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9-주후(골3:1-4)
위엣 것을 찾으라2014-06-30조회 279추천 24
(원문설교)
20140629 주후
골로새서 3:1-4
여기 본문에 ‘그리스도’ 라는 이름이 몇 번 나옵니까? 한번 세어볼까요, 간단하게, 잠깐. 1절부터 4절까지 그리스도가 몇 번 나옵니까? 몇 번 나옵니까? 네 번 나오지요. 또, ‘그리스도와 함께’ 라는 말이 몇 번 나옵니까? ‘함께’. 함께라는 말은 몇 번 나옵니까? 두 번이요? 세 번 아닙니까? 세 번 나오지요, 함께 라는 말은. 그러면 우리 구원이란 것은 이루어진 과정과 완성도 그리스도 없이는 되지 않는 것이고, 또 앞으로 우리가 이루어가야되는 구원도 그리스도가 아니면 이루어갈 수 없는 것을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그리스도교라. 그리스도교를 기독교라 그리 말하지요. 그리스도인들이라 그리 말합니다. 예수교는 그리스도교고, 그리스도는 우리가 아는대로 하나님의 이름인데, 신성인데, 직명이라 그리 말합니다. 직책. 직책이라 말은 일을 하는 그 이름, 그게 직책입니다. 과장, 부장, 또 상무, 전무, 사장 이런게 다 직명입니다 일종에. 그리스도는 신성인데, 예수님의 그 신성인데 직명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말씀을 생각을 하고, 또 위엣 것 땅엣 것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그러므로 라는 것은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을 연결시켜주는 접속사라고 했습니다. 앞에 무슨 말씀이 있는가? 2장 끝에 보면, 20절에 보면,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세상의 초등 학문이라 그말은 세상 모든 지식을 전부다 초등 학문이라, 하나님의 지식 아닌 인간지식 전부를 말하고, 그 인간지식은 전부 세상을 향하게 하고 세상으로 살게 하고 세상을 마련하게 만드는게 초등 학문입니다, 세상 학문. 그런데 여기 대해서는 우리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는데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죽었는데 어떻게 또 그것에게 알지 못하고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대로 부패에 돌아 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이게 초등학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주의를 가지고 세상주의로 살면 결과적으로 육신을 좇게 되고, 그 육체를 좇는데 그만한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다. 그런데 여기 대해서는 죽은 믿는 사람인데, 골로새 교인들중에서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어서 사도바울이 이 말씀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므로 죽었는데 아무 유익이 없는 그것을 다시 좇고 있느냐? 너희들은 그렇게 살 사람이 아닌데, 그러므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너희라 그러면 이 편지가 지칭하는 너희는 골로새 교인들이고, 성령이 가르치는 너희는 바로 오늘 우리들입니다. 우리를 가리켜서 너희라, 여기 다 해당되는 ‘너희’ 속에 들어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그러면 우리가 다시 살림을 받았는데 우리만 산 것이 아니고 누가 같이 살았다고요? 그리스도가 사셨고, 그리스도가 살 때 우리가 같이 살았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여기 살았다는 말은 없는 가운데 처음 생겨진 걸 말함이 아니고 산 자가 죽었던 과거 전력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지음 받은 사람이 범죄함으로 다 죽었는데, 죽어서 그 죽음은 죗값이고 그 죗값은 영원한 사망이고 영원한 지옥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죽었는데 그 죽음에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죽은 우리를 살려내시기 위해서 죽음에 원인되는 죄를 대신 짊어지고 그 죄의 값을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대신 받아 그리스도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들의 모든 죄는 어찌 됐습니까? 우리들의 모든 죄는 다 없어졌습니다. 벗어져서 없어졌고, 그래서 우리는 죽음의 형벌이 중단이 되어졌습니다. 죄 때문에 죽었는데 죄가 없어졌으니까 죽음이 중단이 됐고 되어졌습니다. 대신 죽으셨고 예수님이, 그런데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그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는데 다시 살 수 있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게 된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는 왜 죽었으며 어떻게 다시 사셨습니까? 교리적입니다 내용이. 그리스도가 죽으신 이유는 뭣때문입니까?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졌기 때문에, 죄 때문에 죽었는데, 죄 때문에 죽으신 주님이 어떻게 다시 사실 수가 있는 겁니까? 죄를, 우리 죗값을 받아서 죽었으면 그 죽음은 영원한 죽음인데 어떻게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신 그 주님이 어떻게 다시 살 수 있게 되었습니까? 죄를 지고 있는데, 어떻게 다시 살게 됩니까? 이거는 집회때 교리를 많이 들은 분들, 평소 설교를 많이 들은 분들은 어렵지 않게 아는, 많이 우리가 배운 교리입니다. 어떻게 다시 삽니까? 예수님은 근본 죄가 없는 분이지요. 만약에 예수님이 당신의 죄가 있으면 결코 다시 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원죄도 없고 본죄도 없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니까 안 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죽었느냐?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져서 우리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졌으니까 죽어야되는데 죽었습니다. 죽었는데 어떻게 다시 살아나게 되어졌느냐? 살아나게 되신 그 이유는 예수님이 죽으신 그 죽으심은 당신의 죄 때문이 아니고 우리들의 죄 때문인데, 우리들의 죗값을 받았기 때문에 죗값만 다 치르고 나면 그 죽음은 끝나는 겁니다. 죄가 없으면. 사형 선고를 받으면 사형을 받아 죽어야 됩니다. 그런데 징역 500년 논리적으로, 500년 감옥살이하면은 징역 500년 때리면 일단 죽음은 아닙니다. 그런데 죽을때까지 감옥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600년을 살면, 예를들면 어찌 됩니까? 500년 지나고 나면은 그 사람은 감옥에서 나오는 겁니다. 죗값을 다 치뤘으니까. 논리적으로 말하면 그렇다는 말이고, 그래서 우리 죗값을 예수님이 대신 다 치뤘기 때문에 예수님은 살아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영원한 죽음을 어떻게 예수님이, 영원히 죽어야되는데 어떻게 영원이 안 죽었는데 3일만에 다 치를 수가 있는가?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이신 신성이 그 죗값에 동참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 택자 전부의 죄 전부를 다 짊어지고, 죽음의 형벌 받아, 영원한 죽음의 형벌을 대신 다 받으시고 치르시므로 죗값을 치뤘고, 그리고 치루고 난 다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된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다시 사심은 죗값을 다 치뤘다는 말이고, 그래서 죗값을 다 치뤘기 때문에 대형이지만은 우리의 죄를 대신 다 치루셨으니까 우리는 죄 없는 자가 됐고, 그래서 우리는 죄 없는 자니까 죽음에서 면해졌고 주님의 부활하심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 이걸 가리켜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그래서 그리스도가 다시 사실 때 우리도 다시 살았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에서 생각할 것은,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원래 죄 없는 자였으나 죄를 지었고, 죄 지어서 영원히 지옥의 형벌 받는 죄인이였지만은 주님이 죗값을 대신 치르므로 우리는 죄를 다 벗어낸, 죄짐을 다 벗겨낸 죄 없는 우리가 되었다, 우리는 죄 없는 사람들이고, 더하여 하나님의 모든 의를 우리에게 입혀서 우리는 의를 입은 의인이 되었다, 거기서 더하여 하나님과 화친한 생명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더하여 영원한 소망을 가진 우리들이 되었다. 이런 존영한, 아주 존귀한 위치 입장에 있는 우리들이라 그말입니다. 이런 우리 자신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되었으면, 받았으면 하는 말은 어찌보면 조건부처럼 들리나 받은 것은 이미 지나간 완성된 사실이고, 받았으면 하는 그 말씀은 받은 그 사실을 깨달으면 알면 그런 의미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받았는데 그 사실을 알았으면, 받았으면, 이게 우리의 위치, 그래서 우리는 나라는 사람은 심히 존귀한 사람이다. 우리는 원래부터 우리가 잘난 사람입니까, 못난 사람입니까? 우리는 근본이, 근본이 어찌 됩니까? 근본이 태생적으로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근본이 굉장히 존귀한 존영한 그런 목적을 가지고 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목적대상으로 예정되었고 지음받은 우리들입니다. 굉장히 귀한 그런 우리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서 일반 바깥 세상에 나가면 우리는 모든면으로, 아이들말로 별 볼 일 없는 그런 우리들이지만은, 세상에는 워낙 잘난 사람들이 많아서, 요즘은 그 프로 하는지 또 요즘 제가 안 본지 오래되서 모르겠는데, 옛날에 좀 오래전에 고등학생들 이 벨, 무슨 벨이라 그럽니까? 골든벨 그거 하는 프로가 있었거든요? 그때 그거는 제가 녹화된 것 이런 것 한번씩 봤습니다. 그러면 고등학교 2학년, 3학년 똑똑한 아이들 1학년인데, 얼마나 어려운 교과서 문제, 시사 문제, 정치 문제, 경제 문제, 국제 문제, 어지간한 걸 내놔도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걸 집어놨던지 그거 다 아는 것 보고 참 혀를 내 둘렀습니다. 참 똑똑하다. 책을 얼마나 읽었고 얼마나 공부했으면 저런게 머릿속에 다 들어갔을까? 모르는게 없다 할 만큼 그렇게 똑똑합니다. 세상에는 그렇게 똑똑한 그런, 타고난 머리, 후천적인 노력으로 쌓은 실력있는 사람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좁은 범위안에서 참 우리끼리 보니까 조금만 탁월해도 좀 나은 것 같이 그래도 그걸 들고 바깥 세상에 나가보면 그냥 평균치도 못 미치는 그런게 우리들 대부분인데, 그러니까 세상 조건으로 따지고보면 우리는 못난 사람들입니다.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인물도 학벌도 문벌도 조건도 못난 사람들인데, 그런데 근본을 파고 들어가보면 우리는 굉장히 잘난 그런 사람들이라서 만유주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이 심리적인 그런 치료법으로 자기 최면을 걸어서 그래가지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자꾸 존귀하게 만들도록 최면을 걸고 주문을 외우고 나는 잘났다, 나는 똑똑하다, 나는 천재다 그래가지고 자기 위안을 삼고 그렇게 사는, 그렇게라도 행복한 자기를 만들어간다고 하는데 그거는 그래봐야 자기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 범위 아닌데 우리는 심히 어리석게도 너무 큰 근본과 소망과 배경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임에도 불구하고 이걸 안 믿고 이걸 다 덮어 가리고 썩혀놓고 묵혀놓고 스스로 우리 자신들이 못난 자가 되어지고 스스로 자기를 천하게 만드는 그런 것이 믿는 사람들의 대부분입니다. 알고보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태생적으로 우리는 굉장히 존귀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의 대상입니다.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근본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렇게 난 거기다 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쏟으신 그 사랑과 사랑의 발동으로 인한 희생의 그 수고와 역사와 노력과 자본이 무한으로 거기 투자되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투자된 이걸 형언하기 어렵고, 그래서 신앙은 성령의 감화가 그래서 필요합니다. 이제 말씀드린 것은, 우리는 근본적으로 존귀한 자고 또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그 사랑, 그 사랑을 입었고 그 사랑으로 인한 희생의 역사가 수고가 노력이 자본이 무한히 투자된 우리라는 것은, 이 사실은 진리입니까, 영감입니까? 제가 이제 설명드린 것은 진리입니까, 영감입니까? 이해가 안되십니까? 한번 더 말씀을 드릴까요? 우리는 근본적으로 존귀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목적 대상, 사랑의 대상입니다. 귀하고 아름다운 우리를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근본만 그런 것이 아니고 실제 이런 우리를 만드시기 위해서 투자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로 인한 희생과 수고와 노력과 자본이 무한히 투자된 우리들입니다. 이 사실은 이제 말씀드린 거는 진리입니까, 영감입니까? 이거는 진리지요. 제가 논리적으로 설명 드렸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러하다고 설명을 드렸지 않습니까? 이론적으로. 이론이니까 이치니까 진리지요. 그럼 영감은 뭡니까? 이런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만큼 내게 와닿느냐, 느껴지느냐, 깨달아지며 믿어지느냐, 실감되느냐. 그래서 좋아서 환장을 하고 미쳐서 날뛰느냐. 이게 너무 좋아가지고 내가 이런 잔가 하고 좋아가지고 하나님 아버지 찬양함이 입이 마르도록 밤새도록 찬송을 불러도 입이 안 아프고 피곤하지 않고 잠도 안오고, 모두 좀 열심히 믿는 분들 젊을때는 다 그리 믿었을껀데. 믿어가지고 밤새도록 몇시간이고 찬송부르고 기도해도 잠도 안옵니다 그때는. 잠도 안오고, 비를 맞아가면서 찬송을 해도 피곤할 줄도 모르고 비 맞는줄도 모르고 오히려 더 좋고. 모두 그렇게 믿었을건데. 그렇게 해도 그게, 그런것이 말하자면은, 그런 역사 작용이 있게 만드는 그런 감화감동, 느낌, 실감 이게 영감역사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이란 것은 진리에 바탕, 논리 이치 이론 그 바탕 그 안에 그 모든 진리가 자기에게 깨달아지고 느껴지고 실감되어지고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서 현실생활과 자기 모든 생활을 그것이 주장해나가는 이게 영감역사인데 이런것이 있어야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존영한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하는 말은, 이 사실을 깨달으면, 이제 말씀드린 이런 배경을 알고 이걸 깨달았으면 하는 그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총각으로 살 때, 처녀로 살때는 혼자니까 자유롭게 살았지만은 부부로 상대가 생겼으면 이제는 모든 면을 상대입장을 생각을 하고 상대방과 함께 그렇게 해야 하지 않느냐. 결혼했으면, 아이를 낳아서 부모가 되었으면, 회사에 직원으로 다닐때하고 구멍가게라도 사장이 되면 마음가짐이 틀립니다. 이제는 사장이 되었으면, 이제는 한계급 올라갔으면, 그러면 그 위치가 사람을 만든다고 우리들의 위치가 존영하니까 이 사실을 알고 깨달아졌으면 그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어떻게 하라고요?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것이라는 것은 상대적이고 평가적입니다. 위엣 것이니까 높은 것이겠고 반대는 아랫 것이니까 땅엣 것이겠지요. 땅엣 것이라 말은 세상 것이겠고 위엣 것이라 말은 하늘의 것이겠고. 그러면 아랫 것은 세상 것이니까 이거는 사망선 아래, 범죄 아래, 사망 아래, 저주 아래 있는 다 유한하고 불완전하고 또 육체적이고 또 세월속에 다 없어질 소멸되어질 이런 것들이겠고 위엣 것은 하늘의 것이니까 이거는 범죄함을 넘어서고 사망과 저주를 초월한 이거는 영원하고 완전하고 무한하고 불변의 것들 이런 것들이겠지요. 이런것들이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고 좀 생각해 보십시다.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거기는 위엣 것이 있는 그곳입니다. 위엣 것이 있는 곳이니까 어디겠습니까? 천국이겠지요.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느니라. 이게 참 묘한게, 왜 우리에게 위엣 것을 찾으라 그래놓고 우리 위치를 너희가 그리스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우리들의 위치를 우리의 입장, 우리의 근본 본분을 깨우치고, 그리고 위엣 것을 찾으라 말씀하시고 다시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느니라 이 말씀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거는 제가 설교 준비할때는 몰랐는데 설교하다 보니까 이렇게 연결이 됐습니다. 어떻게 되는가 보니까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리스도가 바로 위엣 것을 찾아가지고 아버지 우편에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니까 바로 우리의 나아갈 목표라는 말이고 우리의 소망이라 그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니 그것을 보면서 그리 향해서 나아가라 그말이 되겠지요.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그러면 그리스도가 어떻게 거기 앉아 계십니까? 그리스도가 앉아 계시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하나님이지만은 2위 성자 그리스도의 그 직책으로 성부 하나님이 맡기신 인간 대속의 역사 사명 맡은 책임 그 책임을 감당하면은 무한한 낮아짐의 희생, 가난해짐의 희생, 고난의 희생, 육체 죽으심의 희생, 또 많은 수없는 수고, 마귀와의 수많은 그런 전투 이런걸 다 감당했으니까 책임과 본분을 당신의 전부를 다 드려서 완수하고 악령과의 모든 전투를, 위엣 것을 찾으므로 완전히 승리하고 앉은 자리가 하나님 우편 자리고 그 우편 자리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 전부를 하나님 대신해서 통치하고 다스리는 그 자리에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런데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그거하고 위엣 것을 찾는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전부를 다 드려서 책임 본분을 완수하고 모든 전투 승리하고 그 자리에 앉으신 것처럼, 우리들이 위엣 것을 찾고 찾고 마련해나아가면 우리들의 갈 자리가 바로 거기다, 거기가 바로 우리 목표고 우리 소망이고 우리들의 나아갈 바다, 그러면 우리가 각자에게 맡겨주신 책임 의무 본분을 위엣 것을 생각하고 찾으므로 다 감당을 하고, 우리 앞에 닥치는 모든 악령과의 전투, 죄와의 전투, 사망과의 전투, 자기 자신과의 전투를 능히 승리로 다 승리하고 나면 우리도 그리스도 우편에 앉아서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내가 상속받아서 주님을 대신해서 모든 것을 통치하고 다스리게 되어진다 이것이 우리들의 소망이다 그말입니다.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느니라. 우리들이 나아갈 소망입니다.
그리고나서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아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생각이라 말은 거기에 마음을 두는 것이고 관심을 두는 것이고 계산을 대는 것이고 수지타산을 대는 것이고, 그러니까 위엣 것에 대해서는 가치를 두고 거기 마음을 두고 또 관심을 두고 손익계산을 따져보고 이래 하고, 그러나 땅엣 것에 대해서는 막말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거기 대해서는 너희들이 관심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마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뭐겠습니까? 위엣 것 아니겠습니까? 위엣 것입니다. 그거 구하는 거기만 우리가 힘쓸 것이지 그것만 하면, 그런 비유가 나옵디다. 회사 다니는 사람이, 회사에 취업을 한 사람이 사원인데, 그 사원이 회사 출근해서 ‘보자, 집에 있는 아내가 잘 지내고 있을까? 또 빨래는 하고 있는가? 아이들 학교에서 공부는 잘하고 있는가? 오늘 저녁 반찬은 뭘 먹는가? 먹을 건 있는가?’ 회사에 출근해서 그 회사에 고용되고 회사에서 월급받고 일하는 사람이 회사에 출근해서 일은 안하고 아내만 생각을 하고 자식만 생각을 하고 집안일만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자꾸 하다 보면 그 회사 사원의 월급이나 직급이 올라갑니까, 내려갑니까? 어찌 됩니까? 회사에 다니는 회사사원이 회사에 출근해서 회사 업무는 뒷전이고 집안일만 자꾸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회사에서 직급이나 월급이 올라가겠습니까, 내려가겠습니까? 일이 제대로 안되니까 내려 가겠지요. 내려가다 나중에는 좇겨나겠지요. ‘너 필요없다. 회사에 왔으면 회사일을 해야되지.’ 반대로 한 사람은 출근해가지고 가정이나 이런건 일단 생각지 아니하고, 무책임한 사람 아닌데, 죽어나 사나 회사일만 죽자 사자 합니다. 퇴근시간 됐는데, 퇴근할 생각도 안하고 일하고 있습니다. ‘퇴근 안해? 얼른 집에 가서 가족들 돌봐야지’ ‘일이 지금 밀렸습니다. 중요한 것 밀렸습니다.’ 그렇게 죽자사자 매달리면 그 사람 직급 월급이 올라가겠습니까, 내려가겠습니까? 사장이면 그런 사람은 월급 올려주고 직급 올려주고 쓰지 않겠습니까? 시대가 변해 그것 다른 것도 생각하겠지만은. 그러니까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일꾼이 저 먹을 것을 염려하면서 무슨 일을 하겠느냐. 군인이 제가 제돈 들여서 군인 가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자기 몸 바쳐서 총 들고 적군과 싸우고 있으면 거기 보급품은 나라에서 알아서 다 챙겨준다 그말입니다. 알아서 다 챙겨준다. 일꾼이 열심히 일 하고 있으면 먹을 것 월급은 회사에서 알아서 챙겨준다 그말입니다.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는 아버지께서 알아서 챙겨주신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위엣 것을 찾으면 땅엣 것은, 그러니까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아라. 땅엣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인데 그거는 잘되든지 못되든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지 못 받는지 이걸 따져도 위엣 것하고 연관되서 따져봐야 됩니다. 그거는 상관없다. 내가 멸시받든 천대받든 조롱받든 일단 그거는 두고, 나는 위엣 것만. 다른 사람이 나를 칭찬하든지 손가락질하든지 일단 두고 나는 위엣 것만. 내가 월급이 올라가든 내려가든 그건 두고 위엣 것만. 위엣 것만 찾으면 세상 아랫 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시니까 위엣 것을 생각하고 위엣 것에 가치두고 위엣 것에 관심 두고 위엣 것에 마음을 두고 그것을 계산대서 오늘 하루 수입에 위엣 것은 어찌 됐느냐. 내가 위엣 것을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 마련했느냐 못했느냐 또 얼마만큼 되어졌느냐, 위엣 것으로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 거기 계산대지 이 세상 그런 것은 아예 관심 두지 말아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아라. 왜 그래야 됩니까? 이는 너희가 죽었고, 여기 죽었다는 것은 땅엣 것을 생각하는 그 사람이 죽었다는 겁니다. 땅엣 것 생각하는 육체로 사는 그 사람이 옛사람인데 그 사람은 주님 죽으심에 함께 죽었고, 이는 너희가 죽었고, 이거는 죽었고, 너희 생명 이 생명은 다시 산 생명이니까 중생된 생명이고 하나님과 연결된 그 생명이고, 그런데 그 생명이, 너희 생명이 중생된 생명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 생명이란 것은 모든 움직임의 근본 원동이 뿌리가 생명이지요. 인간의 모든 활동은 전부 생명에서 다 나오는 겁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된 중생된 그 생명인데, 이 생명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어졌느냐?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어졌느냐?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 생명이 종자적인 생명이 우리가 있게 됐습니까?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었습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생명이 있게 되었습니다. 너희 생명이 하나님과 연결된, 중생된 영생하는 영생에 원동이 되고 바탕이 되어지는 그 생명이, 하나님과 연결이, 이는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그러면 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이 생명을 종자적으로 주셨고, 종자적으로 주신 그리스도가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이 생명을 영원토록 장성하는 그 생명으로 길러서 완전케 온전케 만드시기 위해서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가 함께 동참을 해서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그러면 그리스도에 대속이란 것은 과거에 그리스도가 당신의 전부를 드려서 우리를 대속해서 대속을 이루셨고, 뿐만 아니고 미래 영원토록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고 우리의 전부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다 그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라. 감취었다는 뜻은 세가지로 생각해보면 하나는 너무 존귀해서 깊이 숨겨놨습니다. 너무 귀한 것이라서 깊숙이 숨겨뒀으니까 감취었고, 우리들의 생명 이게 너무 귀한 것이라서 감취었고, 또 두 번째는 세상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니까 세상이 알지 못하도록, 아무나 알 수 없도록 세상이 모르니까 감취었고, 또 세 번째는 아무도 해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다 이런 의미로 감취었음이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취인 것이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종자적으로 하나님과 연결시켜주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앞에 감취어서 영원토록 그 안에서 하나님의 보호 아래서 존귀하게 세상이 알지 못하게 그렇게 영원히 자라가게 된다. 영원히 자라가는데 영원히 자라가는 그런 영원의 자람에 그 종자, 기본적인 종자와 영원의 종자가, 자 또 한번 해볼까요? 종자가 있는데, 이게 제 주관인지 좀 판단해 주십시오. 기본적인 종자와 영원의 종자 같습니까, 다릅니까? 이 생명이 있는데 종자적인 생명이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이 기본적인 종자적인 생명이 있고 영원의 종자적인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면 기본적인 종자 생명은 무엇입니까? 이거는 중생된 생명이겠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러면 영원의 종자적인 생명은 무엇입니까? 이 땅위에 사는 동안에 평생 길러놓은 그 생명의 양이겠습니다. 그게 영원한 생명의 종자. 그런데 그래서 기본적인 생명으로 그리스도가 이 생명으로 하나님과 연결시켜진 이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취어있고, 이 생명이 감취어있는 그 상태에서 이 땅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주님 재림하실 그때까지 개인으로 말하면 이 땅에서 세상 떠나는 그날까지 하나님 안에 감취어서 이것이 그대로 영원의 종자로 점점 만들어져가고 자라가다가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이리 되어있다가 그다음 4절에,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명, 그리스도는 우리 생명입니다. 자 이거 같이 한번 해보시겠습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 우리 생명이라 말은 무엇이라 말입니까? 생명이라 말을 다른 말로 말하면 한마디로 딱 바꿔보시지요.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 그 말을 생명을 다른 말로 바꿔보시지요, 무엇입니까? 000 집사님 말씀해 보시지요? 우리의 구원이신. 틀린 말은 아닌데 제가 생각하는 각도가 아닙니다. 표현이 아닙니다. 생명이라는 그 생명의 역할을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겠지요. 생명은 무엇입니까? 생명은 전부 아닙니까, 전부. 생명은 전부입니다. 우리의 전부이신 그리스도. 소망이며 기쁨이며 존귀며 영광이며 행복이며 성공이며 보는 것이며 듣는 것이며 말하는 것이며 전부다가 생명에서 다 나오는 겁니다. 생명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생명 있으면 다 있는 것이고. 우리 생명이라 그말은 우리의 전부라.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나의 생명 전부되신 그 주님,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우리 전부가 되시는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께서,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와 끊어지면 우리는 죽은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무가 너희는 포도나무 가지라. 나는 포도나무 둥지고 너희는 가지라. 가지가 둥지에서 끊어지면 그걸로 끝나는 것처럼 생명이신 주님과 끊어지면 우리는 그날로 다 끝입니다. 늘 연결되어있어야 되지요. 그러니까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데, 지금은 그리스도가 감취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라 그래도 사람들은 암행어사가 신분을 감추니까 자기 신분을 감추고 아주 큰 권세 임금님의 특명을 받은 임금님의 대리니까 아주 임금님 대행인데, 막강한 권력 그 앞에는 그 누구도 감히 맞서지 못하는데 그런 권력을 가졌으나 조사를 위해서 남루하게 차려입고 거지 차림으로 신분을 감추니까 깔보고 멸시하고 무시하고 그리하지만은 그 사람이 암행어사 마패 들고 자기 신분 밝히고 나타날때는 산천초목이 벌벌 떤다 그러지 않습니까. 이것처럼 지금은 그리스도가 하나님 안에 감취었습니다. 또 누구 감취었습니까? 그리스도가 감취었고 또 누가 감취었습니까? 우리도 감취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모릅니다. 모르니까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줄 모르니까 벌로 날뛰는 것처럼 세상은 모르는데,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게 되면 그때는 산천초목이 아니고 우주가 벌벌 떨고 모든게 다 뒤집어지는 그때가 되는데, 그런데 그때 나타날 때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 어떻게 나타난다고요? 어떻게 나타납니까?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영광 중에 참, 이 영광이라는 표현이 사람들이 은혜 받은게 다 다르지만은 저는 백목사님 설교중에 은혜 받은게 너무 많지만은 그중에 하나 ‘영광’이라는 이 단어 표현에서 참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영광이란 것은 사람이 그 누구도, 우리 구원은 다른 말로 말하면 무엇입니까? 우리 구원은 영광의 구원이고 영광의 찬미입니다. 영광이란 것은 찬송입니다, 찬송. 찬송이고 사은의 노래입니다, 찬송은. 사은의 노래. 그 사은의 노래는 거기에 섞임이 없는 겁니다. 거기는 외식이 없고 이중이 없고 가식이 없고 다른 것이 섞여있지 않습니다. 다른 것이 섞여있지 않습니다. 다른 것이 섞여있는 것은 찬송이 아닙니다. 영광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영광은 1등을 했던지, 적을 물리쳐 이겼던지, 경쟁에서 이겼던지, 뭔가 달성했던지 이 세상에서 얻는 영광은 그 영광 뒤에는 많은 적이 있고 거기는 거짓이 들어있고 외식이 있고 가식이 다 들어있는 그런 것이 없는 세상 영광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영광, 영광중에 나타날 이 영광은 섞임없는 감사고 섞임없는 찬송입니다. 인간관계에서 그런 예를 들지요. 하만이죠. 하만이 그 큰 나라에 총리가 됐으니까 부러울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모르드개가 자기한테 절 하거나 말거나 그 한 사람 무시하면 될 거 아니겠습니까? 무시하고 하거나 말거나 무시하고 하면 되는데, 사람이란 것은 그게 안된다 그말이지요. 다 전부 찬성하는데 모르드개 한 사람이 딱 걸리니까 또 악령이 역사하니까 그게 괘씸해서 못 견뎌서 결국 그 모르드개 한 사람 그 수많은 사람이 전부 자기 밑에 굴복하고 자기가 임금처럼 그렇게 되어있는 상태니까 모르드개 하나 무시해도 될건데, 그 한사람을 무시하지 못하고 그 한사람 기어코 없애버리려 하다가 자기 자신과 집안 전부가 다 절단이 났잖습니까. 사람이란 것은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사람이 다 좋은데 한 사람이 나하고 반대하면 그 사람 때문에 언제든지 그 완벽하게 원만하지 못한, 완전한 그런 맑고 깨끗한 그런 것은 나오지 못합니다. 항상 그것 때문에 거리끼고, 그러기 때문에 너희가 예물 드리다가 사람으로 더불어 불목이 생각나면 먼저 사화하고 그다음에 예물 드리란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인간관계. 인간관계 뿐만 아니고 다른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내가 그에게 받은 은혜가 커서 영광돌리려고 하는데, 감사하는데, 감사하는데 그에 대해서 뭔가 하나 걸리는 것이 있으면 내가 그분에게 받은 은혜가 커서 참 감사한데 이거 하나는 아니더라. 이게 걸리면 전체적으로 진정한 감사는 나올수가 없는 겁니다. 그게 영광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영광이란 것은 이거는 만에 하나 억만에 하나 억억만에 하나도 여기는 다른 것이 섞여있지 않은 말그대로 참 영광의 찬미. 전적 감사, 영광 돌리는 그 영광입니다. 이거는 세상에서 없는 겁니다. 모형들이 하나씩 있어도 진정 참 없는 것이고 이거는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영광중에 나타나는데, 그 영광중에 나타날 때 너희도, 너희가 누구라고요? 우리도 그와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그러니까 그분이 나를 그렇게 그런 위치가 되도록 모든 기반을 다 닦았고 그분이 도왔고 그분이 또 소망 목표가 되었고 함께 했고 그래서 끝까지 그분과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이것이 우리 소망입니다. 우리들의 힘쓸 바고. 그러기 때문에 알고나면 기독교 신앙이란 것은 이보다 더 평가적으로 더 가치있고 존귀한 그 영광스러운 것이 없는 것이 신앙세계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것, 아름다운 것 귀한 것,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이거는 자연을 노래하는 것이지만은 이걸 신령한 면으로 들어가도 그렇고,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구주 예수님의 아름다우심 이 땅 위에 다시 유가 없도다- 그분의 그 아름다움이란 것은 외모의 아름다움이야 그거야 사람들의 보는 시각에 따라 다 다릅니다. 행복지수라는 것을 두고 어제 신문에 보니까 조사 했다 그러는데, 아주 인물 잘난 상위 10프로 하고 아주 못난 하위 10프로 하고 두 그룹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남녀로 만들어서 인물 때문에 얼마나 행복하냐를 따져보니까 인물 때문에 행복한 것은 전혀 상관이 없더랍니다. 오히려 인물 못난 쪽이 조금 더 이유는 모르겠지만은 더 행복하다 더랍니다. 그 사람들과 함께 사는 사람이. 그러니까 육체 껍데기 아름다움이란 이거는 가치가 없는 겁니다. 이거는 주관적이고 시대 따라 다르고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것이고 또 이거는 세월 속에 다 변해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 사람의 인격의 아름다움, 이거는 참 아름다움이고 그 인격의 아름다움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그 영광 이 아름다움은 참 형언하기 어려운, 이런 것이 우리에게 깨달아지고 느껴지는 걸 가리켜서 영감이라 그리 말합니다. 우리 소망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소망을 가지고 사는 우리들인데, 그래서 결론으로 잠깐 정리하면, 위엣 것, 이 모든 것이 다 위엣 것 땅엣 것이 나오는데, 그러기 때문에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 것을 생각해라. 위엣 것이 무엇인가? 좀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게 말한다면 위엣 것이 무엇이며 아랫 것이 무엇이겠는가? 위엣 것이라 말했으니까 뭔가 좀 형체를 가진 그런 것 같이 생각될 수 있겠지만은 위엣 것이라 말은 말그대로 아랫 것이 아니고 위엣 것이라 말인데 위엣 것은 하늘의 것이겠고 아랫 것은 땅엣 것이겠고 땅 아래 찾는다면 바다의 것이라 그렇게 예를 들어 볼 수 있겠는데. 저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은 설교록에 보니까 백목사님 생각을 하고 하신 말씀인데, 땅에 육지에 있는 모든 것이 바닷속에도 다 있다 그럽니다. 육지에 산이 있듯이 바다에도 산이 있고, 육지에 동물이 있듯이, 말이 있지요? 바다에 뭐가 있습니까? 해마가 있지요, 해마. 육지에 사자가 있지요. 바닷속에도 그런 사자 있지요. 있습니다. 다 있답니다 그런게. 그런데 모양은 다르고 그런데 육지에 있는 것보다 바다에 있는 것은 좀더 존재적으로 기능적으로 좀 온전하지 못한 좀 수준이 낮은 그런 것이 바다속에 있는 것들이고, 바다에 있는 것 육지에 다 있는데 육지에 있는 것은 좀 더 온전하며 더 가치가 차원이 높은 것들이고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전부 천국에도 하늘에도 다 있는데, 다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 소가 있으니 천국에 소 있고 이런 말씀이 아니고 이 세상에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사람이 가진 모든 요소, 이 세상에 욕심이 있으니까 하늘에도 욕심이 있고 이 세상에 실력이 있으니까 하늘에 실력이 있고, 세상에 영광과 수치 있듯이 하늘나라도 영광과 수치가 있고 세상에 승패가 있듯이 하늘에 승패가 있고 세상에 존귀 대우가 있듯이 하늘에도 존귀 대우가 있으니 그 하늘나라 이 모든 것들, 하늘나라 실력 대우 영광 존귀 승패 행복 이런 모든 것들은 이 세상 것하고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한 것들이니 위엣 것을 찾으라는 그말은 바로 이런 세상에 있는 그런 이 세상 행복에 가치두고 그런 것 찾지 말고 하늘에 영원한 행복을 찾아라. 거기 가치두고 그걸 마련해라. 이 세상 성공도 세상에서 귀하다 하나 세상 성공에 가치두지 말고 그걸 생각하고 그것을 마련하려 하지 말고 위엣 것 하늘의 성공을 마련해라. 이 세상에 존영 대우를 찾고 그걸 마련하려 하지 말고 영원한 하늘나라 천국의 대우와 존영 그 실력을 마련해라. 그것이 영원한 것이며 무한한 것이며 완전한 것이니까 그걸 마련해라 그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마련하는 것입니까? 그것 마련하는 것은 말씀이지요. 말씀대로 사는 것이고, 또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순종으로 사는 것이고, 신앙 양심으로 사는 것이고, 이런 것이 다 위엣 것을 찾는 겁니다. 자기 주장대로 자기 주관대고 자기 감정대로 자기 욕심대로 자기 취미대로 그리 하지 말고 취미도 이 세상 취미를 가지지 말고 위에 취미를 가져라, 고상한 취미를 가져라. 그러니까 이 세상 자기와 현실 환경에 사람들과 사건, 그 주변 환경에 피동되서 그렇게 살지 말고 하늘에 피동이 되어져라. 그것이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마련하는 방법이고 길이다. 그리 살면 그 생활은 그게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이는 그런 생명이 되고 그 안에서 감취어진 그 안에서 점점 이게 온전해지고 튼튼해지고 자라가다가 그래가지고 내가 끝날 때, 주님 재림하실 그때, 영광 중에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나게 될거니까 그리 살아라 말씀을 하신 겁니다. 오늘 이 말씀에서 우리는 좀 시야를 넓히고 높여서 멀리보고 저 높을 곳을 향하여 높이 보고 길게 보고 전체를 보면서 사람이 나이를 먹을때 나이 헛 먹었다 그말은 참 욕입니다. 우리가 세월 속에서 늙어져 가면서 나이 들어가면서 나이 드는 값을 세상적으로도 해야되고 신앙적으로도 해야되고 믿어가는 연조가 많아지면 믿어가는 신앙의 연조가 그게 많아질수록 우리는 거기에 걸맞는 우리 자신들로 변화가 되어져 가야 됩니다. 우리에게 주신 세월은 유한합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세월이 이십대 세월과 사십대 세월은 틀리고, 삼십대 주어진 일년과 육십대 주어진 일년은 완전히 틀립니다. 삼십대 일년과 칠십대 일년은 천지차이입니다. 삼십대 일년은 큰 일 얼마든지 할 수 있으나 칠십대 팔십대 일년은 자기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드는 그런 일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월 아끼고 조금이라도 젊을때 힘있을때 우리는 위엣 것을 찾고 마련하고 멀리보며 준비하는 그런 우리가 되어야 되지, 세월 허송하지 않도록 어쨌든 소망을 하늘에 두고 우리 신앙을 다시 한번 깨우쳐 보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땅엣 것은 다 지나가는 겁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다. 그 모든 영광은 풀에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위엣 것을 생각하고 위엣 것 찾는 그것만이 가치있고 영원히 남아있을 것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 받은 걸 생각을 하고 위엣 것을 찾읍시다.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우리 생명이 그리스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다는 이 비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이 비밀을 생각하면서 위엣 것을 찾는 생활 힘 쓰십시다.
20140629 주후
골로새서 3:1-4
여기 본문에 ‘그리스도’ 라는 이름이 몇 번 나옵니까? 한번 세어볼까요, 간단하게, 잠깐. 1절부터 4절까지 그리스도가 몇 번 나옵니까? 몇 번 나옵니까? 네 번 나오지요. 또, ‘그리스도와 함께’ 라는 말이 몇 번 나옵니까? ‘함께’. 함께라는 말은 몇 번 나옵니까? 두 번이요? 세 번 아닙니까? 세 번 나오지요, 함께 라는 말은. 그러면 우리 구원이란 것은 이루어진 과정과 완성도 그리스도 없이는 되지 않는 것이고, 또 앞으로 우리가 이루어가야되는 구원도 그리스도가 아니면 이루어갈 수 없는 것을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그리스도교라. 그리스도교를 기독교라 그리 말하지요. 그리스도인들이라 그리 말합니다. 예수교는 그리스도교고, 그리스도는 우리가 아는대로 하나님의 이름인데, 신성인데, 직명이라 그리 말합니다. 직책. 직책이라 말은 일을 하는 그 이름, 그게 직책입니다. 과장, 부장, 또 상무, 전무, 사장 이런게 다 직명입니다 일종에. 그리스도는 신성인데, 예수님의 그 신성인데 직명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말씀을 생각을 하고, 또 위엣 것 땅엣 것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그러므로 라는 것은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을 연결시켜주는 접속사라고 했습니다. 앞에 무슨 말씀이 있는가? 2장 끝에 보면, 20절에 보면,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세상의 초등 학문이라 그말은 세상 모든 지식을 전부다 초등 학문이라, 하나님의 지식 아닌 인간지식 전부를 말하고, 그 인간지식은 전부 세상을 향하게 하고 세상으로 살게 하고 세상을 마련하게 만드는게 초등 학문입니다, 세상 학문. 그런데 여기 대해서는 우리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는데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죽었는데 어떻게 또 그것에게 알지 못하고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대로 부패에 돌아 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이게 초등학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주의를 가지고 세상주의로 살면 결과적으로 육신을 좇게 되고, 그 육체를 좇는데 그만한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다. 그런데 여기 대해서는 죽은 믿는 사람인데, 골로새 교인들중에서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어서 사도바울이 이 말씀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므로 죽었는데 아무 유익이 없는 그것을 다시 좇고 있느냐? 너희들은 그렇게 살 사람이 아닌데, 그러므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너희라 그러면 이 편지가 지칭하는 너희는 골로새 교인들이고, 성령이 가르치는 너희는 바로 오늘 우리들입니다. 우리를 가리켜서 너희라, 여기 다 해당되는 ‘너희’ 속에 들어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그러면 우리가 다시 살림을 받았는데 우리만 산 것이 아니고 누가 같이 살았다고요? 그리스도가 사셨고, 그리스도가 살 때 우리가 같이 살았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여기 살았다는 말은 없는 가운데 처음 생겨진 걸 말함이 아니고 산 자가 죽었던 과거 전력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지음 받은 사람이 범죄함으로 다 죽었는데, 죽어서 그 죽음은 죗값이고 그 죗값은 영원한 사망이고 영원한 지옥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죽었는데 그 죽음에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죽은 우리를 살려내시기 위해서 죽음에 원인되는 죄를 대신 짊어지고 그 죄의 값을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대신 받아 그리스도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들의 모든 죄는 어찌 됐습니까? 우리들의 모든 죄는 다 없어졌습니다. 벗어져서 없어졌고, 그래서 우리는 죽음의 형벌이 중단이 되어졌습니다. 죄 때문에 죽었는데 죄가 없어졌으니까 죽음이 중단이 됐고 되어졌습니다. 대신 죽으셨고 예수님이, 그런데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그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는데 다시 살 수 있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게 된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는 왜 죽었으며 어떻게 다시 사셨습니까? 교리적입니다 내용이. 그리스도가 죽으신 이유는 뭣때문입니까?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졌기 때문에, 죄 때문에 죽었는데, 죄 때문에 죽으신 주님이 어떻게 다시 사실 수가 있는 겁니까? 죄를, 우리 죗값을 받아서 죽었으면 그 죽음은 영원한 죽음인데 어떻게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신 그 주님이 어떻게 다시 살 수 있게 되었습니까? 죄를 지고 있는데, 어떻게 다시 살게 됩니까? 이거는 집회때 교리를 많이 들은 분들, 평소 설교를 많이 들은 분들은 어렵지 않게 아는, 많이 우리가 배운 교리입니다. 어떻게 다시 삽니까? 예수님은 근본 죄가 없는 분이지요. 만약에 예수님이 당신의 죄가 있으면 결코 다시 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원죄도 없고 본죄도 없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니까 안 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죽었느냐?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져서 우리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졌으니까 죽어야되는데 죽었습니다. 죽었는데 어떻게 다시 살아나게 되어졌느냐? 살아나게 되신 그 이유는 예수님이 죽으신 그 죽으심은 당신의 죄 때문이 아니고 우리들의 죄 때문인데, 우리들의 죗값을 받았기 때문에 죗값만 다 치르고 나면 그 죽음은 끝나는 겁니다. 죄가 없으면. 사형 선고를 받으면 사형을 받아 죽어야 됩니다. 그런데 징역 500년 논리적으로, 500년 감옥살이하면은 징역 500년 때리면 일단 죽음은 아닙니다. 그런데 죽을때까지 감옥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600년을 살면, 예를들면 어찌 됩니까? 500년 지나고 나면은 그 사람은 감옥에서 나오는 겁니다. 죗값을 다 치뤘으니까. 논리적으로 말하면 그렇다는 말이고, 그래서 우리 죗값을 예수님이 대신 다 치뤘기 때문에 예수님은 살아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영원한 죽음을 어떻게 예수님이, 영원히 죽어야되는데 어떻게 영원이 안 죽었는데 3일만에 다 치를 수가 있는가?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이신 신성이 그 죗값에 동참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 택자 전부의 죄 전부를 다 짊어지고, 죽음의 형벌 받아, 영원한 죽음의 형벌을 대신 다 받으시고 치르시므로 죗값을 치뤘고, 그리고 치루고 난 다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된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다시 사심은 죗값을 다 치뤘다는 말이고, 그래서 죗값을 다 치뤘기 때문에 대형이지만은 우리의 죄를 대신 다 치루셨으니까 우리는 죄 없는 자가 됐고, 그래서 우리는 죄 없는 자니까 죽음에서 면해졌고 주님의 부활하심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 이걸 가리켜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그래서 그리스도가 다시 사실 때 우리도 다시 살았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에서 생각할 것은,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원래 죄 없는 자였으나 죄를 지었고, 죄 지어서 영원히 지옥의 형벌 받는 죄인이였지만은 주님이 죗값을 대신 치르므로 우리는 죄를 다 벗어낸, 죄짐을 다 벗겨낸 죄 없는 우리가 되었다, 우리는 죄 없는 사람들이고, 더하여 하나님의 모든 의를 우리에게 입혀서 우리는 의를 입은 의인이 되었다, 거기서 더하여 하나님과 화친한 생명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더하여 영원한 소망을 가진 우리들이 되었다. 이런 존영한, 아주 존귀한 위치 입장에 있는 우리들이라 그말입니다. 이런 우리 자신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되었으면, 받았으면 하는 말은 어찌보면 조건부처럼 들리나 받은 것은 이미 지나간 완성된 사실이고, 받았으면 하는 그 말씀은 받은 그 사실을 깨달으면 알면 그런 의미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받았는데 그 사실을 알았으면, 받았으면, 이게 우리의 위치, 그래서 우리는 나라는 사람은 심히 존귀한 사람이다. 우리는 원래부터 우리가 잘난 사람입니까, 못난 사람입니까? 우리는 근본이, 근본이 어찌 됩니까? 근본이 태생적으로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근본이 굉장히 존귀한 존영한 그런 목적을 가지고 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목적대상으로 예정되었고 지음받은 우리들입니다. 굉장히 귀한 그런 우리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서 일반 바깥 세상에 나가면 우리는 모든면으로, 아이들말로 별 볼 일 없는 그런 우리들이지만은, 세상에는 워낙 잘난 사람들이 많아서, 요즘은 그 프로 하는지 또 요즘 제가 안 본지 오래되서 모르겠는데, 옛날에 좀 오래전에 고등학생들 이 벨, 무슨 벨이라 그럽니까? 골든벨 그거 하는 프로가 있었거든요? 그때 그거는 제가 녹화된 것 이런 것 한번씩 봤습니다. 그러면 고등학교 2학년, 3학년 똑똑한 아이들 1학년인데, 얼마나 어려운 교과서 문제, 시사 문제, 정치 문제, 경제 문제, 국제 문제, 어지간한 걸 내놔도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걸 집어놨던지 그거 다 아는 것 보고 참 혀를 내 둘렀습니다. 참 똑똑하다. 책을 얼마나 읽었고 얼마나 공부했으면 저런게 머릿속에 다 들어갔을까? 모르는게 없다 할 만큼 그렇게 똑똑합니다. 세상에는 그렇게 똑똑한 그런, 타고난 머리, 후천적인 노력으로 쌓은 실력있는 사람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좁은 범위안에서 참 우리끼리 보니까 조금만 탁월해도 좀 나은 것 같이 그래도 그걸 들고 바깥 세상에 나가보면 그냥 평균치도 못 미치는 그런게 우리들 대부분인데, 그러니까 세상 조건으로 따지고보면 우리는 못난 사람들입니다.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인물도 학벌도 문벌도 조건도 못난 사람들인데, 그런데 근본을 파고 들어가보면 우리는 굉장히 잘난 그런 사람들이라서 만유주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이 심리적인 그런 치료법으로 자기 최면을 걸어서 그래가지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자꾸 존귀하게 만들도록 최면을 걸고 주문을 외우고 나는 잘났다, 나는 똑똑하다, 나는 천재다 그래가지고 자기 위안을 삼고 그렇게 사는, 그렇게라도 행복한 자기를 만들어간다고 하는데 그거는 그래봐야 자기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 범위 아닌데 우리는 심히 어리석게도 너무 큰 근본과 소망과 배경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임에도 불구하고 이걸 안 믿고 이걸 다 덮어 가리고 썩혀놓고 묵혀놓고 스스로 우리 자신들이 못난 자가 되어지고 스스로 자기를 천하게 만드는 그런 것이 믿는 사람들의 대부분입니다. 알고보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태생적으로 우리는 굉장히 존귀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의 대상입니다.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근본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렇게 난 거기다 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쏟으신 그 사랑과 사랑의 발동으로 인한 희생의 그 수고와 역사와 노력과 자본이 무한으로 거기 투자되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투자된 이걸 형언하기 어렵고, 그래서 신앙은 성령의 감화가 그래서 필요합니다. 이제 말씀드린 것은, 우리는 근본적으로 존귀한 자고 또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그 사랑, 그 사랑을 입었고 그 사랑으로 인한 희생의 역사가 수고가 노력이 자본이 무한히 투자된 우리라는 것은, 이 사실은 진리입니까, 영감입니까? 제가 이제 설명드린 것은 진리입니까, 영감입니까? 이해가 안되십니까? 한번 더 말씀을 드릴까요? 우리는 근본적으로 존귀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목적 대상, 사랑의 대상입니다. 귀하고 아름다운 우리를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근본만 그런 것이 아니고 실제 이런 우리를 만드시기 위해서 투자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로 인한 희생과 수고와 노력과 자본이 무한히 투자된 우리들입니다. 이 사실은 이제 말씀드린 거는 진리입니까, 영감입니까? 이거는 진리지요. 제가 논리적으로 설명 드렸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러하다고 설명을 드렸지 않습니까? 이론적으로. 이론이니까 이치니까 진리지요. 그럼 영감은 뭡니까? 이런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만큼 내게 와닿느냐, 느껴지느냐, 깨달아지며 믿어지느냐, 실감되느냐. 그래서 좋아서 환장을 하고 미쳐서 날뛰느냐. 이게 너무 좋아가지고 내가 이런 잔가 하고 좋아가지고 하나님 아버지 찬양함이 입이 마르도록 밤새도록 찬송을 불러도 입이 안 아프고 피곤하지 않고 잠도 안오고, 모두 좀 열심히 믿는 분들 젊을때는 다 그리 믿었을껀데. 믿어가지고 밤새도록 몇시간이고 찬송부르고 기도해도 잠도 안옵니다 그때는. 잠도 안오고, 비를 맞아가면서 찬송을 해도 피곤할 줄도 모르고 비 맞는줄도 모르고 오히려 더 좋고. 모두 그렇게 믿었을건데. 그렇게 해도 그게, 그런것이 말하자면은, 그런 역사 작용이 있게 만드는 그런 감화감동, 느낌, 실감 이게 영감역사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이란 것은 진리에 바탕, 논리 이치 이론 그 바탕 그 안에 그 모든 진리가 자기에게 깨달아지고 느껴지고 실감되어지고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서 현실생활과 자기 모든 생활을 그것이 주장해나가는 이게 영감역사인데 이런것이 있어야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존영한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하는 말은, 이 사실을 깨달으면, 이제 말씀드린 이런 배경을 알고 이걸 깨달았으면 하는 그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총각으로 살 때, 처녀로 살때는 혼자니까 자유롭게 살았지만은 부부로 상대가 생겼으면 이제는 모든 면을 상대입장을 생각을 하고 상대방과 함께 그렇게 해야 하지 않느냐. 결혼했으면, 아이를 낳아서 부모가 되었으면, 회사에 직원으로 다닐때하고 구멍가게라도 사장이 되면 마음가짐이 틀립니다. 이제는 사장이 되었으면, 이제는 한계급 올라갔으면, 그러면 그 위치가 사람을 만든다고 우리들의 위치가 존영하니까 이 사실을 알고 깨달아졌으면 그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어떻게 하라고요?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것이라는 것은 상대적이고 평가적입니다. 위엣 것이니까 높은 것이겠고 반대는 아랫 것이니까 땅엣 것이겠지요. 땅엣 것이라 말은 세상 것이겠고 위엣 것이라 말은 하늘의 것이겠고. 그러면 아랫 것은 세상 것이니까 이거는 사망선 아래, 범죄 아래, 사망 아래, 저주 아래 있는 다 유한하고 불완전하고 또 육체적이고 또 세월속에 다 없어질 소멸되어질 이런 것들이겠고 위엣 것은 하늘의 것이니까 이거는 범죄함을 넘어서고 사망과 저주를 초월한 이거는 영원하고 완전하고 무한하고 불변의 것들 이런 것들이겠지요. 이런것들이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고 좀 생각해 보십시다.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거기는 위엣 것이 있는 그곳입니다. 위엣 것이 있는 곳이니까 어디겠습니까? 천국이겠지요.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느니라. 이게 참 묘한게, 왜 우리에게 위엣 것을 찾으라 그래놓고 우리 위치를 너희가 그리스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우리들의 위치를 우리의 입장, 우리의 근본 본분을 깨우치고, 그리고 위엣 것을 찾으라 말씀하시고 다시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느니라 이 말씀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거는 제가 설교 준비할때는 몰랐는데 설교하다 보니까 이렇게 연결이 됐습니다. 어떻게 되는가 보니까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리스도가 바로 위엣 것을 찾아가지고 아버지 우편에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니까 바로 우리의 나아갈 목표라는 말이고 우리의 소망이라 그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니 그것을 보면서 그리 향해서 나아가라 그말이 되겠지요.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그러면 그리스도가 어떻게 거기 앉아 계십니까? 그리스도가 앉아 계시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하나님이지만은 2위 성자 그리스도의 그 직책으로 성부 하나님이 맡기신 인간 대속의 역사 사명 맡은 책임 그 책임을 감당하면은 무한한 낮아짐의 희생, 가난해짐의 희생, 고난의 희생, 육체 죽으심의 희생, 또 많은 수없는 수고, 마귀와의 수많은 그런 전투 이런걸 다 감당했으니까 책임과 본분을 당신의 전부를 다 드려서 완수하고 악령과의 모든 전투를, 위엣 것을 찾으므로 완전히 승리하고 앉은 자리가 하나님 우편 자리고 그 우편 자리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 전부를 하나님 대신해서 통치하고 다스리는 그 자리에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런데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그거하고 위엣 것을 찾는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전부를 다 드려서 책임 본분을 완수하고 모든 전투 승리하고 그 자리에 앉으신 것처럼, 우리들이 위엣 것을 찾고 찾고 마련해나아가면 우리들의 갈 자리가 바로 거기다, 거기가 바로 우리 목표고 우리 소망이고 우리들의 나아갈 바다, 그러면 우리가 각자에게 맡겨주신 책임 의무 본분을 위엣 것을 생각하고 찾으므로 다 감당을 하고, 우리 앞에 닥치는 모든 악령과의 전투, 죄와의 전투, 사망과의 전투, 자기 자신과의 전투를 능히 승리로 다 승리하고 나면 우리도 그리스도 우편에 앉아서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내가 상속받아서 주님을 대신해서 모든 것을 통치하고 다스리게 되어진다 이것이 우리들의 소망이다 그말입니다.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느니라. 우리들이 나아갈 소망입니다.
그리고나서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아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생각이라 말은 거기에 마음을 두는 것이고 관심을 두는 것이고 계산을 대는 것이고 수지타산을 대는 것이고, 그러니까 위엣 것에 대해서는 가치를 두고 거기 마음을 두고 또 관심을 두고 손익계산을 따져보고 이래 하고, 그러나 땅엣 것에 대해서는 막말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거기 대해서는 너희들이 관심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마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뭐겠습니까? 위엣 것 아니겠습니까? 위엣 것입니다. 그거 구하는 거기만 우리가 힘쓸 것이지 그것만 하면, 그런 비유가 나옵디다. 회사 다니는 사람이, 회사에 취업을 한 사람이 사원인데, 그 사원이 회사 출근해서 ‘보자, 집에 있는 아내가 잘 지내고 있을까? 또 빨래는 하고 있는가? 아이들 학교에서 공부는 잘하고 있는가? 오늘 저녁 반찬은 뭘 먹는가? 먹을 건 있는가?’ 회사에 출근해서 그 회사에 고용되고 회사에서 월급받고 일하는 사람이 회사에 출근해서 일은 안하고 아내만 생각을 하고 자식만 생각을 하고 집안일만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자꾸 하다 보면 그 회사 사원의 월급이나 직급이 올라갑니까, 내려갑니까? 어찌 됩니까? 회사에 다니는 회사사원이 회사에 출근해서 회사 업무는 뒷전이고 집안일만 자꾸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회사에서 직급이나 월급이 올라가겠습니까, 내려가겠습니까? 일이 제대로 안되니까 내려 가겠지요. 내려가다 나중에는 좇겨나겠지요. ‘너 필요없다. 회사에 왔으면 회사일을 해야되지.’ 반대로 한 사람은 출근해가지고 가정이나 이런건 일단 생각지 아니하고, 무책임한 사람 아닌데, 죽어나 사나 회사일만 죽자 사자 합니다. 퇴근시간 됐는데, 퇴근할 생각도 안하고 일하고 있습니다. ‘퇴근 안해? 얼른 집에 가서 가족들 돌봐야지’ ‘일이 지금 밀렸습니다. 중요한 것 밀렸습니다.’ 그렇게 죽자사자 매달리면 그 사람 직급 월급이 올라가겠습니까, 내려가겠습니까? 사장이면 그런 사람은 월급 올려주고 직급 올려주고 쓰지 않겠습니까? 시대가 변해 그것 다른 것도 생각하겠지만은. 그러니까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일꾼이 저 먹을 것을 염려하면서 무슨 일을 하겠느냐. 군인이 제가 제돈 들여서 군인 가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자기 몸 바쳐서 총 들고 적군과 싸우고 있으면 거기 보급품은 나라에서 알아서 다 챙겨준다 그말입니다. 알아서 다 챙겨준다. 일꾼이 열심히 일 하고 있으면 먹을 것 월급은 회사에서 알아서 챙겨준다 그말입니다.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는 아버지께서 알아서 챙겨주신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위엣 것을 찾으면 땅엣 것은, 그러니까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아라. 땅엣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인데 그거는 잘되든지 못되든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지 못 받는지 이걸 따져도 위엣 것하고 연관되서 따져봐야 됩니다. 그거는 상관없다. 내가 멸시받든 천대받든 조롱받든 일단 그거는 두고, 나는 위엣 것만. 다른 사람이 나를 칭찬하든지 손가락질하든지 일단 두고 나는 위엣 것만. 내가 월급이 올라가든 내려가든 그건 두고 위엣 것만. 위엣 것만 찾으면 세상 아랫 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시니까 위엣 것을 생각하고 위엣 것에 가치두고 위엣 것에 관심 두고 위엣 것에 마음을 두고 그것을 계산대서 오늘 하루 수입에 위엣 것은 어찌 됐느냐. 내가 위엣 것을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 마련했느냐 못했느냐 또 얼마만큼 되어졌느냐, 위엣 것으로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 거기 계산대지 이 세상 그런 것은 아예 관심 두지 말아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아라. 왜 그래야 됩니까? 이는 너희가 죽었고, 여기 죽었다는 것은 땅엣 것을 생각하는 그 사람이 죽었다는 겁니다. 땅엣 것 생각하는 육체로 사는 그 사람이 옛사람인데 그 사람은 주님 죽으심에 함께 죽었고, 이는 너희가 죽었고, 이거는 죽었고, 너희 생명 이 생명은 다시 산 생명이니까 중생된 생명이고 하나님과 연결된 그 생명이고, 그런데 그 생명이, 너희 생명이 중생된 생명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 생명이란 것은 모든 움직임의 근본 원동이 뿌리가 생명이지요. 인간의 모든 활동은 전부 생명에서 다 나오는 겁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된 중생된 그 생명인데, 이 생명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어졌느냐?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어졌느냐?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 생명이 종자적인 생명이 우리가 있게 됐습니까?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었습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생명이 있게 되었습니다. 너희 생명이 하나님과 연결된, 중생된 영생하는 영생에 원동이 되고 바탕이 되어지는 그 생명이, 하나님과 연결이, 이는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그러면 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이 생명을 종자적으로 주셨고, 종자적으로 주신 그리스도가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이 생명을 영원토록 장성하는 그 생명으로 길러서 완전케 온전케 만드시기 위해서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가 함께 동참을 해서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그러면 그리스도에 대속이란 것은 과거에 그리스도가 당신의 전부를 드려서 우리를 대속해서 대속을 이루셨고, 뿐만 아니고 미래 영원토록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고 우리의 전부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다 그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라. 감취었다는 뜻은 세가지로 생각해보면 하나는 너무 존귀해서 깊이 숨겨놨습니다. 너무 귀한 것이라서 깊숙이 숨겨뒀으니까 감취었고, 우리들의 생명 이게 너무 귀한 것이라서 감취었고, 또 두 번째는 세상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니까 세상이 알지 못하도록, 아무나 알 수 없도록 세상이 모르니까 감취었고, 또 세 번째는 아무도 해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다 이런 의미로 감취었음이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취인 것이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종자적으로 하나님과 연결시켜주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앞에 감취어서 영원토록 그 안에서 하나님의 보호 아래서 존귀하게 세상이 알지 못하게 그렇게 영원히 자라가게 된다. 영원히 자라가는데 영원히 자라가는 그런 영원의 자람에 그 종자, 기본적인 종자와 영원의 종자가, 자 또 한번 해볼까요? 종자가 있는데, 이게 제 주관인지 좀 판단해 주십시오. 기본적인 종자와 영원의 종자 같습니까, 다릅니까? 이 생명이 있는데 종자적인 생명이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이 기본적인 종자적인 생명이 있고 영원의 종자적인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면 기본적인 종자 생명은 무엇입니까? 이거는 중생된 생명이겠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러면 영원의 종자적인 생명은 무엇입니까? 이 땅위에 사는 동안에 평생 길러놓은 그 생명의 양이겠습니다. 그게 영원한 생명의 종자. 그런데 그래서 기본적인 생명으로 그리스도가 이 생명으로 하나님과 연결시켜진 이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취어있고, 이 생명이 감취어있는 그 상태에서 이 땅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주님 재림하실 그때까지 개인으로 말하면 이 땅에서 세상 떠나는 그날까지 하나님 안에 감취어서 이것이 그대로 영원의 종자로 점점 만들어져가고 자라가다가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이리 되어있다가 그다음 4절에,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명, 그리스도는 우리 생명입니다. 자 이거 같이 한번 해보시겠습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 우리 생명이라 말은 무엇이라 말입니까? 생명이라 말을 다른 말로 말하면 한마디로 딱 바꿔보시지요.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 그 말을 생명을 다른 말로 바꿔보시지요, 무엇입니까? 000 집사님 말씀해 보시지요? 우리의 구원이신. 틀린 말은 아닌데 제가 생각하는 각도가 아닙니다. 표현이 아닙니다. 생명이라는 그 생명의 역할을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겠지요. 생명은 무엇입니까? 생명은 전부 아닙니까, 전부. 생명은 전부입니다. 우리의 전부이신 그리스도. 소망이며 기쁨이며 존귀며 영광이며 행복이며 성공이며 보는 것이며 듣는 것이며 말하는 것이며 전부다가 생명에서 다 나오는 겁니다. 생명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생명 있으면 다 있는 것이고. 우리 생명이라 그말은 우리의 전부라.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나의 생명 전부되신 그 주님,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우리 전부가 되시는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께서,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와 끊어지면 우리는 죽은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무가 너희는 포도나무 가지라. 나는 포도나무 둥지고 너희는 가지라. 가지가 둥지에서 끊어지면 그걸로 끝나는 것처럼 생명이신 주님과 끊어지면 우리는 그날로 다 끝입니다. 늘 연결되어있어야 되지요. 그러니까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데, 지금은 그리스도가 감취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라 그래도 사람들은 암행어사가 신분을 감추니까 자기 신분을 감추고 아주 큰 권세 임금님의 특명을 받은 임금님의 대리니까 아주 임금님 대행인데, 막강한 권력 그 앞에는 그 누구도 감히 맞서지 못하는데 그런 권력을 가졌으나 조사를 위해서 남루하게 차려입고 거지 차림으로 신분을 감추니까 깔보고 멸시하고 무시하고 그리하지만은 그 사람이 암행어사 마패 들고 자기 신분 밝히고 나타날때는 산천초목이 벌벌 떤다 그러지 않습니까. 이것처럼 지금은 그리스도가 하나님 안에 감취었습니다. 또 누구 감취었습니까? 그리스도가 감취었고 또 누가 감취었습니까? 우리도 감취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모릅니다. 모르니까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줄 모르니까 벌로 날뛰는 것처럼 세상은 모르는데,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게 되면 그때는 산천초목이 아니고 우주가 벌벌 떨고 모든게 다 뒤집어지는 그때가 되는데, 그런데 그때 나타날 때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 어떻게 나타난다고요? 어떻게 나타납니까?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영광 중에 참, 이 영광이라는 표현이 사람들이 은혜 받은게 다 다르지만은 저는 백목사님 설교중에 은혜 받은게 너무 많지만은 그중에 하나 ‘영광’이라는 이 단어 표현에서 참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영광이란 것은 사람이 그 누구도, 우리 구원은 다른 말로 말하면 무엇입니까? 우리 구원은 영광의 구원이고 영광의 찬미입니다. 영광이란 것은 찬송입니다, 찬송. 찬송이고 사은의 노래입니다, 찬송은. 사은의 노래. 그 사은의 노래는 거기에 섞임이 없는 겁니다. 거기는 외식이 없고 이중이 없고 가식이 없고 다른 것이 섞여있지 않습니다. 다른 것이 섞여있지 않습니다. 다른 것이 섞여있는 것은 찬송이 아닙니다. 영광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영광은 1등을 했던지, 적을 물리쳐 이겼던지, 경쟁에서 이겼던지, 뭔가 달성했던지 이 세상에서 얻는 영광은 그 영광 뒤에는 많은 적이 있고 거기는 거짓이 들어있고 외식이 있고 가식이 다 들어있는 그런 것이 없는 세상 영광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영광, 영광중에 나타날 이 영광은 섞임없는 감사고 섞임없는 찬송입니다. 인간관계에서 그런 예를 들지요. 하만이죠. 하만이 그 큰 나라에 총리가 됐으니까 부러울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모르드개가 자기한테 절 하거나 말거나 그 한 사람 무시하면 될 거 아니겠습니까? 무시하고 하거나 말거나 무시하고 하면 되는데, 사람이란 것은 그게 안된다 그말이지요. 다 전부 찬성하는데 모르드개 한 사람이 딱 걸리니까 또 악령이 역사하니까 그게 괘씸해서 못 견뎌서 결국 그 모르드개 한 사람 그 수많은 사람이 전부 자기 밑에 굴복하고 자기가 임금처럼 그렇게 되어있는 상태니까 모르드개 하나 무시해도 될건데, 그 한사람을 무시하지 못하고 그 한사람 기어코 없애버리려 하다가 자기 자신과 집안 전부가 다 절단이 났잖습니까. 사람이란 것은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사람이 다 좋은데 한 사람이 나하고 반대하면 그 사람 때문에 언제든지 그 완벽하게 원만하지 못한, 완전한 그런 맑고 깨끗한 그런 것은 나오지 못합니다. 항상 그것 때문에 거리끼고, 그러기 때문에 너희가 예물 드리다가 사람으로 더불어 불목이 생각나면 먼저 사화하고 그다음에 예물 드리란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인간관계. 인간관계 뿐만 아니고 다른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내가 그에게 받은 은혜가 커서 영광돌리려고 하는데, 감사하는데, 감사하는데 그에 대해서 뭔가 하나 걸리는 것이 있으면 내가 그분에게 받은 은혜가 커서 참 감사한데 이거 하나는 아니더라. 이게 걸리면 전체적으로 진정한 감사는 나올수가 없는 겁니다. 그게 영광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영광이란 것은 이거는 만에 하나 억만에 하나 억억만에 하나도 여기는 다른 것이 섞여있지 않은 말그대로 참 영광의 찬미. 전적 감사, 영광 돌리는 그 영광입니다. 이거는 세상에서 없는 겁니다. 모형들이 하나씩 있어도 진정 참 없는 것이고 이거는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영광중에 나타나는데, 그 영광중에 나타날 때 너희도, 너희가 누구라고요? 우리도 그와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그러니까 그분이 나를 그렇게 그런 위치가 되도록 모든 기반을 다 닦았고 그분이 도왔고 그분이 또 소망 목표가 되었고 함께 했고 그래서 끝까지 그분과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이것이 우리 소망입니다. 우리들의 힘쓸 바고. 그러기 때문에 알고나면 기독교 신앙이란 것은 이보다 더 평가적으로 더 가치있고 존귀한 그 영광스러운 것이 없는 것이 신앙세계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것, 아름다운 것 귀한 것,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이거는 자연을 노래하는 것이지만은 이걸 신령한 면으로 들어가도 그렇고,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구주 예수님의 아름다우심 이 땅 위에 다시 유가 없도다- 그분의 그 아름다움이란 것은 외모의 아름다움이야 그거야 사람들의 보는 시각에 따라 다 다릅니다. 행복지수라는 것을 두고 어제 신문에 보니까 조사 했다 그러는데, 아주 인물 잘난 상위 10프로 하고 아주 못난 하위 10프로 하고 두 그룹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남녀로 만들어서 인물 때문에 얼마나 행복하냐를 따져보니까 인물 때문에 행복한 것은 전혀 상관이 없더랍니다. 오히려 인물 못난 쪽이 조금 더 이유는 모르겠지만은 더 행복하다 더랍니다. 그 사람들과 함께 사는 사람이. 그러니까 육체 껍데기 아름다움이란 이거는 가치가 없는 겁니다. 이거는 주관적이고 시대 따라 다르고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것이고 또 이거는 세월 속에 다 변해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 사람의 인격의 아름다움, 이거는 참 아름다움이고 그 인격의 아름다움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그 영광 이 아름다움은 참 형언하기 어려운, 이런 것이 우리에게 깨달아지고 느껴지는 걸 가리켜서 영감이라 그리 말합니다. 우리 소망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소망을 가지고 사는 우리들인데, 그래서 결론으로 잠깐 정리하면, 위엣 것, 이 모든 것이 다 위엣 것 땅엣 것이 나오는데, 그러기 때문에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 것을 생각해라. 위엣 것이 무엇인가? 좀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게 말한다면 위엣 것이 무엇이며 아랫 것이 무엇이겠는가? 위엣 것이라 말했으니까 뭔가 좀 형체를 가진 그런 것 같이 생각될 수 있겠지만은 위엣 것이라 말은 말그대로 아랫 것이 아니고 위엣 것이라 말인데 위엣 것은 하늘의 것이겠고 아랫 것은 땅엣 것이겠고 땅 아래 찾는다면 바다의 것이라 그렇게 예를 들어 볼 수 있겠는데. 저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은 설교록에 보니까 백목사님 생각을 하고 하신 말씀인데, 땅에 육지에 있는 모든 것이 바닷속에도 다 있다 그럽니다. 육지에 산이 있듯이 바다에도 산이 있고, 육지에 동물이 있듯이, 말이 있지요? 바다에 뭐가 있습니까? 해마가 있지요, 해마. 육지에 사자가 있지요. 바닷속에도 그런 사자 있지요. 있습니다. 다 있답니다 그런게. 그런데 모양은 다르고 그런데 육지에 있는 것보다 바다에 있는 것은 좀더 존재적으로 기능적으로 좀 온전하지 못한 좀 수준이 낮은 그런 것이 바다속에 있는 것들이고, 바다에 있는 것 육지에 다 있는데 육지에 있는 것은 좀 더 온전하며 더 가치가 차원이 높은 것들이고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전부 천국에도 하늘에도 다 있는데, 다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 소가 있으니 천국에 소 있고 이런 말씀이 아니고 이 세상에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사람이 가진 모든 요소, 이 세상에 욕심이 있으니까 하늘에도 욕심이 있고 이 세상에 실력이 있으니까 하늘에 실력이 있고, 세상에 영광과 수치 있듯이 하늘나라도 영광과 수치가 있고 세상에 승패가 있듯이 하늘에 승패가 있고 세상에 존귀 대우가 있듯이 하늘에도 존귀 대우가 있으니 그 하늘나라 이 모든 것들, 하늘나라 실력 대우 영광 존귀 승패 행복 이런 모든 것들은 이 세상 것하고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한 것들이니 위엣 것을 찾으라는 그말은 바로 이런 세상에 있는 그런 이 세상 행복에 가치두고 그런 것 찾지 말고 하늘에 영원한 행복을 찾아라. 거기 가치두고 그걸 마련해라. 이 세상 성공도 세상에서 귀하다 하나 세상 성공에 가치두지 말고 그걸 생각하고 그것을 마련하려 하지 말고 위엣 것 하늘의 성공을 마련해라. 이 세상에 존영 대우를 찾고 그걸 마련하려 하지 말고 영원한 하늘나라 천국의 대우와 존영 그 실력을 마련해라. 그것이 영원한 것이며 무한한 것이며 완전한 것이니까 그걸 마련해라 그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마련하는 것입니까? 그것 마련하는 것은 말씀이지요. 말씀대로 사는 것이고, 또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순종으로 사는 것이고, 신앙 양심으로 사는 것이고, 이런 것이 다 위엣 것을 찾는 겁니다. 자기 주장대로 자기 주관대고 자기 감정대로 자기 욕심대로 자기 취미대로 그리 하지 말고 취미도 이 세상 취미를 가지지 말고 위에 취미를 가져라, 고상한 취미를 가져라. 그러니까 이 세상 자기와 현실 환경에 사람들과 사건, 그 주변 환경에 피동되서 그렇게 살지 말고 하늘에 피동이 되어져라. 그것이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마련하는 방법이고 길이다. 그리 살면 그 생활은 그게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이는 그런 생명이 되고 그 안에서 감취어진 그 안에서 점점 이게 온전해지고 튼튼해지고 자라가다가 그래가지고 내가 끝날 때, 주님 재림하실 그때, 영광 중에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나게 될거니까 그리 살아라 말씀을 하신 겁니다. 오늘 이 말씀에서 우리는 좀 시야를 넓히고 높여서 멀리보고 저 높을 곳을 향하여 높이 보고 길게 보고 전체를 보면서 사람이 나이를 먹을때 나이 헛 먹었다 그말은 참 욕입니다. 우리가 세월 속에서 늙어져 가면서 나이 들어가면서 나이 드는 값을 세상적으로도 해야되고 신앙적으로도 해야되고 믿어가는 연조가 많아지면 믿어가는 신앙의 연조가 그게 많아질수록 우리는 거기에 걸맞는 우리 자신들로 변화가 되어져 가야 됩니다. 우리에게 주신 세월은 유한합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세월이 이십대 세월과 사십대 세월은 틀리고, 삼십대 주어진 일년과 육십대 주어진 일년은 완전히 틀립니다. 삼십대 일년과 칠십대 일년은 천지차이입니다. 삼십대 일년은 큰 일 얼마든지 할 수 있으나 칠십대 팔십대 일년은 자기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드는 그런 일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월 아끼고 조금이라도 젊을때 힘있을때 우리는 위엣 것을 찾고 마련하고 멀리보며 준비하는 그런 우리가 되어야 되지, 세월 허송하지 않도록 어쨌든 소망을 하늘에 두고 우리 신앙을 다시 한번 깨우쳐 보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땅엣 것은 다 지나가는 겁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다. 그 모든 영광은 풀에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위엣 것을 생각하고 위엣 것 찾는 그것만이 가치있고 영원히 남아있을 것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 받은 걸 생각을 하고 위엣 것을 찾읍시다.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우리 생명이 그리스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다는 이 비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이 비밀을 생각하면서 위엣 것을 찾는 생활 힘 쓰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