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4-주후(벧전3:21-22)
신앙 양심2014-08-25조회 278추천 23
원문설교
20140824 주후
베드로전서 3:21-22
하나님의 목적은 영광의 찬미라고 했습니다. 영광의 찬미. 영광의 찬미라 말은, 여러면으로 몇가지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을 영광의 하나님으로 나타내는 것을 영광의 찬미라 그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광의 하나님으로 나타내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광의 찬미의 이 구원을 위해서 이게 하나님의 목적인데, 이 목적 위해서 하시는 그 역사가 예정 속에 다 들어있고 예정 속에 든 것이 오늘 우리 이 시간까지 섭리로 역사해서 내려오고 있고 앞으로 영원히 계속이 되어질 것인데, 하나님의 예정 속에 든 주권 섭리의 모든 역사는 심히 광대하고 또 복잡 다다하고 세밀한 구원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자시다, 알지 못하심이 없고 능치 못하심이 없는데 이런 하나님이 왜 이렇게 복잡하게 모든 일을 하고 계시는가? 왜 우리들에게 사람을 만드시되 영과 마음과 몸으로 만들어놓고 또 천사를 타락시켜 마귀를 만드시고 마귀로 하여금 인간을 미혹하게 하고 인간을 범죄하여 타락하게 하시고, 또 타락한 인간을 영원한 사망케 하시고 사망 속에서 하나님이 또 사람되셔서 구원하시고, 이런 많은 역사를 하시는 그 이유를 지난 주일 또 지난 주간에 몇 번 공부했는데 몇 가지 이유였습니까? 그 이유가 몇 가지였습니까? 새벽기도때, 밤예배때 했는데 하나님 편에서 두 가지, 사람 편에서 세 가지로 생각해 봤습니다.
하나님편에서는 첫째 하나님이 영광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당신을 모든 존재에게 알리시되 영광의 하나님으로 당신을 알리시기 위해서 모든 과정 과정이 필요했다는 것 하나.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되 더 크게 더 많이 더 깊이 실질적으로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복잡한 과정 과정을 두셨다는 것 하나. 또 우리 사람편에서는 세가지를 생각해봤으니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향해서 나아가되 우리의 자유 의지로 선택해서 나아가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자유의지의 선택으로 그리하도록 하시도록 그리 해두셨고, 그다음 두 번째는 자유 의지로 선택한 구원의 걸음을 자기가 직접 걸어가므로 경험하고 체험해서 몸소 겪어서 실감하고 알도록 그리 하신 것이고, 세 번째는 그 속에서 우리 실력의 실질적인 우리 실력을 만들어가시기 위해서 이런 모든 과정을 두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것들도 성경에 그대로 나오지 않으나 우리가 배운 교리를 바탕으로 해서 생각해보면 그리 생각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되 영과 마음과 몸을 만들어두셨고, 그래서 지난 주일에는 사람의 심신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섭리 역사, 그래서 지금도 영원전부터 알고보면, 영원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모든 주권 섭리 역사의 최종의 그 일선 최종의 종착점은 어디냐? 과녁은 어디냐? 과녁은 장소적으로 말하면 우리들의 현실이겠고,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고 원하시는 최종의 과녁은 우리의 심신의 기능을 살려내는 그것이 영원전 하나님의 작정하신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표적이다, 과녁이다 그말입니다. 맞습니까? 논리적으로? 이거 맞습니까? 생각을 해보셔야 되겠지요.
그래서 저격수들이 총을 쏘면 보통, 잘 쏘는 사람은 6백미터? 6백미터면 여기서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6백미터면 여기서 직선거리로 저기 가구거리보다 훨씬 더 멀지요, 아마? 우리 예배당에서 6백미터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가구거리보다 더 멀겠지요? 그 위에 로타리 될란가. 그 정도 되는 거리에서 총을 쏘면 아주 작은 동전만한 이런것도 맞춘다 그러거든요, 쏘아가지고. 그런데 그렇게 멀리 쏘으면 6백미터 전방에서 겨누고 총을 쏘면 그 과정에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 사람이 총을 쏘는 것은 말하자면은 6백미터 후방에 있는 목표물 그걸 향해서 겨눠서 총을 탕 쏜다 그말이지요. 저격수들이 사람을 쏘은다면 그렇게 할 것이고. 하나님의 모든 예정 창조 주권 섭리 하나님의 그 속에 인간의 천사의 타락과 인간의 범죄 타락과 사망과 도성인신과 사활의 대속 역사와 성령의 모든 역사들 그런 모든 과정의 역사들 거기 들어가는 수많은 존재들의 나고 없어지고 있어지는 그 활동 역사들의 그 방향이 전부 그 배후가 하나님인데 하나님의 그 모든 과정의 중간 역사들의 종착의 표적은 바로 각자 우리 내 현실이고, 내 현실에 나의 마음과 몸을, 심신의 기능을 살려내는 것이 바로 그 최종의 과녁이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의 구원이란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내 심신의 기능을 살리는 것이 구원이고 그 심신의 기능을 하나하나 살려 나가다 보면 나라는 사람이 변화가 되어져 가는 이것이 기독자들의 구원입니다. 이 심신의 기능 요소를 살려내는데 우리 사람의 요소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람의 주격인 영이고, 영을 통해서만 살릴 수 있으니까 영을 그래서 만들어두셨고, 하나님이 영을 만드신 것도 하나님이 당신을 사람들에게 존재에게 나타내셔야 되는데 영이 없으면 하나님을 나타낼 수가 없는고로 영을 만들어 두셨고, 그다음 그 영을 통해서 하나님을 우리 마음과 몸에 나타내시고 그다음 영에게 배운 본 받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내 마음과 몸은 사물에게 나타나고, 그래서 바다의 물이 넘침같이 온 우주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도록 만드는게 하나님의 목적이고 이것이 교회고 기독교의 구원이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이라는 것은 과거에는 몰랐어도 지금은 영을 알아야 되고 벌써 수십년 전부터 영에 대한 교리를 밝혀두신 그때부터는 영을 모르면 지금 시대에 21세기 과학이 인간의 모든 몸 마음까지 완전히 해부하는 이런 시대에 영의 세계를 깨닫지 못하면 기독교는 세상에게 삼켜서 밥이 될 수 밖에 없고, 기독교라는 종교는 하나의 이종교와 같은 그런 하나의 수양이라던지 인간의 힘든 고통스러운 인생살이를 위로하는 그런 하나의 수양 종교, 그 이상 넘어갈 수 없는 거기 머물게 되는 겁니다. 실제는 그러하지 않으나 학자들이 또 믿는 사람들이 진실이 없고 파고들어가지 않으니까 영을 발견하지 못하니까 그리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영을 알고나서, 영의 세계를 알고나면 인간들이 아무리 무엇을 만들어내도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그거는 인간에게 허락을 하신 것이라. 그래서 예를 들면 앞으로 사람의 눈도 만들어낼지 모르고, 사람의 심장도 인공심장 지금 만들지요? 만들어낼지 모르고. 사람의 몸에 있는 어지간한 것은 만들어낼지 모르겠고, 피도 앞으로 만들어낼지도 모릅니다. 만들어내도, 피를 만들어내도 그것도 물질이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범위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 만들어내도 인간이 아무리 과학을 발달해도 영에 대한 것은 그거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가 아니기 때문에 알 수 없고 거기는 손을 댈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과학이 세밀하고 머리가 좋고 어디까지 깊이 종교성 가지고 세밀하게 파고 들어가서 석가모니 할배보다 더 깊이 들어가고 들어가도 얼마든지 명상을 하고 명상을 해도 예수님의 대속이 없는 그 영이 죽어있는 상태로서는 인간 피조물 범위 넘어서는 결코 발견할 수도 없고 그 이상의 종교를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모든 심신 가진 물질의 한계고, 기독자들은 아무리 무지하고 못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도 영이 중생되어 있으면 세상에 가장 탁월한 불신자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알게 되기 때문에 이거는 비교 자체가 될 수 없는 그런 다른 차원의 세계가 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영을 우리가 일반 믿는 사람이 정확하게 몰라도, 그래도 지금은 시대가 그런 시대고 어지간히 밝혀졌기 때문에, 우리 교인들도 예배 시간에 아마 그동안에 설교만 제대로 들었어도 영에 대해서 어지간히 교리를 다 알고 있을건데, 모른다면 안 들었던지 다른 뭐가 있겠지요. 어지간히 많이 말씀 드렸으니까. 그래서 지난 주일에 영을 말씀 드린 것이고. 그다음 영은 영인데, 이제 오늘 말씀드린 것은 영은 영물이고 영인데, 물질인 우리 마음에 속한 영을 통한 하나님의 그 모든 것을 받아 드릴 수 있는 마음의 요소 중에서 가장 밝은 부분인 양심을 공부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구원이란 것은 어쨌든 궁극적으로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모든 일이 해결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복도 받을 수 있고 은혜도 받을 수 있고 성공도 할 수 있고 또 구원도 이ㅓ루어갈 수가 있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을 만나야 거기서 비로소 기독교의 구원은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거는 세상에서도 그러지 않습니까 오전에 말씀드린대로. 어쨌든 무슨 문제가 생기면 가정에서도 밑에 사람이 아무리 그래봐야 가장 어른 그 모든 것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어른이 모든 걸 결정하니까 그 어른을 만나야 해결이 되지 그 어른 만나지 않으면 해결이 안된다 그말이지요. 다 해놔도 위에 어른이 틀어버리면 안되는 거니까.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의 신앙생활 구원이란 것은 모든 초점을 하나님께로 맞춰야 되는 것이고 그분에게 맞출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그 분을 영화롭게, 그 분 섭섭하지 않도록, 그 분 좋아하도록, 그 분이 복을 주실 수 있도록, 그 분이 은혜를 주실 수 있도록, 그 분의 눈치를 보면서 모든 초점을 하나님께 다 맞추고 사는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데 문제는 그 하나님은 완전자라 무형의 완전자라서 어두운 우리들의 눈과 심령으로 볼 수 없는 무형의 완전자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을 찾아도 하나님을 만나기가 대단히 어렵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이 찾아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당신이 우리를 당신에게 나타내시고 알리시기를 원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데 그 알려주시는 순서가 있고 법칙이 있으니까 그 법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나볼 수 있으니, 아무리 사람들이 간절하고 애가 타고 해도 그 하나님께서 당신을 알리시는 그 법칙에 맞지 않으면 하나님은 찾을 수가 없고 만나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고 참아도 못하고 믿어야 된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란 것은 어찌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이신데 동시에 하나님은 복수의 하나님이시면서 굉장히 잔인한 잔인의 하나님이라고도 표현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세우신 법칙을 깨트릴수가 없으니까 그 법을 어겨서 인간의 감정에, 눈물에, 정에 끌려서 허용을 하다보면 법이 깨져버리니까 법이 흔들려버리면 하나님은 법이 하나님보다 위에 있을 순 없는데, 그러나 그 법 자체가 하나님이 세우신 법이기 때문에 완전하신 지공의 하나님께서 당신이 세우신 법을 어길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법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지, 그 법을 어기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울고 불고 울다가 지쳐서 눈물이 바다를 이루고 다 죽어도 하나님은 눈도 깜짝 하지 않는 분이 하나님이라. 안타깝게도 마음은 아프시겠지만은 내가 세운 법이 있으니까 그 법대로 해라. 그 법을 찾아서 법대로 하면 안 울어도 되고 밥을 안 굶어도 되고 그렇게 힘들게 안 해도 된다. 법대로만 하면 된다. 그 법이란 것이 율법인데 그 율법이 우리에게 그렇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 은혜가 있으니까 그 대속의 은혜 바탕 위에서 이 율법이 우리에게 왔기 때문에 그 법대로 하면 하나님을 찾아 만날수가 있는 것이고,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 없이 이 율법을 아무리 해도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이고, 대속의 은혜 위에 있어도 이 율법대로 하지 않으면 또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니까 할 수가 없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아도 하나님께서 말씀해놓으신 그 말씀대로 하나님을 찾아야 되니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당신을 알리시는 그 법이 어떤 법인가? 하나님은 순서로 말하면 영감으로 그다음 진리로 역사하시는데 쉽게 한말로 말하면 진리를 통해서 당신을 우리에게 알리시니까 그 진리는 참된 이치고 그걸 알기 쉽게 말하면 말씀이고 그 말씀은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성경 말씀이고 이 성경 말씀은 참된 이치 진리고 그 진리 속에는 하나님이 내재해 계시고, 그러기 때문에 성경 말씀 진리를 읽고 들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는데 문제는 그러면 누구나 다 성경 말씀만 읽고 들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는가? 어떤 사람은 안된다 했습니까? 성경 말씀을 읽으면, 들으면 이 성경 말씀은 진리 참된 이치고 이 참된 이치 진리 속에는 하나님이 내재해 계시니까 이 말씀을 읽기만 하고 듣기만 하면 누구든지 다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는가? 어떤 사람은 안되는 겁니까? 어떤 사람은요? 영이 죽어있는 사람은 안되는 겁니다. 영이 없는 사람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영이 없는 사람은 없고, 영이 없으면 뭡니까?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고, 영이 없는 사람은 없는데, 영이 죽은 사람들, 영이 있기는 있는데 원죄로 인해서 정죄 받아 죽은 사람들은 죽었으니까 있기는 있지만은 활동이 전혀 없으니까, 그 사람은 영이 죽은 사람은 그 증거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증거고, 안 믿는 사람들이고 안 믿는 사람들이 참고로 교양으로, 그래서 세상에 모든 지식들 모든 책들은 사람이 그 모든 걸 다 만들어냈고 사람이 이용을 하면 이용을 당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보기에는 꼭 같이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검은 것은 글이고 흰 것은 종이고 그렇지만은 이 말씀은 그 안에 말씀 자체가 참된 이치 진리기 때문에 그 진리는 하나님의 독자적인 하나님 말씀이고 독자적인 능력을, 이거 한번 제가 언제 저도 이걸 안지가 얼마 안됐는데, 진리는 독자적인 능력을 가졌다 이게 무슨 말인가를 오래토록 의문 가졌는데 얼마전에 아마 그러겠다고 해결을 했습니다. 설명하라 그러면 설명 하시겠습니까? 진리는 독자적인 권위와 독자적인 능력을 가졌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000 선생님 설명하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지? 말 그대로야 쉽지요. 독자적이라 말은 홀로 독자 그러니까 진리 스스로 독자적인 권위와 능력 가졌다. 000 선생님 설명 하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지. 하나 하나 꼭 꼭 짚어서 진실하게, 그래서 내가 신앙에 1차로 중요한 것은 그 한말씀 한말씀 자체가 이해가 되어야 됩니다. 성경을 읽어 나가다 보면 그냥 쭉 읽어나가는데 써내려가다보면 그 성경 속에 모르는 단어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어려운 단어들. 평소에 그냥 읽어 내려가는데도 그 한마디 한마디가 모르는 단어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 하나 하나를 살펴서 일단 외부적으로 깊은거는 몰라도 국어사전을 통해서도 일단 알아놔야 됩니다. 참고로 알고, 그다음에 깊은 뜻은 또 달리 알아야 되고. 그래서 이 성경 말씀이 하나님 말씀이고, 하나님 말씀은 참된 이치 진리고, 그 진리 속에 하나님이 내재해 계시니까. 그런데 영이 죽어있는 사람들, 영이 중생되지 못하고 죽어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읽어도 들어도 진리를 깨닫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결코 만나볼 수가 없다는 것이고, 영이 살아서 중생된 사람들은 이 성경 읽고 듣고 하면은 깨달을 수 있고 믿음이 생겨지고 하나님을 만나볼 수가 있는 것인데,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원론적으로는 그렇지만은 세밀하게 순서를 따져간다면 중생된 사람이 성경 읽고 듣고 진리 말씀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믿음이 생기는 것이 기본적인 믿음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그 믿음은 이미 중생될 때 생기는 것이고 그 믿음이 겨자씨 믿음처럼 점점 성장해서 자라가는 것,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점점 자라가는 그 면. 그래서 말씀을 읽고 들을때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이 생겨지고 믿음이 깊어지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서 만나게 되는 원론적인 것은 중생된 사람이면 누구나 가능하지만은 실질적으로 따져들어가보면 중생된 사람 중에도 한 단계가 더 필요하니 어떤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오전내 말씀드린 것이 양심을 쓰는 사람, 신앙 양심을 써야 만날 수 있다 그말입니다. 신앙 양심이 없는 사람, 양심이 없는 사람은 없는데 양심을 가지되 양심을 다 그만 매장시키고 죽이고 양심에 주인을 만들어놓은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이거는 안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양심도, 수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도 그 양심을 매장시키고 양심을 죽이고 양심의 주인을 만들어놔서 양심이 자유하지를 못하는 겁니다. 철이 자석만 만나면 딱 들어붙어서 떨어지지도 못하고 가야 되는데 자석에 탁 붙어있으니까 안간다 그말이지요. 자석에 들어붙어버리니까. 양심이 자기 지식의 범위안에서 옳은 것 바른 것 참된 것을 찾아서 들어가야 되는데, 욕심이 딱 붙들고 있으니까 욕심에 딱 양심이 들어붙어버리니까 안 움직인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을 써야 된다.
그러면 양심이란 것은 어떤 것이 양심인가를 생각해보니까 양심은 사람에 있는, 하나님의 사자가 아니고 사람에게 있는 마음의 요소, 인적 요소, 마음 안에 있는 욕심이나 감정이나 소원이나 이런 것처럼 여러 가지 있는 중에 양심도 하나고, 인적 요소고, 그러면 그 양심은 지식의 지배를 받는 것이고 그러면서 그 지식의 범위 안에서 가장 옳은 것 바른 것 참된 것을 찾아가는 것이 양심이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는 지식이 많기 때문에 양심이 많고, 그래서 도덕가들의 양심은 도덕적인 양심입니다. 도덕적인 양심. 여러 가지 그런 양심이 있겠습니다. 그러면 기독자의 양심은 어떤 양심인가? 기독자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받는 양심이기 때문에 그 양심을 이름하여 신앙양심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 우리들은 양심을 찾되 그 양심을 찾아가지고 그 양심을 신앙양심으로 만들어서 길러나가야 되겠다. 그래서 다섯가지 면으로 첫째 양심에 대해서 주인을 만들면 안된다. 자기 양심에. 여기 들어가기 전까지 양심을, 자기 속에 양심을 생각해 봐야 됩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여러 요소 중에서 욕심은 무엇이며 감정은 무엇이며 의지는 무엇이며 소원은 무엇이며 또 기억력은 무엇이며 거기서 뜻은 무엇이며 양심은 뭐냐? 내 속에 있는 어떠할 때 그런 마음이 들던데 그 마음이 바로 양심이구나, 그 마음이 바로 욕심이구나, 그 마음은 감정이구나, 자기 마음을 파고 들어가보면 무엇이 무엇인지 구별해서 알 수가 있다 그말이지요. 양심을 찾아봐야 됩니다. 그래가지고 그 양심을 주인을 만들지 말아서 양심이 자유하는 양심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교회라는 것은, 교회는 자유로워야 됩니다. 교회 자유라 그말은, 교회는 자유다. 교회가 세상 권력에게 물질에게 정치에 문화에 이게 휩쓸려 나가는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교회 이름으로 나서서, 목사 이름으로 나서가지고 정치에 나서는 사람들, 목사 이름을 가지고 세상 운동에 나서는 사람들, 교회 이름을 가지고 나서는 사람들 누가 뭐래도 성경으로 틀린 겁니다. 목사 이름 가지고는 자기 개인 이름으로는 할 수 있지만은 목사라는 이름 걸고 정치하는 것은 성경에 틀렸습니다. 죕니다 그거는. 안되는 겁니다. 교회 이름을 걸고 무슨 단체 운동하는 것도 틀린 겁니다. 교회는 이 세상 어디에도 매이면 안되는 자유로운 교회, 오로지 하나님의 교회로서 하나님만 향하는. 그게 교회 자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이유는, 반대해도 그것도 뭐 어쩔 수 없는 건데, 반대하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그 공산주의의 경제 이론 정책이 틀렸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 아닙니다. 그거는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하고는. 믿는 사람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이유는 딱 하나, 그 사람들은 무신론 주의자들입니다. 신을 인정하지 않고 무신론 주의자들. 따라서 교회 종교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반대하는 것이지 다른 건 없는 겁니다. 교회 자유. 신앙도 자유로워야 됩니다. 하나님 섬기는 신앙은 자유입니다. 기본적으로 교회는 자유, 신앙 자유, 양심도 자유입니다. 자유로운 양심이 되어야 되지 그 양심이 어느것에게든지 붙들려 매여가지고 있으면 양심은 양심으로서는 이미 맛을 잃은 것이고 본분을 잃은 것이기 때문에 아무 쓸모가 없는 양심이 되고 마는 겁니다. 내 양심은 어디 붙들려 있는가를 자기가 찾아봐야 됩니다. 자, 한번 생각해보시겠습니다. 각자 자기 양심은 어디 붙들려 있을 가능성이 가장 많습니까? 자기 양심이 어디에 가장 많이 붙들려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거는 조금 응용을 하는 건데,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으러 광야로 가셔서 제일 처음에 뭐했습니까? 금식기도 40일 금식을 하고 나니까 그다음에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배가 잔뜩 고픕니다. 주리니까 육을 가진 예수님 몸이니까 본능적이라도 먹을게 생각이 나겠지요. 주리니까, 갈급하니까, 배가 고프니까.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40일 굶었지, 배가 심히 고프겠지, 떡을 먹고 싶겠지? ‘너는 하나님의 아들 아니냐? 여기 돌멩이로 떡을 만들 수 있지 않느냐? 이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먹으면 되지 않느냐?’ 그럴때,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인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마귀가 그렇게 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때 말하자면은 돈이 필요하지? 돈이 좋지? 여기 돈이 있다. 그러면 돈을 가지면 되는데 그 돈을 가지는 것이 마귀가 주는 돈,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돈이면 그 돈은 우리가 아무리 돈에 갈급해도 가질 수가 없는 것이고, 직장이 아무리 갈급해도 말씀에 어긋나는 어기는 직장 같으면 우리가 가질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것처럼 양심이 주인이 생길 경우는 자기에게 가장 강한 것이 있습니다. 자기 마음의 요소 중에서, 성품 중에, 마음의 요소 중에서 가장 강한 것. 마음의 요소니까 드러나지 않으나 마음은 몸으로 드러나고 몸은 행동으로 나타나니까 그 사람의 평소 언행과 그 사람의 평소 사리판단과 일처리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에 있는 성품을 짐작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마음의 성품, 악성인데, 가장 강한 그 악성 그것이 자기 양심의 주인일 가능성이 대단히 많고 또 자기 몸의 습성중에서 가장 거기에 자기의 시간과 마음과 모든 것이 많이 기울어져서 자기 스스로 생각해볼때 나의 모든 신앙은 이 면 때문에 손해보는게 가장 많다고 생각되는 그런 요소가 다 있지요? 그것이 바로 자기 양심의 주인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거기만 딱 걸리면 넘어진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이걸 찾아가지고 자기 양심에 주인을 찾아서 이 주인을 어째야 됩니까? 끊어버려야 됩니다. 거기서 벗어나서 해방과 자유를 가져서 양심이 자유하는 양심이 되야 됩니다. 그리고 양심의 원래 모습 그대로, 양심은 첫째 뭐라고요? 인적요소인데, 양심의 활동은 첫째 지식의 지배를 받아서, 두 번째는요? 그 지식의 범위안에서 가장 옳은 것, 참된 것, 바른 것을 찾아가는게 양심의 본질이니까 그렇게 하도록 양심을 자유를 줘야 됩니다. 주인을 만들면 안됩니다. 이걸 성경에는 화인 맞았다 그래놨습니다. 불도장을 탁 찍어서 낙인을 찍어가지고 이거는 내꺼다, 너는 종이다. 옛날에는 종들, 도적들은 이마에다가 도둑질했으면 도적 적자를 이마에다가 불로 콱 찍어서 이 사람은 도적이다. 그러면 평생 그 사람은 도적이라는 그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참 형벌중에도 검나는 형벌이지요. 도적. 낙인을 콱 찍어버리면. 그게 화인인데, 양심이 화인 맞으면 양심이 주인이 생기는 것이고, 주인이 생긴 양심은 자유하지 못하고 그 양심은 쓸모없는 양심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양심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 하면, 양심이 그래서 신앙이란 것은 우리 기독교의 신앙 구원이란 것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것인데 한편으로는 사람을 얻고 사람을 점령하고, 점령이라 말이 나쁜 의미가 아니고 사람을 얻어서 점령하는 것이 우리 구원이고 신앙생활이라 그런 면이 있습니다. 사람을 우리가 얻을 때 그 사람의 눈을, 귀를, 생각을 마음을 얻는 것보다 그 사람의 양심을 얻으면 이게 가장 강한 것인데, 그러니까 사람의 양심이란 것은 그 사람의 전생애를 끌고 가되 강하고 담대하게 끌고 가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서 많은 사람이 사도바울을 두고 예언하기를 지금 성령이 사도바울에게 알려주기를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과 환란이 사도바울을 기다리고 있지만은 나는 심령의 그 양심인데, 심령의 매임을 받아, 심령은 마음이고 영에게 속한 마음인데 그 마음 중에 양심을 말하는 겁니다. 거기 매임을 받아가지고 양심에 끌려서 결박 당하고 죽을 위험에 있는 줄 알지만은 양심에 끌려서 가는 겁니다. 안 가면 어찌 됩니까? 양심이, 사도바울을 자극하는데 안 가면 양심에 가책이 돼서 괴로워서 견디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도둑질을 하면은 그게 죄가 되는 줄 모르는 사람들은 도둑질해도 괴롭지 않습니다. 지식적으로 도둑질을 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도둑질을 예사로 하는 겁니다. 그래도 전혀 가책이 없고, ‘그게 왜 나쁜건데?’ 오히려 큰소리 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둑질은 나쁜거야.’ 남의 것 훔치는 것은 죄가 되는 것이고 나쁜 짓이란 것을 아는 사람이 도적질을 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양심에 가책을 받아서 괴로운 겁니다. 자기가 아는데, 그래서 사상가들이 무서운 것은 많은 사람에게 자기가 가장 최고 이상이라고 알고 있는 그 사상을 사람들에게 책을 써서 강의를 통해서 여러 형태로 사상을 주입을 시켜버리니까 그러면 그 사상을 들어보면 이것이 인간을 최고로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목숨을 바쳐서 그 사상을 지키는 것은 그들 아는 그 공산사상 그 범위안에서 이것이 인간을 정말 위하는 것이고 참된 인간을 사랑하고 아끼는 길이란 것을 그들은 세뇌가 돼서 그대로 박혀서 자기 지식이 그게 한계고 그 지식이 그들의 양심을 점령해가지고 있으니까 그 자기 사상 그것을 위해서 죽으면, 나는 인류 위해서 죽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는 것이니까 이거는 귀한 것이고 영광스러운 것이라. 그렇게 인식이 되어있고 양심으로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다가 죽는 것이 그들은 자유롭고 편하지, 그것을 꺾고 양심을 꺾는 것은 괴로워서 못 견디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어느 정도에 육체적인 그런 고통, 사람이 육체적인 고문 고형을 당하면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서 그것도 또 더 할 수 있겠지만은 사람의 몸은 한계가 있으니까 어느 정도로 고통을 당하고 나면 감각이 무뎌져서 아픈 것도 못 느낄 만큼 그리된다 그러죠, 기절해버리던지. 그런데 양심이란 것은 마음의 것이기 때문에 마음의 고통을 당하게 되면 몸의 고통 당하는 것보다 훨씬 더하게 되고, 마음에도 여러 가지 다른 고통보다도 양심이란 것은 마음중에서도 가장 밝은 것이고 가장 빛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 어긋나는 일은 사람이 견디기가 어려운 겁니다. 그래서 양심에 가책되고 나면 괴로워서 못 견디고 그러다가 죽는 사람도 있고 나중에 자수도 하고 여러 가지 그런 작용들이 생기게 되는 거지요. 그게 양심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래서 사람이 양심이 있고 그 양심을 바로 인도하는 그런게 있으면 그 사람은 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게 먼저니까 첫째 양심을 주인을 만들지 말아야 되겠고, 두 번째는 양심을 죽이지 말아라 되겠다. 양심을 죽인다는 말은, 양심은 몸이 아니고 고깃덩어리가 아니고 신령한 물질에 속한 마음이라서 양심이 죽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죽는다는 말은 그만큼 그 양심의 기능 역할이 없어진다 그런 말이 되겠지요. 그런데 고깃덩어리 육체 이거는 일단 심장이 딱 멎어버리고 나면 다시 살릴 수가 없잖습니까? 끝나는건데, 신령한 물질인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은 양심이 죽으면 일단 죽어도 육체가 살아있는한 그 육체 속에 있는 마음의 요소 양심은 한번 죽어도 시간 지나서 노력하면 죽었던 양심이 살아날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죽은 상태로 계속 지나가게 되면은 나중에는 죽어서 양심이 있는 줄 없는 줄도 모르게 되겠지요. 양심을 죽이는 것은 양심이 하는 소리, 호소, 부르짖는 것, 이 자기 내면의 세계에서 양심은 자기 속에 있지 않습니까? 내 속 내면에서 양심이 부르짖는 그 소리를 사람들이 알면서도 양심에 주인이 생긴것이라든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에 이거는 아니라 이거는 해야 된다 알면서도 그 양심의 소리를 꺾어서 눌러서 묵살해버리고 그냥 안할 일을 하고 안 갈 길을 가고 안 할 생활하는 그런 생활을 하게 되면은 양심이 점점 죽어지는데, 이런 생활 안 해보셨습니까? 저는 이걸 따지고보면 논리적으로 보면 양심을 죽이는 생활 굉장히 많이 한 것 같은데, 아닌가요? 우리 교인들은 전부 성자 성녀들이고 저는 죄인이라서 그런가 모르겠습니다.
양심, 자기 속에서 부르짖는 양심의 소리가 있습니다. 주일을 두고도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 좀 읽어야 되는데. 성경 읽어야 되는데 다른 것이 있으면 바빠서, 다른게 더 좋아서 그러면 ‘성경 읽어야 되는데’ 그 소리는 중생된 영이 양심을 통해서 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묵살해버리는 겁니다. 그냥 고개 흔들어버리고 묵살해버리고 그냥 자기 할 일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양심이 죽는 것이다 그말이지요. 이런 걸 하지 말아야 되겠다. 그런데 이걸 안하기가 참 대단히 어렵습니다. 양심을 죽이지 말아야 되겠고, 먹지 말아야 되는데, 무엇을? 예수 믿는 사람이 먹으면 안되는게 있는데, 이거는 좀 제사 음식이니 술이니 이런 것까지는 안가도 내 몸이 지금 이런 음식은 먹으면 내 몸에 해가 되니까 이 음식은 입맛이 당기고 먹고 싶어도 먹으면 안되겠는데 그러면 그게 따져 들어가보면 그것도 양심일 수 있는데, 그래도 하거나 말거나 먹고 싶으니까 먹어버리면 그게 그만큼 죽는 것이 된다 그말입니다. 양심이 죽는게 어떤 것인지. 양심의 소리, 자기 내면에서 마음 속에서 부르짖는 양심의 소리를 들어보면 다 들리는 겁니다.
그걸 꺾으면 양심이 죽는 것이고, 양심을 매장한다는 것은 양심을 아예 써먹지를 않는 겁니다. 양심을 쓰지를 않는 겁니다. 양심 쓰지 않는다 말은 쉽게 말하면 뭐 안한다는 말입니까? 신앙 양심을 쓰지 않는다는 말은 쉽게 말하면 뭘 안한다는 겁니까? 000? 뭘 생각? 말씀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생각을 안한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구별 안하고 따져보지 않고 비판하지 않고 생각을 안하는 겁니다. 그러면 양심은 매장되고 마는 겁니다. 생각하면은 답이 나오는데, 생각하려니까 머리 아프고 복잡하고 힘이 드니까 생각을 안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양심이 서서히 죽어가는 겁니다. 양심을 북돋운다 말은, 양심을 자꾸 써먹는 겁니다. 양심을 찾는 겁니다. 양심을 찾아가지고 양심에게 힘을 실어 주는게 양심을 북돋우는 것이고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자꾸 생각해서 찾아들어가면 양심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 찾은 양심의 인도대로 행하기만 하면 양심이 점점 자라게 되고 그래서 그 장성한 양심은 자기의 몸도 마음도 생활도 전부를 주관하는 그런 마지막까지는 생명까지도 양심이 주관하는 이런 강하고 장성한 양심이 되어야 되고, 이 양심 생활을 끝까지 바로 해서 그 양심이 내 신앙양심이 내 몸과 행동과 마음과 모든 생활과 내 소유와 어렵지만은 자기 목숨까지 내 양심이 신앙양심이 끌고가는 거기까지 나아가게 되면 그 다음에는 거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동행하는 그런 역사가 있으니까 이게 신앙생활에 최고봉이라 그리 말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늘 오후에 하나 더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간단하게 양심은 굉장히 밝은 것이고 중요한 것인데 문제는 이 양심이 지식의 지배를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양심이 우리 양심을 찾아서 이 양심을 주인을 만들지 말고 매장하지 말고 죽이지 말고 매장하지 말고 양심을 북돋우고 길러서 강하고 장성한 양심을 만들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여기까지 나아가야 되는데 문제는 이 양심이 지식의 지배를 받는 양심이 되니까 양심보다 먼저 앞서서 우리들이 구별하고 바로 가져야 될 것이 바로 지식이다 그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하나님 말씀, 말씀은 지식인데 그 말씀을 듣고 선악과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듣고 선악과는 독약이니까 먹으면 죽는거니까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근처에도 가지 않았는데 뱀이 와서 하와에게 뭘 넣어 줬다고요? 뱀이 와서 하와에게 뭐했습니까? 뱀이 와서 하와에게 뭐했습니까? 말을 했잖습니까, 말. 말했는데 무슨 말? 말이 뭡니까? 말이 바로 지식입니다. 하와에게 뭐라 그랬습니까? ‘하나님이 참으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더냐’. 그러니까 피동되서 ‘아니.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더라. 죽을까 하노라 한다 하더라.’ 그러니 뱀이 ‘결코 죽지 않는다. 먹으면 너희들이 눈이 밝아서 하나님처럼 된다.’ 그말을 딱 듣고나서 선악과를 딱 쳐다보니까 선악과가 완전히 다르게 보여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한 열매인지라. 그러고나면 안 먹고 못 견디는 겁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꼭 같은 선악과를 두고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선악과를 볼때는 먹으면 죽는, 절대 먹어서는 안되는 원수입니다, 독약이고, 영원한 사망의 독약입니다. 그런데 마귀의 지식을 받아가지고 그 지식을 가지고 선악과를 보니까 그것만 먹으면 하나님 될것처럼 그렇게 정반대로 보여졌습니다. 원인이 뭐라고요? 무엇에 따라 그렇습니까? 지식에 따라서.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어떤 지식을 가지느냐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겁니다. 그러니까 양심이 중요하고 양심을 찾아서 이걸 가꾸고 길러야 되는데 그보다 앞서 더 중요한 것은 우리는 지식을 바른 지식을 가지는게 중요합니다.
어떤 일을 두고, 어떤 일의 판단이나 처리나 뭘 할 때 두고, 아무리 생각을 하고 생각을 하고 따지고 따지고 구별하고 구별하고 조심을 하고 조심을 하고 그래서 생각을 자꾸 하면 바른 길 갈 수 있습니까? 생각을 자꾸하면 양심을 쓰는 건데 생각을 자꾸하면 옳은 걸 찾을 수 있습니까? 구별하면 옳은 걸 찾을 수 있습니까? 또 비판 평가하면 옳은 걸 찾을 수 있습니까? 양심만 쓰면 되는 겁니까? 생각을 하는데 그 생각에 방향이, 생각의 바탕이, 그 생각의 범위는 워낙 넓으니까 두고라도 그 생각에 주체되는, 생각이란 것은 무엇을 바탕으로 생각이 나옵니까? 생각을 하려면 뭐가 필수적입니까? 생각을 하려면 지식이 있어야 생각을 하지 모르는 생각은 없습니다. 모르는 사람은 생각을 못합니다. 알아야 생각하는데 그 아는 자기의 지식, 주체되는 지식이 어떤 방향으로 생각하느냐가 문제입니다. 기도를 많이 합니다. 종종 예를 들었지요. 어떤 교회 젊어서 장로님 됐는가 모르겠는데, 장로님이라 그러지요. 장로님이 그 교회 안에 마음에 딱 드는 처녀가 있어서, 아마 그런데 얼른 이해 안되는게 장로님인데 결혼 안했는가 모르겠습니다만은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그 사람이 그 마음에 딱 드는 처녀가 있어서 그 처녀하고 결혼해야겠는데 그 처녀하고 결혼하게 해달라고 산에 가서 40일을 금식기도 했다 그러지요. 그러고나서 어떻게 됐다고요? 그만 죽었답니다. 그 금식기도 40일은 그거는 지식이 틀렸기 때문에 그 금식 기도는 틀려먹은 겁니다. 자살 행위입니다. 하는게 아닙니다 그런거는.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 생각이 지식이 잘못된 생각은 하면 할수록 엉뚱한데로 가는 겁니다. 지식이 틀린 구별은 하면 할수록 그 구별은 틀립니다. 틀린 지식 가지고 비판하고 평가하면 할수록 그 비판 평가는 정평정가가 아니고 오판하고 착각하는 그런 것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지식을 바로 가져야 됩니다. 인간 지식과 하나님의 지식이 있지요. 지식은 여러 가지 각도로 있습니다. 지식이란 것은. 그런데 이 지식은 여기 말씀드린 지식은 물리의 지식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인문의 지식, 인문의 지식이라 말은 그 사람의 지식. 인간과 인간의 생활, 인간에 대한, 사람은 무엇이냐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 그 사람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니까 그 지식이 이 세상에 많이 있는데 인간의 생활, 공부를 얼마만큼 해야 되는가? 이거는 물리가 아닙니다. 인문에 관한 지식입니다. 공부를 어느 방향으로 해야 되는가? 인문의 지식입니다.
처녀들이 결혼하면, 제가 오래전에 들은 이야긴데, 한 20년 넘게 전에 들은 이야긴데 25살 안에 결혼을 시키면 부모님들이, 요즘 시대가 변해서 또 모르겠습니다, 어느정도 설명해서 부모님 생각대로 결혼을 하게 할 수가 있고, 25살이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부모님이 그 딸의 결혼을 마음대로 못한다는 말을 이십몇년전에 들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25살전에는 그래도 아직까지 좀 어른들 말을 들을 수 있는 순수함이 남아 있는건데, 25살이 넘어가면 요즘은 더 빨라졌겠지요? 넘어가면 그때는 본 것, 들은 것,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 이런 것들이 전부 그 속에 지식으로 박혀있으니까 그걸 가지고 전부다 계산을 다 대는 겁니다. 또 학교를 덜 다닌 그런 아들 딸들 그런 처녀 총각들은 어른들 말을 좀 잘 듣습니다. 나는 공부를 많이 못했으니까. 잘 모르니까 순종을 잘 합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을 하고 세상에 소위 말하는 먹물을 좀 많이 먹은 그런 아들 딸들은 생각의 범위가 넓고 보고 듣는게 많으니까 그걸 가지고 계산을 대는 겁니다. 그래서 총각들이 결혼하려면 대학은 졸업을 하고 군대는 갔다 오고 그다음 직장은 구해놓고 그래서 어느정도 먹여살릴만큼 만들어놓고 그다음 결혼하는 것이 맞는 것이지, 틀린 말입니까? 맞는 말이지요. 맞는 말입니다. 일반적인 지식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으면 하면 되는데, 그런데 신앙으로 하면 그것도 좋다만은 그게 자연스럽게 그리 되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데 시대가 워낙 험하다 보니까 될 수 있으면 좀 나이 스무살 좀 넘어가고 하면 워낙 이성면으로 혼탁하고 위험이 많은 시대니까 자기를 깨끗하게 지키기 위해서 그래서 무리한 것은, 없는 짝을 찾아 할 순 없는 것이고 어른들이 찾아보고 양쪽을 찾아보고 되겠다 그래 싶으면 한다 그러면 그러면 자기 마음에 안 맞는 것은 안되는 것이고, 결혼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다 이성이 앞서지만은, 결혼이란 것은 앞선다기보다 감정이 안들어갈수가 없는게 결혼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이 안내키는데 억지로 결혼시키면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거는 절대 하면 안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른들이 시키면 순종할 수 있는 것이고, 그래가지고 일찍 결혼하면, ‘그러면 먹고 사는 거는요?’ ‘요즘 먹고 사는데 그냥 안되면 부모님한테 얹혀 살아라’ ‘방은요?’ ‘달셋방 하면 되지 않나?’ ‘꼭 그리 해야 되는 이유가 뭡니까?’ ‘워낙 미혹이 많은 시대니까 마음으로 좀 더 깨끗하게. 너는 괜찮아도 다른 사람을 죄 짓게 하는 그런게 덜하도록.’ 주인이 생기면 함부로 탐을 못 내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것 때문이라도 하는게 좋겠다. 신앙적으로 따지면 반드시 그렇게 하는게 옳다고 말은 못하지만은 그렇게 하는 것이 좀 유익되지 않겠나 이 지식을 가지고 이 지식으로 하면은 어릴때, 세상말로 철이 없는건데 순수할 때 하면 그때는 먹혀드는데 나이가 좀 들고나면 그게 자기 계산되니까 안 먹혀지는 겁니다. 그러고나면 그때부터는 대단히 어려워지게 되는 거지요. 집을 마련해도 교회에서 한 10분정도 차타고 한 10분가면 되는데 싸고 좋은 집이 있습니다. 그 집을 사면 집값도 오르겠습니다. 그 집을 살 수 있습니다. 투자할 수도 있고. 그런데 우리는 신앙중심이니까 교회에서 차를 타고 10분 거리라. 그러면 ‘새벽기도는?’ ‘차 타고 오면 되는데요’ ‘애기들은?’ ‘업고 오면 되는데요’ 못 나올때는? 몸이 아플때는 못 나오겠지요. 그럼 교회 바로 옆에 집을 구하면 그러면 몸이 아파도 다른 사람이 가서 데려올 수도 있을 것이고 예배당 오기는 너무 너무 쉬우니까 신앙으로 계산 대면은 교회에서 10분거리 차타고 집을 구해서 한 3년 후에 1억을 버는데 교회 옆에 집을 사면은 3년 후에 5천만원 손해를 봅니다, 예를 들어서. 그러면 어느걸 할 것인가? 5천만원 손해 보더라도 신앙 유익된 것을 가겠습니다. 그게 아브라함의 길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지식이고. 이런 지식을 가지고 이 지식을 가지고 현실을 생각해보면 양심이, 이런 지식 그 지식이 하나님의 이런 지식이 그 사람의 양심을 지배해서 따져보면 그 양심이 옳은 걸 판단하게 되는 것이고 이 하나님의 지식은 없고 세상 일반지식, 모든 세상의 흐름, 요즘 세상 흐름에 나이가 스무살 스물한살에 결혼한다 하면 손가락질 하고 지금이 조선 시대야? 그렇게 웃겠지요. 세상은 어디까지 타락해서 남자끼리 결혼하는 그게 세상입니다. 여자끼리 펴놓고 결혼하는게 세상입니다. 그것 따라 갈 것인가? 그게 인간 지식입니다. 세상 지식이고. 하나 예를 들어서 결혼이고 이사고 그렇지만은 모든 것이 다 인문에 관한 지식은 다 연결시켜보면 이렇게 다 나옵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신앙주의로 모든 것을 선택을 하고 판단해서 나갈 것인가? 그 지식을 가지고 생각해보면 양심에 답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지식을 꺾어놓고, 그런데 이 지식을 많이 듣고 배운 우리 교인들은 이게 있기 때문에 양심을 쓰면 집을 구하면 어디에, 결혼 하면 어떻게 자녀는 어떻게 하고, 직장은 어떻게 양심에서 답을 줍니다. 그런데 그리하면은 돈을 손해봐야 되고 자기 젊음을 손해봐야 되고 누릴 재미 못 누려야 되고 이런 걸 손해보니까 꺾어서 눌려버리고 ‘요즘 내 주변에는 전부다 그렇게 하는데요. 내 친구들은 다 그런데요. 세상은 다 그런데요.’ ‘그러면 신앙은?’ 그럴때 그 사람은 신앙양심은 꺾어버리고 세상으로 나가는데 그거는 신앙양심이 아닌 겁니다. 신앙양심을 꺾고 매장시키고 죽이는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이 내용이 집회 교재에 나오는데 읽어보셨습니까? 이렇게 결혼 이사까지 세밀하게 안나와도 무엇보다 지식이 중요하다, 양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지식 선택이다. 어느 지식을 자기의 주인되는 지식으로 삼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뭡니까? 지식 선택보다 더 중요한 게 하나 더 있지요. 뭡니까? 어느 영을, 어느 신을 자기 주인으로 삼느냐. 하나님을 자기 주인으로 모시느냐, 세상 마귀를 주인으로 모시느냐 여기 따라 또 달라 지겠지요. 지식까지만 하고, 그래서 양심은 지식의 지배를 받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잘못된 지식 가지고 양심을 써서 양심대로 죽어도 그거는 전혀 엉뚱한 죽음이 될 수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식을 하나님의 지식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의 이 지식 가지고 그다음에 양심도 쓰고 구별도 하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그리 나가야 되는 것이지 이 지식이 틀린 것 가지고 가면은 모든게 전부다 다 틀어진다 이걸 오늘 오후에는 하나 더 기억을 하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양심도 중요합니다. 양심이 없으면 옳은 걸 찾지 못합니다. 양심이 있어야 하나님을 찾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더 중요한 것은 지식을 바로 선택하는게 더 중요합니다. 지식은 논리니까 이 말씀을 가지고 생각해 봐야 됩니다. 과연 이 말이 옳은 것인가. 지식 선택이 먼저라는 것이 옳은 것인가도 또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든지 생각해서 어쨌든 우리 속에는 중생된 영이 있으니까 그 영이 또 우리 양심을 통해서 밝혀주는게 있으니까 찾아보면 결국 답은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20140824 주후
베드로전서 3:21-22
하나님의 목적은 영광의 찬미라고 했습니다. 영광의 찬미. 영광의 찬미라 말은, 여러면으로 몇가지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을 영광의 하나님으로 나타내는 것을 영광의 찬미라 그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광의 하나님으로 나타내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광의 찬미의 이 구원을 위해서 이게 하나님의 목적인데, 이 목적 위해서 하시는 그 역사가 예정 속에 다 들어있고 예정 속에 든 것이 오늘 우리 이 시간까지 섭리로 역사해서 내려오고 있고 앞으로 영원히 계속이 되어질 것인데, 하나님의 예정 속에 든 주권 섭리의 모든 역사는 심히 광대하고 또 복잡 다다하고 세밀한 구원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자시다, 알지 못하심이 없고 능치 못하심이 없는데 이런 하나님이 왜 이렇게 복잡하게 모든 일을 하고 계시는가? 왜 우리들에게 사람을 만드시되 영과 마음과 몸으로 만들어놓고 또 천사를 타락시켜 마귀를 만드시고 마귀로 하여금 인간을 미혹하게 하고 인간을 범죄하여 타락하게 하시고, 또 타락한 인간을 영원한 사망케 하시고 사망 속에서 하나님이 또 사람되셔서 구원하시고, 이런 많은 역사를 하시는 그 이유를 지난 주일 또 지난 주간에 몇 번 공부했는데 몇 가지 이유였습니까? 그 이유가 몇 가지였습니까? 새벽기도때, 밤예배때 했는데 하나님 편에서 두 가지, 사람 편에서 세 가지로 생각해 봤습니다.
하나님편에서는 첫째 하나님이 영광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당신을 모든 존재에게 알리시되 영광의 하나님으로 당신을 알리시기 위해서 모든 과정 과정이 필요했다는 것 하나.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되 더 크게 더 많이 더 깊이 실질적으로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복잡한 과정 과정을 두셨다는 것 하나. 또 우리 사람편에서는 세가지를 생각해봤으니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향해서 나아가되 우리의 자유 의지로 선택해서 나아가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자유의지의 선택으로 그리하도록 하시도록 그리 해두셨고, 그다음 두 번째는 자유 의지로 선택한 구원의 걸음을 자기가 직접 걸어가므로 경험하고 체험해서 몸소 겪어서 실감하고 알도록 그리 하신 것이고, 세 번째는 그 속에서 우리 실력의 실질적인 우리 실력을 만들어가시기 위해서 이런 모든 과정을 두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것들도 성경에 그대로 나오지 않으나 우리가 배운 교리를 바탕으로 해서 생각해보면 그리 생각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되 영과 마음과 몸을 만들어두셨고, 그래서 지난 주일에는 사람의 심신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섭리 역사, 그래서 지금도 영원전부터 알고보면, 영원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모든 주권 섭리 역사의 최종의 그 일선 최종의 종착점은 어디냐? 과녁은 어디냐? 과녁은 장소적으로 말하면 우리들의 현실이겠고,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고 원하시는 최종의 과녁은 우리의 심신의 기능을 살려내는 그것이 영원전 하나님의 작정하신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표적이다, 과녁이다 그말입니다. 맞습니까? 논리적으로? 이거 맞습니까? 생각을 해보셔야 되겠지요.
그래서 저격수들이 총을 쏘면 보통, 잘 쏘는 사람은 6백미터? 6백미터면 여기서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6백미터면 여기서 직선거리로 저기 가구거리보다 훨씬 더 멀지요, 아마? 우리 예배당에서 6백미터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가구거리보다 더 멀겠지요? 그 위에 로타리 될란가. 그 정도 되는 거리에서 총을 쏘면 아주 작은 동전만한 이런것도 맞춘다 그러거든요, 쏘아가지고. 그런데 그렇게 멀리 쏘으면 6백미터 전방에서 겨누고 총을 쏘면 그 과정에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 사람이 총을 쏘는 것은 말하자면은 6백미터 후방에 있는 목표물 그걸 향해서 겨눠서 총을 탕 쏜다 그말이지요. 저격수들이 사람을 쏘은다면 그렇게 할 것이고. 하나님의 모든 예정 창조 주권 섭리 하나님의 그 속에 인간의 천사의 타락과 인간의 범죄 타락과 사망과 도성인신과 사활의 대속 역사와 성령의 모든 역사들 그런 모든 과정의 역사들 거기 들어가는 수많은 존재들의 나고 없어지고 있어지는 그 활동 역사들의 그 방향이 전부 그 배후가 하나님인데 하나님의 그 모든 과정의 중간 역사들의 종착의 표적은 바로 각자 우리 내 현실이고, 내 현실에 나의 마음과 몸을, 심신의 기능을 살려내는 것이 바로 그 최종의 과녁이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의 구원이란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내 심신의 기능을 살리는 것이 구원이고 그 심신의 기능을 하나하나 살려 나가다 보면 나라는 사람이 변화가 되어져 가는 이것이 기독자들의 구원입니다. 이 심신의 기능 요소를 살려내는데 우리 사람의 요소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람의 주격인 영이고, 영을 통해서만 살릴 수 있으니까 영을 그래서 만들어두셨고, 하나님이 영을 만드신 것도 하나님이 당신을 사람들에게 존재에게 나타내셔야 되는데 영이 없으면 하나님을 나타낼 수가 없는고로 영을 만들어 두셨고, 그다음 그 영을 통해서 하나님을 우리 마음과 몸에 나타내시고 그다음 영에게 배운 본 받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내 마음과 몸은 사물에게 나타나고, 그래서 바다의 물이 넘침같이 온 우주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도록 만드는게 하나님의 목적이고 이것이 교회고 기독교의 구원이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이라는 것은 과거에는 몰랐어도 지금은 영을 알아야 되고 벌써 수십년 전부터 영에 대한 교리를 밝혀두신 그때부터는 영을 모르면 지금 시대에 21세기 과학이 인간의 모든 몸 마음까지 완전히 해부하는 이런 시대에 영의 세계를 깨닫지 못하면 기독교는 세상에게 삼켜서 밥이 될 수 밖에 없고, 기독교라는 종교는 하나의 이종교와 같은 그런 하나의 수양이라던지 인간의 힘든 고통스러운 인생살이를 위로하는 그런 하나의 수양 종교, 그 이상 넘어갈 수 없는 거기 머물게 되는 겁니다. 실제는 그러하지 않으나 학자들이 또 믿는 사람들이 진실이 없고 파고들어가지 않으니까 영을 발견하지 못하니까 그리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영을 알고나서, 영의 세계를 알고나면 인간들이 아무리 무엇을 만들어내도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그거는 인간에게 허락을 하신 것이라. 그래서 예를 들면 앞으로 사람의 눈도 만들어낼지 모르고, 사람의 심장도 인공심장 지금 만들지요? 만들어낼지 모르고. 사람의 몸에 있는 어지간한 것은 만들어낼지 모르겠고, 피도 앞으로 만들어낼지도 모릅니다. 만들어내도, 피를 만들어내도 그것도 물질이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범위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 만들어내도 인간이 아무리 과학을 발달해도 영에 대한 것은 그거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가 아니기 때문에 알 수 없고 거기는 손을 댈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과학이 세밀하고 머리가 좋고 어디까지 깊이 종교성 가지고 세밀하게 파고 들어가서 석가모니 할배보다 더 깊이 들어가고 들어가도 얼마든지 명상을 하고 명상을 해도 예수님의 대속이 없는 그 영이 죽어있는 상태로서는 인간 피조물 범위 넘어서는 결코 발견할 수도 없고 그 이상의 종교를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모든 심신 가진 물질의 한계고, 기독자들은 아무리 무지하고 못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도 영이 중생되어 있으면 세상에 가장 탁월한 불신자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알게 되기 때문에 이거는 비교 자체가 될 수 없는 그런 다른 차원의 세계가 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영을 우리가 일반 믿는 사람이 정확하게 몰라도, 그래도 지금은 시대가 그런 시대고 어지간히 밝혀졌기 때문에, 우리 교인들도 예배 시간에 아마 그동안에 설교만 제대로 들었어도 영에 대해서 어지간히 교리를 다 알고 있을건데, 모른다면 안 들었던지 다른 뭐가 있겠지요. 어지간히 많이 말씀 드렸으니까. 그래서 지난 주일에 영을 말씀 드린 것이고. 그다음 영은 영인데, 이제 오늘 말씀드린 것은 영은 영물이고 영인데, 물질인 우리 마음에 속한 영을 통한 하나님의 그 모든 것을 받아 드릴 수 있는 마음의 요소 중에서 가장 밝은 부분인 양심을 공부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구원이란 것은 어쨌든 궁극적으로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모든 일이 해결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복도 받을 수 있고 은혜도 받을 수 있고 성공도 할 수 있고 또 구원도 이ㅓ루어갈 수가 있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을 만나야 거기서 비로소 기독교의 구원은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거는 세상에서도 그러지 않습니까 오전에 말씀드린대로. 어쨌든 무슨 문제가 생기면 가정에서도 밑에 사람이 아무리 그래봐야 가장 어른 그 모든 것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어른이 모든 걸 결정하니까 그 어른을 만나야 해결이 되지 그 어른 만나지 않으면 해결이 안된다 그말이지요. 다 해놔도 위에 어른이 틀어버리면 안되는 거니까.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의 신앙생활 구원이란 것은 모든 초점을 하나님께로 맞춰야 되는 것이고 그분에게 맞출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그 분을 영화롭게, 그 분 섭섭하지 않도록, 그 분 좋아하도록, 그 분이 복을 주실 수 있도록, 그 분이 은혜를 주실 수 있도록, 그 분의 눈치를 보면서 모든 초점을 하나님께 다 맞추고 사는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데 문제는 그 하나님은 완전자라 무형의 완전자라서 어두운 우리들의 눈과 심령으로 볼 수 없는 무형의 완전자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을 찾아도 하나님을 만나기가 대단히 어렵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이 찾아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당신이 우리를 당신에게 나타내시고 알리시기를 원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데 그 알려주시는 순서가 있고 법칙이 있으니까 그 법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나볼 수 있으니, 아무리 사람들이 간절하고 애가 타고 해도 그 하나님께서 당신을 알리시는 그 법칙에 맞지 않으면 하나님은 찾을 수가 없고 만나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고 참아도 못하고 믿어야 된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란 것은 어찌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이신데 동시에 하나님은 복수의 하나님이시면서 굉장히 잔인한 잔인의 하나님이라고도 표현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세우신 법칙을 깨트릴수가 없으니까 그 법을 어겨서 인간의 감정에, 눈물에, 정에 끌려서 허용을 하다보면 법이 깨져버리니까 법이 흔들려버리면 하나님은 법이 하나님보다 위에 있을 순 없는데, 그러나 그 법 자체가 하나님이 세우신 법이기 때문에 완전하신 지공의 하나님께서 당신이 세우신 법을 어길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법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지, 그 법을 어기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울고 불고 울다가 지쳐서 눈물이 바다를 이루고 다 죽어도 하나님은 눈도 깜짝 하지 않는 분이 하나님이라. 안타깝게도 마음은 아프시겠지만은 내가 세운 법이 있으니까 그 법대로 해라. 그 법을 찾아서 법대로 하면 안 울어도 되고 밥을 안 굶어도 되고 그렇게 힘들게 안 해도 된다. 법대로만 하면 된다. 그 법이란 것이 율법인데 그 율법이 우리에게 그렇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 은혜가 있으니까 그 대속의 은혜 바탕 위에서 이 율법이 우리에게 왔기 때문에 그 법대로 하면 하나님을 찾아 만날수가 있는 것이고,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 없이 이 율법을 아무리 해도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이고, 대속의 은혜 위에 있어도 이 율법대로 하지 않으면 또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니까 할 수가 없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아도 하나님께서 말씀해놓으신 그 말씀대로 하나님을 찾아야 되니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당신을 알리시는 그 법이 어떤 법인가? 하나님은 순서로 말하면 영감으로 그다음 진리로 역사하시는데 쉽게 한말로 말하면 진리를 통해서 당신을 우리에게 알리시니까 그 진리는 참된 이치고 그걸 알기 쉽게 말하면 말씀이고 그 말씀은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성경 말씀이고 이 성경 말씀은 참된 이치 진리고 그 진리 속에는 하나님이 내재해 계시고, 그러기 때문에 성경 말씀 진리를 읽고 들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는데 문제는 그러면 누구나 다 성경 말씀만 읽고 들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는가? 어떤 사람은 안된다 했습니까? 성경 말씀을 읽으면, 들으면 이 성경 말씀은 진리 참된 이치고 이 참된 이치 진리 속에는 하나님이 내재해 계시니까 이 말씀을 읽기만 하고 듣기만 하면 누구든지 다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는가? 어떤 사람은 안되는 겁니까? 어떤 사람은요? 영이 죽어있는 사람은 안되는 겁니다. 영이 없는 사람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영이 없는 사람은 없고, 영이 없으면 뭡니까?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고, 영이 없는 사람은 없는데, 영이 죽은 사람들, 영이 있기는 있는데 원죄로 인해서 정죄 받아 죽은 사람들은 죽었으니까 있기는 있지만은 활동이 전혀 없으니까, 그 사람은 영이 죽은 사람은 그 증거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증거고, 안 믿는 사람들이고 안 믿는 사람들이 참고로 교양으로, 그래서 세상에 모든 지식들 모든 책들은 사람이 그 모든 걸 다 만들어냈고 사람이 이용을 하면 이용을 당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보기에는 꼭 같이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검은 것은 글이고 흰 것은 종이고 그렇지만은 이 말씀은 그 안에 말씀 자체가 참된 이치 진리기 때문에 그 진리는 하나님의 독자적인 하나님 말씀이고 독자적인 능력을, 이거 한번 제가 언제 저도 이걸 안지가 얼마 안됐는데, 진리는 독자적인 능력을 가졌다 이게 무슨 말인가를 오래토록 의문 가졌는데 얼마전에 아마 그러겠다고 해결을 했습니다. 설명하라 그러면 설명 하시겠습니까? 진리는 독자적인 권위와 독자적인 능력을 가졌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000 선생님 설명하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지? 말 그대로야 쉽지요. 독자적이라 말은 홀로 독자 그러니까 진리 스스로 독자적인 권위와 능력 가졌다. 000 선생님 설명 하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지. 하나 하나 꼭 꼭 짚어서 진실하게, 그래서 내가 신앙에 1차로 중요한 것은 그 한말씀 한말씀 자체가 이해가 되어야 됩니다. 성경을 읽어 나가다 보면 그냥 쭉 읽어나가는데 써내려가다보면 그 성경 속에 모르는 단어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어려운 단어들. 평소에 그냥 읽어 내려가는데도 그 한마디 한마디가 모르는 단어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 하나 하나를 살펴서 일단 외부적으로 깊은거는 몰라도 국어사전을 통해서도 일단 알아놔야 됩니다. 참고로 알고, 그다음에 깊은 뜻은 또 달리 알아야 되고. 그래서 이 성경 말씀이 하나님 말씀이고, 하나님 말씀은 참된 이치 진리고, 그 진리 속에 하나님이 내재해 계시니까. 그런데 영이 죽어있는 사람들, 영이 중생되지 못하고 죽어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읽어도 들어도 진리를 깨닫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결코 만나볼 수가 없다는 것이고, 영이 살아서 중생된 사람들은 이 성경 읽고 듣고 하면은 깨달을 수 있고 믿음이 생겨지고 하나님을 만나볼 수가 있는 것인데,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원론적으로는 그렇지만은 세밀하게 순서를 따져간다면 중생된 사람이 성경 읽고 듣고 진리 말씀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믿음이 생기는 것이 기본적인 믿음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그 믿음은 이미 중생될 때 생기는 것이고 그 믿음이 겨자씨 믿음처럼 점점 성장해서 자라가는 것,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점점 자라가는 그 면. 그래서 말씀을 읽고 들을때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이 생겨지고 믿음이 깊어지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서 만나게 되는 원론적인 것은 중생된 사람이면 누구나 가능하지만은 실질적으로 따져들어가보면 중생된 사람 중에도 한 단계가 더 필요하니 어떤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오전내 말씀드린 것이 양심을 쓰는 사람, 신앙 양심을 써야 만날 수 있다 그말입니다. 신앙 양심이 없는 사람, 양심이 없는 사람은 없는데 양심을 가지되 양심을 다 그만 매장시키고 죽이고 양심에 주인을 만들어놓은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이거는 안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양심도, 수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도 그 양심을 매장시키고 양심을 죽이고 양심의 주인을 만들어놔서 양심이 자유하지를 못하는 겁니다. 철이 자석만 만나면 딱 들어붙어서 떨어지지도 못하고 가야 되는데 자석에 탁 붙어있으니까 안간다 그말이지요. 자석에 들어붙어버리니까. 양심이 자기 지식의 범위안에서 옳은 것 바른 것 참된 것을 찾아서 들어가야 되는데, 욕심이 딱 붙들고 있으니까 욕심에 딱 양심이 들어붙어버리니까 안 움직인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을 써야 된다.
그러면 양심이란 것은 어떤 것이 양심인가를 생각해보니까 양심은 사람에 있는, 하나님의 사자가 아니고 사람에게 있는 마음의 요소, 인적 요소, 마음 안에 있는 욕심이나 감정이나 소원이나 이런 것처럼 여러 가지 있는 중에 양심도 하나고, 인적 요소고, 그러면 그 양심은 지식의 지배를 받는 것이고 그러면서 그 지식의 범위 안에서 가장 옳은 것 바른 것 참된 것을 찾아가는 것이 양심이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는 지식이 많기 때문에 양심이 많고, 그래서 도덕가들의 양심은 도덕적인 양심입니다. 도덕적인 양심. 여러 가지 그런 양심이 있겠습니다. 그러면 기독자의 양심은 어떤 양심인가? 기독자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받는 양심이기 때문에 그 양심을 이름하여 신앙양심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 우리들은 양심을 찾되 그 양심을 찾아가지고 그 양심을 신앙양심으로 만들어서 길러나가야 되겠다. 그래서 다섯가지 면으로 첫째 양심에 대해서 주인을 만들면 안된다. 자기 양심에. 여기 들어가기 전까지 양심을, 자기 속에 양심을 생각해 봐야 됩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여러 요소 중에서 욕심은 무엇이며 감정은 무엇이며 의지는 무엇이며 소원은 무엇이며 또 기억력은 무엇이며 거기서 뜻은 무엇이며 양심은 뭐냐? 내 속에 있는 어떠할 때 그런 마음이 들던데 그 마음이 바로 양심이구나, 그 마음이 바로 욕심이구나, 그 마음은 감정이구나, 자기 마음을 파고 들어가보면 무엇이 무엇인지 구별해서 알 수가 있다 그말이지요. 양심을 찾아봐야 됩니다. 그래가지고 그 양심을 주인을 만들지 말아서 양심이 자유하는 양심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교회라는 것은, 교회는 자유로워야 됩니다. 교회 자유라 그말은, 교회는 자유다. 교회가 세상 권력에게 물질에게 정치에 문화에 이게 휩쓸려 나가는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교회 이름으로 나서서, 목사 이름으로 나서가지고 정치에 나서는 사람들, 목사 이름을 가지고 세상 운동에 나서는 사람들, 교회 이름을 가지고 나서는 사람들 누가 뭐래도 성경으로 틀린 겁니다. 목사 이름 가지고는 자기 개인 이름으로는 할 수 있지만은 목사라는 이름 걸고 정치하는 것은 성경에 틀렸습니다. 죕니다 그거는. 안되는 겁니다. 교회 이름을 걸고 무슨 단체 운동하는 것도 틀린 겁니다. 교회는 이 세상 어디에도 매이면 안되는 자유로운 교회, 오로지 하나님의 교회로서 하나님만 향하는. 그게 교회 자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이유는, 반대해도 그것도 뭐 어쩔 수 없는 건데, 반대하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그 공산주의의 경제 이론 정책이 틀렸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 아닙니다. 그거는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하고는. 믿는 사람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이유는 딱 하나, 그 사람들은 무신론 주의자들입니다. 신을 인정하지 않고 무신론 주의자들. 따라서 교회 종교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반대하는 것이지 다른 건 없는 겁니다. 교회 자유. 신앙도 자유로워야 됩니다. 하나님 섬기는 신앙은 자유입니다. 기본적으로 교회는 자유, 신앙 자유, 양심도 자유입니다. 자유로운 양심이 되어야 되지 그 양심이 어느것에게든지 붙들려 매여가지고 있으면 양심은 양심으로서는 이미 맛을 잃은 것이고 본분을 잃은 것이기 때문에 아무 쓸모가 없는 양심이 되고 마는 겁니다. 내 양심은 어디 붙들려 있는가를 자기가 찾아봐야 됩니다. 자, 한번 생각해보시겠습니다. 각자 자기 양심은 어디 붙들려 있을 가능성이 가장 많습니까? 자기 양심이 어디에 가장 많이 붙들려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거는 조금 응용을 하는 건데,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으러 광야로 가셔서 제일 처음에 뭐했습니까? 금식기도 40일 금식을 하고 나니까 그다음에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배가 잔뜩 고픕니다. 주리니까 육을 가진 예수님 몸이니까 본능적이라도 먹을게 생각이 나겠지요. 주리니까, 갈급하니까, 배가 고프니까.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40일 굶었지, 배가 심히 고프겠지, 떡을 먹고 싶겠지? ‘너는 하나님의 아들 아니냐? 여기 돌멩이로 떡을 만들 수 있지 않느냐? 이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먹으면 되지 않느냐?’ 그럴때,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인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마귀가 그렇게 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때 말하자면은 돈이 필요하지? 돈이 좋지? 여기 돈이 있다. 그러면 돈을 가지면 되는데 그 돈을 가지는 것이 마귀가 주는 돈,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돈이면 그 돈은 우리가 아무리 돈에 갈급해도 가질 수가 없는 것이고, 직장이 아무리 갈급해도 말씀에 어긋나는 어기는 직장 같으면 우리가 가질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것처럼 양심이 주인이 생길 경우는 자기에게 가장 강한 것이 있습니다. 자기 마음의 요소 중에서, 성품 중에, 마음의 요소 중에서 가장 강한 것. 마음의 요소니까 드러나지 않으나 마음은 몸으로 드러나고 몸은 행동으로 나타나니까 그 사람의 평소 언행과 그 사람의 평소 사리판단과 일처리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에 있는 성품을 짐작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마음의 성품, 악성인데, 가장 강한 그 악성 그것이 자기 양심의 주인일 가능성이 대단히 많고 또 자기 몸의 습성중에서 가장 거기에 자기의 시간과 마음과 모든 것이 많이 기울어져서 자기 스스로 생각해볼때 나의 모든 신앙은 이 면 때문에 손해보는게 가장 많다고 생각되는 그런 요소가 다 있지요? 그것이 바로 자기 양심의 주인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거기만 딱 걸리면 넘어진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이걸 찾아가지고 자기 양심에 주인을 찾아서 이 주인을 어째야 됩니까? 끊어버려야 됩니다. 거기서 벗어나서 해방과 자유를 가져서 양심이 자유하는 양심이 되야 됩니다. 그리고 양심의 원래 모습 그대로, 양심은 첫째 뭐라고요? 인적요소인데, 양심의 활동은 첫째 지식의 지배를 받아서, 두 번째는요? 그 지식의 범위안에서 가장 옳은 것, 참된 것, 바른 것을 찾아가는게 양심의 본질이니까 그렇게 하도록 양심을 자유를 줘야 됩니다. 주인을 만들면 안됩니다. 이걸 성경에는 화인 맞았다 그래놨습니다. 불도장을 탁 찍어서 낙인을 찍어가지고 이거는 내꺼다, 너는 종이다. 옛날에는 종들, 도적들은 이마에다가 도둑질했으면 도적 적자를 이마에다가 불로 콱 찍어서 이 사람은 도적이다. 그러면 평생 그 사람은 도적이라는 그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참 형벌중에도 검나는 형벌이지요. 도적. 낙인을 콱 찍어버리면. 그게 화인인데, 양심이 화인 맞으면 양심이 주인이 생기는 것이고, 주인이 생긴 양심은 자유하지 못하고 그 양심은 쓸모없는 양심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양심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 하면, 양심이 그래서 신앙이란 것은 우리 기독교의 신앙 구원이란 것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것인데 한편으로는 사람을 얻고 사람을 점령하고, 점령이라 말이 나쁜 의미가 아니고 사람을 얻어서 점령하는 것이 우리 구원이고 신앙생활이라 그런 면이 있습니다. 사람을 우리가 얻을 때 그 사람의 눈을, 귀를, 생각을 마음을 얻는 것보다 그 사람의 양심을 얻으면 이게 가장 강한 것인데, 그러니까 사람의 양심이란 것은 그 사람의 전생애를 끌고 가되 강하고 담대하게 끌고 가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서 많은 사람이 사도바울을 두고 예언하기를 지금 성령이 사도바울에게 알려주기를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과 환란이 사도바울을 기다리고 있지만은 나는 심령의 그 양심인데, 심령의 매임을 받아, 심령은 마음이고 영에게 속한 마음인데 그 마음 중에 양심을 말하는 겁니다. 거기 매임을 받아가지고 양심에 끌려서 결박 당하고 죽을 위험에 있는 줄 알지만은 양심에 끌려서 가는 겁니다. 안 가면 어찌 됩니까? 양심이, 사도바울을 자극하는데 안 가면 양심에 가책이 돼서 괴로워서 견디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도둑질을 하면은 그게 죄가 되는 줄 모르는 사람들은 도둑질해도 괴롭지 않습니다. 지식적으로 도둑질을 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도둑질을 예사로 하는 겁니다. 그래도 전혀 가책이 없고, ‘그게 왜 나쁜건데?’ 오히려 큰소리 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둑질은 나쁜거야.’ 남의 것 훔치는 것은 죄가 되는 것이고 나쁜 짓이란 것을 아는 사람이 도적질을 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양심에 가책을 받아서 괴로운 겁니다. 자기가 아는데, 그래서 사상가들이 무서운 것은 많은 사람에게 자기가 가장 최고 이상이라고 알고 있는 그 사상을 사람들에게 책을 써서 강의를 통해서 여러 형태로 사상을 주입을 시켜버리니까 그러면 그 사상을 들어보면 이것이 인간을 최고로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목숨을 바쳐서 그 사상을 지키는 것은 그들 아는 그 공산사상 그 범위안에서 이것이 인간을 정말 위하는 것이고 참된 인간을 사랑하고 아끼는 길이란 것을 그들은 세뇌가 돼서 그대로 박혀서 자기 지식이 그게 한계고 그 지식이 그들의 양심을 점령해가지고 있으니까 그 자기 사상 그것을 위해서 죽으면, 나는 인류 위해서 죽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는 것이니까 이거는 귀한 것이고 영광스러운 것이라. 그렇게 인식이 되어있고 양심으로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다가 죽는 것이 그들은 자유롭고 편하지, 그것을 꺾고 양심을 꺾는 것은 괴로워서 못 견디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어느 정도에 육체적인 그런 고통, 사람이 육체적인 고문 고형을 당하면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서 그것도 또 더 할 수 있겠지만은 사람의 몸은 한계가 있으니까 어느 정도로 고통을 당하고 나면 감각이 무뎌져서 아픈 것도 못 느낄 만큼 그리된다 그러죠, 기절해버리던지. 그런데 양심이란 것은 마음의 것이기 때문에 마음의 고통을 당하게 되면 몸의 고통 당하는 것보다 훨씬 더하게 되고, 마음에도 여러 가지 다른 고통보다도 양심이란 것은 마음중에서도 가장 밝은 것이고 가장 빛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 어긋나는 일은 사람이 견디기가 어려운 겁니다. 그래서 양심에 가책되고 나면 괴로워서 못 견디고 그러다가 죽는 사람도 있고 나중에 자수도 하고 여러 가지 그런 작용들이 생기게 되는 거지요. 그게 양심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래서 사람이 양심이 있고 그 양심을 바로 인도하는 그런게 있으면 그 사람은 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게 먼저니까 첫째 양심을 주인을 만들지 말아야 되겠고, 두 번째는 양심을 죽이지 말아라 되겠다. 양심을 죽인다는 말은, 양심은 몸이 아니고 고깃덩어리가 아니고 신령한 물질에 속한 마음이라서 양심이 죽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죽는다는 말은 그만큼 그 양심의 기능 역할이 없어진다 그런 말이 되겠지요. 그런데 고깃덩어리 육체 이거는 일단 심장이 딱 멎어버리고 나면 다시 살릴 수가 없잖습니까? 끝나는건데, 신령한 물질인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은 양심이 죽으면 일단 죽어도 육체가 살아있는한 그 육체 속에 있는 마음의 요소 양심은 한번 죽어도 시간 지나서 노력하면 죽었던 양심이 살아날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죽은 상태로 계속 지나가게 되면은 나중에는 죽어서 양심이 있는 줄 없는 줄도 모르게 되겠지요. 양심을 죽이는 것은 양심이 하는 소리, 호소, 부르짖는 것, 이 자기 내면의 세계에서 양심은 자기 속에 있지 않습니까? 내 속 내면에서 양심이 부르짖는 그 소리를 사람들이 알면서도 양심에 주인이 생긴것이라든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에 이거는 아니라 이거는 해야 된다 알면서도 그 양심의 소리를 꺾어서 눌러서 묵살해버리고 그냥 안할 일을 하고 안 갈 길을 가고 안 할 생활하는 그런 생활을 하게 되면은 양심이 점점 죽어지는데, 이런 생활 안 해보셨습니까? 저는 이걸 따지고보면 논리적으로 보면 양심을 죽이는 생활 굉장히 많이 한 것 같은데, 아닌가요? 우리 교인들은 전부 성자 성녀들이고 저는 죄인이라서 그런가 모르겠습니다.
양심, 자기 속에서 부르짖는 양심의 소리가 있습니다. 주일을 두고도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 좀 읽어야 되는데. 성경 읽어야 되는데 다른 것이 있으면 바빠서, 다른게 더 좋아서 그러면 ‘성경 읽어야 되는데’ 그 소리는 중생된 영이 양심을 통해서 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묵살해버리는 겁니다. 그냥 고개 흔들어버리고 묵살해버리고 그냥 자기 할 일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양심이 죽는 것이다 그말이지요. 이런 걸 하지 말아야 되겠다. 그런데 이걸 안하기가 참 대단히 어렵습니다. 양심을 죽이지 말아야 되겠고, 먹지 말아야 되는데, 무엇을? 예수 믿는 사람이 먹으면 안되는게 있는데, 이거는 좀 제사 음식이니 술이니 이런 것까지는 안가도 내 몸이 지금 이런 음식은 먹으면 내 몸에 해가 되니까 이 음식은 입맛이 당기고 먹고 싶어도 먹으면 안되겠는데 그러면 그게 따져 들어가보면 그것도 양심일 수 있는데, 그래도 하거나 말거나 먹고 싶으니까 먹어버리면 그게 그만큼 죽는 것이 된다 그말입니다. 양심이 죽는게 어떤 것인지. 양심의 소리, 자기 내면에서 마음 속에서 부르짖는 양심의 소리를 들어보면 다 들리는 겁니다.
그걸 꺾으면 양심이 죽는 것이고, 양심을 매장한다는 것은 양심을 아예 써먹지를 않는 겁니다. 양심을 쓰지를 않는 겁니다. 양심 쓰지 않는다 말은 쉽게 말하면 뭐 안한다는 말입니까? 신앙 양심을 쓰지 않는다는 말은 쉽게 말하면 뭘 안한다는 겁니까? 000? 뭘 생각? 말씀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생각을 안한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구별 안하고 따져보지 않고 비판하지 않고 생각을 안하는 겁니다. 그러면 양심은 매장되고 마는 겁니다. 생각하면은 답이 나오는데, 생각하려니까 머리 아프고 복잡하고 힘이 드니까 생각을 안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양심이 서서히 죽어가는 겁니다. 양심을 북돋운다 말은, 양심을 자꾸 써먹는 겁니다. 양심을 찾는 겁니다. 양심을 찾아가지고 양심에게 힘을 실어 주는게 양심을 북돋우는 것이고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자꾸 생각해서 찾아들어가면 양심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 찾은 양심의 인도대로 행하기만 하면 양심이 점점 자라게 되고 그래서 그 장성한 양심은 자기의 몸도 마음도 생활도 전부를 주관하는 그런 마지막까지는 생명까지도 양심이 주관하는 이런 강하고 장성한 양심이 되어야 되고, 이 양심 생활을 끝까지 바로 해서 그 양심이 내 신앙양심이 내 몸과 행동과 마음과 모든 생활과 내 소유와 어렵지만은 자기 목숨까지 내 양심이 신앙양심이 끌고가는 거기까지 나아가게 되면 그 다음에는 거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동행하는 그런 역사가 있으니까 이게 신앙생활에 최고봉이라 그리 말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늘 오후에 하나 더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간단하게 양심은 굉장히 밝은 것이고 중요한 것인데 문제는 이 양심이 지식의 지배를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양심이 우리 양심을 찾아서 이 양심을 주인을 만들지 말고 매장하지 말고 죽이지 말고 매장하지 말고 양심을 북돋우고 길러서 강하고 장성한 양심을 만들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여기까지 나아가야 되는데 문제는 이 양심이 지식의 지배를 받는 양심이 되니까 양심보다 먼저 앞서서 우리들이 구별하고 바로 가져야 될 것이 바로 지식이다 그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하나님 말씀, 말씀은 지식인데 그 말씀을 듣고 선악과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듣고 선악과는 독약이니까 먹으면 죽는거니까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근처에도 가지 않았는데 뱀이 와서 하와에게 뭘 넣어 줬다고요? 뱀이 와서 하와에게 뭐했습니까? 뱀이 와서 하와에게 뭐했습니까? 말을 했잖습니까, 말. 말했는데 무슨 말? 말이 뭡니까? 말이 바로 지식입니다. 하와에게 뭐라 그랬습니까? ‘하나님이 참으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더냐’. 그러니까 피동되서 ‘아니.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더라. 죽을까 하노라 한다 하더라.’ 그러니 뱀이 ‘결코 죽지 않는다. 먹으면 너희들이 눈이 밝아서 하나님처럼 된다.’ 그말을 딱 듣고나서 선악과를 딱 쳐다보니까 선악과가 완전히 다르게 보여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한 열매인지라. 그러고나면 안 먹고 못 견디는 겁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꼭 같은 선악과를 두고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선악과를 볼때는 먹으면 죽는, 절대 먹어서는 안되는 원수입니다, 독약이고, 영원한 사망의 독약입니다. 그런데 마귀의 지식을 받아가지고 그 지식을 가지고 선악과를 보니까 그것만 먹으면 하나님 될것처럼 그렇게 정반대로 보여졌습니다. 원인이 뭐라고요? 무엇에 따라 그렇습니까? 지식에 따라서.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어떤 지식을 가지느냐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겁니다. 그러니까 양심이 중요하고 양심을 찾아서 이걸 가꾸고 길러야 되는데 그보다 앞서 더 중요한 것은 우리는 지식을 바른 지식을 가지는게 중요합니다.
어떤 일을 두고, 어떤 일의 판단이나 처리나 뭘 할 때 두고, 아무리 생각을 하고 생각을 하고 따지고 따지고 구별하고 구별하고 조심을 하고 조심을 하고 그래서 생각을 자꾸 하면 바른 길 갈 수 있습니까? 생각을 자꾸하면 양심을 쓰는 건데 생각을 자꾸하면 옳은 걸 찾을 수 있습니까? 구별하면 옳은 걸 찾을 수 있습니까? 또 비판 평가하면 옳은 걸 찾을 수 있습니까? 양심만 쓰면 되는 겁니까? 생각을 하는데 그 생각에 방향이, 생각의 바탕이, 그 생각의 범위는 워낙 넓으니까 두고라도 그 생각에 주체되는, 생각이란 것은 무엇을 바탕으로 생각이 나옵니까? 생각을 하려면 뭐가 필수적입니까? 생각을 하려면 지식이 있어야 생각을 하지 모르는 생각은 없습니다. 모르는 사람은 생각을 못합니다. 알아야 생각하는데 그 아는 자기의 지식, 주체되는 지식이 어떤 방향으로 생각하느냐가 문제입니다. 기도를 많이 합니다. 종종 예를 들었지요. 어떤 교회 젊어서 장로님 됐는가 모르겠는데, 장로님이라 그러지요. 장로님이 그 교회 안에 마음에 딱 드는 처녀가 있어서, 아마 그런데 얼른 이해 안되는게 장로님인데 결혼 안했는가 모르겠습니다만은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그 사람이 그 마음에 딱 드는 처녀가 있어서 그 처녀하고 결혼해야겠는데 그 처녀하고 결혼하게 해달라고 산에 가서 40일을 금식기도 했다 그러지요. 그러고나서 어떻게 됐다고요? 그만 죽었답니다. 그 금식기도 40일은 그거는 지식이 틀렸기 때문에 그 금식 기도는 틀려먹은 겁니다. 자살 행위입니다. 하는게 아닙니다 그런거는.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 생각이 지식이 잘못된 생각은 하면 할수록 엉뚱한데로 가는 겁니다. 지식이 틀린 구별은 하면 할수록 그 구별은 틀립니다. 틀린 지식 가지고 비판하고 평가하면 할수록 그 비판 평가는 정평정가가 아니고 오판하고 착각하는 그런 것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지식을 바로 가져야 됩니다. 인간 지식과 하나님의 지식이 있지요. 지식은 여러 가지 각도로 있습니다. 지식이란 것은. 그런데 이 지식은 여기 말씀드린 지식은 물리의 지식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인문의 지식, 인문의 지식이라 말은 그 사람의 지식. 인간과 인간의 생활, 인간에 대한, 사람은 무엇이냐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 그 사람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니까 그 지식이 이 세상에 많이 있는데 인간의 생활, 공부를 얼마만큼 해야 되는가? 이거는 물리가 아닙니다. 인문에 관한 지식입니다. 공부를 어느 방향으로 해야 되는가? 인문의 지식입니다.
처녀들이 결혼하면, 제가 오래전에 들은 이야긴데, 한 20년 넘게 전에 들은 이야긴데 25살 안에 결혼을 시키면 부모님들이, 요즘 시대가 변해서 또 모르겠습니다, 어느정도 설명해서 부모님 생각대로 결혼을 하게 할 수가 있고, 25살이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부모님이 그 딸의 결혼을 마음대로 못한다는 말을 이십몇년전에 들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25살전에는 그래도 아직까지 좀 어른들 말을 들을 수 있는 순수함이 남아 있는건데, 25살이 넘어가면 요즘은 더 빨라졌겠지요? 넘어가면 그때는 본 것, 들은 것,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 이런 것들이 전부 그 속에 지식으로 박혀있으니까 그걸 가지고 전부다 계산을 다 대는 겁니다. 또 학교를 덜 다닌 그런 아들 딸들 그런 처녀 총각들은 어른들 말을 좀 잘 듣습니다. 나는 공부를 많이 못했으니까. 잘 모르니까 순종을 잘 합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을 하고 세상에 소위 말하는 먹물을 좀 많이 먹은 그런 아들 딸들은 생각의 범위가 넓고 보고 듣는게 많으니까 그걸 가지고 계산을 대는 겁니다. 그래서 총각들이 결혼하려면 대학은 졸업을 하고 군대는 갔다 오고 그다음 직장은 구해놓고 그래서 어느정도 먹여살릴만큼 만들어놓고 그다음 결혼하는 것이 맞는 것이지, 틀린 말입니까? 맞는 말이지요. 맞는 말입니다. 일반적인 지식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으면 하면 되는데, 그런데 신앙으로 하면 그것도 좋다만은 그게 자연스럽게 그리 되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데 시대가 워낙 험하다 보니까 될 수 있으면 좀 나이 스무살 좀 넘어가고 하면 워낙 이성면으로 혼탁하고 위험이 많은 시대니까 자기를 깨끗하게 지키기 위해서 그래서 무리한 것은, 없는 짝을 찾아 할 순 없는 것이고 어른들이 찾아보고 양쪽을 찾아보고 되겠다 그래 싶으면 한다 그러면 그러면 자기 마음에 안 맞는 것은 안되는 것이고, 결혼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다 이성이 앞서지만은, 결혼이란 것은 앞선다기보다 감정이 안들어갈수가 없는게 결혼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이 안내키는데 억지로 결혼시키면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거는 절대 하면 안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른들이 시키면 순종할 수 있는 것이고, 그래가지고 일찍 결혼하면, ‘그러면 먹고 사는 거는요?’ ‘요즘 먹고 사는데 그냥 안되면 부모님한테 얹혀 살아라’ ‘방은요?’ ‘달셋방 하면 되지 않나?’ ‘꼭 그리 해야 되는 이유가 뭡니까?’ ‘워낙 미혹이 많은 시대니까 마음으로 좀 더 깨끗하게. 너는 괜찮아도 다른 사람을 죄 짓게 하는 그런게 덜하도록.’ 주인이 생기면 함부로 탐을 못 내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것 때문이라도 하는게 좋겠다. 신앙적으로 따지면 반드시 그렇게 하는게 옳다고 말은 못하지만은 그렇게 하는 것이 좀 유익되지 않겠나 이 지식을 가지고 이 지식으로 하면은 어릴때, 세상말로 철이 없는건데 순수할 때 하면 그때는 먹혀드는데 나이가 좀 들고나면 그게 자기 계산되니까 안 먹혀지는 겁니다. 그러고나면 그때부터는 대단히 어려워지게 되는 거지요. 집을 마련해도 교회에서 한 10분정도 차타고 한 10분가면 되는데 싸고 좋은 집이 있습니다. 그 집을 사면 집값도 오르겠습니다. 그 집을 살 수 있습니다. 투자할 수도 있고. 그런데 우리는 신앙중심이니까 교회에서 차를 타고 10분 거리라. 그러면 ‘새벽기도는?’ ‘차 타고 오면 되는데요’ ‘애기들은?’ ‘업고 오면 되는데요’ 못 나올때는? 몸이 아플때는 못 나오겠지요. 그럼 교회 바로 옆에 집을 구하면 그러면 몸이 아파도 다른 사람이 가서 데려올 수도 있을 것이고 예배당 오기는 너무 너무 쉬우니까 신앙으로 계산 대면은 교회에서 10분거리 차타고 집을 구해서 한 3년 후에 1억을 버는데 교회 옆에 집을 사면은 3년 후에 5천만원 손해를 봅니다, 예를 들어서. 그러면 어느걸 할 것인가? 5천만원 손해 보더라도 신앙 유익된 것을 가겠습니다. 그게 아브라함의 길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지식이고. 이런 지식을 가지고 이 지식을 가지고 현실을 생각해보면 양심이, 이런 지식 그 지식이 하나님의 이런 지식이 그 사람의 양심을 지배해서 따져보면 그 양심이 옳은 걸 판단하게 되는 것이고 이 하나님의 지식은 없고 세상 일반지식, 모든 세상의 흐름, 요즘 세상 흐름에 나이가 스무살 스물한살에 결혼한다 하면 손가락질 하고 지금이 조선 시대야? 그렇게 웃겠지요. 세상은 어디까지 타락해서 남자끼리 결혼하는 그게 세상입니다. 여자끼리 펴놓고 결혼하는게 세상입니다. 그것 따라 갈 것인가? 그게 인간 지식입니다. 세상 지식이고. 하나 예를 들어서 결혼이고 이사고 그렇지만은 모든 것이 다 인문에 관한 지식은 다 연결시켜보면 이렇게 다 나옵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신앙주의로 모든 것을 선택을 하고 판단해서 나갈 것인가? 그 지식을 가지고 생각해보면 양심에 답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지식을 꺾어놓고, 그런데 이 지식을 많이 듣고 배운 우리 교인들은 이게 있기 때문에 양심을 쓰면 집을 구하면 어디에, 결혼 하면 어떻게 자녀는 어떻게 하고, 직장은 어떻게 양심에서 답을 줍니다. 그런데 그리하면은 돈을 손해봐야 되고 자기 젊음을 손해봐야 되고 누릴 재미 못 누려야 되고 이런 걸 손해보니까 꺾어서 눌려버리고 ‘요즘 내 주변에는 전부다 그렇게 하는데요. 내 친구들은 다 그런데요. 세상은 다 그런데요.’ ‘그러면 신앙은?’ 그럴때 그 사람은 신앙양심은 꺾어버리고 세상으로 나가는데 그거는 신앙양심이 아닌 겁니다. 신앙양심을 꺾고 매장시키고 죽이는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이 내용이 집회 교재에 나오는데 읽어보셨습니까? 이렇게 결혼 이사까지 세밀하게 안나와도 무엇보다 지식이 중요하다, 양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지식 선택이다. 어느 지식을 자기의 주인되는 지식으로 삼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뭡니까? 지식 선택보다 더 중요한 게 하나 더 있지요. 뭡니까? 어느 영을, 어느 신을 자기 주인으로 삼느냐. 하나님을 자기 주인으로 모시느냐, 세상 마귀를 주인으로 모시느냐 여기 따라 또 달라 지겠지요. 지식까지만 하고, 그래서 양심은 지식의 지배를 받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잘못된 지식 가지고 양심을 써서 양심대로 죽어도 그거는 전혀 엉뚱한 죽음이 될 수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식을 하나님의 지식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의 이 지식 가지고 그다음에 양심도 쓰고 구별도 하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그리 나가야 되는 것이지 이 지식이 틀린 것 가지고 가면은 모든게 전부다 다 틀어진다 이걸 오늘 오후에는 하나 더 기억을 하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양심도 중요합니다. 양심이 없으면 옳은 걸 찾지 못합니다. 양심이 있어야 하나님을 찾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더 중요한 것은 지식을 바로 선택하는게 더 중요합니다. 지식은 논리니까 이 말씀을 가지고 생각해 봐야 됩니다. 과연 이 말이 옳은 것인가. 지식 선택이 먼저라는 것이 옳은 것인가도 또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든지 생각해서 어쨌든 우리 속에는 중생된 영이 있으니까 그 영이 또 우리 양심을 통해서 밝혀주는게 있으니까 찾아보면 결국 답은 나오게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