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주후(약1:12-18)
모든 시험의 원인은 욕심2014-10-27조회 309추천 25
20141027 주후
야고보서 1:12-18
무선마이크를 몇주전에 주일학교 찬송인도때 좀 끊어져서 밧데리를 바꿨는데 아마 그게 잘못된 것 같습니다. 000 선생님이 좀 확인하시고 살펴주시면 좋겠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여러 가지 표현들은 세상에서 쓰는 그런 단어라던지 표현과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상식으로 알아야 되겠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구원의 도리로 주신 말씀이고, 우리에게 도덕이라던지 윤리라던지 세상 상식을 가르치는 말씀이 아닙니다. 국어 교과서도 아니고 또 역사 교과서도 아니고 도덕 교과서는 더욱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여러 가지 표현들 단어들을 볼때는 그 의미를 하나님과 연결시켜봐야 되고 또 하나님의 구원역사와 연결시켜서 생각을 해야 됩니다. 성경에 보면 잠시라는 그런 말들이 종종 나옵니다. 잠시고 나그네고 하룻밤이고 이런 표현들이 나오는데 그거는 사람의 한평생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한평생을 잠시라. 한평생이면 80년, 요즘으로 말하면 길면 90년까지 되는데 그 세월이 대단히 길지만은 그 긴 세월을, 한평생의 긴 세월을 잠시라 잠깐이라 임시라 일시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영원에 비해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영원한 시간이 우리 시간이기 때문에 그 영원에 비하면 지금 있는 시간은 잠시 밖에 되지를 않는 겁니다. 모든 것은 다 상대적인 그런게 세상에서도 있습니다. 또 지극히 작은 것이라는 그런 표현들, 사소한 것이라는 그런 표현들, 불의의 것이라는 그런 것들도 그게 다 무궁세계를 대비해서 이 세상 것을 표현해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영원에 비하면 이 세상에 천년의 세월이 짧은 것이고 영원에 비하면 세상이 비록 만년까지 간다해도 짧은 세월이고 또 무궁세계 무한한 세계에 비하면 이 세상의 우주를 다 합해도 무궁세계에 비하면 그거는 작은 것일수밖에 없는데, 하물며 우리 사람들의 가진 소유라던지 자기 마련한 어떤 지식이나 권위나 어떤 명예나 권세나 그런 모든 것들을 아무리 크다 한들 무궁세계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것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런 것들을 상식으로 머릿속에 담아놓고, 모든 성경을 상대하고 성경 속에 기록한 모든 말씀들을 생각하는 그런 우리가 되어야 됩니다.
오늘 말씀에도 그런 의미들이 다 들어있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 시험이 무엇인가? 시험은 여러 가지 종류, 여러 가지 형태의 어려움을 가리켜서 시험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어려움을 겪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어려움은 종류가 많고 또 강도도 다양하고 형태도 제각각입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몸으로 당하는 것이 있고, 마음으로 당하는 것이 있고, 그것의 원인은 물질 때문도 있고 사람 때문도 있고 사건 때문도 있고 또 자기 자신의 실수도 있고 자기 성격면도 있고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여러 가지 원치 아니하는 그런 어려움들을 사람은 세상에 살아가면서 당하고 있는데, 이거는 믿는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안 믿는 사람들도 다 그러합니다. 지금 여기 있는 우리들도 돌아보면 다 말을 하지 않고 표현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각자 나름대로 자기 속에 어려움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우리에게 시험이라 그리 말합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의 생활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 되는가? 시험을 참는 자, 시험은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어려움이 있고 시험이 있는데 그 어려운 시험들을 사람들이 살아가다가 안 믿는 사람들도 어려움을 만나고 더욱이 믿는 사람은 법이 하나 더 있고, 간섭이 더 세밀해서 더욱 더 어려움을 더 많이 겪고 있는 것이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성경 오늘 본문 전체로 보면 그런 모든 어려움들은 한편으로 보면은 좋은 것이고 한편으로 보면은 없어도 되는 것들이고 없으면 좋겠는데 없을 수가 없어서 오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이런 어려움들이 우리에게 없으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 답도 여기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시험을 참는자, 어려움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오는데 그 어려움을 참고 견디고 인내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오전에 이 참는 것을 몇가지로 말씀을 드렸는지 혹 기억하시는지요? 이 어려움을 참는다말은 무조건 꿍하고 참는 걸 말하는게 아닙니다. 오른 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도 줘버리고 억지로 오리를 가고자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 주라는 이런 무저항주의적인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시험이 오면 이유를 불문하고 무조건하고 참아라. 욕을 얻어먹어도 참고, 억울하게 돈을 사기 당해도 참고, 보증을 서서 억울하게 돈을 수천만원 떼여서 집안이 폭삭 망해도 참고, 병이 들어도 참고, 무조건 참고 견디라는 그런 뜻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상식적으로? 그러면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 이거를 피상적인 단어 그대로 껍데기로만 보고 어려울때 무조건 참고 견디고 기도하고 무조건하고 찬송하고. 찬송이란 것은 감사의 표시고, 감사란 것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내 속에 나오는 겁니다. 찬송은 필연적이라야 됩니다. 필연적인 찬송. 그래서 감사의 표시로 필연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찬송 이게 되는데, 그렇지 않고 그냥 어려움 닥쳤으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현실이니 하고 대책없이 앉아서 고행주의처럼 그렇게 참고 견디고 말하지 않고 아무 원망하지 않고 그냥 견디면 되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욥은 인내했습니다.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욥에게 시험이 왔을때 욥은 하나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도 원망하지 않았고, 아내가 바가지 긁을때는 ‘당신의 말이 하나님을 모르는 자의 말과 같다’고 그렇게 표현 했습니다. 심하게 말해도 그랬었습니다. 그리고나서 친구들이 왔을때도 그렇고 어쨌든 참고 잘 견뎠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복을 주실때는 욥이 그냥 무조건 참고 견뎠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닌 겁니다. 하신 것은, 욥이 자기 속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런 것을 찾아서 발견해서 고쳤기 때문에 그리 하신 겁니다. 그러면 시험을 참는다, 어려움을 참는다 할때 그 참는 것은 어떤게 참는 것인가? 오전에 말씀드렸는데 몇가지로 말씀을 드렸던가요? 혹시 기억 하십니까? 시험을 참는다 말은, 어려움을 참는다 말은 그 어려움의 원인을 첫째 찾는 것. 자기한테 닥친 그 어려움의 원인을 첫째로 찾는 것, 원인을 찾고. 찾되, 그 찾는 근거를 도덕적이나 윤리적이나 세상적인 그런 것을 근거로 하여 찾지를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시험이 오게 된 그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는 것. 두 번째는 그것을 찾아가지고 고치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주시는 그 현실에 대해서 세 번째는 인내하고 참고 기다리는 겁니다. 이 세 가지가 시험을 참는자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는, 그 복이란 것은 복은 결과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그러면 여기서 주시는 복은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복은 12절에 말씀하신 걸로 말하면 결과가 복인데, 그 복은 무엇입니까? 시험을 참는 자가 받는 복은 결과적으로 무엇이 되는 겁니까?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참는다는 것은 그 다음에 말씀하시기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렇게 해놓고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그랬으니까, 이것이라는 게 뭔가? 이것이라는 것은 그 시험이 오게 된 자기 속에 있는 원인 그것이 이것이겠고, 이것에 옳다 인정하신 것은 그 원인을 찾아 발견해서 고치는 것이 옳다 인정하시는 것이겠고, 그런 후에 받는 복이 뭐냐? 그 후에 받는 복은 하나님과 연결에 승리가 되는 생명의 면류관. 그러면 이 생명의 면류관은 어떤 사람에게 주시는 것인가? 생명의 면류관은 어떤 사람에게 주신다고 되어있습니까?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고 주님같이 되는 것인데, 그게 다시 말하면 본문에 보니까 자기의 시험의 원인되는 요소를 찾아서, 발견해서 고치는 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 전체가 우리 평소 듣는 말씀하고 연결시켜볼때 이게 성경 해석이 어떻습니까? 다 연결이 되지 않습니까?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 주님 사랑하는 것은 주님 사랑을 내가 받는 것이고 그 사랑을 받는 것은 자기를 고쳐서 주님과 같이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생명의 면류관 주신다고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러면 이거는 우리들이 만나는 시험에 대한 실질적인 면, 우리가 실제 신앙생활 해나가다가 만나는 시험, 여러 가지 어려움들에 대한 내면, 실질적인 면을 12절에서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 여러 가지 종류의 어려움을 만날 때 그 어려움을 참는데, 참는다는 말은 첫째 그 어려움이 나한테 오게 된 내 속에 있는 원인을 하나님 말씀을 근거해서 찾는 것. 두 번째는 그걸 찾아가지고 하나님 말씀대로 그것을 고치는 것. 그리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현실을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것. 이 세가지가 어려움 만났을때 우리들의 할 일입니다. 어떤 종류의 어려움을 만나던지 이 세가지만 우리가 할 일이고, 그 외에는 우리 할 일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권면할때도 이 세가지를 늘 염두에 두고 권면하는데, 그런데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것을 말하면 알아듣는 사람은 거의 별로 없습니다. 많지 않습니다. 이걸 말하면 모두들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의 잘못, 성경에 말씀하신 그대롭니다. 어찌하여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너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자기 속에 들보가 있는데, 그 들보있는 상태에서 남의 티를 보면 그 보이는게 이상하지요 그게. 내 눈에 들보가 있으면 아무것도 안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자기 속에 들보가 들어있는 들보 낀 그 눈 가지고 형제 눈속에 있는 티를 보니까 그게 제대로 보일 리가 없는 겁니다. 이게 거의 모든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도 저를 비롯해서 대개 다 그러한데, 이게 성경적으로 따져보면 잘못된 겁니다. 그래서 시험에 대한 실질적인 면, 이걸 여기 본문에서 12절에 말씀을 합니다. 그러면 오늘 봉독한 말씀에 원칙, 원래 중심은 12절 말씀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이 속에 모든게 다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13절에는 거기 대해서 사람들이 어려움 만나는데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사람들이 잘못알고 오해하니까 거기 대한 주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험을, 어려움 만났을때 믿는 사람이 어려움 만나는 그 이유는 죄를 지어서 만날때도 있고, 계명 말씀을 순종해 나가다가 어려움을 만날때도 있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날 수 있는데, 어쨌든 어떤 종류의, 어떤 원인 때문에 어려움 만나던지 어려움 만나는데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지는 그 생각은, 인식은 오해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그 오해에 대한 바른 지식을 지금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 여기 사람은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안 믿는 사람 말하지 않고. 믿는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서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이 나에게 지금 어려움을 주신다, 하나님이 나에게 고통을 주신다, 나를 시험하신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신다는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신다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경에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신다는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여기 본문에는 뭐라 그랬습니까? 시험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시험하지 않는다 그랬는데, 다른 곳에 보면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도 시험하셨고, 또 히스기야도 시험하셨고 시험을 하셨습니다. 시험했다고 성경에 명문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네가 하나님에게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신다’ 그랬으니까 이 두 성구가 갖다대보면 모순이 되니, 그러면 성경이 둘 중에 하나는 틀렸는가? 성경은 틀림없는 진리니까 이 속에서 진리를 찾아서 하나로 통하는 걸 찾아봐야 됩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에게 시험을 받는다고 하지 말아라 그말은, 그 시험 받는 원인이 자기한테 있다는 것을 지금 암시하고 있습니다. 네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환경이나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런 어려움을 당하게 된 그 원인은 너한테 있다 그말입니다. 자기한테서 찾아라 그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설명합니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악이란 것은 뭐라 그랬습니까? 악은, 창조주 하나님은 악이 없습니다. 악은 피조물로 갈 때 악입니다. 악이란 것은 피조물로 갈 때 악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에게는 악이 없고 하나님을 떠날 때 비로소 악은 생겨지게 되고 출발이 되는데 하나님이 아닌 것은 무조건하게 아니고, 지음받은 피조물이 하나님에게 소속이 되어 속해있을 때, 하나님의 것이 되고 속해있을 때는 선이라 그럽니다. 그런데 완전하신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이 하나님을 떠나서 제가 독단적으로 하나님 자리에 설때는 무조건하고 악이라 그럽니다. 그게 개인이든지 단체든지 전인류든지 어쨌든 하나님을 떠난 상태로 그게 중심이 되고 주체가 되면 전부다 그거는 크든 작든 많든 전부 악이다 그말입니다. 그런데 그 악이란 것은 피조물이고 그 피조물은, 그 악은 하나님을 떠난 피조물의 중심과 작용이 악이니, 그러면 하나님이 악에게 시험받지 않는다 그말은, 그 악의 모든, 하나님을 떠난 피조물 인간들의 어떠한 작용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거기에 영향을 받거나 피동되지를 않는다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을 바로 연결시켜 보면 사람이 죄를 지으니까 내가 죄 지으니까 하나님께서 괘씸해서 미워서 아니면 벌을 주려고 그렇게 나에게 이렇게 하신다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하느냐? 답을 찾아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말을 깊이 들어가서 살펴보면 하나님은 모든 역사는 예정이고 그 예정 순서를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권하시는 모든 주권 섭리로 모든 사람에게 어려움도 좋은 것도 닥치게 되어지는데, 그러면 사람이 죄를 짓거나 말씀을 순종하다 어려움 만날 때 그 어려움 오는 것은 죄를 짓는 것도 예정, 말씀 순종하다 만나는 어려움도 예정, 전부 예정 속에 든 것이고 그 예정은 하나님의 예정대로 된 주권 섭리로 되어지는 것인데 그러면 내가 만나는 어려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은, 그것은 네가 어려움을,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또 말씀 순종하므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려움이 아니라 너 속에 있는 그런 고칠 요소를 고치기 위한 사랑의 작용이고, 너를 하나님께서 온전한 사람 만드시기 위해서 예정하신 것이고 그 예정은 목적을 위한 예정이지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이 당신의 뜻대로 그 모든 것을 은혜로 그렇게 하시는 것이지 그 인간 그 죄 짓고 잘못된 그 인간에게 피동 되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괴롭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고통주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을 실패하게 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가 그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그리고 14절에 바로 콕 찍어서 말씀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다’. 사람이 온갖 종류의 고통을 당하는 것은 오직 자기 속에 있는 자기 욕심 때문이다 그말이고, 그런데 그 욕심이란 것은 종류가 굉장히 많습니다. 아주 수준 낮은 저급의 그런 욕심도 있고 아주 고급의 고등욕심도 있습니다. 욕심 아닌 것 같은데 욕심인 것도 있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악이라 그럴 때, 소선은 대선의 적이다. 작은 선은 큰 선의 적이다 그럴 때, 참 이것도 생각을 잘해야 되는데, 그러면 소선은 대선의 적이다 그럴 때, 그 소선이란 것은 작은 선이라 그 뜻인데 그 작은 선이 진정한 선이면은 그게, 대선이면 참된 하나만 되는 선이라 그말인데 선과 선은 이게 대립이 될 수가 있는 겁니까? 선과 선이 대립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소선은 대선의 적이다 그럴 때, 그 소선은 어떤 걸 말하며, 대선은 어떤 걸 말할까? 소선은 말하자면 세상적인 선을 말하는 것이고, 또 하나님 중심적인 선 같으나 그 선 속에 자기 중심이 들어있는 그런 성격의 선을 말하는 것이고, 그런 것들은 대선의 적이 되는 겁니다. 그 작은 선이 참된 선인 것 같으면 대선과 적이 될 수가 없는 것이고 어찌 됩니까, 그러면? 소선과 대선이 그 본질 본성이 같다면 대선과 소선은 하나기 때문에 소선은 대선에게 소속이 되고 하나가 되는 것이지 대립될 수가 없는데, 소선은 대선에 적이 될 때는 그 작은 선이라는 그 껍데기 속에 다른 것이 들어있기 때문에 맞지 않고 배치가 되어진다는 그말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욕심이란 것은 종류가 굉장히 많고 단계가 많습니다. 홍포 입은 부자가 자주 말씀드렸는데, 홍포 입은 부자의 그 모습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더니, 자색 옷 왕들이 입는 그런 옷 붉은 홍포 아주 세밀한 자색 옷, 또 고운 베옷, 홍포입니다. 홍포를 입고, 왕들이 입을 수 있는 그런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겁게 잔치했다. 그러면 옷이란 것은 자기를 꾸미는 것이고, 그 꾸미는 것이란 것은, 자기를 꾸민다 말은 요즘 시대에도 옷을 가지고 자기를 꾸미는 사람을 생각있는 사람들은 수준을 낮게 봅니다. 얼굴에 화장품으로 떡칠을 해서 그렇게 꾸미면, 남반들이 좋아하는 여인의 모습은 화장을 하되 아주 옅게 수수하게 하는 그런 것을 남자들은 좋아합니다, 일반적으로. 저 혼자만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일반적으로 남반들은 여반들이 얼굴 화장을 진하게 하고 냄새 강하게 풍기는 것은 싫어합니다. 거부합니다, 속으로 다. 대개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니까, 사람들이 얼굴에 진하게 하고 떡칠하고 그렇게 하는데 그것 보기 흉한 겁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면 아는 겁니다. 또, 인물이 잘났다고 잘난 척을 하면은 보기 싫어합니다. 옷, 돈 많다고 돈 많은 표를 내면은 사람들이 다 싫어합니다. 그러면 그 싫은 것은 돈이 많아도, 또 인물이 잘 생겨도, 옷을 잘 입어도 그걸 가지고 꾸미면은 오히려 사람들이 싫어하니까 격이 떨어지는 겁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이고, 많이 배운 사람은 배운 표를 잘 안 냅니다. 그래서 지성인들의 언행은 대개 보면은 무겁습니다. 신중하고. 빈 깡통은 요란하고, 빈 깡통은 바람에 쉽게 흔들리는데 그 속에 뭐가 꽉 찬 그런 통은 소리도 잘 안내고 잘 안 흔들립니다. 속에 든 것이 많으면, 배워서 아는 것이 많고 든 것이 많은 사람들은 가볍게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쉽게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습니다. 무겁게 움직입니다. 표를 잘 안낸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자기를 꾸미는 건데, 홍포 입은 부자가 자색 옷을 입고 고운 베옷을 입고 그러니까, 요란한 옷을 입고 화려한 옷 입은 걸로 그렇게만 생각하는데 그거는 하나의 표현이고, 자기를 이 세상에서 나서 세상에서 가장 제물도 많고 많이 배우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을 하나 표현해서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인데, 그러면 그런 사람이 자기를 꾸밀 때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드러내려 그러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인간관계적으로 굉장히 겸손해야 됩니다. 겸손해야 되고 신중해야 되고 사람들이 볼 때 거짓 없고 진실해야 되고 희생이 있어야 되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깜빡 넘어갈 수 있는 그런 정도의 모습을 가져야 그게 홍포 입은 부자의 모습으로 그리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은 사람들이 다 좋아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가장 숭배하는 그런 인물을 몇 사람 꼽으면 누굽니까? 역사에 사람들이 숭배하는 인물을 꼽는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석가, 또 공자, 소크라테스, 맹자, 이런 사람들 다 사람들이 존경하지 않습니까? 다 존경하고 우러러 봅니다. 그 사람들이 돈 욕심을 냈습니까? 자랑을 했습니까? 다 겸손했고, 인생에 대해서 걱정을 했고 다 그랬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다 높이고 존경하고 우러러보고 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대 원수입니다. 하나님과 가장 큰 원수 대적이 석가모니고 공자고 소크라테스고 그런 사람들인데, 이런 말을 세상에 말하면 알아 듣습니까? 이런 말을 가리켜 성경에 뭐라 그러던가요? 이런 말을 가리켜서 방언이라 그러지요. 세상이 모르는 이런 말을 방언이라 그런답니다. 성경 해석에서.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건 세상이 모른다 그말이지요. 욕심이란 것은, 수준 낮은 욕심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그런 것도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 그럴때 그 욕심은 저급의 욕심도 포함되지만은, 굉장히 고급의 고등욕심도 포함이 되는 겁니다. 목회자가 교회를 개척하고 전도를 하고, 열심히 전도하고 기도하고 설교하고 교회를 부흥시키는 그래서 교회가 부흥이 되면 그 속에 욕심이 들어있다고 말하면 되겠습니까? 교인들한테 은혜를 끼치겠다, 교인들 위해서 기도하고 설교준비해서 설교하고 심방 전도하고 교회를 부흥시키고 그렇게 열심히 하는 그 하나님 종 속에 욕심이 들어있다고 하면 말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 속에도 욕심이 들어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설교록에 보면은 그런 내용이 많습니다. 기도하되, 자기 중심으로 기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설교하되, 설교가 자기 중심으로 얼마든지 설교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 걸 가리켜서 고급의 욕심이라 그럽니다. 사람들은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그런데 그런 욕심이 있으면 그 욕심이 생기면 거기서 죄는 필연적으로 나옵니다. 일반적인걸 다 무조건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 극단 예를 들어서 고등적인 그런 욕심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욕심이란 것은 물질욕도 있고 아주 저급의 육신의 정욕도 있고 향락욕도 있고 좀 사람들이 고급으로 치는 지식욕심도 있고 명예욕도 있고 권세욕도 있고 소유욕도 있고 성취욕도 있고 별에별 욕심이 인간 속에는 다 있습니다. 책임지고자 하는 책임 욕심도 있고, 온갖 욕심이 다 있습니다. 전부다 욕심입니다. 그러면 그런 욕심을 사욕이라 그러는데, 그 모든 욕심 속에는 거기서 나오는게 뭐냐? 거기서 나오는게 죄고, 그 죄는 사망인데 그런 욕심들이 들어서 우리에게 오는게 뭐가 온다고요? 욕심이 들어서 뭐가 온다고 오늘 본문 전체에 말씀하고 있습니까? 시험이 온다 그말입니다. 그 욕심 때문에 시험이 온다. 욕심 때문에 어려움이 온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고통 없이 사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욕심을 뽑아 버리면 됩니다. 그런데 욕심이란 것은, 이제 말씀드린대로 세상적으로 좀 말하면 욕심이란 것은 부정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많은 폐단을 일으키는데 욕심을 긍정적으로 말하면 욕심이 있어야 열정이 있고 욕심이 있어야 힘이 나고 욕심이 있어야 일을 하게 됩니다. 욕심 없으면 아무 것도 못 합니다. 사람들이 물질욕이 있어야 돈을 벌게 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라는 그 민주주의 자본주의 국가에 가장 깊이 들어가면, 자본주의에 가장 근본적인 바탕은 그거는 인간의 욕심입니다. 자기 중심의 욕심. 이기주의적인 욕심이 자본주의가 성립될 수 있는 가장 근본 바탕입니다. 거기서 나온다 그말이지요. 그래서 이걸 사람들이 연구해서 알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야 된다고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고, 공산주의란 것은 인간의 이기주의적인 그런 욕심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해해서 만든 것이지 근본 인간이란 것은 이기주의적인 자기 욕심이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란 것은 결코 이상이지 성립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욕심이란 것은 여러 가지 층이 있습니다. 이걸 기억을 하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욕심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어려움이 오게 되는 겁니다. 고통이 오는 겁니다. 그러면 욕심을 다 뽑아 버리면,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종교 불교 같은데서는 이걸 어느정도 알고 보니까 그 사람들은 자기를 다 없애버려라, 그 없애버리라는 속에 그래서 그 사람들은 금욕주의를 주장하는 겁니다. 자기 속에 모든 욕심을 다, 자기 자체를 다 없애버리는 무아지경으로 들어가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게 다 없어지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은 피조물만 알고 그게 전부니까 그리 되는데 그렇게 가면 아무것도 없으니까 나중에는 허무한 걸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무(無)로 돌아가니까 허무가 되는 겁니다. 성경이 말씀하신 욕심이란 것은 인간의 욕심, 한말로 말하면 사욕을 말합니다. 육신의 모든 정욕 사욕. 그 사욕을 다 뽑아버리고 사욕만 뽑아버리면 그때부터 우리에게는 고통이 없게 되는데, 만약에 사욕이란 이것만 뽑아버리고 그 속에 성령의 소욕이 들어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반쪽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지게 됩니다. 그래서 쉽게 말하면 모든 환난 어려움 시험의 원인은 인간의 욕심이니까 욕심을 다 벗어버리고 뽑아버리고 나면 인간에게 고통될 것이 없는 것이고, 그러면 욕심을 버리면 그 다음에 할 일이 무엇인가? 자 여기 나옵니다. 14절,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러면 12절은, 12절 말씀은 우리들이 시험을 만나는 실질적인 그 생활에 당면한 것을 두고 어떻게 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실제 내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고. 13절은 12절 시험에 대해서 사람들이 잘못 알고 오해하니까 그 오해를 풀어주는 겁니다. 주의를 하고. 또 14절은 좀 더 구체적으로 그 원인들을 설명을 하고 있는 거지요, 15절까지. 그러면 16절에는 거기 대한 배경 지식을 지금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권면하고. 16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내 사랑하는 형제라 그말은 야고보의 형제인데, 우리 모두, 하나님 한분을 아버지로 모시고 한 하나님 아버지 밑에서 나온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요 자매라는 구속받은 성도들 이 모두를 다 내 형제들아 그리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속는다 말이 무슨 말입니까? 속는다는 말은, 거짓말에 넘어간다는 말이고 아닌 것에게 넘어간다는 말이지요, 속는다는 말은. 그러니까 속는다 말은 있는 줄 알았는데 있다해서 가보니까 없으니까 있다는 말이 거짓말이고, 그것이라 해서 가보니까 아니니까 속은 것이고, 참이라 해서 가보니까 참인 줄 알았는데 아니니까 속은 것이고. 전부 속지 말라는 말은 거짓말에 넘어가지 말라는 말이고, 아닌 것에게 자기 가진 시간과 소유와 세월을 그런 것들에게 꼬여 넘어가서 허비하지 말아라 말인데, 그러면 속지 말라는 말은 쉽게 한 말로 말하면 무엇에게 속지 말라는 말이 됩니까? 본문에 말씀에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무엇에게, 누구에게 속지 말라는 겁니까? 마귀에게? 죄에게? 세상에게? 사기꾼에게? 거짓말 쟁이에게? 누구에게 무엇에게 속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자기 욕심에게 속지 말라는 겁니다. 자기 욕심에게.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인간 자기 속에 있는 자기 욕심, 자기 사욕, 자기 속에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한 인간, 마귀한테 꼬임받아 자기 중심된 거기서 나오는 수많은 종류의 온갖 그런 요소 욕심들이 있으니 그런 욕심들이 인간을 꼬우는데 그 욕심이란 것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데, 그런게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은 모든 잉태라는 것은 생겨지면 그다음 그 속에서 잉태라는 것은 종자라는 뜻이고 그게 때가 되면 낳지 출산하지 않습니까? 잉태되면, 그러면 욕심이란 것은 죄도 마찬가지고, 욕심이 잉태한즉, 욕심이 생겨지면 그 욕심이 점점 욕심이 욕심을 낳고 욕심을 낳고 욕심을 끌고 들어가서 욕심이란 것은 이게 배암의 옥니처럼 끌고 들어가는 그런 요소가 있고, 욕심이 점점 커지고 많아지면 생겨지면 죄가 필연적으로 나오게 되고 그 죄는 점점 성장성 전염성 가지고 있어서 죄는 점점 커지게 되고, 그래서 죄 하나만 있어도 사람이 멸망하지만은, 작은 죄 하나 가지고 자기 일생이 망할 수도 있지만은 큰 죄로 인생이 망하는 수도 있지만은, 거짓말 하는 죄 하나 작은 죄 지었다고 친구한테 거짓말 하나 했다고, 돈 만원짜리 하나 거짓말 하는 죄 지었다고 그 사람 인생이 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죄라는 것은 점점 전염성 성장성이 있어가지고 죄가 있으면 자꾸 커져서 마지막에는 마침내 그 죄를 해결하지 않으면, 회개하지 않으면 암덩어리같이 퍼져가지고 자기 일생과 영원을 망치고 만다는 것을 가리켜서 사망을 낳는다고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런데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말라. 자기 욕심에게 속지 말라는 겁니다. 온갖 종류 욕심이 있으니까 그 욕심에게 붙들려서, 지식욕에 붙들려서, 오랜 세월을 공부한다고 많은 세월을 투자하는데 마땅히 해야 될 공부를 한다면 많은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멀리 봐야 됩니다, 멀리. 83년도 9월 4일 설교인가, 10월 30일인가 모르겠는데 유다서 설교를 하시면서 어떤 중간반 반사가 이렇게 저렇게 말하는데 내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면서 그럽니다. 멀리 봐라, 길게 봐라, 구름같은 간증자들봐라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멀리 봐야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내가 이 말씀대로 사는 걸 말하는게 아닙니다. 말씀대로 다 사는 사람은 희귀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적어도 알고 가질 것은 생각은 바로 가지고, 그래서 사상이라는 것이 중요하고 지식이란게 중요합니다. 멀리 봐야 됩니다. 인생을 넓게 봐야 되고 길게 봐야 되고 우리는 성경 통해서 영원까지를 배웠기 때문에 영원까지를 보고 오늘 판단을 해야 됩니다. 마땅히 공부해서 그 공부가 나의 영원을 향한 이 세상 평생의 신앙에 도움이 되고 필요하고 유익이 되는 것 같으면 밤잠을 자지 아니하고 공부를 하는 것이 마땅하고 그게 신앙이고 충성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고 단순히 영원까지 생각지 못하고 영원을 향한 내 평생의 생활에 영원한 구원을 이루어가는데 필요한지 안한지 모르겠고 도움될지 안될지 모르겠지만은 일단은 내가 배우고 싶으니까 욕심이 나서 지식욕에 의해서 공부한다면 그 공부가 앞으로 유익이 될지 해가 될지는 모릅니다. 지켜봐야 됩니다. 죄가 되지 않으니까, 나이가 그런때니까 열심히 하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해야 되고. 공부 안하면 죄 짓고 돌아다니고 엉뚱한 짓 하니까 그런 학생들은 공부를 죽도록 해야 됩니다. 그게 충성이고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게 달리 있다면 깊이 생각해 봐야 됩니다. 그러니까 욕심이란 것은 굉장히 많은 종류가 있다는 걸 지금 말씀 드리는 겁니다. 지식 욕심이 있으면 그 지식욕, 만약에 지식 욕심에 의해서 내가 움직인다면 거기 속지 말아라. 이 땅 위에 사는 동안에 물질만능주의라 그러니까 뭐니 뭐니 그래도 돈이 있어야 되겠다 생각해서 그래서 돈이 필요하다고 돈 욕심 때문에 돈을 가져야 되겠다고 열심히 땀 흘려 일하고 돈을 버는 사람 같으면 그 돈 욕심에 속지 말아라. 권세를 가져야 되겠다고 평생을 노력하는 사람이면 권세 욕심에 속지 말아라. 뭔가 내가 책임을 지고 뭔가 달성해야 되겠다고 하는 그것이 만약에 욕심 같으면 그 욕심에도 속지 마라. 욕심에 속지 말라는 겁니다. 수많은 종류의 욕심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욕심에 속지 말아라.
그다음 17절입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은사는 하나님에게 받아가지고 있는 우리 각자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그런 모든 것들 조건들을 말하겠습니다. 선물은 다 또 주시는 것이고. 각양, 온갖 종류의 온갖 형태 온갖 모양의 각양 좋은, 좋은 것은 하나님이 주시면 좋은 것이니까 영원을 두고 시공을 초월한 영원을 두고 우리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 참으로 좋은 것, 영원토록 좋은 것, 세상과 천국에 다 좋은 것,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어디서 오느냐? 이거는 인간의 욕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의지로 인간의 노력으로 인간의 열심으로 부지런함으로 근면성실함으로 되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어디서 나오느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위라는 것은 평가 가치적으로 위를 말합니다, 위.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 빛은 하나님만이 빛인데 그 하나님 한분에게서 나타나는 그 빛이 많은 것들을 통해서 나타날 때 그걸 전부 빛들이라 그럽니다. 사랑은 빛이고, 미움은 어두움입니다. 행복은 빛이고 불행은 어두움입니다. 또 오해는 어두움이고 이해는 빛이 되겠습니다. 평강은 빛이고 고통은 어두움입니다. 진실은 빛이고 외식은 어두움입니다. 참은 빛이고 거짓은 어두움입니다. 이런 빛들이 이 세상에 있는데 그 빛들은 전부 어디서 나오느냐? 세상에 나타나는 사람들에게 비치는 모든 빛들은 전부 빛의 원천이신 하나님 아버지 그분에게서 다 나오는 겁니다. 빛들의 아버지, 그 모든 그러니까 각양 좋은 은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온갖 종류의 좋은 것들, 진정 사람에게 영육으로 다 참으로 좋고 영원히 좋은 그 모든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전부 그 빛으로 나타나는데 그 빛들의 아버지 하나님 그분에게서 내려오나니, 그런데 그 분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그분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믿을 수 있다는. 그분은 요동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에 피동되지도 아니하고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되도 그분은 거짓도 없고 변함도 없고 가감도 없는 만세반석으로 참으로 믿을만한 그분에게서 온다 그말이지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러니까 그분만이 믿을 수 있고 바라볼 수 있고 의지할 수 있고 그분에게 내 모든 걸 맡길 수 있는 유일한 그분이니까 그분에게 모든 것 다 맡겨놓고 그분 원하시는대로만 하면 되는데 그 속에 그리하지 못하는 것이 왜 그리하지 못하느냐? 모든 걸 하나님께 맡겨놓고 믿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면 되겠는데, 왜 인생이 그리하지 못하는가? 왜 그리하지 못합니까? 뭐 때문이라고요? 욕심 때문에 못 합니다. 온갖 종류의 욕심 때문에. 그래서 사람이 욕심이 들어가면 괴롭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욕심이 들어가면. 발람이 발락이 보낸 사자들을 보고 발락이 보낸 많은 부귀영화를 보고 거기 욕심이 들어가니까 그때부터는 발람은 죽을 지경입니다. 말은 그리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라하는지 안가라 하는지 내가 모르겠으니까 여기 자라. 거짓말입니다 그말은. 양심을 속이는 말입니다. 발람은 선지자입니다. 가야될지 안가야 될지 아는 말입니다. 아는 일이고, 환하게 답이 나와 있습니다. 주일을 지켜야 될지 말아야 될지 기도해보겠습니다. 말이 되는 소립니까? 내가 거짓말 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기도 좀 해보고 하겠습니다. 그거는 기도하는 그 자체가 죕니다, 그거는. 그런 기도는 하는게 아닙니다. 주일을 지켜야 될지 말아야 될지 내가 기도하고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러면 그 기도는 죄고 생각은 전부 죕니다. 안 하는 겁니다, 그거는. 주일은 무조건 지키고 보는 겁니다. 안 가야 되는데, 왜 내가 물어보겠다 그말은 기도 해보겠다 그말이거든요. 하나님 앞에 물어보겠다, 기도 좀 해보겠다. 기도 해보겠다는 것은 왜 기도해 봐야 됩니까? 무엇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드는 겁니까? 욕심이 들어서 그런 안 해도 될 일을 하는 겁니다. 두번째, 또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라 하신다고 그걸 가라는 것인 줄 알고, 갈라면 가라. 그러니깐 갑니다, 털레 털레. 가니까 나귀가 세 번을 막았지요. 고통스러웠지요. 그만하면 알 것인데, 얼른 회개하고 돌아가면 그때라도 돌아가면 회개할테니까 괜찮은데 기어코 끝까지 갔잖습니까. 가고 난 다음부터는 그때부터는 목숨 걸고 지켜도 다 이미 지나가버렸습니다. 목숨 걸고 지켰다하지만은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돈 욕심에 끌려서 몇 번을 제단 쌓고 안 할 짓 하고 난 다음 마지막에 기어코라도 하나님 백성들 약점을 알려주고 난다음에 많은 걸 받았겠지요. 마지막에는 여호수아의 칼에 죽었습니까? 칼에 죽었습니다, 결국은. 다 망했고. 영원토록 비참한 그런 사람이 되고 말았는데 그게 왜 그리 되어졌느냐? 자기 속의 욕심 때문에. 물질 욕심, 부귀 영화 욕심. 게하시가, 왜 나아만의 문둥병이 게하시에게 들어갔습니까? 물질 욕심 때문에. 사람이 물욕도 크고, 명예욕도 크고, 권세욕도 크고, 권위욕도 큽니다. 성취욕도 대단히 큽니다. 사람의 욕심은 도수가 굉장히 종류가 많고, 차이가 굉장히 많습니다. 온갖 종류 욕심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욕심이 있으면 사람은 괴롭게 되어집니다. 무책임하고 욕심을 버리는 거는 틀립니다. 그래서 자기 속에 욕심 중에 고급 욕심이라면, 사람을 얻고자 하는 것도 욕심입니다, 고급 욕심. 그런데 사람을 얻고자 하는 것도 그것도 하나님께서 하라는 그 선이 있습니다. 그 넘어가면 욕심이 되는 것이고, 욕심이 되면 그때부터 악이 되는 겁니다. 교역자가 교회를 키우고자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욕심이 아닌 내가 할 책임과 의무가 선이 어디까지인가를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 양심과 인간의 구원과 현상의 자연 계시와 이 몇 가지를 가지고 생각해보면 답은 나옵니다. 거기까지만 하면 그때부터는, ‘제가 할 수 있는 거는 여기까지입니다. 나머지는 저는 할 게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겨놓고 나면 그때부터는 마음이 편안합니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고 그냥 편안하고 괜찮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 더 들어가서 뭔가를 붙들려고 하던지 손해 안보려고 하던지 하려고 하면 그때부터는 마음이 굉장히 고통스럽고 무겁게 눌리게 되어있습니다. 그게 다 욕심입니다. 그러니까 속지 말라는 겁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래놓고 18절에 ‘그가 그 조물 중에’ 조물이라 말은, 지음받은 피조물 전부를 말합니다. 모든 피조물.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이게 결론이고 근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다 여기 있습니다. 그가 그 조물 중에라 말은, 후택설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지으실때부터 그랬습니다. 수많은 피조물 중에 우리는 하나님의 첫 열매가 되기 위해서 지음 받았습니다. 열매란 것은 맺어지는 결실입니다. 외견상 첫 열매는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은 하나님이니까 그분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사람되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하여 그 대속을 입고 그 대속을 근거하여 그 대속과 대속으로 인한 진리와 영감으로 중생된 우리들이 주님같은 내가 되어지는게 첫 열매입니다. 그런 내가 되는게 첫 열매인데, 그런 내가 되는 것은 어떤 과정 과정을 통해서 되어지는가? 내 속에 있는 이 세상에서 이 땅 위에서 여러 종류의 고통 괴로움 받을 수 있는 그런 원인되는 하나님 앞에 잘못된 그런 요소를 하나씩 하나씩 고쳐나가는 그런 과정들을 통하여 비로소 주님을 닮은 온전한 사람 첫 열매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이걸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역사를 하고 계신다는 것이기 때문에 시험과 연결시켜보면은 우리가 모든 답이 환하게 나오게 되어있고,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를 다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 앞에 닥치는 모든 어려움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고 해결해 나가면 해결 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말이지요. 우리가 몰라서, 다 깨닫지 못하고 다 몰라서 못하는 수 있고, 우리들이 부족해서 못하는 수 있어도 말씀은 틀림이 없습니다. 말씀 속에 영감을 주셨고, 우리에게 양심을 주셨고 또 우리에게 현실을 주시고 이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내 속에 신앙 양심, 눈에 보여지는 현실의 상황, 인간 구원의 목적, 하나님의 영광 기뻐하시는 것, 이런 몇 가지를 종합해보면 우리들이 내게 당면한 모든 현실 현실에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은 환하게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각자 만나는 시험 어려움은 사람마다 다 다르고, 형태는 다른데 그 어려움들도 속에 찾아 들어가보면 이치는 꼭 같습니다. 12절, 실질적인 것이고, 13절은 거기 대해 사람들이 잘못 알고 오해하니까 설명하는 것이고, 14절 15절까지는 구체적 원인을 좀 더 직접 설명하는 것이고, 그다음 16절부터는 거기 대한 배경지식을 말씀하고, 18절은 그 모든 전체 목적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걸 생각해보고 우리 앞에 닥치는 모든 어려움들을,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하고 이 말씀으로 잘 해결하는 그런 우리가 되도록 하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차근 차근 성경을 근거해서 생각해보면 환하게 알 수 있습니다. 좀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야고보서 1:12-18
무선마이크를 몇주전에 주일학교 찬송인도때 좀 끊어져서 밧데리를 바꿨는데 아마 그게 잘못된 것 같습니다. 000 선생님이 좀 확인하시고 살펴주시면 좋겠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여러 가지 표현들은 세상에서 쓰는 그런 단어라던지 표현과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상식으로 알아야 되겠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구원의 도리로 주신 말씀이고, 우리에게 도덕이라던지 윤리라던지 세상 상식을 가르치는 말씀이 아닙니다. 국어 교과서도 아니고 또 역사 교과서도 아니고 도덕 교과서는 더욱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여러 가지 표현들 단어들을 볼때는 그 의미를 하나님과 연결시켜봐야 되고 또 하나님의 구원역사와 연결시켜서 생각을 해야 됩니다. 성경에 보면 잠시라는 그런 말들이 종종 나옵니다. 잠시고 나그네고 하룻밤이고 이런 표현들이 나오는데 그거는 사람의 한평생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한평생을 잠시라. 한평생이면 80년, 요즘으로 말하면 길면 90년까지 되는데 그 세월이 대단히 길지만은 그 긴 세월을, 한평생의 긴 세월을 잠시라 잠깐이라 임시라 일시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영원에 비해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영원한 시간이 우리 시간이기 때문에 그 영원에 비하면 지금 있는 시간은 잠시 밖에 되지를 않는 겁니다. 모든 것은 다 상대적인 그런게 세상에서도 있습니다. 또 지극히 작은 것이라는 그런 표현들, 사소한 것이라는 그런 표현들, 불의의 것이라는 그런 것들도 그게 다 무궁세계를 대비해서 이 세상 것을 표현해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영원에 비하면 이 세상에 천년의 세월이 짧은 것이고 영원에 비하면 세상이 비록 만년까지 간다해도 짧은 세월이고 또 무궁세계 무한한 세계에 비하면 이 세상의 우주를 다 합해도 무궁세계에 비하면 그거는 작은 것일수밖에 없는데, 하물며 우리 사람들의 가진 소유라던지 자기 마련한 어떤 지식이나 권위나 어떤 명예나 권세나 그런 모든 것들을 아무리 크다 한들 무궁세계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것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런 것들을 상식으로 머릿속에 담아놓고, 모든 성경을 상대하고 성경 속에 기록한 모든 말씀들을 생각하는 그런 우리가 되어야 됩니다.
오늘 말씀에도 그런 의미들이 다 들어있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 시험이 무엇인가? 시험은 여러 가지 종류, 여러 가지 형태의 어려움을 가리켜서 시험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어려움을 겪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어려움은 종류가 많고 또 강도도 다양하고 형태도 제각각입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몸으로 당하는 것이 있고, 마음으로 당하는 것이 있고, 그것의 원인은 물질 때문도 있고 사람 때문도 있고 사건 때문도 있고 또 자기 자신의 실수도 있고 자기 성격면도 있고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여러 가지 원치 아니하는 그런 어려움들을 사람은 세상에 살아가면서 당하고 있는데, 이거는 믿는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안 믿는 사람들도 다 그러합니다. 지금 여기 있는 우리들도 돌아보면 다 말을 하지 않고 표현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각자 나름대로 자기 속에 어려움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우리에게 시험이라 그리 말합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의 생활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 되는가? 시험을 참는 자, 시험은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어려움이 있고 시험이 있는데 그 어려운 시험들을 사람들이 살아가다가 안 믿는 사람들도 어려움을 만나고 더욱이 믿는 사람은 법이 하나 더 있고, 간섭이 더 세밀해서 더욱 더 어려움을 더 많이 겪고 있는 것이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성경 오늘 본문 전체로 보면 그런 모든 어려움들은 한편으로 보면은 좋은 것이고 한편으로 보면은 없어도 되는 것들이고 없으면 좋겠는데 없을 수가 없어서 오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이런 어려움들이 우리에게 없으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 답도 여기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시험을 참는자, 어려움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오는데 그 어려움을 참고 견디고 인내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오전에 이 참는 것을 몇가지로 말씀을 드렸는지 혹 기억하시는지요? 이 어려움을 참는다말은 무조건 꿍하고 참는 걸 말하는게 아닙니다. 오른 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도 줘버리고 억지로 오리를 가고자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 주라는 이런 무저항주의적인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시험이 오면 이유를 불문하고 무조건하고 참아라. 욕을 얻어먹어도 참고, 억울하게 돈을 사기 당해도 참고, 보증을 서서 억울하게 돈을 수천만원 떼여서 집안이 폭삭 망해도 참고, 병이 들어도 참고, 무조건 참고 견디라는 그런 뜻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상식적으로? 그러면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 이거를 피상적인 단어 그대로 껍데기로만 보고 어려울때 무조건 참고 견디고 기도하고 무조건하고 찬송하고. 찬송이란 것은 감사의 표시고, 감사란 것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내 속에 나오는 겁니다. 찬송은 필연적이라야 됩니다. 필연적인 찬송. 그래서 감사의 표시로 필연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찬송 이게 되는데, 그렇지 않고 그냥 어려움 닥쳤으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현실이니 하고 대책없이 앉아서 고행주의처럼 그렇게 참고 견디고 말하지 않고 아무 원망하지 않고 그냥 견디면 되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욥은 인내했습니다.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욥에게 시험이 왔을때 욥은 하나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도 원망하지 않았고, 아내가 바가지 긁을때는 ‘당신의 말이 하나님을 모르는 자의 말과 같다’고 그렇게 표현 했습니다. 심하게 말해도 그랬었습니다. 그리고나서 친구들이 왔을때도 그렇고 어쨌든 참고 잘 견뎠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복을 주실때는 욥이 그냥 무조건 참고 견뎠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닌 겁니다. 하신 것은, 욥이 자기 속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런 것을 찾아서 발견해서 고쳤기 때문에 그리 하신 겁니다. 그러면 시험을 참는다, 어려움을 참는다 할때 그 참는 것은 어떤게 참는 것인가? 오전에 말씀드렸는데 몇가지로 말씀을 드렸던가요? 혹시 기억 하십니까? 시험을 참는다 말은, 어려움을 참는다 말은 그 어려움의 원인을 첫째 찾는 것. 자기한테 닥친 그 어려움의 원인을 첫째로 찾는 것, 원인을 찾고. 찾되, 그 찾는 근거를 도덕적이나 윤리적이나 세상적인 그런 것을 근거로 하여 찾지를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시험이 오게 된 그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는 것. 두 번째는 그것을 찾아가지고 고치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주시는 그 현실에 대해서 세 번째는 인내하고 참고 기다리는 겁니다. 이 세 가지가 시험을 참는자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는, 그 복이란 것은 복은 결과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그러면 여기서 주시는 복은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복은 12절에 말씀하신 걸로 말하면 결과가 복인데, 그 복은 무엇입니까? 시험을 참는 자가 받는 복은 결과적으로 무엇이 되는 겁니까?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참는다는 것은 그 다음에 말씀하시기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렇게 해놓고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그랬으니까, 이것이라는 게 뭔가? 이것이라는 것은 그 시험이 오게 된 자기 속에 있는 원인 그것이 이것이겠고, 이것에 옳다 인정하신 것은 그 원인을 찾아 발견해서 고치는 것이 옳다 인정하시는 것이겠고, 그런 후에 받는 복이 뭐냐? 그 후에 받는 복은 하나님과 연결에 승리가 되는 생명의 면류관. 그러면 이 생명의 면류관은 어떤 사람에게 주시는 것인가? 생명의 면류관은 어떤 사람에게 주신다고 되어있습니까?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고 주님같이 되는 것인데, 그게 다시 말하면 본문에 보니까 자기의 시험의 원인되는 요소를 찾아서, 발견해서 고치는 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 전체가 우리 평소 듣는 말씀하고 연결시켜볼때 이게 성경 해석이 어떻습니까? 다 연결이 되지 않습니까?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 주님 사랑하는 것은 주님 사랑을 내가 받는 것이고 그 사랑을 받는 것은 자기를 고쳐서 주님과 같이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생명의 면류관 주신다고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러면 이거는 우리들이 만나는 시험에 대한 실질적인 면, 우리가 실제 신앙생활 해나가다가 만나는 시험, 여러 가지 어려움들에 대한 내면, 실질적인 면을 12절에서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 여러 가지 종류의 어려움을 만날 때 그 어려움을 참는데, 참는다는 말은 첫째 그 어려움이 나한테 오게 된 내 속에 있는 원인을 하나님 말씀을 근거해서 찾는 것. 두 번째는 그걸 찾아가지고 하나님 말씀대로 그것을 고치는 것. 그리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현실을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것. 이 세가지가 어려움 만났을때 우리들의 할 일입니다. 어떤 종류의 어려움을 만나던지 이 세가지만 우리가 할 일이고, 그 외에는 우리 할 일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권면할때도 이 세가지를 늘 염두에 두고 권면하는데, 그런데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것을 말하면 알아듣는 사람은 거의 별로 없습니다. 많지 않습니다. 이걸 말하면 모두들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의 잘못, 성경에 말씀하신 그대롭니다. 어찌하여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너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자기 속에 들보가 있는데, 그 들보있는 상태에서 남의 티를 보면 그 보이는게 이상하지요 그게. 내 눈에 들보가 있으면 아무것도 안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자기 속에 들보가 들어있는 들보 낀 그 눈 가지고 형제 눈속에 있는 티를 보니까 그게 제대로 보일 리가 없는 겁니다. 이게 거의 모든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도 저를 비롯해서 대개 다 그러한데, 이게 성경적으로 따져보면 잘못된 겁니다. 그래서 시험에 대한 실질적인 면, 이걸 여기 본문에서 12절에 말씀을 합니다. 그러면 오늘 봉독한 말씀에 원칙, 원래 중심은 12절 말씀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이 속에 모든게 다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13절에는 거기 대해서 사람들이 어려움 만나는데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사람들이 잘못알고 오해하니까 거기 대한 주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험을, 어려움 만났을때 믿는 사람이 어려움 만나는 그 이유는 죄를 지어서 만날때도 있고, 계명 말씀을 순종해 나가다가 어려움을 만날때도 있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날 수 있는데, 어쨌든 어떤 종류의, 어떤 원인 때문에 어려움 만나던지 어려움 만나는데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지는 그 생각은, 인식은 오해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그 오해에 대한 바른 지식을 지금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 여기 사람은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안 믿는 사람 말하지 않고. 믿는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서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이 나에게 지금 어려움을 주신다, 하나님이 나에게 고통을 주신다, 나를 시험하신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신다는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신다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경에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신다는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여기 본문에는 뭐라 그랬습니까? 시험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시험하지 않는다 그랬는데, 다른 곳에 보면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도 시험하셨고, 또 히스기야도 시험하셨고 시험을 하셨습니다. 시험했다고 성경에 명문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네가 하나님에게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신다’ 그랬으니까 이 두 성구가 갖다대보면 모순이 되니, 그러면 성경이 둘 중에 하나는 틀렸는가? 성경은 틀림없는 진리니까 이 속에서 진리를 찾아서 하나로 통하는 걸 찾아봐야 됩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에게 시험을 받는다고 하지 말아라 그말은, 그 시험 받는 원인이 자기한테 있다는 것을 지금 암시하고 있습니다. 네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환경이나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런 어려움을 당하게 된 그 원인은 너한테 있다 그말입니다. 자기한테서 찾아라 그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설명합니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악이란 것은 뭐라 그랬습니까? 악은, 창조주 하나님은 악이 없습니다. 악은 피조물로 갈 때 악입니다. 악이란 것은 피조물로 갈 때 악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에게는 악이 없고 하나님을 떠날 때 비로소 악은 생겨지게 되고 출발이 되는데 하나님이 아닌 것은 무조건하게 아니고, 지음받은 피조물이 하나님에게 소속이 되어 속해있을 때, 하나님의 것이 되고 속해있을 때는 선이라 그럽니다. 그런데 완전하신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이 하나님을 떠나서 제가 독단적으로 하나님 자리에 설때는 무조건하고 악이라 그럽니다. 그게 개인이든지 단체든지 전인류든지 어쨌든 하나님을 떠난 상태로 그게 중심이 되고 주체가 되면 전부다 그거는 크든 작든 많든 전부 악이다 그말입니다. 그런데 그 악이란 것은 피조물이고 그 피조물은, 그 악은 하나님을 떠난 피조물의 중심과 작용이 악이니, 그러면 하나님이 악에게 시험받지 않는다 그말은, 그 악의 모든, 하나님을 떠난 피조물 인간들의 어떠한 작용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거기에 영향을 받거나 피동되지를 않는다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을 바로 연결시켜 보면 사람이 죄를 지으니까 내가 죄 지으니까 하나님께서 괘씸해서 미워서 아니면 벌을 주려고 그렇게 나에게 이렇게 하신다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하느냐? 답을 찾아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말을 깊이 들어가서 살펴보면 하나님은 모든 역사는 예정이고 그 예정 순서를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권하시는 모든 주권 섭리로 모든 사람에게 어려움도 좋은 것도 닥치게 되어지는데, 그러면 사람이 죄를 짓거나 말씀을 순종하다 어려움 만날 때 그 어려움 오는 것은 죄를 짓는 것도 예정, 말씀 순종하다 만나는 어려움도 예정, 전부 예정 속에 든 것이고 그 예정은 하나님의 예정대로 된 주권 섭리로 되어지는 것인데 그러면 내가 만나는 어려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은, 그것은 네가 어려움을,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또 말씀 순종하므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려움이 아니라 너 속에 있는 그런 고칠 요소를 고치기 위한 사랑의 작용이고, 너를 하나님께서 온전한 사람 만드시기 위해서 예정하신 것이고 그 예정은 목적을 위한 예정이지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이 당신의 뜻대로 그 모든 것을 은혜로 그렇게 하시는 것이지 그 인간 그 죄 짓고 잘못된 그 인간에게 피동 되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괴롭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고통주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을 실패하게 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가 그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그리고 14절에 바로 콕 찍어서 말씀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다’. 사람이 온갖 종류의 고통을 당하는 것은 오직 자기 속에 있는 자기 욕심 때문이다 그말이고, 그런데 그 욕심이란 것은 종류가 굉장히 많습니다. 아주 수준 낮은 저급의 그런 욕심도 있고 아주 고급의 고등욕심도 있습니다. 욕심 아닌 것 같은데 욕심인 것도 있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악이라 그럴 때, 소선은 대선의 적이다. 작은 선은 큰 선의 적이다 그럴 때, 참 이것도 생각을 잘해야 되는데, 그러면 소선은 대선의 적이다 그럴 때, 그 소선이란 것은 작은 선이라 그 뜻인데 그 작은 선이 진정한 선이면은 그게, 대선이면 참된 하나만 되는 선이라 그말인데 선과 선은 이게 대립이 될 수가 있는 겁니까? 선과 선이 대립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소선은 대선의 적이다 그럴 때, 그 소선은 어떤 걸 말하며, 대선은 어떤 걸 말할까? 소선은 말하자면 세상적인 선을 말하는 것이고, 또 하나님 중심적인 선 같으나 그 선 속에 자기 중심이 들어있는 그런 성격의 선을 말하는 것이고, 그런 것들은 대선의 적이 되는 겁니다. 그 작은 선이 참된 선인 것 같으면 대선과 적이 될 수가 없는 것이고 어찌 됩니까, 그러면? 소선과 대선이 그 본질 본성이 같다면 대선과 소선은 하나기 때문에 소선은 대선에게 소속이 되고 하나가 되는 것이지 대립될 수가 없는데, 소선은 대선에 적이 될 때는 그 작은 선이라는 그 껍데기 속에 다른 것이 들어있기 때문에 맞지 않고 배치가 되어진다는 그말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욕심이란 것은 종류가 굉장히 많고 단계가 많습니다. 홍포 입은 부자가 자주 말씀드렸는데, 홍포 입은 부자의 그 모습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더니, 자색 옷 왕들이 입는 그런 옷 붉은 홍포 아주 세밀한 자색 옷, 또 고운 베옷, 홍포입니다. 홍포를 입고, 왕들이 입을 수 있는 그런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겁게 잔치했다. 그러면 옷이란 것은 자기를 꾸미는 것이고, 그 꾸미는 것이란 것은, 자기를 꾸민다 말은 요즘 시대에도 옷을 가지고 자기를 꾸미는 사람을 생각있는 사람들은 수준을 낮게 봅니다. 얼굴에 화장품으로 떡칠을 해서 그렇게 꾸미면, 남반들이 좋아하는 여인의 모습은 화장을 하되 아주 옅게 수수하게 하는 그런 것을 남자들은 좋아합니다, 일반적으로. 저 혼자만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일반적으로 남반들은 여반들이 얼굴 화장을 진하게 하고 냄새 강하게 풍기는 것은 싫어합니다. 거부합니다, 속으로 다. 대개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니까, 사람들이 얼굴에 진하게 하고 떡칠하고 그렇게 하는데 그것 보기 흉한 겁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면 아는 겁니다. 또, 인물이 잘났다고 잘난 척을 하면은 보기 싫어합니다. 옷, 돈 많다고 돈 많은 표를 내면은 사람들이 다 싫어합니다. 그러면 그 싫은 것은 돈이 많아도, 또 인물이 잘 생겨도, 옷을 잘 입어도 그걸 가지고 꾸미면은 오히려 사람들이 싫어하니까 격이 떨어지는 겁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이고, 많이 배운 사람은 배운 표를 잘 안 냅니다. 그래서 지성인들의 언행은 대개 보면은 무겁습니다. 신중하고. 빈 깡통은 요란하고, 빈 깡통은 바람에 쉽게 흔들리는데 그 속에 뭐가 꽉 찬 그런 통은 소리도 잘 안내고 잘 안 흔들립니다. 속에 든 것이 많으면, 배워서 아는 것이 많고 든 것이 많은 사람들은 가볍게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쉽게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습니다. 무겁게 움직입니다. 표를 잘 안낸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자기를 꾸미는 건데, 홍포 입은 부자가 자색 옷을 입고 고운 베옷을 입고 그러니까, 요란한 옷을 입고 화려한 옷 입은 걸로 그렇게만 생각하는데 그거는 하나의 표현이고, 자기를 이 세상에서 나서 세상에서 가장 제물도 많고 많이 배우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을 하나 표현해서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인데, 그러면 그런 사람이 자기를 꾸밀 때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드러내려 그러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인간관계적으로 굉장히 겸손해야 됩니다. 겸손해야 되고 신중해야 되고 사람들이 볼 때 거짓 없고 진실해야 되고 희생이 있어야 되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깜빡 넘어갈 수 있는 그런 정도의 모습을 가져야 그게 홍포 입은 부자의 모습으로 그리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은 사람들이 다 좋아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가장 숭배하는 그런 인물을 몇 사람 꼽으면 누굽니까? 역사에 사람들이 숭배하는 인물을 꼽는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석가, 또 공자, 소크라테스, 맹자, 이런 사람들 다 사람들이 존경하지 않습니까? 다 존경하고 우러러 봅니다. 그 사람들이 돈 욕심을 냈습니까? 자랑을 했습니까? 다 겸손했고, 인생에 대해서 걱정을 했고 다 그랬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다 높이고 존경하고 우러러보고 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대 원수입니다. 하나님과 가장 큰 원수 대적이 석가모니고 공자고 소크라테스고 그런 사람들인데, 이런 말을 세상에 말하면 알아 듣습니까? 이런 말을 가리켜 성경에 뭐라 그러던가요? 이런 말을 가리켜서 방언이라 그러지요. 세상이 모르는 이런 말을 방언이라 그런답니다. 성경 해석에서.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건 세상이 모른다 그말이지요. 욕심이란 것은, 수준 낮은 욕심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그런 것도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 그럴때 그 욕심은 저급의 욕심도 포함되지만은, 굉장히 고급의 고등욕심도 포함이 되는 겁니다. 목회자가 교회를 개척하고 전도를 하고, 열심히 전도하고 기도하고 설교하고 교회를 부흥시키는 그래서 교회가 부흥이 되면 그 속에 욕심이 들어있다고 말하면 되겠습니까? 교인들한테 은혜를 끼치겠다, 교인들 위해서 기도하고 설교준비해서 설교하고 심방 전도하고 교회를 부흥시키고 그렇게 열심히 하는 그 하나님 종 속에 욕심이 들어있다고 하면 말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 속에도 욕심이 들어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설교록에 보면은 그런 내용이 많습니다. 기도하되, 자기 중심으로 기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설교하되, 설교가 자기 중심으로 얼마든지 설교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 걸 가리켜서 고급의 욕심이라 그럽니다. 사람들은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그런데 그런 욕심이 있으면 그 욕심이 생기면 거기서 죄는 필연적으로 나옵니다. 일반적인걸 다 무조건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 극단 예를 들어서 고등적인 그런 욕심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욕심이란 것은 물질욕도 있고 아주 저급의 육신의 정욕도 있고 향락욕도 있고 좀 사람들이 고급으로 치는 지식욕심도 있고 명예욕도 있고 권세욕도 있고 소유욕도 있고 성취욕도 있고 별에별 욕심이 인간 속에는 다 있습니다. 책임지고자 하는 책임 욕심도 있고, 온갖 욕심이 다 있습니다. 전부다 욕심입니다. 그러면 그런 욕심을 사욕이라 그러는데, 그 모든 욕심 속에는 거기서 나오는게 뭐냐? 거기서 나오는게 죄고, 그 죄는 사망인데 그런 욕심들이 들어서 우리에게 오는게 뭐가 온다고요? 욕심이 들어서 뭐가 온다고 오늘 본문 전체에 말씀하고 있습니까? 시험이 온다 그말입니다. 그 욕심 때문에 시험이 온다. 욕심 때문에 어려움이 온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고통 없이 사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욕심을 뽑아 버리면 됩니다. 그런데 욕심이란 것은, 이제 말씀드린대로 세상적으로 좀 말하면 욕심이란 것은 부정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많은 폐단을 일으키는데 욕심을 긍정적으로 말하면 욕심이 있어야 열정이 있고 욕심이 있어야 힘이 나고 욕심이 있어야 일을 하게 됩니다. 욕심 없으면 아무 것도 못 합니다. 사람들이 물질욕이 있어야 돈을 벌게 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라는 그 민주주의 자본주의 국가에 가장 깊이 들어가면, 자본주의에 가장 근본적인 바탕은 그거는 인간의 욕심입니다. 자기 중심의 욕심. 이기주의적인 욕심이 자본주의가 성립될 수 있는 가장 근본 바탕입니다. 거기서 나온다 그말이지요. 그래서 이걸 사람들이 연구해서 알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야 된다고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고, 공산주의란 것은 인간의 이기주의적인 그런 욕심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해해서 만든 것이지 근본 인간이란 것은 이기주의적인 자기 욕심이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란 것은 결코 이상이지 성립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욕심이란 것은 여러 가지 층이 있습니다. 이걸 기억을 하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욕심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어려움이 오게 되는 겁니다. 고통이 오는 겁니다. 그러면 욕심을 다 뽑아 버리면,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종교 불교 같은데서는 이걸 어느정도 알고 보니까 그 사람들은 자기를 다 없애버려라, 그 없애버리라는 속에 그래서 그 사람들은 금욕주의를 주장하는 겁니다. 자기 속에 모든 욕심을 다, 자기 자체를 다 없애버리는 무아지경으로 들어가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게 다 없어지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은 피조물만 알고 그게 전부니까 그리 되는데 그렇게 가면 아무것도 없으니까 나중에는 허무한 걸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무(無)로 돌아가니까 허무가 되는 겁니다. 성경이 말씀하신 욕심이란 것은 인간의 욕심, 한말로 말하면 사욕을 말합니다. 육신의 모든 정욕 사욕. 그 사욕을 다 뽑아버리고 사욕만 뽑아버리면 그때부터 우리에게는 고통이 없게 되는데, 만약에 사욕이란 이것만 뽑아버리고 그 속에 성령의 소욕이 들어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반쪽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지게 됩니다. 그래서 쉽게 말하면 모든 환난 어려움 시험의 원인은 인간의 욕심이니까 욕심을 다 벗어버리고 뽑아버리고 나면 인간에게 고통될 것이 없는 것이고, 그러면 욕심을 버리면 그 다음에 할 일이 무엇인가? 자 여기 나옵니다. 14절,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러면 12절은, 12절 말씀은 우리들이 시험을 만나는 실질적인 그 생활에 당면한 것을 두고 어떻게 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실제 내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고. 13절은 12절 시험에 대해서 사람들이 잘못 알고 오해하니까 그 오해를 풀어주는 겁니다. 주의를 하고. 또 14절은 좀 더 구체적으로 그 원인들을 설명을 하고 있는 거지요, 15절까지. 그러면 16절에는 거기 대한 배경 지식을 지금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권면하고. 16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내 사랑하는 형제라 그말은 야고보의 형제인데, 우리 모두, 하나님 한분을 아버지로 모시고 한 하나님 아버지 밑에서 나온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요 자매라는 구속받은 성도들 이 모두를 다 내 형제들아 그리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속는다 말이 무슨 말입니까? 속는다는 말은, 거짓말에 넘어간다는 말이고 아닌 것에게 넘어간다는 말이지요, 속는다는 말은. 그러니까 속는다 말은 있는 줄 알았는데 있다해서 가보니까 없으니까 있다는 말이 거짓말이고, 그것이라 해서 가보니까 아니니까 속은 것이고, 참이라 해서 가보니까 참인 줄 알았는데 아니니까 속은 것이고. 전부 속지 말라는 말은 거짓말에 넘어가지 말라는 말이고, 아닌 것에게 자기 가진 시간과 소유와 세월을 그런 것들에게 꼬여 넘어가서 허비하지 말아라 말인데, 그러면 속지 말라는 말은 쉽게 한 말로 말하면 무엇에게 속지 말라는 말이 됩니까? 본문에 말씀에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무엇에게, 누구에게 속지 말라는 겁니까? 마귀에게? 죄에게? 세상에게? 사기꾼에게? 거짓말 쟁이에게? 누구에게 무엇에게 속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자기 욕심에게 속지 말라는 겁니다. 자기 욕심에게.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인간 자기 속에 있는 자기 욕심, 자기 사욕, 자기 속에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한 인간, 마귀한테 꼬임받아 자기 중심된 거기서 나오는 수많은 종류의 온갖 그런 요소 욕심들이 있으니 그런 욕심들이 인간을 꼬우는데 그 욕심이란 것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데, 그런게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은 모든 잉태라는 것은 생겨지면 그다음 그 속에서 잉태라는 것은 종자라는 뜻이고 그게 때가 되면 낳지 출산하지 않습니까? 잉태되면, 그러면 욕심이란 것은 죄도 마찬가지고, 욕심이 잉태한즉, 욕심이 생겨지면 그 욕심이 점점 욕심이 욕심을 낳고 욕심을 낳고 욕심을 끌고 들어가서 욕심이란 것은 이게 배암의 옥니처럼 끌고 들어가는 그런 요소가 있고, 욕심이 점점 커지고 많아지면 생겨지면 죄가 필연적으로 나오게 되고 그 죄는 점점 성장성 전염성 가지고 있어서 죄는 점점 커지게 되고, 그래서 죄 하나만 있어도 사람이 멸망하지만은, 작은 죄 하나 가지고 자기 일생이 망할 수도 있지만은 큰 죄로 인생이 망하는 수도 있지만은, 거짓말 하는 죄 하나 작은 죄 지었다고 친구한테 거짓말 하나 했다고, 돈 만원짜리 하나 거짓말 하는 죄 지었다고 그 사람 인생이 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죄라는 것은 점점 전염성 성장성이 있어가지고 죄가 있으면 자꾸 커져서 마지막에는 마침내 그 죄를 해결하지 않으면, 회개하지 않으면 암덩어리같이 퍼져가지고 자기 일생과 영원을 망치고 만다는 것을 가리켜서 사망을 낳는다고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런데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말라. 자기 욕심에게 속지 말라는 겁니다. 온갖 종류 욕심이 있으니까 그 욕심에게 붙들려서, 지식욕에 붙들려서, 오랜 세월을 공부한다고 많은 세월을 투자하는데 마땅히 해야 될 공부를 한다면 많은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멀리 봐야 됩니다, 멀리. 83년도 9월 4일 설교인가, 10월 30일인가 모르겠는데 유다서 설교를 하시면서 어떤 중간반 반사가 이렇게 저렇게 말하는데 내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면서 그럽니다. 멀리 봐라, 길게 봐라, 구름같은 간증자들봐라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멀리 봐야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내가 이 말씀대로 사는 걸 말하는게 아닙니다. 말씀대로 다 사는 사람은 희귀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적어도 알고 가질 것은 생각은 바로 가지고, 그래서 사상이라는 것이 중요하고 지식이란게 중요합니다. 멀리 봐야 됩니다. 인생을 넓게 봐야 되고 길게 봐야 되고 우리는 성경 통해서 영원까지를 배웠기 때문에 영원까지를 보고 오늘 판단을 해야 됩니다. 마땅히 공부해서 그 공부가 나의 영원을 향한 이 세상 평생의 신앙에 도움이 되고 필요하고 유익이 되는 것 같으면 밤잠을 자지 아니하고 공부를 하는 것이 마땅하고 그게 신앙이고 충성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고 단순히 영원까지 생각지 못하고 영원을 향한 내 평생의 생활에 영원한 구원을 이루어가는데 필요한지 안한지 모르겠고 도움될지 안될지 모르겠지만은 일단은 내가 배우고 싶으니까 욕심이 나서 지식욕에 의해서 공부한다면 그 공부가 앞으로 유익이 될지 해가 될지는 모릅니다. 지켜봐야 됩니다. 죄가 되지 않으니까, 나이가 그런때니까 열심히 하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해야 되고. 공부 안하면 죄 짓고 돌아다니고 엉뚱한 짓 하니까 그런 학생들은 공부를 죽도록 해야 됩니다. 그게 충성이고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게 달리 있다면 깊이 생각해 봐야 됩니다. 그러니까 욕심이란 것은 굉장히 많은 종류가 있다는 걸 지금 말씀 드리는 겁니다. 지식 욕심이 있으면 그 지식욕, 만약에 지식 욕심에 의해서 내가 움직인다면 거기 속지 말아라. 이 땅 위에 사는 동안에 물질만능주의라 그러니까 뭐니 뭐니 그래도 돈이 있어야 되겠다 생각해서 그래서 돈이 필요하다고 돈 욕심 때문에 돈을 가져야 되겠다고 열심히 땀 흘려 일하고 돈을 버는 사람 같으면 그 돈 욕심에 속지 말아라. 권세를 가져야 되겠다고 평생을 노력하는 사람이면 권세 욕심에 속지 말아라. 뭔가 내가 책임을 지고 뭔가 달성해야 되겠다고 하는 그것이 만약에 욕심 같으면 그 욕심에도 속지 마라. 욕심에 속지 말라는 겁니다. 수많은 종류의 욕심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욕심에 속지 말아라.
그다음 17절입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은사는 하나님에게 받아가지고 있는 우리 각자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그런 모든 것들 조건들을 말하겠습니다. 선물은 다 또 주시는 것이고. 각양, 온갖 종류의 온갖 형태 온갖 모양의 각양 좋은, 좋은 것은 하나님이 주시면 좋은 것이니까 영원을 두고 시공을 초월한 영원을 두고 우리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 참으로 좋은 것, 영원토록 좋은 것, 세상과 천국에 다 좋은 것,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어디서 오느냐? 이거는 인간의 욕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의지로 인간의 노력으로 인간의 열심으로 부지런함으로 근면성실함으로 되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어디서 나오느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위라는 것은 평가 가치적으로 위를 말합니다, 위.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 빛은 하나님만이 빛인데 그 하나님 한분에게서 나타나는 그 빛이 많은 것들을 통해서 나타날 때 그걸 전부 빛들이라 그럽니다. 사랑은 빛이고, 미움은 어두움입니다. 행복은 빛이고 불행은 어두움입니다. 또 오해는 어두움이고 이해는 빛이 되겠습니다. 평강은 빛이고 고통은 어두움입니다. 진실은 빛이고 외식은 어두움입니다. 참은 빛이고 거짓은 어두움입니다. 이런 빛들이 이 세상에 있는데 그 빛들은 전부 어디서 나오느냐? 세상에 나타나는 사람들에게 비치는 모든 빛들은 전부 빛의 원천이신 하나님 아버지 그분에게서 다 나오는 겁니다. 빛들의 아버지, 그 모든 그러니까 각양 좋은 은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온갖 종류의 좋은 것들, 진정 사람에게 영육으로 다 참으로 좋고 영원히 좋은 그 모든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전부 그 빛으로 나타나는데 그 빛들의 아버지 하나님 그분에게서 내려오나니, 그런데 그 분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그분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믿을 수 있다는. 그분은 요동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에 피동되지도 아니하고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되도 그분은 거짓도 없고 변함도 없고 가감도 없는 만세반석으로 참으로 믿을만한 그분에게서 온다 그말이지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러니까 그분만이 믿을 수 있고 바라볼 수 있고 의지할 수 있고 그분에게 내 모든 걸 맡길 수 있는 유일한 그분이니까 그분에게 모든 것 다 맡겨놓고 그분 원하시는대로만 하면 되는데 그 속에 그리하지 못하는 것이 왜 그리하지 못하느냐? 모든 걸 하나님께 맡겨놓고 믿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면 되겠는데, 왜 인생이 그리하지 못하는가? 왜 그리하지 못합니까? 뭐 때문이라고요? 욕심 때문에 못 합니다. 온갖 종류의 욕심 때문에. 그래서 사람이 욕심이 들어가면 괴롭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욕심이 들어가면. 발람이 발락이 보낸 사자들을 보고 발락이 보낸 많은 부귀영화를 보고 거기 욕심이 들어가니까 그때부터는 발람은 죽을 지경입니다. 말은 그리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라하는지 안가라 하는지 내가 모르겠으니까 여기 자라. 거짓말입니다 그말은. 양심을 속이는 말입니다. 발람은 선지자입니다. 가야될지 안가야 될지 아는 말입니다. 아는 일이고, 환하게 답이 나와 있습니다. 주일을 지켜야 될지 말아야 될지 기도해보겠습니다. 말이 되는 소립니까? 내가 거짓말 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기도 좀 해보고 하겠습니다. 그거는 기도하는 그 자체가 죕니다, 그거는. 그런 기도는 하는게 아닙니다. 주일을 지켜야 될지 말아야 될지 내가 기도하고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러면 그 기도는 죄고 생각은 전부 죕니다. 안 하는 겁니다, 그거는. 주일은 무조건 지키고 보는 겁니다. 안 가야 되는데, 왜 내가 물어보겠다 그말은 기도 해보겠다 그말이거든요. 하나님 앞에 물어보겠다, 기도 좀 해보겠다. 기도 해보겠다는 것은 왜 기도해 봐야 됩니까? 무엇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드는 겁니까? 욕심이 들어서 그런 안 해도 될 일을 하는 겁니다. 두번째, 또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라 하신다고 그걸 가라는 것인 줄 알고, 갈라면 가라. 그러니깐 갑니다, 털레 털레. 가니까 나귀가 세 번을 막았지요. 고통스러웠지요. 그만하면 알 것인데, 얼른 회개하고 돌아가면 그때라도 돌아가면 회개할테니까 괜찮은데 기어코 끝까지 갔잖습니까. 가고 난 다음부터는 그때부터는 목숨 걸고 지켜도 다 이미 지나가버렸습니다. 목숨 걸고 지켰다하지만은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돈 욕심에 끌려서 몇 번을 제단 쌓고 안 할 짓 하고 난 다음 마지막에 기어코라도 하나님 백성들 약점을 알려주고 난다음에 많은 걸 받았겠지요. 마지막에는 여호수아의 칼에 죽었습니까? 칼에 죽었습니다, 결국은. 다 망했고. 영원토록 비참한 그런 사람이 되고 말았는데 그게 왜 그리 되어졌느냐? 자기 속의 욕심 때문에. 물질 욕심, 부귀 영화 욕심. 게하시가, 왜 나아만의 문둥병이 게하시에게 들어갔습니까? 물질 욕심 때문에. 사람이 물욕도 크고, 명예욕도 크고, 권세욕도 크고, 권위욕도 큽니다. 성취욕도 대단히 큽니다. 사람의 욕심은 도수가 굉장히 종류가 많고, 차이가 굉장히 많습니다. 온갖 종류 욕심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욕심이 있으면 사람은 괴롭게 되어집니다. 무책임하고 욕심을 버리는 거는 틀립니다. 그래서 자기 속에 욕심 중에 고급 욕심이라면, 사람을 얻고자 하는 것도 욕심입니다, 고급 욕심. 그런데 사람을 얻고자 하는 것도 그것도 하나님께서 하라는 그 선이 있습니다. 그 넘어가면 욕심이 되는 것이고, 욕심이 되면 그때부터 악이 되는 겁니다. 교역자가 교회를 키우고자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욕심이 아닌 내가 할 책임과 의무가 선이 어디까지인가를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 양심과 인간의 구원과 현상의 자연 계시와 이 몇 가지를 가지고 생각해보면 답은 나옵니다. 거기까지만 하면 그때부터는, ‘제가 할 수 있는 거는 여기까지입니다. 나머지는 저는 할 게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겨놓고 나면 그때부터는 마음이 편안합니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고 그냥 편안하고 괜찮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 더 들어가서 뭔가를 붙들려고 하던지 손해 안보려고 하던지 하려고 하면 그때부터는 마음이 굉장히 고통스럽고 무겁게 눌리게 되어있습니다. 그게 다 욕심입니다. 그러니까 속지 말라는 겁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래놓고 18절에 ‘그가 그 조물 중에’ 조물이라 말은, 지음받은 피조물 전부를 말합니다. 모든 피조물.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이게 결론이고 근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다 여기 있습니다. 그가 그 조물 중에라 말은, 후택설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지으실때부터 그랬습니다. 수많은 피조물 중에 우리는 하나님의 첫 열매가 되기 위해서 지음 받았습니다. 열매란 것은 맺어지는 결실입니다. 외견상 첫 열매는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은 하나님이니까 그분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사람되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하여 그 대속을 입고 그 대속을 근거하여 그 대속과 대속으로 인한 진리와 영감으로 중생된 우리들이 주님같은 내가 되어지는게 첫 열매입니다. 그런 내가 되는게 첫 열매인데, 그런 내가 되는 것은 어떤 과정 과정을 통해서 되어지는가? 내 속에 있는 이 세상에서 이 땅 위에서 여러 종류의 고통 괴로움 받을 수 있는 그런 원인되는 하나님 앞에 잘못된 그런 요소를 하나씩 하나씩 고쳐나가는 그런 과정들을 통하여 비로소 주님을 닮은 온전한 사람 첫 열매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이걸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역사를 하고 계신다는 것이기 때문에 시험과 연결시켜보면은 우리가 모든 답이 환하게 나오게 되어있고,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를 다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 앞에 닥치는 모든 어려움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고 해결해 나가면 해결 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말이지요. 우리가 몰라서, 다 깨닫지 못하고 다 몰라서 못하는 수 있고, 우리들이 부족해서 못하는 수 있어도 말씀은 틀림이 없습니다. 말씀 속에 영감을 주셨고, 우리에게 양심을 주셨고 또 우리에게 현실을 주시고 이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내 속에 신앙 양심, 눈에 보여지는 현실의 상황, 인간 구원의 목적, 하나님의 영광 기뻐하시는 것, 이런 몇 가지를 종합해보면 우리들이 내게 당면한 모든 현실 현실에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은 환하게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각자 만나는 시험 어려움은 사람마다 다 다르고, 형태는 다른데 그 어려움들도 속에 찾아 들어가보면 이치는 꼭 같습니다. 12절, 실질적인 것이고, 13절은 거기 대해 사람들이 잘못 알고 오해하니까 설명하는 것이고, 14절 15절까지는 구체적 원인을 좀 더 직접 설명하는 것이고, 그다음 16절부터는 거기 대한 배경지식을 말씀하고, 18절은 그 모든 전체 목적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걸 생각해보고 우리 앞에 닥치는 모든 어려움들을,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하고 이 말씀으로 잘 해결하는 그런 우리가 되도록 하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차근 차근 성경을 근거해서 생각해보면 환하게 알 수 있습니다. 좀 깊이 생각해보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