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6-주후(단6:19-24)
다니엘의 신앙 성공의 과정2014-07-07조회 338추천 28
본문: 단6:19-24
제목: 다니엘의 신앙 성공의 과정
요점:
=원문설교 =
20140706 주후
다니엘 6:19-24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기도하는 것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생활을 중단하지 아니하고 신앙 양심을 꺽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작정한 그 기도를 불의의 그 세력에게 꺽이지 아니하고 계속한 연고로 사자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기도를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나와있지 않으나 다니엘이 기도를 시작하게 된 것은 아마 오래 되지 않았나 그리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과거에도 계속했던 그 기도가 왜 이때쯤 문제가 되어졌던가? 그것은 다니엘의 그 정적들의 시기 때문이었고, 다니엘을 끄어내려야 자기들이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다니엘을 제거하기 위한 그들의 모략이였습니다. 왕은 그들의 모략인 것을 다니엘을 처치하고 난 다음에 사자굴에 들어가게 되었을 그때사 비로소 알았고, 다니엘은 미리 알았을 것이고, 그러나 그것을 모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상황도 아니었고 그리 됐습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 던져졌지만은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하심을 받아서 사자굴 속에서 건져져서 나왔습니다. 아무런 문제없이 무사히 나왔습니다. 그러고나서 왕이 명을 내려서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해서 그들을 처자들과 함께 사자굴에 던져넣었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 전에 사자가 움켜서 뼈까지 다 부숴뜨렸더라. 그러면 이들이 다니엘을 참소할 때는 자신들이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되어질 줄을 몰랐고 자기들이 다니엘을 제거하기 위해서 모략을 꾸몄을때 결과적으로 자기들이 비참하게 제거함을 당하게 되어졌습니다. 이리 되어지는데 다니엘은 그 정적들에 대해서 단 하나도 그들을 해롭게 하는 말이라든지 마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안봐도 다니엘은 이들을 불쌍히 여겼을 것이고 그들을 사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했지 그들을 스스로 그 꾀에 빠져서 망하게 해달라는 그런 기도를 다니엘이 안했습니다.
시편에 보면 다윗이라든지 이런 성도들의 기도에 보면은 악한 자들로 스스로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멸망 받게 하시고 그 자손들 어떻게 되게 하시고 그런 기도의 내용이 마치 원수들을 향해서 그들을 저주하는듯한 그런 기도들이 종종 나오는데, 그것은 그 사람들을 향해서 하는 기도라 그리 보기 어렵습니다. 그 사람들을 붙들고 있는 악령에 대한 기도고 그 죄에 대한 그런 기도지 그 사람들이 그리 되라고 하는 그런 기도라고 성경 전체를 두고 볼 때 또 하나님의 성품을 볼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의 그 성품 볼때 비록 나를 해치려는 원수일지라도 그 원수가 망하게 해달라는 그런 기도를 믿는 사람은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다니엘이 그 정적들을 향해서 그들이 이렇게 비참하게 되게 해달라는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없고 그런 기도를 하지 않았지만은 다니엘은 그들에 대해서 의롭게만 하고 선하게만 하고 사랑만 베풀었지만은 하나님이 보실 때 그들을 그냥 둘 수 없기 때문에 처치를 하신 겁니다. 이것이 성도가 세상에서 자기 모든 방해 세력을 제거하는 그런 방법이라면 말이 좀 이상한데 이런 형식이라 그리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은 어떤 경우도 사람에 대해서 사람을 저주하거나 사람을 미워하거나 그 사람이 안되고 망하기를 바라고 하는 그런 것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이고 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할 일 하는데 하나님이 보시고 필요하면 그들을 제거하신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말하자면은 의인을 핍박하는데 의인을 핍박하는 그 일에 이용되는 그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들이라 그리 볼 수 있고 이런 사람들은 어디든지 다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있습니다. 모르드개를 그렇게 핍박하던 하만이 결국 자기가 세운 그 나무에 자기가 매달려 죽고 말았고, 거기에 에스더가 모르드개를 나무에 달라 그리 왕에게 요청을 했는데 그거는 좀 또 다른 각도로 생각을 해봐야 될 것 같고, 모르드개는 그리하지 않지 않았을까 좀 더 생각을 해봐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민족 전체의 문제하고 다 연관된 그런게 있고 그래서, 어쨌든 이 다니엘을 사자굴에 집어넣게 괴략을 꾸민 이 사람들은 다니엘의 그 신앙에 이용된 사람들이고 사람들로써는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그런 사람들이며, 이런 사람은 지금 시대에도 우리 주변에 찾아보면 있습니다. 우리가 정도는 다르고 보는 각도는 달라 그러하지 이런 사람들은 어디든지 다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사람도 우리가 보는 그런 눈을 가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에 대해서 안되기를 바란다든지 그 사람이 망하기를 바란다든지 그런 마음은 가질 수 없고 그런 기도는 절대 할 수가 없는 것이 성도된 우리들의 입장이라 하나 좀 기억을 하십시다. 가장 불쌍한 그런 사람들입니다.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간 그런 입장에 있는 아주 불행한 민족의, 이때로 말하면, 불행한 시대, 불행한 그런 민족의 시대에 난 그런 사람들이었고 또 포로로 끌려갔으니까 참 불행한 입장에 처해진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다니엘이 특수학교에, 드러나기는 특수학교에 들어가는 그때부터 시작해서 이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다윗이 목동 초군으로 그냥 들에서 양떼들을 먹이는 거기 쳐박혀있다가 다윗이 드러나게 된 것은 골리앗이 나왔을 그때, 골리앗이 나왔을 그때에 비로소 다윗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이름이 나오기 시작했고 유명해지고 나타나게 되는데 다니엘이 말하자면은 외부로 드러나게 된 것이 특수학교에 입학하는 그때부터라 그리 성경 기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니엘이 특수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은 외부적인 조건으로 말하면 왕족이기 때문에, 귀족이거나 왕족이기 때문에 그리 된건데 왕족과 귀족은 수가 많을건데 그중에서 다니엘이 뽑혔고 그 뽑힌 것이 다른 사람들은 일반적인 그런 조건에 의해서 뽑혔다고 볼 수 있으나 다니엘이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일반적인 왕족이기 때문에 뽑혔다기보다 그들의 신앙 때문에 하나님께서 뽑으신 것이라 그리 보는 것이 성경적으로 맞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특수학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하나님 앞에 그 신앙이 바로 되고 있었고, 요셉이 종으로 팔려가게 된 원인이 꿈을 꾼 그 사실을 형들에게 말했기 때문이고 요셉이 꿈을 영몽을 꾸게 된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계시인데, 그 계시의 꿈을 보게 된 것은 요셉이 평소 신앙생활을 바로 잘 했기 때문에 그리 되어진 겁니다. 요셉이 신앙생활을 바로 하지 않았다면, 심령이 어두우면 그런 꿈을 꿀 수가 없고 하나님의 계시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요셉은 어려서부터 밝은 그런 심령으로 신앙생활을 했고, 그래서 때가 되니까 그런 꿈으로 계시해주셨고 그 꿈으로 인해서 형들에게 안그래도 편애하는 아버지 때문에 미움받고 있는데 형들의 핍박과 시기가 더해졌고, 그래서 애굽으로 팔려가게 되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다 기록되있지 않아도 다니엘은 특수학원에 뽑혀 들어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 역사고 다니엘의 신앙이 바탕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지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특수학원에 들어가서 가자마자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내려줄 때 다니엘은 그 음식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을 것이다고 뜻을 정하고 그 뜻을 기어코 관철 시켰는데 그 뜻을 관철시킬때 다니엘의 의지가 아무리 확고부동해도 그 의지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채식을 먹으면, 채식 먹는 그 다니엘과 그 동무하고 왕의 진미와 포도주 먹는 다른 동무들과 얼굴 비교해볼때 다니엘과 그 동무들의 얼굴이 훨씬 더 윤택하고 그리 되어진 건 하나님의 역사지 이게 음식으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신앙생활할 때 우리 할 일은 우리가 하면, 우리 할 일 하면은 하나님께서 필요하심 따라서 당신의 하실 일을 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일을 하시면 이런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들에 대해서 일을 하시게 만드는 것이 뭐냐? 그게 믿음이고 우리의 의고 충성이다 그리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의가 없는, 충성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나타나지를 아니합니다. 같이 해보실까요? ‘믿음이 없고, 의가 없고, 충성이 없으면 기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리될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3년을 그리 살았고, 3년을 공부하고 난 다음에 졸업을 할때 왕이 그들을 면접을 보니까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더 훨씬 뛰어났고 그중에 다니엘은 일반사람보다 열배나 뛰어난 지능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열배나 뛰어난 그 지능이란 것도 이거는 사람의 지능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거는. 이거는 사람이 아무리 탁월해도 그리 될 수가 없는건데 하나님의 지능이 그와 함께 하니까 열배나 뛰어난 그런 다니엘이 되게 되었다 그리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탁월한 그런 지능이 있으니까 그 지능을 바탕삼아서 계속해서 충성을 하고 신앙생활하고 맡은 그 일에 충성을 하니까 자꾸 올라가고 올라가서 나중에는 아주 높은 고위직까지 올라가게 되어졌습니다. 그리고 꿈 해몽도 하고 이런게 있으니까 사람들이 다 보니까 다르니까 일을 자꾸 맡기고 일을 하려 그러면 높아야 되니까 권세가 있어야 되니까 권세를 자꾸 주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올라가게 된 것이고, 또 사자굴에 들어갈때도 사자굴에 들어간 것은 기도를 계속하는 것은 다니엘이 하는 일입니다. 이게 믿음이고 의고 충성입니다. 다니엘은 기도를 계속할 뿐이고 그러니까 믿음을 지켰고 의를 행했고 충성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외부 사람들을 동원해서 다니엘을 사자굴에 집어넣었고 원해서 들어가지 않았고 스스로 들어가지 않았고 들어가려 하지 않았는데 믿음을 지켰고 의를 행했고 충성했을 뿐인데 결과는 사자굴에 들어갔고, 그런데 사자굴에 들어갔지만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사자입을 막아버리니까 사자가 그를 해하지 못했고 고스란히 나왔습니다. 그러면 다니엘이 한 것은 사자굴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고 사자입을 막지 않았고 사자굴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이 한 것은 자기 현실에서 믿음만 지켰고 하나님의 뜻만 행했고 충성만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역사들이 하나님의 섭리로 다 굴러가서 결과적으로 다니엘은 큰 영광스러운 이런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낸 이런 것이 되어졌다 그말이고, 다니엘의 심령이 밝으니까 꿈 해몽도 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계시를 보여주셨고, 또 다니엘서도 예언서도 기록을 하고 이런 큰 말하자면은 일이 있었는데,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다니엘의 그 신앙과 성공을 생각해봤는데 성공이란 것은 결과고 열매라 그말입니다. 열매라는 것은 사람들이 열매를 말하자면 맺게 하는 건데, 열매는 필연적으로 맺어지는게 열매입니다. 결과라는 것은 과정에 따라서 시작과 과정의 어떠함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맺어지는 그게 결과입니다. 부엌에 아궁이에다가 불을 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아궁이에 불을 떼면 굴뚝에는 연기가 나는 겁니다. 그런데 연기가 나는데,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데 “우리 집에 불 안 뗐어. 음식 안했어. 밥 안했어” 그러면 암만 잡아떼도 “아니 뗀 굴뚝에 어찌 연기가 나느냐. 연기가 나는 것 보니까 불을 뗐지. 많이 뗐든 적게 뗐든, 종이를 태웠든 뭘 했든 어쨌든 아궁이에 불을 지폈으니까 굴뚝에 연기가 나겠지. 불을 안 뗐는데 연기가 나는 수가 있느냐”, 필연적입니다. 콩을 심으면 그 밭에는 콩이 나지, 콩을 심어놓고 팥을 수확할 수는 없는 것이고, 안 심어놓고 거둘 수는 없는 겁니다. 또 심기만 심어놓고 가꾸지 않았으면 나도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자라다가 노랗게 죽고 말지 결과는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열매는 저절로 맺어지는 거니까 농사만 부지런히 지면, 파종하고 거름 주고 또 제충해주고 제충해주고 필요한 것 비료주고 필요한 것만 다 해놓으면 거기 따라서 곡식이면 곡식, 과일이면 과일, 열매는 저절로 맺어지는 것이다 그말입니다.
신앙의 성공도 역시 그러합니다. 세상 성공도 그러하고. 그러니까 열심히 공부를 하면 시험 성적은 올라가게 되어있습니다. 그게 방향이 잘못해서 시간 허비하는데 잘못하면 못하겠지만은 바로 해가지고 공부를 시간 들이고 마음 들이고 노력해서 하면은 성적은 올라가는 것은 필연입니다. 부지런히 땀흘려 일하고 근면성실하게 일을 하면 통장에 돈은 차곡차곡 모여지게 되어있습니다. 그게 일반적이다 그말입니다. 보편적으로. 신앙의 성공도 그렇습니다. 다니엘의 성공은 다니엘이 성공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특수학교에서 왕의 진미와 포도주 먹는 소년들보다 나은 얼굴 하려고 노력을 했겠지만은 그리 된다고 믿기는 믿었으나 사람 힘으로 되는게 아닙니다. 자기는 자기 노력 했고, 그 노력의 결과에 따라 필요에 따라 열매는 하나님이 맺게 하신 겁니다. 10배 지능도 그리 된 것이고 꿈 해몽도 그리 된 것이고 모든 계시도 그렇고 사자굴 승리도 그렇고. 그래서 성공은 열매고 열매는 결과니까 결과는 필연이다. 같이 한번 해보실까요? ‘성공은 필연’. 열매입니다, 열매. 결과. 그러면 필연적인 그 성공, 필연이라는 그 성공의 열매가 맺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냐? 과정이 중요하다 그말이지요. 과정이 잘못되면 결과는 잘못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과정이 바로 되면 결과는 바로 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다니엘의 신앙에서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다니엘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성공했는데, 그 성공의 과정이 어떠했느냐 이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나 중요한 것은 그 성공을 맺기까지 걸어간 그 과정에 다니엘에게 당면된 그 환경, 다니엘의 그 입장 조건 이걸 따져볼때 믿는 사람은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세상 조건은 다만 참고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조건을 주셨구나 하고 참고사항일 뿐이지, 그것이 자기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는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이거 하나도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이걸 가지면 믿는 사람이 어떤 경우도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어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낙망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겁니다. 세상 조건이 아무리 열악해도 상관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다니엘은 성공을 했는가? 그게 이제 오전에 크게 공과에도 나와있고 3가지라 그랬지요. 3가지를 좀 생각해봐야 되는데 이거는 아주 기본적인 그런 생활입니다. 기본적인 그런 조건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살아있다는 말은 현실을 맞이하고 있다는 말이고 그 사람이 예배당에 있던지 병원에 있던지 또 주일 못 지켜 딴데 있던지 군에 있던지 어쨌든 현실이란 것은 그 사람, 나 자신의 뭐가 있는 곳이라고요? 현실은 자기의 몸이 있는 곳이 현실입니다. 마음이 있는 곳은 현실이 아닙니다. 내 마음 있는 곳이 아니고 내 고깃덩어리 몸이 가있는 거기가 현실입니다. 맞습니까, 논리적으로? 내 몸이 있는 그 자리가 현실입니다. 바로 그 환경이 현실입니다. 내 고깃덩어리 몸, 물론 마음과 몸은 또 같이 있으니까. 그런데 내 몸이 여기 있어도 마음은 미국 가 있을 수 있는데 미국은 내 현실이 아닙니다. 내 몸이 있는 거기가 내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 환경이 내 현실이고, 또 그 시간이 내 현실입니다.
사람이란 것은 몸이 있으면 그 몸이 살아있으면 현실에 있는 것이고, 현실을 떠난 사람은 죽은 겁니다. 죽기 전에는 현실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현실에서 사는 사람들의 일반 생활은 어떠한가? 또 사람들의 성정은 어떠한가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한번씩 신문이라든지 방송에 나오는 잘난 사람들의 그 생활을 보고 언뜻 언뜻, 물론 그들은 맡은 일이 있고 크니까 외부적으로 큰 일 합니다. 국가적인 또 국제적인 그런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이면에 들어가서 그들도 속에 들어가보면 그들의 성정도 우리와 다를바없는 꼭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고, 그들의 감정도, 그들의 모든 감정의 그 요소도, 작용도 우리들하고 별로 다를바가 없고, 그들의 생활모습도 우리와 별 다를바가 없습니다. 그들도 먹고 또 화장실도 가야되고 양치도 해야되고, 여반들이 아주 10대 소녀들, 처녀들 자기들 막 몸 화장하고 꾸미고 할때 보면은 이슬만 먹고 사는 것 같지요 모두. 이슬만 먹고 사는 그런 공주병이 들어서. ‘너는 이슬만 먹고 사니? 너는 양치도 안하니? 너는 화장실도 안가니?’ 속에 들어가보면 그 속도 다른 사람 속과 꼭 같습니다. 다를 바가 없다 그말이지요. 껍데기를 그래 꾸며놓으니까 그리 되는 것 같지, 대통령은 안 먹어도 삽니까? 또 어떤 위대한 인물 그런 사람들은 안자도 삽니까?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 다 그리 사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도 말하고 듣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거기따라서 그 사람이 가진 성정, 지정리에 따라서 좋은 말 들으면 그 사람도 기분 좋고 기분 나쁜 말 들으면 속에 기분 나쁘고 감정 나고 화 나면 화내고 좋으면 웃고 슬픈 일 당하면 그 사람도 슬퍼하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날 것 같다는 그런 독한 사람도 그 사람도 차이가 있어도 그 사람도 역시 같은 사람이면 감정 있는 사람이라서 바늘로 찌르면 피도 나고 아픕니다. 로마에 가장 악독한 네로 황제가 그렇게 수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제 손에서 피가 나니까 그렇게 울고, ‘내 몸에 피가 난다’고 고통스러워하더란가요? 악한 인간이지요. 그렇게 많은 사람 죽여놓고. 그 인간도 역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것은 기본적인 그런 것으로 들어가면 다 비슷비슷하다 그말입니다. 다니엘도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인데, 엘리야가 기도하니까 3년 6개월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 하니까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다 그말은, 왜 엘리야가 우리가 기본적으로 같은 사람인데 이렇게 능력에 사람 됨됨이의 차이가 이렇게 크냐 말입니다. 왜 엘리야는 엘리야가 되는데 나는 나밖에 되지 못하느냐. 이런 걸 두고 우리는 크게 탄식을 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건이란 것이, 엘리야의 그 과정을 보면, 그러니까 문제는 과정입니다, 과정. 어떤 과정 거쳐서 1년을 어떻게 살았느냐, 10년을 어떻게 살았느냐.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는데, 사람이 10년이면 어마어마하게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10년을 별 볼일 없이 살면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 10년을 특별하게 노력하게 그 면에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거는 필연입니다, 열매입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이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같은 성정 가지고 기본적인 생활 다 같이 하고 그런 현실에 살았는데 결과를 보니까 다니엘은 그렇게 위대한 인물이 되었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볼때 현재 우리 모습이 이 모습이지 않습니까? 우리를 바깥에 내놓을때 여기서 스스로 자신을 돌아볼때 나는 하나님 앞에 떳떳핟, 사도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 한 것처럼, ‘모두 나를 본받으라’ 하실 만한 분이 얼마나 계실런지요? 바깥에 나가서 나만큼만 성공하면 인생 성공했다고 할만한 분이 계실런지요? 여기 계시는 분 정도에서 그리 말할 수 있다면 제가 단정은 못하겠습니다만은 그릇이 너무도 좁고 얕은 분이구나 그리 생각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실패가 많지 성공은 우리는 별로 없는 사람들입니다. 서민들이고 범인들이니까 그만그만하게 큰 죄 저지르지 않고 그냥 살아와서 그러하지 특별하게 탁월한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면적으로 들어가서 표나지 않게 신앙적으로 오랜 세월속에서 꾸준하게 신앙으로 살아서 드러나지 아니한, 아직까지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 지금은 나타나지 않으니까 숨어있으니까 영광도 숨었고 권위도 숨었고 하나님의 모든 주시고 싶은 상도 숨어있는 그런 분들은 더러더러 여기도 더러 있을 겁니다. 그거 아니라면 나는 잘 살았다고 자부하기 어려울 겁니다. 다니엘은 그리 되었는데 우리는 왜 그리 되지 못했는가? 그것이 과정문제니까 이걸 살펴봐야 되겠다 그말이지요. 어떤 과정이었는가. 현실을 살았는데, 그 현실에 첫째는 현실을 기억하시고 그 현실을 접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활과 성정은 대동소이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사람은 별 사람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대동소이 합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차이가 크게 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들어가면 대동소이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현실을 살 때, 현실이라는 내 몸이 있는 그 상황, 그 환경, 장소, 그 형편 거기는 나를 기준해서 나와 관련된 상관관계된 그런 존재가 많이 있어서 보이지 않는 위로는 하나님이 계시고 또 전체적으로 악령이 있고 옆으로 사람들이 있고 또 벌어지는 사건들이 있고 물질들 만물들이 있으니 이 모든 존재가 내가 사는 현실에 알게 모르게 항상 부딪혀오고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겁니다. 거기서 그 모든 존재를 내가 어떻게 상대하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상대할 때, 또 사건처리할 때 그때는 드러나는 윤곽이 있는데, 하나님과 자기 관계는 보이지 아니하게 자기 자신 혼자의 관계, 그런데 사람이 혼자 있을때는 없고, 나 혼자 있는 거기도 반드시 하나님이 계시고 악령이 있으니까 이 모든 관계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살고 악령 주변에 다 살고 있는데, 내 눈에 안 보일지라도 생각해보면 알고, 말씀으로 논리를 따져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악령이 역사를 하고 있다,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뭘 요구하시고 있다, 믿는 사람은 영이 살아있습니다. 중생이 됐기 때문에. 영이 살아있는 사람은 양심을 쓰면 영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게 누구 음성입니까? 양심을 쓰면 영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게 누구 음성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영은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그 소리가 양심을 쓰면 들립니다. 부정을 못 할 겁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이. 조금 생각해보면 ‘아 그것이 영의 소리였고 하나님의 음성이였다’. 생각해보면 압니다. 그런 것이 있고, 악령의 소리도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거는 악령의 미혹이다, 마귀 소리다 안다 그말이지요. 압니다. 그런게 있고, 사람과의 관계도 있습니다. 사람을 상대할 때, 또 무슨 일이 생깁니다. 그 일을 처리할 때 그런 모든 생활에서 거기서 나 자신이 움직여지는데, 나라는 사람이 지정리가 움직이고 거기서 여러 가지 작용이 생겨지는데 말하게 되고 생각을 하게 되고 판단하게 되고 욕심을 가지게 되고 어떤 일을 처리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미워하게 되고 분노하게 되고 슬퍼하고 기뻐하게 되고 계획도 하고 설계도 하고 여러 가지 그런 내 심신의 작용 역사가 현실에서 일어나는데, 그 일어나는 그 모든 것이 전부 나 아닌 다른 존재들하고 상관관계를 다 가지고 있고, 보이지 않게는 하나님 앞에고 악령과의 관계고, 보이게는 사람이나 사건 이런 관계가 되어져 있습니다. 그리 되어진 거기서 어떤 그런 접하는 모든 존재들과 내가 어떻게 관계를 맺어지느냐 거기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는데, 다니엘은 그런 모든 생활할 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생활을 할때 그는 늘 하나님을 인지하고 의식하고 생각을 하고 그분앞에서 안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니엘은 생각도 하고 연구도 하고 비교도 하고 판단도 하고 처리도 하고 혼자 있을때도, 악령의 모든 미혹이 와도 다니엘은 그 악령의 미혹에 넘어가지 아니하고 구별해서 물리쳐 이기고, 사람들을 상대할때도 다니엘은 그 사람만 보지 않고 하나님을 함께 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만하지 아니하고 조심없이 대하지 아니하고, 자기 기분대로 감정대로 손익계산을 따라 형편따라 사람의 앞면따라 지금 말씀드린 이런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대외접촉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편 따라 또 감정 따라 기분 따라 손익계산 따라 사람의 앞면 따라, 자기 위신 체면 따라 그래 따라가지고 자기가 다 그때그때 모든 생활을 해나가지 거기서 조심을 하고 양심을 쓰고 말씀에 따라서 그 순간 순간을 살아나가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렇게 살아나가는 그 생활을 다니엘은 했고, 이 생활이 예외고 없었고, 이렇게 다니엘이 조심을 하고 양심을 쓰고, 하나님의 법칙,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아는 그 법칙대로 사는 그 생활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누구에게는 그리하고 누구에게는 그리 안하는 그런 차별이 없었고, 대상에 따라 장소에 따라 시간에 따라 이것이 변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에서나 누구를 대해서나 다니엘은 항상 모든 생활 전부다가 항상 하나님 앞에 조심하고 양심을 쓰고 말씀을 따라서 그렇게 말하고 그리 생각하고 그리 판단하고 처리하고, 거기 따라서 웃고 거기 따라서 슬퍼하고 분노하고 그리 했지 하나님 떠나고 말씀 떠나고 양심 저버리고 조심 없이 하지를 않았다 그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 생각을 하고 복음의 영광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생각하면서 그리 사는 그 생활을 하니까 까끌까끌하게 구비해야 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보면은 밤송이처럼 까끌까끌하게 됐을 것이고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부드럽기도 했을 것이고 여러 가지 모습이 나타났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은 여러 가지 모습, 그래서 알기 쉽게 그만 다른 분은 직접 접해보지 못했으니까 모르겠는데, 백목사님은 가까이서 제법 오래 접해봤으니까 압니다. 그분은 일주일에 한번씩 바로 앞에서 얼굴 대고 몇 년을 그래 같이 모셨으니까. 그분은 보면은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진 분입니다. 어떨 때 보면은 굉장히 인자하고 부드러운 참 할아버지 아버님 같고 어떨때는 굉장히 무서운 그런 분이고, 아주 까끌까끌한 바늘 같기도 하고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진 그런 모습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속에 변하지 않는 것인데, 당신 자신은 하나님을 모시고 진리대로 사람의 구원을 따라서 조심해서 양심대로 하나님의 영광과 형제 구원위해서 하는데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은 변하지 않고 한 목적으로 한 원동으로 한 방법으로 한 동기로 그렇게 하는데 나타날 모습은 여러형태로 나타나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이 내가 헬라인에게는 헬라엔처럼, 야만인에게는 야만인처럼, 또 유식한 사람에게는 유식한 사람처럼, 무식한 사람에게는 무식한 사람처럼, 그리하는 것은 아무쪼록 여러 사람을 얻기 위해서 그 사람들에 따라서 대응하다 보니까 외부에 접촉되는 그런 존재들이 여러 형태니까 그래 나타나는 것이지, 그 성령의 사람의 원동과 법칙과 중심과 목적과 방편은 변하지를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은 언제든지 이렇게 살았습니다. 이렇게 사는 이 생활을 다니엘은 때에 따라, 장소에 따라, 대상에 따라, 환경 형편에 따라 변하지 아니하고 일관되게 했고 그리고 그 생활을 수십년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이것이 참 가장 중요한 겁니다. 하루 천사 노릇은 여기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루 천사노릇은 누구나 다 하고 일주일 천사 노릇도 왠만하면 합니다. 그런데 한달동안 천사노릇하려 그러면 대단히 어렵고 3개월 하려그러면 더 어렵습니다. 1년 동안을 믿음으로 계속 살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일반적인 그런 생활 하는데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 특별하게 나는 하나님 앞에 특별한 양심에 가책되는 것은 없다, 특별한 충성을 못해도 양심에 가책되는 것이 없고 무난 무난하게 그렇게 살아간다고 그렇게 생각이 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특별히 징계 받는 것도 없고 고만고만하게 살아가는 그런 분들이라면 거기서 한단계 더 올라갈 필요가 있고, 더 한걸음 나아가려 하다보면 여러 가지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은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요하게 나가니까 그러나 그렇게 고요하게 가다가 거기서 좀 더 주님 앞에 충성하려고 일부러 하지 않아도 그런 상황이 생길 수 있는데 그렇게 하려고 하다보면은 뭔가 여러 가지 문제점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현실을 내가 만들 수도 없을뿐더러 내가 현실을 변하고 만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현실 인도에 따라서 우리는 따라갈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핑계 삼아서 그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그게 어찌보면 신앙에 안일 주의가 되기가 쉽습니다. 현재 주어진 환경 형편 여건 거기서 주어진 그 생활에서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고 거기서 좀 더 힘을 쓰고 좀 더 노력하고 좀 더 충성하면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갈 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서 만족하고 사는, 엘리야를 따라갈 때 길갈에, 벧엘에, 여리고에 각각 선지생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벧엘에 머물렀고 여리고에 머물렀습니다. 엘리사는 머물지 아니하고 따라갈 때 머무는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여기 있자, 갈 길이 너무 어렵다, 나는 가야 되겠다, 벧엘에서도 여리고에서도 붙드는 사람들 있었고, 그 붙든 사람들은 거기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고 그들도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거기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끝까지 따라간 엘리사의 제자는 되었을지언정 엘리사 같은 엘리야를 대 이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은 되지를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도 생각을 해야 됩니다. 현실 안주는 따뜻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벧엘 생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벧엘이 우리 목적은 아닙니다. 여리고도 우리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 목적은 요단강을 건너서 더 이상 갈 수 없는 거기까지 가는것이 우리 목적인데 그렇다고 하여 모험할 수 없고 인도하지 않는 걸 따라갈 수 없지만은 자기 할 수 그 현실에서 있는 충성은 다 해야 됩니다. 다니엘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 때, 여러 가지 문제가 다 생겨졌고 결과적으로 다 승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론으로 말씀드리면, 다니엘은 아주 불리한 조건에서 온갖 멸시, 차별, 또 괄시, 이런게 많이 있었지만은 믿음으로 그 모든 것 다 극복을 하고 위대한 여러 가지면으로 위대한 그런 신앙의 사람이 되어졌습니다. 그렇게 되게 된 그 방편, 과정이 어떠했던가를 살펴보니까 우리와 꼭 같은 현실을 살았고 우리와 같이 의식주 생활 했고,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가 달랐던 것은 그 현실을 살아갈 때 모든 관계를 맺어갈 때 그는 항상 조심을 했다는 겁니다. 조심을 하고 양심을 썼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했고 이걸 버리지 않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의 영광을 위해서 했고, 형제 구원 위해서 했고, 그리고 그 생활을 계속 했다, 이것이 다니엘의 성공에 유일한 방편입니다. 이거 외에는 신앙이 성공하는 길은 없습니다. 믿는 사람이 영육으로 성공하는 길은 이 길 외에는 없기 때문에 신앙에는 지름길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많이 배워도 말세가 되면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훈계에 훈계를 더한다 그랬는데, 세상에 과학의 발달이, 지식의 발전이, 인간 문명의 발달이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쌓인 토대 위에 더 쌓아가니까 발전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6천년 세월 속에 오늘까지 인류 문명이 이렇게까지 발달이 되어 온 겁니다. 휴대폰 스마트폰 있기 전에는 그보다 덜한 그런, 무슨 폰? 폴더폰, 피쳐폰 그게 있었고 그게 있기 전에는 아주 무전기만한 그런 휴대폰이 있었고, 그거 있기전에는 유선 전화가 있었고, 지금도 있지만은, 있고, 유선 전화 있기 전에는 또 그것보다 못한 것이 있고 그래가지고 하나씩 하나씩 발달되어 온 것이지, 어느날 갑자기 유선 전화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갑자기 스마트폰이 턱 생긴게 아닙니다. 비행기가 생기게 된 것, 오늘날 비행기가 된 것도 여러 가지 과정 거쳐가지고 오늘의 비행기가 생겨진 것이고 다 그런 겁니다. 오늘날 문명이 다 그렇게 되어진 것처럼, 그래서 지식에 지식을 더하고 자꾸 발달이 되어지는데, 어쨌든 신앙이란 것은 그러기 때문에 지식은 단번에 깨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은 백목사님의 깨달음은, 백목사님의 평생의 깨달음입니다. 55년 걸린 깨달음이 백목사님 마지막 깨달음입니다. 그 깨달음을 우리는, 그 지식의 깨달음을 우리는 설교록 보면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아 이렇구나’ 믿음만 가지면 이런것이구나 하고 이해는, 논리적인 거는 알 수 있습니다, 지식적으로. 그러나 그것이 자기 구원은 아니고 진정한 자기 깨달음 변화는 아닙니다. 그걸 가지고 그것이 자기에게 백목사님처럼 그런 복음으로 능력으로 역사하기까지는 그 말씀 붙들고 자기가 그런 생활을 해야 그리 되어지지, 그만큼 살아가야 그런게 되어지지 그 말씀에 능력에 사람이 되지 그리 되기전에는 안된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에서는 어린 아이라도 세례요한보다 크다. 천국은 신약시대입니다. 지금 우리 주일학생 똑똑한 주일학생은 세례요한보다 성경 더 많이 알고 교리 더 많이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래서 나는 세례요한보다 위대하다’ 아니지요. 있을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에는 지름길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걸어간 만큼이 자기 구원입니다. 행한만큼, 산만큼이 자기 구원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자기 변화고, 자기 변화는 자기가 살지 않고 걸어가지 않으면 결코 있을 수가 없는 것이 자기 구원입니다. 다니엘의 신앙걸음을 우리가 살펴보고 현실을 어떻게 살았는가? 우리와 같은 사람인데, 어떤 성정으로 어떻게 살아서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를 생각해보고 우리들도 바로 많은 세월을 지나보내도, 돌아갈 수 없어도 지금 남은 때라도 그렇게 살면 남은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안하니까 문제지요.
다니엘처럼 우리가 말씀을 기억하고 주어진 그 현실 각자 자기 현실에서, 학생은 학생 입장에서 가정주부는 가정주부의 입장에서, 직장인은 직장에서 또 교인으로 누구로, 자기 그 위치에 따라 거기서 주변 모든 사람들 모든 존재 사건들을 상대할 때 항상 조심하고 양심을 쓰고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과 복음의 영광을 생각을 하고 형제의 구원을 생각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모든 대외 접촉을 하고, 그리고 그 생활이 계속이 되어지면 그게 되어짐에 따라 그 사람은 알게 모르게 귀하고 아름다운 존영한 그런 인물이 되어진다 이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신앙은 별스러운 것이 아니고 신앙의 걸음 또한 별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주셨으니까 요대로 살면 되는데, 안믿고 안하니까 안되는 겁니다. 하면 되는데 안하니까 안되는 것이고 해도 좀 하다 마니까 안되는 겁니다. 계속 하면 되는 것인데. 나는 그렇게 살았는가를 착각을 버리고 주관을 버리고 말씀에 입각해서 깊이 좀 돌아보십시다.
제목: 다니엘의 신앙 성공의 과정
요점:
=원문설교 =
20140706 주후
다니엘 6:19-24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기도하는 것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생활을 중단하지 아니하고 신앙 양심을 꺽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작정한 그 기도를 불의의 그 세력에게 꺽이지 아니하고 계속한 연고로 사자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기도를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나와있지 않으나 다니엘이 기도를 시작하게 된 것은 아마 오래 되지 않았나 그리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과거에도 계속했던 그 기도가 왜 이때쯤 문제가 되어졌던가? 그것은 다니엘의 그 정적들의 시기 때문이었고, 다니엘을 끄어내려야 자기들이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다니엘을 제거하기 위한 그들의 모략이였습니다. 왕은 그들의 모략인 것을 다니엘을 처치하고 난 다음에 사자굴에 들어가게 되었을 그때사 비로소 알았고, 다니엘은 미리 알았을 것이고, 그러나 그것을 모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상황도 아니었고 그리 됐습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 던져졌지만은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하심을 받아서 사자굴 속에서 건져져서 나왔습니다. 아무런 문제없이 무사히 나왔습니다. 그러고나서 왕이 명을 내려서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해서 그들을 처자들과 함께 사자굴에 던져넣었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 전에 사자가 움켜서 뼈까지 다 부숴뜨렸더라. 그러면 이들이 다니엘을 참소할 때는 자신들이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되어질 줄을 몰랐고 자기들이 다니엘을 제거하기 위해서 모략을 꾸몄을때 결과적으로 자기들이 비참하게 제거함을 당하게 되어졌습니다. 이리 되어지는데 다니엘은 그 정적들에 대해서 단 하나도 그들을 해롭게 하는 말이라든지 마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안봐도 다니엘은 이들을 불쌍히 여겼을 것이고 그들을 사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했지 그들을 스스로 그 꾀에 빠져서 망하게 해달라는 그런 기도를 다니엘이 안했습니다.
시편에 보면 다윗이라든지 이런 성도들의 기도에 보면은 악한 자들로 스스로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멸망 받게 하시고 그 자손들 어떻게 되게 하시고 그런 기도의 내용이 마치 원수들을 향해서 그들을 저주하는듯한 그런 기도들이 종종 나오는데, 그것은 그 사람들을 향해서 하는 기도라 그리 보기 어렵습니다. 그 사람들을 붙들고 있는 악령에 대한 기도고 그 죄에 대한 그런 기도지 그 사람들이 그리 되라고 하는 그런 기도라고 성경 전체를 두고 볼 때 또 하나님의 성품을 볼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의 그 성품 볼때 비록 나를 해치려는 원수일지라도 그 원수가 망하게 해달라는 그런 기도를 믿는 사람은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다니엘이 그 정적들을 향해서 그들이 이렇게 비참하게 되게 해달라는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없고 그런 기도를 하지 않았지만은 다니엘은 그들에 대해서 의롭게만 하고 선하게만 하고 사랑만 베풀었지만은 하나님이 보실 때 그들을 그냥 둘 수 없기 때문에 처치를 하신 겁니다. 이것이 성도가 세상에서 자기 모든 방해 세력을 제거하는 그런 방법이라면 말이 좀 이상한데 이런 형식이라 그리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은 어떤 경우도 사람에 대해서 사람을 저주하거나 사람을 미워하거나 그 사람이 안되고 망하기를 바라고 하는 그런 것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이고 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할 일 하는데 하나님이 보시고 필요하면 그들을 제거하신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말하자면은 의인을 핍박하는데 의인을 핍박하는 그 일에 이용되는 그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들이라 그리 볼 수 있고 이런 사람들은 어디든지 다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있습니다. 모르드개를 그렇게 핍박하던 하만이 결국 자기가 세운 그 나무에 자기가 매달려 죽고 말았고, 거기에 에스더가 모르드개를 나무에 달라 그리 왕에게 요청을 했는데 그거는 좀 또 다른 각도로 생각을 해봐야 될 것 같고, 모르드개는 그리하지 않지 않았을까 좀 더 생각을 해봐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민족 전체의 문제하고 다 연관된 그런게 있고 그래서, 어쨌든 이 다니엘을 사자굴에 집어넣게 괴략을 꾸민 이 사람들은 다니엘의 그 신앙에 이용된 사람들이고 사람들로써는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그런 사람들이며, 이런 사람은 지금 시대에도 우리 주변에 찾아보면 있습니다. 우리가 정도는 다르고 보는 각도는 달라 그러하지 이런 사람들은 어디든지 다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사람도 우리가 보는 그런 눈을 가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에 대해서 안되기를 바란다든지 그 사람이 망하기를 바란다든지 그런 마음은 가질 수 없고 그런 기도는 절대 할 수가 없는 것이 성도된 우리들의 입장이라 하나 좀 기억을 하십시다. 가장 불쌍한 그런 사람들입니다.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간 그런 입장에 있는 아주 불행한 민족의, 이때로 말하면, 불행한 시대, 불행한 그런 민족의 시대에 난 그런 사람들이었고 또 포로로 끌려갔으니까 참 불행한 입장에 처해진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다니엘이 특수학교에, 드러나기는 특수학교에 들어가는 그때부터 시작해서 이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다윗이 목동 초군으로 그냥 들에서 양떼들을 먹이는 거기 쳐박혀있다가 다윗이 드러나게 된 것은 골리앗이 나왔을 그때, 골리앗이 나왔을 그때에 비로소 다윗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이름이 나오기 시작했고 유명해지고 나타나게 되는데 다니엘이 말하자면은 외부로 드러나게 된 것이 특수학교에 입학하는 그때부터라 그리 성경 기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니엘이 특수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은 외부적인 조건으로 말하면 왕족이기 때문에, 귀족이거나 왕족이기 때문에 그리 된건데 왕족과 귀족은 수가 많을건데 그중에서 다니엘이 뽑혔고 그 뽑힌 것이 다른 사람들은 일반적인 그런 조건에 의해서 뽑혔다고 볼 수 있으나 다니엘이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일반적인 왕족이기 때문에 뽑혔다기보다 그들의 신앙 때문에 하나님께서 뽑으신 것이라 그리 보는 것이 성경적으로 맞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특수학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하나님 앞에 그 신앙이 바로 되고 있었고, 요셉이 종으로 팔려가게 된 원인이 꿈을 꾼 그 사실을 형들에게 말했기 때문이고 요셉이 꿈을 영몽을 꾸게 된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계시인데, 그 계시의 꿈을 보게 된 것은 요셉이 평소 신앙생활을 바로 잘 했기 때문에 그리 되어진 겁니다. 요셉이 신앙생활을 바로 하지 않았다면, 심령이 어두우면 그런 꿈을 꿀 수가 없고 하나님의 계시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요셉은 어려서부터 밝은 그런 심령으로 신앙생활을 했고, 그래서 때가 되니까 그런 꿈으로 계시해주셨고 그 꿈으로 인해서 형들에게 안그래도 편애하는 아버지 때문에 미움받고 있는데 형들의 핍박과 시기가 더해졌고, 그래서 애굽으로 팔려가게 되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다 기록되있지 않아도 다니엘은 특수학원에 뽑혀 들어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 역사고 다니엘의 신앙이 바탕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지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특수학원에 들어가서 가자마자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내려줄 때 다니엘은 그 음식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을 것이다고 뜻을 정하고 그 뜻을 기어코 관철 시켰는데 그 뜻을 관철시킬때 다니엘의 의지가 아무리 확고부동해도 그 의지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채식을 먹으면, 채식 먹는 그 다니엘과 그 동무하고 왕의 진미와 포도주 먹는 다른 동무들과 얼굴 비교해볼때 다니엘과 그 동무들의 얼굴이 훨씬 더 윤택하고 그리 되어진 건 하나님의 역사지 이게 음식으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신앙생활할 때 우리 할 일은 우리가 하면, 우리 할 일 하면은 하나님께서 필요하심 따라서 당신의 하실 일을 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일을 하시면 이런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들에 대해서 일을 하시게 만드는 것이 뭐냐? 그게 믿음이고 우리의 의고 충성이다 그리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의가 없는, 충성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나타나지를 아니합니다. 같이 해보실까요? ‘믿음이 없고, 의가 없고, 충성이 없으면 기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리될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3년을 그리 살았고, 3년을 공부하고 난 다음에 졸업을 할때 왕이 그들을 면접을 보니까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더 훨씬 뛰어났고 그중에 다니엘은 일반사람보다 열배나 뛰어난 지능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열배나 뛰어난 그 지능이란 것도 이거는 사람의 지능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거는. 이거는 사람이 아무리 탁월해도 그리 될 수가 없는건데 하나님의 지능이 그와 함께 하니까 열배나 뛰어난 그런 다니엘이 되게 되었다 그리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탁월한 그런 지능이 있으니까 그 지능을 바탕삼아서 계속해서 충성을 하고 신앙생활하고 맡은 그 일에 충성을 하니까 자꾸 올라가고 올라가서 나중에는 아주 높은 고위직까지 올라가게 되어졌습니다. 그리고 꿈 해몽도 하고 이런게 있으니까 사람들이 다 보니까 다르니까 일을 자꾸 맡기고 일을 하려 그러면 높아야 되니까 권세가 있어야 되니까 권세를 자꾸 주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올라가게 된 것이고, 또 사자굴에 들어갈때도 사자굴에 들어간 것은 기도를 계속하는 것은 다니엘이 하는 일입니다. 이게 믿음이고 의고 충성입니다. 다니엘은 기도를 계속할 뿐이고 그러니까 믿음을 지켰고 의를 행했고 충성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외부 사람들을 동원해서 다니엘을 사자굴에 집어넣었고 원해서 들어가지 않았고 스스로 들어가지 않았고 들어가려 하지 않았는데 믿음을 지켰고 의를 행했고 충성했을 뿐인데 결과는 사자굴에 들어갔고, 그런데 사자굴에 들어갔지만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사자입을 막아버리니까 사자가 그를 해하지 못했고 고스란히 나왔습니다. 그러면 다니엘이 한 것은 사자굴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고 사자입을 막지 않았고 사자굴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이 한 것은 자기 현실에서 믿음만 지켰고 하나님의 뜻만 행했고 충성만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역사들이 하나님의 섭리로 다 굴러가서 결과적으로 다니엘은 큰 영광스러운 이런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낸 이런 것이 되어졌다 그말이고, 다니엘의 심령이 밝으니까 꿈 해몽도 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계시를 보여주셨고, 또 다니엘서도 예언서도 기록을 하고 이런 큰 말하자면은 일이 있었는데,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다니엘의 그 신앙과 성공을 생각해봤는데 성공이란 것은 결과고 열매라 그말입니다. 열매라는 것은 사람들이 열매를 말하자면 맺게 하는 건데, 열매는 필연적으로 맺어지는게 열매입니다. 결과라는 것은 과정에 따라서 시작과 과정의 어떠함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맺어지는 그게 결과입니다. 부엌에 아궁이에다가 불을 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아궁이에 불을 떼면 굴뚝에는 연기가 나는 겁니다. 그런데 연기가 나는데,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데 “우리 집에 불 안 뗐어. 음식 안했어. 밥 안했어” 그러면 암만 잡아떼도 “아니 뗀 굴뚝에 어찌 연기가 나느냐. 연기가 나는 것 보니까 불을 뗐지. 많이 뗐든 적게 뗐든, 종이를 태웠든 뭘 했든 어쨌든 아궁이에 불을 지폈으니까 굴뚝에 연기가 나겠지. 불을 안 뗐는데 연기가 나는 수가 있느냐”, 필연적입니다. 콩을 심으면 그 밭에는 콩이 나지, 콩을 심어놓고 팥을 수확할 수는 없는 것이고, 안 심어놓고 거둘 수는 없는 겁니다. 또 심기만 심어놓고 가꾸지 않았으면 나도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자라다가 노랗게 죽고 말지 결과는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열매는 저절로 맺어지는 거니까 농사만 부지런히 지면, 파종하고 거름 주고 또 제충해주고 제충해주고 필요한 것 비료주고 필요한 것만 다 해놓으면 거기 따라서 곡식이면 곡식, 과일이면 과일, 열매는 저절로 맺어지는 것이다 그말입니다.
신앙의 성공도 역시 그러합니다. 세상 성공도 그러하고. 그러니까 열심히 공부를 하면 시험 성적은 올라가게 되어있습니다. 그게 방향이 잘못해서 시간 허비하는데 잘못하면 못하겠지만은 바로 해가지고 공부를 시간 들이고 마음 들이고 노력해서 하면은 성적은 올라가는 것은 필연입니다. 부지런히 땀흘려 일하고 근면성실하게 일을 하면 통장에 돈은 차곡차곡 모여지게 되어있습니다. 그게 일반적이다 그말입니다. 보편적으로. 신앙의 성공도 그렇습니다. 다니엘의 성공은 다니엘이 성공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특수학교에서 왕의 진미와 포도주 먹는 소년들보다 나은 얼굴 하려고 노력을 했겠지만은 그리 된다고 믿기는 믿었으나 사람 힘으로 되는게 아닙니다. 자기는 자기 노력 했고, 그 노력의 결과에 따라 필요에 따라 열매는 하나님이 맺게 하신 겁니다. 10배 지능도 그리 된 것이고 꿈 해몽도 그리 된 것이고 모든 계시도 그렇고 사자굴 승리도 그렇고. 그래서 성공은 열매고 열매는 결과니까 결과는 필연이다. 같이 한번 해보실까요? ‘성공은 필연’. 열매입니다, 열매. 결과. 그러면 필연적인 그 성공, 필연이라는 그 성공의 열매가 맺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냐? 과정이 중요하다 그말이지요. 과정이 잘못되면 결과는 잘못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과정이 바로 되면 결과는 바로 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다니엘의 신앙에서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다니엘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성공했는데, 그 성공의 과정이 어떠했느냐 이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나 중요한 것은 그 성공을 맺기까지 걸어간 그 과정에 다니엘에게 당면된 그 환경, 다니엘의 그 입장 조건 이걸 따져볼때 믿는 사람은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세상 조건은 다만 참고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조건을 주셨구나 하고 참고사항일 뿐이지, 그것이 자기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는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이거 하나도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이걸 가지면 믿는 사람이 어떤 경우도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어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낙망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겁니다. 세상 조건이 아무리 열악해도 상관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다니엘은 성공을 했는가? 그게 이제 오전에 크게 공과에도 나와있고 3가지라 그랬지요. 3가지를 좀 생각해봐야 되는데 이거는 아주 기본적인 그런 생활입니다. 기본적인 그런 조건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살아있다는 말은 현실을 맞이하고 있다는 말이고 그 사람이 예배당에 있던지 병원에 있던지 또 주일 못 지켜 딴데 있던지 군에 있던지 어쨌든 현실이란 것은 그 사람, 나 자신의 뭐가 있는 곳이라고요? 현실은 자기의 몸이 있는 곳이 현실입니다. 마음이 있는 곳은 현실이 아닙니다. 내 마음 있는 곳이 아니고 내 고깃덩어리 몸이 가있는 거기가 현실입니다. 맞습니까, 논리적으로? 내 몸이 있는 그 자리가 현실입니다. 바로 그 환경이 현실입니다. 내 고깃덩어리 몸, 물론 마음과 몸은 또 같이 있으니까. 그런데 내 몸이 여기 있어도 마음은 미국 가 있을 수 있는데 미국은 내 현실이 아닙니다. 내 몸이 있는 거기가 내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 환경이 내 현실이고, 또 그 시간이 내 현실입니다.
사람이란 것은 몸이 있으면 그 몸이 살아있으면 현실에 있는 것이고, 현실을 떠난 사람은 죽은 겁니다. 죽기 전에는 현실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현실에서 사는 사람들의 일반 생활은 어떠한가? 또 사람들의 성정은 어떠한가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한번씩 신문이라든지 방송에 나오는 잘난 사람들의 그 생활을 보고 언뜻 언뜻, 물론 그들은 맡은 일이 있고 크니까 외부적으로 큰 일 합니다. 국가적인 또 국제적인 그런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이면에 들어가서 그들도 속에 들어가보면 그들의 성정도 우리와 다를바없는 꼭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고, 그들의 감정도, 그들의 모든 감정의 그 요소도, 작용도 우리들하고 별로 다를바가 없고, 그들의 생활모습도 우리와 별 다를바가 없습니다. 그들도 먹고 또 화장실도 가야되고 양치도 해야되고, 여반들이 아주 10대 소녀들, 처녀들 자기들 막 몸 화장하고 꾸미고 할때 보면은 이슬만 먹고 사는 것 같지요 모두. 이슬만 먹고 사는 그런 공주병이 들어서. ‘너는 이슬만 먹고 사니? 너는 양치도 안하니? 너는 화장실도 안가니?’ 속에 들어가보면 그 속도 다른 사람 속과 꼭 같습니다. 다를 바가 없다 그말이지요. 껍데기를 그래 꾸며놓으니까 그리 되는 것 같지, 대통령은 안 먹어도 삽니까? 또 어떤 위대한 인물 그런 사람들은 안자도 삽니까?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 다 그리 사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도 말하고 듣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거기따라서 그 사람이 가진 성정, 지정리에 따라서 좋은 말 들으면 그 사람도 기분 좋고 기분 나쁜 말 들으면 속에 기분 나쁘고 감정 나고 화 나면 화내고 좋으면 웃고 슬픈 일 당하면 그 사람도 슬퍼하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날 것 같다는 그런 독한 사람도 그 사람도 차이가 있어도 그 사람도 역시 같은 사람이면 감정 있는 사람이라서 바늘로 찌르면 피도 나고 아픕니다. 로마에 가장 악독한 네로 황제가 그렇게 수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제 손에서 피가 나니까 그렇게 울고, ‘내 몸에 피가 난다’고 고통스러워하더란가요? 악한 인간이지요. 그렇게 많은 사람 죽여놓고. 그 인간도 역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것은 기본적인 그런 것으로 들어가면 다 비슷비슷하다 그말입니다. 다니엘도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인데, 엘리야가 기도하니까 3년 6개월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 하니까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다 그말은, 왜 엘리야가 우리가 기본적으로 같은 사람인데 이렇게 능력에 사람 됨됨이의 차이가 이렇게 크냐 말입니다. 왜 엘리야는 엘리야가 되는데 나는 나밖에 되지 못하느냐. 이런 걸 두고 우리는 크게 탄식을 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건이란 것이, 엘리야의 그 과정을 보면, 그러니까 문제는 과정입니다, 과정. 어떤 과정 거쳐서 1년을 어떻게 살았느냐, 10년을 어떻게 살았느냐.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는데, 사람이 10년이면 어마어마하게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10년을 별 볼일 없이 살면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 10년을 특별하게 노력하게 그 면에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거는 필연입니다, 열매입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이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같은 성정 가지고 기본적인 생활 다 같이 하고 그런 현실에 살았는데 결과를 보니까 다니엘은 그렇게 위대한 인물이 되었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볼때 현재 우리 모습이 이 모습이지 않습니까? 우리를 바깥에 내놓을때 여기서 스스로 자신을 돌아볼때 나는 하나님 앞에 떳떳핟, 사도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 한 것처럼, ‘모두 나를 본받으라’ 하실 만한 분이 얼마나 계실런지요? 바깥에 나가서 나만큼만 성공하면 인생 성공했다고 할만한 분이 계실런지요? 여기 계시는 분 정도에서 그리 말할 수 있다면 제가 단정은 못하겠습니다만은 그릇이 너무도 좁고 얕은 분이구나 그리 생각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실패가 많지 성공은 우리는 별로 없는 사람들입니다. 서민들이고 범인들이니까 그만그만하게 큰 죄 저지르지 않고 그냥 살아와서 그러하지 특별하게 탁월한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면적으로 들어가서 표나지 않게 신앙적으로 오랜 세월속에서 꾸준하게 신앙으로 살아서 드러나지 아니한, 아직까지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 지금은 나타나지 않으니까 숨어있으니까 영광도 숨었고 권위도 숨었고 하나님의 모든 주시고 싶은 상도 숨어있는 그런 분들은 더러더러 여기도 더러 있을 겁니다. 그거 아니라면 나는 잘 살았다고 자부하기 어려울 겁니다. 다니엘은 그리 되었는데 우리는 왜 그리 되지 못했는가? 그것이 과정문제니까 이걸 살펴봐야 되겠다 그말이지요. 어떤 과정이었는가. 현실을 살았는데, 그 현실에 첫째는 현실을 기억하시고 그 현실을 접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활과 성정은 대동소이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사람은 별 사람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대동소이 합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차이가 크게 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들어가면 대동소이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현실을 살 때, 현실이라는 내 몸이 있는 그 상황, 그 환경, 장소, 그 형편 거기는 나를 기준해서 나와 관련된 상관관계된 그런 존재가 많이 있어서 보이지 않는 위로는 하나님이 계시고 또 전체적으로 악령이 있고 옆으로 사람들이 있고 또 벌어지는 사건들이 있고 물질들 만물들이 있으니 이 모든 존재가 내가 사는 현실에 알게 모르게 항상 부딪혀오고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겁니다. 거기서 그 모든 존재를 내가 어떻게 상대하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상대할 때, 또 사건처리할 때 그때는 드러나는 윤곽이 있는데, 하나님과 자기 관계는 보이지 아니하게 자기 자신 혼자의 관계, 그런데 사람이 혼자 있을때는 없고, 나 혼자 있는 거기도 반드시 하나님이 계시고 악령이 있으니까 이 모든 관계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살고 악령 주변에 다 살고 있는데, 내 눈에 안 보일지라도 생각해보면 알고, 말씀으로 논리를 따져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악령이 역사를 하고 있다,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뭘 요구하시고 있다, 믿는 사람은 영이 살아있습니다. 중생이 됐기 때문에. 영이 살아있는 사람은 양심을 쓰면 영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게 누구 음성입니까? 양심을 쓰면 영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게 누구 음성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영은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그 소리가 양심을 쓰면 들립니다. 부정을 못 할 겁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이. 조금 생각해보면 ‘아 그것이 영의 소리였고 하나님의 음성이였다’. 생각해보면 압니다. 그런 것이 있고, 악령의 소리도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거는 악령의 미혹이다, 마귀 소리다 안다 그말이지요. 압니다. 그런게 있고, 사람과의 관계도 있습니다. 사람을 상대할 때, 또 무슨 일이 생깁니다. 그 일을 처리할 때 그런 모든 생활에서 거기서 나 자신이 움직여지는데, 나라는 사람이 지정리가 움직이고 거기서 여러 가지 작용이 생겨지는데 말하게 되고 생각을 하게 되고 판단하게 되고 욕심을 가지게 되고 어떤 일을 처리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미워하게 되고 분노하게 되고 슬퍼하고 기뻐하게 되고 계획도 하고 설계도 하고 여러 가지 그런 내 심신의 작용 역사가 현실에서 일어나는데, 그 일어나는 그 모든 것이 전부 나 아닌 다른 존재들하고 상관관계를 다 가지고 있고, 보이지 않게는 하나님 앞에고 악령과의 관계고, 보이게는 사람이나 사건 이런 관계가 되어져 있습니다. 그리 되어진 거기서 어떤 그런 접하는 모든 존재들과 내가 어떻게 관계를 맺어지느냐 거기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는데, 다니엘은 그런 모든 생활할 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생활을 할때 그는 늘 하나님을 인지하고 의식하고 생각을 하고 그분앞에서 안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니엘은 생각도 하고 연구도 하고 비교도 하고 판단도 하고 처리도 하고 혼자 있을때도, 악령의 모든 미혹이 와도 다니엘은 그 악령의 미혹에 넘어가지 아니하고 구별해서 물리쳐 이기고, 사람들을 상대할때도 다니엘은 그 사람만 보지 않고 하나님을 함께 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만하지 아니하고 조심없이 대하지 아니하고, 자기 기분대로 감정대로 손익계산을 따라 형편따라 사람의 앞면따라 지금 말씀드린 이런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대외접촉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편 따라 또 감정 따라 기분 따라 손익계산 따라 사람의 앞면 따라, 자기 위신 체면 따라 그래 따라가지고 자기가 다 그때그때 모든 생활을 해나가지 거기서 조심을 하고 양심을 쓰고 말씀에 따라서 그 순간 순간을 살아나가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렇게 살아나가는 그 생활을 다니엘은 했고, 이 생활이 예외고 없었고, 이렇게 다니엘이 조심을 하고 양심을 쓰고, 하나님의 법칙,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아는 그 법칙대로 사는 그 생활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누구에게는 그리하고 누구에게는 그리 안하는 그런 차별이 없었고, 대상에 따라 장소에 따라 시간에 따라 이것이 변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에서나 누구를 대해서나 다니엘은 항상 모든 생활 전부다가 항상 하나님 앞에 조심하고 양심을 쓰고 말씀을 따라서 그렇게 말하고 그리 생각하고 그리 판단하고 처리하고, 거기 따라서 웃고 거기 따라서 슬퍼하고 분노하고 그리 했지 하나님 떠나고 말씀 떠나고 양심 저버리고 조심 없이 하지를 않았다 그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 생각을 하고 복음의 영광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생각하면서 그리 사는 그 생활을 하니까 까끌까끌하게 구비해야 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보면은 밤송이처럼 까끌까끌하게 됐을 것이고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부드럽기도 했을 것이고 여러 가지 모습이 나타났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은 여러 가지 모습, 그래서 알기 쉽게 그만 다른 분은 직접 접해보지 못했으니까 모르겠는데, 백목사님은 가까이서 제법 오래 접해봤으니까 압니다. 그분은 일주일에 한번씩 바로 앞에서 얼굴 대고 몇 년을 그래 같이 모셨으니까. 그분은 보면은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진 분입니다. 어떨 때 보면은 굉장히 인자하고 부드러운 참 할아버지 아버님 같고 어떨때는 굉장히 무서운 그런 분이고, 아주 까끌까끌한 바늘 같기도 하고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진 그런 모습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속에 변하지 않는 것인데, 당신 자신은 하나님을 모시고 진리대로 사람의 구원을 따라서 조심해서 양심대로 하나님의 영광과 형제 구원위해서 하는데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은 변하지 않고 한 목적으로 한 원동으로 한 방법으로 한 동기로 그렇게 하는데 나타날 모습은 여러형태로 나타나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이 내가 헬라인에게는 헬라엔처럼, 야만인에게는 야만인처럼, 또 유식한 사람에게는 유식한 사람처럼, 무식한 사람에게는 무식한 사람처럼, 그리하는 것은 아무쪼록 여러 사람을 얻기 위해서 그 사람들에 따라서 대응하다 보니까 외부에 접촉되는 그런 존재들이 여러 형태니까 그래 나타나는 것이지, 그 성령의 사람의 원동과 법칙과 중심과 목적과 방편은 변하지를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은 언제든지 이렇게 살았습니다. 이렇게 사는 이 생활을 다니엘은 때에 따라, 장소에 따라, 대상에 따라, 환경 형편에 따라 변하지 아니하고 일관되게 했고 그리고 그 생활을 수십년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이것이 참 가장 중요한 겁니다. 하루 천사 노릇은 여기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루 천사노릇은 누구나 다 하고 일주일 천사 노릇도 왠만하면 합니다. 그런데 한달동안 천사노릇하려 그러면 대단히 어렵고 3개월 하려그러면 더 어렵습니다. 1년 동안을 믿음으로 계속 살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일반적인 그런 생활 하는데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 특별하게 나는 하나님 앞에 특별한 양심에 가책되는 것은 없다, 특별한 충성을 못해도 양심에 가책되는 것이 없고 무난 무난하게 그렇게 살아간다고 그렇게 생각이 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특별히 징계 받는 것도 없고 고만고만하게 살아가는 그런 분들이라면 거기서 한단계 더 올라갈 필요가 있고, 더 한걸음 나아가려 하다보면 여러 가지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은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요하게 나가니까 그러나 그렇게 고요하게 가다가 거기서 좀 더 주님 앞에 충성하려고 일부러 하지 않아도 그런 상황이 생길 수 있는데 그렇게 하려고 하다보면은 뭔가 여러 가지 문제점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현실을 내가 만들 수도 없을뿐더러 내가 현실을 변하고 만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현실 인도에 따라서 우리는 따라갈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핑계 삼아서 그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그게 어찌보면 신앙에 안일 주의가 되기가 쉽습니다. 현재 주어진 환경 형편 여건 거기서 주어진 그 생활에서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고 거기서 좀 더 힘을 쓰고 좀 더 노력하고 좀 더 충성하면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갈 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서 만족하고 사는, 엘리야를 따라갈 때 길갈에, 벧엘에, 여리고에 각각 선지생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벧엘에 머물렀고 여리고에 머물렀습니다. 엘리사는 머물지 아니하고 따라갈 때 머무는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여기 있자, 갈 길이 너무 어렵다, 나는 가야 되겠다, 벧엘에서도 여리고에서도 붙드는 사람들 있었고, 그 붙든 사람들은 거기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고 그들도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거기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끝까지 따라간 엘리사의 제자는 되었을지언정 엘리사 같은 엘리야를 대 이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은 되지를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도 생각을 해야 됩니다. 현실 안주는 따뜻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벧엘 생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벧엘이 우리 목적은 아닙니다. 여리고도 우리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 목적은 요단강을 건너서 더 이상 갈 수 없는 거기까지 가는것이 우리 목적인데 그렇다고 하여 모험할 수 없고 인도하지 않는 걸 따라갈 수 없지만은 자기 할 수 그 현실에서 있는 충성은 다 해야 됩니다. 다니엘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 때, 여러 가지 문제가 다 생겨졌고 결과적으로 다 승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론으로 말씀드리면, 다니엘은 아주 불리한 조건에서 온갖 멸시, 차별, 또 괄시, 이런게 많이 있었지만은 믿음으로 그 모든 것 다 극복을 하고 위대한 여러 가지면으로 위대한 그런 신앙의 사람이 되어졌습니다. 그렇게 되게 된 그 방편, 과정이 어떠했던가를 살펴보니까 우리와 꼭 같은 현실을 살았고 우리와 같이 의식주 생활 했고,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가 달랐던 것은 그 현실을 살아갈 때 모든 관계를 맺어갈 때 그는 항상 조심을 했다는 겁니다. 조심을 하고 양심을 썼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했고 이걸 버리지 않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의 영광을 위해서 했고, 형제 구원 위해서 했고, 그리고 그 생활을 계속 했다, 이것이 다니엘의 성공에 유일한 방편입니다. 이거 외에는 신앙이 성공하는 길은 없습니다. 믿는 사람이 영육으로 성공하는 길은 이 길 외에는 없기 때문에 신앙에는 지름길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많이 배워도 말세가 되면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훈계에 훈계를 더한다 그랬는데, 세상에 과학의 발달이, 지식의 발전이, 인간 문명의 발달이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쌓인 토대 위에 더 쌓아가니까 발전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6천년 세월 속에 오늘까지 인류 문명이 이렇게까지 발달이 되어 온 겁니다. 휴대폰 스마트폰 있기 전에는 그보다 덜한 그런, 무슨 폰? 폴더폰, 피쳐폰 그게 있었고 그게 있기 전에는 아주 무전기만한 그런 휴대폰이 있었고, 그거 있기전에는 유선 전화가 있었고, 지금도 있지만은, 있고, 유선 전화 있기 전에는 또 그것보다 못한 것이 있고 그래가지고 하나씩 하나씩 발달되어 온 것이지, 어느날 갑자기 유선 전화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갑자기 스마트폰이 턱 생긴게 아닙니다. 비행기가 생기게 된 것, 오늘날 비행기가 된 것도 여러 가지 과정 거쳐가지고 오늘의 비행기가 생겨진 것이고 다 그런 겁니다. 오늘날 문명이 다 그렇게 되어진 것처럼, 그래서 지식에 지식을 더하고 자꾸 발달이 되어지는데, 어쨌든 신앙이란 것은 그러기 때문에 지식은 단번에 깨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은 백목사님의 깨달음은, 백목사님의 평생의 깨달음입니다. 55년 걸린 깨달음이 백목사님 마지막 깨달음입니다. 그 깨달음을 우리는, 그 지식의 깨달음을 우리는 설교록 보면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아 이렇구나’ 믿음만 가지면 이런것이구나 하고 이해는, 논리적인 거는 알 수 있습니다, 지식적으로. 그러나 그것이 자기 구원은 아니고 진정한 자기 깨달음 변화는 아닙니다. 그걸 가지고 그것이 자기에게 백목사님처럼 그런 복음으로 능력으로 역사하기까지는 그 말씀 붙들고 자기가 그런 생활을 해야 그리 되어지지, 그만큼 살아가야 그런게 되어지지 그 말씀에 능력에 사람이 되지 그리 되기전에는 안된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에서는 어린 아이라도 세례요한보다 크다. 천국은 신약시대입니다. 지금 우리 주일학생 똑똑한 주일학생은 세례요한보다 성경 더 많이 알고 교리 더 많이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래서 나는 세례요한보다 위대하다’ 아니지요. 있을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에는 지름길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걸어간 만큼이 자기 구원입니다. 행한만큼, 산만큼이 자기 구원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자기 변화고, 자기 변화는 자기가 살지 않고 걸어가지 않으면 결코 있을 수가 없는 것이 자기 구원입니다. 다니엘의 신앙걸음을 우리가 살펴보고 현실을 어떻게 살았는가? 우리와 같은 사람인데, 어떤 성정으로 어떻게 살아서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를 생각해보고 우리들도 바로 많은 세월을 지나보내도, 돌아갈 수 없어도 지금 남은 때라도 그렇게 살면 남은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안하니까 문제지요.
다니엘처럼 우리가 말씀을 기억하고 주어진 그 현실 각자 자기 현실에서, 학생은 학생 입장에서 가정주부는 가정주부의 입장에서, 직장인은 직장에서 또 교인으로 누구로, 자기 그 위치에 따라 거기서 주변 모든 사람들 모든 존재 사건들을 상대할 때 항상 조심하고 양심을 쓰고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과 복음의 영광을 생각을 하고 형제의 구원을 생각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모든 대외 접촉을 하고, 그리고 그 생활이 계속이 되어지면 그게 되어짐에 따라 그 사람은 알게 모르게 귀하고 아름다운 존영한 그런 인물이 되어진다 이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신앙은 별스러운 것이 아니고 신앙의 걸음 또한 별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주셨으니까 요대로 살면 되는데, 안믿고 안하니까 안되는 겁니다. 하면 되는데 안하니까 안되는 것이고 해도 좀 하다 마니까 안되는 겁니다. 계속 하면 되는 것인데. 나는 그렇게 살았는가를 착각을 버리고 주관을 버리고 말씀에 입각해서 깊이 좀 돌아보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