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6-주후(출2:1-15)
모세와 요게벳의 신앙2014-11-17조회 313추천 27
20141116 주후
출애굽기 2:1-15
자녀의 신앙이 부모에게 이어지고, 그중에서 어머니의 신앙, 모계로 신앙이 이어지는 것은 성경이고 일반적인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모세의 부모의 신앙중에서 특별히 어머니 신앙을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봐야 됩니다. 물론 부모가 함께 신앙생활 했고, 모세를 잘 숨겼고 잘 길렀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성경 전체적으로, 또 본문에 실제적으로 보면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쪽이 더 영향을 훨씬 더 크게 많이 미친다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이를 낳았고 낳았을 이 당시에 오전에 말씀드린대로 시대 상황이 애굽 나라의 식민지로써 그 나라 법을 안 따를 수가 없고 그래서 많은 히브리 사람이 자기 태로 난 그 남자 아들들을 나일강에 버려서 굉장히 많이 죽었다 그리 볼 수 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에서 나일강이 피가 되는 재앙을 내리신 것이 그런 원인이 있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 한 것은 그 아이를 살려둔 것이 발각되면 아이만 죽는게 아니고 아이도 죽고 가족들이 다 죽게 되니까 부득이하게 그리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주 나쁜 짓 중에서 가장 나쁜 짓이 바로 이런 짓이고, 애굽 사람들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참으로 사람으로써 못할 짓들을 한 겁니다. 세상에서 보면은 사람을 납치해다가 팔아먹는 인신매매범, 아주 죄 중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처벌을 강하게 해야 될 죄 중에 하나가 사람을 해치는 것, 사람을 잡아다가 팔아먹는 그런 것들은 할 수만 있으면 극형으로 다스려서 그런 짓은 사람의 탈을 쓰고는 못하게 만들어버려야 되는데 세상이 워낙 죄가 많고 그러다보니까 그런게 만연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아랍쪽에 그 사람들은 이슬람 국가를 지향하는 그 사람들은 지금도 사람을 잡아다가 수십억씩 받고 팔아먹는 그런 일이 아주 만연에 있지요. 예사로 그리 하고 있고 지금도, 21세기 지금 하늘 아래도 그렇게 자행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잡아다가 자기들 수단 방편을 위해서 예사로 사람을 죽이는 그런 경우가 허다하게 일어납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그렇습니다. 옛날엔 하물며 말할 것 없겠지요.
그래서 그런 시대 상황 속에 모세가 태어났으니까 대단히 어렵고 불행한 그런 시대에 태어났는데, 나아보니까 딸이면 기르면 되는데 아들이니까 갖다버려야 되는데, 모세의 아버지 어머니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라, 물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태에서 난 자식, 자기 피 자기 혈육의 자식을 갖다버린다는 것은 ‘차라리 내가 죽고 말지.’ 그런 마음일건데, 못할 짓인데도 그게 일반화가 되면 고통스럽지만은 사람들은 다 하게 되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면역성이란 것은 그 환경에 적응 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필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단히 두려운 그런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걸 잘 보고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 가장 중요하게 많이 말씀하신 것 중에 하나가 현실에 피동되지 말고 현실을 능동으로 다스리라는 것을 에덴동산에서부터 말씀을 하고, 우리 신앙생활에 평생을 두고 가장 중요하게 우리가 알고 있고, 또 실제 그리 해야 될 것이 현실에 피동되거나 현실에 종 되지 말고 현실을 내가 주인이 돼서 능동으로 다스려라 하는 겁니다. 그런 것이 다 환경이 그렇게 되어버리면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따라가는, 얼마전에도 많이 말씀 드린대로 시대의 조류, 그 시대의 흐름, 말하자면 유행이며 문화며 이런 것들인데 모든 사람이 다 동으로 가니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따라서 동쪽으로 휩쓸려 가버립니다. 동으로 우 가다가 모든 사람이 전부 서로 가니까 전부 서로 또 다 가버립니다. 너도 나도 전부다 자식들을 대학에 다 보내니까 그 자녀의 적성이라든지 머리라든지 앞날의 미래는 상관없이 무조건 대학을 빚을 내고 집을 팔아서라도 보내는 겁니다. 그게 우리 나라 사람들의 특성입니다. 결혼식을 두고도 신문에 많이 나지만은 외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보면은 도무지 이해를 못하는 것 중에 하나가 결혼식이라 그러지요. 결혼식 하면은 엄청난, 하루 결혼식 하는데 남는 것은 사진 찍는 것인데 사진 남는 것이고 한번 우리 결혼식을 이렇게 했다는 과시하는 그게 전부인데 거기 들어가는 비용을 많게는 1억을 넘게 들이고, 보통 4-5천만원씩 들이고 적게 들이면 2-3천만원씩 들이는게 우리나라 일반 결혼하는 모습이라 그럽니다. 참 보통 병폐가 아니지요. 사람들의 머리를 완전히 바꿔버려야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봅니다. 왜 그런짓을 하는지 선진국 사람들이 와서 보면은 혀를 내두르고 도무지 이해를 못한다 그럽니다. 저같은 사람의 머리로도 왜 그렇게 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그런데 사회 생활 하면서 그 시대 흐름 조류 속에 들어가서 사는 사람들은 그것이 당연한 것이고, 모두 다 그리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하는 겁니다. 자기 주관이 없는 겁니다. 현실에 피동되어서 무조건 따라가는 겁니다. 그리하면 어떤 손익이 되는지, 손익 계산도 따져보고 남는게 무엇인지, 허비가 무엇인지, 그리하므로 어떤 게 유익되며 어떤게 해가 되는지 다 따져가지고 정말 그렇게 할 필요가 있으면 그렇게 하면 되는데 계산 없이 남이 하니까 그렇게 한 다음에는 후회하고, 빚을 내서 했으니까 허리가 휘어지고 온갖 부작용들이 다 생겨지는데, 비단 그것뿐이 아니고 자녀 교육이라든지 또 주거환경이라든지 취미생활이든지 자기 생활 전부다가 다 그런 면으로 다 되고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가 그런 시대의 흐름이나 조류를 따라가면 별 수 없는 세상 사람들이고 그들과 같이 되는 겁니다.
모세의 부모가 그 어려운, 그거는 흐름이라 하기는 어렵겠지만은, 그래도 법으로 눌러서, 나라의 법이란 것은 대단히 무서운 겁니다. 법에 직접적인 제재를 받지 아니하고 영향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별로 모릅니다. 일반 서민들이야 법하고 직접 부딪힐 일이 없쟎습니까. 그런데 사업을 조금 크게 해서 세금과 관련된 그런 일을 본격적으로 그런 서류 처리를 해야 되는 사람들, 또 나라의 공무와 관련된 그런 일을 직접적으로 하는 사람들, 또 어떤 일이 생겨서 경찰서나 검찰에서 소환 통보 한번 받아본 사람들은 법의 위력을 실감을 합니다. 그만 보통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게 알고보면 아무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영향을 크게 받는 것인데, 이때 지금 애굽 나라 법으로 정해져 있다 말이지요. 바로의 말이 법이고 그리 되있으니까. 그러니까 과거 일제 시대때 조선 나라 말을 쓰면은 일본 사람들이 잡아다가 감옥에 가둬버리고 한국 말을 못 쓰게 한 것처럼. 한복을 못 입게 하고 머리 다 잘라버리고 한국나라 성을 못쓰게 하고 전부 창시 개명을 해서 일본 이름으로 다 바꾸게 만들었던 것처럼 그렇게 더 강해서 이때 애굽 사람들은 유대인들에 대해서 남아를 낳으면은 무조건 없애 버려라 이게 애굽나라의 법입니다. 아주 잔악한 그런 잔인한 법인데, 안 따를 수가 없는데, 안 따르면 다 죽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모세의 부모는 그 바로 왕보다 애굽 나라의 무시무시한 법보다 하나님이 더 두려워서 혈육의 정으로 갖다버리지 않았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더 두려워서 그래서 본문에는 그 준수함을 보고 그렇게 해놨는데 그 준수함이라는게 그렇게까지 해석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은, 하나님의 종들을 통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과 가나안 소망이 그들에게 평생을 머릿속에 자리 잡고 소망으로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를 보내서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여기서 구출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지 모르는 그런 면에 있기 때문에, 과거 유대인들 여인들로써는 아들 낳으면 여인의 후손으로 메시야 구주가 난다고 약속하셨으니까 여인들로써는 자기 몸에서 메시야가 날지 모르니까 그게 일편단심 소망이고 그래서 아들 낳는게 그렇게 기다렸고 자랑스럽게 되어졌던 것처럼, 그러니까 아이를 낳아보니까 준수해서 이 아이가 혹시 이 나라의 인도자, 구출자가 될 것인가 그런 믿음의 소망을 가지고 그랬다고 해석을 한다면 지나친 해석이 될까요? 결과적으로 그리 됐는데. 모세 어머니 신앙으로써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준수함을 보고 하나님이 두려워서 애굽 나라 바로보다도, 나라의 법 보다도, 무시무시한 그 권력의 두려움 보다도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 아이를 갖다버리지 못하고 몰래 몰래 길렀다 그말이지요. 기를때 그때 가족이 다 합심해서 하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한 사람만 겁을 집어먹고 갖다 찔러도 안되는거니까. 그래서 그 부모가 아이를 잘 기른 그런 신앙.
그다음에 3개월이 지나고 난 다음에 더 이상 기를수가 없으니까, 발각이 되면 다 죽으니까 하는 수 없이 아이를 갖다 버리기는 갖다 버리되,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갈대를 베다가 상자를 만들고 그 상자 안에 역청과 나무 진을 가지고 물 새어 들어가지 않도록 방수처리를 해서 아이를 안에 넣고 덮어가지고 누군가 보면 정이 딱 들도록, 데려가고 싶도록 그렇게 했겠지요. 그래가지고 살짝 띄어놓고, 갈대 사이에 띄어났으니까 함부로 막 둥둥 떠내려가진 않을 것 아닙니까, 걸리고. 그렇게 해놓고 미리암이 나이가 아마 그리 많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미리암이 멀리서 딱 지켜보고 있고. 마침 바로의 공주가 와서 거닐다가 목욕하러 왔다가 상자를 보고 가져다가 아이를 보고 데려다 기르게 되는 이런 과정들. 그래서 모세의 부모가 석달 동안 기른 것도, 그다음 석달 동안 기르고 난 다음에 아이를 버리기는 버렸으되 그 처리한 그 과정 과정을 보면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범위까지는 다 했다 그말이지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선까지 가서 더 이상 할 수 없는데까지 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다 맡겨놓고 그러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선까지 다 하고 난 다음에 그렇게 해놓으니까 그다음부턴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마침 그때 바로의 공주를 목욕하러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고, 목욕하러 보내되 하필 그 상자 근처로 보내셨고, 상자가 있어도 그냥 예사로 지내보낼건데 ‘저게 뭐지?’ 하고 마음에 호기심을 일으키신 것도 하나님이시고, 아이를 보고 불쌍히 여긴 것도 히브리 사람의 아이인줄 알고 불쌍히 여겨서 ‘내가 데려가야겠다.’고 마음을 감동시키신 분도 하나님이고. 사람이 할 수 있는데까지 다 했을때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그렇게 처리를 하신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니까 미리암이 지혜롭게 얼른 쫒아가서 ‘내가 이 아이를 위해서 유모를 불러올까요?’ 공주가 그때 결혼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이가 없으니까 젖을 먹여야 되니까 ‘유모를 불러올까요?’ ‘가라.’ 그래서 얼른 가서 아이 어머니를 데려왔지만은 공주가 아이 어머니인지 유모인지 알 수 없잖습니까. 그래서 그 모세는 자기 친어머니 품에서 친어머니 젖을 먹고, 공주가 볼때는 유모고 그렇지만은 실상은 그런, 그런 환경으로 자랐는데 그렇게 자랄 때 어머니 요게벳이 품에 안고 젖을 먹이면서, 또 잠을 재우면서, 안고 다니면서, 업고 다니면서 몇 년이 될런지 모르겠지만은 젖 뗄 때 까지 그렇게 길지 않은 세월이지만은 얼마나 간절하게 간곡하게 그 아이에게 믿음을 심어 넣어 주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 기억할 것이, 늘 말씀드리는 대로 자녀의 신앙은 부모 신앙의 표시판입니다. 안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예외적인 경우도. 그러나 보편적으로 일반적으로는 자녀의 신앙은 부모 신앙의 표시판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보고 정죄할 수는 없어도 우리가 원칙으로 두고 볼때, 신앙생활 잘하는 그런 어린 자녀들 볼때 그 부모의 신앙을 생각해 볼 수 있고 그러지 않을때 또 다시 생각해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모되고 또 조상 선조되고 선배된 우리들 입장에서는 나의 자녀들 후손들 후배들 그들의 신앙의 모습이 바로 나에게서 나갔다는 것을 이거는 진리라 생각을 하고 절대 불변의 진리라 생각을 하고 자기를 늘 살피고 돌아봐야 됩니다. 그래서 내 자녀가, 내 후손들이, 내 후배가 믿음생활을 잘하고 좋으면 하나님의 참 은혜라 감사하고, 잘못되고 있으면 ‘나의 어느 부분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자녀, 이런 후손을 주셔서 나를 돌아보게 하시는가’를 생각을 하고 쉬지 않고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성경적으로 옳은 겁니다.
가인과 아벨이 누구 아들입니까? 가인과 아벨이 누구 아들입니까? 가인의 아버지는 따로 있고, 아벨의 아비가 따로 있습니까? 가인은 만고의 저주 받은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지 않습니까? 그 인물이 아버지가 누굽니까? 아담입니다. 아벨은 만고에 다시 없는 의인입니다. 그 아버지는 누굽니까? 그 아버지도 아담입니다. 왜 꼭 같은 아담 하와에게, 선악과 따먹고 범죄하고 타락해서 모든 인류를 전부 멸망에 빠트린 그 아담 하와의 자손 속에서 가인이 나오고 아벨이 나왔냐 그말이지요. 가인만 나왔으면 몹쓸 인간들이라 그러겠는데, 아담 하와에게 가인의 요소뿐이 아니고 아벨의 요소도 그들에게 있었다는 겁니다. 아벨의 요소도 그들에게 있고, 반대로 가인의 요소도 그들에게 있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살펴봐야 됩니다. 모든 사람의 허리에서, 그래서 아담의 허리에 죄인도 들었고 의인도 들었고 모든 왕들이 다 들어있었다 그러는 겁니다.
유다 나라 왕 중에서 아주 악한 그런 왕들이 많이 났는데, 이스라엘도 그랬지만은, 그 악한 왕들, 그 왕들은 올라가면 누구 자손이냐? 다윗의 자손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도 악한 왕도 났고, 믿음의 조상 이삭의 아들 중에서 야곱도 났지만은 에서도 나왔습니다. 그런 걸 보고, 나의 자손들 나의 자녀들에게서 그 신앙들을 볼때 내 속에 이런 면도 있고 이런 면도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이란 것을 살펴봐야 됩니다.
그래서 어머니 요게벳이 모세를 안고 젖을 먹일 때, 그를 가르칠 때 그때 그냥 입에 발린 말로 그냥 흥얼 흥얼 흥얼 그렇게 했을 것인가? 그 어린 모세 머릿속에, 정신 속에, 사상 속에 평생을 그를 끌고 가는 그 신앙의 사상과 신앙의 정신과 신앙의 길이, 어릴 때, 젖먹이 때, 안고 잠 재울때, 업고 다닐 그 때 어머니 요게벳의 그 입에서, 그 마음 속에서 그 모세 속에 다 들어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어머니가 어떤 심정으로, 어떤 정신으로, 어떤 태도로 그 아이에게 말을 하고 주입을 시켰을 것인가? 얼마나 간절하게 그렇게 했을까? 말로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지요. 말이야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실질적으로 모세 어머니 신앙은 참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고 이스라엘의 구원과 가나안 소망이 누구보다도 뜨거웠던 그런 간절함이 그 속에 있었다고 그가 낳은 아들 모세의 맺어진 결과를 보고 우리는 짐작해볼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것이 토대가 되었고, 그게 그 속에 기초가 되어가지고 거기서 자라나온 믿음이 그런 결과를 맺었던 겁니다.
설교할 때, 백목사님 생전에 어떤 분이 설교하면 백목사님 설교를 필기해서 받아가지고 그대로 설교를 하는데 목사님께서 칭찬을 굉장히 잘 하십니다. ‘나보다 낫다.’ 그렇게 하시는 분이 있고, 어떤 사람은 토시하나 안 빠트리고 꼭 그대로 같이 설교하는데 대단히 꾸중을 많이 하십니다. ‘너는 인본이다.’ 그러고, ‘니가 앵무새냐?’ 그럽니다. 왜 꼭 같은, 두 사람이 꼭 같은 내용을 가지고 같이 설교하는데, 한 사람은 목사님 당신보다 칭찬으로 낫다 하시고, 한 사람은 너는 앵무새다, 녹음기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가? 그 설교하는 그 사람 속에 신앙의 정신과 중심과 사상을 아시기 때문에 목사님께서 그렇게 그 사람을 알고 그리 책망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모르면, 그 사람의 언행심사와 모든 사리판단을 바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얼마전에 그걸 공부했지요. 신앙이란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고 자기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사람을 아는게 중요한데, 사울이 하나님 몰랐고 자기 모르니까 사람을 몰랐고, 사람을 모르니까 사람을 모를 수 밖에 없고 결국은 완전히 실패자가 되고 말았던 것처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머니 요게벳의 신앙을 여기서 깊이 생각해보고 오늘 우리들도 우리가 맡은 그런 혈육의 자녀들, 또 모든 신앙의 자녀들 후배들에게 이런 정신과 사상으로 교육을 시켜 양육해나가는 그런 우리들이 되어야 되겠다.
그래서 믿음 세계 안에서 실력이란 것은 별 실력이 없습니다. 알고 보면은, 사람이 굉장히 일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많이 할 수 있도록 그런 분량을 주셨으면 많이 할 수 있는 것이고, 아무리 하고 싶어도 안 주셨으면 안 하는 것인데, 자기 받은 분량 할 수 있는 것만 다 하면 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는 것인데, 아무리 사람이 일을 많이 했다 그래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그 일은 일이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거 뭐, 단정적으로 말은 못하겠지만은, 순복음 교회 조형기 목사님은 세계 제일가는 그런 교회를 만들었고, 세계적으로 수많은 그런 사람을 전도해서 믿는 사람을 만들었는데 거기 하나님께서 어디까지 그와 함께 하셔서 어디까지 그 일을 하셨는지 모르겠으나 오늘날 되어지는 본인과 그 교회 모습들을 볼때 그거는 하나님의 역사와는 좀 거리가 있지 않았는가 그렇게 우리가 생각할 수 있고, 그리 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일은 세계적으로 그렇게 뛰어나게 많이 했지만은 깊이 들어가보면 과연 그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일이었던가? 하나님께서 정말 깊은 속속들이 하나님의 뜻과 맞아서 하셨던가를 생각해보면, 성경적으로 연결시켜 보면 의문이 안 생길수가 없고 백목사님은 거기 비하면 숫자적으로 말하면 얼마 안되는 것 같아도 그분이 한 것은 껍데기가 별로 없는 거의 알찬 그대로, 하나님이 과연 곳곳마다 사건 사건마다 전체적으로 함께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할만큼 그런 역사가 있었던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이거는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이 아니고, 객관 역사로 살펴봐도, 소이 말하는 통계로 가지고 살펴봐도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들로써는 할 수 있는대로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주신 그런 자녀들 후손들 후배들에 대해서 어떤 정신과 중심과 사상, 어떤 자세로 그들을 가르치고 인도해야 되겠는가 그리 될 때는 자기 자신이 된 것만큼 되지, 그러기 때문에 신앙이란 것은 내 구원이, 자기 구원이 가장 먼저고 우선이란 것은 내가 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만드는 수는 이 세상에는 있어도 기독교 신앙 세계안에는 없는 것이고, 그래서 교역자와 교회 비밀을 말씀하신 것이고, 그래서 교인들은 자기들은 밥을 굶어도 교역자는 먹이는게 맞고, 교인들은 헐벗어도 교역자는 입혀야 되고 자기들 자식들 기도 못해도 교역자와 교역자의 가정 위해서는 기도하는게 성경적으로 우선순위로 옳은 겁니다. 그게 복 받는 일이고. 그것이 교역자를 위한 것인 동시에 그게 바로 자기와 가정과 자손들을 위한 그런 진정한 길이 되어진다 그말이지요. 참된 교역자는 반대로 들어가보면 자기와 가정 위해서는 기도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모두 교인들 위해서만 기도하지. 그것이 성경적으로 그리 되는 것은 교역자가 교회 머리니까 교역자가 바로 되지 않으면 교인들이 그 교역자를 넘어설 수가 없기 때문에 그리 되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에. 여러 가지 깊이 많이 생각을 해야 되고, 신앙세계라는 것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백목사님의 신앙세계는 일반 사람들이 알기에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닙니다. 그 깊은 속에 얼마나 많고 깊은 것이 들어있는지 모릅니다.
어머니 신앙, 부모 신앙 중에서 어머니 신앙을 좀 생각해보시고, 그다음 두 번째는 모세의 신앙에서 어릴적에 어머니로부터 배운, 그래서 받아들이는 모든 지식과 신앙이 그 속에 토대가 되어가지고 그게 기초가 되어서 자랐는데 그것을 믿음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바로의 궁에서 모세가 먹고 입고 자고 거기서 교육받고 자랐지만은 결과적으로 볼때 모세는 애굽나라의 모든 언어와 학문과 문화를 전부다 배웠지만은 결과적으로 보니까 모세는 거기에 조금도 동화되지 아니하고 애굽화 되지를 않았습니다. 알기는 알았고, 애굽 나라의 언어도 모든 학문도 문화도 역사도 모든 걸 알기는 알았지만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이용물로만 가졌지 모세 자신이 ‘애굽 나라 역사는 참 전통있다. 유구한 역사로구나. 또 이 나라는 참 크구나. 토대가 튼튼하구나. 과연 이 나라에 내 평생 바칠만 하구나.’ 그런 자기의 어떠한 것을 그 애굽 나라에 마음이라든지, 자기 중심이라든지, 자기 진심을 애굽 나라에 조금도 주지를 않았습니다. 마음을 주지 않았다 그말이지요. 바로의 공주와 바로 왕은 모세를 길러서 그 나라의 후계를 세워서 튼튼한 나라를 만들어보고 싶었겠지만은 그러나 모세는 거기 대해서 눈꼽만큼도 동화되지 아니하고 영향 받지를 않았단 것을 결과적으로 봐서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나타났을때, 그러니까 애굽 나라에 조금도 피동되거나 영향 받지 않은 상태에서 그 속에는 순전히 어머니께 배운 그 하나님을 향한 그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래서 하나님을 알았으니까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순종하는 그 생활, 아마 안봐도 애굽나라 살면서 애굽 나라 안에서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죄 되는 그런 일은 모세가 하지를 않았을 겁니다, 하나도. 어떻게든 피하고 이겨냈지. 그런데 그들은 잘 몰랐을 것이고, 의문은 가졌는지 모르겠지만은. 그리된 상태, 그러니까 참 부귀 영화를 누리고 비단 융이불자리 깔고자고 고량진미를 먹고 그리 했지만은 모세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고, 기회만 노리고 있고 마음 속에 늘, 그러니까 몸과 마음이 따로 있다는 말처럼, 몸은 바로의 궁 핵심부 안에 있었지만은, 그의 마음은 늘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고 그들 구출하는 거기 다 있었지 마음까지 거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말입니다.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마침 그런 일이 있으니까 그만 견디지 못해서, 결과적으로 그 일은 실패했지만은 견디지 못해서 복수를 하고 탄로가 나서 도망을 쳤는데 그때 바로가 모세를 죽이려 한 것은 아마 안봐도 바로가 모세에 대해서 의문은 많이 가졌을 겁니다. ‘저게 보니까 호랑이 새끼인지, 고양이 새끼인지 모르겠다’ 의문을 가지고 저게 과연 오랜 세월 몇 십년을 가르치고 길렀으니까 전부 애굽 안에서 애굽 나라 궁안에 핵심부 안에서, 그 환경, 사람이란 것이 10년이면 뭐가 변합니까?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강산이 변하는 게 쉽습니까? 사람 변하는게 쉽습니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그말은, 사람은 그보다 열 번도 더 변한다 그뜻입니다. 그런데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40년을 길렀으니까 ‘모세가 아무리 히브리 사람이고 유대인이라 그래도 이만큼 가르쳤고 이만큼 먹였고 입혔고, 이만큼 환경이 되어있으니까 이 속에 있으니까 이제는 애굽화 되었을 것이다’ 그런 기대가 많이 있었을 것이고, 그러나 똑똑한 사람들이니까 한편으로는 눈 여겨 보면서 ‘그래도 저 종자가 다르니까’ 하고 그렇게 보고 있었을 것인데, 사건이 딱 터지고 보니까 ‘과연 저놈은 될 줄 알았는데 아니로구나. 무늬는 애굽인데 속은 전부 유대인이고 히브리 족속이로구나. 안되는구나.’ 그래서 살려놨다가는 애굽 나라 덜어먹을 그런 인물이니까 죽이려고 찾은 것은 틀림이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모세라는 사람이 말하자면은, 애굽 나라에 살았는데 종자는 애굽 종자가 아니었다 그말이지요. 히브리 종자고 하나님 백성의 종자지. 예수 믿는 사람의 신앙이,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 사는 것이 모세처럼 이렇게 되어져야 됩니다. 그래서 모세의 신앙이 위대한 것은 어릴때 어머니로부터 받은 그 모든 교훈과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 역사, 하나님 백성에 대한 그런 자부심과 또 그들 구출해야 되는 그런 사명감과 가나안 땅에 인도해야 되는 소망과 하나님 백성의 나라 건설의 그 소망, 이런 소망이 모세가 평생토록 애굽이라는 그 환경 속에 살면서 변하지를 않았다는 거지요, 그렇게. 사람이 자꾸 말을 듣다 보면은 자기도 모르게 사람이 세뇌가 되고 변하는 것인데, 서울 가면 변하고 미국 가면 변하고, 이 지방 가면 변하고. 어떤 경상도 사람이 주관이 뚜렷해서 서울에 가도 10년, 20년 지나도 말투가 안 쓰고, 한 30년 지나도 그대로 경상도 말투가 튀어나오더라 그말이지요. 그런데 한 40년쯤 지나고나니까 이제 반반이 섞입디다, 보니까. 서울 말씨하고 경상도 말씨하고 섞여 나오더만요, 보니까. 40년 지나고 나니까 그리 되는데, 아무리 안변해도 변할 수 있는게 사람인데. 사람의 생각도 욕망도 가치관도 정신도 사상도 변할 수 있는게 사람인데, 모세는 그 애굽나라 가장 핵심부 안에 들어있으면서도, 중심에 있었지만은 모세는 그 하나님을 향한 그 신앙, 사상이, 정신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애굽 나라가 모세 머릿속에 전혀 물들지 않았으니까 이게 얼마나 위대한 신앙인지 한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애굽 나라 오늘로 말하면 무엇입니까? 애굽은 오늘로 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바로 애굽 나라의 중심으로 살고 있던 모세와 같은 입장인데,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이 세상 속에 한 가운데 살고 있으나 우리들의 정신과 사상과 가치관과 욕망 속에 이 세상이 내 머릿 속에, 정신 속에, 사상 속에, 가치관 속에, 욕망 속에, 인생관 속에 들어와가지고 나의 인생관이 이 세상을 향하고 이 세상의 어떤 것을 향하고 나의 가치관이, 목적이, 그리 향한 그런 사상으로 내 정신이 변질되었다면 예수 믿는 사람으로 변질이 된 사람입니다. 사람이란 건 다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다 다르고, 실력도 다르고, 겉모습도 다르고 다 다릅니다. 그러니까 어떤 모습으로 그 사람이 외부로 나타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사람, 말하자면은, 미운 오리 새끼는 결국에 마지막에 성공을 하지요? 미운 오리였는데 나중에 길러보니까 뭐가 됐던가요? 백조가 됐습니까? 오리하고 백조는 차원이 다른가보지요. 그러니까 오리인줄 알고 길렀는데, 백조였다. 어릴때는 몰라도 이 세상에 살 때 어릴때는 잘 모르고 또 자라가는 과정에도 잘 모르고, 철 없어 잘 모를때는 몰라도 나이가 들고 신앙이 들고 옳은 교훈을 점점 배우고 그리고 난 다음에 자기 주관과 자기 자유 의지와 이걸 가지고 인생관의 방향을 정할 때 따져보고 생각해보면, 이 교훈을 받지 못한 사람들, 이 교훈과 교리, 이 노선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할 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성경을 보고 따져보면 할 말이 없을 것인데. 더구나 이 교훈, 이 노선, 이 교리, 이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핑계대지를 못할 겁니다. 하나 핑계 되는 방법은, 우리 교인들 같으면 핑계 댈 수 있을 겁니다. ‘목사님이 영감이 없어서. 능력이 없으니까 그랬습니다.’ 그러면 이제 저도 할 말은 없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거기 대해서 좀 감안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훈 자체는, 노선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러면 또 할 말이 없을 겁니다. 이걸 가지고 자기가 자기의 주관과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자기 이성과 지성 가지고 인생관에 방향을 정할 때 따져보면 이 세상에 사니까 학생으로써, 가정주부로써, 가장으로써, 또 직업 가진 직장인으로써, 사업가로써, 거기서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해야 되니까 시간도 없고 바쁘고 그래서 하루 종일 가도 성경 한 장 못 읽고 기도할 시간 없고 예배도 더러더러 빠지고 시간이 없어 정신 없는 그런 생활을 할지라도, 그런 신앙 생활 하면서 하나님 앞에 늘 죄송한 마음을 가질지라도, 그래도 그 마음 속에 ‘나는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닌데. 나의 소망은 천국이고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백성인데. 내가 세상 속에 빠져서 이렇게 살고 있구나.’ 그 마음 속 깊은 속에 탄식을 가지고 언젠가 이 세상에 종노릇 하고 세상에 빠져 정신없는 이 생활에서 벗어나서 신앙으로 자유하는 그런 사람이, 그런 환경이 만들어질 것인가를 늘 소망하고 기도하고 애를 쓰는 그런 자세를 가지는 그게 예수 믿는 사람이고 바른 신앙 정신을 가진 사람이지. 그냥 자기 현실 거기에 안주하면서,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오전에 이것도 말씀드린대로, 모래 한 알은 모래 한 알만큼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습니다. 돌맹이 하나도 돌맹이 하나만큼의 가치가 있고, 금은 금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돈은 그 액수만큼의 가치가 있고 그 가치만큼의 이 세상의 역할을 하는 것이 세상의 모든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면 그만큼 수입이 될 것이고, 기술 연마하면 그런 기술의 실력 있는 사람이 될 것이고, 사람을 잘 사겨놓으면 인성으로 쌓아서 자기 배경이 될 수 있을 것이고, 공부를 많이 하면 그 공부가 자기의 지식이 되고 실력이 돼서 그런 실력 있는 사람이 될 것이고. 그런 걸 쌓아두면 그것이 살아가는데 여러 가지로 편리하게, 유용하게, 효력있게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냐? 그게 끝이냐? 그게 인생 끝이냐? 인생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고, 그 너머는 없느냐 그러면 안 믿는 사람과 같은 것이고, 그 너머를 계산해서 이렇게 살아가지고 내가 나이가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되고 늙어서 주님 앞에 서는 그날이 올 것이고, 마지막에 죽은 다음에 무궁 세계에 가서 주님 심판 앞에 드러날 것이고 그렇게 될 것인데, 그때까지 연결시켜 볼때에 과연 내가 지금 달려가는 이 방향이, 내가 인생의 목표로 방향으로 정해놓은 이 목표 방향이 옳은 것이며, 큰 것이며, 가치있는 것이며 귀한 것인가를 생각해보고 오늘을 가야 됩니다. 오늘을 살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길을 가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디로 향해서 가느냐, 어디를 갈 것인가? 내가 달음질 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지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친 것 같지 아니하여 예수 믿는 사람은 첫째 정할 것이 인생의 방향을 바로 정해야 됩니다. 내 평생 인생살이를 어디를 향해서 나아갈 것인가? 과정 과정 방법은 여러 형태가 있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갈 때 목적지는 바다 건너편입니다. 바다 건너편인데, 그때는 배를 타고 노를 저어서 가는 그 방편으로 갔습니다. 배 타고 노 젓는 방편으로 가지만은, 목적지는 주님이 가라고 하신 바다 건너편으로 가는 것처럼, 이 세상에 믿는 사람이 살아가는 방편와 모습은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게 어떤 사람은 뛰어나고 많고 적고 여러 그런 형태 있지만은 어쨌든 우리 목적지는 하나, 천국을 향해야 되고 하나님을 향하고 구원을 향해 가야 되지, 이것이 아닌 인생의 목적지가 바로 되어졌다면 그것이 가는 과정, 방편이 좋아도 화려해도 영광스러워도, 모든 사람이 다 부러워해도, 뛰어나도 그만큼의 가치는 있는데 그 안에서 끝나고 마는 겁니다. 첫불을 켜면 그 촛불이 뜨거움도 있고 그 촛불에 밝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초가 다 꺼지고 나면 촛불은 꺼지고 녹아 없어지고 마는 겁니다, 그거는. 그걸로 끝입니다. 하늘의 태양은 물질계 있을때 까지는 계속 있겠지요. 이 세상에 모든 것은 그렇습니다. 권력을 잡아도, 경제를 잡아도, 실력을 쌓아도, 지식을 습득해도, 어떤 학벌을 장만해도 무엇을 가져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체로는 그만큼 힘이 있고, 효력이 있습니다. 무조건 쓸모없다는 것이 아니고, 가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것뿐이라면, 그 속에 다른 것이 없다면, 모세가 세상 애굽 나라에 모든 언어와 학술을 다 습득을 하고 능하게 다 가져서 아무도 모세를 따라갈 수 없을만큼 애굽 나라 모든 것 다 가졌어도 모세는 그것을 가치로 두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활용을 해서 바로를 상대하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통치하는데 상대하고, 이스라엘을 하나님 뜻대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가는 거기에 이용해먹었고 써먹었지, 애굽 나라 자체에 가치나 소망이나 욕망을 두고 거기 조금도 마음을 두지를 않았습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의 이 세상에서 가져야 될 정상적인 바른 자세라 그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원래부터 세상을 만드실 때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이거는 우리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에덴동산이고. 이 세상을 만드신 목적은 천국 건설을 위한 것이고, 사람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세상 사는 동안에 세상에서 천국 배우고 하나님 배우고 구원에 모든 것 배워가지고 주시는 그 현실 현실 속에서 하나님 말씀 인도를 따라서 입은 대속을 벗지 않고 지키는 생활하므로 자기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가는 그 생활이 가장 가치있는 것이고, 거기에 써먹고 필요한 모든 것들이 세상의 전부라. 그러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 전부다 배설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고. 그 세상 그 자체로 가치를 둔다면 안 믿는 사람들이 가치가지는 것이지, 믿는 사람들이 가질 것은 아니라 그말이지요.
깊이 좀 생각해보십시다. 후회라는 말은, 후회, 후회라는 그 ‘후’자가 무슨 ‘후’자 입니까? ‘뒤 후’자, ‘뉘우칠 회’자 겠지요. 지나가고 난 다음에,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겁니다. 외양간을 소를 잃고 난 다음에 또 소를 사서 기를꺼니까 소를 잃어버리고도 외양간은 고치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두 번이 없으니까, 지나간 세월,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그 기간 안에 모든 것 끝내야 됩니다. 10년 살았는데, 10년 돌아보니까 후회가 되면, 앞으로 남은 세월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은 앞으로는 후회되는 생활 안해야 되는데, 그런데 인간이 부족해서 그게 참 어렵지만은 가다가 넘어질지라도 이런게 있습니다. 앉은뱅이 누운뱅이가 떼굴떼굴 굴러가도 가야 될 목적지 방향을 바로 정해놓고 굴러가면 굴러가는만큼, 달려가고 자동차 타고 비행기 타고 가는 사람하고는 비교도 못할만큼 느리더라도, 그래도 그 사람은 그방향으로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져서 가기는 그리 갑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가는 사람이 방향을 다른데 잡고 날아가면, 날아가면 날아갈수록 엉뚱한데로 가고, 목적지와는 반대 방향 더 멀어지지 가까워지지 않는 것은 상식이고 아는 이치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천국의 방향 정하지 않고, 구원의 방향 정하지 아니하고 이 세상에서 잘나면 잘난만큼 그 사람은 천국하고 멀어져버립니다. 불행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잘난 것이 신앙의 방향을 바로 잡으면 그만큼 사도바울처럼 유용하게 요긴하게 쓰여지고, 방향을 잘못 잡으면 많이 가질수록 똑똑할수록 뛰어날수록 그만큼 불행한 일이 되어진다는것을 깨닫기 때문에 백목사님께서 평생을 두고 인간지식을 반지식이론이라 할만큼 철저하게 그렇게 박살을 내버린겁니다. 인간 지식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까. 많이 공부하는 것 조심해라. 자식들 공부시키는 것 조심시켜라. 얼마나 참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당신이 그렇게 외쳐놨습니다, 설교록에다가. 이런걸 깨달아 알기 때문에. 차라리 무식해도, 몰라도 신앙의 방향을 바로잡아 그리가면 복이겠는데. 머리 좋고 똑똑하고 의지 강하고 실력있어서 많이 배워가지고 방향을 잘못 틀어버리면 그만큼 불행한 것이 되어지니까.
모세의 신앙을 통해서, 모세 어머니의 신앙도 우리가 배우고 자녀를 어떻게 길렀는가 그 신앙도 배우고 모세의 신앙 속에서 그 애굽 나라에 핵심부에서 40년을 살았는데, 그 애굽 나라 문물이 모세의 사상과 정신 속에 조금도 침입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거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서 그렇게 기르신 것이고, 모세 자기로서는 할 수 있는 것 다 했을 것이고. 오늘 이 땅에 세상에 살지만은, 우리는 이 세상 정신 사상 가치관 욕망이 내 머릿속에 사상에 들어왔으면 그게 바로 변질입니다. 신앙에 변질인 것은, 주일 어기는 게 변질이 아닙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술 먹고 타락하는게 변질 아닙니다. 그 정신 사상 속에, 신앙의 사상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게 세상을 향하고 있으면 그게 타락이고 변질입니다. 아무리 잘 믿어도, 아무리 기도 많이 하고 전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고 아무리 신앙 생활 잘해 자기를 바로해 말씀대로 사는 생활 한다 할지라도 그 신앙의 방향이 천국이 아니고, 하나님이 아니고, 구원이 아니고 이 세상으로 가고 있으면 그것 전부다 인본이고 타락 변질이고, 하나님의 일대 적이고 원수가 되고 마는 겁니다. 근본과 방향을 바로하는. 그래서 아브라함의 신앙 출발에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근본 소속과 방향을 바꾸라고 말씀을 하신 겁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이성이 있고 지성이 있고 양심이 있습니다. 배운 세상 지식도 있고 하나님 말씀의 지식도 있습니다. 넓게 크게 멀리까지 보면서 우리 자신 속에서 깊이 깊이 생각해서, 첫째, 인생의 방향을 바로 정하고, 두 번째는 신앙의 방향을 바로 정해서 우리의 인생이 신앙으로 향하고 그 신앙 생활이 하나님 뜻대로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소원하고 노려하는 우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출애굽기 2:1-15
자녀의 신앙이 부모에게 이어지고, 그중에서 어머니의 신앙, 모계로 신앙이 이어지는 것은 성경이고 일반적인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모세의 부모의 신앙중에서 특별히 어머니 신앙을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봐야 됩니다. 물론 부모가 함께 신앙생활 했고, 모세를 잘 숨겼고 잘 길렀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성경 전체적으로, 또 본문에 실제적으로 보면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쪽이 더 영향을 훨씬 더 크게 많이 미친다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이를 낳았고 낳았을 이 당시에 오전에 말씀드린대로 시대 상황이 애굽 나라의 식민지로써 그 나라 법을 안 따를 수가 없고 그래서 많은 히브리 사람이 자기 태로 난 그 남자 아들들을 나일강에 버려서 굉장히 많이 죽었다 그리 볼 수 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에서 나일강이 피가 되는 재앙을 내리신 것이 그런 원인이 있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 한 것은 그 아이를 살려둔 것이 발각되면 아이만 죽는게 아니고 아이도 죽고 가족들이 다 죽게 되니까 부득이하게 그리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주 나쁜 짓 중에서 가장 나쁜 짓이 바로 이런 짓이고, 애굽 사람들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참으로 사람으로써 못할 짓들을 한 겁니다. 세상에서 보면은 사람을 납치해다가 팔아먹는 인신매매범, 아주 죄 중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처벌을 강하게 해야 될 죄 중에 하나가 사람을 해치는 것, 사람을 잡아다가 팔아먹는 그런 것들은 할 수만 있으면 극형으로 다스려서 그런 짓은 사람의 탈을 쓰고는 못하게 만들어버려야 되는데 세상이 워낙 죄가 많고 그러다보니까 그런게 만연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아랍쪽에 그 사람들은 이슬람 국가를 지향하는 그 사람들은 지금도 사람을 잡아다가 수십억씩 받고 팔아먹는 그런 일이 아주 만연에 있지요. 예사로 그리 하고 있고 지금도, 21세기 지금 하늘 아래도 그렇게 자행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잡아다가 자기들 수단 방편을 위해서 예사로 사람을 죽이는 그런 경우가 허다하게 일어납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그렇습니다. 옛날엔 하물며 말할 것 없겠지요.
그래서 그런 시대 상황 속에 모세가 태어났으니까 대단히 어렵고 불행한 그런 시대에 태어났는데, 나아보니까 딸이면 기르면 되는데 아들이니까 갖다버려야 되는데, 모세의 아버지 어머니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라, 물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태에서 난 자식, 자기 피 자기 혈육의 자식을 갖다버린다는 것은 ‘차라리 내가 죽고 말지.’ 그런 마음일건데, 못할 짓인데도 그게 일반화가 되면 고통스럽지만은 사람들은 다 하게 되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면역성이란 것은 그 환경에 적응 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필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단히 두려운 그런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걸 잘 보고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 가장 중요하게 많이 말씀하신 것 중에 하나가 현실에 피동되지 말고 현실을 능동으로 다스리라는 것을 에덴동산에서부터 말씀을 하고, 우리 신앙생활에 평생을 두고 가장 중요하게 우리가 알고 있고, 또 실제 그리 해야 될 것이 현실에 피동되거나 현실에 종 되지 말고 현실을 내가 주인이 돼서 능동으로 다스려라 하는 겁니다. 그런 것이 다 환경이 그렇게 되어버리면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따라가는, 얼마전에도 많이 말씀 드린대로 시대의 조류, 그 시대의 흐름, 말하자면 유행이며 문화며 이런 것들인데 모든 사람이 다 동으로 가니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따라서 동쪽으로 휩쓸려 가버립니다. 동으로 우 가다가 모든 사람이 전부 서로 가니까 전부 서로 또 다 가버립니다. 너도 나도 전부다 자식들을 대학에 다 보내니까 그 자녀의 적성이라든지 머리라든지 앞날의 미래는 상관없이 무조건 대학을 빚을 내고 집을 팔아서라도 보내는 겁니다. 그게 우리 나라 사람들의 특성입니다. 결혼식을 두고도 신문에 많이 나지만은 외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보면은 도무지 이해를 못하는 것 중에 하나가 결혼식이라 그러지요. 결혼식 하면은 엄청난, 하루 결혼식 하는데 남는 것은 사진 찍는 것인데 사진 남는 것이고 한번 우리 결혼식을 이렇게 했다는 과시하는 그게 전부인데 거기 들어가는 비용을 많게는 1억을 넘게 들이고, 보통 4-5천만원씩 들이고 적게 들이면 2-3천만원씩 들이는게 우리나라 일반 결혼하는 모습이라 그럽니다. 참 보통 병폐가 아니지요. 사람들의 머리를 완전히 바꿔버려야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봅니다. 왜 그런짓을 하는지 선진국 사람들이 와서 보면은 혀를 내두르고 도무지 이해를 못한다 그럽니다. 저같은 사람의 머리로도 왜 그렇게 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그런데 사회 생활 하면서 그 시대 흐름 조류 속에 들어가서 사는 사람들은 그것이 당연한 것이고, 모두 다 그리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하는 겁니다. 자기 주관이 없는 겁니다. 현실에 피동되어서 무조건 따라가는 겁니다. 그리하면 어떤 손익이 되는지, 손익 계산도 따져보고 남는게 무엇인지, 허비가 무엇인지, 그리하므로 어떤 게 유익되며 어떤게 해가 되는지 다 따져가지고 정말 그렇게 할 필요가 있으면 그렇게 하면 되는데 계산 없이 남이 하니까 그렇게 한 다음에는 후회하고, 빚을 내서 했으니까 허리가 휘어지고 온갖 부작용들이 다 생겨지는데, 비단 그것뿐이 아니고 자녀 교육이라든지 또 주거환경이라든지 취미생활이든지 자기 생활 전부다가 다 그런 면으로 다 되고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가 그런 시대의 흐름이나 조류를 따라가면 별 수 없는 세상 사람들이고 그들과 같이 되는 겁니다.
모세의 부모가 그 어려운, 그거는 흐름이라 하기는 어렵겠지만은, 그래도 법으로 눌러서, 나라의 법이란 것은 대단히 무서운 겁니다. 법에 직접적인 제재를 받지 아니하고 영향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별로 모릅니다. 일반 서민들이야 법하고 직접 부딪힐 일이 없쟎습니까. 그런데 사업을 조금 크게 해서 세금과 관련된 그런 일을 본격적으로 그런 서류 처리를 해야 되는 사람들, 또 나라의 공무와 관련된 그런 일을 직접적으로 하는 사람들, 또 어떤 일이 생겨서 경찰서나 검찰에서 소환 통보 한번 받아본 사람들은 법의 위력을 실감을 합니다. 그만 보통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게 알고보면 아무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영향을 크게 받는 것인데, 이때 지금 애굽 나라 법으로 정해져 있다 말이지요. 바로의 말이 법이고 그리 되있으니까. 그러니까 과거 일제 시대때 조선 나라 말을 쓰면은 일본 사람들이 잡아다가 감옥에 가둬버리고 한국 말을 못 쓰게 한 것처럼. 한복을 못 입게 하고 머리 다 잘라버리고 한국나라 성을 못쓰게 하고 전부 창시 개명을 해서 일본 이름으로 다 바꾸게 만들었던 것처럼 그렇게 더 강해서 이때 애굽 사람들은 유대인들에 대해서 남아를 낳으면은 무조건 없애 버려라 이게 애굽나라의 법입니다. 아주 잔악한 그런 잔인한 법인데, 안 따를 수가 없는데, 안 따르면 다 죽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모세의 부모는 그 바로 왕보다 애굽 나라의 무시무시한 법보다 하나님이 더 두려워서 혈육의 정으로 갖다버리지 않았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더 두려워서 그래서 본문에는 그 준수함을 보고 그렇게 해놨는데 그 준수함이라는게 그렇게까지 해석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은, 하나님의 종들을 통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과 가나안 소망이 그들에게 평생을 머릿속에 자리 잡고 소망으로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를 보내서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여기서 구출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지 모르는 그런 면에 있기 때문에, 과거 유대인들 여인들로써는 아들 낳으면 여인의 후손으로 메시야 구주가 난다고 약속하셨으니까 여인들로써는 자기 몸에서 메시야가 날지 모르니까 그게 일편단심 소망이고 그래서 아들 낳는게 그렇게 기다렸고 자랑스럽게 되어졌던 것처럼, 그러니까 아이를 낳아보니까 준수해서 이 아이가 혹시 이 나라의 인도자, 구출자가 될 것인가 그런 믿음의 소망을 가지고 그랬다고 해석을 한다면 지나친 해석이 될까요? 결과적으로 그리 됐는데. 모세 어머니 신앙으로써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준수함을 보고 하나님이 두려워서 애굽 나라 바로보다도, 나라의 법 보다도, 무시무시한 그 권력의 두려움 보다도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 아이를 갖다버리지 못하고 몰래 몰래 길렀다 그말이지요. 기를때 그때 가족이 다 합심해서 하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한 사람만 겁을 집어먹고 갖다 찔러도 안되는거니까. 그래서 그 부모가 아이를 잘 기른 그런 신앙.
그다음에 3개월이 지나고 난 다음에 더 이상 기를수가 없으니까, 발각이 되면 다 죽으니까 하는 수 없이 아이를 갖다 버리기는 갖다 버리되,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갈대를 베다가 상자를 만들고 그 상자 안에 역청과 나무 진을 가지고 물 새어 들어가지 않도록 방수처리를 해서 아이를 안에 넣고 덮어가지고 누군가 보면 정이 딱 들도록, 데려가고 싶도록 그렇게 했겠지요. 그래가지고 살짝 띄어놓고, 갈대 사이에 띄어났으니까 함부로 막 둥둥 떠내려가진 않을 것 아닙니까, 걸리고. 그렇게 해놓고 미리암이 나이가 아마 그리 많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미리암이 멀리서 딱 지켜보고 있고. 마침 바로의 공주가 와서 거닐다가 목욕하러 왔다가 상자를 보고 가져다가 아이를 보고 데려다 기르게 되는 이런 과정들. 그래서 모세의 부모가 석달 동안 기른 것도, 그다음 석달 동안 기르고 난 다음에 아이를 버리기는 버렸으되 그 처리한 그 과정 과정을 보면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범위까지는 다 했다 그말이지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선까지 가서 더 이상 할 수 없는데까지 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다 맡겨놓고 그러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선까지 다 하고 난 다음에 그렇게 해놓으니까 그다음부턴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마침 그때 바로의 공주를 목욕하러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고, 목욕하러 보내되 하필 그 상자 근처로 보내셨고, 상자가 있어도 그냥 예사로 지내보낼건데 ‘저게 뭐지?’ 하고 마음에 호기심을 일으키신 것도 하나님이시고, 아이를 보고 불쌍히 여긴 것도 히브리 사람의 아이인줄 알고 불쌍히 여겨서 ‘내가 데려가야겠다.’고 마음을 감동시키신 분도 하나님이고. 사람이 할 수 있는데까지 다 했을때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그렇게 처리를 하신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니까 미리암이 지혜롭게 얼른 쫒아가서 ‘내가 이 아이를 위해서 유모를 불러올까요?’ 공주가 그때 결혼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이가 없으니까 젖을 먹여야 되니까 ‘유모를 불러올까요?’ ‘가라.’ 그래서 얼른 가서 아이 어머니를 데려왔지만은 공주가 아이 어머니인지 유모인지 알 수 없잖습니까. 그래서 그 모세는 자기 친어머니 품에서 친어머니 젖을 먹고, 공주가 볼때는 유모고 그렇지만은 실상은 그런, 그런 환경으로 자랐는데 그렇게 자랄 때 어머니 요게벳이 품에 안고 젖을 먹이면서, 또 잠을 재우면서, 안고 다니면서, 업고 다니면서 몇 년이 될런지 모르겠지만은 젖 뗄 때 까지 그렇게 길지 않은 세월이지만은 얼마나 간절하게 간곡하게 그 아이에게 믿음을 심어 넣어 주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 기억할 것이, 늘 말씀드리는 대로 자녀의 신앙은 부모 신앙의 표시판입니다. 안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예외적인 경우도. 그러나 보편적으로 일반적으로는 자녀의 신앙은 부모 신앙의 표시판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보고 정죄할 수는 없어도 우리가 원칙으로 두고 볼때, 신앙생활 잘하는 그런 어린 자녀들 볼때 그 부모의 신앙을 생각해 볼 수 있고 그러지 않을때 또 다시 생각해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모되고 또 조상 선조되고 선배된 우리들 입장에서는 나의 자녀들 후손들 후배들 그들의 신앙의 모습이 바로 나에게서 나갔다는 것을 이거는 진리라 생각을 하고 절대 불변의 진리라 생각을 하고 자기를 늘 살피고 돌아봐야 됩니다. 그래서 내 자녀가, 내 후손들이, 내 후배가 믿음생활을 잘하고 좋으면 하나님의 참 은혜라 감사하고, 잘못되고 있으면 ‘나의 어느 부분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자녀, 이런 후손을 주셔서 나를 돌아보게 하시는가’를 생각을 하고 쉬지 않고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성경적으로 옳은 겁니다.
가인과 아벨이 누구 아들입니까? 가인과 아벨이 누구 아들입니까? 가인의 아버지는 따로 있고, 아벨의 아비가 따로 있습니까? 가인은 만고의 저주 받은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지 않습니까? 그 인물이 아버지가 누굽니까? 아담입니다. 아벨은 만고에 다시 없는 의인입니다. 그 아버지는 누굽니까? 그 아버지도 아담입니다. 왜 꼭 같은 아담 하와에게, 선악과 따먹고 범죄하고 타락해서 모든 인류를 전부 멸망에 빠트린 그 아담 하와의 자손 속에서 가인이 나오고 아벨이 나왔냐 그말이지요. 가인만 나왔으면 몹쓸 인간들이라 그러겠는데, 아담 하와에게 가인의 요소뿐이 아니고 아벨의 요소도 그들에게 있었다는 겁니다. 아벨의 요소도 그들에게 있고, 반대로 가인의 요소도 그들에게 있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살펴봐야 됩니다. 모든 사람의 허리에서, 그래서 아담의 허리에 죄인도 들었고 의인도 들었고 모든 왕들이 다 들어있었다 그러는 겁니다.
유다 나라 왕 중에서 아주 악한 그런 왕들이 많이 났는데, 이스라엘도 그랬지만은, 그 악한 왕들, 그 왕들은 올라가면 누구 자손이냐? 다윗의 자손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도 악한 왕도 났고, 믿음의 조상 이삭의 아들 중에서 야곱도 났지만은 에서도 나왔습니다. 그런 걸 보고, 나의 자손들 나의 자녀들에게서 그 신앙들을 볼때 내 속에 이런 면도 있고 이런 면도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이란 것을 살펴봐야 됩니다.
그래서 어머니 요게벳이 모세를 안고 젖을 먹일 때, 그를 가르칠 때 그때 그냥 입에 발린 말로 그냥 흥얼 흥얼 흥얼 그렇게 했을 것인가? 그 어린 모세 머릿속에, 정신 속에, 사상 속에 평생을 그를 끌고 가는 그 신앙의 사상과 신앙의 정신과 신앙의 길이, 어릴 때, 젖먹이 때, 안고 잠 재울때, 업고 다닐 그 때 어머니 요게벳의 그 입에서, 그 마음 속에서 그 모세 속에 다 들어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어머니가 어떤 심정으로, 어떤 정신으로, 어떤 태도로 그 아이에게 말을 하고 주입을 시켰을 것인가? 얼마나 간절하게 그렇게 했을까? 말로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지요. 말이야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실질적으로 모세 어머니 신앙은 참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고 이스라엘의 구원과 가나안 소망이 누구보다도 뜨거웠던 그런 간절함이 그 속에 있었다고 그가 낳은 아들 모세의 맺어진 결과를 보고 우리는 짐작해볼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것이 토대가 되었고, 그게 그 속에 기초가 되어가지고 거기서 자라나온 믿음이 그런 결과를 맺었던 겁니다.
설교할 때, 백목사님 생전에 어떤 분이 설교하면 백목사님 설교를 필기해서 받아가지고 그대로 설교를 하는데 목사님께서 칭찬을 굉장히 잘 하십니다. ‘나보다 낫다.’ 그렇게 하시는 분이 있고, 어떤 사람은 토시하나 안 빠트리고 꼭 그대로 같이 설교하는데 대단히 꾸중을 많이 하십니다. ‘너는 인본이다.’ 그러고, ‘니가 앵무새냐?’ 그럽니다. 왜 꼭 같은, 두 사람이 꼭 같은 내용을 가지고 같이 설교하는데, 한 사람은 목사님 당신보다 칭찬으로 낫다 하시고, 한 사람은 너는 앵무새다, 녹음기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가? 그 설교하는 그 사람 속에 신앙의 정신과 중심과 사상을 아시기 때문에 목사님께서 그렇게 그 사람을 알고 그리 책망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모르면, 그 사람의 언행심사와 모든 사리판단을 바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얼마전에 그걸 공부했지요. 신앙이란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고 자기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사람을 아는게 중요한데, 사울이 하나님 몰랐고 자기 모르니까 사람을 몰랐고, 사람을 모르니까 사람을 모를 수 밖에 없고 결국은 완전히 실패자가 되고 말았던 것처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머니 요게벳의 신앙을 여기서 깊이 생각해보고 오늘 우리들도 우리가 맡은 그런 혈육의 자녀들, 또 모든 신앙의 자녀들 후배들에게 이런 정신과 사상으로 교육을 시켜 양육해나가는 그런 우리들이 되어야 되겠다.
그래서 믿음 세계 안에서 실력이란 것은 별 실력이 없습니다. 알고 보면은, 사람이 굉장히 일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많이 할 수 있도록 그런 분량을 주셨으면 많이 할 수 있는 것이고, 아무리 하고 싶어도 안 주셨으면 안 하는 것인데, 자기 받은 분량 할 수 있는 것만 다 하면 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는 것인데, 아무리 사람이 일을 많이 했다 그래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그 일은 일이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거 뭐, 단정적으로 말은 못하겠지만은, 순복음 교회 조형기 목사님은 세계 제일가는 그런 교회를 만들었고, 세계적으로 수많은 그런 사람을 전도해서 믿는 사람을 만들었는데 거기 하나님께서 어디까지 그와 함께 하셔서 어디까지 그 일을 하셨는지 모르겠으나 오늘날 되어지는 본인과 그 교회 모습들을 볼때 그거는 하나님의 역사와는 좀 거리가 있지 않았는가 그렇게 우리가 생각할 수 있고, 그리 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일은 세계적으로 그렇게 뛰어나게 많이 했지만은 깊이 들어가보면 과연 그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일이었던가? 하나님께서 정말 깊은 속속들이 하나님의 뜻과 맞아서 하셨던가를 생각해보면, 성경적으로 연결시켜 보면 의문이 안 생길수가 없고 백목사님은 거기 비하면 숫자적으로 말하면 얼마 안되는 것 같아도 그분이 한 것은 껍데기가 별로 없는 거의 알찬 그대로, 하나님이 과연 곳곳마다 사건 사건마다 전체적으로 함께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할만큼 그런 역사가 있었던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이거는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이 아니고, 객관 역사로 살펴봐도, 소이 말하는 통계로 가지고 살펴봐도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들로써는 할 수 있는대로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주신 그런 자녀들 후손들 후배들에 대해서 어떤 정신과 중심과 사상, 어떤 자세로 그들을 가르치고 인도해야 되겠는가 그리 될 때는 자기 자신이 된 것만큼 되지, 그러기 때문에 신앙이란 것은 내 구원이, 자기 구원이 가장 먼저고 우선이란 것은 내가 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만드는 수는 이 세상에는 있어도 기독교 신앙 세계안에는 없는 것이고, 그래서 교역자와 교회 비밀을 말씀하신 것이고, 그래서 교인들은 자기들은 밥을 굶어도 교역자는 먹이는게 맞고, 교인들은 헐벗어도 교역자는 입혀야 되고 자기들 자식들 기도 못해도 교역자와 교역자의 가정 위해서는 기도하는게 성경적으로 우선순위로 옳은 겁니다. 그게 복 받는 일이고. 그것이 교역자를 위한 것인 동시에 그게 바로 자기와 가정과 자손들을 위한 그런 진정한 길이 되어진다 그말이지요. 참된 교역자는 반대로 들어가보면 자기와 가정 위해서는 기도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모두 교인들 위해서만 기도하지. 그것이 성경적으로 그리 되는 것은 교역자가 교회 머리니까 교역자가 바로 되지 않으면 교인들이 그 교역자를 넘어설 수가 없기 때문에 그리 되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에. 여러 가지 깊이 많이 생각을 해야 되고, 신앙세계라는 것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백목사님의 신앙세계는 일반 사람들이 알기에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닙니다. 그 깊은 속에 얼마나 많고 깊은 것이 들어있는지 모릅니다.
어머니 신앙, 부모 신앙 중에서 어머니 신앙을 좀 생각해보시고, 그다음 두 번째는 모세의 신앙에서 어릴적에 어머니로부터 배운, 그래서 받아들이는 모든 지식과 신앙이 그 속에 토대가 되어가지고 그게 기초가 되어서 자랐는데 그것을 믿음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바로의 궁에서 모세가 먹고 입고 자고 거기서 교육받고 자랐지만은 결과적으로 볼때 모세는 애굽나라의 모든 언어와 학문과 문화를 전부다 배웠지만은 결과적으로 보니까 모세는 거기에 조금도 동화되지 아니하고 애굽화 되지를 않았습니다. 알기는 알았고, 애굽 나라의 언어도 모든 학문도 문화도 역사도 모든 걸 알기는 알았지만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이용물로만 가졌지 모세 자신이 ‘애굽 나라 역사는 참 전통있다. 유구한 역사로구나. 또 이 나라는 참 크구나. 토대가 튼튼하구나. 과연 이 나라에 내 평생 바칠만 하구나.’ 그런 자기의 어떠한 것을 그 애굽 나라에 마음이라든지, 자기 중심이라든지, 자기 진심을 애굽 나라에 조금도 주지를 않았습니다. 마음을 주지 않았다 그말이지요. 바로의 공주와 바로 왕은 모세를 길러서 그 나라의 후계를 세워서 튼튼한 나라를 만들어보고 싶었겠지만은 그러나 모세는 거기 대해서 눈꼽만큼도 동화되지 아니하고 영향 받지를 않았단 것을 결과적으로 봐서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나타났을때, 그러니까 애굽 나라에 조금도 피동되거나 영향 받지 않은 상태에서 그 속에는 순전히 어머니께 배운 그 하나님을 향한 그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래서 하나님을 알았으니까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순종하는 그 생활, 아마 안봐도 애굽나라 살면서 애굽 나라 안에서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죄 되는 그런 일은 모세가 하지를 않았을 겁니다, 하나도. 어떻게든 피하고 이겨냈지. 그런데 그들은 잘 몰랐을 것이고, 의문은 가졌는지 모르겠지만은. 그리된 상태, 그러니까 참 부귀 영화를 누리고 비단 융이불자리 깔고자고 고량진미를 먹고 그리 했지만은 모세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고, 기회만 노리고 있고 마음 속에 늘, 그러니까 몸과 마음이 따로 있다는 말처럼, 몸은 바로의 궁 핵심부 안에 있었지만은, 그의 마음은 늘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고 그들 구출하는 거기 다 있었지 마음까지 거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말입니다.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마침 그런 일이 있으니까 그만 견디지 못해서, 결과적으로 그 일은 실패했지만은 견디지 못해서 복수를 하고 탄로가 나서 도망을 쳤는데 그때 바로가 모세를 죽이려 한 것은 아마 안봐도 바로가 모세에 대해서 의문은 많이 가졌을 겁니다. ‘저게 보니까 호랑이 새끼인지, 고양이 새끼인지 모르겠다’ 의문을 가지고 저게 과연 오랜 세월 몇 십년을 가르치고 길렀으니까 전부 애굽 안에서 애굽 나라 궁안에 핵심부 안에서, 그 환경, 사람이란 것이 10년이면 뭐가 변합니까?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강산이 변하는 게 쉽습니까? 사람 변하는게 쉽습니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그말은, 사람은 그보다 열 번도 더 변한다 그뜻입니다. 그런데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40년을 길렀으니까 ‘모세가 아무리 히브리 사람이고 유대인이라 그래도 이만큼 가르쳤고 이만큼 먹였고 입혔고, 이만큼 환경이 되어있으니까 이 속에 있으니까 이제는 애굽화 되었을 것이다’ 그런 기대가 많이 있었을 것이고, 그러나 똑똑한 사람들이니까 한편으로는 눈 여겨 보면서 ‘그래도 저 종자가 다르니까’ 하고 그렇게 보고 있었을 것인데, 사건이 딱 터지고 보니까 ‘과연 저놈은 될 줄 알았는데 아니로구나. 무늬는 애굽인데 속은 전부 유대인이고 히브리 족속이로구나. 안되는구나.’ 그래서 살려놨다가는 애굽 나라 덜어먹을 그런 인물이니까 죽이려고 찾은 것은 틀림이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모세라는 사람이 말하자면은, 애굽 나라에 살았는데 종자는 애굽 종자가 아니었다 그말이지요. 히브리 종자고 하나님 백성의 종자지. 예수 믿는 사람의 신앙이,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 사는 것이 모세처럼 이렇게 되어져야 됩니다. 그래서 모세의 신앙이 위대한 것은 어릴때 어머니로부터 받은 그 모든 교훈과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 역사, 하나님 백성에 대한 그런 자부심과 또 그들 구출해야 되는 그런 사명감과 가나안 땅에 인도해야 되는 소망과 하나님 백성의 나라 건설의 그 소망, 이런 소망이 모세가 평생토록 애굽이라는 그 환경 속에 살면서 변하지를 않았다는 거지요, 그렇게. 사람이 자꾸 말을 듣다 보면은 자기도 모르게 사람이 세뇌가 되고 변하는 것인데, 서울 가면 변하고 미국 가면 변하고, 이 지방 가면 변하고. 어떤 경상도 사람이 주관이 뚜렷해서 서울에 가도 10년, 20년 지나도 말투가 안 쓰고, 한 30년 지나도 그대로 경상도 말투가 튀어나오더라 그말이지요. 그런데 한 40년쯤 지나고나니까 이제 반반이 섞입디다, 보니까. 서울 말씨하고 경상도 말씨하고 섞여 나오더만요, 보니까. 40년 지나고 나니까 그리 되는데, 아무리 안변해도 변할 수 있는게 사람인데. 사람의 생각도 욕망도 가치관도 정신도 사상도 변할 수 있는게 사람인데, 모세는 그 애굽나라 가장 핵심부 안에 들어있으면서도, 중심에 있었지만은 모세는 그 하나님을 향한 그 신앙, 사상이, 정신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애굽 나라가 모세 머릿속에 전혀 물들지 않았으니까 이게 얼마나 위대한 신앙인지 한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애굽 나라 오늘로 말하면 무엇입니까? 애굽은 오늘로 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바로 애굽 나라의 중심으로 살고 있던 모세와 같은 입장인데,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이 세상 속에 한 가운데 살고 있으나 우리들의 정신과 사상과 가치관과 욕망 속에 이 세상이 내 머릿 속에, 정신 속에, 사상 속에, 가치관 속에, 욕망 속에, 인생관 속에 들어와가지고 나의 인생관이 이 세상을 향하고 이 세상의 어떤 것을 향하고 나의 가치관이, 목적이, 그리 향한 그런 사상으로 내 정신이 변질되었다면 예수 믿는 사람으로 변질이 된 사람입니다. 사람이란 건 다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다 다르고, 실력도 다르고, 겉모습도 다르고 다 다릅니다. 그러니까 어떤 모습으로 그 사람이 외부로 나타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사람, 말하자면은, 미운 오리 새끼는 결국에 마지막에 성공을 하지요? 미운 오리였는데 나중에 길러보니까 뭐가 됐던가요? 백조가 됐습니까? 오리하고 백조는 차원이 다른가보지요. 그러니까 오리인줄 알고 길렀는데, 백조였다. 어릴때는 몰라도 이 세상에 살 때 어릴때는 잘 모르고 또 자라가는 과정에도 잘 모르고, 철 없어 잘 모를때는 몰라도 나이가 들고 신앙이 들고 옳은 교훈을 점점 배우고 그리고 난 다음에 자기 주관과 자기 자유 의지와 이걸 가지고 인생관의 방향을 정할 때 따져보고 생각해보면, 이 교훈을 받지 못한 사람들, 이 교훈과 교리, 이 노선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할 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성경을 보고 따져보면 할 말이 없을 것인데. 더구나 이 교훈, 이 노선, 이 교리, 이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핑계대지를 못할 겁니다. 하나 핑계 되는 방법은, 우리 교인들 같으면 핑계 댈 수 있을 겁니다. ‘목사님이 영감이 없어서. 능력이 없으니까 그랬습니다.’ 그러면 이제 저도 할 말은 없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거기 대해서 좀 감안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훈 자체는, 노선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러면 또 할 말이 없을 겁니다. 이걸 가지고 자기가 자기의 주관과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자기 이성과 지성 가지고 인생관에 방향을 정할 때 따져보면 이 세상에 사니까 학생으로써, 가정주부로써, 가장으로써, 또 직업 가진 직장인으로써, 사업가로써, 거기서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해야 되니까 시간도 없고 바쁘고 그래서 하루 종일 가도 성경 한 장 못 읽고 기도할 시간 없고 예배도 더러더러 빠지고 시간이 없어 정신 없는 그런 생활을 할지라도, 그런 신앙 생활 하면서 하나님 앞에 늘 죄송한 마음을 가질지라도, 그래도 그 마음 속에 ‘나는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닌데. 나의 소망은 천국이고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백성인데. 내가 세상 속에 빠져서 이렇게 살고 있구나.’ 그 마음 속 깊은 속에 탄식을 가지고 언젠가 이 세상에 종노릇 하고 세상에 빠져 정신없는 이 생활에서 벗어나서 신앙으로 자유하는 그런 사람이, 그런 환경이 만들어질 것인가를 늘 소망하고 기도하고 애를 쓰는 그런 자세를 가지는 그게 예수 믿는 사람이고 바른 신앙 정신을 가진 사람이지. 그냥 자기 현실 거기에 안주하면서,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오전에 이것도 말씀드린대로, 모래 한 알은 모래 한 알만큼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습니다. 돌맹이 하나도 돌맹이 하나만큼의 가치가 있고, 금은 금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돈은 그 액수만큼의 가치가 있고 그 가치만큼의 이 세상의 역할을 하는 것이 세상의 모든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면 그만큼 수입이 될 것이고, 기술 연마하면 그런 기술의 실력 있는 사람이 될 것이고, 사람을 잘 사겨놓으면 인성으로 쌓아서 자기 배경이 될 수 있을 것이고, 공부를 많이 하면 그 공부가 자기의 지식이 되고 실력이 돼서 그런 실력 있는 사람이 될 것이고. 그런 걸 쌓아두면 그것이 살아가는데 여러 가지로 편리하게, 유용하게, 효력있게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냐? 그게 끝이냐? 그게 인생 끝이냐? 인생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고, 그 너머는 없느냐 그러면 안 믿는 사람과 같은 것이고, 그 너머를 계산해서 이렇게 살아가지고 내가 나이가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되고 늙어서 주님 앞에 서는 그날이 올 것이고, 마지막에 죽은 다음에 무궁 세계에 가서 주님 심판 앞에 드러날 것이고 그렇게 될 것인데, 그때까지 연결시켜 볼때에 과연 내가 지금 달려가는 이 방향이, 내가 인생의 목표로 방향으로 정해놓은 이 목표 방향이 옳은 것이며, 큰 것이며, 가치있는 것이며 귀한 것인가를 생각해보고 오늘을 가야 됩니다. 오늘을 살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길을 가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디로 향해서 가느냐, 어디를 갈 것인가? 내가 달음질 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지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친 것 같지 아니하여 예수 믿는 사람은 첫째 정할 것이 인생의 방향을 바로 정해야 됩니다. 내 평생 인생살이를 어디를 향해서 나아갈 것인가? 과정 과정 방법은 여러 형태가 있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갈 때 목적지는 바다 건너편입니다. 바다 건너편인데, 그때는 배를 타고 노를 저어서 가는 그 방편으로 갔습니다. 배 타고 노 젓는 방편으로 가지만은, 목적지는 주님이 가라고 하신 바다 건너편으로 가는 것처럼, 이 세상에 믿는 사람이 살아가는 방편와 모습은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게 어떤 사람은 뛰어나고 많고 적고 여러 그런 형태 있지만은 어쨌든 우리 목적지는 하나, 천국을 향해야 되고 하나님을 향하고 구원을 향해 가야 되지, 이것이 아닌 인생의 목적지가 바로 되어졌다면 그것이 가는 과정, 방편이 좋아도 화려해도 영광스러워도, 모든 사람이 다 부러워해도, 뛰어나도 그만큼의 가치는 있는데 그 안에서 끝나고 마는 겁니다. 첫불을 켜면 그 촛불이 뜨거움도 있고 그 촛불에 밝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초가 다 꺼지고 나면 촛불은 꺼지고 녹아 없어지고 마는 겁니다, 그거는. 그걸로 끝입니다. 하늘의 태양은 물질계 있을때 까지는 계속 있겠지요. 이 세상에 모든 것은 그렇습니다. 권력을 잡아도, 경제를 잡아도, 실력을 쌓아도, 지식을 습득해도, 어떤 학벌을 장만해도 무엇을 가져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체로는 그만큼 힘이 있고, 효력이 있습니다. 무조건 쓸모없다는 것이 아니고, 가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것뿐이라면, 그 속에 다른 것이 없다면, 모세가 세상 애굽 나라에 모든 언어와 학술을 다 습득을 하고 능하게 다 가져서 아무도 모세를 따라갈 수 없을만큼 애굽 나라 모든 것 다 가졌어도 모세는 그것을 가치로 두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활용을 해서 바로를 상대하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통치하는데 상대하고, 이스라엘을 하나님 뜻대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가는 거기에 이용해먹었고 써먹었지, 애굽 나라 자체에 가치나 소망이나 욕망을 두고 거기 조금도 마음을 두지를 않았습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의 이 세상에서 가져야 될 정상적인 바른 자세라 그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원래부터 세상을 만드실 때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이거는 우리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에덴동산이고. 이 세상을 만드신 목적은 천국 건설을 위한 것이고, 사람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세상 사는 동안에 세상에서 천국 배우고 하나님 배우고 구원에 모든 것 배워가지고 주시는 그 현실 현실 속에서 하나님 말씀 인도를 따라서 입은 대속을 벗지 않고 지키는 생활하므로 자기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가는 그 생활이 가장 가치있는 것이고, 거기에 써먹고 필요한 모든 것들이 세상의 전부라. 그러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 전부다 배설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고. 그 세상 그 자체로 가치를 둔다면 안 믿는 사람들이 가치가지는 것이지, 믿는 사람들이 가질 것은 아니라 그말이지요.
깊이 좀 생각해보십시다. 후회라는 말은, 후회, 후회라는 그 ‘후’자가 무슨 ‘후’자 입니까? ‘뒤 후’자, ‘뉘우칠 회’자 겠지요. 지나가고 난 다음에,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겁니다. 외양간을 소를 잃고 난 다음에 또 소를 사서 기를꺼니까 소를 잃어버리고도 외양간은 고치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두 번이 없으니까, 지나간 세월,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그 기간 안에 모든 것 끝내야 됩니다. 10년 살았는데, 10년 돌아보니까 후회가 되면, 앞으로 남은 세월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은 앞으로는 후회되는 생활 안해야 되는데, 그런데 인간이 부족해서 그게 참 어렵지만은 가다가 넘어질지라도 이런게 있습니다. 앉은뱅이 누운뱅이가 떼굴떼굴 굴러가도 가야 될 목적지 방향을 바로 정해놓고 굴러가면 굴러가는만큼, 달려가고 자동차 타고 비행기 타고 가는 사람하고는 비교도 못할만큼 느리더라도, 그래도 그 사람은 그방향으로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져서 가기는 그리 갑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가는 사람이 방향을 다른데 잡고 날아가면, 날아가면 날아갈수록 엉뚱한데로 가고, 목적지와는 반대 방향 더 멀어지지 가까워지지 않는 것은 상식이고 아는 이치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천국의 방향 정하지 않고, 구원의 방향 정하지 아니하고 이 세상에서 잘나면 잘난만큼 그 사람은 천국하고 멀어져버립니다. 불행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잘난 것이 신앙의 방향을 바로 잡으면 그만큼 사도바울처럼 유용하게 요긴하게 쓰여지고, 방향을 잘못 잡으면 많이 가질수록 똑똑할수록 뛰어날수록 그만큼 불행한 일이 되어진다는것을 깨닫기 때문에 백목사님께서 평생을 두고 인간지식을 반지식이론이라 할만큼 철저하게 그렇게 박살을 내버린겁니다. 인간 지식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까. 많이 공부하는 것 조심해라. 자식들 공부시키는 것 조심시켜라. 얼마나 참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당신이 그렇게 외쳐놨습니다, 설교록에다가. 이런걸 깨달아 알기 때문에. 차라리 무식해도, 몰라도 신앙의 방향을 바로잡아 그리가면 복이겠는데. 머리 좋고 똑똑하고 의지 강하고 실력있어서 많이 배워가지고 방향을 잘못 틀어버리면 그만큼 불행한 것이 되어지니까.
모세의 신앙을 통해서, 모세 어머니의 신앙도 우리가 배우고 자녀를 어떻게 길렀는가 그 신앙도 배우고 모세의 신앙 속에서 그 애굽 나라에 핵심부에서 40년을 살았는데, 그 애굽 나라 문물이 모세의 사상과 정신 속에 조금도 침입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거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서 그렇게 기르신 것이고, 모세 자기로서는 할 수 있는 것 다 했을 것이고. 오늘 이 땅에 세상에 살지만은, 우리는 이 세상 정신 사상 가치관 욕망이 내 머릿속에 사상에 들어왔으면 그게 바로 변질입니다. 신앙에 변질인 것은, 주일 어기는 게 변질이 아닙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술 먹고 타락하는게 변질 아닙니다. 그 정신 사상 속에, 신앙의 사상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게 세상을 향하고 있으면 그게 타락이고 변질입니다. 아무리 잘 믿어도, 아무리 기도 많이 하고 전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고 아무리 신앙 생활 잘해 자기를 바로해 말씀대로 사는 생활 한다 할지라도 그 신앙의 방향이 천국이 아니고, 하나님이 아니고, 구원이 아니고 이 세상으로 가고 있으면 그것 전부다 인본이고 타락 변질이고, 하나님의 일대 적이고 원수가 되고 마는 겁니다. 근본과 방향을 바로하는. 그래서 아브라함의 신앙 출발에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근본 소속과 방향을 바꾸라고 말씀을 하신 겁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이성이 있고 지성이 있고 양심이 있습니다. 배운 세상 지식도 있고 하나님 말씀의 지식도 있습니다. 넓게 크게 멀리까지 보면서 우리 자신 속에서 깊이 깊이 생각해서, 첫째, 인생의 방향을 바로 정하고, 두 번째는 신앙의 방향을 바로 정해서 우리의 인생이 신앙으로 향하고 그 신앙 생활이 하나님 뜻대로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소원하고 노려하는 우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