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9-주후(요6:1-15)
오병이어2014-10-21조회 306추천 26
20141019 주후
요한복음 6:1-15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그 깊은 의미를 다 헤아리지 못해도 아는대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 여기 4절에 보니까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고 했습니다. 명절이라 그러면 좋은 날로 그렇게 우리는 인식을 하고 있지만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은 한편으로는 해방과 자유를 얻은 절기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환난의 절기입니다. 그래서 유월절 절기는 일반적으로 환난의 절기라 그리 말합니다. 유월절은 환난. 같이 해보시겠습니다. ‘유월절은 환난’. 성경에 유월절이 나오면 이거는 한편으로는 해방과 자유를 얻은 절기이면서 한편으로는 그 해방과 자유를 얻을때 그냥 얻은 것이 아니고 많은 환난을 통해서 얻은 것이다 그말입니다. 그 환난에서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았고 애굽 백성들은 다 수없이 죽은 거의 전멸 가까이 되어진 것이 유월절 환난입니다. 그러면 오병이어의 표적을 말씀하시면서 앞에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고 이렇게 일부로 사이에다가 끼워놓으신 것은 이 오병이어의 표적과 유월절은 연관성이 있다 그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월절은 환난의 절기인데 오병이어가 있기전에 환난의 절기가 있는 걸 말씀하셨으니 환난때일수록 개인적인 환난, 가정적인 환난, 교회적인 환난, 교계적인 환난, 어떤 환난때일수록 어려울수록 어려움을 만날수록 우리가 더욱 조심할 것은 오병이어의 표적에 말씀하신 깊은 뜻에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더욱 더 해야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2장에 유월절 환난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 첫째 뭐 먹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고 나서 먹을때 뭘 먹어라고 했습니까? 양고기를 먹습니다, 양고기. 양고기는, 양은 어린 양이고, 어린 양은 누구를 예표합니까? 예수님을 예표하기 때문에 그 양고기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으신 고난을 생각하는게 양고기를 먹는 건데, 그 양고기를 먹을때 꼭 같이 먹어야 되는 것이 첫째가 뭡니까? 무교병입니다, 무교병. 누룩을 넣지 아니한 떡. 부풀지 않는 떡. 무교병을 먹으면 맛이 어떨까요? 무교병은 먹으면 딱딱해서 맛이 없답니다. 굉장히 딱딱하답니다. 안에 누룩을 넣어서 밀가루 사이를 벌려서 부풀어야 말랑말랑하고 부드럽고 빵이 맛있는데, 떡이 맛있는데 무교병은 누룩을 안 넣으니까 이게 딱딱하게 들어붙어서 아마 그 떡이 말라붙으면 돌처럼 딱딱하게 되지요. 그게 무교병인데, 먹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도 그걸 반드시 같이 먹어라고 했습니다. 무교병과 쓴나물. 환난때일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불목을 조심하고 화목을 더욱 힘을 쓰라는 것을 말씀을 하셨고, 여기 본문에도 오병이어 도리를 말씀하시기 전에 앞에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고 하나 끼워넣어서 일부러 이렇게 말씀을 해두셨습니다. 참고로 기억을 하십시다.
이 본문에 말씀은 백목사님 설교록에 나오는 말씀인데 이 말씀을 하신 시점이, 제가 지금 설교록 교정을 64호를 보고 있는데, 그 날짜가 1980년, 000 선생님 몇 월 달입니까? 000 선생님, 혹시? 0 선생님이 교정보신 것도 있는 것 같던데. 1980년 이게, 제가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1980년도 설교입니다. 그 설교에 나오는 내용인데 그때 서부교회 분위기가 반영된 설교입니다, 상황이. 그래서 백목사님의 모든 설교록 이름이 목회설교록이라, 목회라 말은 사람을 길러서 구원하는 그게 목회고,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바로 인도하는게 목회고 그 사람을 가르치고 길러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가는 거기에 필요한 설교라 그래서 이름을 목회 설교라 그러고, 그것을 모아 놓은 것이라 그래서 목회설교록이라고 이름을 붙여놨는데, 그러기 때문에 백목사님의 모든 설교는 목회설교고, 그래서 그 설교한 모든 설교 거의 대부분이 그 시대와 그 당시 교회와 교계와 그 시대 상황이 반영이 다 되있습니다. 그래서 설교록을 읽어보면 그 시대 분위기를 상당히 깊게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특히 그 교회 분위기를. 그런데 이때 이 설교를 할 당시에 서부교회 그 형편은, 서부교회 주일학교가 폭발적으로 부흥이 돼서 매주 팔천명씩, 만명씩 매주 서부교회로 모이던 때입니다. 한창 탄력을 받고 아주 최고조로 올라가던 그런 올라가는 도중의 때입니다. 그리고 8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약간 내려오기 시작하는데. 80년도라서, 70년도 후반부터 올라가기 시작해서 80년대 초에 아주 최고조로 올라가던 그런 때입니다. 그런데 그리 되니까 예배당이 좁아가지고, 서부교회 예배당이 상당히 큰 편인데 실평수가 한 대지가 아마 육백몇평인가 그럴건데 상당히 큽니다, 예배당이. 우리 예배당보다 열 몇배는 크겠지요. 굉장히 큰 예배당인데, 층층이 대개 다 그런데. 그 예배당마다 꽉꽉 차가지고 그때는 신관 짓기 전이니까 조금 덜했겠는데요. 그러니까 콩나물 시루처럼 예배당이 그렇게 빡빡해서 주일오전 주일학교 예배시간 되면은 발 디딜 틈도 없이 그 넓은 예배당이 꽉 찼었습니다. 1층, 2층, 3층, 또 한쪽 지하층까지 꽉꽉 들어차서. 그래서 학생들은 자꾸 많아지고 모이는데 예배당이 포화상태가 되니까 예배당을 지어야 되는데 대책이 없다 말이지요. 돈도 없지요, 땅도 없지요 주변에. 그래가지고 많은 기도하고 연구 끝에 양쪽으로 예배당을 넓혀 짓고 그리한 그런 때입니다. 그래서 그와 연관된 말씀이고, 그래서 이 많은 주일학교 그 무리들, 많은 무리들이 주님을 찾아 주일마다 예배당에 오는데 이 무리를 우리가 돈이 없다고, 형편이 어렵다고, 우리 형편에 안된다고 이들을 어떻게 하겠는가? 감당을 해야 된다 그말이죠. 그래서 예배당을 그 후에 얼마 안 있어서 새로 굉장히 크게 더 지었었습니다. 그런게 있었고. 또 하나는 중간반 학생들도 서영준 목사님이 그때 부장이 되고 하면서 굉장히 올라가서 없던 중간반을 2천 몇명까지 올라갔었습니다. 중간반 학생의 숫자가. 중간반 숫자만 2천5백명까지 올라가고. 그러니까 장년반 숫자가 3-4천명, 중간반이 2천오백명, 주일학교 만명, 아주 그당시 부산에서 제일 크고 전국에서도 아마 그 당시로 말하면 순복음교회 다음으로 컸던지, 전국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을만큼 큰 교회였습니다. 그 당시 큰 교회는 지금처럼 많지 않았으니까. 세계적으로 주일학교가 한창 부흥해서 신문에 나고 방송 타고 세계적으로 교계에서 이름이 나기 시작한 막 알려지던 그런 때입니다. 중간반 학생들이 이천몇명 되는데 집회를 가면, 학생들이니까 돈이 없고 그때는 뭐 잘 모를때고 경제도 어려울 때고 하니까, 집회가면 돈이 없으니까, 집회비가 말하자면 요즘 돈으로 만원 같으면 학생들이 만원을 못 낸다 그말이죠. 믿는 가정 아이들은 내는데, 못내는 가정 아이들은 많이 못내고 그래서 선생님들이 보조도 하고 그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못 내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보조를 하려 그랬는데, 중간반 부서에서는 ‘아무래도 학생들은 다 못내고 집회는 가고 싶어하고 가야 되겠고 선생님들도 돈이 한정이 있으니까 장년반에서 지원을 좀 해주십시오’ 하고 지원 요청하니까 장년반에서는 ‘그 철없는 아이들 데려가서 애만 먹이는데 뭐하려고 데려갑니까. 적당히 하고 차비 내는 아이들만 데려가고 말지요.’ 이런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아주 대책망하신 것도 있고. 그들이 이렇게 주님을 찾아오는데 우리 형편이 어렵다고 힘들다고 나 몰라라 할 수 있겠느냐. 그런 교회 입장, 형편, 분위기 그런 것이 반영된 설교다 이걸 참고로 기억을 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언제든지 해당이 되지만은 그러나 우리들이 또 필요할때마다 이런 성경을 연관시켜서 여러 가지면으로 구원 도리를 생각해보고 찾아볼 수가 있는 겁니다.
기억을 하시면서,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서 왔습니다. 따라온 것은 예수님께서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따라왔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말씀만 가르쳐가지고는 모르니까, 죽은 사람도 살리고 38년된 병자도 고치고, 소경의 눈도 띄우고 앉은뱅이도 일으켜 세우고 이런 표적이 마구 일어나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더욱 따라다녔습니다. 백목사님 생전에도 한창 능력있게 병 고칠때는 그만 저는 직접 보지 못했고 간접으로 말만 들었고, 85년도 대구집회때 적어낸 그런 기록을 많이 봤고 그랬는데. 살아생전에 그 광경을 본 분들 말 들어보면은 집회를 하는데 막 방해하고 그러면 목사님께서, ‘너 그러면 눈이 먼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눈이 멀어버린 답니다. 눈이 멀어버리고 ‘너 자꾸 그러면 벙어리 된다’ 그러면 벙어리 되버린답니다. 그런걸 보니까 사람들이 벌벌 떠는 겁니다, 목사님 앞에. 그래서 백목사님의 능력이 있고 권위가 있고 설교가 사람의 패부를 찔러내는 그런 설교를 하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앞에 하나님 모시듯이 그렇게 모시고 한 그런 기독교의 한 역사지요. 한 역사가 있었는데, 그런 이적 표적이 나타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주님도 따라다녔다 그말이지요. 그래서 그리되니까 백목사님께서 그런 병 고치는 능력이 많이 나타나니까 목사님이 집회만 간다하면은 강단 주변에 예배당 안에 전부 병자들만 빽빽하게 모여 든답니다. 병자들만 빽빽하게 예배당 안에 들어오고 성한 사람들은 예배당 밖으로 다 밀려나가니까, 시골이니까 예배당이 그리 크지 않은데, 그런데도 몇백명 모여들었는데, 그리하는데 병자들이 빽빽하게 앉아있고 성한 사람들은 저 멀리 물러나니까 한번 설교하려니까 아무리해도 설교가 안되서, 목사님께서 설교가 안되서 기도하니까 ‘만약에 하나님께서 병 고치는 여기 치중하고 말씀 전하는 도에 소홀해질까 싶어 이것 때문에 말씀을 막으시고 은혜를 안주신다면 앞으로는 이걸 바꾸겠고, 병 고치는데에 기도라던지 안수라던지 이런 걸 안하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기도하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을 열어주셔서 그날 아주 큰 은혜가 있었다 그러거든요. 그 당시 있었던 분 말 들어보면 은혜받고 사람들이 붕붕 뛰었답니다. 땅에서 40센치씩 뛰고 그랬답니다. 어떻게 그런지 모르겠는데 기도를 하는데 막 붕붕 뛰면서 기도를 했답니다. 공중에 떠가지고. 제가 직접 그리 했던 분들한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나서부터는 목사님께서 신유의 은사는 오래토록 말씀을 안하시다가 그다음 이제 80년대 중반에 와가지고 이상한 사람들이 병을 고쳤다, 순복음 교회 이런데 나와가지고 하니까 그때 또다시 목사님께서 미혹 받는 것 때문에 많이 말씀을 하셨지요. 그러니까 기독교라는 것은 그런 신유의 이적의 능력이 없는게 아니고 실제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게 주목적은 아닌 것이고. 어쨌든 예수님께서 많은 이적을 행하시고 말씀도 은혜롭게 하니까 수많은 사람이 구름떼처럼 주님을 따라다녔고 이때도 디베랴 바다에서 산으로 올라가시니까 많은 사람이 주님을 따라갔고 예수님께서 오랜 시간 말씀을 가르치니까 해가 져물어 갔다 그말이죠. 그러니까 들판에서 밤을 보낼 수 없으니까 돌려 보내야 되는데 제자들은 해가 저물어가고 이곳은 빈 들판이고 우리는 가진 것이 없으니까 무리를 보내서 각자 먹을 것을 알아서 사먹도록 해야 됩니다. 그럴때 주님은 갈 것이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우리 있는 이곳이 빈 들판이고 우리 가진 것도 없고 있어도 이백데나리온의 떡을 사도 부족한데 어디서 떡을 사서 이 많은 무리들에게 먹이겠나이까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셨다고 그리 말씀했습니다. 그럴때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그 무리들에 대해서 날은 저물어 가고 이곳은 빈들판이고 먹을 떡을 살 돈도 없고 살수도 없고 이런 상황 형편 입장이 자기들의 능력이 이러니까 할 수 없이 이들은 보내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고 제자들로서는 할 수 없는, 말하자면은 외통목에 몰려서 그 길 밖에는 길이 없었다 그말이지요. 제자들이 볼때는 그 길밖에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빈들판에 날은 저물어가고 가진 것도 없고 있어봐야 살 때도 없고, 그들의 능력으로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그러니까 힘들고 기진 하겠지만은 각자 알아서 돌아가면서 밥을 사먹도록, 자기 책임 자기가 지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제자들로써는. 그러나 주님은 그게 아니었거든요? 주님은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고,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그리 물었다 그러셨습니다. 거기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이 제자들은 그 많은 무리들에 대해서 제자들은 그들을 책임을 지되 자기 몸처럼 자기 처자식처럼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고 책임지는 것이 그들에 대한 사랑의 도수라던지 강도가 주님만큼 안됐다 그말이고, 참 어렵지만은 자기 몸같이 안됐다는 말이고 주님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은 그들의 사랑이 없는 연고로 그래밖에 안됐던것이지, 그들이 정말 그 무리들을 진정 가다가 기진할까 염려되고 자기 몸처럼 자기 처자식처럼 그런 한몸같은 뜨거운 사랑 갈급한 사랑을 가졌다면 차라리 굶어도 같이 굶고 여기서 죽어도 같이 죽고 그리 하지 너희들 알아서 돌아가다가 굶던지 먹던지 알아서 하라고 무책임하게 돌려보낼 수는 없는것이다 그말이지요. 그 사랑을 가졌다면 주님을 봤을 것이고 주님에게 의논했을 것이고, 주님을 봤다면 주님의 능력을 바로 믿으니까 바로 해결이 됐을건데 그들에게는 그냥 책임을 벗기에 급급했고 그래서 책임지지 않기 위해서 돌려보내기에 급했지, 사랑이 없으니까 주님을 찾고 주님으로 인한 해결할 생각을 하지를 못했던 것이 사랑이 없는 연고로 그리 되었다는 겁니다. 이걸 오늘 우리에게 이 제자들의 태도를 통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겁니다.
오늘 우리들도 우리 주변에는 어떤 형태로든 우리 주변에는 사람들이 찾아 오고 있고 찾아오게 되어있습니다. 많으냐 적으냐 그 차이지, 어린 학생들 또 중간반 학생들 장년반 식구들 어떤 별에별 원인과 이유와 목적과 그런 것 때문에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몇 사람이든 어떤 분한테는 집으로도 찾아오고 교회로도 찾아오고 별에별 형태로 우리를 주님 모시고 있다하여 찾아오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있다 그말이지요. 넓은 사람에게는 좀 많이 오고 좁은 사람에게는 적게 오는 차이지, 심지어 우리가 믿는 부모님이라면 신앙 어린 자녀들은 주님이 그들에게 맡긴 사람들이고 그를 찾아온 사람과 같은 입장인 것이고, 신앙 있는 남편에게 신앙 어린 아내라면 그 아내는 이 무리와 같은 사람이고 반대도 마찬가지고. 어쨌든 어떤 형태로든 주님 모신 우리를 찾아온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있다는 겁니다. 그럴때 우리가 그들을 감당하다가 이끌어나가다가 함께 가서 인도해가다 이끌어나가다가 그럴때 사람은 체력도 가진 지능도, 물질도, 형편도, 모든 것이 유한하고 우리는 전지전능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상황이 인간의 힘으로써 해결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닥칠때가 있다는 겁니다, 여러 형태로. 개인적이든 가정적이든 교회적이든 교계적이든 어떤 형태든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형태가 인간 구원의 관계, 사람을 버려야 되느냐, 각자 돌려 보내야 되느냐, 끝까지 책임져야 되느냐 그런 관계를 두고 그런 어쩔 수 없는 그런 상황에 부딪힐때가 우리 앞에 닥쳐 온다는 겁니다. 그럴때 이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그 책임을 면하려했는데 그것은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에. 주님의 무리를 사랑한, 인간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심정을 깨닫지 못하고 그러기 때문에 그들로써는 이럴 수 밖에 없으니까 형편이 이러니, 입장이 이러니, 환경이 이러니, 내 처지가 이러니까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돌려보내야 됩니다. 그렇게 논리적으로 다 그리 될 수 밖에 없지만은 더 깊이 들어가보면 그들을 정말 뜨겁게 사랑한다면 주님을 붙들고 매달려서 같이 해결하는 그게 맞는 것이지, 내가 할 수 없으니까 보낸다는 것은 주님이 원치 않았던 일이고 기뻐하지 않았던 일이란 것을 본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걸 기억하고, 우리 앞에 이런 상황이 닥쳤을때 우리는 늘 이걸 염두에 두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없으니까 책임을 벗으려 했고, 사랑이 없으니까 믿음도 생겨지지 않았습니다. 주님도 안 보였고, 주님을 향한 믿음도 그들에게 생기지 않아서, 주님이면 다 해결이 되어지는데 어떻게든 주님 한분이면 다 해결이 되는데 주님도 안보였고 믿음도 생기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주님을 섭섭하게 하는 이런 결과를 맺고 말았다 그말입니다.
기독교라는 것은, 기독교는 뭐냐? 기독교는 한문 글자고, 기독교를 우리 말인지 모르겠는데 풀면은 예수교라는 뜻이고, 기독교나 예수교는 같은 말이고, 예수교라는 말의 뜻이 뭐냐? 예수교라 말은 예수의 도라는 뜻이고, 예수의 도. 예수의 도가 뭐냐?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뭡니까?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신 분인데,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것이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고 그게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의 전부는 말하자면은 하나님의 백성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기독교의 전부다 그말이지요. 그게 예수교입니다. 기독교고, 그게 교회고. 그리고 그 기독교의 시초가 어디냐? 기독교의 근본 뿌리가 무엇이냐? 기독교의 뿌리, 예수교의 뿌리는 인간 구원을 전부로 삼는 기독교 예수교의 근본 출발은 자존하신 하나님이고, 그 자존하신 하나님의 첫 역사가 기독교의 출발인데 그게 뭡니까? 자존하신 하나님의 첫 역사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 목적이 뭐냐?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시초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란 곳에서 기독교 신앙 세계에서 인간 구원을 빼낸 것은 교회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그래서 신앙 노선이 있는데, 신앙 노선이란 것은 신앙 노선과 인간 구원은 뗄 수 없는 하나입니다. 노선과 인간 구원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하나라서 신앙 노선이 인간 구원을 위한 노선이 아니면 그 노선은 틀린 겁니다. 아닌 겁니다, 노선이 아니고. 인간 구원에 손해 끼치는 노선은 잘못된 노선입니다. 동시에 올바른 노선없는 인간 구원도 없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 노선이란 것하고 인간 구원이란 것은 하나라. 결국 같은 말이 되는 겁니다. 같이 가야 되는 겁니다. 뗄 수가 없는 겁니다. 어느 하나를 앞세울 수가 없는 겁니다. 노선이 먼저냐, 인간 구원이 먼저냐 뗄 수 없는 하나입니다. 신앙 노선은 인간 구원을 위한 것이고, 인간 구원 때문에 있는 것이고 동시에 인간구원이란 것은 올바른 노선 없이는 인간 구원도 없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둘은 뗄 수 없는 하나다 그말이지요. 어쨌든 신앙이란 것은, 교회란 것은 인간구원이 전부고 이게 목적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할때 예수님께서 율법에 뭐라고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었느냐? 네 마음과 목숨과 힘 뜻 다해서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처럼 하라. 하나님 사랑도 결국 인간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을 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인간 사랑하는 것이 없으면 거짓말이라 그랬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형제를 사랑치 않는 것은 거짓말 하는 자다. 하나입니다. 인간 사랑이 바로 되었으면 그거는 하나님 사랑과 연결된 인간 사랑이라야 되지, 하나님 사랑 없는 인간 사랑도 없는 겁니다. 이 둘은 하나입니다. 결국 지상교회에서, 지상교회의 최대 목적 전부는 바로 인간 구원입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을 말씀의 사람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형상 만드는 것이 이것이 지상교회의 목적이며 가장 중요한 일이며 전부다 그말이지요.
알고보면 구별해봐야 되겠는데, 진리는 사람보다 위에 있습니다. 진리는 사람보다 위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인간 구원을 위한 진리가 아니면 그 진리는 사람에게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는 검이고 칼인데, 이 검을 잘못 쓰면은 검한테 망한다는 그말이 세상 권세를 잘못쓰면 권세한테 망한다는 말도 되고, 말씀을 잘못 써먹으면 그 말씀 때문에 자기가 심판 받는다는 말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심지어 진리까지도, 진리는 사람보다 위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진리가 인간 구원을 위한 진리가 아니면 그 진리는 적용이 잘못되서 사람들에게 큰 손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더 강조해서 말하면, 하나님은 당신이 전분데 그 하나님이 인간 구원이 없는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분에게 영감이 없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고 영광의 찬미인데 그 영광의 찬미란 것은 인간이 있고 인간 구원이 있을때 영광의 찬미가 있는 것이지, 인간 구원 없는 영광의 찬미는 없습니다. 이게 하나님 목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겁니다. 하나님이 사람되시고 사람되신 그 역사가, 그 사람되셔서 하신 그 역사가 대속 역사고 그리고 부활하신 사활의 대속 역사가 예수교의 전부 아닙니까? 이게 하나님의 전부고 이게 기독교의 전부고 이게 그 속에 중심이 인간구원이다 그말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심정, 주님의 심정은 인간구원에 대해서 이토록 당신의 전부를 다 받친 그게 인간구원의, 사랑의 심정입니다. 우리가 이런 심정가지고 실제로 그리 살지 못해도 사랑이란 것은 사랑의 요소 사랑의 작용 사랑의 성품이란 것은 마음의 요소입니까, 몸의 요소입니까? 사랑이란 것은 마음의 작용입니까, 몸의 작용입니까? 마음의 작용이 크지 않습니까? 마음이 가면 몸도 가는 것도 물질 가는 것도 필연입니다. 육체는 정신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그러니까 마음의 작용, 몸의 작용이 크고 물질의 작용이 큰데 그러나 그보다 먼저 앞선 것은 마음의 작용이 더 큰 겁니다. 내 마음 속에 사람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주님의 사랑의 심정을 헤아려서 얼마만큼 주님과 그 사랑에 동참하고 뜨겁게 되어져서 내가 사람을 주님처럼 아끼고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외부 자기의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충성이나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어지는 겁니다. 모든 물질 처리도, 사건 처리도 마찬가지로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첫째 우리가 기억할 것은 제자들이 주님의 사랑 같은 뜨거운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이 제자들은 이 무리들에 대해서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벗어버리려 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연고로. 그것을 주님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어라. 너희들이 책임을 져야 된다. 그들로서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으나 그리 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은 그들이 보는 사랑이 없는 관점에서 보니까 그리 되었지 사랑의 관점에서 보니까 답은 보였고 주님은 해결을 했습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을 상대할 때 우리들이 부족해서 내가 사람 인간 구원에 대해서 내 시간과 노력과 물질을 많이 드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중심과 소원, 우리의 정신만큼은 어쨌든 인간 구원 이웃을 구원하는 그 일에 우리는 모든 걸 다 초점을 맞춰야 됩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그게 되어야 이웃 구원이 되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가장 우선에 두고, 그분에게 연결시켜놓은 인간구원을 그다음 최우선으로 두고 모든 것을 해나가야 된다 그말이지요. 그 사랑의 뜨거움에서 이런 것은 생겨질 수가 있다는 겁니다. 아브람의 깨달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역사에 없는 부활의 깨달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처럼, 사람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있으면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그런 생각이 지혜가 능력까지도 나오게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는데 자기들 중간에 길목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원치 않는 곳으로 주님이 간다하여 길을 막고 비켜주지 않을때 제자들이 있다가 말하기를 ‘선생님 우리가 기도해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가지고 이 길 막는 사람을 멸하기를 원하시나이까’ 그럴때 예수님께서 꾸짖으시고 다른 길로 돌아가셨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능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랑이 있는 곳에, 인간 구원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말입니다. 이걸 중요하게 우리가 기억을 하고, 그러기 때문에 문제는 외부로 나타나는 것도 중요합니다. 몸을 바쳐 충성하는 것, 시간 바쳐 충성하는 것, 물질을 드리는 것 이런 것들이 다 중요하나 그 모든 것들의 출발은, 그 모든 것들의 근본은 우리의 마음 중심 사상에서부터 출발이 되는 겁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 대해서 어떤 마음 어떤 자세 어떤 중심을 가지고 사람을 상대하며 물질을 상대하며 일을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판이하게 달라질 수가 있는 겁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는 그 자식이 어디까지 속을 속여도 부모님은 그 자식을 버리지 못합니다. 호적에서 파내가라고 해도, 호적에서 파내도 그 부모님의 심정은 그 자식은 자식이지 자식 아닐 수가 없는 겁니다. 집은 나간 탕자가 아버지 재산 다 까먹고 와도 아버지는 매일 같이 나가서 그 자식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고 기다렸고, 오니까 어긋맞고 크게 잔치한 그게 하나님 아버지 심정을 기록해 놓으신 겁니다.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 내가 실제 할 수 있고 없고 하고는 다른 차이입니다. 내가 그렇게 얼마만큼 내 몸이 하고 내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냐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첫째는 뭐냐? 내 중심 자세입니다. 내 정신 사상. 내 마음 중심 자세. 내가 주님같은 이런 심정가지고 어떻게 하면 인간 구원에 손해 끼치지 않을까. 유익을 줄까, 바른 길로 인도할까를 생각하는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말이지요. 그게 있으면, 자기가 그걸 가지고 있으면은 그때부터는 충성하는만큼, 연구하고 노력하는 만큼 하나님의 능력은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이걸 여기서 첫째 기억을 하고.
그 어린 아이의, 오병이어 도시락 내놓은 이 어린 아이는 이거는 말 그대로 어린, 여기 한 아이가 있어, 아이라 그랬으니까 보통 아이라 그러면 초등학생, 커봐야 중학생이지 않습니까? 중학생도 아이는 아이지만은 보통 아이라 그러면 초등학생 정도를 아이라 그러지요. 중학생도 포함되겠지만은. 그런 어린 아이니까 그 어린 아이가 그 분위기를 다는 몰랐을 것이고 주님의 심정 알아봐야 얼마나 알았겠습니까? 그 심정 알아봐야 얼마나 알았겠으며 그 심정에 동참을 얼마나 하겠습니까만은, 그러나 그 어린 아이로서는 저대로는 먹을 것이 없어 보니까 찾고 있는 것같고 힘들어하는 것 같은데 저한테 있으니까, 그 어린 아이가 저 먹으려고 준비한 것을 선뜻 주님 앞에 내놨다 말이죠. 안드레 통해 주님 앞에 내놨습니다. 내놓으니까 그것을 저를 위해서 준비했으니까 저 혼자 먹었으면 아마 먹을때도 몰래 먹었으니까 얹힐란지 모르겠고, 소화불량 걸렸을 것이고 먹을때 눈치 보니까 억지로 꾸역꾸역 맛도 별로 없었을 것이고 몰래 먹는 떡이 맛있는 것 하고는 다른 차원입니다 이거는. 또 먹고 난 다음에는 꺼림칙 할 것이고. 사람이 어지간히 삐뚤어진 인성이 아니면 이런 상황에서 도시락 혼자 가져가서 몰래 구석에 가서 먹으면 먹기도 괴롭고 먹어봐야 맛도 없고 소화도 안되고 먹고 난 다음에도 굉장히 불편할 겁니다. 그런데 이걸 그만 눈 질끈 감고했든 어쨌든 간에 주님 사랑을 깨닫고 거기다가 내놓으니까, 또 자기가 쓰지 아니하고 주님 앞에 바쳐 내놓으니까 주님이 그걸 가지고는 마음껏 거기다가 복을 주실 수 있고 능력을 보태서 일을 하실 수가 있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주님이 축사하시고 이런 능력이 나타난 걸 보면 이 아이는 내놓으신 것이 억지가 아니고 단마음으로 내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거기다가 마음껏 축사하실 수 있었으니까.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인간구원에 있어서는 우리들이 내가 가진 것이 부족하고 나는 배운 것이 없고 못나고 실력도 없고 나이도 많이 들었고 몸도 아프고 그런 조건이 전혀 해당이 없다는 겁니다. 이것도 많이 말씀드렸지요. 주님앞에 전혀 해당이 없고, 그 사람의 마음이 인간을 사랑하여 구원하고자 하는 욕망이 주님과 얼마만큼 가까이서 얼마만큼 주님의 그 심정을 헤아리고 있느냐, 얼마만큼 뜨거우냐 그 정도로 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오늘 믿는 사람이 주님의 대속의 사랑을 얼마나 깨닫겠습니까? 중학교 1학년정도 학생이 말씀을 깨달으면 얼마나 깨닫겠습니까? 경험해보면 그렇습니다. 과거에 반사할 때 보면은, 반사를 처음 할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합니다. 동기는 그냥 은혜받고 다 하니까 하고, 목적은 1등하고 싶어서, 칭찬받고 싶어서, 선생님 소리 듣고 싶어서, 별에별 목적으로 반사를 시작을 합니다. 동기도 깨끗하지 못하고 다 그런데도 그런데 하나 분명한 것은 어쨌든 사람을 전도해서 길러보겠다는 순수한 그거는 있다 말이죠.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걸 가지고 하니까 대개 보면은 다른 분들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만은, 저는 지금도 처음에 반사했던 그때 학생들 얼굴까지 저는 기억을 합니다. 이름도 제가 지금 아삼아삼 있지만은 몇몇 학생 기억을 하고, 집도 지금 머릿 속에 뱅뱅 돕니다. 초기에 제가 반사할 그때는, 그때는 순수하고 깨끗하게 전심전력 다 쏟아서 했던 그 학생들은 이름도 얼굴 형태도 집도 골목까지도 지금 머릿속에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몇 년 지나고 나서 한거는 많이 했는데도 별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만큼 점점 변질이 되어갔다 그말이고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그말이 되겠지요. 에베소 교회에 주님이 물으신 것은 많은 걸 묻지 않았습니다 .요구하지 않았고, 에베소 교회가 많은 일을 했지만은 주님은 다 귀찮아 했습니다. 다 필요없다, 내가 너에게 원하는 것은, 뭐 찾았습니까? 내가 네 수고와 인내와 참은 것 여러 가지 여덞가지 말씀하셨는데 그걸 가지고 있지만은 그거 다 필요없다는 거지요. 내가 원하는 것은 딱 하나다. 뭡니까? 처음 사랑을 가져라. 네가 정말 주님을 주님으로 알고 주님 한분 전부 삼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으로 전부 삼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전부 삼고, 주님 사랑으로 너도 사랑 가졌던 그 사랑, 결혼의 첫사랑 같은 그 사랑을 주님이 원하신다 그말입니다. 다른 것 원치 않습니다. 왜? 주님은 당신이 전능자니까. 당신이 주시면 얼마든지 주실 수 있으니까. 인간에게 받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이 어린 아이가 내놓은 것은 어린 아이기 때문에, 성경에는 아이 역사가 많이 있는데 그 아이는 힘이 없는 것이고 어리니까 잘 모르는 것이고 유약한 것이 아이입니다. 모든 면에 철없고 서툴고 부족하고 불완전한 것이 아이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특징이 자라가면서 순전하고 깨끗한 것이 있다 말이지요. 주님 앞에는 이게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슬기있고 지혜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것이 아버지 뜻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 서는 사람이 주님이 붙들고 쓰실 수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이 아이가 그런 순진한 중심과 주님 사랑을 저대로 아는 그것을 가지고 자기것을 바쳤을때 주님은 거기 마음껏 축사하셨고 은혜 베푸시고 능력을 함께해서 그 많은 무리들에게 나눠서 배불리 먹었고 자기도 먹었고 그러니까 편하게 먹었고 실컷 먹었고 기쁘게 먹었고 소화 잘되게 먹었고 많은 사람 배불렸고 주님에게 영광 돌렸고, 자기가 바른 중심가지고 내놓으니까 전부다 천국이고, 만약에 이걸 숨겨서 그랬다면 전부다 지옥이겠지요. 이것이 주님 앞에 선 우리들의 자세다 그말입니다.
오늘도 이 역사는 변함이 없습니다. 주님은 천년 전이나 육천년전이나 예를 들면 억만년 전이나 주님은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 변함없는 주님이기 때문에 오늘도 이 이치를 가지고 우리들이 내게 주어진 그 역량 다해서 바른 중심 가지고 내 힘을 들이고 시간을 들이고 노력을 들이고 물질 드리고 주님 앞에 드리면 그것가지고 주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뜻을 얼마든지 이룰 수가 있다는 것을 두 번째로 기억을 하고. 그다음 세 번째는 이렇게 하고 난 다음에는 많은 사람이 넘어지는 것은 다 누워 있으면 넘어질 일이 없지요. 누워 있으면. 기어다니면 넘어질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일어서서 다니면 넘어질 확률이 많고, 뛰어다니면 넘어질 확률이 더 많습니다. 사람들이 어려울때 올라갈때는 이런 일이 잘 없는데 어느정도 성취가 되고나면 사람들은 다 넘어지는 그런 경우를 성경에도 그렇고 수도없이 많이 봅니다. 능력 있는 일을 행하고 나니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임금을 삼으려 그랬습니다. 주남선 목사님 같은 분이 거창 그때 교회는 그 지방 교회는 상당히 큰 교회였고 그 당시 교회란 곳은 지금은 교회가 안 믿는 사람들한테 보기 싫은 하나의 지탄의 대상이 되어있지만은, 50년전 그때 교회는 그 지역에 상당히 중심되는 그런 좋은 호평을 받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 목사님은 안 믿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지방에 유지처럼 그 지방에 지도자처럼 그렇게 인식이 되어있는 상황인데 그 주남선 목사님이 거기다가 일제시대 반대, 신사참배 반대지만은 안 믿는 사람들 눈에는 항일로 보여졌고 독립 투사로 보여졌지요, 항일 투사로. 그렇게 보여지니가 그분이 만약에 국회의원 나서면 우리 전부다 사퇴하겠습니다. 그 잘난 사람들 다 사퇴하겠다 그랬는데 주목사님께서 내 나라는 천국이 내 나라, 하늘나라가 내 나라고 내가 할 일은 천국 복음 전하고 천국 건설이 내가 할 건설이지 세상 건설은 내가 할 것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거절하고, 그랬기 때문에 그분은 마지막까지 참 존경받는 그런 어른으로 죽지 못한 순교자라 이름이 그렇습니다, 주남선 목사님은. 6년 감옥 옥고 치루고 마지막에 나는 죄가 많아가지고, 손양원 목사님은 너무 깨끗해서 순교로 데려가시고 주남선 목사님은 나는 죄가 많아서 하나님께서 제물로 안 받으셨다고 얼마나 가책이 됐는지, 회개한다 그러면서 얼마나 외쳐댔는지 안에 창자가 이상이 생겼다던가요. 그래가지고 얼마 안있어서 돌아가셨다 그러지요. 순교할려고 다른 지방에 있다가 인민군들 후퇴한다는 말 듣고 그때 후퇴하면은 두 번 다시 순교못한다 그래가지고 다른 지방에 있다가 순교하려고 거창지방으로 들어오려했는데 오는데 발목이 삐어가지고 몇일동안 꼼짝을 못했답니다. 그러고나니까 인민군 다 가고 없지요. 후퇴하고 나니까. 얼마나 순교 못했다고 탄식을 하셨는지. 또 전설에 의하면 일부러 위에 비행기 지나가면 저 대로변에 십자가 하고 한가운데서 섰답니다. 잘 보이는데서. 비행기 총탄 맞아 순교하려고. 그런데 한번도 안 맞았다 그말이지요. 그렇게 산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마지막까지 끝까지 그래놓고도 겸손하게 그리하다가 세상을 떠나셨고, 다 믿음의 종들이 그렇습니다. 능력있게 일을 하고 난 다음에 대우를 바라면 그 순간 떨어지고 마는 겁니다. 성경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억지로 잡아서 인간 삼으려는 줄 아시고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이것도 우리가 깊이 생각해봐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에서 세가지를 기억하십시다. 첫째, 제자들은 주님을 모신 그들을 찾아온 무리들에 대해서 사랑이 부족하여 무책임하게 되어졌고 사랑이 부족하여 믿음도 생기지 않았고 주님까지도 다 잊어버리는 그 순간, 그런 제자들이 되어졌싑니다. 사랑을 가졌으면 다 가질 수 있는 것들인데, 보이는 것들이고 그리 되어졌습니다. 두 번째, 어린 아이는 주님의 사랑의 심정에 동참해서 자기의 가진 것,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은 아낌없이 주님 원하시는 역사에 바치니까 주님은 그것을 붙들고 마음껏 축사하시고 일하실 수 있었고 그 결과로 수많은 사람을 기진해서 살렸고 주님의 뜻을 이루었고 자기도 기뻤고 오늘까지 이 아이의 행적은 기록되어있고, 아마 이름을 알고나면 천국에서는 이름이 나올 거니까 영원토록 빛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지겠지요. 주님은 능력있게 하고 난다음에는 억지로 잡아서 임금 삼으려는 줄 아시고 산으로 떠나가셨다, 이렇게 세가지를 기억을 하면서 우리도 제자들 같은 이런 사랑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고 어린 아이같은 오병이어를 내놓은 것 같은 이런 우리가 되어야 되겠고 주님처럼 혹시라도 작은 것 하나라도 하고 난 다음에 주변에서 올렸을때, 올라가면 그다음부터는 떨어지는 것만 남습니다. 안 올라가고 있으면 올라가는 것만 남지요. 일을 할때, 무슨 일이 생길때 어려움을 닥치면 어려운 상황이 있으면은 어디서 연락이 오면은 연락이 기다려집니다. 해결이 되는가. 극단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몰렸을때는 누구든지 찾아오고 연락오면은 기다려집니다. 왜? 극단적으로 내몰렸으니까 남은 것은 좋은 것 밖에 없으니까. 더 떨어질 건 없으니까. 그런데 좋은 상황이 되었을때는 연락이 오면 겁이 납니다. 아마 어디 좋은 대학이나 직장 이런데 시험쳐서 합격 통보 딱 받고난 다음에, 합격 통보 받기전이라던지 떨어지고 난 다음에는 거기서 연락왔다 그러면 얼마나 기다려집니까, 혹시 좀 뭐가 변수가 생겨서 합격이 될란가 싶어서 얼른 전화 기다려지는데. 합격이 딱 되고 난다음에 연락이 오면은 또 이거 잘못되서 취소 되는 건 아닌가 얼마나 겁이 납니까. 사람이란 것이 어쨌든 올라가면 떨어지는 것 밖에 안 남기 때문에 올라가는 건 우리가 할 일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올리셔도 우리는 최대한 안 올라가야 되고, 하나님은 올리시고 나는 안 올라가고.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올라갈때는 반석 위에 있는 것처럼 탄탄대로로 그렇게 되어지지 쉽게 무너지고 그런게 아닙니다. 그래도 그 자리에서는 항상 조심을 하고 무익한 종의 자세가 변치 않아야 된다 그말이지요. 세가지를 기억하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오전에 말씀드린대로 본문의 내막을 먼저 사건 전개를 머릿속에 담아놓고 그 사건 전개된 그 상황에서 가르쳐주신 제자들의 태도에서의 사랑 없는 결과, 또 어린 아이의 사랑의 신앙, 주님의 마지막 가신 것 이렇게 세가지를 생각해 보십시다.
요한복음 6:1-15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그 깊은 의미를 다 헤아리지 못해도 아는대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 여기 4절에 보니까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고 했습니다. 명절이라 그러면 좋은 날로 그렇게 우리는 인식을 하고 있지만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은 한편으로는 해방과 자유를 얻은 절기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환난의 절기입니다. 그래서 유월절 절기는 일반적으로 환난의 절기라 그리 말합니다. 유월절은 환난. 같이 해보시겠습니다. ‘유월절은 환난’. 성경에 유월절이 나오면 이거는 한편으로는 해방과 자유를 얻은 절기이면서 한편으로는 그 해방과 자유를 얻을때 그냥 얻은 것이 아니고 많은 환난을 통해서 얻은 것이다 그말입니다. 그 환난에서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았고 애굽 백성들은 다 수없이 죽은 거의 전멸 가까이 되어진 것이 유월절 환난입니다. 그러면 오병이어의 표적을 말씀하시면서 앞에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고 이렇게 일부로 사이에다가 끼워놓으신 것은 이 오병이어의 표적과 유월절은 연관성이 있다 그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월절은 환난의 절기인데 오병이어가 있기전에 환난의 절기가 있는 걸 말씀하셨으니 환난때일수록 개인적인 환난, 가정적인 환난, 교회적인 환난, 교계적인 환난, 어떤 환난때일수록 어려울수록 어려움을 만날수록 우리가 더욱 조심할 것은 오병이어의 표적에 말씀하신 깊은 뜻에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더욱 더 해야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2장에 유월절 환난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 첫째 뭐 먹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고 나서 먹을때 뭘 먹어라고 했습니까? 양고기를 먹습니다, 양고기. 양고기는, 양은 어린 양이고, 어린 양은 누구를 예표합니까? 예수님을 예표하기 때문에 그 양고기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으신 고난을 생각하는게 양고기를 먹는 건데, 그 양고기를 먹을때 꼭 같이 먹어야 되는 것이 첫째가 뭡니까? 무교병입니다, 무교병. 누룩을 넣지 아니한 떡. 부풀지 않는 떡. 무교병을 먹으면 맛이 어떨까요? 무교병은 먹으면 딱딱해서 맛이 없답니다. 굉장히 딱딱하답니다. 안에 누룩을 넣어서 밀가루 사이를 벌려서 부풀어야 말랑말랑하고 부드럽고 빵이 맛있는데, 떡이 맛있는데 무교병은 누룩을 안 넣으니까 이게 딱딱하게 들어붙어서 아마 그 떡이 말라붙으면 돌처럼 딱딱하게 되지요. 그게 무교병인데, 먹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도 그걸 반드시 같이 먹어라고 했습니다. 무교병과 쓴나물. 환난때일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불목을 조심하고 화목을 더욱 힘을 쓰라는 것을 말씀을 하셨고, 여기 본문에도 오병이어 도리를 말씀하시기 전에 앞에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고 하나 끼워넣어서 일부러 이렇게 말씀을 해두셨습니다. 참고로 기억을 하십시다.
이 본문에 말씀은 백목사님 설교록에 나오는 말씀인데 이 말씀을 하신 시점이, 제가 지금 설교록 교정을 64호를 보고 있는데, 그 날짜가 1980년, 000 선생님 몇 월 달입니까? 000 선생님, 혹시? 0 선생님이 교정보신 것도 있는 것 같던데. 1980년 이게, 제가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1980년도 설교입니다. 그 설교에 나오는 내용인데 그때 서부교회 분위기가 반영된 설교입니다, 상황이. 그래서 백목사님의 모든 설교록 이름이 목회설교록이라, 목회라 말은 사람을 길러서 구원하는 그게 목회고,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바로 인도하는게 목회고 그 사람을 가르치고 길러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가는 거기에 필요한 설교라 그래서 이름을 목회 설교라 그러고, 그것을 모아 놓은 것이라 그래서 목회설교록이라고 이름을 붙여놨는데, 그러기 때문에 백목사님의 모든 설교는 목회설교고, 그래서 그 설교한 모든 설교 거의 대부분이 그 시대와 그 당시 교회와 교계와 그 시대 상황이 반영이 다 되있습니다. 그래서 설교록을 읽어보면 그 시대 분위기를 상당히 깊게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특히 그 교회 분위기를. 그런데 이때 이 설교를 할 당시에 서부교회 그 형편은, 서부교회 주일학교가 폭발적으로 부흥이 돼서 매주 팔천명씩, 만명씩 매주 서부교회로 모이던 때입니다. 한창 탄력을 받고 아주 최고조로 올라가던 그런 올라가는 도중의 때입니다. 그리고 8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약간 내려오기 시작하는데. 80년도라서, 70년도 후반부터 올라가기 시작해서 80년대 초에 아주 최고조로 올라가던 그런 때입니다. 그런데 그리 되니까 예배당이 좁아가지고, 서부교회 예배당이 상당히 큰 편인데 실평수가 한 대지가 아마 육백몇평인가 그럴건데 상당히 큽니다, 예배당이. 우리 예배당보다 열 몇배는 크겠지요. 굉장히 큰 예배당인데, 층층이 대개 다 그런데. 그 예배당마다 꽉꽉 차가지고 그때는 신관 짓기 전이니까 조금 덜했겠는데요. 그러니까 콩나물 시루처럼 예배당이 그렇게 빡빡해서 주일오전 주일학교 예배시간 되면은 발 디딜 틈도 없이 그 넓은 예배당이 꽉 찼었습니다. 1층, 2층, 3층, 또 한쪽 지하층까지 꽉꽉 들어차서. 그래서 학생들은 자꾸 많아지고 모이는데 예배당이 포화상태가 되니까 예배당을 지어야 되는데 대책이 없다 말이지요. 돈도 없지요, 땅도 없지요 주변에. 그래가지고 많은 기도하고 연구 끝에 양쪽으로 예배당을 넓혀 짓고 그리한 그런 때입니다. 그래서 그와 연관된 말씀이고, 그래서 이 많은 주일학교 그 무리들, 많은 무리들이 주님을 찾아 주일마다 예배당에 오는데 이 무리를 우리가 돈이 없다고, 형편이 어렵다고, 우리 형편에 안된다고 이들을 어떻게 하겠는가? 감당을 해야 된다 그말이죠. 그래서 예배당을 그 후에 얼마 안 있어서 새로 굉장히 크게 더 지었었습니다. 그런게 있었고. 또 하나는 중간반 학생들도 서영준 목사님이 그때 부장이 되고 하면서 굉장히 올라가서 없던 중간반을 2천 몇명까지 올라갔었습니다. 중간반 학생의 숫자가. 중간반 숫자만 2천5백명까지 올라가고. 그러니까 장년반 숫자가 3-4천명, 중간반이 2천오백명, 주일학교 만명, 아주 그당시 부산에서 제일 크고 전국에서도 아마 그 당시로 말하면 순복음교회 다음으로 컸던지, 전국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을만큼 큰 교회였습니다. 그 당시 큰 교회는 지금처럼 많지 않았으니까. 세계적으로 주일학교가 한창 부흥해서 신문에 나고 방송 타고 세계적으로 교계에서 이름이 나기 시작한 막 알려지던 그런 때입니다. 중간반 학생들이 이천몇명 되는데 집회를 가면, 학생들이니까 돈이 없고 그때는 뭐 잘 모를때고 경제도 어려울 때고 하니까, 집회가면 돈이 없으니까, 집회비가 말하자면 요즘 돈으로 만원 같으면 학생들이 만원을 못 낸다 그말이죠. 믿는 가정 아이들은 내는데, 못내는 가정 아이들은 많이 못내고 그래서 선생님들이 보조도 하고 그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못 내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보조를 하려 그랬는데, 중간반 부서에서는 ‘아무래도 학생들은 다 못내고 집회는 가고 싶어하고 가야 되겠고 선생님들도 돈이 한정이 있으니까 장년반에서 지원을 좀 해주십시오’ 하고 지원 요청하니까 장년반에서는 ‘그 철없는 아이들 데려가서 애만 먹이는데 뭐하려고 데려갑니까. 적당히 하고 차비 내는 아이들만 데려가고 말지요.’ 이런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아주 대책망하신 것도 있고. 그들이 이렇게 주님을 찾아오는데 우리 형편이 어렵다고 힘들다고 나 몰라라 할 수 있겠느냐. 그런 교회 입장, 형편, 분위기 그런 것이 반영된 설교다 이걸 참고로 기억을 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언제든지 해당이 되지만은 그러나 우리들이 또 필요할때마다 이런 성경을 연관시켜서 여러 가지면으로 구원 도리를 생각해보고 찾아볼 수가 있는 겁니다.
기억을 하시면서,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서 왔습니다. 따라온 것은 예수님께서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따라왔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말씀만 가르쳐가지고는 모르니까, 죽은 사람도 살리고 38년된 병자도 고치고, 소경의 눈도 띄우고 앉은뱅이도 일으켜 세우고 이런 표적이 마구 일어나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더욱 따라다녔습니다. 백목사님 생전에도 한창 능력있게 병 고칠때는 그만 저는 직접 보지 못했고 간접으로 말만 들었고, 85년도 대구집회때 적어낸 그런 기록을 많이 봤고 그랬는데. 살아생전에 그 광경을 본 분들 말 들어보면은 집회를 하는데 막 방해하고 그러면 목사님께서, ‘너 그러면 눈이 먼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눈이 멀어버린 답니다. 눈이 멀어버리고 ‘너 자꾸 그러면 벙어리 된다’ 그러면 벙어리 되버린답니다. 그런걸 보니까 사람들이 벌벌 떠는 겁니다, 목사님 앞에. 그래서 백목사님의 능력이 있고 권위가 있고 설교가 사람의 패부를 찔러내는 그런 설교를 하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앞에 하나님 모시듯이 그렇게 모시고 한 그런 기독교의 한 역사지요. 한 역사가 있었는데, 그런 이적 표적이 나타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주님도 따라다녔다 그말이지요. 그래서 그리되니까 백목사님께서 그런 병 고치는 능력이 많이 나타나니까 목사님이 집회만 간다하면은 강단 주변에 예배당 안에 전부 병자들만 빽빽하게 모여 든답니다. 병자들만 빽빽하게 예배당 안에 들어오고 성한 사람들은 예배당 밖으로 다 밀려나가니까, 시골이니까 예배당이 그리 크지 않은데, 그런데도 몇백명 모여들었는데, 그리하는데 병자들이 빽빽하게 앉아있고 성한 사람들은 저 멀리 물러나니까 한번 설교하려니까 아무리해도 설교가 안되서, 목사님께서 설교가 안되서 기도하니까 ‘만약에 하나님께서 병 고치는 여기 치중하고 말씀 전하는 도에 소홀해질까 싶어 이것 때문에 말씀을 막으시고 은혜를 안주신다면 앞으로는 이걸 바꾸겠고, 병 고치는데에 기도라던지 안수라던지 이런 걸 안하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기도하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을 열어주셔서 그날 아주 큰 은혜가 있었다 그러거든요. 그 당시 있었던 분 말 들어보면 은혜받고 사람들이 붕붕 뛰었답니다. 땅에서 40센치씩 뛰고 그랬답니다. 어떻게 그런지 모르겠는데 기도를 하는데 막 붕붕 뛰면서 기도를 했답니다. 공중에 떠가지고. 제가 직접 그리 했던 분들한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나서부터는 목사님께서 신유의 은사는 오래토록 말씀을 안하시다가 그다음 이제 80년대 중반에 와가지고 이상한 사람들이 병을 고쳤다, 순복음 교회 이런데 나와가지고 하니까 그때 또다시 목사님께서 미혹 받는 것 때문에 많이 말씀을 하셨지요. 그러니까 기독교라는 것은 그런 신유의 이적의 능력이 없는게 아니고 실제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게 주목적은 아닌 것이고. 어쨌든 예수님께서 많은 이적을 행하시고 말씀도 은혜롭게 하니까 수많은 사람이 구름떼처럼 주님을 따라다녔고 이때도 디베랴 바다에서 산으로 올라가시니까 많은 사람이 주님을 따라갔고 예수님께서 오랜 시간 말씀을 가르치니까 해가 져물어 갔다 그말이죠. 그러니까 들판에서 밤을 보낼 수 없으니까 돌려 보내야 되는데 제자들은 해가 저물어가고 이곳은 빈 들판이고 우리는 가진 것이 없으니까 무리를 보내서 각자 먹을 것을 알아서 사먹도록 해야 됩니다. 그럴때 주님은 갈 것이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우리 있는 이곳이 빈 들판이고 우리 가진 것도 없고 있어도 이백데나리온의 떡을 사도 부족한데 어디서 떡을 사서 이 많은 무리들에게 먹이겠나이까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셨다고 그리 말씀했습니다. 그럴때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그 무리들에 대해서 날은 저물어 가고 이곳은 빈들판이고 먹을 떡을 살 돈도 없고 살수도 없고 이런 상황 형편 입장이 자기들의 능력이 이러니까 할 수 없이 이들은 보내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고 제자들로서는 할 수 없는, 말하자면은 외통목에 몰려서 그 길 밖에는 길이 없었다 그말이지요. 제자들이 볼때는 그 길밖에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빈들판에 날은 저물어가고 가진 것도 없고 있어봐야 살 때도 없고, 그들의 능력으로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그러니까 힘들고 기진 하겠지만은 각자 알아서 돌아가면서 밥을 사먹도록, 자기 책임 자기가 지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제자들로써는. 그러나 주님은 그게 아니었거든요? 주님은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고,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그리 물었다 그러셨습니다. 거기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이 제자들은 그 많은 무리들에 대해서 제자들은 그들을 책임을 지되 자기 몸처럼 자기 처자식처럼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고 책임지는 것이 그들에 대한 사랑의 도수라던지 강도가 주님만큼 안됐다 그말이고, 참 어렵지만은 자기 몸같이 안됐다는 말이고 주님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은 그들의 사랑이 없는 연고로 그래밖에 안됐던것이지, 그들이 정말 그 무리들을 진정 가다가 기진할까 염려되고 자기 몸처럼 자기 처자식처럼 그런 한몸같은 뜨거운 사랑 갈급한 사랑을 가졌다면 차라리 굶어도 같이 굶고 여기서 죽어도 같이 죽고 그리 하지 너희들 알아서 돌아가다가 굶던지 먹던지 알아서 하라고 무책임하게 돌려보낼 수는 없는것이다 그말이지요. 그 사랑을 가졌다면 주님을 봤을 것이고 주님에게 의논했을 것이고, 주님을 봤다면 주님의 능력을 바로 믿으니까 바로 해결이 됐을건데 그들에게는 그냥 책임을 벗기에 급급했고 그래서 책임지지 않기 위해서 돌려보내기에 급했지, 사랑이 없으니까 주님을 찾고 주님으로 인한 해결할 생각을 하지를 못했던 것이 사랑이 없는 연고로 그리 되었다는 겁니다. 이걸 오늘 우리에게 이 제자들의 태도를 통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겁니다.
오늘 우리들도 우리 주변에는 어떤 형태로든 우리 주변에는 사람들이 찾아 오고 있고 찾아오게 되어있습니다. 많으냐 적으냐 그 차이지, 어린 학생들 또 중간반 학생들 장년반 식구들 어떤 별에별 원인과 이유와 목적과 그런 것 때문에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몇 사람이든 어떤 분한테는 집으로도 찾아오고 교회로도 찾아오고 별에별 형태로 우리를 주님 모시고 있다하여 찾아오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있다 그말이지요. 넓은 사람에게는 좀 많이 오고 좁은 사람에게는 적게 오는 차이지, 심지어 우리가 믿는 부모님이라면 신앙 어린 자녀들은 주님이 그들에게 맡긴 사람들이고 그를 찾아온 사람과 같은 입장인 것이고, 신앙 있는 남편에게 신앙 어린 아내라면 그 아내는 이 무리와 같은 사람이고 반대도 마찬가지고. 어쨌든 어떤 형태로든 주님 모신 우리를 찾아온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있다는 겁니다. 그럴때 우리가 그들을 감당하다가 이끌어나가다가 함께 가서 인도해가다 이끌어나가다가 그럴때 사람은 체력도 가진 지능도, 물질도, 형편도, 모든 것이 유한하고 우리는 전지전능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상황이 인간의 힘으로써 해결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닥칠때가 있다는 겁니다, 여러 형태로. 개인적이든 가정적이든 교회적이든 교계적이든 어떤 형태든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형태가 인간 구원의 관계, 사람을 버려야 되느냐, 각자 돌려 보내야 되느냐, 끝까지 책임져야 되느냐 그런 관계를 두고 그런 어쩔 수 없는 그런 상황에 부딪힐때가 우리 앞에 닥쳐 온다는 겁니다. 그럴때 이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그 책임을 면하려했는데 그것은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에. 주님의 무리를 사랑한, 인간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심정을 깨닫지 못하고 그러기 때문에 그들로써는 이럴 수 밖에 없으니까 형편이 이러니, 입장이 이러니, 환경이 이러니, 내 처지가 이러니까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돌려보내야 됩니다. 그렇게 논리적으로 다 그리 될 수 밖에 없지만은 더 깊이 들어가보면 그들을 정말 뜨겁게 사랑한다면 주님을 붙들고 매달려서 같이 해결하는 그게 맞는 것이지, 내가 할 수 없으니까 보낸다는 것은 주님이 원치 않았던 일이고 기뻐하지 않았던 일이란 것을 본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걸 기억하고, 우리 앞에 이런 상황이 닥쳤을때 우리는 늘 이걸 염두에 두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없으니까 책임을 벗으려 했고, 사랑이 없으니까 믿음도 생겨지지 않았습니다. 주님도 안 보였고, 주님을 향한 믿음도 그들에게 생기지 않아서, 주님이면 다 해결이 되어지는데 어떻게든 주님 한분이면 다 해결이 되는데 주님도 안보였고 믿음도 생기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주님을 섭섭하게 하는 이런 결과를 맺고 말았다 그말입니다.
기독교라는 것은, 기독교는 뭐냐? 기독교는 한문 글자고, 기독교를 우리 말인지 모르겠는데 풀면은 예수교라는 뜻이고, 기독교나 예수교는 같은 말이고, 예수교라는 말의 뜻이 뭐냐? 예수교라 말은 예수의 도라는 뜻이고, 예수의 도. 예수의 도가 뭐냐?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뭡니까?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신 분인데,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것이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고 그게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의 전부는 말하자면은 하나님의 백성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기독교의 전부다 그말이지요. 그게 예수교입니다. 기독교고, 그게 교회고. 그리고 그 기독교의 시초가 어디냐? 기독교의 근본 뿌리가 무엇이냐? 기독교의 뿌리, 예수교의 뿌리는 인간 구원을 전부로 삼는 기독교 예수교의 근본 출발은 자존하신 하나님이고, 그 자존하신 하나님의 첫 역사가 기독교의 출발인데 그게 뭡니까? 자존하신 하나님의 첫 역사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 목적이 뭐냐?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시초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란 곳에서 기독교 신앙 세계에서 인간 구원을 빼낸 것은 교회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그래서 신앙 노선이 있는데, 신앙 노선이란 것은 신앙 노선과 인간 구원은 뗄 수 없는 하나입니다. 노선과 인간 구원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하나라서 신앙 노선이 인간 구원을 위한 노선이 아니면 그 노선은 틀린 겁니다. 아닌 겁니다, 노선이 아니고. 인간 구원에 손해 끼치는 노선은 잘못된 노선입니다. 동시에 올바른 노선없는 인간 구원도 없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 노선이란 것하고 인간 구원이란 것은 하나라. 결국 같은 말이 되는 겁니다. 같이 가야 되는 겁니다. 뗄 수가 없는 겁니다. 어느 하나를 앞세울 수가 없는 겁니다. 노선이 먼저냐, 인간 구원이 먼저냐 뗄 수 없는 하나입니다. 신앙 노선은 인간 구원을 위한 것이고, 인간 구원 때문에 있는 것이고 동시에 인간구원이란 것은 올바른 노선 없이는 인간 구원도 없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둘은 뗄 수 없는 하나다 그말이지요. 어쨌든 신앙이란 것은, 교회란 것은 인간구원이 전부고 이게 목적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할때 예수님께서 율법에 뭐라고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었느냐? 네 마음과 목숨과 힘 뜻 다해서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처럼 하라. 하나님 사랑도 결국 인간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을 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인간 사랑하는 것이 없으면 거짓말이라 그랬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형제를 사랑치 않는 것은 거짓말 하는 자다. 하나입니다. 인간 사랑이 바로 되었으면 그거는 하나님 사랑과 연결된 인간 사랑이라야 되지, 하나님 사랑 없는 인간 사랑도 없는 겁니다. 이 둘은 하나입니다. 결국 지상교회에서, 지상교회의 최대 목적 전부는 바로 인간 구원입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을 말씀의 사람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형상 만드는 것이 이것이 지상교회의 목적이며 가장 중요한 일이며 전부다 그말이지요.
알고보면 구별해봐야 되겠는데, 진리는 사람보다 위에 있습니다. 진리는 사람보다 위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인간 구원을 위한 진리가 아니면 그 진리는 사람에게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는 검이고 칼인데, 이 검을 잘못 쓰면은 검한테 망한다는 그말이 세상 권세를 잘못쓰면 권세한테 망한다는 말도 되고, 말씀을 잘못 써먹으면 그 말씀 때문에 자기가 심판 받는다는 말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심지어 진리까지도, 진리는 사람보다 위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진리가 인간 구원을 위한 진리가 아니면 그 진리는 적용이 잘못되서 사람들에게 큰 손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더 강조해서 말하면, 하나님은 당신이 전분데 그 하나님이 인간 구원이 없는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분에게 영감이 없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고 영광의 찬미인데 그 영광의 찬미란 것은 인간이 있고 인간 구원이 있을때 영광의 찬미가 있는 것이지, 인간 구원 없는 영광의 찬미는 없습니다. 이게 하나님 목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겁니다. 하나님이 사람되시고 사람되신 그 역사가, 그 사람되셔서 하신 그 역사가 대속 역사고 그리고 부활하신 사활의 대속 역사가 예수교의 전부 아닙니까? 이게 하나님의 전부고 이게 기독교의 전부고 이게 그 속에 중심이 인간구원이다 그말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심정, 주님의 심정은 인간구원에 대해서 이토록 당신의 전부를 다 받친 그게 인간구원의, 사랑의 심정입니다. 우리가 이런 심정가지고 실제로 그리 살지 못해도 사랑이란 것은 사랑의 요소 사랑의 작용 사랑의 성품이란 것은 마음의 요소입니까, 몸의 요소입니까? 사랑이란 것은 마음의 작용입니까, 몸의 작용입니까? 마음의 작용이 크지 않습니까? 마음이 가면 몸도 가는 것도 물질 가는 것도 필연입니다. 육체는 정신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그러니까 마음의 작용, 몸의 작용이 크고 물질의 작용이 큰데 그러나 그보다 먼저 앞선 것은 마음의 작용이 더 큰 겁니다. 내 마음 속에 사람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주님의 사랑의 심정을 헤아려서 얼마만큼 주님과 그 사랑에 동참하고 뜨겁게 되어져서 내가 사람을 주님처럼 아끼고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외부 자기의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충성이나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어지는 겁니다. 모든 물질 처리도, 사건 처리도 마찬가지로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첫째 우리가 기억할 것은 제자들이 주님의 사랑 같은 뜨거운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이 제자들은 이 무리들에 대해서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벗어버리려 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연고로. 그것을 주님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어라. 너희들이 책임을 져야 된다. 그들로서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으나 그리 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은 그들이 보는 사랑이 없는 관점에서 보니까 그리 되었지 사랑의 관점에서 보니까 답은 보였고 주님은 해결을 했습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을 상대할 때 우리들이 부족해서 내가 사람 인간 구원에 대해서 내 시간과 노력과 물질을 많이 드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중심과 소원, 우리의 정신만큼은 어쨌든 인간 구원 이웃을 구원하는 그 일에 우리는 모든 걸 다 초점을 맞춰야 됩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그게 되어야 이웃 구원이 되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가장 우선에 두고, 그분에게 연결시켜놓은 인간구원을 그다음 최우선으로 두고 모든 것을 해나가야 된다 그말이지요. 그 사랑의 뜨거움에서 이런 것은 생겨질 수가 있다는 겁니다. 아브람의 깨달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역사에 없는 부활의 깨달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처럼, 사람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있으면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그런 생각이 지혜가 능력까지도 나오게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는데 자기들 중간에 길목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원치 않는 곳으로 주님이 간다하여 길을 막고 비켜주지 않을때 제자들이 있다가 말하기를 ‘선생님 우리가 기도해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가지고 이 길 막는 사람을 멸하기를 원하시나이까’ 그럴때 예수님께서 꾸짖으시고 다른 길로 돌아가셨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능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랑이 있는 곳에, 인간 구원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말입니다. 이걸 중요하게 우리가 기억을 하고, 그러기 때문에 문제는 외부로 나타나는 것도 중요합니다. 몸을 바쳐 충성하는 것, 시간 바쳐 충성하는 것, 물질을 드리는 것 이런 것들이 다 중요하나 그 모든 것들의 출발은, 그 모든 것들의 근본은 우리의 마음 중심 사상에서부터 출발이 되는 겁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 대해서 어떤 마음 어떤 자세 어떤 중심을 가지고 사람을 상대하며 물질을 상대하며 일을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판이하게 달라질 수가 있는 겁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는 그 자식이 어디까지 속을 속여도 부모님은 그 자식을 버리지 못합니다. 호적에서 파내가라고 해도, 호적에서 파내도 그 부모님의 심정은 그 자식은 자식이지 자식 아닐 수가 없는 겁니다. 집은 나간 탕자가 아버지 재산 다 까먹고 와도 아버지는 매일 같이 나가서 그 자식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고 기다렸고, 오니까 어긋맞고 크게 잔치한 그게 하나님 아버지 심정을 기록해 놓으신 겁니다.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 내가 실제 할 수 있고 없고 하고는 다른 차이입니다. 내가 그렇게 얼마만큼 내 몸이 하고 내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냐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첫째는 뭐냐? 내 중심 자세입니다. 내 정신 사상. 내 마음 중심 자세. 내가 주님같은 이런 심정가지고 어떻게 하면 인간 구원에 손해 끼치지 않을까. 유익을 줄까, 바른 길로 인도할까를 생각하는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말이지요. 그게 있으면, 자기가 그걸 가지고 있으면은 그때부터는 충성하는만큼, 연구하고 노력하는 만큼 하나님의 능력은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이걸 여기서 첫째 기억을 하고.
그 어린 아이의, 오병이어 도시락 내놓은 이 어린 아이는 이거는 말 그대로 어린, 여기 한 아이가 있어, 아이라 그랬으니까 보통 아이라 그러면 초등학생, 커봐야 중학생이지 않습니까? 중학생도 아이는 아이지만은 보통 아이라 그러면 초등학생 정도를 아이라 그러지요. 중학생도 포함되겠지만은. 그런 어린 아이니까 그 어린 아이가 그 분위기를 다는 몰랐을 것이고 주님의 심정 알아봐야 얼마나 알았겠습니까? 그 심정 알아봐야 얼마나 알았겠으며 그 심정에 동참을 얼마나 하겠습니까만은, 그러나 그 어린 아이로서는 저대로는 먹을 것이 없어 보니까 찾고 있는 것같고 힘들어하는 것 같은데 저한테 있으니까, 그 어린 아이가 저 먹으려고 준비한 것을 선뜻 주님 앞에 내놨다 말이죠. 안드레 통해 주님 앞에 내놨습니다. 내놓으니까 그것을 저를 위해서 준비했으니까 저 혼자 먹었으면 아마 먹을때도 몰래 먹었으니까 얹힐란지 모르겠고, 소화불량 걸렸을 것이고 먹을때 눈치 보니까 억지로 꾸역꾸역 맛도 별로 없었을 것이고 몰래 먹는 떡이 맛있는 것 하고는 다른 차원입니다 이거는. 또 먹고 난 다음에는 꺼림칙 할 것이고. 사람이 어지간히 삐뚤어진 인성이 아니면 이런 상황에서 도시락 혼자 가져가서 몰래 구석에 가서 먹으면 먹기도 괴롭고 먹어봐야 맛도 없고 소화도 안되고 먹고 난 다음에도 굉장히 불편할 겁니다. 그런데 이걸 그만 눈 질끈 감고했든 어쨌든 간에 주님 사랑을 깨닫고 거기다가 내놓으니까, 또 자기가 쓰지 아니하고 주님 앞에 바쳐 내놓으니까 주님이 그걸 가지고는 마음껏 거기다가 복을 주실 수 있고 능력을 보태서 일을 하실 수가 있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주님이 축사하시고 이런 능력이 나타난 걸 보면 이 아이는 내놓으신 것이 억지가 아니고 단마음으로 내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거기다가 마음껏 축사하실 수 있었으니까.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인간구원에 있어서는 우리들이 내가 가진 것이 부족하고 나는 배운 것이 없고 못나고 실력도 없고 나이도 많이 들었고 몸도 아프고 그런 조건이 전혀 해당이 없다는 겁니다. 이것도 많이 말씀드렸지요. 주님앞에 전혀 해당이 없고, 그 사람의 마음이 인간을 사랑하여 구원하고자 하는 욕망이 주님과 얼마만큼 가까이서 얼마만큼 주님의 그 심정을 헤아리고 있느냐, 얼마만큼 뜨거우냐 그 정도로 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오늘 믿는 사람이 주님의 대속의 사랑을 얼마나 깨닫겠습니까? 중학교 1학년정도 학생이 말씀을 깨달으면 얼마나 깨닫겠습니까? 경험해보면 그렇습니다. 과거에 반사할 때 보면은, 반사를 처음 할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합니다. 동기는 그냥 은혜받고 다 하니까 하고, 목적은 1등하고 싶어서, 칭찬받고 싶어서, 선생님 소리 듣고 싶어서, 별에별 목적으로 반사를 시작을 합니다. 동기도 깨끗하지 못하고 다 그런데도 그런데 하나 분명한 것은 어쨌든 사람을 전도해서 길러보겠다는 순수한 그거는 있다 말이죠.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걸 가지고 하니까 대개 보면은 다른 분들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만은, 저는 지금도 처음에 반사했던 그때 학생들 얼굴까지 저는 기억을 합니다. 이름도 제가 지금 아삼아삼 있지만은 몇몇 학생 기억을 하고, 집도 지금 머릿 속에 뱅뱅 돕니다. 초기에 제가 반사할 그때는, 그때는 순수하고 깨끗하게 전심전력 다 쏟아서 했던 그 학생들은 이름도 얼굴 형태도 집도 골목까지도 지금 머릿속에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몇 년 지나고 나서 한거는 많이 했는데도 별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만큼 점점 변질이 되어갔다 그말이고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그말이 되겠지요. 에베소 교회에 주님이 물으신 것은 많은 걸 묻지 않았습니다 .요구하지 않았고, 에베소 교회가 많은 일을 했지만은 주님은 다 귀찮아 했습니다. 다 필요없다, 내가 너에게 원하는 것은, 뭐 찾았습니까? 내가 네 수고와 인내와 참은 것 여러 가지 여덞가지 말씀하셨는데 그걸 가지고 있지만은 그거 다 필요없다는 거지요. 내가 원하는 것은 딱 하나다. 뭡니까? 처음 사랑을 가져라. 네가 정말 주님을 주님으로 알고 주님 한분 전부 삼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으로 전부 삼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전부 삼고, 주님 사랑으로 너도 사랑 가졌던 그 사랑, 결혼의 첫사랑 같은 그 사랑을 주님이 원하신다 그말입니다. 다른 것 원치 않습니다. 왜? 주님은 당신이 전능자니까. 당신이 주시면 얼마든지 주실 수 있으니까. 인간에게 받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이 어린 아이가 내놓은 것은 어린 아이기 때문에, 성경에는 아이 역사가 많이 있는데 그 아이는 힘이 없는 것이고 어리니까 잘 모르는 것이고 유약한 것이 아이입니다. 모든 면에 철없고 서툴고 부족하고 불완전한 것이 아이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특징이 자라가면서 순전하고 깨끗한 것이 있다 말이지요. 주님 앞에는 이게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슬기있고 지혜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것이 아버지 뜻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 서는 사람이 주님이 붙들고 쓰실 수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이 아이가 그런 순진한 중심과 주님 사랑을 저대로 아는 그것을 가지고 자기것을 바쳤을때 주님은 거기 마음껏 축사하셨고 은혜 베푸시고 능력을 함께해서 그 많은 무리들에게 나눠서 배불리 먹었고 자기도 먹었고 그러니까 편하게 먹었고 실컷 먹었고 기쁘게 먹었고 소화 잘되게 먹었고 많은 사람 배불렸고 주님에게 영광 돌렸고, 자기가 바른 중심가지고 내놓으니까 전부다 천국이고, 만약에 이걸 숨겨서 그랬다면 전부다 지옥이겠지요. 이것이 주님 앞에 선 우리들의 자세다 그말입니다.
오늘도 이 역사는 변함이 없습니다. 주님은 천년 전이나 육천년전이나 예를 들면 억만년 전이나 주님은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 변함없는 주님이기 때문에 오늘도 이 이치를 가지고 우리들이 내게 주어진 그 역량 다해서 바른 중심 가지고 내 힘을 들이고 시간을 들이고 노력을 들이고 물질 드리고 주님 앞에 드리면 그것가지고 주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뜻을 얼마든지 이룰 수가 있다는 것을 두 번째로 기억을 하고. 그다음 세 번째는 이렇게 하고 난 다음에는 많은 사람이 넘어지는 것은 다 누워 있으면 넘어질 일이 없지요. 누워 있으면. 기어다니면 넘어질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일어서서 다니면 넘어질 확률이 많고, 뛰어다니면 넘어질 확률이 더 많습니다. 사람들이 어려울때 올라갈때는 이런 일이 잘 없는데 어느정도 성취가 되고나면 사람들은 다 넘어지는 그런 경우를 성경에도 그렇고 수도없이 많이 봅니다. 능력 있는 일을 행하고 나니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임금을 삼으려 그랬습니다. 주남선 목사님 같은 분이 거창 그때 교회는 그 지방 교회는 상당히 큰 교회였고 그 당시 교회란 곳은 지금은 교회가 안 믿는 사람들한테 보기 싫은 하나의 지탄의 대상이 되어있지만은, 50년전 그때 교회는 그 지역에 상당히 중심되는 그런 좋은 호평을 받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 목사님은 안 믿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지방에 유지처럼 그 지방에 지도자처럼 그렇게 인식이 되어있는 상황인데 그 주남선 목사님이 거기다가 일제시대 반대, 신사참배 반대지만은 안 믿는 사람들 눈에는 항일로 보여졌고 독립 투사로 보여졌지요, 항일 투사로. 그렇게 보여지니가 그분이 만약에 국회의원 나서면 우리 전부다 사퇴하겠습니다. 그 잘난 사람들 다 사퇴하겠다 그랬는데 주목사님께서 내 나라는 천국이 내 나라, 하늘나라가 내 나라고 내가 할 일은 천국 복음 전하고 천국 건설이 내가 할 건설이지 세상 건설은 내가 할 것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거절하고, 그랬기 때문에 그분은 마지막까지 참 존경받는 그런 어른으로 죽지 못한 순교자라 이름이 그렇습니다, 주남선 목사님은. 6년 감옥 옥고 치루고 마지막에 나는 죄가 많아가지고, 손양원 목사님은 너무 깨끗해서 순교로 데려가시고 주남선 목사님은 나는 죄가 많아서 하나님께서 제물로 안 받으셨다고 얼마나 가책이 됐는지, 회개한다 그러면서 얼마나 외쳐댔는지 안에 창자가 이상이 생겼다던가요. 그래가지고 얼마 안있어서 돌아가셨다 그러지요. 순교할려고 다른 지방에 있다가 인민군들 후퇴한다는 말 듣고 그때 후퇴하면은 두 번 다시 순교못한다 그래가지고 다른 지방에 있다가 순교하려고 거창지방으로 들어오려했는데 오는데 발목이 삐어가지고 몇일동안 꼼짝을 못했답니다. 그러고나니까 인민군 다 가고 없지요. 후퇴하고 나니까. 얼마나 순교 못했다고 탄식을 하셨는지. 또 전설에 의하면 일부러 위에 비행기 지나가면 저 대로변에 십자가 하고 한가운데서 섰답니다. 잘 보이는데서. 비행기 총탄 맞아 순교하려고. 그런데 한번도 안 맞았다 그말이지요. 그렇게 산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마지막까지 끝까지 그래놓고도 겸손하게 그리하다가 세상을 떠나셨고, 다 믿음의 종들이 그렇습니다. 능력있게 일을 하고 난 다음에 대우를 바라면 그 순간 떨어지고 마는 겁니다. 성경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억지로 잡아서 인간 삼으려는 줄 아시고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이것도 우리가 깊이 생각해봐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에서 세가지를 기억하십시다. 첫째, 제자들은 주님을 모신 그들을 찾아온 무리들에 대해서 사랑이 부족하여 무책임하게 되어졌고 사랑이 부족하여 믿음도 생기지 않았고 주님까지도 다 잊어버리는 그 순간, 그런 제자들이 되어졌싑니다. 사랑을 가졌으면 다 가질 수 있는 것들인데, 보이는 것들이고 그리 되어졌습니다. 두 번째, 어린 아이는 주님의 사랑의 심정에 동참해서 자기의 가진 것,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은 아낌없이 주님 원하시는 역사에 바치니까 주님은 그것을 붙들고 마음껏 축사하시고 일하실 수 있었고 그 결과로 수많은 사람을 기진해서 살렸고 주님의 뜻을 이루었고 자기도 기뻤고 오늘까지 이 아이의 행적은 기록되어있고, 아마 이름을 알고나면 천국에서는 이름이 나올 거니까 영원토록 빛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지겠지요. 주님은 능력있게 하고 난다음에는 억지로 잡아서 임금 삼으려는 줄 아시고 산으로 떠나가셨다, 이렇게 세가지를 기억을 하면서 우리도 제자들 같은 이런 사랑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고 어린 아이같은 오병이어를 내놓은 것 같은 이런 우리가 되어야 되겠고 주님처럼 혹시라도 작은 것 하나라도 하고 난 다음에 주변에서 올렸을때, 올라가면 그다음부터는 떨어지는 것만 남습니다. 안 올라가고 있으면 올라가는 것만 남지요. 일을 할때, 무슨 일이 생길때 어려움을 닥치면 어려운 상황이 있으면은 어디서 연락이 오면은 연락이 기다려집니다. 해결이 되는가. 극단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몰렸을때는 누구든지 찾아오고 연락오면은 기다려집니다. 왜? 극단적으로 내몰렸으니까 남은 것은 좋은 것 밖에 없으니까. 더 떨어질 건 없으니까. 그런데 좋은 상황이 되었을때는 연락이 오면 겁이 납니다. 아마 어디 좋은 대학이나 직장 이런데 시험쳐서 합격 통보 딱 받고난 다음에, 합격 통보 받기전이라던지 떨어지고 난 다음에는 거기서 연락왔다 그러면 얼마나 기다려집니까, 혹시 좀 뭐가 변수가 생겨서 합격이 될란가 싶어서 얼른 전화 기다려지는데. 합격이 딱 되고 난다음에 연락이 오면은 또 이거 잘못되서 취소 되는 건 아닌가 얼마나 겁이 납니까. 사람이란 것이 어쨌든 올라가면 떨어지는 것 밖에 안 남기 때문에 올라가는 건 우리가 할 일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올리셔도 우리는 최대한 안 올라가야 되고, 하나님은 올리시고 나는 안 올라가고.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올라갈때는 반석 위에 있는 것처럼 탄탄대로로 그렇게 되어지지 쉽게 무너지고 그런게 아닙니다. 그래도 그 자리에서는 항상 조심을 하고 무익한 종의 자세가 변치 않아야 된다 그말이지요. 세가지를 기억하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오전에 말씀드린대로 본문의 내막을 먼저 사건 전개를 머릿속에 담아놓고 그 사건 전개된 그 상황에서 가르쳐주신 제자들의 태도에서의 사랑 없는 결과, 또 어린 아이의 사랑의 신앙, 주님의 마지막 가신 것 이렇게 세가지를 생각해 보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