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8-주후(행10:1-8)
고넬료의 하나님 경외 생활2014-09-29조회 261추천 30
20140928 주일오후예배
사도행전 10:1-8
여기 참고로 19절에 보니까,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그리 되있는데 그 밑에 각주에 보면 1 해놓고 ‘어떤 사본에 새사람이’ 그렇게 되있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몇 사람을 보냈습니까? 성경에 보면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낼때 몇 명을 보냈습니까? 몇 사람 보냈습니까? 대답이 안 나오네요. 몇 사람을 보냈습니까? 7절에 보실까요?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2 더하기 1은 얼맙니까? 3이지요. 세 사람을 보냈지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이래 놨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본에는 새사람이 그리 되있는데, 이런 걸 티를 잡아서 왜 성경이 틀리느냐 그렇게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수학을 몰라서 산수를 몰라가지고 그렇게 착각 하셨겠습니까? 아니면 영감으로 기록했는데 영감이 착각을 해서 그랬겠습니까? 이거는 세 사람 중에서 중생되는 두 사람이 기록했던지 어쨌든 두사람이라 그럴 필요가 있으니까 그렇게 해놨겠지요. 이런 것은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닌 겁니다. 세 사람 보냈지만은 그중에 또 둘만 나섰을 수 있는 것이고, 그러니까 참고로 이런 일 있다는 것을, 그래서 성경은 국어 교과서가 아니고 성경은 역사 교과서도 아니고 성경은 수학 문제풀이집도 아니고 성경은 도덕 그런 것도 아니고 성경은 우리 구원의 도리를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에서 가르쳐주시는 구원의 도리만 바로 깨달으면 되는 겁니다.
고넬료의 경건생활을 생각해보면, 고넬료가 이방사람으로서, 고넬료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정확하게 모릅니다. 이때 로마는, 지금 로마는 이탈리아 나라의 도시 중에 하나고 이탈리아라는 나라의 도시중에 하난데, 그때는 로마가 나라였고, 그 로마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큰 대제국이였고, 제가 아는대로 역사에 로마 나라만큼 대제국을 이룬 나라가 없습니다. 맞습니까? 000 선생 맞아요? 몰라요? 제가 틀렸는가요? 로마 나라만큼 대제국을 이룬 나라가, 000샘 맞습니까? 맞지요. 그때 거의 세계를 다 점령하다시피 로마가 그렇게 많이 점령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이달리야대라는 것은 말하자면 우리 나라 말하면 맹호부대 청룡부대 그런 것이 있듯이 비둘기 부대 이런 것 있듯이 그런 소규모의 부대의 이름이다, 이달리야대라는. 그 부대 군대 부대의 백부장이다. 백명을 거느린 장교였는데, 이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고 이방인이었습니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는데 넓게 보면은 로마 사람이라고도 할 수가 있지 않을까 그리 짐작을 합니다. 그런데 어쨌든 이 사람이 누구는 아닌 겁니까? 유대인은 아닙니다. 이방인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없는 사람인데, 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인데 유대 나라에 파송이 되가지고 유대 나라에 말하자면 점령군으로서 그 나라를 유대나라에 가이사랴라는 지방을 관할하는 그런 한 부대 중에 하나로서 거기 파송되어간 이방인입니다. 그 지방에 유대나라 이스라엘 나라의 가이사랴 지방에 가니까 그 나라가 하나님의 백성의 이스라엘 나라니까 거기 전부 하나님 섬기는 종교가 있는 것이고, 그래서 처음에는 몰랐겠지마는 거기 사는 가운데서 유대나라에서 섬기는 하나님을 보고 듣고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가져서 하나님을 알게 됐고 섬기게 되었는데, 그 고넬료의 하나님 섬김의 그 신앙이 대단히 진실해서, 그래서 첫째 모를때는 모르지만은 알고나니까 하나님은 심히 크신 분이고 높으신 분이고 심히 존귀하신 분이라. 너무도 두려우신 분이라서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그 이름조차 함부로 부를 수 없는 굉장히 형언하기 어려울만큼 큰 분, 높은 분, 귀하신 분, 두려우신 분인줄을 깨닫고 그 분을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경외라는 말은 가까이 하고 싶으나 두려운, 좋아하면서도 존경하고 사랑하고 좋아하면서도 굉장히 두려워서 조심하는 이런 양면을 같이 있는 걸 가리켜 경외라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심히 경외해서, 하나님을 경외한다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 말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 말은 무엇이 전제가 되어있는 겁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 말은 두가지를 전제로 생각해본다면 뭐 뭐 두가지가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 그 속에 두가지 무엇무엇이 전제가 되어있는 겁니까? 첫째는 하나님을 자기 정도에서 아는 것, 모르는 것을 두려워할 수는 없지요. 그 두려움은 하나의 막연한 것이고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대로는 안 겁니다. 우주를 지으신 분이다, 우주의 모든 것을 주권하시는 분이고 인간의 모든 흥망성쇠를 다 주권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다. 어떤 분인지 자세히는 몰라도 그분의 자존성, 영원불변성, 완전성 이런 것까지 다 몰랐는지는 모르겠지만은 어쨌든 큰 분이고 높으신 분이고 아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두려우신 분인 것을 알았습니다. 두 번째는 또 뭐가 전제됩니까? 아는 것 하고 그다음에는요? 아는 그대로 믿은 거지요. 아는 그대로 인정을 하고 믿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저절로 나오게 되어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고 안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인정을 하니까 그분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니까 두려우신 그 하나님 앞에 사는 고넬료의 모든 생활은 두려운 어른 앞에 서있으면 가장 대표적으로 어떤 모습이 나타납니까? 높으신 분 앞에 있으면 우리 각자가, 자기 자신이 누군가 상대할 때 나보다 아랫사람하고 있으면 내가 덕을 못 끼칠까 싶어서 그렇지만은 그렇게 부담이 적고, 친구끼리 있으면 만만하게 아무렇게나 할 말 할 행동 그냥 다 하는 것이고, 조금 높은 사람 조금 그런 사람은 조금 조심할 것이고 많이 높은 그런 사람 앞에 있으면 대표적으로 그의 모든 말과 행동과 모든 것들이 어떻게 됩니까? 높으신 분 앞에 있으면, 두려우신 분 앞에 있으면 조심이 되겠지요 모든 면에. 조심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넬료의 모든 말과 행동과 그의 모든 자기 자신의 일상적인 그런 생활과 또 모든 물질관계와 또 사건에 대한 판단과 처리와 인간 관계와, 새로 한번 해볼까요? 첫째, 말과 행동과 일상 생활과 모든 물질관계와 사건에 대한 판단과 처리와 그다음에 모든 인간 관계와, 이런 것들이 굉장히 하나님을 생각을 하고 조심이 되어진 겁니다. 조심이 되어지니까 말을 쉽게 함부로 못할 것이고 거짓말을 못할 것이고 또 악한 말을 못할 것이고 남을 헤치는 그런 말을 못할 것이고 행동도 아무렇게나 못하고 신중하고 조심이 되어질 것이고, 보이지 않는 마음에 생각이라든지 또 자기 욕심이라던지 그런 보이지 않는 마음의 모든 것까지도 함부로 못하고 조심이 되어질 것이고 그래서 말과 행동 생각 이런 것들, 그다음 자기 모든 일상적인 생활, 말과 행동과 자기 모든 마음과 생각 또 모든 그 일상적인 자기 모든 생활 먹는 것 입는 것 잠자는 것 신발 신는 것 걸음 걷는 것 취미생활 하는 것, 이런 걸 제가 열거할 때 신앙생활 해보시는 분들은 그 하나하나에 느낌이 있어야 됩니다. 신앙생활 해보면 말과, 말이 뭐 대수인가? 사람의 거의 대부분의 생활을 말로 하는데 말을 조심없이 하는 사람은 신앙이 없는 사람입니다, 들어가보면. 하나님이 두려우면 말을 함부로 못합니다. 말. 행동거취, 자기 모든 눈이 움직이고 귀가 움직이고 팔다리 움직이고 하는 그런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하는 것이고, 말 행동 마음에 보이지 않는 생각도 아무렇게나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는 사람은. 말 행동 생각 마음에 모든 것들 그다음에 자기 모든 일상생활에 먹는 것도 입맛 따라 못 먹고 대충 대충 못 먹고 옷을 입어도 아무렇게나 못 입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옷을 입을때 자기 좋은대로 입고 다니고 남에게 잘 보이려 입고 다니는 그런 것도 문제고 내가 돈 많으니까 내 돈 내 마음대로 써서 입고 다니는 것도 문제고 아무런 신경 쓰지 아니하고 편한대로 그냥 마구잡이로 입고 다니는 것도 문제고, 그러니까 여러 가지를 하나님을 생각을 하고 그분이 내 옷차림을 보고 내가 먹는 것을 보고, 내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보고 내가 신발 신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집에 갖다놓은 가전제품들을 보고, 내가 평소 누워자는 모습을 보고, 자기 일상생활을 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는데 나를 어떻게 보실 것인가를 생각하면 함부로 못한다 그말이지요. 그런 걸 조심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 정도 까지는 사람이 봐도 보는 사람 있으면 함부로 못하겠지요. 일상생활 그다음 물질에 대해서. 물질을 모으는 것도 그렇고 버는 것도 그렇고 쓰는 것도 그렇고 저축하는 것도 그렇고 주고 받는 것도 그렇고 그것도 조심을 할 것이고, 또 중요한 것은 사건이 생기면 어떤 일이 생기면 그 일에 대해서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떤 일이 생길때 자기와 상관없는 일은 공평되게 판단하고 공평되게 처리를 합니다. 그런데 자기하고 직접으로 간접으로 상관이 되있으면, 팔은 굽히면 어느쪽으로 굽어요? 바깥쪽으로는 아무리 굽혀도 부러지고 말지 안 굽어지지 않습니까? 팔이 안으로 굽어서 나하고 가까운 사람쪽을 편을 들게 되고 그쪽으로 판단이 기울어지고 그쪽으로 판단이 되면 그쪽으로 처리를 하게 되는데, 그런 것이 나타나면 그래서 사람이 권위라는 것은, 공평이란 것은 여러 가지를 생각해야 되는 것인데 권위란 것은 객관에 의한, 객관이 살펴보는 공평이 나와야 권위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공평이란 것이, 객관이 보는 것이 그 보는 사람들 자기 주관대로 보는 그것도 문제지만은,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판단해서 여기 공평하면은 그게 맞는 것인데. 그러니까 어떤 사건이 생겼을때 그 사건을 그가 판단하는 것 보니까 저 사람은 자기 기준으로 판단한다, 자기 손익계산 따져서 판단하고, 자기 혈육 손익계산 따져 판단하고 자기 위신 따져 판단하고 이런 것 가지고 판단하고 그렇게 처리를 하면은 다른 사람이 볼때 그 사람의 사건 판단과 처리 보고 ‘저거는 공평이 아니다’ 말은 안할지라도 속으로 사람은 다 생각이 있는 겁니다. ‘저 사람의 판단은 아닌데. 저렇게 처리하는 것은 틀렸는데.’ 계산이 다 있고 안다 그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럴때 자기로서는 최대한 하나님 앞에서 공평되게 하는데 그럴때 하나님의 그 깊은 뜻을 모르는 사람이 볼때는 ‘이거는 공평이 아닌데’ 그럴때도 있긴 있습니다. 그래도 자기로서는 하나님 앞에 최대한 사람들의 신앙에 어린 신앙에 손해 안되도록 하지만은 하나님 앞에서 공평되게 판단하고 처리하는데 그런 것은 당장에 이해 못해도 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해를 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것을 보면 알고, 그리고 인간관계 사람과의 관계를 보면은 그 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만큼 두려워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되는데, 고넬료라는 사람은 그의 모든 말이라든지 행동이라던지 그 속에 마음,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뜻이란 것은 말과 행동을 통해서 대개 나타나는데 그 사람의 보이지 않는 생각 중심까지, 그리고 모든 물질생활이라던지 사건에 대한 판단과 처리라던지 인간관계나 이런 모든 것을 볼때, 집안 모든 사람이 고넬료를 존경했고 많은 유대인들이 고넬료를 칭찬하고 존경을, 칭송했다 그리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리 사니까. 뿐만 아니고 고넬료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을 하셨다 그말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첫째 이 말씀에서 고넬료의 경건생활에서 배울 것이 고넬료가 하나님을 경외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배워야 되겠다. 경외라는 것은 항상 양면을 같이 기억을 하십시다. ‘경’자가 공경할 경자고 두려울 외자인데, 경외라는 말을 한마디로 줄일때는 두려움으로 그렇게 씁니다. 그러나 두려움이란 그 속에 두려움은 깡패를 겁을 내고 두려워하는 것도 두려움이고 북한에 사는 북한 주민들이 그 북한 정권 김정은이라는 그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도 두려움인데 그런 두려움은 경외라 하지 않습니다. 그냥 겁을 내는 것이고 마지 못해 하는 그런 것이지, 경외라는 말은 마음 속에서부터 존경, 존경이라 말을 쓰면은 인간적인 맛이 나서 참 존경 공경이란 말 쓰면 그런데, 하나님을 공경하는 그런 공경의 의미와, 공경이란 것은 좋아한다는 것이고 가까이 가고 싶다는 뜻이고 그분을 닮고싶다는 그런 뜻이 그속에 들어있고 그것 하고 두려움이 같이 있는 걸 가리켜 뭐라 한다고요? 공경과 두려움의 의미가 같이 있는 것을 가리켜서 경외라 그럽니다, 경외. 경외한다. 그래서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 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나면 경외심이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이거는 그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마음에, 그의 인식이고 그의 관념이고 그의 사고방식이고 그의 생각이며 사상이고 정신이고 중심이고 마음의 작용 요소들, 마음 요소들의 작용이 그 속에 먼저 자리잡고 지식이란 것은 마음입니다. 인정도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아는 그대로 인정하는 그 인정의 마음의 작용에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그 경외심이 마음 속에 있고, 그것이 말하자면 자기 후방으로 자리 잡고 있으면서 전방으로 나타나는 그 모습이 말하자면은 말이며 말조심이며 행동조심이며 모든 물질 생활의 조심이며 사건 판단과 처리의 공평이며 인간관계에 신중과 조심이며 이런 것으로 외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진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개인적으로도 그러하고 가정도 그러하고 어디서든지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워하는 이런 경외심을 가지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아야 되고 믿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을 항상 해야 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이 필연적으로 나왔으니, 하나님 섬기는 생활의 대표적인 모습은 예배니까 고넬료가 말하자면 가정예배를, 그거는 이 성구에서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여기서 고넬료는 가정적인 가정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정예배를 항상 시간을 정해놓고 꼬박꼬박 드리므로 하나님 섬기는 예배 생활을 진실하게 해 나갔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경외심이 있고 두려움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하나님 섬기는 예배 생활에 모든 것을 다 기울일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두 번째 기억할 말씀은 우리가 예배생활을 굉장히 중요성을 깨달아야 됩니다. 예배를 바로 드려야 내 가정이 바로되고 내 생활이 바로되느니라. 예배를 바로 드린다는 말은 예배시간 자체를 두고, 바로 드린다는 말의 의미는 예배를 바로 드린다는 것은 그날 그날 예배 시간에 마음을 기울여 드리는 것도 바로 드리는 것이고 전체를 두고 예배를 바로 드려야 할때 그 바로 드린다는 의미는 무슨 의미냐 하면은 예배를 바로 드려야 한다는 그 의미는 모든 자기 생활의 중심이 예배가 되어야 된다 그뜻입니다. 그날 그 시간 예배 한번을 바로 드리라는 의미가 아니고 예배 시간시간마다 예배를 바로 드리는 것도 포함되어있지마는 전체적인 중점의 말씀은 예배를 바로 드려야 생활이 바로 된다는 그 말씀은 모든 생활에 중심이 예배가 되어야 된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활을 예배에 맞춰가지고 모든 생활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걸 하나에 참고로만 듣고 지나가면 큰 손해가 따릅니다. 이걸 신앙생활은 백미터 달리기 아니고 이거는 어찌보면 하나의 위안을 주는 그런 것이 되는건데, 그래도 또 사실이 그러하니까, 신앙은 평생을 믿어야 되기 때문에 멀리를 봐야 되니까 오늘만 전부 같으면, 교역자 사례를 한달에 50만원 받으면 살겠습니까, 못 살겠습니까? 못 살겠습니까? 살지요, 뭐. 한달에 10만원 받으면 못 살겠습니까? 살지요. 한달에 100만원 내놓고 살겠지요. 그런데 그래가지고 살라 할때 제가 한달에 100만원씩 내놓고 안받고 목회하겠습니다. 그리하는 것은 하긴 하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할랍니까? 그러면 문제가 되지요. 한달 정도야 아무나 하겠지요. 1년도 빚 내가지고 하겠지요. 그런데 평생 그렇게 하라 그러면 재산이 어마어마하게 많으면 몰라도, 많아도 그거는 안되는 겁니다. 교인들 다 베리니까. 사람이 뭐든지 그렇습니다. 희생하는 것 봉사하는 것 말씀대로 사는 것, 뛰어내리는 건 누구나 뛰어내립니다. 마귀가 예수님 미혹하듯이. 성전에서 뛰어내리라. 성전에서 못 뛰어내릴 사람 있습니까? 뛰어내리면 되지요, 아무라도. 어린 아이도 뛰어내리고 70 노인도 뛰어내리면 되는데 문제는 뛰어내렸을때 죽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뛰어내리는게. 아무 가치가 없는 거지요. 그래서 함부로 뛰어내릴 수 없는 것이고. 예배가 중심 생활 되는 이것도 새겨들어야 됩니다. 예배가 중심이 되어야 되기 때문에 직장도, 거처도, 학교도, 사업도 전부 예배에 맞추는게 성경입니다. 이것이 예배를 바로 드리는 것이고 고넬료의 자세입니다. 예배를 바로 드리는 것. 그러기 때문에 모든 직장을 선택할때는 예배생활에 맞춰서, 예배를 드릴 수 없으면 직장생활을 더 낮춰 손해를 봐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고 하니까 먹고 살지를 못하겠고 힘이 들어 안된다면 그러면 부득이하게 하나님앞에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지금은 제가 아직까지 형편이 안되니까 일단 어느정도까지 예배를 빠질수도 있고 지각도 할 수 있고 그리 되겠는데’, 참 마음속으로 죄 짓는 그런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면서 진정 소원을 가지고 내가 어느 세월에 언젠가는 예배에 자유할 수 있는 그런 직장 직업을 가지리라. 늘 하나님 앞에 포언을 가지고 기도하는 그런 자세를 가지고 예배 참석을 빠질때도 그렇고 참석 못할때도 그런 마음을 가지는게 바른 자세고, 그게 진정이라야 됩니다. 하나님 보실 때 인정이 되어야 됩니다. 자기가 알고 하나님이 아시는 겁니다. 그것이 예배를 바로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자유가 있다면, 모든 생활을 예배에 맞춰가지고 예배 시간에 지각한다는 것은 오일밤예배때도 말씀드렸는데 지각을 한다는 것은 직장 때문에 매여서 사업에 매여서 그게 죄라 할 수 없고 안 할 수 없지마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 생활을 바로 알고나면 예배 시간에 지각한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아는대로도 바로 믿는 분들은 제가 볼때 10년 20년 30년을 믿어도 그런 분들은 예배 시간에 지각하는 것을 거의 보지를 못합니다. 손가락에 꼽을만큼. 몸이 아파서, 정말 어쩌다가. 백목사님도 새벽기도 한번씩 지각할 때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는 너무 피곤해서 깜빡 잠이 들어서 옆에서 안깨우고 그럴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자세로, 그런게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실수가 있을 수 있어도 알고는 그러지 않는다 그말입니다. 예배시간에 지각이란 것은 성경적으로 예배를 바로 드려야 하는 그 면에서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고넬료는 그런 자세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하나님 섬기는 그 예배생활을 모든 생활에 우선에 두고 중심에 두고 하는 그게 진실하게 보여지는데, 하나님 보실 때 고넬료에게 복을 안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같으면 그런 성도가 있으면 우리는 복을 안 주겠습니까? 하늘에서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냐 보라 다른거지만은 그리 안되겠습니까? 고넬료의 두 번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예배를 바로 드린 겁니다. 예배 생활을 바로 한 겁니다. 이것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런 어른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인식, 사람의 인식이란 것은 그의 말과 행동과 생활에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어있고,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어른들의 인식이 바로 자기 자녀들에게 직접 고스란히 들어가는 겁니다. 부모님이 한발 뒤로 물러나면 자식들은 열발 뒤로 물러나고 부모님이 열발 뒤로 물러나면 자녀들은 백발 뒤로 물러난다는 것 아닙니까. 반대로 부모님이 열발 주님 앞으로 가까이 가면 자녀들은 한발 겨우 가까이 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한발 한발이 나중에 돈으로 계산할 수 없고 시간으로 계산할 수 없는 어릴때 그 실제적인 모범의 교육이 어마어마한 결과를 나타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비들아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그다음 뭐라 그랬습니까?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주의 교양과 훈계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앞서가시므로 보여주셨듯이 앞서가면서 자녀들을 감화감동으로 따라오도록 만들어라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역자가 되지 않는데 교인이 되는 수는 없고 부모님이 안되는데 자녀가 되는 수도, 정상적인 가정에서는 별로, 완전히 없지는 않은데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으로 맞습니다. 고넬료의 자녀가 안 나왔지마는 안봐도 자녀들은 다 바로되지 않았을까?
두 번째, 예배생활이고, 세 번째는 뭡니까? 세 번째가 뭐지요? 구제입니다, 구제. 구제는 이거는 물질적인 구제도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제를 말하면, 우리 공회에서 구제 말하면 거의 다 신령한 면을 두고 인간구원을 말하는데 그게 목적이고 가치고 중심이고,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증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있으면 몸이 가는 것이고 물질이 따라가는 겁니다. 물질은 하나에 마음의 표시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없으면 물질은 안가는 겁니다. 인간구제에 대한 마음이 있으면 물질적으로도 사람들에 대해서 도와주게 되있습니다. 가난한 사람 부러운 사람 있으면 내가 형편 되는대로 어쨌든 밥한끼라도 챙겨먹이고 입던 옷이라도 챙겨주고 좀 위문이라도 가고 그래가지고 보살펴주는 그런 구제가 필연적으로 있을 수 밖에 없어서 대개 보면 성자 성녀들이 안 믿을때, 성자 성녀 되기전 그들의 부모님들이 대개 보면은, 성자 성녀들의 부모님들이 다는 아닌데 많은 분들이 보면은 하나님을 모를때도 그 부모님들은 나그네 대접하는 것이 전기 읽어보면 굉장히 많습니다. 백목사님도 그랬다고. 그 부모님들도 보면은 모르는 사람 나그네 있으면 꼭 데려다가 먹이고 재우고 그렇게 보내지 그냥 안보냈다 그러지요.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사람을 아끼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고 구제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나오게 되있습니다. 이걸 가지고 우리 속에 생각해봐야 됩니다. 내 속에 사람을 아끼는 것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있는가. 고넬료 세가지.
그다음 하나 더, 항상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생활 이것이 있었습니다. 이 네가지가 고넬료의 경건생활로 있었고 이렇게 되어질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이 첫째는 고넬료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두려움의 그 생각, 그 중심, 그 마음, 그리고 그의 보이지 않는 마음에서 나오는 그의 조심스런 말과 행동, 그의 모든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인한 하나님을 의식하므로 조심스럽게 사는 그의 일상 모든 생활 그리고 예배, 그리고 사람 구제하는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다 기억을 하셨다 그말이지요.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은 대단히 큰 것 아니겠습니까? 나를 그 사람이 기억하나 마나, 기억할 필요 없는, 오히려 기억하기 싫은 그런 경우 있겠지마는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해주신다면 그것 참 얼마나 큰 영광이며 그런게 되어지겠습니까? 만유주 하나님께서 고넬료를 기억을 하셨다. 그의 모든 이런 경건한 선한 생활이, 의로운 생활이 하늘에 상달이 되고 하나님께서 기억을 하셨다는 것.
그다음 두 번째는, 하나님이 기억을 하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셔서 성령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고, 또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역사했고, 하나님께서 친히 보자기 같은 그릇을 내려가지고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이 직접 친히 당신이 역사를 하셨고 또 천사를 동원해서 보내가지고 고넬료에게도 보냈고 또 베드로에게도 보내가지고 알리셨고, 또 베드로라는 그런 고집쟁이, 베드로에게 비몽사몽간에 보여준 그 계시가 베드로가 아는대로 그걸 먹으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베드로는 어부인데 굉장히 고집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죽으면 죽었지 그걸 안먹는 사람이고, 그러니까 안 먹는 베드로인줄 아니까 하나님께서 그 베드로에게 먹을 수 없는 부정한 것들을 가득 담은 그릇을 보여주고 ‘잡아 먹어라’ ‘결코 부정하고 속된 것을 먹지 않았고 먹을 수 없나이다.’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함부로 더럽다 하지 말아라. 또 잡아먹어라.’ ‘그럴 수 없나이다.’ ‘그러지 말아라.’ 세 번이나 그런 일이 있고난 다음에 올라가니까 베드로 생각에 한번도 그런게 드문데 세 번씩이나 반복이 되니까 아무리 고집쟁이 베드로도 생각을 안할 수가 없는거지요. 이게 무슨 뜻인가? 틀림 없는 하나님의 계시는 계신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하고 의문중에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찾아와서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있습니까? 위에서 보니까 소리가 들리니까 이것 하고 연관이 있는가 싶어서 생각하는데 성령이 베드로를 감동시켜서 ‘내가 저 사람들 보냈으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그러니까 내려가서 물어보니까 ‘내가 베드론데 왜 찾느냐?’ 찾는데 보니까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누가 보냈습니까? 고넬료가 보냈는데, 그 고넬료가 누구인데요? 백부장 고넬룐데, 그 고넬료가 말하자면은 먹을 수 없는 보자기에 든 그런 류의 사람이라 말이지요. 그런데 따라갈 수 없고 상종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찾아왔는데 생각해보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함부로 부정하다 하지 말아라 말씀을 생각하니까 바로 이런 일이구나. 그래서 따라가서 그 말 했잖습니까? ‘함부로 속되거나 더럽다 하지 말라 하시기 때문에 왔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상종하는게 위법인줄을 너희도 알지 않느냐? 그렇지마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보여주셔서 내가 왔는데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나를 불렀느냐?’ 그럴때 고넬료가 본 것을 말했지요. ‘이렇게 이렇게 생활했는데 천사가 나한테 이렇게 알려주고 당신을 모셔오라 그래서 모셔왔는데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이 아니고 우리가 당신에게 무슨 말씀을 들으려 모셔왔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럴때 베드로가 하나님께서 과연 진실한 참된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작정을 하셨는가보다 그러고 예수님의 대속역사의 그 복음을 전했고, 전하니까 성령이 역사해서 방언을 말하고, 거기 방언이라는 것은 이것도 하나 우리가 깊이 생각해볼 것인데 성경에 방언이 나오니까 방언을 우리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방언이 무엇인가를 두고 실질적으로 생각해볼때 방언이란 것은 사도행전 2장에 방언, 그 방언은 뚜렷이 알다시피 베드로가 한 나라 말로 했는데 각 사람이 자기 나라 자기 지방의 말로 들려진 그 역사가 방언이고, 어떤 경우는 한 사람이 한 언어로 말을 했는데 자기 언어로 들려지는게 방언의 역사고, 신령한 면으로는 한 구원의 도리를 말씀하는데 그 말씀을 듣는 교인들이 각각 자기 형편 자기 처지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깨달아가지는게 더 깊은 방언의 역사고, 그것보다 좀 더 실질적인 방언을 사람들이 알기 쉽게 말한다면, 여기 본문에 보면은 44절에 베드로가 이 말 할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가 이 말 할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이거는 성령의 모습이나 이런 게 좀 볼 수 있도록 나타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 방언을 말했을때 이 방언이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혀를 돌려 하는 그런 방언이겠는가? 그런 방언이 안해봐서 저는 모르겠는데 하나 분명한 것은 우리 나라로 말하면 대표적인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이 방언했다는 기록은 ‘사랑의 원자탄’에 제가 본대로 단 한마디도 업습니다. 주남선 목사님 ‘해와 같이 빛나리’ 그분도 방언했다는 말 하나도 없습니다. 백목사님께서는 그런 방언을 아예 절대를 붙이다시피 아예 부정을 했습니다. 그거는 방언이 아니라고. 단언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방언하는 사람들이 대개 보면은 순복음교회, 좀 신비주의한 그런 걸 찾고 옳은 진리의 방향을 찾기보다는 신비한 그런 걸 찾는 그런 사람들 쪽에서 많이 하는데 그 방언은 따져볼때, 제가 누가 전에 한번 방언을 가지고 계속해서 물어보길래 제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 방언을 그렇게 했다고 치고, 혀를 돌려서 이상한 그런 말 방언을 했다치고 그 방언을 한 것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 신앙생활하는데 구원 이루어가는데 그게 무슨 관계가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한마디도 필요없는 말이 없는데 우리들이 구원을 이루어가는데 그렇게 혀를 돌려 말하는 그 방언이 무슨 가치가 있으며 무슨 의미가 있으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말입니다. 아무 소용이 없잖습니까, 그거는. 아무 쓸데없는, 순전한 자기 주관이고 그런 것이지. 실질적인 그런 효력이나 소용은 없는 것이다 그말입니다. 그게 성령 역사라고 뚜렷하게 보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라 그말입니다. 여기 본문에 말씀하신 방언을 말한다는 그것은 하나님의 도를 깨닫는 그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고, 깨닫고 베드로를 통해서 전하는 예수님의 대속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듣고 깨달은, 몰랐던 것을 깨달은 그 깨달음을 말하는 것을 방언이라는 것이고 그 깨달음 속에서 하나님 높이는 그게 방언입니다. 방언 말했다는 것은 몰랐던 깨달음을 가졌다는 그말이고 그 깨달음을 가지고나니까 하나님을 높이게 됐다는 그런 겁니다. 그래서 이런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고넬료의 그 하나님을 두려워함에서 나오는 경건 생활, 하나님 두려운 그 자세, 예배 생활, 또 인간 구제, 항상 기도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감동시켰고 하나님께서 기억을 하셨고 하나님이 직접 역사하셨고 천사를 보냈고 고집쟁이 그렇지만은 사도 베드로를 그 생각을 완전히 바꿔 버렸습니다. 베드로의 사상을 변화시켜서,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절대 상종할 수 없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죽는 일이기 때문에 절대 할 수 없는데 그 베드로의 목숨을 걸 수 있는 그런 사상을 변화시켜서 바꾸어서 보냈다 그말이지요. 이렇게 큰 역사를 하나님께서 하신 겁니다. 이게 본문에 나타난 말씀이고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직접적으로 기억할 것은, 우리가 가질 것은, 고넬료 신앙에서 배울 것은 첫째 우리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을 가져야 되겠다는 것. 나 개인도 나와 관련된 가족 가정에도 그래서 그 사람이 그 가정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이 있으면 그 가정은 희망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가정이면은 회개하기 전에는 희망이 있기가 어려운 겁니다. 그다음 두 번째는 예배에 모든 생활의 중점을 두고 예배를 바로 드리는, 예배의 중심 생활이 되어야 되겠고 세 번째는 우리가 사람을 아껴서 구제하는 그런 우리가 되도록 해야 되겠고, 네 번째는 항상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런데 여기서 오후에 하나 더 추가하고 싶은 말씀은 오전에 잠깐 말씀을 드렸는데, 고넬료가 하나님을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두려워하고 경외하고 경외하므로 예배를 드렸고 온 집으로 더불어 예배 드렸고 많이 구제했고 그래서 칭송을 많이 받았고 항상 기도를 했습니다. 이게 고넬료의 경건 생활이였고 또 신앙이였습니다. 그러면 고넬료의 이런 하나님 앞에 하나님 두려워하고 한 경건 생활이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와 비교해볼때 그 고넬료가 한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은 고넬료라는 그 사람 자체가 이 땅위에 있는 수많은 수십억 역사에 왔다간 수백억 인구중에 한 사람, 더 많게는 수많은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 한 존재, 우주와 영계까지 더 합치면 무한히 많은 그 존재 중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만한 그런 존재 하나, 우리 몸의 세포가 수천억개가 넘고 수조억개가 넘는데 하루에 몇 개가 죽는다던가? 하루에 몇 백억개가 나고 죽는다 하던가요? 우리 몸에 세포가. 그 많은 세포가 수백억이 매일 매일같이 났다가 죽고 났다 죽는데 그걸 우리가 압니까? 신경이나 씁니까. 머리카락 하나 뽑혀나가본들 머리 없는 사람들이야 신경쓰겠지만은, 신경 쓰겠습니까? 고넬료 한 사람이 그 하나님 지으신 피조물 많은 존재중에서 하난데, 그 한 고넬료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한들 그것이 하나님께 무슨 의미가 있으며 가치가 있길래, 그 고넬료가 하나님을 그 집안으로 더불어 섬기는 예배생활을 한다 그래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무슨 큰 역사가 되며 도움이 되길래, 무슨 하나님께 유익이 있길래, 고넬료가 구제해본들 얼마나 하길래, 하나님께서 그렇게 고넬료에 대해서 기뻐하셨겠는가 그말입니다. 고넬료의 그 두려워하고 예배드리고 구제하고 기도하는 그 고넬료의 경건생활과 말하자면 그 수고가 그것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걸 그토록 그 많은 존재중에 고넬료를 기억을 하시고 당신이 직접 움직여 역사하시고 천사를 동원하고 베드로를 움직여서 이런 큰 역사를 하셨겠는가? 대비로 말하면 하나님의 역사와 고넬료의 수고를 비교해본다면 너무나도 작은 티끌 먼지같은 수고에 너무나도 큰 역사가 일어난 것인데 이것이 어떤 의미겠는가? 이걸 좀 생각해보자 그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우리 기독교에 구원이란 것이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기독자들의 신앙생활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이런 말씀에서 또 한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말하자면은 오늘 이 땅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되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겠는가 그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것은 어떤 것이 우리 신앙생활인가? 그래서 신앙생활을 끌고 나가는 은혜란 것은 무엇이 은혜며, 어떤 걸 알고 어떻게 걸어가야 은혜를 받는 것이며 신앙생활이 바르게 되어지겠는가를 이런 말씀에서 생각해보고 알아봐야 되겠다 그말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대표적인게 뭐뭐입니까? 믿는 사람이 신앙생활한다 그러면 대표적으로 뭘 말합니까? 첫째, 주일 지키고 두 번째 성경 읽고 세 번째 기도하고 네 번째 전도하고 다섯 번째 연보하고 그러고 말씀대로 사는 생활이고, 이런 생활을 우리가 합니다. 그런 생활이 아주 사도바울같은 그런 분들은 자기 목숨 바쳐서 곳곳에 다니며 복음을 수도없이 많이 전하는 큰 역할했고, 백목사님 같은 분들도 많은 일을 해서 큰 역사를 했는데 기독교 역사에 대다수의 모든 믿는 사람들이 그들 속에도 바울 외에도 열두사도 외에도 엘리사 외에 칠천명이나 남겨놨듯이 성경에 기록된 인물외에도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과 진실한 성도들이 많이 왔다갔고 구원을 수도없이 이루어갔는데, 대표적으로 말하면 나아만의 여종같은 사람은 그 나아만의 여종이 나아만 집에서 종노릇한 사람이 무슨 일을 얼마나 했겠는가? 얼마나 크게 활동을 하겠는가? 얼마나 드러나게 모든 사람이 알게 유명하게 했겠는가? 홍포 입은 부잣집에 병이 들어 누운 나사로가 일을 하면 얼마나 했겠는가? 그 나사로를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기뻐하셔서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도록 하셨겠는가? 이런걸 통해서 신앙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아야 됩니다. 동시에 거기 또 치우쳐서 게을러서도 안되는 것이고. 그러면 신앙이란 것은 무엇이 신앙인가? 우리 구원이란 것은 수도없이 말씀드린대로 우리 구원은 무엇이 우리 구원입니까? 우리 구원은 뭐가 우리 구원입니까? 자신의 변화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 우리 구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나를 변화시키는 겁니다. 나를 고쳐 바꾸어 가는 것. 나를 변화시키는 그 생활은 전도에서도 하고 성경 읽기도 하고 주일지킴도 하고 다 하는데 그 생활은 일을 많이 한다고 되는게 아닌 겁니다. 활동을 많이 한다고 해서 많은 사람에게 드러나게 복음을 전하고, 드러나게 순교하고 그리 한다고 해서 그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그런 위치가 있는데, 사람의 몸에는 온갖 종류의 수많은 그런 지체가 있고 외부에 내장에 오만 그런 지체 그런게 다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이 다 각자 자기 위치에서 부지런히 움직여 가지고 하는 것은 그 존재 자기 자신을, 눈은 눈을 스스로 보호하면서 눈의 일을 하고 있고 귀는 귀를 보호하면서 귀의 일 하고 있고 손은 스스로 보호하면서 하고 있으면서 온 몸 전체를 보호하고 몸을 유지되게 하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처럼 각자 자기의 위치,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인데 그 구원을 이루어간다는 것은 그것은, 그러기 때문에 남의 현실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이, 내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것이 다 그런 것인데, 내게 주신 현실이 내게는 가장 복있고 가장 소중하다는 그 깊은 의미를 생각해보면 나를 변화시키는 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내 모습을 변화시키는 것은 내게 주시는 내 현실, 나를 인도하시는 그 현실이 내게 나를 바꾸는 가장 좋은, 가장 알맞은 현실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인데 그러니까 각자 자기 주어진 거기서 높으면 높은대로 낮으면 낮은대로 천하면 천한대로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몸이 불편하면 불편한대로, 되어진 거기서 현재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 뜻을 찾아서 그 뜻대로 하나하나 순종해나가는 그 생활이 바로 자기를 변화시키는 그 생활인데, 그 생활이 얼마나 큰 생활이 되느냐? 그 생활이나 고넬료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이렇게 하는 생활이나, 나아만 대장은 계시 인물입니다. 나아만 집의 여종도 계시 인물입니다. 고넬료도 좀 특별한 경우지만은 계시 인물중에 하나라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 다 그런거니까. 그러면 그런 분들이 하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있었고 큰 역할하니까 크게 했다하지만은 알고보니까 나아만 집의 여종이 한 일은 뭐였습니까? 나아만 대장의 그 계집아이 여종이 한거는 뭐였습니까? 우리 주인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하나님의 선지자 앞에 섰으면 좋겠나이다. 그분이 주인의 문둥병을 고치겠습니다. 말 한마디 한 게 전부입니다. 말 한마디 한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그 말 한마디에 하나님이 움직였고 많은 역사가 있었습니다. 왜 그런 말이 큰 것인가? 여종의 그 말이,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을 닮아간 그 여종의 말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계신데, 그러니까 그 여종이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우리를 그런 사람을 만들어가시는 그게 목적이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말하자면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사람을 만들어가시는 것인데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사람을 만들어가시는 것인데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사람을 만들어가는 그 모습이 되어진 그 모습의 중심에 들어가면 중점에 들어가면 어떤 사람이 되어있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의 모습은 어떤 사람이 되어있는가를 생각해보면,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한분만으로 전부 삼아서, 다른 것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 없으면 안되고 하나님 한분이면 아무것도 없어도 되는 하나님 한분만 믿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고 두려워하는 그분만으로 전부 삼는 이런 사람으로 만드시는게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것들이 큰 것이고 이것이 우리 구원이고 하나님의 뜻이고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또 하나 생각해보면, 그러면 하나님 한분만 전부 삼는 이 사람이 되는 것은 뭘로 하는 겁니까? 하나님 한분만으로 전부 삼는 그 사람이 되는 것은 이것이 뭐가 되는 겁니까? 사람이, 고린도후서 4장 16절 이하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고깃덩어리 육체 이거는 후패하나 범죄하므로 저주받은 몸이기 때문에 세월속에 이거는 점점 낡아져서 부스러져서 나이가 들면 몸도 약해지고 키도 줄어들고 기름기도 빠져나가고 윤기도 빠져나가고 또 속에 골수도 빠져나가고 신경세포도 자꾸 쭈글어들고 하니까 이거는 쭈글쭈글해져서 바스라집니다. 피부도 거칠어지고 뼈도 구멍이 송송나고 그리 되어집니다. 이게 고깃덩어리 육첸데 이거는 백목사님 육체도 사도바울의 육체도 사도요한의 육체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죄 아래 있는 육체니까. 그래서 겉사람은 후패하나, 그런데 그 후패한 겉사람 속에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다는 그 속이 뭐냐? 그 속이란 것이 말하자면 새사람이란 것인데 그 새사람을 만든 것이 육체로 만든 것이고 육체보다 더 많은 비중 만든 것이 마음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 하나님 한분만으로 전부삼는 그 사람이 된다는 그 말은 고깃덩어리입니까, 마음입니까? 하나님 한분만으로 전부 삼는 하나님 형상을 닮은 그 사람의 중심은 고깃덩어리가 많습니까, 마음이 많습니까? 중심이란 것은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두려워하고 이거는 전부 몸이 합니까, 마음이 합니까?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영광돌리고 이거는 전부 마음이 하는 겁니다. 마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깃덩어리가 아무리 약해도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고깃덩어리로 하는데 지장이 있는 것은 하나 지장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고깃덩어리가 약해서, 이게 늙어서 약해서 지장있는 것은 하나 있습니다. 뭡니까? 일을 못합니다, 일을. 육체적인. 다른 사람에게 하는 그런 드러나는 일을, 육체적인 일을 못하는데 그거는 알고보면 그렇게 큰 것이 아닌 겁니다. 마음이 중요한 것이고, 중심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순종하는 전부 마음이 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롭다는 것이, 속사람이 있지마는 그 속사람이 새로운 것은 몸이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그 속사람으로 자리잡고 있는 겁니다. 마음 속에 있는 중생된 영이 강건해진겁니다. 아무리 성자 성녀라도, 사도요한 같은 분이 나이가 구십이 넘어 살았는데 그분이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 한마디만 하면 수많은 청중이 눈물 흘리고 대성통곡을 하고 은혜 받는다는데, 그분은 몸이 늙어 몸 움직이니까 다른 사람이 들어서 매다놨잖습니까? 몸이 무슨 일 했습니까? 말 한마디 하는데. 그 마음속에 늘 주님 모시고 주님 사모하고, 사모는 마음입니다. 생각도 마음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마음으로 하는 겁니다. 그래 사람이 그러기 때문에 세월 속에서 이런 사람으로 점점 변화가 되어져 가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세월을 보내면서 우리들이 젊을때는 몸으로 같이 하면서 마음을 써서 우리 자신이 결국에는 하나님 한분을 내가 나타내는데, 젊어서는 몸으로 나타내고 마음으로 함께 나타내다가 점점 세월이 지나가면 몸은 못하니까 마음으로 점점 나타내고, 마음 속에 있는 주님 사모 간절이, 주님 동행이 피부로 나타나고 말 한마디로 나타날 때 그 사람 성도의 얼굴만 봐도 앉아있는 모습만 봐도 은혜받는 그런게 된다면 그거는 뭐 사람들이 젊어 뛰는 그것하고 비교못할만큼 큰 일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오후에 지금 하나 더 말씀드린 것은, 신앙이 무엇인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앙생활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활동을 많이 하는게 신앙이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바로 나타내는게 신앙이고, 그런 사람이 되어지는게 구원입니다. 이걸 사람들이 생각지를 못하니까 방향을 전부 엉뚱한대로 다 털어가지고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봐야. 사도바울이 이리 크지만은 그게 전부가 아니고 고넬료가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그거는.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것은 당신이 원하시는 그런 사람이 됐고 당신을 그렇게 나타내니까 기뻐하신 겁니다. 하나님을 전부 삼아서 그분을 보여주는 것, 나타내는 것, 그래서 그분으로 전부 삼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만드는 것, 이것이 먼저 된 사람들의 할 일입니다. 이거는 몸으로 젊을 때 하지만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 훨씬 더 많다. 그러기 때문에 몸이 약한 것, 병든 것, 늙은 것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마음의 문제기 때문에. 마음은 몸의 영향을 받는게 있지만은 그런걸 자꾸 쌓아나가는게 우리가 젊어서 할 일이겠지요.
고넬료의 경건생활, 하나님 경외생활에서 말씀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고 오후에 말씀에서 신앙의 방향을 깊이 깊이 생각해봐야 됩니다. 평생을 달려나가도 다른 길로 가면은, 무조건 달려간다고 구원이 되는게 아닙니다. 목표를 바로 두고,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달리기를 향방 없는 것 같지 아니한다. 목표를 바로 보고 달려가야 됩니다. 힘을 써도, 신앙생활이 무엇이며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고 힘을 써야 되지 이것 모르고 힘 쓰는 것은 안타깝게도 헛된 수고가 되는게 너무 많은 겁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아는게 신앙이고 그분을 모시고 사는게 신앙이고 그분을 나타내는 것이 신앙이고 이게 그런 사람 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 깊이 좀 생각해보십시다.
사도행전 10:1-8
여기 참고로 19절에 보니까,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그리 되있는데 그 밑에 각주에 보면 1 해놓고 ‘어떤 사본에 새사람이’ 그렇게 되있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몇 사람을 보냈습니까? 성경에 보면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낼때 몇 명을 보냈습니까? 몇 사람 보냈습니까? 대답이 안 나오네요. 몇 사람을 보냈습니까? 7절에 보실까요?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2 더하기 1은 얼맙니까? 3이지요. 세 사람을 보냈지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이래 놨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본에는 새사람이 그리 되있는데, 이런 걸 티를 잡아서 왜 성경이 틀리느냐 그렇게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수학을 몰라서 산수를 몰라가지고 그렇게 착각 하셨겠습니까? 아니면 영감으로 기록했는데 영감이 착각을 해서 그랬겠습니까? 이거는 세 사람 중에서 중생되는 두 사람이 기록했던지 어쨌든 두사람이라 그럴 필요가 있으니까 그렇게 해놨겠지요. 이런 것은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닌 겁니다. 세 사람 보냈지만은 그중에 또 둘만 나섰을 수 있는 것이고, 그러니까 참고로 이런 일 있다는 것을, 그래서 성경은 국어 교과서가 아니고 성경은 역사 교과서도 아니고 성경은 수학 문제풀이집도 아니고 성경은 도덕 그런 것도 아니고 성경은 우리 구원의 도리를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에서 가르쳐주시는 구원의 도리만 바로 깨달으면 되는 겁니다.
고넬료의 경건생활을 생각해보면, 고넬료가 이방사람으로서, 고넬료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정확하게 모릅니다. 이때 로마는, 지금 로마는 이탈리아 나라의 도시 중에 하나고 이탈리아라는 나라의 도시중에 하난데, 그때는 로마가 나라였고, 그 로마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큰 대제국이였고, 제가 아는대로 역사에 로마 나라만큼 대제국을 이룬 나라가 없습니다. 맞습니까? 000 선생 맞아요? 몰라요? 제가 틀렸는가요? 로마 나라만큼 대제국을 이룬 나라가, 000샘 맞습니까? 맞지요. 그때 거의 세계를 다 점령하다시피 로마가 그렇게 많이 점령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이달리야대라는 것은 말하자면 우리 나라 말하면 맹호부대 청룡부대 그런 것이 있듯이 비둘기 부대 이런 것 있듯이 그런 소규모의 부대의 이름이다, 이달리야대라는. 그 부대 군대 부대의 백부장이다. 백명을 거느린 장교였는데, 이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고 이방인이었습니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는데 넓게 보면은 로마 사람이라고도 할 수가 있지 않을까 그리 짐작을 합니다. 그런데 어쨌든 이 사람이 누구는 아닌 겁니까? 유대인은 아닙니다. 이방인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없는 사람인데, 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인데 유대 나라에 파송이 되가지고 유대 나라에 말하자면 점령군으로서 그 나라를 유대나라에 가이사랴라는 지방을 관할하는 그런 한 부대 중에 하나로서 거기 파송되어간 이방인입니다. 그 지방에 유대나라 이스라엘 나라의 가이사랴 지방에 가니까 그 나라가 하나님의 백성의 이스라엘 나라니까 거기 전부 하나님 섬기는 종교가 있는 것이고, 그래서 처음에는 몰랐겠지마는 거기 사는 가운데서 유대나라에서 섬기는 하나님을 보고 듣고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가져서 하나님을 알게 됐고 섬기게 되었는데, 그 고넬료의 하나님 섬김의 그 신앙이 대단히 진실해서, 그래서 첫째 모를때는 모르지만은 알고나니까 하나님은 심히 크신 분이고 높으신 분이고 심히 존귀하신 분이라. 너무도 두려우신 분이라서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그 이름조차 함부로 부를 수 없는 굉장히 형언하기 어려울만큼 큰 분, 높은 분, 귀하신 분, 두려우신 분인줄을 깨닫고 그 분을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경외라는 말은 가까이 하고 싶으나 두려운, 좋아하면서도 존경하고 사랑하고 좋아하면서도 굉장히 두려워서 조심하는 이런 양면을 같이 있는 걸 가리켜 경외라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심히 경외해서, 하나님을 경외한다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 말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 말은 무엇이 전제가 되어있는 겁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 말은 두가지를 전제로 생각해본다면 뭐 뭐 두가지가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 그 속에 두가지 무엇무엇이 전제가 되어있는 겁니까? 첫째는 하나님을 자기 정도에서 아는 것, 모르는 것을 두려워할 수는 없지요. 그 두려움은 하나의 막연한 것이고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대로는 안 겁니다. 우주를 지으신 분이다, 우주의 모든 것을 주권하시는 분이고 인간의 모든 흥망성쇠를 다 주권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다. 어떤 분인지 자세히는 몰라도 그분의 자존성, 영원불변성, 완전성 이런 것까지 다 몰랐는지는 모르겠지만은 어쨌든 큰 분이고 높으신 분이고 아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두려우신 분인 것을 알았습니다. 두 번째는 또 뭐가 전제됩니까? 아는 것 하고 그다음에는요? 아는 그대로 믿은 거지요. 아는 그대로 인정을 하고 믿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저절로 나오게 되어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고 안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인정을 하니까 그분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니까 두려우신 그 하나님 앞에 사는 고넬료의 모든 생활은 두려운 어른 앞에 서있으면 가장 대표적으로 어떤 모습이 나타납니까? 높으신 분 앞에 있으면 우리 각자가, 자기 자신이 누군가 상대할 때 나보다 아랫사람하고 있으면 내가 덕을 못 끼칠까 싶어서 그렇지만은 그렇게 부담이 적고, 친구끼리 있으면 만만하게 아무렇게나 할 말 할 행동 그냥 다 하는 것이고, 조금 높은 사람 조금 그런 사람은 조금 조심할 것이고 많이 높은 그런 사람 앞에 있으면 대표적으로 그의 모든 말과 행동과 모든 것들이 어떻게 됩니까? 높으신 분 앞에 있으면, 두려우신 분 앞에 있으면 조심이 되겠지요 모든 면에. 조심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넬료의 모든 말과 행동과 그의 모든 자기 자신의 일상적인 그런 생활과 또 모든 물질관계와 또 사건에 대한 판단과 처리와 인간 관계와, 새로 한번 해볼까요? 첫째, 말과 행동과 일상 생활과 모든 물질관계와 사건에 대한 판단과 처리와 그다음에 모든 인간 관계와, 이런 것들이 굉장히 하나님을 생각을 하고 조심이 되어진 겁니다. 조심이 되어지니까 말을 쉽게 함부로 못할 것이고 거짓말을 못할 것이고 또 악한 말을 못할 것이고 남을 헤치는 그런 말을 못할 것이고 행동도 아무렇게나 못하고 신중하고 조심이 되어질 것이고, 보이지 않는 마음에 생각이라든지 또 자기 욕심이라던지 그런 보이지 않는 마음의 모든 것까지도 함부로 못하고 조심이 되어질 것이고 그래서 말과 행동 생각 이런 것들, 그다음 자기 모든 일상적인 생활, 말과 행동과 자기 모든 마음과 생각 또 모든 그 일상적인 자기 모든 생활 먹는 것 입는 것 잠자는 것 신발 신는 것 걸음 걷는 것 취미생활 하는 것, 이런 걸 제가 열거할 때 신앙생활 해보시는 분들은 그 하나하나에 느낌이 있어야 됩니다. 신앙생활 해보면 말과, 말이 뭐 대수인가? 사람의 거의 대부분의 생활을 말로 하는데 말을 조심없이 하는 사람은 신앙이 없는 사람입니다, 들어가보면. 하나님이 두려우면 말을 함부로 못합니다. 말. 행동거취, 자기 모든 눈이 움직이고 귀가 움직이고 팔다리 움직이고 하는 그런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하는 것이고, 말 행동 마음에 보이지 않는 생각도 아무렇게나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는 사람은. 말 행동 생각 마음에 모든 것들 그다음에 자기 모든 일상생활에 먹는 것도 입맛 따라 못 먹고 대충 대충 못 먹고 옷을 입어도 아무렇게나 못 입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옷을 입을때 자기 좋은대로 입고 다니고 남에게 잘 보이려 입고 다니는 그런 것도 문제고 내가 돈 많으니까 내 돈 내 마음대로 써서 입고 다니는 것도 문제고 아무런 신경 쓰지 아니하고 편한대로 그냥 마구잡이로 입고 다니는 것도 문제고, 그러니까 여러 가지를 하나님을 생각을 하고 그분이 내 옷차림을 보고 내가 먹는 것을 보고, 내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보고 내가 신발 신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집에 갖다놓은 가전제품들을 보고, 내가 평소 누워자는 모습을 보고, 자기 일상생활을 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는데 나를 어떻게 보실 것인가를 생각하면 함부로 못한다 그말이지요. 그런 걸 조심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 정도 까지는 사람이 봐도 보는 사람 있으면 함부로 못하겠지요. 일상생활 그다음 물질에 대해서. 물질을 모으는 것도 그렇고 버는 것도 그렇고 쓰는 것도 그렇고 저축하는 것도 그렇고 주고 받는 것도 그렇고 그것도 조심을 할 것이고, 또 중요한 것은 사건이 생기면 어떤 일이 생기면 그 일에 대해서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떤 일이 생길때 자기와 상관없는 일은 공평되게 판단하고 공평되게 처리를 합니다. 그런데 자기하고 직접으로 간접으로 상관이 되있으면, 팔은 굽히면 어느쪽으로 굽어요? 바깥쪽으로는 아무리 굽혀도 부러지고 말지 안 굽어지지 않습니까? 팔이 안으로 굽어서 나하고 가까운 사람쪽을 편을 들게 되고 그쪽으로 판단이 기울어지고 그쪽으로 판단이 되면 그쪽으로 처리를 하게 되는데, 그런 것이 나타나면 그래서 사람이 권위라는 것은, 공평이란 것은 여러 가지를 생각해야 되는 것인데 권위란 것은 객관에 의한, 객관이 살펴보는 공평이 나와야 권위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공평이란 것이, 객관이 보는 것이 그 보는 사람들 자기 주관대로 보는 그것도 문제지만은,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판단해서 여기 공평하면은 그게 맞는 것인데. 그러니까 어떤 사건이 생겼을때 그 사건을 그가 판단하는 것 보니까 저 사람은 자기 기준으로 판단한다, 자기 손익계산 따져서 판단하고, 자기 혈육 손익계산 따져 판단하고 자기 위신 따져 판단하고 이런 것 가지고 판단하고 그렇게 처리를 하면은 다른 사람이 볼때 그 사람의 사건 판단과 처리 보고 ‘저거는 공평이 아니다’ 말은 안할지라도 속으로 사람은 다 생각이 있는 겁니다. ‘저 사람의 판단은 아닌데. 저렇게 처리하는 것은 틀렸는데.’ 계산이 다 있고 안다 그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럴때 자기로서는 최대한 하나님 앞에서 공평되게 하는데 그럴때 하나님의 그 깊은 뜻을 모르는 사람이 볼때는 ‘이거는 공평이 아닌데’ 그럴때도 있긴 있습니다. 그래도 자기로서는 하나님 앞에 최대한 사람들의 신앙에 어린 신앙에 손해 안되도록 하지만은 하나님 앞에서 공평되게 판단하고 처리하는데 그런 것은 당장에 이해 못해도 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해를 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것을 보면 알고, 그리고 인간관계 사람과의 관계를 보면은 그 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만큼 두려워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되는데, 고넬료라는 사람은 그의 모든 말이라든지 행동이라던지 그 속에 마음,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뜻이란 것은 말과 행동을 통해서 대개 나타나는데 그 사람의 보이지 않는 생각 중심까지, 그리고 모든 물질생활이라던지 사건에 대한 판단과 처리라던지 인간관계나 이런 모든 것을 볼때, 집안 모든 사람이 고넬료를 존경했고 많은 유대인들이 고넬료를 칭찬하고 존경을, 칭송했다 그리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리 사니까. 뿐만 아니고 고넬료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을 하셨다 그말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첫째 이 말씀에서 고넬료의 경건생활에서 배울 것이 고넬료가 하나님을 경외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배워야 되겠다. 경외라는 것은 항상 양면을 같이 기억을 하십시다. ‘경’자가 공경할 경자고 두려울 외자인데, 경외라는 말을 한마디로 줄일때는 두려움으로 그렇게 씁니다. 그러나 두려움이란 그 속에 두려움은 깡패를 겁을 내고 두려워하는 것도 두려움이고 북한에 사는 북한 주민들이 그 북한 정권 김정은이라는 그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도 두려움인데 그런 두려움은 경외라 하지 않습니다. 그냥 겁을 내는 것이고 마지 못해 하는 그런 것이지, 경외라는 말은 마음 속에서부터 존경, 존경이라 말을 쓰면은 인간적인 맛이 나서 참 존경 공경이란 말 쓰면 그런데, 하나님을 공경하는 그런 공경의 의미와, 공경이란 것은 좋아한다는 것이고 가까이 가고 싶다는 뜻이고 그분을 닮고싶다는 그런 뜻이 그속에 들어있고 그것 하고 두려움이 같이 있는 걸 가리켜 뭐라 한다고요? 공경과 두려움의 의미가 같이 있는 것을 가리켜서 경외라 그럽니다, 경외. 경외한다. 그래서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 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나면 경외심이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이거는 그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마음에, 그의 인식이고 그의 관념이고 그의 사고방식이고 그의 생각이며 사상이고 정신이고 중심이고 마음의 작용 요소들, 마음 요소들의 작용이 그 속에 먼저 자리잡고 지식이란 것은 마음입니다. 인정도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아는 그대로 인정하는 그 인정의 마음의 작용에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그 경외심이 마음 속에 있고, 그것이 말하자면 자기 후방으로 자리 잡고 있으면서 전방으로 나타나는 그 모습이 말하자면은 말이며 말조심이며 행동조심이며 모든 물질 생활의 조심이며 사건 판단과 처리의 공평이며 인간관계에 신중과 조심이며 이런 것으로 외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진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개인적으로도 그러하고 가정도 그러하고 어디서든지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워하는 이런 경외심을 가지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아야 되고 믿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을 항상 해야 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이 필연적으로 나왔으니, 하나님 섬기는 생활의 대표적인 모습은 예배니까 고넬료가 말하자면 가정예배를, 그거는 이 성구에서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여기서 고넬료는 가정적인 가정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정예배를 항상 시간을 정해놓고 꼬박꼬박 드리므로 하나님 섬기는 예배 생활을 진실하게 해 나갔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경외심이 있고 두려움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하나님 섬기는 예배 생활에 모든 것을 다 기울일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두 번째 기억할 말씀은 우리가 예배생활을 굉장히 중요성을 깨달아야 됩니다. 예배를 바로 드려야 내 가정이 바로되고 내 생활이 바로되느니라. 예배를 바로 드린다는 말은 예배시간 자체를 두고, 바로 드린다는 말의 의미는 예배를 바로 드린다는 것은 그날 그날 예배 시간에 마음을 기울여 드리는 것도 바로 드리는 것이고 전체를 두고 예배를 바로 드려야 할때 그 바로 드린다는 의미는 무슨 의미냐 하면은 예배를 바로 드려야 한다는 그 의미는 모든 자기 생활의 중심이 예배가 되어야 된다 그뜻입니다. 그날 그 시간 예배 한번을 바로 드리라는 의미가 아니고 예배 시간시간마다 예배를 바로 드리는 것도 포함되어있지마는 전체적인 중점의 말씀은 예배를 바로 드려야 생활이 바로 된다는 그 말씀은 모든 생활에 중심이 예배가 되어야 된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활을 예배에 맞춰가지고 모든 생활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걸 하나에 참고로만 듣고 지나가면 큰 손해가 따릅니다. 이걸 신앙생활은 백미터 달리기 아니고 이거는 어찌보면 하나의 위안을 주는 그런 것이 되는건데, 그래도 또 사실이 그러하니까, 신앙은 평생을 믿어야 되기 때문에 멀리를 봐야 되니까 오늘만 전부 같으면, 교역자 사례를 한달에 50만원 받으면 살겠습니까, 못 살겠습니까? 못 살겠습니까? 살지요, 뭐. 한달에 10만원 받으면 못 살겠습니까? 살지요. 한달에 100만원 내놓고 살겠지요. 그런데 그래가지고 살라 할때 제가 한달에 100만원씩 내놓고 안받고 목회하겠습니다. 그리하는 것은 하긴 하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할랍니까? 그러면 문제가 되지요. 한달 정도야 아무나 하겠지요. 1년도 빚 내가지고 하겠지요. 그런데 평생 그렇게 하라 그러면 재산이 어마어마하게 많으면 몰라도, 많아도 그거는 안되는 겁니다. 교인들 다 베리니까. 사람이 뭐든지 그렇습니다. 희생하는 것 봉사하는 것 말씀대로 사는 것, 뛰어내리는 건 누구나 뛰어내립니다. 마귀가 예수님 미혹하듯이. 성전에서 뛰어내리라. 성전에서 못 뛰어내릴 사람 있습니까? 뛰어내리면 되지요, 아무라도. 어린 아이도 뛰어내리고 70 노인도 뛰어내리면 되는데 문제는 뛰어내렸을때 죽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뛰어내리는게. 아무 가치가 없는 거지요. 그래서 함부로 뛰어내릴 수 없는 것이고. 예배가 중심 생활 되는 이것도 새겨들어야 됩니다. 예배가 중심이 되어야 되기 때문에 직장도, 거처도, 학교도, 사업도 전부 예배에 맞추는게 성경입니다. 이것이 예배를 바로 드리는 것이고 고넬료의 자세입니다. 예배를 바로 드리는 것. 그러기 때문에 모든 직장을 선택할때는 예배생활에 맞춰서, 예배를 드릴 수 없으면 직장생활을 더 낮춰 손해를 봐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고 하니까 먹고 살지를 못하겠고 힘이 들어 안된다면 그러면 부득이하게 하나님앞에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지금은 제가 아직까지 형편이 안되니까 일단 어느정도까지 예배를 빠질수도 있고 지각도 할 수 있고 그리 되겠는데’, 참 마음속으로 죄 짓는 그런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면서 진정 소원을 가지고 내가 어느 세월에 언젠가는 예배에 자유할 수 있는 그런 직장 직업을 가지리라. 늘 하나님 앞에 포언을 가지고 기도하는 그런 자세를 가지고 예배 참석을 빠질때도 그렇고 참석 못할때도 그런 마음을 가지는게 바른 자세고, 그게 진정이라야 됩니다. 하나님 보실 때 인정이 되어야 됩니다. 자기가 알고 하나님이 아시는 겁니다. 그것이 예배를 바로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자유가 있다면, 모든 생활을 예배에 맞춰가지고 예배 시간에 지각한다는 것은 오일밤예배때도 말씀드렸는데 지각을 한다는 것은 직장 때문에 매여서 사업에 매여서 그게 죄라 할 수 없고 안 할 수 없지마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 생활을 바로 알고나면 예배 시간에 지각한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아는대로도 바로 믿는 분들은 제가 볼때 10년 20년 30년을 믿어도 그런 분들은 예배 시간에 지각하는 것을 거의 보지를 못합니다. 손가락에 꼽을만큼. 몸이 아파서, 정말 어쩌다가. 백목사님도 새벽기도 한번씩 지각할 때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는 너무 피곤해서 깜빡 잠이 들어서 옆에서 안깨우고 그럴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자세로, 그런게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실수가 있을 수 있어도 알고는 그러지 않는다 그말입니다. 예배시간에 지각이란 것은 성경적으로 예배를 바로 드려야 하는 그 면에서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고넬료는 그런 자세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하나님 섬기는 그 예배생활을 모든 생활에 우선에 두고 중심에 두고 하는 그게 진실하게 보여지는데, 하나님 보실 때 고넬료에게 복을 안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같으면 그런 성도가 있으면 우리는 복을 안 주겠습니까? 하늘에서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냐 보라 다른거지만은 그리 안되겠습니까? 고넬료의 두 번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예배를 바로 드린 겁니다. 예배 생활을 바로 한 겁니다. 이것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런 어른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인식, 사람의 인식이란 것은 그의 말과 행동과 생활에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어있고,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어른들의 인식이 바로 자기 자녀들에게 직접 고스란히 들어가는 겁니다. 부모님이 한발 뒤로 물러나면 자식들은 열발 뒤로 물러나고 부모님이 열발 뒤로 물러나면 자녀들은 백발 뒤로 물러난다는 것 아닙니까. 반대로 부모님이 열발 주님 앞으로 가까이 가면 자녀들은 한발 겨우 가까이 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한발 한발이 나중에 돈으로 계산할 수 없고 시간으로 계산할 수 없는 어릴때 그 실제적인 모범의 교육이 어마어마한 결과를 나타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비들아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그다음 뭐라 그랬습니까?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주의 교양과 훈계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앞서가시므로 보여주셨듯이 앞서가면서 자녀들을 감화감동으로 따라오도록 만들어라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역자가 되지 않는데 교인이 되는 수는 없고 부모님이 안되는데 자녀가 되는 수도, 정상적인 가정에서는 별로, 완전히 없지는 않은데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으로 맞습니다. 고넬료의 자녀가 안 나왔지마는 안봐도 자녀들은 다 바로되지 않았을까?
두 번째, 예배생활이고, 세 번째는 뭡니까? 세 번째가 뭐지요? 구제입니다, 구제. 구제는 이거는 물질적인 구제도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제를 말하면, 우리 공회에서 구제 말하면 거의 다 신령한 면을 두고 인간구원을 말하는데 그게 목적이고 가치고 중심이고,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증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있으면 몸이 가는 것이고 물질이 따라가는 겁니다. 물질은 하나에 마음의 표시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없으면 물질은 안가는 겁니다. 인간구제에 대한 마음이 있으면 물질적으로도 사람들에 대해서 도와주게 되있습니다. 가난한 사람 부러운 사람 있으면 내가 형편 되는대로 어쨌든 밥한끼라도 챙겨먹이고 입던 옷이라도 챙겨주고 좀 위문이라도 가고 그래가지고 보살펴주는 그런 구제가 필연적으로 있을 수 밖에 없어서 대개 보면 성자 성녀들이 안 믿을때, 성자 성녀 되기전 그들의 부모님들이 대개 보면은, 성자 성녀들의 부모님들이 다는 아닌데 많은 분들이 보면은 하나님을 모를때도 그 부모님들은 나그네 대접하는 것이 전기 읽어보면 굉장히 많습니다. 백목사님도 그랬다고. 그 부모님들도 보면은 모르는 사람 나그네 있으면 꼭 데려다가 먹이고 재우고 그렇게 보내지 그냥 안보냈다 그러지요.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사람을 아끼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고 구제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나오게 되있습니다. 이걸 가지고 우리 속에 생각해봐야 됩니다. 내 속에 사람을 아끼는 것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있는가. 고넬료 세가지.
그다음 하나 더, 항상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생활 이것이 있었습니다. 이 네가지가 고넬료의 경건생활로 있었고 이렇게 되어질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이 첫째는 고넬료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두려움의 그 생각, 그 중심, 그 마음, 그리고 그의 보이지 않는 마음에서 나오는 그의 조심스런 말과 행동, 그의 모든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인한 하나님을 의식하므로 조심스럽게 사는 그의 일상 모든 생활 그리고 예배, 그리고 사람 구제하는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다 기억을 하셨다 그말이지요.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은 대단히 큰 것 아니겠습니까? 나를 그 사람이 기억하나 마나, 기억할 필요 없는, 오히려 기억하기 싫은 그런 경우 있겠지마는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해주신다면 그것 참 얼마나 큰 영광이며 그런게 되어지겠습니까? 만유주 하나님께서 고넬료를 기억을 하셨다. 그의 모든 이런 경건한 선한 생활이, 의로운 생활이 하늘에 상달이 되고 하나님께서 기억을 하셨다는 것.
그다음 두 번째는, 하나님이 기억을 하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셔서 성령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고, 또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역사했고, 하나님께서 친히 보자기 같은 그릇을 내려가지고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이 직접 친히 당신이 역사를 하셨고 또 천사를 동원해서 보내가지고 고넬료에게도 보냈고 또 베드로에게도 보내가지고 알리셨고, 또 베드로라는 그런 고집쟁이, 베드로에게 비몽사몽간에 보여준 그 계시가 베드로가 아는대로 그걸 먹으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베드로는 어부인데 굉장히 고집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죽으면 죽었지 그걸 안먹는 사람이고, 그러니까 안 먹는 베드로인줄 아니까 하나님께서 그 베드로에게 먹을 수 없는 부정한 것들을 가득 담은 그릇을 보여주고 ‘잡아 먹어라’ ‘결코 부정하고 속된 것을 먹지 않았고 먹을 수 없나이다.’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함부로 더럽다 하지 말아라. 또 잡아먹어라.’ ‘그럴 수 없나이다.’ ‘그러지 말아라.’ 세 번이나 그런 일이 있고난 다음에 올라가니까 베드로 생각에 한번도 그런게 드문데 세 번씩이나 반복이 되니까 아무리 고집쟁이 베드로도 생각을 안할 수가 없는거지요. 이게 무슨 뜻인가? 틀림 없는 하나님의 계시는 계신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하고 의문중에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찾아와서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있습니까? 위에서 보니까 소리가 들리니까 이것 하고 연관이 있는가 싶어서 생각하는데 성령이 베드로를 감동시켜서 ‘내가 저 사람들 보냈으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그러니까 내려가서 물어보니까 ‘내가 베드론데 왜 찾느냐?’ 찾는데 보니까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누가 보냈습니까? 고넬료가 보냈는데, 그 고넬료가 누구인데요? 백부장 고넬룐데, 그 고넬료가 말하자면은 먹을 수 없는 보자기에 든 그런 류의 사람이라 말이지요. 그런데 따라갈 수 없고 상종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찾아왔는데 생각해보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함부로 부정하다 하지 말아라 말씀을 생각하니까 바로 이런 일이구나. 그래서 따라가서 그 말 했잖습니까? ‘함부로 속되거나 더럽다 하지 말라 하시기 때문에 왔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상종하는게 위법인줄을 너희도 알지 않느냐? 그렇지마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보여주셔서 내가 왔는데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나를 불렀느냐?’ 그럴때 고넬료가 본 것을 말했지요. ‘이렇게 이렇게 생활했는데 천사가 나한테 이렇게 알려주고 당신을 모셔오라 그래서 모셔왔는데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이 아니고 우리가 당신에게 무슨 말씀을 들으려 모셔왔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럴때 베드로가 하나님께서 과연 진실한 참된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작정을 하셨는가보다 그러고 예수님의 대속역사의 그 복음을 전했고, 전하니까 성령이 역사해서 방언을 말하고, 거기 방언이라는 것은 이것도 하나 우리가 깊이 생각해볼 것인데 성경에 방언이 나오니까 방언을 우리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방언이 무엇인가를 두고 실질적으로 생각해볼때 방언이란 것은 사도행전 2장에 방언, 그 방언은 뚜렷이 알다시피 베드로가 한 나라 말로 했는데 각 사람이 자기 나라 자기 지방의 말로 들려진 그 역사가 방언이고, 어떤 경우는 한 사람이 한 언어로 말을 했는데 자기 언어로 들려지는게 방언의 역사고, 신령한 면으로는 한 구원의 도리를 말씀하는데 그 말씀을 듣는 교인들이 각각 자기 형편 자기 처지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깨달아가지는게 더 깊은 방언의 역사고, 그것보다 좀 더 실질적인 방언을 사람들이 알기 쉽게 말한다면, 여기 본문에 보면은 44절에 베드로가 이 말 할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가 이 말 할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이거는 성령의 모습이나 이런 게 좀 볼 수 있도록 나타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 방언을 말했을때 이 방언이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혀를 돌려 하는 그런 방언이겠는가? 그런 방언이 안해봐서 저는 모르겠는데 하나 분명한 것은 우리 나라로 말하면 대표적인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이 방언했다는 기록은 ‘사랑의 원자탄’에 제가 본대로 단 한마디도 업습니다. 주남선 목사님 ‘해와 같이 빛나리’ 그분도 방언했다는 말 하나도 없습니다. 백목사님께서는 그런 방언을 아예 절대를 붙이다시피 아예 부정을 했습니다. 그거는 방언이 아니라고. 단언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방언하는 사람들이 대개 보면은 순복음교회, 좀 신비주의한 그런 걸 찾고 옳은 진리의 방향을 찾기보다는 신비한 그런 걸 찾는 그런 사람들 쪽에서 많이 하는데 그 방언은 따져볼때, 제가 누가 전에 한번 방언을 가지고 계속해서 물어보길래 제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 방언을 그렇게 했다고 치고, 혀를 돌려서 이상한 그런 말 방언을 했다치고 그 방언을 한 것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 신앙생활하는데 구원 이루어가는데 그게 무슨 관계가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한마디도 필요없는 말이 없는데 우리들이 구원을 이루어가는데 그렇게 혀를 돌려 말하는 그 방언이 무슨 가치가 있으며 무슨 의미가 있으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말입니다. 아무 소용이 없잖습니까, 그거는. 아무 쓸데없는, 순전한 자기 주관이고 그런 것이지. 실질적인 그런 효력이나 소용은 없는 것이다 그말입니다. 그게 성령 역사라고 뚜렷하게 보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라 그말입니다. 여기 본문에 말씀하신 방언을 말한다는 그것은 하나님의 도를 깨닫는 그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고, 깨닫고 베드로를 통해서 전하는 예수님의 대속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듣고 깨달은, 몰랐던 것을 깨달은 그 깨달음을 말하는 것을 방언이라는 것이고 그 깨달음 속에서 하나님 높이는 그게 방언입니다. 방언 말했다는 것은 몰랐던 깨달음을 가졌다는 그말이고 그 깨달음을 가지고나니까 하나님을 높이게 됐다는 그런 겁니다. 그래서 이런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고넬료의 그 하나님을 두려워함에서 나오는 경건 생활, 하나님 두려운 그 자세, 예배 생활, 또 인간 구제, 항상 기도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감동시켰고 하나님께서 기억을 하셨고 하나님이 직접 역사하셨고 천사를 보냈고 고집쟁이 그렇지만은 사도 베드로를 그 생각을 완전히 바꿔 버렸습니다. 베드로의 사상을 변화시켜서,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절대 상종할 수 없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죽는 일이기 때문에 절대 할 수 없는데 그 베드로의 목숨을 걸 수 있는 그런 사상을 변화시켜서 바꾸어서 보냈다 그말이지요. 이렇게 큰 역사를 하나님께서 하신 겁니다. 이게 본문에 나타난 말씀이고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직접적으로 기억할 것은, 우리가 가질 것은, 고넬료 신앙에서 배울 것은 첫째 우리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을 가져야 되겠다는 것. 나 개인도 나와 관련된 가족 가정에도 그래서 그 사람이 그 가정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이 있으면 그 가정은 희망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가정이면은 회개하기 전에는 희망이 있기가 어려운 겁니다. 그다음 두 번째는 예배에 모든 생활의 중점을 두고 예배를 바로 드리는, 예배의 중심 생활이 되어야 되겠고 세 번째는 우리가 사람을 아껴서 구제하는 그런 우리가 되도록 해야 되겠고, 네 번째는 항상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런데 여기서 오후에 하나 더 추가하고 싶은 말씀은 오전에 잠깐 말씀을 드렸는데, 고넬료가 하나님을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두려워하고 경외하고 경외하므로 예배를 드렸고 온 집으로 더불어 예배 드렸고 많이 구제했고 그래서 칭송을 많이 받았고 항상 기도를 했습니다. 이게 고넬료의 경건 생활이였고 또 신앙이였습니다. 그러면 고넬료의 이런 하나님 앞에 하나님 두려워하고 한 경건 생활이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와 비교해볼때 그 고넬료가 한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은 고넬료라는 그 사람 자체가 이 땅위에 있는 수많은 수십억 역사에 왔다간 수백억 인구중에 한 사람, 더 많게는 수많은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 한 존재, 우주와 영계까지 더 합치면 무한히 많은 그 존재 중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만한 그런 존재 하나, 우리 몸의 세포가 수천억개가 넘고 수조억개가 넘는데 하루에 몇 개가 죽는다던가? 하루에 몇 백억개가 나고 죽는다 하던가요? 우리 몸에 세포가. 그 많은 세포가 수백억이 매일 매일같이 났다가 죽고 났다 죽는데 그걸 우리가 압니까? 신경이나 씁니까. 머리카락 하나 뽑혀나가본들 머리 없는 사람들이야 신경쓰겠지만은, 신경 쓰겠습니까? 고넬료 한 사람이 그 하나님 지으신 피조물 많은 존재중에서 하난데, 그 한 고넬료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한들 그것이 하나님께 무슨 의미가 있으며 가치가 있길래, 그 고넬료가 하나님을 그 집안으로 더불어 섬기는 예배생활을 한다 그래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무슨 큰 역사가 되며 도움이 되길래, 무슨 하나님께 유익이 있길래, 고넬료가 구제해본들 얼마나 하길래, 하나님께서 그렇게 고넬료에 대해서 기뻐하셨겠는가 그말입니다. 고넬료의 그 두려워하고 예배드리고 구제하고 기도하는 그 고넬료의 경건생활과 말하자면 그 수고가 그것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걸 그토록 그 많은 존재중에 고넬료를 기억을 하시고 당신이 직접 움직여 역사하시고 천사를 동원하고 베드로를 움직여서 이런 큰 역사를 하셨겠는가? 대비로 말하면 하나님의 역사와 고넬료의 수고를 비교해본다면 너무나도 작은 티끌 먼지같은 수고에 너무나도 큰 역사가 일어난 것인데 이것이 어떤 의미겠는가? 이걸 좀 생각해보자 그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우리 기독교에 구원이란 것이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기독자들의 신앙생활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이런 말씀에서 또 한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말하자면은 오늘 이 땅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되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겠는가 그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것은 어떤 것이 우리 신앙생활인가? 그래서 신앙생활을 끌고 나가는 은혜란 것은 무엇이 은혜며, 어떤 걸 알고 어떻게 걸어가야 은혜를 받는 것이며 신앙생활이 바르게 되어지겠는가를 이런 말씀에서 생각해보고 알아봐야 되겠다 그말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대표적인게 뭐뭐입니까? 믿는 사람이 신앙생활한다 그러면 대표적으로 뭘 말합니까? 첫째, 주일 지키고 두 번째 성경 읽고 세 번째 기도하고 네 번째 전도하고 다섯 번째 연보하고 그러고 말씀대로 사는 생활이고, 이런 생활을 우리가 합니다. 그런 생활이 아주 사도바울같은 그런 분들은 자기 목숨 바쳐서 곳곳에 다니며 복음을 수도없이 많이 전하는 큰 역할했고, 백목사님 같은 분들도 많은 일을 해서 큰 역사를 했는데 기독교 역사에 대다수의 모든 믿는 사람들이 그들 속에도 바울 외에도 열두사도 외에도 엘리사 외에 칠천명이나 남겨놨듯이 성경에 기록된 인물외에도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과 진실한 성도들이 많이 왔다갔고 구원을 수도없이 이루어갔는데, 대표적으로 말하면 나아만의 여종같은 사람은 그 나아만의 여종이 나아만 집에서 종노릇한 사람이 무슨 일을 얼마나 했겠는가? 얼마나 크게 활동을 하겠는가? 얼마나 드러나게 모든 사람이 알게 유명하게 했겠는가? 홍포 입은 부잣집에 병이 들어 누운 나사로가 일을 하면 얼마나 했겠는가? 그 나사로를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기뻐하셔서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도록 하셨겠는가? 이런걸 통해서 신앙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아야 됩니다. 동시에 거기 또 치우쳐서 게을러서도 안되는 것이고. 그러면 신앙이란 것은 무엇이 신앙인가? 우리 구원이란 것은 수도없이 말씀드린대로 우리 구원은 무엇이 우리 구원입니까? 우리 구원은 뭐가 우리 구원입니까? 자신의 변화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 우리 구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나를 변화시키는 겁니다. 나를 고쳐 바꾸어 가는 것. 나를 변화시키는 그 생활은 전도에서도 하고 성경 읽기도 하고 주일지킴도 하고 다 하는데 그 생활은 일을 많이 한다고 되는게 아닌 겁니다. 활동을 많이 한다고 해서 많은 사람에게 드러나게 복음을 전하고, 드러나게 순교하고 그리 한다고 해서 그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그런 위치가 있는데, 사람의 몸에는 온갖 종류의 수많은 그런 지체가 있고 외부에 내장에 오만 그런 지체 그런게 다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이 다 각자 자기 위치에서 부지런히 움직여 가지고 하는 것은 그 존재 자기 자신을, 눈은 눈을 스스로 보호하면서 눈의 일을 하고 있고 귀는 귀를 보호하면서 귀의 일 하고 있고 손은 스스로 보호하면서 하고 있으면서 온 몸 전체를 보호하고 몸을 유지되게 하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처럼 각자 자기의 위치,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인데 그 구원을 이루어간다는 것은 그것은, 그러기 때문에 남의 현실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이, 내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것이 다 그런 것인데, 내게 주신 현실이 내게는 가장 복있고 가장 소중하다는 그 깊은 의미를 생각해보면 나를 변화시키는 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내 모습을 변화시키는 것은 내게 주시는 내 현실, 나를 인도하시는 그 현실이 내게 나를 바꾸는 가장 좋은, 가장 알맞은 현실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인데 그러니까 각자 자기 주어진 거기서 높으면 높은대로 낮으면 낮은대로 천하면 천한대로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몸이 불편하면 불편한대로, 되어진 거기서 현재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 뜻을 찾아서 그 뜻대로 하나하나 순종해나가는 그 생활이 바로 자기를 변화시키는 그 생활인데, 그 생활이 얼마나 큰 생활이 되느냐? 그 생활이나 고넬료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이렇게 하는 생활이나, 나아만 대장은 계시 인물입니다. 나아만 집의 여종도 계시 인물입니다. 고넬료도 좀 특별한 경우지만은 계시 인물중에 하나라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 다 그런거니까. 그러면 그런 분들이 하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있었고 큰 역할하니까 크게 했다하지만은 알고보니까 나아만 집의 여종이 한 일은 뭐였습니까? 나아만 대장의 그 계집아이 여종이 한거는 뭐였습니까? 우리 주인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하나님의 선지자 앞에 섰으면 좋겠나이다. 그분이 주인의 문둥병을 고치겠습니다. 말 한마디 한 게 전부입니다. 말 한마디 한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그 말 한마디에 하나님이 움직였고 많은 역사가 있었습니다. 왜 그런 말이 큰 것인가? 여종의 그 말이,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을 닮아간 그 여종의 말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계신데, 그러니까 그 여종이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우리를 그런 사람을 만들어가시는 그게 목적이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말하자면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사람을 만들어가시는 것인데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사람을 만들어가시는 것인데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사람을 만들어가는 그 모습이 되어진 그 모습의 중심에 들어가면 중점에 들어가면 어떤 사람이 되어있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의 모습은 어떤 사람이 되어있는가를 생각해보면,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한분만으로 전부 삼아서, 다른 것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 없으면 안되고 하나님 한분이면 아무것도 없어도 되는 하나님 한분만 믿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고 두려워하는 그분만으로 전부 삼는 이런 사람으로 만드시는게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것들이 큰 것이고 이것이 우리 구원이고 하나님의 뜻이고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또 하나 생각해보면, 그러면 하나님 한분만 전부 삼는 이 사람이 되는 것은 뭘로 하는 겁니까? 하나님 한분만으로 전부 삼는 그 사람이 되는 것은 이것이 뭐가 되는 겁니까? 사람이, 고린도후서 4장 16절 이하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고깃덩어리 육체 이거는 후패하나 범죄하므로 저주받은 몸이기 때문에 세월속에 이거는 점점 낡아져서 부스러져서 나이가 들면 몸도 약해지고 키도 줄어들고 기름기도 빠져나가고 윤기도 빠져나가고 또 속에 골수도 빠져나가고 신경세포도 자꾸 쭈글어들고 하니까 이거는 쭈글쭈글해져서 바스라집니다. 피부도 거칠어지고 뼈도 구멍이 송송나고 그리 되어집니다. 이게 고깃덩어리 육첸데 이거는 백목사님 육체도 사도바울의 육체도 사도요한의 육체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죄 아래 있는 육체니까. 그래서 겉사람은 후패하나, 그런데 그 후패한 겉사람 속에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다는 그 속이 뭐냐? 그 속이란 것이 말하자면 새사람이란 것인데 그 새사람을 만든 것이 육체로 만든 것이고 육체보다 더 많은 비중 만든 것이 마음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 하나님 한분만으로 전부삼는 그 사람이 된다는 그 말은 고깃덩어리입니까, 마음입니까? 하나님 한분만으로 전부 삼는 하나님 형상을 닮은 그 사람의 중심은 고깃덩어리가 많습니까, 마음이 많습니까? 중심이란 것은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두려워하고 이거는 전부 몸이 합니까, 마음이 합니까?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영광돌리고 이거는 전부 마음이 하는 겁니다. 마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깃덩어리가 아무리 약해도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고깃덩어리로 하는데 지장이 있는 것은 하나 지장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고깃덩어리가 약해서, 이게 늙어서 약해서 지장있는 것은 하나 있습니다. 뭡니까? 일을 못합니다, 일을. 육체적인. 다른 사람에게 하는 그런 드러나는 일을, 육체적인 일을 못하는데 그거는 알고보면 그렇게 큰 것이 아닌 겁니다. 마음이 중요한 것이고, 중심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순종하는 전부 마음이 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롭다는 것이, 속사람이 있지마는 그 속사람이 새로운 것은 몸이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그 속사람으로 자리잡고 있는 겁니다. 마음 속에 있는 중생된 영이 강건해진겁니다. 아무리 성자 성녀라도, 사도요한 같은 분이 나이가 구십이 넘어 살았는데 그분이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 한마디만 하면 수많은 청중이 눈물 흘리고 대성통곡을 하고 은혜 받는다는데, 그분은 몸이 늙어 몸 움직이니까 다른 사람이 들어서 매다놨잖습니까? 몸이 무슨 일 했습니까? 말 한마디 하는데. 그 마음속에 늘 주님 모시고 주님 사모하고, 사모는 마음입니다. 생각도 마음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마음으로 하는 겁니다. 그래 사람이 그러기 때문에 세월 속에서 이런 사람으로 점점 변화가 되어져 가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세월을 보내면서 우리들이 젊을때는 몸으로 같이 하면서 마음을 써서 우리 자신이 결국에는 하나님 한분을 내가 나타내는데, 젊어서는 몸으로 나타내고 마음으로 함께 나타내다가 점점 세월이 지나가면 몸은 못하니까 마음으로 점점 나타내고, 마음 속에 있는 주님 사모 간절이, 주님 동행이 피부로 나타나고 말 한마디로 나타날 때 그 사람 성도의 얼굴만 봐도 앉아있는 모습만 봐도 은혜받는 그런게 된다면 그거는 뭐 사람들이 젊어 뛰는 그것하고 비교못할만큼 큰 일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오후에 지금 하나 더 말씀드린 것은, 신앙이 무엇인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앙생활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활동을 많이 하는게 신앙이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바로 나타내는게 신앙이고, 그런 사람이 되어지는게 구원입니다. 이걸 사람들이 생각지를 못하니까 방향을 전부 엉뚱한대로 다 털어가지고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봐야. 사도바울이 이리 크지만은 그게 전부가 아니고 고넬료가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그거는.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것은 당신이 원하시는 그런 사람이 됐고 당신을 그렇게 나타내니까 기뻐하신 겁니다. 하나님을 전부 삼아서 그분을 보여주는 것, 나타내는 것, 그래서 그분으로 전부 삼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만드는 것, 이것이 먼저 된 사람들의 할 일입니다. 이거는 몸으로 젊을 때 하지만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 훨씬 더 많다. 그러기 때문에 몸이 약한 것, 병든 것, 늙은 것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마음의 문제기 때문에. 마음은 몸의 영향을 받는게 있지만은 그런걸 자꾸 쌓아나가는게 우리가 젊어서 할 일이겠지요.
고넬료의 경건생활, 하나님 경외생활에서 말씀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고 오후에 말씀에서 신앙의 방향을 깊이 깊이 생각해봐야 됩니다. 평생을 달려나가도 다른 길로 가면은, 무조건 달려간다고 구원이 되는게 아닙니다. 목표를 바로 두고,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달리기를 향방 없는 것 같지 아니한다. 목표를 바로 보고 달려가야 됩니다. 힘을 써도, 신앙생활이 무엇이며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고 힘을 써야 되지 이것 모르고 힘 쓰는 것은 안타깝게도 헛된 수고가 되는게 너무 많은 겁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아는게 신앙이고 그분을 모시고 사는게 신앙이고 그분을 나타내는 것이 신앙이고 이게 그런 사람 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 깊이 좀 생각해보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