는 것, 그분의 뜻을,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니까 자타의 구원 위한 이것이 양식입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는 것. 그러면 크게 네가지로 생각해서, 때를 따라 주인의 집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눠 준다. 말씀을 주고, 실행함으로 힘을 주고 실행케 하고, 주님 대속을 알려주고 대속을 깨우쳐 주고 입은 자로 살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게 해주고 그 뜻 찾은대로 그 뜻 이루게 해주는, 크게 말하면 이 네가지가 주인의 집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이 되는 것인데, 이 네가지를 주는 방법은 세가지로 한번 생각해보면, 이 네 가지 양식을 주는 방법을 세 가지 면으로 생각해보면 첫째, 소망적으로, 전체를 다 아우러서 말씀드립니다. 소망적으로 양식 준다 그말은, 인생의 목표를 보여주고 알려주는 겁니다, 인생의 목표. 인생의 목표는 인생의 소망이고, 그 소망은 어디서 생겨지는가. 어디서 소망이 생겨집니까? 목표 소망이란 것은, 가치에서 생깁니다, 가치관에서.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나이로 태어나서, 또 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요즘은 우리 나라 공수 특전단에 군가가 바뀐다 그러지요. 사나이로인데, 사나이라는 말이 바뀌어서 전사로 바뀝니다, 전사. 왜 바뀔까요? 공수 특전단에는 남자만 갔는데 요즘은 여자도 많이 가서, 사나이는 남자니까 성별 차이 되기 때문에 사나이라 그러지 아니하고 전사라 그런답니다, 전사. 용사, 전사라 그러니까 남녀 다 포함이 되겠지요. 그리되는데, 가치에 따라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번뿐인 인생,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는데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겨야 되니까, 내가 무엇을 해서 내 아이들 후손들 후세들에게 내 이름을 유명하게 남길까? 그래가지고 열심히 공부하고 기술익히고 돈 벌고 뭔가를 하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을 하는 것이 모든 인생인데, 하다보니까 안되니까 그만 자포자기하고 그날그날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그런 사람들이 일반 서민들 대부분이고, 좀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하다가 안되면 그만 낙심을 해서 술이나 먹고 허송세월 보내고, 그럭저럭 살고 하는데, 실력있는 똑똑한 사람들은 어쨌든 열심히 활동해서 뭔가 인생으로써 가치있는 것을 이루기위해서 불철주야 노력을 하니, 그 가치있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바로 인생의 소망이고 목표고 나아갈 방향입니다. 그런데 때를 따라 양식 나누어주는 것은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중생되고 예수 믿는 사람이 되고, 말씀을 들어 깨닫고 말씀을 들어 깨닫고 나서 보니까, 말씀대로 살고나서 보니까 눈이 뜨여져서 인생의 가치관이 달라지게 되지요. 이 세상은 끝나는 세상이다, 기울어져 가는 침몰해가는 배고, 망해가는 회사고, 망해가는 나라같은 이 세상이고, 이 위에 건설해봐야 전부다 무너질 것이고. 이 세상이 좀 더 몇 백년 더 간다해도 내가 떠나야 되니까 내가 떠나면 세상이 아무리 건설해도 나와 상관 없는 것이니까 이 세상에서 어디에다 가치를 둘까? 열심히 준비하고 해서 돈을 많이 모을까? 억만금을 가진 이건희 회장도 자기 아들에게 줬지, 자기는 병이 들어 눕고 보니까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금 모를 것 아닙니까? 뭘 어떻게 하고 해도 모른다 그말이지요. 자기와 상관 없는 그런 사람이 되더라. 또 누구도 그리 되더라. 마지막 죽고 나니까 그렇게 되고, 권력 잡아봐야 어떤 사람은 감옥도 가고 쫓겨나니까 욕만 얻어먹고 별에 별일이 다 있더라. 구름 같은 간증자들 그들의 걸음을 보고 자기 인생도 보면서 그 뿐이면 낙망 낙심 밖에 못하는데, 성경을 보니까, 내 속에 중생된 영 역사로 말씀을 가지고 따져보니까 인생의 가치는 재물도 아니고 성공도 아니고 향락도 아니고 출세도 아니고 행복한 것도 다 일시적인 것이고, 기쁨도 일시고, 이 땅 위에 모든 소망은 전부다 눈덮인 그런 산과 같아서 녹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그런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가치 둘 것이 없구나. 인생의 영원한 가치는 인생의 죽음 너머를 봐야 되고, 죽음 너머에 부활이 있고 심판이 있고 무궁세계가 있고 끝 없는 그 나라와 그 세계 그 하나님이 계시니까 그때를 생각을 하고 하나님이 오늘에 이 세상을 주신 목적이 그 때 준비하라고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인생의 가치를 거기 둬야 되겠다. 그래서 자존하시고, 영존하시고, 완전하시고, 무한하신 심판주되신 영원무궁토록 영존하시는 그 하나님 아버지 그분에게 가치를 두고 그분을 향하여, 그분의 천국 건설 끝없는 그 나라를 향하여 그것을 깨닫고 거기다가 인생의 소망과 목표를 두고 가치를 거기 두고 내가 그렇게 살고 내게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여기 대해서 눈을 띄워주기 위해서 어쨌든 기도하고 전도하고 틈만 나면 말씀을 가르쳐서 인생의 허무함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려줘서 가치를 거기 두고 방향을 거기 두고 살도록, 저도 지금 설교하는게 그겁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우리 교인들이 이 세상은 끝나는 겁니다. 인생은 떠나는 겁니다. 허무한 겁니다. 그러니까 가치를 하나님과 천국 무궁 세계에 두고, 죽음 너머에 가치를 두고 거기 소망 두고 목표를 두고 달려가는 것이 인생의 가치입니다. 이걸 내가 깨닫고 이걸 내가 가지고 나도 놓지 않기 위해서 내게 속한 하나님의 사람, 주인의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기도하고 설명해주고 설득해주고 알려주고 비교도 해주고 자꾸 틈만 있으면 말을 해주고 하는 그것이 바로 양식 나누어주는 그런 요소 중에 하나가 방편 중에 하나가 될 수 있겠고, 이거는 소망적으로, 두 번째는 확신적으로. 이게 참 어려운데, 세 개 다 어렵지만 확신적으로,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믿음은, 확실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남대문에 문턱이 무슨 나무라고요? 남대문 문턱이 대추나무라 그럽니까, 박달나무라 그럽니까, 무슨 나무라 그럽디까? 저 서울에 있는 남대문의 문턱이 무슨 나무라 그럽니까? 우리 저 예배당 현관에 문턱이 무슨 나무입니까? 000, 무슨 나무던가요? 00이 집에 방문에 문턱은 무슨 나무입니까? 문턱이 뭔지는 알지요? 요즘 자기 집에 집집마다 문턱을 무슨 나무로 만드셨던가요? 대추나무입니까, 박달나무입니까. 막 우겨대는데 둘이 싸웁니다. 대추나무다, 아니 박달나무다 둘이 싸우는데, 하나는 뭐라 한다고요? ‘어리석은 사람들, 가 보지 않은 사람들. 문이면 의례히 대추나무, 박달나무로 문턱을 만드는게 오늘까지의 상식이지만은, 그런데 요즘 시대는 변해서 문에 문턱을 안 만든다.’ 그러면 그때까지만 아는 사람은 박박 세워댑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 상식에 어긋나는 말, 통계에 안 맞는 말, 이치에 안 맞는 말. 문 턱 없는 문이 어디있나’ 박박 세워서 협박을 하고 두드려패고 감옥가두고 그러면, 속에 겁이나서 ‘알았다, 알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내가 가보니까 문턱이 없더라.’ 그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게 뭡니까? 확신이고, 믿음입니다. 신앙이란 것은 그런 믿음을 가지는게 신앙이고 확신입니다. 이걸 내가 가지고 내게 맡겨주신 주인의 집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그말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그분이 얼마나 크신 분임을, 그분이 얼마나 두려우신 분임을, 높으신 분임을.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세밀함을, 그분의 약속이 얼마나 신실함을, 이걸 보여준다 그말입니다. 내가 믿고, 그러니까 이렇게 하니까 믿음이 있으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고 또 하나님을 두려워하니까 그분에게 순종하고 그분의 크심을 알고 그분의 사랑과 약속의 신실하심을 믿으니까 온유하고 든든하고 담대하고 평안하고 항상 기뻐하고 다시 말해도 또 기뻐하고. 또 감사하고 찬송하고 이런 자세로 세상을 내가 살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걸 가르쳐서 전해서 그리 살게 만들어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걱정할게 뭐 있어? 하나님의 예정인데.’ 이걸 말만 하면 소용없으니까 내가 그렇게 살고, 기도하고 그래서 양식을 주는 첫째 조건이 있습니다. 주인의 집 사람들에게 양식 나누어주려면 첫째 조건이 무엇입니까? 가장 선제 조건, 첫째 조건이 뭐지요? 나한테 양식이 있어야 주지, 없는 거는 줄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모르는 사람은 말씀을 못 주고, 또 실행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실행을 못 주고. 주님의 대속이 자기 속에 확신이 없는 사람은 못 주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을 줄 수 없습니다. 내가 가져야 되니까. 소망도 내가 가져야 되고, 확신도 내가 가져야 됩니다. 내가 가진만큼 다른 사람에게 양식으로 줄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실행적으로, 실질적으로 눈에 보이게, 그래서 인생의 목표를, 소망을, 하나님과 천국에 두고 이 세상 안에 두지 말고 세상 너머에 두고. 이 세상에 모든 것은 어떻게 든든하게 집을 지어도, 우리나라는 지진이 잘 안 일어나니까 내진 설계가 다 빈약해서 진도 8만 일어나버리면 다 무너져버리겠지요. 일본은 지진이 자주 일어나니까 거기 대해서 다 대비해서 건물을 설계한다 그러지만은 그래도 인간이 설계해놓은 진도 10을 넘어가서 그 너머로 지진이 나버리면 다 무너져버리지 별 수 있습니까? 6천년의 과학이 1분만 흔들어버리면 한순간에 다 무너져버립니다. 안 그렇습니까?
안된 일이지만은, 과거 2001년도입니까? 미국에 쌍둥이 빌딩 무역센터 테러 당할 때, 그거 건설할 때 얼마나 많이 걸렸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과 장비와 비용이 적어도 아마 한 1-2년 안 걸렸겠나 싶은데, 그만큼 걸려서 지어놓은 것 비행기 폭파하니까, 폭파하는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순간 몇 분만에 다 내려앉아 버렸지요. 지진 일어나면 그것보다 더 빨리 됩니다. 일 분 안에 다 무너져 버립니다. 일 분도 안 걸리지요. 그렇게 되는 것이 이 세상이고, 그런 것도 보고, 인간들의 평생을 통해서, 공부하는 학생들, 공부하려고 애쓰는 것 보면은 안쓰럽습니다. 불철주야로 머릿속에 집어넣어서 그 지식을 담아야 되니까 그렇게 애를 쓰고 애를 쓰고 애를 써서, 오늘 주일학교 설교 보니까 의사 하나 얼마 나온다고요? 몇 백 명 중에 의대 하나 갈까, 부산에서 몇 개 초등학교 다 합해봐야 의대 하나 갈까 말까한 그것도 서울에 좋은데 부산에 좋은데 아닌 저 대구에 그런데 갔다고요. 운동선수도 그렇고. 그렇게 머리 써서 그리 가봐야, 그래가지고 의사 되도, 요새는 의사 중에서도 실업자가 많이 생긴답니다. 판사, 변호사, 법대를 가고, 로스쿨 법 전문학교 가서 졸업 하고 거기 해도 변호사도 요새는 실업자가 많다 그러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변호사 되려면 공부를 얼마나 해야 되겠습니까? 보통 전교 1,2등을 아마 고등학교까지 전교 1등을 거의 안 떨어지고 해야 될만큼 어지간한 학교에서, 후진 고등학교가 아니고 제법 괜찮은 고등학교에서, 지방에서 전체에서 1등을 해야 변호사 될까, 그 정도로 어려운데 그렇게 해봐야 밥 벌어먹기 어려운 그런 때가 지금 시대다 그말이지요. 그렇게 머리 싸매서 건설했는데 그렇게 만들어놨는데 무너지는거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계산을 대서 대학교 4년에 들어가는 학비가 4천만원, 예를 들면. 1년에 천만원 계산하면 약 4천만원. 4년 동안에 내가 돈을 벌면 한달에 백만원씩 벌면 일년 있으면 4천만원이면 8천만원인데, 그 8천만원 가지고 차라리, 계산이 맞습니까, 돈 벌고 그 돈 가지고 장사하고 다른 것 하고 말지 대학 가겠나. 물론 적성에 따라서 공부할 사람은 공부하고, 안 할 사람은 안 하지만은, 계산은 현실적이고 실질적으로 계산해야 되지, 눈 먼 망아지가 원앙 소리 듣고 따라 간다고 모든 사람이 가니까 따라가는 그런 어리석은 우리 나라 사람들같은 그런 짓 하면은 자기는 손해다. 남의 인생을 살아주는 겁니다. 모든게 다 그렇듯이. 실질적으로 실속있게 하는 그게 가치있는 거지요. 그래서 인생의 가치를 바로 깨닫고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준다는 것은 말씀을 주고, 두 번째는 뭘 준다고요? 실행을 주고, 세 번째는 주님 대속을 주고, 네 번째는 하나님의 뜻을 주고. 이 네 가지를 주는 실질적인 방편은 첫째 소망적으로 내가 가져야 되는데, 그 소망적이라 말은 ‘가치관’이라는 말이고, 인생의 가치를 어디에다가 두느냐를 내가 깨닫고 깨우쳐 주는 겁니다. 비교하고 논리로 따지고 견주어가지고 한번 생각해보자. 그래서 기독교는, 신앙이란 것은 생각이 거의 대부분이라 할만큼 거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어제 신문에 보니까, 지금까지는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고 지식을 받아들여 아는 것이 시대를 선도했는데, 앞으로 어떤 시대가 된다 그럽디까? 앞으로는 힘이, 생각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 앞으로는 실력 있는 사람, 끌고가는 사람이 될거다. 생각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 되라. 그 말 한다 그러데요. 시대따라 변하는 겁니다, 다. 믿는 사람은 생각을 해야 됩니다. 생각이라 말은 연구라 말이고, 연구라 말은 분석이라 말이고 비판이라는 말이고 평가라는 말이고 따진단 말이고, 비교한다는 겁니다. 계산한다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자기 주력하는 바를 더 계산대서, 멀리 보고 전체를 보고 계산해서 인생 가치가 과연 어디 있는가 이걸 계산하고, 그래서 인생의 가치를 전체적으로 최종 목표를 하나님과 천국에 두고, 죽음 너머에 두고 이걸 내가 지고 깨우쳐 주고, 두 번째는 확신적으로 믿음적으로 이 사실을 내가 가지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천국을 믿으니까 믿으면 생활이 다 달리질 것 아니겠습니까? 큰 것을 보면 그 앞에 주눅이 들듯이, 두려운 걸 보면 머리끝이 쭈뼛 서듯이, 소름이 돋듯이,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그분의 두려우심을 아니까 두려워서 그분 앞에 조심 할 수 밖에 없고 그분의 목적을 위한 예정과 주권 섭리, 사랑, 약속의 신실하심을 아니까 믿으니까 감사하고 든든하고 온유하고 담대하고 평안할 수 밖에 없고, 이런 것들이 내게 있고 이런 사실을 내가 가지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 주고, 확신을 시켜주고 이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리고 세 번째 실행적으로는 이제는 이걸 실제 가지고 그걸 가졌으니까 이걸 실제로 이루는 생활에 있어서는 예배생활, 성경 읽는 생활, 기도하는 생활, 계명 지키는 생활, 말 조심하는 생활, 진실한 생활, 또 덕을 세우는 생활, 양심적인 생활, 정직한 생활, 이런 생활을 실질적으로 한다 그말이지요. 하고 이걸 다른 주변 사람들에게 주고. 이것이 내 주변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양식을 주는 방법이다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가지고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주면, 주님 오실 때 보면 다 보고 계시지요. 그에게 모든 소유를 다 맡긴다. 이 일이 바로 주인의 대리역할입니다. 주님이 하실 그 일을 내가 대신하는 거고, 내가 대신했기 때문에 내 심신에는 주님 그 역사가 기능으로 익어있고, 그런 사람이 되어있고 그런 사람이 되어있으니까 주님이 천국에서 그 사람에게 모든 것 다 맡기지 누구한테 맡기겠습니까? 그 사람에게 맡기지요. ‘너 밖에 할 사람이 없다.’ 모든 소유를 다 맡기리라. 이게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고.
악한 종은 앞에 말씀드린대로 제 주관대로, 제 생각대로, 제 판단대로. 하나님과 상관없이, 말씀과 상관없이 순전히 인간지식, 제 생각대로 이게 전부, 이게 제일이고, 그래가지고 주인이 오는 것도, 인생 가치관도, 욕망도 전부다 자기 생각대로 판단해서 동무들을 때린다 그말은, 새벽기도 나가면, 동무라 그러니까 동무라는 뜻이 뭡니까? 같을 ‘동’자겠지요, 동무라는 말은. 같은 입장이라 그 뜻 아니겠습니까? 같은 입장. 믿는 사람에게 동무면 누굽니까? 믿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믿는 사람? 신앙 생활로 예수 열심히 믿으면, ‘예수 열심히 믿으면 예수가 밥 먹여줘?’ 믿는 사람이 그런다 말입니다. 새벽기도 열심히 나간다고 일찍 자면은 ‘지금 시험이 눈 앞인데, 새벽기도가 뭐냐?’ 주일 지킨다 그러면, ‘나도 교회다니지만은, 이렇게 바쁠때는, 시험이 앞에 있을때는 예배 보고 와서 얼른 공부를 해야지’ 그것이 동무들을 때리는 겁니다. 열심히 신앙으로 달려나가는 사람들을 뒤에서 줄을 땡기고 한마디씩 툭툭 던져서 힘을 떨어트리고 쥐어박는 그게 동무들을 때리는 거니까, 거기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그말입니다. 부모님들이 ‘성경도 읽지만은 공부를 해야지, 공부가 제일이야. 새벽기도 꼭 안나가도 괜찮아. 몸 약하면 잠도 자야지.’ 일리도 있는 말이지만은, 머릿속에 사고방식이 어떻게 되있느냐가 문제입니다. 망냑에 그렇게 했다면, 인식을 그렇게 해가지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동무를 때리는 것이고 그 동무 때리는 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가장 무섭습니다. 그래서 그게 아말렉이 되는데, 믿음으로 신앙으로 달려가는 형제들, 신앙으로 달려가는 후배들, 친구들, 자녀들, 그들에 대해서 친구가, 선배가, 동지가, 부모가 그 뒷줄 땡기고 ‘예수가 전부가 아니야. 믿음이 전부가 아니야. 성경이 전부가 아니야. 기도만 한다고 되는게 아니야. 공부도 해야 되고, 돈도 벌어야 되고, 또 사람이 몸도 건강해야 되고.’ 말은 맞는 말인데, 그 속에 중심을 뭘로 갖느냐 그게 문제입니다. 만약에 그 중심을 가지고, 세상 중심으로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습니다. 진노가 무섭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 한마디 한마디를 잊지 않고, 다 기억했다가. 사람은 백 년 지나면 다 잊어버리지만은 하나님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아서 잊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그 심판. 그래서 ‘엄히 때리고 외식 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 세상에는 후회도 있고, 회개도 있는데 끝나고 나면 후회가 없고 회개가 없습니다. 주님은 ‘내가 죄인을 불러 구원하러 왔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다’는 말은 언제까지 필요하다고요?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고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은 언제까지 해당되는 말이라고요? 내 살아생전까지 해당되는 말입니다. 주님 재림하시거나 나 세상 떠나고 나면 주님은 죄인은 쳐다보지 않고 모조리 끌어다가 유황불에 던져버리는게 주님입니다. 죄인은 있는대로 다 긁어서, 죄에 속한 말, 죄에 속한 중심 낱낱이 긁어서, 단 티끌만한 것 하나 남겨놓지 않고 지옥에 다 던져버리는게 주님입니다. 살아생전은 후회도 하고 회개하고. 그러기 때문에 살아생전에 회개해야 되고 잘못된 것 고쳐야 되고 이래야 되지, 이대로 계속가다가 끝나버리면은 심판이 무섭습니다. 이게 바로 동무들 때리고, 술 친구라 그말은 세상 친구라 그말입니다. 같은 신앙류끼리, 예수를 믿어도 인본주의로 세본주의로 세상주의로, 일곱머리 열 뿔에 속한 그런 신앙으로 믿으면서 ‘교회만 가면 되지, 예배만 보면 되지, 주일날 뭘 그렇게 꼬박 꼬박 하루종일 예배당에 있고, 주일날 돈도 못쓰고 텔레비전도 안보고, 그런 예수를 그렇게 믿어야 돼?’ 그런 빈정거리는 그런 말을 하면서 주일날 텔레비전 보는 것 예사고, 돈 쓰는 것 예사고 그렇게 하는 믿는 사람들, 그러면서 자기만 그렇게 믿어도, 나는 이렇게 믿지만 이게 죄인이다, 이렇게 믿으면 안되는데 문제다. 그래서 주일날 부모가 신앙이 어려 몰래 텔레비전 보면 자기 자녀들은, 그래봐야 영향은 미치지만은 그래도, 나는 주일날 텔레비전 보지만은 내 자녀들은 보면 안되는데 해서 자녀들이 그걸 알까싶어서 겁을 내면서 몰래 몰래 텔레비전 보는 것 하고, 툭까놓고 주일날 텔레비전 켜놓고 자녀들 있는데서 보면서 ‘봐도 괜찮아. 예배 보고 왔으니까 됐어’ 그러면서 보는 것 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 중심을 보실 때. 죄를 지어도 ‘나는 죄를 지어도, 너는 지으면 안된다’ 이렇게 하고 죄 짓는 것 하고, ‘나 죄 지었는데, 너도 지어도 괜찮아’ 그렇게 짓는거는 천지차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결국 영향을 미치지만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도둑놈이 ‘나는 도둑질 하지만은 너는 도둑놈 하면 안되’ 하는 것 하고, 그래서 자식이 도둑질 할까 싶어서, 자기 아버지 도둑놈이라는 그 사실 들킬까봐서 절절 매는 그 도둑놈 아버지하고, 자식을 데려다가 도둑질 시키는 그 아버지 하고 같습니까? 자식 앞날이 같아지겠습니까? 얼마나 차이가 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가 다 그렇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오늘 말씀에 제목은 그겁니다. ‘깨어서 양식주는 자가 되자’. 우리는 이런 사람들입니다. 알든지 모르든지, 내가 직접 주든지 간접 주든지 나로 인하여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양식을 주거나 때리거나 둘 중에 하나로 살고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속으로 죄를 지어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죄 지을까 싶어서 벌벌 떠는 그게 한편으로는 외식이지만은 그러나 그것이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쨌든 양식 주는 사람이 될지언정 동무들 때리는 그런 악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본문에 말씀에서 비유도 있고 실상도 있습니다. 실상 그대로 따져서 나는 오늘까지 어떻게 살았으며, 지금 나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양식을 주는지, 덕을 끼쳐서 믿음에 힘을 주고 있는지, 나 때문에 손해를 주고 있는지 고요하게 생각해보십시다.
마태복음 24:42-51
여기 본문에 보면은, 비유가 있고 또 실상이 있습니다. 42절에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이거는 비유가 아니라 실상입니다. 실제 그렇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그다음, 그 가운데 43절 조금 밑에 ‘너희도 아는바니’ 이거는 비유입니다.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어느날에 주님이 오실런지 알지 못한다 그말이지요. 주님이 오시기는 오시는데 오시는 그 날과 시를 모르게 해놨습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6절에 한번 보시지요.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리고 37절에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노아시대때 120년 세월을 정해놨지만은 그 때가 언제인지 몰랐고, 노아는 알고 대략 짐작을 하고 배를 만들었는데, 배를 홍수가 온다고 모든 사람에게 노아를 통해서 알렸지만은, 그래서 노아는 정확한 날짜와 시는 모르고 홍수가 온다는 것을 알고 믿고 준비를 했으나 그러나 노아 식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들어도 몰랐고 세상을 전멸시키는 비가 내리고 있는데도 ‘비는 원래 오는거니까’ 비는 항상 해마다 오는 것이고, 또 철마다 오는 것이 비니까 의례히 그런 비인줄 알았지 온 세상을 전멸시킬 그런 비인줄은 몰랐겠지요. 그런데 노아는 알았습니다. 주님 재림은 언제인지 모르지만은 반드시 있기는 있고, 개인의 죽음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그 때가 준비하는 사람들은 짐작을 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마지막도 그러하고. 백목사님 같은 분도 당신이 자의식으로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뒤에 가서 들어보면은 당신의 임종이 임박한 것을, 임종이라기보다 순교가 임박한 것을 아는 그런 행동을 다, 일처리 다 하셨거든요. 주님 재림도 정확하게 몰라도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아는 것과 마찬가지인 그런 사람이 된다 그리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전체적으로 그 날과 그 때는 모릅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데, 오기는 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언제 올지 모르니까 항상 깨어서 준비를 해야 됩니다. 어디로 올지 모르니까 모든 곳을 다 지켜야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놓고 비유하기를, 만일 집 주인이 도둑놈이 언제 올지 알았다면 실컷 자고 있다가 오는 그 시간에 딱 일어나서 막으면 되는데,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됩니까? 밤새도록 잠을 안 자고 지키는 수 밖에 없습니다. 안그러면 도둑 맞을 수 밖에 없으니까 그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기는 오시는데 언제 올지는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됩니까? 깨어 있어야 됩니다. 예를 들자면 도적이 어느 시점에 올 줄을 알면은 자고 있다가 그때 막으면 되는데, 도둑이 초저녁에 올런지 한밤중에 올런지 새벽에 올런지 심지어 낮에 올런지 알 수 없으니까, 밤에 오긴 오겠는데, 어느 시점에 올 지 모르니까 밤새도록 깨어서 도적을 막아야 되는 것처럼 주님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깨어있어야 된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도적에 대한 것은 비유입니다. 또 44절에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예비라는 말하고 같은 말이 무슨 말입니까? 앞에 나온 말 중에서 예비하고 있는다는 말하고 같은 말은 깨어 있는다는 말이겠지요.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이게 실제고, 그다음 45절부터 또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악’이란 것은 악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악의 정의는 자기 중심, 자기 위주라는 건데, 쉽게 말하면 자기가 왕이고 자기가 하나님이고, 뭐든지 자기대로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어찌 생각한다고요?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누구 생각입니까? 누구 생각입니까? 자기 생각입니다, 자기 생각. 주님은 언제 올지 모른다고 했는데, 이 종은 ‘설마 오늘 오겠어? 내일 오겠어? 나 살아생전에 주님 오겠어? 내가 오늘 세상을 떠날까? 이 건강한 몸이. 금년까지야 못 살겠어?’ 그게 전부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바로 그 생각이고 그 판단입니다. 자기 주관입니다. 그래서 그게 악입니다.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는 그 생각이 악한 생각인데, 악한 생각이라 말은 무슨 생각이라는 뜻입니까? 자기 생각이라. 자기 주관대로의, 자기 판단, 자기대로의 판단이고 생각이지 오실 주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그래서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시험을 치면, 수능 시험을 치면은 시험 출제 위원들은 어떻게 시험을 내겠습니까? 학생들이 빠트릴 수 있는 것, 생각지 못할 수 있는 것만 찾아가지고 시험 문제를 냅니다. 면접을 보면은, 면접 보는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그런 걸 찾아서 문제 내는게 시험 출제 위원들이 하는 일입니다. 학생들은요? 그런 것을 최대한 안 빠트리고 다 챙기는게 학생들의 준비입니다. 그러니까 이 악한 종이 자기 생각대로 생각지 않은 날, 모든 날을 다 생각하면 생각지 않은 날이 없을 건데 자기 생각대로 ‘설마 오늘은’, 오늘은 이런 날이니까 또 이게 바쁜 날이니까, 좋은 날이니까, 슬픈 날이니까, 이게 있으니까 저게 있으니까 다 빠트려 놓는데 자기 생각 속에 지워버리는데, 주님은 그날들에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엄히 때린다 그말은, 엄하다 그말은 엄격하다는 말의 의미를 파고 들어가보면, 엄하다 엄격하다 그말은 원칙대로다 그말이고, 원칙대로라는 말을 또 다른 말로 말하면 뭐라 말입니까? 원칙대로라는 그 말은 법대로라 그말입니다, ‘법’대로.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서 정해놓으신 미리 선포해놓으신, 미리 알려놓으신 말씀의 법을 따라서 그 법대로 조금도 가감없이 엄히, 거기 기준하여 때리고 ‘외식 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본문의 내용을 몇 가지를 정리해보면, 첫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는 겁니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고 끝이 있고, 또 그 세상에 사는 인생살이도 무병장수라 하지만은 길어봐야 100년이고 7-80년이 보통입니다. 요즘 많이 길어져봐야 8-90년, 이게 좀 오래 살면 그렇고.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세월이란 것은 길면 길고 짧으면 짧아서 어린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세월이 지루하게 안 가는데, 젊은 사람들은 좀 더 빨리 가고 나이 많은 사람들은 세월이 엄청 빨리 갑니다. 나이가 70된 사람의 세월은 시속 몇 키로라 하던가요? 70키로고, 열 살 먹는 사람의 세월은 시속 10키로고, 어느게 빠릅니까? 이거는 나이가 들어봐서 실제 겪어봐야 압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물론 경우에 따라 다를 수 있는데, 하루하루가 얼마나 빨리 가는지. 우리에게 주시는 날이 신속히 가니, 어떻게 한다고요? 날아가나이다. 그 날아가는 속도가 얼마만큼 빠르겠습니까? 살 같이 빠른 세월. 요즘 살은 뭡니까? 옛날의 살은 뭘 살이라 그럽니까? 살 같이 빠른 세월은, 화살을 말하거든요 화살. 그런데 요즘은 뭡니까? 요즘 화살은요? 총알입니다, 총알. 총알만큼 빠른 세월. 얼마나 세월이 빨리 가는지. 그만큼 세월이 빨리 갑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전체적인데,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이 전부고 그 밖에 것을 모르니까 그래서 제가 잘은 모르겠는데, 한글에 띄어쓰기나 문법에 보면 ‘세상 밖’ 이라는 말을 한글에서 쳐보면 아마 틀렸다고 빨간 줄이 나오지 않을까. 세상 밖이라는 단어는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세상 밖이라는 것은. 세상 안이 전부지.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세상 바깥이 있거든요.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에겐 세상이 전부고, 세상 너머 세상 밖이란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그러기 때문에 세상이 언제까지든지 오늘까지 인간들에 의해서 세상은 발전되어왔고 발달되어왔고 점점 좋아져왔고, 이런 세상이 되어졌는데 이것처럼 앞으로도 세상은 점점 변해가면서 발달이 되어질 것이고, 아니면 다시 뭐 어떻게 되었을지라도 다시 또 사람 사는 세상으로 생기게 될 것이라. 여러 가지 면으로 추측 추론하고 그러면서 세상은 계속 될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은 심지어 멀리 보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과거에 의해서 세상이 어떻게 되고 인류가 다 멸망을 하고, 세상이 다 어떻게 되도 또다시 거기서 진화론에 의해서 뭐가 생겨져서 또 다시 새로 뭐가 시작될 것이고, 별에 별 추츤 추론 하지만은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은 끝이 있고, 그 끝이 언제냐? 구원 받을 사람들의 구원의 양과 멸망 받을 사람들의 멸망의 양이 다 차면,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은 간수해두신 목적이 뭐냐? 이 세상을 두신 목적은 불 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않은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두시고 그게 차고 나면 세상은 다 불에 타서 없어진다고 말씀을 하신 게 성경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은 말하자면은, 침몰되어가는 배와 같은 것이고 망해가는 회사와 같은 것이고 망해가는 나라와 같은 것이 이 세상이라. 이 세상은 점점 없어져 가는 겁니다. 마지막에 다 불 타 없어질 세상. 그래서 침몰해가는 그 배에 탈 정신 나간 사람은 없을 것이고, 망해가는 회사에 투자할 그런 정신 나간 사람도 없을 것이고, 나라가 점점 망해져가면 그 나라에 이민을 가거나 투자할 그런 사람도 없을 겁니다. 빠져나오지요, 전부 다. 사람의 몸이 죽어가면 사람 몸에 있던 이가 도망쳐 나온다 그러지요? 백목사님 전기에 보면 나오지요, 설교록에 나오고. 옛날에 그러더랍니다. 우리 젊은 사람들, 학생들은 이가 뭔지 모를건데, 이. 아마 여기 한 40대도 이 잘, 000샘 이 봤습니까? 보기는 봤습니까? 이 별로 잡아보지는 않았겠지요. 저희들 어릴때 시골에 살면 머리고 옷이고, 저도 많이 그랬습니다. 가난하게 사니까 옷에 막 이가 기어다니면 막 손톱으로 찍어서 이를 잡아 죽이는, 이가 말하자면 흡혈 그걸 곤충이라 해도 됩니까? 그런 사람 피 빨아먹고 사는건데. 그게 머리에도 있고 아주 가난한 사람들은 옷에도 기어다니고 그랬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를, 그 이가 사람 몸에 있으면 그 사람이 건강하다는 뜻이고 그 사람이 점점 병들어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몸에 있는 이가 그 사람 몸에서 다 나온답니다. 다 빠져나와 버린답니다. 병이 들어서 죽어가는 사람의 이가 기어나오는 걸 잡아다가 그 사람 몸에 도로 넣으면 또 다시 나온답니다. 목사님이 그렇게 해보셨다 그러지요. 직접 들은 말이 있고, 실제 그런가 싶어서 그럴 일이 있어서 해보니까 이가 죽어가는 사람 몸에서는 기어 나오더랍니다. 안다 그말이지요. 곤충들, 그런 짐승들도 보면은 지진나거나 사고 날 때 되면은 느끼고 도망을 다 친다 그러지요.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기울어져 가는 배에서는 탈출하는 것이고, 또 망해가는 회사에서는 자기 자본을 빼낼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망해가는 나라는 떠나는 겁니다. 그게 정상적인 사람들의 생각이고 당연한 사고 방식이지요. 이 세상은 침몰해가는 배와 같고, 망해가는 회사와 같고, 망해가는 나라와 같은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니까 거기 투자도 하고 심기도 하고 다 바쳐 살지만은, 이 사실을 성경으로 들어서 아는 믿는 사람들은 이걸 깨닫고 이 세상에 자기 것을 투자하고 기울일 것이 아니고 세상을 빠져 나가서 안전한 곳에 투자하고 그리 갈 생각을 해야 되는데 믿음이 없으니까 그리 하지를 않는다 그말이지요. 우리가 그런 사람들 아닙니까? 이 세상은 끝나는 세상이고,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날 인생들이란 것을, 그래서 하룻밤 나그네 세상, 이 세상에 있는 집은 우리는 장막집이지 영주처가 아니다 그말입니다. 이거는 논리적으로 따지면, 세상이 끝난다는 것은 사람들이 이해를 잘 못할지 몰라도, 인생이 끝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알고 있지만은 의례히 그런 것이고, 그 너머는 없는 것으로 사람들이 생각을 하고 사람이 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그런 인간 이상의 일이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는 건 줄 알고 다 포기하고 살지만은 성경은 그 너머를 생각을 하고 대비하는 방법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끝나고 인생도 끝이 있다 이걸 첫째 기억을 하고, 그다음 두 번째는 끝나면 그것으로 전부가 아니고 그 너머에 새로운 시작이 영원한 시작이 새롭게 시작된다는 것도 같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새로 시작이 되면 그때는 뭐냐? 그때가 바로 주님을 만나는 날인데, 세상 끝나는 날이고 내가 세상을 떠나는 그날이, 이 세상의 주인이시고 나를 세상에 보내신 그 주님을 만나는 날이다 그말입니다. 여기서 정리하면, 세상이 있고, 말하자면 주인의 집이 있고, 주인이 있고, 주인의 집이 있고, 주인의 집 사람들이 있고, 또 뭐가 있습니까? 본문을 정리하면, 주인이 있고, 주인의 집이 있고, 주인의 집 사람들이 있고 또 뭐가 있습니까? 종들이 있고, 그 종들에게 부탁한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주인이 집을 떠나서 멀리 일 보러 여행을 가면서, 일 보러 가면서 남아있는 종들에게 주인의 집 사람들을 부탁을 했지요? 부탁을 했습니다. 본문에 비유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이 말씀 가지고 하면은, 주님 재림을 말씀하고 그 재림이 언제인지 모르니까 깨어 있으라는 말씀 속에, 그 속에 주인이 있고 그 주인이 집을 떠나서 먼 길을 가면서 남아 있는 주인의 집 종들에게 주인의 집 사람들을 부탁을 했다 그말입니다. ‘내가 갔다 올 동안에 나의 사람들을 잘 보살펴달라. 챙겨 먹여주고 병 안 걸리게 해주고 나쁜 짓 못하게 하고 잘 보살펴 달라’고 종들에게 부탁을 하고 떠났습니다. 내가 다시 오기는 오는데 언제 올지 모르겠다고 떠났습니다. 말하자면은 주인이신 하나님 주님이 주님의 집인 이 세상에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 구속하신 성도들을 이 세상에 두시고 그 중에서 세우신 종들 먼저 믿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택한 백성들 구속하신 성도들을 부탁을 다 그말입니다. 이 사람들을 보살펴달라.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누가 누구에게 부탁했습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복음 21장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먹이라’ 또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그게 뭐냐하면은 주님이 당신의 사람들을 먼저 된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신 겁니다. 그러면 오늘 여기 있는 우리들은 믿는 사람들이고 복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정도는 다 달라도. 그러면 주님이 오늘 우리들에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집이고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가, 하늘에 계시지 않습니까? 아버지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부탁을 하신 겁니다. 우리를 종으로 세워놓고 우리들에게 주님의 당신의 양떼 사람들을 우리에게 부탁을 하신 겁니다. 그들을 먹이고 잘 치고 길러서 그들 잘 양육해달라고 부탁을 하셨는데, 그런데 그중에서 두 종류의 종이 있었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이걸 다시 한번 정리해봅시다. 주인은 누구라고요? 주인은 하나님이신 주님이고 주인의 집은 이 세상이고, 이거는 알겠고 맡은 종은 우리들이고 우리는 다 맡은 두 종류의 종 중에 있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좀 어려운 것은, 주인되신 주님이 종된 우리에게 맡겨놓으신 주인의 집 사람들이 누구냐 그말인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누구냐 그말인데, 그들은 각자 자기 자신에 있는 위치와 정도에 따라서 주인의 집 사람들이 달라지게 됩니다. 대상이. 서로 서로 그렇게 되는 수도 있고, 간단하게 쉽게 말하면 반사 선생님에게 주인의 집 사람들은 전도한 주일학생들입니다. 중간반 학생들이고 구역 식구들이고 교역자에게는 교인들이고. 이들이 주인되신 주님이 맡기신 주인의 집 사람들이고, 믿음의 부모님에게 자기 자녀들은 하나님이 맡기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또, 믿음의 조상들에게 살아있는 후손들도 그러합니다. 또, 회사에 나가서 내가 다니는 회사에 내 주변 아랫 사람이나 동류나 상급자가 있는데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 내가 근무하는 현장에 나와 직접 간접으로 관련된 나를 알고 내가 나와 접하고 나와 관계를 가지는 여러 종류 여러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속에는 택자도 있고 불택자도 있고, 믿는 사람도 있고 안 믿는 사람도 있는데 믿는 사람은 표가 나고 또 택자 불택자는 표가 안나는데, 누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은 그들 속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있습니다. 택자라면 그들은 내게 맡기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가정에도 그런 사람은 있고, 학생들 다니는 학교 교실에도 있고, 우리 이웃집에도 있고 회사에도 있고 내 거래처에도 있고 교회안에도 있고, 어쨌든 나를 기준해서 나와 관계 맺는 많은 사람들, 나를 아는 사람들, 나와 접하는 사람들, 내 영향을 직접 간접으로 받고 있는 사람들,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이면 전부다 누구라는 말입니까? 누굽니까, 전부다? 주인의 집 사람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면 아시겠지요 누군지? 자녀가 있는 분들은, 자녀들입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그리 될 수 있습니다. 형제간끼리도 서로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믿음 없는 부모님에게 믿음 있는 자녀는 부모님이지만은 믿음 있는 자녀에게 하나님께서 그 부모님을 주인의 집 사람으로 맡겨 놓을수도 있습니다. 또, 교회 안에 교인들 관계에서도 그러합니다. 식구들. 또 회사에도 그렇고, 이웃에, 거래처 다 곳곳에. 어쨌든 이 세상에서 내가 살아가는, 내가 활동하는 내 활동 곳곳에 하나님의 사람들, 택한 백성들이고 구속 받은 성도들이고 그들이 곳곳에 있다 그말이지요. 이게 주인의 집 사람들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주인의 집 사람들? 그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부산에 살던 사람이 서울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러면 부산에 살던 사람인데, 부산에서 접하다가 있던 주인의 집 사람들이 가까이 있다가 내가 서울로 이사를 가면은 그러면 그때는 부산에 살던 사람들은 주인의 집 사람들이었지만은 좀 거리가 멀어지게 되고, 서울에서 새롭게 주인의 집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연결시켜 주시는 그런 사람들이 새로 생기겠지요. 거기 살다가 미국가면은 거기서 또 생길 수 있습니다. 어쨌든 내 몸이 가는 곳, 내 몸이 가면서 나하고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맺고, 나의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 교역자로 말하면, 저로 말하면 설교를 합니다. 이 설교를 실시간으로 듣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가 아는 분도 있고 모르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들은 제가 몰라도 이 설교를 실시간으로 다른 지역에서 들으면 그 분들은 저와 관계된 주인의 집 사람들입니다. 저로 인해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누군가 나는 모르는데 그 사람이 나를 알아서 나의 신앙 모습이나 평소 생활을 보고 그가 신앙에 자기 생활에 영향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주인의 집 사람들이 될 수 있다 그말입니다. 그런데 전혀 상관없는 그런 사람들도 있잖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나와 상관이 없는데, 따지고 보면 상당히 범위가 넓어집니다. 가까이에서 멀리까지. 이런 관계가 다 주인의 집 사람들을 내게 맡겨주신 겁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때를 따라서 양식을 나눠주는 것이 뭔가? 때를 따라 그말은, 그때 그때 필요한 것 따라서 양식을 나눠 주는 것인데, 양식을 나눠준다는 그말은, 양식이라는 것은 먹고 배부른게 양식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양식은 입으로 먹는 육의 양식을 말하는게 아니겠고, 믿음의 양식, 신앙의 양식, 영의 양식을 말씀하는 건데, 성경이 말씀하시는 믿음의 양식, 영의 양식은 무엇입니까? 첫째, 성경이 말씀하시는 양식은 첫째 뭡니까? 알기 쉽게 말하면? 때를 따라서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뇨. 내가 내 주변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눠줘야 되는데, 성경에 말씀하시는 대표적인 양식이 뭡니까, 첫째?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육의 양식보다도 믿음의 양식인데 그 양식은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 이 말씀이 양식이 되겠고, 또 두 번째는 양식이 뭐겠습니까? 양식이란 것은 먹는 것이고 먹고 배부르고 먹고 힘을 내는게 양식입니다. 그러면 첫째 말씀, 두 번째 양식은 이 말씀대로 실행하는 행함이, 실행하는 것이 양식입니다. 실행하지 않으면 자기도 다른 사람도 양식을 주지 못합니다. 말씀 자체, 두 번째는 말씀을 실행하는 것. 세 번째 양식은,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 주님의 살과 피, 주님 대속의 역사를 생각을 하고 그 대속을 입고 사는게 양식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주님 양식, 내가 먹을 양식은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과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뜻을 행하는 것, 그분의 뜻을,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니까 자타의 구원 위한 이것이 양식입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는 것. 그러면 크게 네가지로 생각해서, 때를 따라 주인의 집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눠 준다. 말씀을 주고, 실행함으로 힘을 주고 실행케 하고, 주님 대속을 알려주고 대속을 깨우쳐 주고 입은 자로 살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게 해주고 그 뜻 찾은대로 그 뜻 이루게 해주는, 크게 말하면 이 네가지가 주인의 집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이 되는 것인데, 이 네가지를 주는 방법은 세가지로 한번 생각해보면, 이 네 가지 양식을 주는 방법을 세 가지 면으로 생각해보면 첫째, 소망적으로, 전체를 다 아우러서 말씀드립니다. 소망적으로 양식 준다 그말은, 인생의 목표를 보여주고 알려주는 겁니다, 인생의 목표. 인생의 목표는 인생의 소망이고, 그 소망은 어디서 생겨지는가. 어디서 소망이 생겨집니까? 목표 소망이란 것은, 가치에서 생깁니다, 가치관에서.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나이로 태어나서, 또 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요즘은 우리 나라 공수 특전단에 군가가 바뀐다 그러지요. 사나이로인데, 사나이라는 말이 바뀌어서 전사로 바뀝니다, 전사. 왜 바뀔까요? 공수 특전단에는 남자만 갔는데 요즘은 여자도 많이 가서, 사나이는 남자니까 성별 차이 되기 때문에 사나이라 그러지 아니하고 전사라 그런답니다, 전사. 용사, 전사라 그러니까 남녀 다 포함이 되겠지요. 그리되는데, 가치에 따라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번뿐인 인생,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는데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겨야 되니까, 내가 무엇을 해서 내 아이들 후손들 후세들에게 내 이름을 유명하게 남길까? 그래가지고 열심히 공부하고 기술익히고 돈 벌고 뭔가를 하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을 하는 것이 모든 인생인데, 하다보니까 안되니까 그만 자포자기하고 그날그날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그런 사람들이 일반 서민들 대부분이고, 좀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하다가 안되면 그만 낙심을 해서 술이나 먹고 허송세월 보내고, 그럭저럭 살고 하는데, 실력있는 똑똑한 사람들은 어쨌든 열심히 활동해서 뭔가 인생으로써 가치있는 것을 이루기위해서 불철주야 노력을 하니, 그 가치있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바로 인생의 소망이고 목표고 나아갈 방향입니다. 그런데 때를 따라 양식 나누어주는 것은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중생되고 예수 믿는 사람이 되고, 말씀을 들어 깨닫고 말씀을 들어 깨닫고 나서 보니까, 말씀대로 살고나서 보니까 눈이 뜨여져서 인생의 가치관이 달라지게 되지요. 이 세상은 끝나는 세상이다, 기울어져 가는 침몰해가는 배고, 망해가는 회사고, 망해가는 나라같은 이 세상이고, 이 위에 건설해봐야 전부다 무너질 것이고. 이 세상이 좀 더 몇 백년 더 간다해도 내가 떠나야 되니까 내가 떠나면 세상이 아무리 건설해도 나와 상관 없는 것이니까 이 세상에서 어디에다 가치를 둘까? 열심히 준비하고 해서 돈을 많이 모을까? 억만금을 가진 이건희 회장도 자기 아들에게 줬지, 자기는 병이 들어 눕고 보니까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금 모를 것 아닙니까? 뭘 어떻게 하고 해도 모른다 그말이지요. 자기와 상관 없는 그런 사람이 되더라. 또 누구도 그리 되더라. 마지막 죽고 나니까 그렇게 되고, 권력 잡아봐야 어떤 사람은 감옥도 가고 쫓겨나니까 욕만 얻어먹고 별에 별일이 다 있더라. 구름 같은 간증자들 그들의 걸음을 보고 자기 인생도 보면서 그 뿐이면 낙망 낙심 밖에 못하는데, 성경을 보니까, 내 속에 중생된 영 역사로 말씀을 가지고 따져보니까 인생의 가치는 재물도 아니고 성공도 아니고 향락도 아니고 출세도 아니고 행복한 것도 다 일시적인 것이고, 기쁨도 일시고, 이 땅 위에 모든 소망은 전부다 눈덮인 그런 산과 같아서 녹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그런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가치 둘 것이 없구나. 인생의 영원한 가치는 인생의 죽음 너머를 봐야 되고, 죽음 너머에 부활이 있고 심판이 있고 무궁세계가 있고 끝 없는 그 나라와 그 세계 그 하나님이 계시니까 그때를 생각을 하고 하나님이 오늘에 이 세상을 주신 목적이 그 때 준비하라고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인생의 가치를 거기 둬야 되겠다. 그래서 자존하시고, 영존하시고, 완전하시고, 무한하신 심판주되신 영원무궁토록 영존하시는 그 하나님 아버지 그분에게 가치를 두고 그분을 향하여, 그분의 천국 건설 끝없는 그 나라를 향하여 그것을 깨닫고 거기다가 인생의 소망과 목표를 두고 가치를 거기 두고 내가 그렇게 살고 내게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여기 대해서 눈을 띄워주기 위해서 어쨌든 기도하고 전도하고 틈만 나면 말씀을 가르쳐서 인생의 허무함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려줘서 가치를 거기 두고 방향을 거기 두고 살도록, 저도 지금 설교하는게 그겁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우리 교인들이 이 세상은 끝나는 겁니다. 인생은 떠나는 겁니다. 허무한 겁니다. 그러니까 가치를 하나님과 천국 무궁 세계에 두고, 죽음 너머에 가치를 두고 거기 소망 두고 목표를 두고 달려가는 것이 인생의 가치입니다. 이걸 내가 깨닫고 이걸 내가 가지고 나도 놓지 않기 위해서 내게 속한 하나님의 사람, 주인의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기도하고 설명해주고 설득해주고 알려주고 비교도 해주고 자꾸 틈만 있으면 말을 해주고 하는 그것이 바로 양식 나누어주는 그런 요소 중에 하나가 방편 중에 하나가 될 수 있겠고, 이거는 소망적으로, 두 번째는 확신적으로. 이게 참 어려운데, 세 개 다 어렵지만 확신적으로,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믿음은, 확실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남대문에 문턱이 무슨 나무라고요? 남대문 문턱이 대추나무라 그럽니까, 박달나무라 그럽니까, 무슨 나무라 그럽디까? 저 서울에 있는 남대문의 문턱이 무슨 나무라 그럽니까? 우리 저 예배당 현관에 문턱이 무슨 나무입니까? 000, 무슨 나무던가요? 00이 집에 방문에 문턱은 무슨 나무입니까? 문턱이 뭔지는 알지요? 요즘 자기 집에 집집마다 문턱을 무슨 나무로 만드셨던가요? 대추나무입니까, 박달나무입니까. 막 우겨대는데 둘이 싸웁니다. 대추나무다, 아니 박달나무다 둘이 싸우는데, 하나는 뭐라 한다고요? ‘어리석은 사람들, 가 보지 않은 사람들. 문이면 의례히 대추나무, 박달나무로 문턱을 만드는게 오늘까지의 상식이지만은, 그런데 요즘 시대는 변해서 문에 문턱을 안 만든다.’ 그러면 그때까지만 아는 사람은 박박 세워댑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 상식에 어긋나는 말, 통계에 안 맞는 말, 이치에 안 맞는 말. 문 턱 없는 문이 어디있나’ 박박 세워서 협박을 하고 두드려패고 감옥가두고 그러면, 속에 겁이나서 ‘알았다, 알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내가 가보니까 문턱이 없더라.’ 그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게 뭡니까? 확신이고, 믿음입니다. 신앙이란 것은 그런 믿음을 가지는게 신앙이고 확신입니다. 이걸 내가 가지고 내게 맡겨주신 주인의 집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그말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그분이 얼마나 크신 분임을, 그분이 얼마나 두려우신 분임을, 높으신 분임을.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세밀함을, 그분의 약속이 얼마나 신실함을, 이걸 보여준다 그말입니다. 내가 믿고, 그러니까 이렇게 하니까 믿음이 있으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고 또 하나님을 두려워하니까 그분에게 순종하고 그분의 크심을 알고 그분의 사랑과 약속의 신실하심을 믿으니까 온유하고 든든하고 담대하고 평안하고 항상 기뻐하고 다시 말해도 또 기뻐하고. 또 감사하고 찬송하고 이런 자세로 세상을 내가 살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걸 가르쳐서 전해서 그리 살게 만들어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걱정할게 뭐 있어? 하나님의 예정인데.’ 이걸 말만 하면 소용없으니까 내가 그렇게 살고, 기도하고 그래서 양식을 주는 첫째 조건이 있습니다. 주인의 집 사람들에게 양식 나누어주려면 첫째 조건이 무엇입니까? 가장 선제 조건, 첫째 조건이 뭐지요? 나한테 양식이 있어야 주지, 없는 거는 줄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모르는 사람은 말씀을 못 주고, 또 실행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실행을 못 주고. 주님의 대속이 자기 속에 확신이 없는 사람은 못 주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을 줄 수 없습니다. 내가 가져야 되니까. 소망도 내가 가져야 되고, 확신도 내가 가져야 됩니다. 내가 가진만큼 다른 사람에게 양식으로 줄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실행적으로, 실질적으로 눈에 보이게, 그래서 인생의 목표를, 소망을, 하나님과 천국에 두고 이 세상 안에 두지 말고 세상 너머에 두고. 이 세상에 모든 것은 어떻게 든든하게 집을 지어도, 우리나라는 지진이 잘 안 일어나니까 내진 설계가 다 빈약해서 진도 8만 일어나버리면 다 무너져버리겠지요. 일본은 지진이 자주 일어나니까 거기 대해서 다 대비해서 건물을 설계한다 그러지만은 그래도 인간이 설계해놓은 진도 10을 넘어가서 그 너머로 지진이 나버리면 다 무너져버리지 별 수 있습니까? 6천년의 과학이 1분만 흔들어버리면 한순간에 다 무너져버립니다. 안 그렇습니까?
안된 일이지만은, 과거 2001년도입니까? 미국에 쌍둥이 빌딩 무역센터 테러 당할 때, 그거 건설할 때 얼마나 많이 걸렸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과 장비와 비용이 적어도 아마 한 1-2년 안 걸렸겠나 싶은데, 그만큼 걸려서 지어놓은 것 비행기 폭파하니까, 폭파하는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순간 몇 분만에 다 내려앉아 버렸지요. 지진 일어나면 그것보다 더 빨리 됩니다. 일 분 안에 다 무너져 버립니다. 일 분도 안 걸리지요. 그렇게 되는 것이 이 세상이고, 그런 것도 보고, 인간들의 평생을 통해서, 공부하는 학생들, 공부하려고 애쓰는 것 보면은 안쓰럽습니다. 불철주야로 머릿속에 집어넣어서 그 지식을 담아야 되니까 그렇게 애를 쓰고 애를 쓰고 애를 써서, 오늘 주일학교 설교 보니까 의사 하나 얼마 나온다고요? 몇 백 명 중에 의대 하나 갈까, 부산에서 몇 개 초등학교 다 합해봐야 의대 하나 갈까 말까한 그것도 서울에 좋은데 부산에 좋은데 아닌 저 대구에 그런데 갔다고요. 운동선수도 그렇고. 그렇게 머리 써서 그리 가봐야, 그래가지고 의사 되도, 요새는 의사 중에서도 실업자가 많이 생긴답니다. 판사, 변호사, 법대를 가고, 로스쿨 법 전문학교 가서 졸업 하고 거기 해도 변호사도 요새는 실업자가 많다 그러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변호사 되려면 공부를 얼마나 해야 되겠습니까? 보통 전교 1,2등을 아마 고등학교까지 전교 1등을 거의 안 떨어지고 해야 될만큼 어지간한 학교에서, 후진 고등학교가 아니고 제법 괜찮은 고등학교에서, 지방에서 전체에서 1등을 해야 변호사 될까, 그 정도로 어려운데 그렇게 해봐야 밥 벌어먹기 어려운 그런 때가 지금 시대다 그말이지요. 그렇게 머리 싸매서 건설했는데 그렇게 만들어놨는데 무너지는거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계산을 대서 대학교 4년에 들어가는 학비가 4천만원, 예를 들면. 1년에 천만원 계산하면 약 4천만원. 4년 동안에 내가 돈을 벌면 한달에 백만원씩 벌면 일년 있으면 4천만원이면 8천만원인데, 그 8천만원 가지고 차라리, 계산이 맞습니까, 돈 벌고 그 돈 가지고 장사하고 다른 것 하고 말지 대학 가겠나. 물론 적성에 따라서 공부할 사람은 공부하고, 안 할 사람은 안 하지만은, 계산은 현실적이고 실질적으로 계산해야 되지, 눈 먼 망아지가 원앙 소리 듣고 따라 간다고 모든 사람이 가니까 따라가는 그런 어리석은 우리 나라 사람들같은 그런 짓 하면은 자기는 손해다. 남의 인생을 살아주는 겁니다. 모든게 다 그렇듯이. 실질적으로 실속있게 하는 그게 가치있는 거지요. 그래서 인생의 가치를 바로 깨닫고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준다는 것은 말씀을 주고, 두 번째는 뭘 준다고요? 실행을 주고, 세 번째는 주님 대속을 주고, 네 번째는 하나님의 뜻을 주고. 이 네 가지를 주는 실질적인 방편은 첫째 소망적으로 내가 가져야 되는데, 그 소망적이라 말은 ‘가치관’이라는 말이고, 인생의 가치를 어디에다가 두느냐를 내가 깨닫고 깨우쳐 주는 겁니다. 비교하고 논리로 따지고 견주어가지고 한번 생각해보자. 그래서 기독교는, 신앙이란 것은 생각이 거의 대부분이라 할만큼 거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어제 신문에 보니까, 지금까지는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고 지식을 받아들여 아는 것이 시대를 선도했는데, 앞으로 어떤 시대가 된다 그럽디까? 앞으로는 힘이, 생각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 앞으로는 실력 있는 사람, 끌고가는 사람이 될거다. 생각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 되라. 그 말 한다 그러데요. 시대따라 변하는 겁니다, 다. 믿는 사람은 생각을 해야 됩니다. 생각이라 말은 연구라 말이고, 연구라 말은 분석이라 말이고 비판이라는 말이고 평가라는 말이고 따진단 말이고, 비교한다는 겁니다. 계산한다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자기 주력하는 바를 더 계산대서, 멀리 보고 전체를 보고 계산해서 인생 가치가 과연 어디 있는가 이걸 계산하고, 그래서 인생의 가치를 전체적으로 최종 목표를 하나님과 천국에 두고, 죽음 너머에 두고 이걸 내가 지고 깨우쳐 주고, 두 번째는 확신적으로 믿음적으로 이 사실을 내가 가지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천국을 믿으니까 믿으면 생활이 다 달리질 것 아니겠습니까? 큰 것을 보면 그 앞에 주눅이 들듯이, 두려운 걸 보면 머리끝이 쭈뼛 서듯이, 소름이 돋듯이,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그분의 두려우심을 아니까 두려워서 그분 앞에 조심 할 수 밖에 없고 그분의 목적을 위한 예정과 주권 섭리, 사랑, 약속의 신실하심을 아니까 믿으니까 감사하고 든든하고 온유하고 담대하고 평안할 수 밖에 없고, 이런 것들이 내게 있고 이런 사실을 내가 가지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 주고, 확신을 시켜주고 이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리고 세 번째 실행적으로는 이제는 이걸 실제 가지고 그걸 가졌으니까 이걸 실제로 이루는 생활에 있어서는 예배생활, 성경 읽는 생활, 기도하는 생활, 계명 지키는 생활, 말 조심하는 생활, 진실한 생활, 또 덕을 세우는 생활, 양심적인 생활, 정직한 생활, 이런 생활을 실질적으로 한다 그말이지요. 하고 이걸 다른 주변 사람들에게 주고. 이것이 내 주변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양식을 주는 방법이다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가지고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주면, 주님 오실 때 보면 다 보고 계시지요. 그에게 모든 소유를 다 맡긴다. 이 일이 바로 주인의 대리역할입니다. 주님이 하실 그 일을 내가 대신하는 거고, 내가 대신했기 때문에 내 심신에는 주님 그 역사가 기능으로 익어있고, 그런 사람이 되어있고 그런 사람이 되어있으니까 주님이 천국에서 그 사람에게 모든 것 다 맡기지 누구한테 맡기겠습니까? 그 사람에게 맡기지요. ‘너 밖에 할 사람이 없다.’ 모든 소유를 다 맡기리라. 이게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고.
악한 종은 앞에 말씀드린대로 제 주관대로, 제 생각대로, 제 판단대로. 하나님과 상관없이, 말씀과 상관없이 순전히 인간지식, 제 생각대로 이게 전부, 이게 제일이고, 그래가지고 주인이 오는 것도, 인생 가치관도, 욕망도 전부다 자기 생각대로 판단해서 동무들을 때린다 그말은, 새벽기도 나가면, 동무라 그러니까 동무라는 뜻이 뭡니까? 같을 ‘동’자겠지요, 동무라는 말은. 같은 입장이라 그 뜻 아니겠습니까? 같은 입장. 믿는 사람에게 동무면 누굽니까? 믿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믿는 사람? 신앙 생활로 예수 열심히 믿으면, ‘예수 열심히 믿으면 예수가 밥 먹여줘?’ 믿는 사람이 그런다 말입니다. 새벽기도 열심히 나간다고 일찍 자면은 ‘지금 시험이 눈 앞인데, 새벽기도가 뭐냐?’ 주일 지킨다 그러면, ‘나도 교회다니지만은, 이렇게 바쁠때는, 시험이 앞에 있을때는 예배 보고 와서 얼른 공부를 해야지’ 그것이 동무들을 때리는 겁니다. 열심히 신앙으로 달려나가는 사람들을 뒤에서 줄을 땡기고 한마디씩 툭툭 던져서 힘을 떨어트리고 쥐어박는 그게 동무들을 때리는 거니까, 거기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그말입니다. 부모님들이 ‘성경도 읽지만은 공부를 해야지, 공부가 제일이야. 새벽기도 꼭 안나가도 괜찮아. 몸 약하면 잠도 자야지.’ 일리도 있는 말이지만은, 머릿속에 사고방식이 어떻게 되있느냐가 문제입니다. 망냑에 그렇게 했다면, 인식을 그렇게 해가지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동무를 때리는 것이고 그 동무 때리는 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가장 무섭습니다. 그래서 그게 아말렉이 되는데, 믿음으로 신앙으로 달려가는 형제들, 신앙으로 달려가는 후배들, 친구들, 자녀들, 그들에 대해서 친구가, 선배가, 동지가, 부모가 그 뒷줄 땡기고 ‘예수가 전부가 아니야. 믿음이 전부가 아니야. 성경이 전부가 아니야. 기도만 한다고 되는게 아니야. 공부도 해야 되고, 돈도 벌어야 되고, 또 사람이 몸도 건강해야 되고.’ 말은 맞는 말인데, 그 속에 중심을 뭘로 갖느냐 그게 문제입니다. 만약에 그 중심을 가지고, 세상 중심으로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습니다. 진노가 무섭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 한마디 한마디를 잊지 않고, 다 기억했다가. 사람은 백 년 지나면 다 잊어버리지만은 하나님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아서 잊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그 심판. 그래서 ‘엄히 때리고 외식 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 세상에는 후회도 있고, 회개도 있는데 끝나고 나면 후회가 없고 회개가 없습니다. 주님은 ‘내가 죄인을 불러 구원하러 왔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다’는 말은 언제까지 필요하다고요?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고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은 언제까지 해당되는 말이라고요? 내 살아생전까지 해당되는 말입니다. 주님 재림하시거나 나 세상 떠나고 나면 주님은 죄인은 쳐다보지 않고 모조리 끌어다가 유황불에 던져버리는게 주님입니다. 죄인은 있는대로 다 긁어서, 죄에 속한 말, 죄에 속한 중심 낱낱이 긁어서, 단 티끌만한 것 하나 남겨놓지 않고 지옥에 다 던져버리는게 주님입니다. 살아생전은 후회도 하고 회개하고. 그러기 때문에 살아생전에 회개해야 되고 잘못된 것 고쳐야 되고 이래야 되지, 이대로 계속가다가 끝나버리면은 심판이 무섭습니다. 이게 바로 동무들 때리고, 술 친구라 그말은 세상 친구라 그말입니다. 같은 신앙류끼리, 예수를 믿어도 인본주의로 세본주의로 세상주의로, 일곱머리 열 뿔에 속한 그런 신앙으로 믿으면서 ‘교회만 가면 되지, 예배만 보면 되지, 주일날 뭘 그렇게 꼬박 꼬박 하루종일 예배당에 있고, 주일날 돈도 못쓰고 텔레비전도 안보고, 그런 예수를 그렇게 믿어야 돼?’ 그런 빈정거리는 그런 말을 하면서 주일날 텔레비전 보는 것 예사고, 돈 쓰는 것 예사고 그렇게 하는 믿는 사람들, 그러면서 자기만 그렇게 믿어도, 나는 이렇게 믿지만 이게 죄인이다, 이렇게 믿으면 안되는데 문제다. 그래서 주일날 부모가 신앙이 어려 몰래 텔레비전 보면 자기 자녀들은, 그래봐야 영향은 미치지만은 그래도, 나는 주일날 텔레비전 보지만은 내 자녀들은 보면 안되는데 해서 자녀들이 그걸 알까싶어서 겁을 내면서 몰래 몰래 텔레비전 보는 것 하고, 툭까놓고 주일날 텔레비전 켜놓고 자녀들 있는데서 보면서 ‘봐도 괜찮아. 예배 보고 왔으니까 됐어’ 그러면서 보는 것 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 중심을 보실 때. 죄를 지어도 ‘나는 죄를 지어도, 너는 지으면 안된다’ 이렇게 하고 죄 짓는 것 하고, ‘나 죄 지었는데, 너도 지어도 괜찮아’ 그렇게 짓는거는 천지차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결국 영향을 미치지만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도둑놈이 ‘나는 도둑질 하지만은 너는 도둑놈 하면 안되’ 하는 것 하고, 그래서 자식이 도둑질 할까 싶어서, 자기 아버지 도둑놈이라는 그 사실 들킬까봐서 절절 매는 그 도둑놈 아버지하고, 자식을 데려다가 도둑질 시키는 그 아버지 하고 같습니까? 자식 앞날이 같아지겠습니까? 얼마나 차이가 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가 다 그렇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오늘 말씀에 제목은 그겁니다. ‘깨어서 양식주는 자가 되자’. 우리는 이런 사람들입니다. 알든지 모르든지, 내가 직접 주든지 간접 주든지 나로 인하여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양식을 주거나 때리거나 둘 중에 하나로 살고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속으로 죄를 지어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죄 지을까 싶어서 벌벌 떠는 그게 한편으로는 외식이지만은 그러나 그것이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쨌든 양식 주는 사람이 될지언정 동무들 때리는 그런 악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본문에 말씀에서 비유도 있고 실상도 있습니다. 실상 그대로 따져서 나는 오늘까지 어떻게 살았으며, 지금 나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양식을 주는지, 덕을 끼쳐서 믿음에 힘을 주고 있는지, 나 때문에 손해를 주고 있는지 고요하게 생각해보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