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5-주후(눅14:25-27)
자기 십자가2014-06-16조회 302추천 26
-------------------------------------------
설교 원문
(설교원문)
20140615 주후
누가복음 14:25-27
기독교 신앙에 본질이라 할지, 성경에 가르쳐주시는 우리 소망의 실상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에 성경에 기록해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가감없이 받아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또 소망을 이루어감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그런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타락한 인간들 속에는 하나같이 전부 자기 속에 자기 주관이라는 것이 들어있고 주관이란 것은 자기 주관이기 때문에 그 자기 주관은 대개 하나님의 말씀과 배치되는 것이 많습니다. 자기 주관은 다시 말하면 자기고 자기의 기존지식이라 그리 말하고 또 좀 어려운 말로 선입적인 관념이라 그리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없이 또는 하나님 말씀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타락한 상태로 어릴때부터 살아온 사람들의 경험과 체험, 하나님의 지식이 아닌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역한 인간들의 그 뱀에게서 나온 그 지식을 근거로 해서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자기가 보고 듣고 배우고 또 경험하고 체험한 그 지식과 그 경험 체험 그게 자기라는 사람으로 만들어졌고 그게 자기 주관이 되어있는데 그것은 전부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과 대립이 되고 배치되고 반대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여러군데 보면 여기는 그 말씀이 없는데 다른 곳에 보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그말은 내나 여전히 ‘주님 제자가 되려거든’ 그 말과 같은 말인데, 조건이 첫째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 말씀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도 보면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첫째 자기를 부인하고 그다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쫓으라 말씀하셨는데 그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이 자기 속에 자기 자신 자기 주관을 부인하라는 말이고 자기 주관을 만든 가장 근본 뿌리된 그 요소가 자기 인간 지식입니다. 인간 지식이 전부 자기를 인간 지식의 사람을 만들고 그게 자기라는 주관이 되고 그 주관은 전부 자기의 경험이며 체험이며 경륜이며 쌓여진 보고 듣고 배운 그런 것들이고 그것이 그대로 살아서 자기라는 사람을 만들어 있습니다. 똘똘 뭉쳐서 그게 자기가 되어졌기 때문에 그 자기를 부인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받아드릴수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은, 누구든지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에 더하면 여기 기록된 말씀 외에 다른 말을 더하면 이 책에 기록된 재앙을 더하겠고 이 말씀에서 빼면 구원에서 빼버리겠다 그리 말씀하셔서 신구약 성경 말씀은 가감없는 하나님 말씀으로 확정을 지었고 또 다른 곳에 보면 누구든지 이 말씀을 말하자면은 빼놓고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고 말씀대로 행하면서 말씀을 가르치면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그리 말씀을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에 기록된 사실을 물론 어떤 것은 많은 말씀이 해석이 필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계시로 기록해준 말씀이고 때로는 상징이고 비유고 구원의 도리 말씀이기 때문에 이걸 말하자면은 벼를 갖다가 타작을 해서 방아를 찧어가지고 그다음 그래 먹어도 되지만은 쌀을 만들어 먹어도 되지만은 먹기 어려우니까 쌀을 밥을 해가지고 먹는 것처럼, 밥도 먹기 어려운 그런 어린 아이들에게는 죽을 쒀서 그렇게 먹고 배탈이 나면 밥을 갈아서 미음을 끓여먹고 이렇게 하는 것처럼 성경은 양식이고 말씀인데 너무 어려운 내용이 많아서 해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해석도 우리가 다 몰라도 들어가서 원리를 알고 성경이 말씀하신 그 방법대로 해석을 하면은 어지간히 알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언어는 원어가 히브리어고 헬라어로 기록됐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들을때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다. 한국 사람에게 영어나 중국어는 불어같은 것은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에게 한국어 국어는 일상에 쓰는 말이고 보통 말이지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한국 사람에게 영어가 어렵지 영어권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어는 결코 어렵지를 아니합니다. 히브리어는 우리는 외국인이니까 히브리어가 어렵지만은 그 나라 사람들 또 그 당시에 쓰는 그 말은 보편적인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 언어는 어려운 말로 기록된 것이 아니고 보편적인 언어로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설교도 어려운 말로 설교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틀렸다고 말은 못해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가장 쉽게 대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써서 설교도 하는 것이 맞고 성경도 그렇게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무식이 상관이 없고 이거는 잘나고 못남에 상관없이 진실하게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실을 사실 그대로 믿고 성경이 말씀하신 소개하는 하나님의 실존을 정말 그대로 믿고 하나님의 모든 구원 역사를 그대로 믿으므로 그대로 받아드리면서 이 성경을 살펴보면 어지간하면 알 수 있도록 그렇게 되어져 있습니다. 또 모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종들을 세우셔서 특별히 영감을 통해서 밝혀서 자기가 힘만 쓰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게 되어있는데 사람들이 노력하지 않아서 모르는 것이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방향을 잘못 잡아서 엉뚱하게 가서 모르는 것이고 그러니까 진실하게 힘만 쓰면 구원 도리는 바로 깨달을 수 있고 그리고 아는대로 힘써 실행만 하면 모르는 것은 다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방법을 해두셨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사실 그대로 믿고 받아드리고 그다음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드리면서 이 말씀에 기록해주신 구원 세계나 구원에 소망을 우리가 생각해보면 너무도 크기 때문에 이 소망 이 구원외에 가치둘만한 것이 없는 것이 양심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현재 모습을 보고 우리 과거 살아온 모습과 살아온 모습이 만든 우리 현재 모습을 보면 소망의 실상과 우리 자신의 현모습을 보면은 낙심 낙망되기가 쉽습니다. 그래도 또 다시 우리가 또 발버둥을 치는 것은 낙망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또 다시 일어서고 하는 겁니다. 설교에서 어떤 사람들은 설교시간에 큰소리 치고 힘있게 강단을 두드리고 아주 목청껏 외치는 그런 설교가들의 그 외침의 부류가 종류가 두 종류가 있어서 하나는 많은 경우 자기 주관 인간의 감정 거기 도취되가지고 강단을 두드리고 힘있게 설교하는 그런 경우도 허다하게 많이 있습니다. 미국에 흑인 목사님인 킹 목사님이라는 그분은 흑인 해방 운동주의자입니다. 인권주의자인데 목사님이지요. 그런데 그분은 연설을 그렇게 잘하고 설교를 그리 잘했답니다. 그런데 지금 그분의 전기를 보든지 가만 읽어보면은 그분은 기독교인권주의자지 신앙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런 분들은. 그런데도 그분은 설교를 힘있게 하고 아주 청중들을 감동시키고 변화시켰다 그러는데 그 감동은 전부 인간적인 감동 인간의 변화지 신앙적인 그런 변화는 별로 많지를 아니한데 그런 경우는 허다하게 많이 있습니다. 웅변학원에 가서 웅변가들의 그 연설을 들어보면 마음이 감동이 되고 가슴이 울리고 그만 눈물이 쏟아지고 흥분이 되어지는 그런 경우는 얼마든지 들을 수 있고 부흥회 가면은 설교가들이 여러 가지 감정 섞인 그런 설교를 해서 청중들을 하여금 전재산을 몽땅 다 바치게 만드는 그런 기술들을 아주 많습니다. 그런 거는 참된 신앙의 설교라든지 그런 영감의 역사가 아닙니다 그거는. 거의 대개는 그렇습니다. 물론 그중에 있을 수 있지만은 대개 다 그렇습니다. 어떤 경우는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 말씀을 바탕 근거하고 이 말씀이 소개하는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그분 자체와 그분의 지능과 그분의 그 성품과 속성 그분의 구원의 역사 그 구원역사의 어떠함과 그 과정 전개된 과정 과정 목적과 예정 창조 섭리 도성인신의 역사 사활의 대속 역사와 성령과 진리 역사와 부활후의 하늘나라 구원의 소망 이런 것을 생각해 연구해서 연계해가지고 논리로 따져 들어갈 때 기도 많이 하고 본인의 생활과 하나되어가지고 설교하게 되면은 힘있게 그렇게 아주 뭐 영감역사로 그렇게 설교를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역사를 하지 못하는 것은 다 몰라서 그런 것이고 또 알아도 실상을 이루지 못하니까 우리는 늘 힘 없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인데 우리가 다 약하니까 그 가운데서 자꾸 힘을 쓰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문제는 말씀을 가감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은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행하도록 인식을 그래가지고 해야 됩니다. 사람이 아무리 세월이 지나가고 환경이 바뀌고 시대가 변해도 변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 말씀은 변할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성경에 말씀하신 그런 것들은 변할 수가 없는 겁니다. 노아시대와 지금 시대는 분명히 시대가 4천년 지났기 때문에 다르고 주님 계시던 그때와 지금은 다릅니다. 어떤 분이 공회 홈페이지에 보니까 백목사님 설교에 보면은 많은 부분이 6ㆍ25 전쟁 당시에 전투, 일제 시대때 일본 사람들의 신앙 탄압과 거기 대한 전투, 이런 전투에 대한 신앙 기록이 많고 그런 성격의 신앙 투쟁을 해야 되는 것이 많았는데 지금은 시대적으로 보면은 남북전쟁에 가능성이 별로 없고 또 전쟁이 나면 북한 쪽에서 그냥 전투하다가 북한이 망하고 말지, 그게 아는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 그리 다 알고 그게 정설이라 그럽니다. 전쟁 났다하면 남북은 통일이 되고 북한은 망하기 때문에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는 그게 아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그래도 인간세계 역사는 사람이 아는게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어찌될지 모르지만은 일반적으로 되어진 상황을 볼때 그런데, 그렇다고해서 지금 일제시대 신사참배처럼 그런 것이 있을리는 없는 것이고 국기배례 때문에 탄압이 있었지만은 지금은 그것도 별로 탄압이 없고, 이러니까 지금 시대에 신앙의 전투는 그 대상이 무엇이겠는가? 교회에서 학생들에게 교인들에게 신앙의 전투를 할때 무엇을 대상으로 신앙 전투를 하라고 그렇게 전해야 되겠는가 하는 그런 질문을 올려놓은 것을 봤습니다. 그것이 당연한 질문인 것이고 굉장히 중요한 질문인데 그러기 때문에 시대를 봐야되는 겁니다.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오전에도 소위 이름이 더러운 표현인데 ‘동성애’라고, 참 입에 담기 더러운 표현입니다. 남자가 남자끼리 결혼해도 되지 않느냐? 이게 초기에는 민망해서 부끄러워서 고개만 살짝 내밀다가 점점 이게 일반화되서 이제는 대놓고 목소리를 대가리를 쳐들고 소리를 높이고 있다는 말이지요. ... 그런데 어쨌든 성경은 그런것은 더러운 짓이라고 기록해놨습니다. 그러니까 시대가 그런 시대니까 우리들의 신앙 투쟁은 바로 그런 것이 우리 신앙 투쟁입니다. 언제든지 옛날이나 지금이나 기독교와 대립되는 그 대상은 세상이고 그 세상은 그때그때 그 시대시대에 세상이고 그 시대를 다 붙들고 이끌고 있는 그 시대의 조류, 신앙가 반대되고 대립되는 그런 것들이 다, 유행이라든지 시대 분위기 흐름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전부 신앙생활에 반대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문제는 세상이 그렇게 말세가 되어져갈수록 점점 노아시대때 그때 모습,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된 세상이 망하게 되는 그때, 노아시대는 말세였고 그때 모습, 또 그 이후에 도시가 완전히 다 망해버린 소돔 고모라 그 모습, 그다음 주님 초림하실 때 그때 모습, 이런 모습들이 다 말세에 되어질 그런 모습입니다. 지금 모습은 딱 그런 모습에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를 않습니다. 그럴때 그 시대를 바로 보고 그 시대를 발아래 밟고 호령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거기 끌려가지는 아니하고 발을 버투고 울어가면서라도 따라가면 안된다는 것을 알기는 알고 괴롭기라도 하게 되면 그런 것은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고 진실하게 믿는 신앙이 아니면 알기도 어렵고 모릅니다. 앞으로 모르기는 몰라도 교회 안에서도 그런 것을 찬동하는 그런 목소리들이 나올 겁니다. 순 전부 가짜 목사들 그런 사람의 말이 아마 앞으로도 나오게 될 겁니다. 참 보통 문제가 아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못난 것은 상관이 없고 못 배워서 무식한 것도 상관이 없고 또 모든 면에 실력 없고 부족한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지만은 하나님 앞에 진실해야 되고 성경 말씀을 성경 그대로 받아드리는 그런 우리가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런 말씀을 바탕에 깔고 오늘 말씀을 생각해보면 허다한 무리가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허다하다 말은 수가 많다는 말입니다. 많은데 소위 말하는 세상말에 불특정 다수들입니다. 어떤 특정 계급이 아니고 남녀노소 또 지위고하 신분의 귀천 이런 것 다 막라하고 여러종류의 여러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라갔으니 그들 향해서 그런데 그러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본다면 여기는 예외가 없다는 것이고 누구나 그 말이고 누구나인데 그 중에서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 주님에게 나아오는 사람, 사람들이 주님에게 많을때 오천명 칠천명이 나아왔는데 그들이 주님에게 나온 것은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을 겁니다.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배가 고파서 떡조가리 먹으러 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주님 앞에 병고치러 온 사람도 많을 것이고 또 뭔가 좀 새로운 말씀을 들으려고 온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고 어쨌든 예수님을 찾아 만나가지고 여러 가지 주님에게 뭔가 얻으려고 주님에게 나아온 그런 사람들 그중에서도 주님을 따라 가기를 원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 그게 말하자면은 누구든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나를 따라오려면 내 제자가 되려면 그말입니다. 주님 제자가 되려면, 그러면 신앙생활에 목적이 뭐냐? 우리 신앙의 목적은 말하자면은 여러 가지면 여러 가지 각도로 말할 수 있지만은 우리 신앙의 목적은 주님을 따라가서 주와 같이 되는 것이 우리 신앙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주님을 닮는 것이 하나님을 닮는 것이고 그게 하나님의 목적이며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 성공은 거기 있습니다. 예수 믿어서 땅의 것을 목적하는 것은 신앙의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에 소망이 있는 것이고 그 하늘의 소망의 실체는 우리 자신들이 주님 같은 자 되는 그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의 목적입니다. 그러면 주님 같이 된다는 말은 좀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오전에 몇가지 말했습니까? 자, 여반에 오전에 몇가지 말했던가요? 주님같이 되는 것은, 몇가지 말했습니까? 다섯가지요? 첫째 뭡니까? ‘인격’이라 했지요 인격. 인격이라 말은 인품, 성품, 그 사람 됨됨이라 그 뜻입니다. 예수님 같은 사람, 사람이라 말은 사람은 단번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은 오랜 세월 속에 만들어지는 겁니다. 세월이 사람을 만들고 그 세월 속에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환경에서 어떤 과정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겁니다. 말하자면 어떤 길을 걸어가느냐? 어떤 인생길, 어떤 신앙길을 걸어가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되어지는 겁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 원하시는 그대로만 살아서 하나님의 형상을 고스란히 닮은 주님의 사랑 주님의 거룩 주님의 진실 이런 것들이 하나님과 꼭 같은 하나가 된 그게 주님입니다. 예수님의 형상. 말하자면 인격, 주와 같은 인격이 되는 것이 주님 같이 되는 것이고 주님의 사랑과 내 사랑이 같아야 되고 주님의 진노와 내 진노가 같아야 되고 주님 시기 질투와 내 질투가 같아야 되고 주님의 진실과 내 진실이 같아야 되는 이런 것이 말하자면은 인격입니다. 사람 됨됨이라는 거, 쉽게 말하면. 주님 같은 인격 두 번째는 주와 같은 그 인격을 만드는 그런 요소인데, ‘사상’입니다. 사상이라는 말은 생각이라는 말이고 정신이라는 말이고 가치관이라는 말이고 뜻이라는 말입니다. 일종에 그런 그게 그의 사상주의, 그 사람을 끌고나가는 가장 주력되는 그런 지식이 바로 사상인데 그 사상 주님 가지신 그 사상, 주님 사상은 신본주의 사상이고 천국주의 사상이고 구원목적의 사상인, 모든 세상을 구원을 위해서 모든 피조물은 전부 하나님 한분만을 전부 삼는 이런것이 주님의 사상입니다, 신앙 사상. 주와 같은 사상이 되는 것이 주와 같이 되는 주님 제자 되는 것이고, 세 번째는 그래가지고 주님 사신 그 ‘생애’를 사는 겁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형체를 가져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하나님이지만은 피조물이 되셨고 또 하나님이 사람되신 지정리를 가진 인격체지만은 당신 자신의 모든 것을 완전히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붙들리고 피동되고 전부 삼은 그렇게 살았고, 하나님이지만은 완전이 낮춰서 종이되기까지 낮아졌고 고난 받고 죽으시되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고 단마음으로 그리 했고 그러면서 원죄도 없을뿐더러 본죄 하나도 없고 그렇게 온전히 다 바쳐 마친 것이 주님의 생애니까 이 생애를 따라가는, 시대와 환경은 달라도 주님이 걸어가신 그 이치를 구원의 그 길을 깨달아서 말하자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겁니다. 그것이 주와 같이 되는 겁니다. 주님은 유대인이고 우리는 한국 사람이니까 겉모습도 다를 것이고 모든게 다를지라도 그분의 인격 그분의 사상 그분의 생애는 우리가 닮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게 우리 신앙이고, 네 번째는, 이렇게 살다보면은 우리 지능의 실력이 주님의 지능같은 내 지능이 되게 됩니다. 내 지식과 지혜와 능력이 실력이 주님 같은 그런,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 혹은 교회 역사에 주님 걸어가신 그 길을 걸어간 위대한 종들마다 다 능력있는 그런 종들이 되어졌고 외부로 나타난 그 능력은 그 능력을 있게 만든 그 지식과 지혜가 바탕이 되어있는, 주님의 지능같은 그런 실력있는 그런 종들 권능있는 종들이 된 것은 주와 같이 살았기 때문에 그리 된 겁니다. 그래가지고 마지막 최종적으로는 주님이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모든 만물에 주가 된 것처럼 우리는 주님 보좌 우편에 앉아서 주님 다음으로 만물의 주가 되어지는 이것이 주와 같이 되는 것이고 이게 우리의 구원의 소망입니다. 삼성그룹에 이건희 회장처럼 된다면 어떤 면을 말합니까? 많은 사람이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 그것 참 요새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깨어났습니까? 아직 안깨어났습니까? 지금까지 안깨어났으면 문제가 있겠네요? 그분처럼 이건희씨처럼 되는 그런 소망을 가졌다면 그것은 어떤 면을 말하겠습니까? 돈이겠지요 그거는. 돈입니다. 돈이고, 어떤 위대한 과학자처럼 과학으로 이름 날린 그와 같이 되겠다 그러면 과학자 같은 그런 것이 되겠다는 말이겠고, 공자처럼 되겠다 그말은 도덕적인 그런 면으로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그런 사람이 되겠다는 그런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 같이 된다는 말은 여러 가지 면으로 예수님 같은 이런 여러 가지 면을 가지고 주와 같이 되는데, 세상에 어떤 것을 가지고 이제 말씀드린 다섯가지, 궁극적으로는 더 오래 들어가지만은 표면적으로 이천년 역사, 그 이후로 영원토록 예수의 이름은 드러나게도 마귀에게 붙들린 사람들이 현재 역사 세계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과정에서 예수라는 이름을 안좋게 말하는 그런 사람들이 더러 있으나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어가보면 예수 이름을 욕하는 사람 없을 것이고 예수 이름을 찬양하지 않고 존경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역사에 알고나면, 인간역사에만 두고봐도, 어느 인물이 예수라는 예수님 예수처럼 존경받고 또 찬송하고 영광 돌리고 영광 받는 그런 이름이 누가 있었습니까? 사람들이 알기에는 뭐 몇 대승이 나고 예수님을 같은 반열에 놓으나 거기서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보면 전혀 다른 차원인 것을 알 수 있고, 그러니까 인간 역사에 인간이 알기에도 예수라는 이름은 그렇게 위대하고 성경적으로 바로 깨닫고 나면은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이고 영원토록 빛나는 영광의 이름이 예수인데, 그 예수처럼 되는 것이 우리 소망이니까 그게 우리 목표니까 이 세상에서 어디에다 어떤 각도에 소망을 가지고 목표를 설정을 하고 나아가면 이와 같은 혹은 이와 비슷한 그런 가치있고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그런 소망이나 성공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그말이지요. 모르는 사람은 몰라도 알고나면 주님 제자 되어서 주와 같이 되는 이보다 더 귀하고 영광스럽고 높고 성공되는 것은 없는데 억만금을 가져본들 온세상을 다 차지해본들 이름을 인간 주님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인간역사에 이름을 날려본들 어떻게 해본들 이 소망 이 목적과 비할바가 아닌데, 그러기 때문에 주님 제자되는 것이 가장 큰 성공이고 영광스러운 것이고 이게 존귀한 것이 되어지는 건데 우리가 믿지 못하니까 이걸 느끼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 소망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 하나도 우리가 붙들고, 사람이 신앙생활에 잠을 잘때가 있고 암흑을 만날때가 있습니다.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별 수 없이 백목사님 같은 분들은 우리들과 다른 차원이지만은 그분도 젊었을때 그때는 한창 불을 뿜어서 전국을 다니면서 그렇게 부흥회 하고 그럴땐데도 아주 신령한 그런 뭐 앉은뱅이를 벌떡 일으키고 기적을 그냥 일으키는 그런 능력있는 그런 신앙생활하고 그렇게 일을 할때도 한때 암흑이 와서 예수 믿기가 싫다던가 그리 될 만큼 암흑을 만날때도 있었습니다. 설교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나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살아가다보면 하나님 은혜가 줄어지고 끊어져버리면 어디까지 타락하고 어두워질지 모르는 겁니다. 심령이 어두워져버리게 되면은 그만 신앙생활은 그냥 말하자면은 사람이 넋이 나간 것처럼 껍데기만 믿는 사람이지 기도해도 껍데기, 성경 읽어도 껍데기, 설교해도 껍데기 모든게 다 껍데기로 그렇게 흉내만 내고 있지 진정한 주님과 자기의 알맹이 교제는 없는 그런때가 많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걸 벗어나고 다시 빛을 받아가지고 주님과 교제가 밀접하게 살아나게 된다면, 은혜를 받게 되면은 그때는 성경이 믿어지고 믿는 세계가 바로 깨달아지게 되고, 그러고나면 이제 이 소망이라던지 구원에 대해서 확신이 서게 되면은 그 속에서 나오는 그런 속에서부터 나오는 그런 여러 가지 역사가 있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 제자 되어진 이 소망을 두고 깊이 좀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중요한 것은 명상이고 묵상이고 말씀을 붙들고 생각하는 것이고 생각은 비교하는 것이고 연구하는 것이고 평가하는 것이고 따져보는 겁니다. 그게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실질적으로. 있는 것을 가지고 없는 것을 억지로 포장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있는 것을 자꾸 찾아들어가는 겁니다. 잃어버린 문화를 자꾸 쓸어서 비로 쓸어가지고 찾아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영을 통해서 밝혀두신 진리 통해 밝혀두신 구원의 모든 세계를 말씀을 가지고 자꾸 찾아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님도 찾아 들어가고 천국도 찾아 들어가고 구원의 세계 소망도 찾아 들어가고 주님 제자되는 것도 찾아서 자꾸 안으로 들어가보는 겁니다. 들어가면은 자꾸 밝아지게 되고 밝아지면 그 속에 자기 속에 빛이 오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환하게 보이고 보이게 되면은 바로 알고 나면 확정이 서게 되고 그러고나면 거기를 가는데 힘있게 갈 수가 있는 겁니다. 주님 제자 되는 소망,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주와 같이 되려면 주님 제자가 되려면 조건을 한가지 조건과 한가지를 또 할 일을 말하셨는데 하나 조건은 미워하지 않으면, 부모도 처자도 형제자매도 자기 목숨도 미워하지 않으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이 말을 이 부분만 빼서도 문제지만은 앞뒤 문맥을 다 맞춰가지고 바로 해석을 하면 이거는 ‘~보다’ 라는 말인데 ‘보다’. 보다라는 말인데 그 보다가 비교 대상이 누구냐? 부모님과 주님을 비교해놓고 주님보다 부모를 더 사랑하면 안된다, 주님보다 처자식을 더 사랑하면 안된다, 주님보다 형제자매를 더 사랑하면 안된다, 이렇게 주장을 할때 세상 안 믿는 사람들이 이해를 하겠습니까? 어느 종교에 이런 도리가 있습니까? 세상에 기독교를 제외한 성경에서 파생된, 코란 같은거 아랍인들이 쓰는 그런 것에는 아마 이와 같은 내용이 있을 수 있을 겁니다. 내나 여기서 나간 거니까. 변질된 거니까. 그러나 그것 외에 세상에 어떤 종교도 이런거는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종교는 전부다 세상 속에서 세상에서 나온 것이고 세상이 뿌리고 세상이 근본이고 그러므로 세상에 모든 종교는 전부다 진화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세상 속에 삼켜질 수 밖에 없고 담겨질 수 밖에 없고 세상 벗어날수가 없는 것이 세상의 모든 이종교들입니다. 이종교라는 말은 다르다 말이죠. 기독교와 그들 종교는 다릅니다. 본질, 본성, 근본, 목적, 궁극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그러니까 종교는 다 같은 것으로 알고있는 이 세상 사람들과 이종교인들이 ‘보다’로 비교해서 주님보다 부모를 더 사랑하면 주님 제자가 되지 못한다, 그말은 천국에 못간다는 말하고 건설구원적으로 바로 연결이 됩니다. 주님보다 처자식을 먼저 사랑하면 주님 제자가 되지 못한다. 형제 자매 목숨까지도 그러하다 이렇게 말을 하면 이 세상이 이해를 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 이해를 하겠습니까? 자, 제가 오늘 물어보고 싶은 사람이 우리 저 000 선생님 어때요? 들었습니까? 주님보다 부모님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면 안된다, 또 앞으로 우리 00씨가 결혼해서 남편과 자녀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면 안된다 그리 될 때 사람들 이해하겠습니까? 지금 우리 000선생님은 이해가 됩니까? 쉽지 않겠지요. 000 선생님 어때요? 이해 됩니까? 논리적으로라야 성경이 있으니까 반론은 못하겠지요. 그런데 실질적으로 과연 이것이 과연 하겠으며 이게 과연 옳은 것이겠느냐 까지 나가는 겁니다. 많은 믿는 사람들이 이 말을 이해를 못할 겁니다. 제가 모르기는 모르겠습니다만은 이 성경 해석이 백목사님 설교 성경 해석 말고 어느 주석에 이 성경 해석이 바로 되어있는지 있는 곳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찾기가 쉽지를 않지 않을까. 다 살펴보지는 못하겠지만은. 그런데 문제는 이게 성경입니다. 이거는 더하지도 못하고 덜하지도 못합니다. 그대로입니다. 누구든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부모나 처자나 형제나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못을 딱 박아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라는 것은 하나님 한분이 전부고 주님 우선주의가 아니고 주님 한분이 전부라는 겁니다. 그게 신본입니다. 하나님이면 전부고 그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면 전부인데 하나님이 그 목적과 구원 역사가 인간이 있고 인간을 구원하는게 하나님의 구원이기 때문에 하나님 있고 그다음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으로 인해서 인간도 있어야 된다. 그래서 첫째, 너희가 여덟가지 덕에 너희가 더욱 힘써 제일 첫째 뭡니까? 베드로전서 1장입니까? 제일 첫째,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팔덕에 첫째 뭡니까? 믿음입니다, 믿음.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 관계고 하나님이 전부고 그 다음에 덕입니다. 믿음에 덕을, 그러니까 하나님이 전부고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고 살 수 있으면 살고 예수 미등면 죽어야 되면은 죽는 겁니다. 예수 안 믿고 살래 예수 믿고 죽을래? 어느게 성경 입니까? 예수 믿고 죽는게 성경입니다. 그래서 순교자들이 다 순교를 하고 성경 그대로 믿으니까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걸 우리가 중요한 것은 말씀을 이대로 받아드리는게 중요하고 나는 정말 이대로 믿는가? 사람이, 이것도 하나의 위안죈데, 다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알기는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옳다, 이게 성경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대로 믿지 못하고 있고 이대로 살지 못하니까 나는 죄인이다 이렇게 되면은 하나님 앞에 자기를 돌아보면서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그러면 애통하는 마음 가지면 위로를 받게 되고 긍휼도 받게 되어지는데, 사람들이 전부다 아전인수라 그럽니까? 성경 해석을 해서 전부 같은 걸 두고 저한테 유익된 대로 그렇게 해석을 합니다. 신사참배는 죽은 사람들을 갖다놓은 그 신사에다가 절하는 것은 명백하게 2계명 어기는 우상숭배죄라서 하면은 안되는건데, 많은 목사들이 많은 믿는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의 강압에 못이겨 신사참배 하면서 합리화 시켜 하는 말이, 이거는 2계명 아니고 나라에서 하라 그러는 국가의 의식이니까 그래서 할 수 있다고 그렇게 합리화 시켜서 그랬습니다. 어려움 만나면 사람이란 것은 빠져나갈 길을 찾는게 모든 사람들입니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평소 작은 것에서 세밀하게 구별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부딪혀서 고난 당해도 부딪힐 건 부딪히고 그리하지 않으면 신앙의 승리는 없다는 겁니다. 주님 같이 되는 조건입니다. 어떤 것이든 이 세상에서 예외는 없습니다. 부모를 말했으니까 부모, 처자, 형제, 자매를 말했으니까 이보다 더 가까운 사람 아끼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없잖습니까? 그러면 사람을 이런 사람 말했으니까 그 안에 재물이라든지 직업이나 직장이라든지 이런거는 거의 말할 것도 없는 거지요.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 사람을 포함해서 어떤 것이든 주님을 따라 주와 같이, 되려면 신앙 성공 하려면, 천국의 구원을 이루어가려면 주님이 전부라야 되고 주님이 가장 앞에 있어야 되고 그다음 주님 때문에 주님으로 인해서 주를 위해서 모든게 필요한 것이지 그게 아닌 것은 다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 성경입니다. 이 인식을 우리가 바로 가져야 됩니다. 이게 바로 신앙 인식이고 이것이 신앙의 사상입니다. 내가 이렇게 현실에서 이렇게 살지 못하고 이렇게 내 생활하지 못해도 성경이 이렇게 말씀했으니 이것이 옳다고 확정을 짓고 이렇게 인식 가지고 기도하고 애를 쓰고 이렇게 살지 못하는 자기를 탄식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진실한 성도의 자세고, 그러기 때문에 진실한 사람들은 말씀이 이렇고 성경이 이런데 이렇게 살지 못하니까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은혜 받아서 빛을 받아서 좀 바르게 살다보면은 조금 명랑하게 밝게 살다가도 또 자기를 돌아보면은 죄인이 되어서 견딜수가 없고 그러기 때문에 어디까지 올라가도 하나님 앞에 교만할 수 결코 없는 것이 진실한 신앙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다음 두 번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된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도인데, 왜 기독교는 십자가의 도라야 되느냐를 오전에 잠깐 말씀을 드렸는데, 왜 기독교는 십자가의 도라야 됩니까? 왜 십자가가 아니면 안되는 것인가? 그것이 궁극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목적에, 그 목적의 성격이 사랑인데, 하나님이라는 분의 본질 본성이 사랑이니까 사랑이란 것은 상대방을 어쨌든 좋게 하고 위하고 자기것을 상대방에 다 쏟아부어주려는 그 속성이 바로 사랑이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목적의 대상된 당신의 백성된 우리들, 우리들을 하나님의 무한의 사랑 전부로 사랑하되 더욱더 뜨겁게 사랑하시기 위해서 하신 역사가 뭐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하되 더 뜨겁게 사랑하려고 하신 역사가 범죄 타락을 예정하신 것이고, 그래서 인간이 범죄하고 하나님 배반하고 영원한 멸망속에 빠진 그 인간을 구원해야 되니까 대속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고 대속이란 것은 사랑의 역사고 이거는 희생이고 고난이고 죽으심이고 자기 위한 것이 아니고 대속이니까, 대신할 대자니까. 위로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 원하시는 인간구원 위해서 자기를 다 바쳐 드리는 희생, 고난, 손해, 낮아짐, 죽어짐 이게 십자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십자가가 없으면 기독교라는 것은 이루어질 수가 없고 기독교의 구원은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의 표현이고 표시입니다, 상징이고. 그속에는 사랑으로 인한 희생과 고난, 손해 수고 이게 전부 다 들어있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십자가의 도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신앙생활하는데 주일을 지키매, 예배시간을 지키매, 또 말씀대로 사는 생활에, 말씀을 바탕으로 말씀대로 사는 가정생활에, 말씀으로 사는 인간관계 생활에, 말씀으로 사는 학교 생활에, 말씀으로 사는 직장과 사회 생활에, 경제 생활에 자기 개인 생활에 십자가가 없으면, 다시 말하면 하나님 때문에 진리 때문에 자타의 구원 때문에 자기가 손해보고 낮아지고 희생하고 참고 견디는 이런 십자가 성격에 십자가의 역사가 자기 생활에 없다면 그 신앙 한번 점검해봐야 됩니다. 없을 수가 없는 겁니다.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있고 온 세상은 악령이 다 주관하고 있기 때문에 그속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존귀하게 그분 만족하게 하나님의 뜻 진리를 거역하지 아니하고 순종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 구원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가려고 하면 말한마디 하나도, 내가 얼굴 표정을 잘못해서 다른 사람이 시험에 들었나? 그래서 예를 들면 나하고 전화 통화를 하고 난다음 그 사람이 마지막 전화 끊을때 목소리가 좀 어둡더라. 나하고 만나고 난 다음 그 사람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라. 그다음날 새벽기도 빠졌더라. 그러면 마음이 덜컥 합니다. 내가 표정을 잘못했는가? 내가 목소리를 잘못했는가? 제가 어제도 어떤 일이 있어서 여기 예배당 위에 올라가면서 보니까 중간반 학생이 그 더운데 땀을 뻘뻘 흘리며 청소를 하고 있는데 제가 지적할 것이 있어서 좀 지적하면서 엄하게 말했습니다. 그러고나니까 마음이 어찌 무겁던지. 그 땀을 뻘뻘 흘리고 청소하는데 좋게 말해도 될건데 내가 너무 엄하게 말했구나 싶으니까 영 마음이 안 편합니다. 다행스럽게 물어보니까 괜찮다고 그래서 안심을 하지만은. 그런 말한마디, 내 얼굴 표정하나, 자기 걸음 걸음 하나하나가 위로 하나님에게, 진리 말씀에, 자타의 구원과 다 연관된 이런 생활 하다보면은 그게 전부 십자가입니다. 하나하나가 다. 그런것이 없다면 자기 신앙생활을 한번 돌아봐야 된다 그말입니다. 십자가는 필연입니다. 그래서 한말로 말하면 십자가는 희생이고 고난이고 죽어지는 것이고, 그런데 자기 사리 사욕 때문에, 자기 실수 때문에 당하는 이런 고난 희생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잘못해놓고 주님 때문에 당했다고 핑계되는, 그래서 6ㆍ25때 순교자라고 많이 책을 내고 그래 한다는데, 거의 대개는 세상 정치하다가 죽은 것이고 제 욕심 차리다 죽었고 다른 제 실수 때문에 죽은 것이 대부분이지 정말 순교한 사람은 6ㆍ25때 많지 못하다, 그게 정설입니다. 사람들이 전부다 포장을 해갖고 다 아닌 것도 그렇다고 만들어서 그렇지 참으로 주를 위해서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은 그 가치가 소자 하나를 위해서 냉수 한그릇 떠다 준 수고도 결코 상을 잃지 않겠다, 누가 그랬습니까? 누가 그랬다고요? 만유주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소자 하나를 위해서 찬물 한그릇 떠다준 수고도 하나님이 그 수고를 잊어버리지 않겠다, 이게 성경입니다. 그런데 주를 위한 수고 희생이 가치가 없는 것 아니기 때문에 가치가 없는 것은, 가치가 큰 것은 귀한 것이고 그만큼 어려운 겁니다. 많은 부분에 있어서 우리는 다 자기 사욕, 자기 실수, 자기 자존심, 인간 감정, 이런 것 때문에 욕 먹고 이런 것 때문에 희생하고 고난받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지 정말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기쁘시게 존귀하게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정말로 하나님 말씀 때문에, 인간 구원 때문에 손해보는 것은 어렵기도 어렵고 정말 그렇게 됐다면 그보다 더 귀한 것은 없는 겁니다. 하나님과 진리, 자타구원 때문에.
아브라함이 소돔 고모라 전쟁을 이기고 물리치고 적산을 다 빼앗아 왔을때 소돔 왕이 와서 사람만 보내고 빼앗은 거는 전부 당신이 가져가라 그럴때, 아브라함은 당연히 자기 목숨 걸고 싸웠으니까 자기 것이지만은, 전립품입니다, 적산, 자기 것이지만은 하나님으로 인해서 내가 부요케 됐는데 이것 때문에 부요해졌다고 하나님의 영광에 누가 될까하여 신들매 하나도 취하지 아니하겠다 그게 많은 물질을 손해본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다니엘이 왕이 내려준 진미와 포도주를 먹을 수 있지만은, 먹어도 되지만은 그러나 주권을 하나님께 돌리는 그 믿음 때문에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기 위해서 조상들의 진노를 풀기 위해서 그래서 채식한 그것이 바로 하나님 때문에 진 그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 진리 때문에 자기가 손해보고 희생하는 것. 그러기 때문에 대개는 안 당할 수 있고, 벗으려면 벗을 수 있고 면할 수 있는 성격들이 대부분입니다. 이게 십자가입니다. 이거는 가정에서도 그렇고 직장에서도 그렇고 인간관계도 그렇고 우리 모든 생활 전부다 다 걸쳐져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 십자가는 뭐냐? 자기 십자가. 누구에게나 자기 십자가는 다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는 자기가 지고 가야될, 하나님이 자기에게 분담시켜 주셨고, 다른 사람이 대신 질 수 없는 십자가인데 이 자기 십자가 형태가 몇가지라고요? 오전에 두가지 말씀드렸는데, 하나는 뭡니까? 환경적인 십자가인데 이거는 주로 어떤 것이라고요? 환경적인 십자가인데 고정적인 것이 대개입니다. 고정적인 것. 나를 둘러싼 내 환경. 부부가 결혼했으면, 요즘은 이혼을 밥 먹듯이 물 마시듯이 하는데, 그것도 사람 할 짓이 아닙니다. 살아가다 보면은 부득이 하게 그래 되는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감히 나누지 못할지니라. 성경입니다 이거. 그런데 부득이 하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아이들 소꿉놀이 하다가 그만 두듯이 그렇게 쉽게 이혼하는 그것도 말세 현상이고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한번 결혼했으면 그거는 목숨을 걸만한 그런 것이 아니라면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기까지 평생 사는 그게 옳은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한번 결혼하고 나면 고정입니다. 환경입니다. 자녀를 낳고나면 그 자식이 아무리 애를 먹여도 그 자식은 호적에서 파내도 그 자식은 내 자식입니다. 끊어버릴 수 없는, 그래서 천륜이라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것이 환경입니다, 환경. 직장에 들어가면 옮길 수 있지만은 그래도 한번 들어가면 쉽게 바꾸지 못하지요. 그런 것도 환경입니다. 학교도 마찬가지. 고정적인 그런 환경. 그런데 그 환경이 내가 그 속에 안에 들어있으면서 그들과 관계를 가지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존귀하게 하고 말씀을 지키고 구원에 유익을 끼치려고 그렇게 믿음으로 살려하다 보니까 환경과 마찰되는 그런 경우가 있는, 그런 마찰되는 그런 경우가 많은데 이걸 벗어버릴 수 없는 이런 십자가 환경적인 고정적인 십자가였으니 이거는 하나님께서 지고 가라고 자기에게 메워주신 자기 십자가입니다. 아이를 낳았는데 이놈이 크더니 믿음생활 하지 아니하고 온갖 죄를 저지르고 돌아다니면서 부모 속을 썩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자식은 너에게 메워주신 네 십자가다. 평생을 두고 그 자식을 보면서 너의 과거를 돌아보고 너의 과거 하나님 앞에 잘못된 걸 돌아보고, 자녀 교육도 돌아보고, 또 네가 수고해야 될 그런 수고니까 지고 갈 너의 십자가다. 자기 십자가입니다. 가족들 관계, 직장관계, 자기 몸에도 그런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관계. 이런 것 하나님께서 내게 메워주신 다른 사람이 대신 할 수 없는, 그러면서 쉽게 바뀌지 않는 자기 십자가. 누구든지 무릇 네게 오는 자가, 두 번째 할 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지 않는 자도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이거는 계속해서 지고 가야 됩니다. 이 자기 십자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생활적인 십자가인데 이거는 유동적인 십자가입니다. 살아가면서 매일 매일 현실에서 부딪히는 그 십자가. 믿음으로 사니까 부딪히는 겁니다. 이 시대에 국기를 가지고 장난치는 이 시대에 국기경례 안하니까 오는 핍박. 대기업에 들어가면 모든게 다 좋아하는, 모두 목을 메고 있는데, 주일날 시험치니까 부득이해서 주일날 시험 안치려고 대기업에 못 들어가는 그런 십자가. 이런 것도 십자가입니다. 마당을 내 집 앞마당을 쓸면 되는데, 마당을 쓰는데 내 집 앞만 쓸면 되는데, 눈이 와도 그렇고.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옆집 사람들이 나 예수 믿는 사람인 줄 아는데 마당을 내 집 앞 골목만 딱 쓸어놓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참 예수 믿는 것들 깍쟁이들 옆집에 좀 쓸어주면 안되겠는가. 딱 자기 집앞 골목만 쓸어놨네.’ 손가락질 할 지 모르니까 부득이하게 몇 집 좀 쓸어주는 것도 그것도 십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거는 전부다 주를 위한 수고 희생 그런 것이기 때문에 다 십자가인데, 자기에게 분담된 자기 생활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된다. 이런 것들이 우리 전생활에 내가 가는 곳곳마다 다 연결되어 있으니까 이런 걸 찾아가지고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가 되어야 되겠다.
그래서 오늘 오전 말씀에서, 허다한 무리에게. 우리도 다 포함이 되어집니다. 주님을 따라가려면, 주님 제자되려면, 주님 제자 되는게 우리 소망이니까 주와 같이 되려면, 다섯가지로, 그러려면 주님 한분만으로 전부 삼아야 된다. 주님만이 전부고 다른 것은 전부 주님 때문에, 주를 위해서, 주로 인해서 그리 되어야 되는 것이고 하나 할 일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된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 신앙을 또 한번 돌아보십시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외우도록 하십시다. 아무든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부모, 처자, 형제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 주님보다 앞세우면 주님은 따라갈 수 없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는 자도 주님 따라갈 수 없다고 하셨으니까 이 말씀을 기억하고 이런 신본의 신앙, 주님 한 분 유일의 이 신앙을 가지고 자기에게 분담된 자기 십자가를 단마음으로 지고 끝까지 따라가는 우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