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1-주후(마5:1-12)
산상보훈2014-06-01조회 356추천 24
본문: 마5:1-12
제목: 산상보훈
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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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설교
20140601 주후
마태복음 5:1-12
오전 말씀을 복습을 하고 뒤에 계속해서 이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산상보훈’이라 이름을 아주 좋게 붙였습니다. 이거는 세상 국어사전에도 나오는 말이고 백과사전에도 기록이 되어있는 내용입니다. 사전에 ‘산상보훈’ 찾아보면 세상 사람들이 아는 그 범위로 내용을 적어놨습니다. 산상수훈이라고도 하고 황금율이라는 말은 그 뒤에 있는 말씀, 7장인가 그 끝에 있는 그 말씀을 두고 하는 말인데 전체적으로 5장부터 7장까지 말씀 전체를 황금률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본문의 말씀은 팔복이라고도 합니다. 팔복. 여덟가지 복이라 그래서 팔복이라 그렇게 말씀을 합니다. 복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믿는 성도에게 주시는 상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상급이란 것은 잘한 사람에게 마땅히 상을 받을만한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 상급입니다. 아무나 받을만한 그런 자격이나 공이 없는데도 상을 주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상급은 일종의 노력에 충성에 또 공로에 승리의 댓가로 주는게 상급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고, 은혜라는 것은 공으로 주시는 것이 은혜인데 은혜 역시 두가지가 있어서 하나는 기본적인 은혜가 있고 또 하나는 건설적인 은혜가 있어서, 기본적인 은혜는 일반적인 은혜고 보편적인 은혜로 누구에게나 다 주시는 것이라서 이거는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 할 것 없이 다 주시는 은혜고 또 믿는 사람에게도 공통적으로 주신 은혜가 있고 그중에도 건설적인 그런 면으로 주시는 은혜가 있으니 그거는 일종에 상급과 같은 것이고 복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이란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은혜라 그렇게 말할 수 있고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이다고도 말할 수 있고 또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지능 그 이상에 은혜를 주시는 것 이게 복이라 말할 수 있고 하나님이 친히 지극히 큰 능력으로 우리를 잘 되도록 해주시는 이런 역사를 가리켜서 복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영육간에 복이 다 그러한겁니다.
그러면 복이란 것은 받을만한 행동이 있어야 복을 받고 복을 받을만한 생활을 해야 복을 받고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복을 받지,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런 행동 생활 그런 사람이 되어있지 못하면 복은 줄 수가, 받을 수가 없는 것은 필연한 것입니다. 공부를 꼴찌하는 사람에게 상을 줄 수 있는가? 상을 줄 수 있겠습니다. 무슨 상을 줄까요? 공부 꼴찌했으면 무슨 상을 주겠습니까? 격려상이라 그래 줄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거는 상이, 상이란 것은 영광이라야 되는데 못해서 힘내라고 받는 상은 수치가 되어지겠지요. 부끄러운 상입니다 그런것들은. 복이란 것은 하나님이 받을 수 있는 그런 언행심사를 하고 그런 생활을 하고 그런 사람이 된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지 아무렇게나 복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귀한 것이고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흔하게 되면 더 이상 귀하다 하지를 아니합니다. 아무리 값비싼 것이라도 흔하게 되면 값이 떨어지는 것이 필연이고 흔하면 귀하다 하지 않습니다. 축복은 귀한 것이고 하나님 은혜는 귀한 것입니다. 성경에 복을 많이 말씀했지만은 정작 복을 받은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우리 중에도 모두 영육간에 복을 받은 분들이 더러더러 계실건데 그 받은 복들이 보면은 대개 한정이 되어있고 제한적이고 다 지업적이고 이러하지 전체적으로 원만하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영육간의 복을 다 받은 사람은 참 보기가 쉽지를 아니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공부하면서 집사님 기도하신대로 복을 받기로 원하고 실제 복을 받는 여덟가지 복을 받아가지는 우리가 되는 것이 이 말씀을 공부하는 목적이고 여덟가지 복을 받아 가지려고 하면 이 복을 받을 수 있는 우리 사람이 되어야 되고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복 받을 수 있는 생활을 하고 언행심사를 하면 되는 것이고 그 복 받을 수 있는 생활을 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방법을 알아서 기준도 알고 내용도 알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는지 알아가지고 노력을 하면 되는 겁니다.
팔복에 첫 번째 복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찬송가, 우리 찬송가에는 없지요 아마. 그게 가본에 있을건데. 마음이 빈 자는 복이 있는 잘세 천국이 저들의 것임이요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마음이 빈 자는 복 있는 자라. 심령은 쉽게 말하면 마음이라 그 뜻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그냥 마음이 아니고 영에게 속한 마음, 영에게 붙들린 마음을 심령이라 그리 말합니다. 이거는 교리적인데 깨닫기 어려운데 백목사님 설교록에 그렇게 해석되어 나옵니다. 영에게 속한 마음, 영에게 붙들린 마음을 ‘심령’이라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그 이유는 그 마음이 영에게 붙들렸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것이고, 영에게 붙들렸다 그 말은 하나님께 붙들렸다는 뜻이고 영과 하나님은 항상 동행입니다. 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에게 붙들린 마음은 하나님께 붙들린 마음이 되고 하나님에게 붙들렸다는 그말은 하나님이 그 마음을 주인으로 움직이신다는 그런 말이고 그러면 그 마음에 대해서 나 자신은 마음에 대해서 주권이 없다는 말이고 그러므로 그 자체적으로 심령이 가난한 그런 것이 되어지겠고,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봤습니다. 사람이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마음에 대해서 자기가 주인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그 마음에 주인되는 것이 심령에 가난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걸리는게 뭐냐하면 마음을 자기가 마음대로 한다.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진 않겠지만은 드물지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내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 그 마음을 지켜야되는데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못합니다. 그런데 왜 마음에 주권을 자기가 가지고 아니면 하나님께 맡긴다 하느냐? 내가 내 마음을 마음대로 못하는데. 내가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하면 또 하나님이 그 마음을 붙들지 못하면 그러면 그 마음은 누가 붙들고 있는 겁니까? 자기 마음을 자기가 붙들지 못하면 그런데 하나님이 그 마음에 주인이 되지 못했다면 그 마음은 누가 붙들고 있는 겁니까? 악령이 붙들고 있습니다. 마음이란 것은 독립 독행할 수 없는 존재고 어떤 것에게 붙들려 피동으로 사는 것이 움직이는 것이 마음인데, 하나님께 붙들리지 않았으면 악령에게 붙들린 것이고 그 악령은 악령이 내 마음을 붙들었는데 악령이 내 마음을 악령의 것이니까 강제하나 예수님의 대속이 없는 사람은 마음을 악령이 강제하나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사람은 성도의 마음은 결코 악령이 강제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내 마음을 악령이 강제한다 그말은 내가 그 마음을 악령에게 내어줬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네가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켜라’ 그거는 내가 하나님께 붙들린 마음으로 지킨다는 뜻이고 하나님께 붙들린 마음으로 지키지 못하면 그 마음은 막바로 악령에 붙들린 마음이 되어진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은 바로 악령에게 붙들린 마음인데 제가 그 마음에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에서 주인이 되어있는 것이니까 그 마음의 주인은 자기고 그러면 그 마음이 자기가 주인된 마음이 많으면 그 마음은 부요한 마음이 될 수 밖에 없게 되어있습니다. 필연입니다. 그러면 내 마음을 내가 붙들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붙들리고 영에게 붙들리면 그 마음은 심령이고 그 심령은 가난한 심령이 되는 겁니다. 어디에 대해서 가난하게 되느냐? 물질에 대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장 가난을 느끼는 것은 물질에 대한 가난입니다. 어쨌든 돈은 먹고 죽어도 좋으니까 돈만 좀 많았으면 좋겠다. 돈에 깔려 죽어도 돈 좀 많았으면 좋겠다. 돈에 치여죽어도 돈 좀 많았으면 좋겠다, 그게 돈에 포원진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 돈에 대해서 가난이고 가난은 갈급을 부르는 겁니다. 가난은 갈증과 갈급, 굶주림과 갈급을 부르게 되는 것이 가난입니다. 돈에 대해서 마음이 가난하면 그 마음은 돈을 갈구하게 되고 찾아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마음이 돈에 대해서 갈급해서 돈을 갈망하고 갈구하는 그 마음이 과연 복있는 마음이겠는가? 복이 없는 마음입니다. 돈에 대해서는 갈망하지 않아도 어떤 사람은 돈이 많으니까 권력을 지고 싶어서 이거는 여기 있는 우리들은 권력에 대한 욕망이 없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권력이란 것은 국가의 권력도 권력이고 교회의 권력을 교권이라 그러고 가정에도 권력이 있고 사람 몇 사람 모이면 거기도 권력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모이면 학교에서 아이들이 주먹싸움하는 소위 말하는 일진이니 이진이니 삼진이니 하는 그 아이들의 장난하는 그런 것도 하나의 권력다툼 주먹싸움 그것도 권력입니다. 제가 머리 되고 싶고 뭐든지 제가 주장되고 제 마음대로 하고 싶은 그게 권력의 욕심인데, 권력에 맛을 들여놓으면 그것도 아편만큼이나 끊기가 어렵다 그럽니다. 권력의 욕심. 권력에 갈급한 사람은 요즘 선거하는데 제가 계산 한번 해봤습니다. 선거하는데 있어서 선거운동원들을 보나마나 자원봉사자라는 이름으로 쓸건데, 한사람 앞에 하루에 여자분들 암만 못줘도 7만원은 줘야 될 것 같은데 하루에. 하루에 칠만원. 그러면 부산시의원 한다 그러면 부산시전역에 그 사람들을 다 풀어놔야 되는데 그러면 하루에 칠만원 열명이면 칠십만원, 백명 가지고 부산시에 다 풀어놓겠습니까? 백명이면은 하루에 칠백만원. 열흘이면은 얼마입니까? 칠천만원. 그런데 이백명이면 일억사천만원. 그래서 선거는 돈이 없는 사람은 선거 못하는 겁니다. 돈이 엄청나게 깨집니다. 그래서 어지간한 돈 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원 선거 한번 나서고 떨어지면 그날로 집안이 망합니다. 그런 사람들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가지고 집안 말아먹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집안을 말아먹어도 권력을 한번 잡아보겠다. 권력에 가까이 가보겠다. 권력에 욕심입니다. 명예욕이 있는 사람들은 돈을 싸들고 가서 학위도 받고 명예를 또 얻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돈보다 명예를 얻어라 그래되어있는데 명예 그것도 일종에 욕심입니다. 자기 위신욕 과시욕 별에별 종류의 사람의 욕심 소원 소망 이게 전부 마음에 뭔가 자기가 갈망하고 가난해서 그것을 찾고 얻고 취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가난이고 가난이 갈망과 갈구를 부르고 갈급을 부르고 그것을 향해서 노력을 하게 되는 겁니다. 학벌을 원하는 사람도, 그래서 시험쳐서 일류대학에 시험쳐서 떨어지면 재수하고 삼수하고 몇 수를 해도 기어코 일류대학을 가야되고 또 고시치는 사람들은 옛날에 그 고시가 옛날으로 말하면 급제하는건데, 과거급제인데 요즘 말하면 사법고시 행정고시 그게 옛날로 말하면 과거 급제인데 거기 평생을 그래 매달린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한자리 좀 해보겠다고. 그것도 일종에 가난입니다. 평생 시간 세월 자기 정력 노력 물질 다 투자해서 그래 얻는데 얻어봐야 가보면, 옛날에는 참 고시 급제하면 팔자를 고치는데 요즘은 그것도 쉽지 않지요 아마. 요즘 사법고시 합격해봐야 판사 검사 되기가 하늘에 별따기처럼 어렵다 그러지요. 수만명이 시험쳐서 그중에서 열명이나 되는가 모르겠습니다 합격하는 사람이. 그만큼 어려운데 되어봐야 몇 년 지나고나면 그렇고 먹고 사는 거는 먹고 살기 위해서 같으면 그 머리 가지고 또 다른 것 하면 길은 얼마든지 있을건데 외길로만 가는 그것도 참 어떻게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은. 별에별 그런 사람의 갈급 심령의 가난 이런것이 있는데 마음의 가난인데 심령의 가난, 영에게 붙들린 그 마음에 가난은 그런 것에 대해서 가난하질 아니하고 한말로 말하면 천국에 대해서 가난입니다. 그런데 묘한게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것임이라 그랬으니까 이 사람은 천국이 없는 사람입니까 천국을 가진 사람입니까?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그랬으니까 천국이 이미 저희 것이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천국이 저희 것이 되어있는데 뭐 천국에 대해서 가난한가? 그래서 묘한 겁니다. 세상 것은 가지면 가질수록 가진만큼 그것이 그릇이 차게 되고 더 이상 들어올 자리가 없게 되고 올라가고 올라가서 다 올라가고 나면 더 이상 올라갈 자리가 없고 떨어져 내려오는 것만 있는게 세상 권력이고 자리고 물질은 많아서 자꾸 많아지고 채우는데 욕심이 끝이 없지만은 차고 나면 그다음에는 또 그게 없어지고 이래되는 그게 물질이고 세상 것은 또 어느정도 잡아보고 나면 권태나고 별 것 아닌 것이 세상에 대한 것인데 천국에 대한 것은 신기하게도 이거는 가지면 가질수록 점점 더 갈급이 더 심해지는게 천국의 것이고 그런데 세상에도 이런 성격이 있는데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은 것 더 누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거는 그리 될수록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이고 자기를 패망시키는 그런 것인데 천국에 속한 것은 가지면 가질수록 많아질수록 더 갈급하고 갈망한데 거기 대해서 느끼는 자기 느낌이나 자기라는 사람은 점점 더 인격적으로 도덕적으로 지능적으로 구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지면서 신비스러운 그런 온전함에서 나오는 그런 신비한 그런 쾌락이 있으면서 더 기쁘면서 더 갈급하면서 더 고급스럽고 더 고차원적이고 더 인격적이고 더 영광스럽고 좋은 말은 다 갖다붙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꾸 갈급이 생기니까 기도를 자꾸 하면 치우친 기도 아니고 바른 기도, 가끔 한번씩 말씀을 드렸습니다만은 백목사님께서 남해에 남해 내산? 집사님 남해 내산이 있습니까? 남해에 내산이라는 곳이 있습니까, 내산? 남해에 내산이란 곳이 있답니다, 내산. 남해 내산 기도원에 몇일 금식기도하고 갔다오면서 버스에서 가만히 생각을 해봤답니다. 생각해보니까 참 교인들 일반 사람들은 하루만 기도하려 그래도 직장을 비워야 되지요 결근계를 내야 되지요 사업을 못하지요 가정에 청소 집안일 못하지요. 큰 문제가 생기니까 기도하기 어려운데 교역자가 되놓으니까 기도를 많이 다닐수록 교인은 더 좋아하지요. 다른 사람 성경 읽는게 그리 힘이 드는데 성경 읽을수록 더 좋아하지요. 또 심방 전도 많이 할수록 더 좋아하지요. 그러니까 하늘의 상급이 많지요, 자기 신앙으로 성화되어 지지요, 교인들 다 좋아하지요, 하나님 기뻐하시지요. 이거는 뭐 일거양득이 아니라 전체적인 면으로 좋은 것 유익된 것만 다 갖췄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이런 길을 들어섰는가 하고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래 오셨다고. 설교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어디 속한 것이라고요? 이런게 바로 천국에 속한 겁니다. 그래서 천국에 속한 갈급은 이런 갈급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가져도 가져도 차지 아니하고 실제는 자꾸 찹니다. 자꾸 차는데 자기는 더 갈급해지고 차면은 빈자리가 자꾸 줄어드는데 빈자리는 자꾸 더 넓어지고 차면은 사람이 그만큼 교만해지고 오만해지기 쉬운데 더 조심스러워지고 내가 많이 가지면 다른 사람들은 자기 것을 빼앗기니까 못가지니까 시기 질투를 할건데, 천국에서는 내가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다른 사람들이 더 좋아하고 더 존경하고 더 감사하고 하나님 더 좋아하시니까 만고에 참 좋은 이게 천국에 속한 심령이 가난한 자가 가지는 천국에 가난이다 그말입니다. 이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복을 생각해보셨습니까? 이런 복을 가져보시고 맛을 보셨습니까? 이게 참된 천국의 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복. 그러기 때문에 이런 복을 이런 천국에 속한 것을 가져보고 맛을 보고 누려본 사람들은 세상에 어떤 것을 줘도 그거는 꾸린내가 나서 악취가 나서 또 수준이 낮아서 그거는 너무 수치스러워서 거기 대해서는 눈을 돌리지를 아니합니다. 이 세계를 맛을 봐본 사람들은 아멘이 되고 동감이 되어질 것입니다. 이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천국이 저희것임이요. 천국은 바로 이 사람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은 하나님이 통치자 주권자 왕이 되시고 하나님의 절대 불변의 자유의 율법인 진리가 그 나라 법이고 지공지성의 그 나라 법이고 빛이 있어 공의가 있고 사랑이 넘치는 그리고 끝이 없는 알파와 오메가의 영원무궁한 그 나라가 천국이다. 이 나라는 그 나라의 사람이 돼서 그 나라에 대한 갈급이 있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다. 이 사람이 천국 사람이고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신앙생활에, 지난 주일에 아브라함의 신앙 공부하면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신앙출발이고 방향전환입니다. 예수 믿는 겉모습은 내면적으로 택하심을 입고 중생이 되고 때가 되면 부르심 받아서 교회를 다닙니다. 겉모습입니다. 그런데 교회 다니기까지는 하나님 은혜로써 신앙출발의 겉모습인데, 실제로 신앙출발을 한 사람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다. 무엇과 무엇이 바뀐 겁니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다 말은 무엇과 무엇을 바꾼 겁니까? 소속과 소망을 바꾼 겁니다. 이 세상에 땅에 피조물에게 소속이 되고, 소속이라 말은 자기가 거기 박혀 있다 그말입니다. 뿌리가 거기니까 그것에 따라 움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수박을 딸 때 수박을 저기서 땄는데 그 수박에 넝쿨이 몇미터 뻗어나갔는데, 호박도 그렇고 그 뿌리 찾아보니까 몇미터 저 쪽에 뿌리는 있는데 넝쿨이 뻗어나가서 저쪽에 있다 그말이죠. 그러니까 그걸 들면 뿌리를 찾아 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뿌리 쏙 뽑아버리면 몇 미터 밖에 있는 수박이 다 말라 죽지 않겠습니까? 뿌리가 뽑혔으니까. 그게 소속입니다. 자기가 어디 소속했느냐? 신앙 노선도 일종에 소속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소속되고 천국에 소속된 이것으로 방향을 소속을 바꾸고, 방향이라 말은 소망입니다. 자기가 나아가는 방향. 어디를 향해서 나아가느냐? 천국을 향해서 가느냐 세상 향해 가느냐?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다 물어보지요? ‘하나님을 믿습니까?’ ‘아 믿지요. 당연히 믿습니다.’ ‘예수 믿습니까?’ ‘믿습니다.’ ‘성경 믿습니까?’ ‘믿습니다.’ ‘하늘나라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소망합니까?’ ‘당연히 소망하지요.’ 그런데 천국을 소망하고 방향 삼고 소망 삼고 방향으로 나아가고 뿌리가 천국이라 하나님이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인식이 바뀌어야 됩니다. 인식은 자기 주관이 된 지식입니다. 자기를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그 지식이 바로 인식입니다. 자기를 끌고 가는 그 지식 그게 인식인데 인식이 바뀌면 신앙중심에 소속과 소망이 바꾸어진 그 사람의 인식이 바꿔진 그 사람은 인식이 바꾸어지면 생활 모습이 달라집니다. 생활의 방편이 달라집니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우선순위가 변해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기 때문에 우선 순위가 자기보다 하나님, 모든 사람보다 하나님의 뜻, 보이는 조건보다 하나님의 축복이 우선이였고, 롯은 몸은 따라갔는데 내면적으로 본토 친척 아비집을 실제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막상 딱 닥치니까 우선 순위가 바꾸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롯의 신앙모습으로 사는 예수 믿는 사람들, 겉은 믿고 천국 소망하고 성경 믿는다 하는데 내면적으로 실제 인식과 생활, 모습, 생활의 가치, 우선 순위 이게 바뀌지 않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거의 대다수라 할만큼 그렇게 많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사람은 약한게 사람입니다. 약하면 쉽게 넘어집니다. 그러니까 이게 바꾸어져도 가다보면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꾸어져서 가다가 넘어지는 사람하고 아예 바뀌지 아니하고 근본적으로 그냥 그 자리 있는 사람하고는 완전히 틀립니다. 이거는 성경 가지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 압니다. 여기서 이것이 뿌리되고 원동이 되어서 나타나는 것이 자기 모든 일상생활이 전부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모든 취사선택, 이게 어려운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뭔가를 골라서 가지고 취하고 버리는 선택 또 모든 사리에 판단하는 것, 비판하고 평가하고 처리하는 것. 자기 모든 생활, 학교 생활, 직장 생활, 사업 생활, 처소 마련, 자녀 생산, 자녀 양육, 결혼 이 모든 전부다가 다 여기서 뿌리되서 나오는 겁니다. 그 보면은 이 생활 전부 이게 되어가지고 나오는 그 사람하고, 그러니까 외부로 드러나는 그 사람의 생활 가정 모습을 보면은 그 사람이 과연 바뀌었는지 안 바뀌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말입니다. 넘어지는 사람하고 약해서 넘어지는 사람하고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은 사람은 틀립니다.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고 천국에 속한 사람이 돼서 천국을 차지하는 이런 우리가 되어야 되겠고,
두 번째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애통이라 말은 슬퍼하고 아파하는 겁니다. 몸입니까, 마음입니까? 애통이란 말은 그 대상이 몸이겠습니까 마음이겠습니까? 마음이겠지요. 애통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슬프고 마음이 아픈 겁니다. 왜 슬프고, 슬픔이 지나치니까 아픈 고통이 따라옵니다. 왜 마음이 그렇게 겉으로 슬프고 아프게 되어지느냐? 사랑하는 가족이 큰 변을 당하면 슬프고 고통스럽고 일반적으로 보니까 이별은 슬픔을 부릅니다. 사랑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하고 떨어져 이별하면은 슬프고 아픕니다. 또 그런 말을 듣고 그런 상황을 보면 또 마음이 슬프고 고통스럽고 아픕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위로를 합니다. 그거 복입니까? 가족을 잃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그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음이 슬프고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니까 주변 사람이 와서 조문 오고 위로 합니다. 복입니까? 또 사랑하는 사람하고 헤어졌습니다. 이별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주변에 와서 위로해줍니다. 복입니까? 그거는 복이 아닙니다. 그거는 불행이지요. 불행이니까 위로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그랬습니다. 그 애통이 무슨 애통이길래, 또 위로는 무슨 위로길래 그게 복이 되는가? 복이라 말은 나쁜 겁니까, 좋은 겁니까? 복은 좋은 겁니다. 귀한 겁니다. 그러면 무슨 애통이 무엇이길래? 위로는 무엇이길래. 이 애통이란 것은 반드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 애통은 나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두가지를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는 자기의 죄 혹은 불의 불충, 자기 잘못된 것, 하나님 앞에 삐뚤어진 것, 하나님의 진노를 쌓은 것 이것 하나있고, 또 하나는 뭘 생각해야 됩니까? 사람이 슬프고 고통스러울때 필연적으로 슬프고 고통스러운 이유는 원인은 연결되는건데, 사람이 죽었습니다. 슬픕니다. 왜 슬픕니까? 죽은 사람을 살리지를 못하니까 슬픈 겁니다. 헤어졌습니다. 슬픕니다. 왜 슬픕니까? 다시 만나면 되지요.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슬픈 겁니다. 그게 인간의 무지무능의 연약성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도 애통이란 것은 두가지 면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 자기가 잘못한 겁니다. 죄를 지었든지, 하나님의 뜻을 져버렸든지, 다른 사람에게 신앙의 손해를 끼쳤던지, 덕을 끼치지 못했던지 어쨌든 하나님의 노를 쌓은 것 하나, 그런데 두 번째는 자기가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겁니다. 자기 연약성. 그래서 자기 죄악성과 자기 연약성 이 두가지를 하나님 앞에서 발견할 때 비로소 애통이 나오는 것이고 이 발견한 것이 크고 강할수록 애통은 크고 강하게 되는 것이고, 애통이 크고 강할수록 하나님의 위로는 그만큼 간절하게 임하게 된다 그말입니다. 성경이 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배반하고 고기 잡으러 갔던 베드로를 심방오신 주님이 깊은데 가서 그물 내려 고기를 잡으라. 베드로 마음 속에 ‘선생이여 내가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은 하도 선생님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되지도 않는 말이지만은 하니까 선생님 앞면을 차마 무시 못하겠고 대우해서 내가 그물 내려보기는 내려보겠지만은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마음속으로 그렇게 다짐을 하고 그물을 내렸으니까 예수님을 속으로 무시했고 깔봤고 멸시했고 그래 했지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무시했잖습니까? 선생이여, 하고 그랬으니까 무시했고 말씀을 믿지 않았고 깔봤고 차마 그냥 막 좇아내지는 못했지만은 실제는 쫓아냈다 그말이지요. 아주 불경하게 그래 한겁니다. 그러니까 버르장 머리 없이 차마 인격적으로 말은 했지만은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고기 잡히고 나니까 베드로가 정신이 번쩍 들었지요. 내가 주님을 배반했는데 주님 배반하고 져버리고 돌아온 것, 주님 말씀을 무시한 것, 주님 자체를 무시한 것, 불신한 것, 그동안에 말씀으로 살지 못한 것, 이런 걸 생각하니까 기가 찬 겁니다. 원통하고 마음이 슬프고 아픈 겁니다. 그래서 주님 발 앞에 엎드려 졌는데 그 마음이 애통이 되니까, 주님이 애통을 넘어서 두려워하기까지 하니까 주님이 두려워하지 말아라고 위로를 하신 거지요.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가서 고비고비 넘어서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이 돼서 주님을 발견하고 나서,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님 앞에 자기를 발견하고 보니까 옛날하고 전혀 다른 주님이였습니다. 그 주님은 두려워하지마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그 말은 나는 변하지 않았다. 주님은 변하지 않는 분입니다. 누가 변했습니까? 누가 변했습니까? 주님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변한 겁니까? 사도 요한이 변했는데, 어떻게 변했습니까? 눈이 그만큼 밝아졌습니다. 눈이, 우리 눈에 이게 돌아다니는 공기 중에 돌아다니는 병균이 우리 눈에 안보이지 않습니까? 우리 손톱 밑에 세균이 우글우글 하다 그러지요. 보입니까? 그런데 현미경으로 갖다대면 우글우글하게 보인다 그러지요. 눈이 어두워서 안보이는 겁니다. 자연계시입니다. 주님은 그대로인데 눈이 어두워서 그분을 몰랐는데, 밧모섬에 주를 위한 말씀 때문에 고난받고 성령에 감동되서 전에 모르던 그 음성 듣고 알아보고 주님을 보니까 주님이 보였는데 옛날하고는 전혀 다른 주님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앞에 기절해버렸습니다. 너무 겁이 나서. 이런 분인데 내가 멋도 모르고 그 앞에서 품에 의지해서 드러누워서 ‘선생님~’하고 어리광도 부리고 그랬잖습니까? 그러니까 죄송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너무 겁이 나서 기절하고 쓰러져버리니까 이거는 애통을 넘어서 기절해 죽어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어떻게 하셨다고요? 손을 얹고 위로 하신 겁니다. 이런 애통이 있을때 우리에게 주님 위로는 온다는 겁니다. 비유지만은 자녀가 잘못을 저지르고 부모님한테 바락바락 달라듭니다. ‘내가 뭐 잘못했는데요?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나만 잘못했습니까?’ 하고 목을 딱 고개를 들고 달려들면 부모님이 그냥 귀싸대기를 그냥 한 대 쎄려주고 싶겠지요. ‘이놈 자식, 버르장머리 없이 잘못했으면 용서를 빌고 잘못을 알아야지. 그러고도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그렇게 대들껀데, 작은 잘못을 하나 잘못인데 열 개나 잘못한 것처럼 그만 무릎 끓고,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옵소서.’ 하고 진정으로 빌면은 어지간하면 부모님이 제법 큰 사고를 쳐도 ‘야야 사람이 그럴 수 있는 거 아니가. 힘을 내자’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게 인지상정이라는 세상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고 사람의 마음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애통하는 자’ 잘못을 저지르고 애통하는 것, 연결이 되는데 세상적인 그런 것 때문에 애통하는 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그거는. 억울하다 분하다 내가 계산 잘못해서 돈 몇백만원 손해봤다 억울하다 분하다 이거는 가치가 없습니다. ‘이번에 내가 승진할 수 있는 자리인데, 내 경쟁자 저 사람이 나 대신 올라갔구나. 분하다. 잠이 안 온다.’ ‘이번에 거래처에 우리 회사에서 그 일거리 수주할 수 있는데 놓쳤다, 분하다.’ 이런거는 가치가 없습니다, 그거는. 거기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지 않습니다. 자기 죄를 발견했을 때, 하나님 앞에 자기 잘못, 삐뚤어진 것, 잘못된 것, 부족한 것 이걸 발견하고 연약해서 넘어진 자기 연약성 이걸 발견해서 마음이 진정 슬플때, 괴로울 때, 두려움까지 가면 더 좋겠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를 결코 버리지를 아니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회개하는 걸음에는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죄인에 대해서는 소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지 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회개가 끊어지는 그 순간, 하나님은 그에 대해서 버릴 수도 있습니다. 방림해 버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죄를 크게 많게 지어도 회개가 끊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은 결코 소망을 버리지를 아니합니다. 이것을 악용하면 문제가 되지만은 악용하지 아니하고 꼭 붙들고 있으면, 그래서 성도들은 약한 사람들은 많이 속으로 웁니다. 울다가 웃다가, 기뻐하다 슬퍼하다가, 괴롭다 즐겁다가 이것이 인격 대 인격의 교제, 신인교제 신앙생활에 이런 맛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신앙생활 하겠습니까? 이런 맛이 있으니까 잘못 했으니까 용서 빌고 또 다시 한참 잘못했다가도 하나님께서 잘못이 된 걸 보여주시니까 하나님이 지금 화가 나셨구나, 매를 대셨구나, 정신 차려야 되는데 안되니까 괴롭고 괴롭고 그러다 은혜 주시면 또 정신 차리고 또 한단계 올라가고, 그래가지고 자꾸 단계 단계 올라가고 몰랐던 것 깨닫게 되고 느끼게 되고 주님과 점점 가까워지고 성화되어지고 그래가지고 변화되는 것이 우리 구원이고 그러다보니까 세월은 유한한데 허비되는 것이 많으니까 아까운 것이 많지요. 징계가 많으면 허비가 많습니다. 그러나 약하니까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애통이 있으면 하나님이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위로.
그다음 세 번째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온유라는 말은 여유라는 말입니다. 넉넉함에서 나오는 여유. 넉넉함이란 것은 많이 있다는 겁니다. 모든 면에 다 그러합니다. 사람이 내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논리를 가지고 있으면 상대할 때 넉넉함이 나옵니다. 어떤 논리를 갖다대보십시오. 내가 다 이깁니다. 그런데 논리가 약하면 사람이 조급해지게 되는 겁니다. 논리도 그렇고 돈도 그렇고 어떤 자기 권력도 그렇고 힘도 그렇고 모든 면이 다 그렇습니다. 본문에 온유라는 것은 하나님을 배경 삼는, 예수님의 대속을 근거한 이걸 배경 삼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약속 이런 것을 근거해서 이런 걸 배경 삼음으로 세상 현실을 상대하는 그 상대에 대한 자세입니다. 그러니까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 그말은 땅을 상으로 주신다는 말도 들어있고 이 세상을 상급으로 주신다 그말은 세상을 내가 대해서 이겼기 때문에 그 세상을 내 밥으로 양식으로 주신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이 세상이란 것은 현실이고 그 현실 속에는 많은 것이 들어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현실을 내가 온유함으로 현실을 다스리고 지켜서 이기면 밥으로 삼아 먹으면 그 모든 현실 전부는 내 것이 되는 것이고 영원한 천국의 자본이 되어지는 것이라. 온유 이거 참 좋은 겁니다. 그러니까 온유의 반대말은 초조함이고 조급함이고 이런 것이 온유의 반대지요. 그러기 때문에 원망하지 말아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온유하면은 원망이란 게 없는 겁니다. 온유는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이게 전부 온유하고 연결이 되어지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고문고형을 하고 톱으로 켜고 가죽을 벗기고 어떻게 해도 믿음으로 인해서 요동치 아니하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라, 그게 온유함입니다.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런 극단의 어려움을 평소 우리 생활에서 온유함으로 자꾸 연습해나가는 거기서 이런 극단의 어려움까지 이길 수 있는 그런 온유가 연습되어지고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온유함이 있는 사람은 화를 내지 않습니다. 감정을 내지 않습니다. 충분히 얼마든지 능가할 수 있으니까. 오전에 말씀드린대로 정권을 잡은 그 사람이 자기 정권 잡을때 극단적으로 방해했던 사람은 잡아다가 사형선고 판결을 딱 내려놓고 얼마지나고 난다음에 그 사람은 석방을 시켰습니다. 다 아는 사람입니다. 여기 이정도 말하면 아마 세상 정치 아는 분들 다 누군지 알겁니다. 말은 안해도. 그럴때 목사님께서 ‘자신 있다는 말이지. 충분히 제어할 수 있는 다스릴 수 있는 자신감이 있다는 말이니까 좋은 것이다’. 그러니까 힘이 없는 사람은 베풀지를 못합니다. 안 그런가요? 돈이 없는 사람은 남에게 돈으로 도와주지를 못하고 지식이 없는 사람은 남에게 가르쳐주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용서라 말도 그렇다 하데요. 용서라는 것은 힘이 있는 자가 하는 것이다. 베푸는 것은 힘이 있고 여유가 있는 사람이 베푸는 것이지 여유 없으면 베풀지 못합니다. 우리는, 나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재물이 있습니까? 힘이 있습니까? 지식이 있습니까? 배경이 있습니까? 없는데 하나님을 배경 삼으니까 하나님이 내 배경이고 모든 전부다가 하나님의 것이니까 그분을 배경삼고 믿으므로, 주님 대속 근거해서 전부다 내것이니까 그러니까 무슨, 찬송가 115장,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그 다음 뭡니까? 내 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그 다음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또? 믿음으로 사는 자는? 그다음? 제가 기억이 안나 그럽니다.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그게 온유입니다, 온유. 그러니 그 사람은 조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관계 때문에 조급할 수 있는데, 그거 아니면, 그래서 애통이 있어야 애통이라는 과정을 통과해야 온유가 나옵니다. 애통이라는 과정을 통과하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난 다음에 비로소 온유함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사람을 대하든지 사건을 대하든지 모든 면에 대해서 넉넉하고 여유있고 배짱도 있고 조급하지 않고 감사하고 기쁨으로 상대할 수 있다.
네 번째,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거기에 갈급하고 배 고픈 그 사람, 그 사람은 거기 주력할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넘치도록 이루어져서 배부른 사람이 될 것이고 그 의인은 결코 세상적으로 배를 굶는 일이 없다. 의인의 자손이 걸식하는 법이 없다.
다섯 번째,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은 한말로 말하면 사랑인데, 다른 사람을 자기처럼 사랑하는 걸 긍휼이라 그리 말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야고보서 2장 13절, 긍휼이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이게 바로 긍휼이 여기는 자는 긍휼이 여김을 받는다는 바로 같은 뜻입니다. 긍휼이 모든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내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면 나는 하나님 앞에 긍휼 받고 용서 받습니다. 결코 손해가는 거래가 아닙니다. 그런데 무섭게도 내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내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이 도리를 깨닫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용서 못할 죄가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빚진 동감 비유를 생각해야 됩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형제는 우리 주변 사람들입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하리이까? 몇 번입니까? 하루 일곱 번까지 하면 되겠습니까? 하루 일곱 번씩 하면 많지 않습니까? 하루 일곱 번이면 이틀이면 열네번, 열흘이면 칠십번, 얼마나 많습니까? 하루 일곱 번쯤 용서해주면 됩니까? 주님 말씀은 일곱 번이 아니고 일흔번씩 일곱 번이니까 끝이 없습니다. 만수에, 하나님수에 또 하나님 수를 곱했으니까 끝이 없는 거지요 이거는. 그러니까 끝없이 용서해주라. 그러고 난다음에 나온 비유가 빚진 동관 비유입니다. 일만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하도 빌어서 용서해 탕감해 주었더니 저한테 백데나리온 빚진 자기와 동급의 관리 하나를 붙들고 목을 붙잡고 ‘빚을 갚아라’ ‘갚겠습니다. 기다려주옵소서’ 빨리 갚으라고 감옥에 넣어버리니까 주인이 ‘아 나쁜놈, 참 나쁜 놈이네’ 안 그렇겠습니까? ‘나는 너한테 일만달란트 빚을 갚아줬는데, 겨우 백데나리온 빚 그걸 안 갚는다고 감옥에 넣어? 너는 일만달란트 갚아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바로 말씀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내 죄를 용서하지 않는데, 사람이 나한테 죄를 지어봐야 얼마나 큰 죽을 죄를 짓겠습니까? 그걸 용서 못하면 하나님은 우리는 영원히 지옥 갈 그 죄를 하나님은 우리는 영원히 지옥 갈 그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겠다는 성경입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내가 사람은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다 그말입니다. 참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단 것이 아니고 되로 주고 이거는 뭐 몇 가마니로 받는 비교 못하는 그런 것이겠지요.
여섯 번째,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청결이라 말은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고 맑다는 말은 거기 이물질이 섞여있지 않다 그말입니다.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 들어있지 않다는게 맑은 것이고 깨끗이라 말은 원래 그 모습 본질 본성 그대로를 깨끗하다 그래 말합니다. 날씨로 딱 생각해보면 바로 알고 물로 생각해보면 압니다. 맑은 물에는 찌꺼기가 없습니다. 맑은 물은 다 거슬리고. 그런데 찌꺼기 있는 물은 휘저으면 대반에 더러워지지요. 그게 맑고 깨끗하지 않아서 그런겁니다. 맑은 날에는 구름도 안끼고 황사도 없습니다. 먼지도 없고. 먼지가 뿌옇게 끼면은 날이 맑지 못합니다. 구름도 끼어도 그렇고. 그거는 다른 것이 끼어서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마음이 청결하다 그말은 우리 마음속에 사사로운 것이, 하나님이 허락지 않은 그런것이 마음속에 들어오면 마음이 지저분해지고 찌꺼기가 들어서 그 마음이 변질된 마음이 되면은 청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가리워있으니까 하나님과 자기 사이가 가리었으니까 하나님이 안보이겠지요. 마음이 청결하면 하나님은 보입니다. 자, 하나님 보셨습니까? 나는 하나님을 만나봤는가. 만나보지 못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 마음은 불결하구나. 청결하지 못하구나. 이렇게 단정을 지으면 거의 틀림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별로 만나지 못했다. 성경은 보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본다 그랬는데 나는 마음이 하나님이 안보이는 것 보니까 내 마음은 더럽구나. 이렇게 판단하면 별로 틀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판단하고 자기 마음을 살펴야 됩니다. 같이 한번 해보실까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그다음 일곱 번째,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이거는 바로 내가 예수님처럼 대우 받는다 그말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만물 사이를 붙이는 화목시키는 이것도 주일학교때 가르치데요 보니까. 마귀가 에덴동산에서 제일 처음에 한 일이 뭡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벌어트린, 이간질 시키는 겁니다. 벌어트리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물질 사이를 벌어트리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일입니다. 붙이는 겁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하나님께로 끌어붙이고, 사람과 사람을 붙이고, 사람과 만물을 붙이려고 화목케하려고 노력하는 우리가 되야되지 이걸 벌어트리면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에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았다. 천국은 의인의 나라고 의의 나라라. 우리는 의에 거하는바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도다. 천국은 바로 의에 나라고 의인에 나라입니다. 천국에 속한 사람은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여덟가지 팔복, 앞에 세가지는 좀 말씀을 드렸고 뒤에 다섯가지는 대충 했는데 새벽기도때 또 계속해서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팔복의 말씀을 생각을 하고 이 말씀을 잣대로 삼아서 거울로 삼아서 이 말씀에 나의 모든 언행심사를, 생활을 한번 대조해보십시다. 이 말씀과 맞지 않으면 바로 우리는 이 말씀에서 어긋나는 사람이고 이 말씀에 어긋나면 이 말씀이 약속하시는 복은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팔복을 받는 우리가 되도록 하십시다.
제목: 산상보훈
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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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설교
20140601 주후
마태복음 5:1-12
오전 말씀을 복습을 하고 뒤에 계속해서 이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산상보훈’이라 이름을 아주 좋게 붙였습니다. 이거는 세상 국어사전에도 나오는 말이고 백과사전에도 기록이 되어있는 내용입니다. 사전에 ‘산상보훈’ 찾아보면 세상 사람들이 아는 그 범위로 내용을 적어놨습니다. 산상수훈이라고도 하고 황금율이라는 말은 그 뒤에 있는 말씀, 7장인가 그 끝에 있는 그 말씀을 두고 하는 말인데 전체적으로 5장부터 7장까지 말씀 전체를 황금률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본문의 말씀은 팔복이라고도 합니다. 팔복. 여덟가지 복이라 그래서 팔복이라 그렇게 말씀을 합니다. 복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믿는 성도에게 주시는 상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상급이란 것은 잘한 사람에게 마땅히 상을 받을만한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 상급입니다. 아무나 받을만한 그런 자격이나 공이 없는데도 상을 주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상급은 일종의 노력에 충성에 또 공로에 승리의 댓가로 주는게 상급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고, 은혜라는 것은 공으로 주시는 것이 은혜인데 은혜 역시 두가지가 있어서 하나는 기본적인 은혜가 있고 또 하나는 건설적인 은혜가 있어서, 기본적인 은혜는 일반적인 은혜고 보편적인 은혜로 누구에게나 다 주시는 것이라서 이거는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 할 것 없이 다 주시는 은혜고 또 믿는 사람에게도 공통적으로 주신 은혜가 있고 그중에도 건설적인 그런 면으로 주시는 은혜가 있으니 그거는 일종에 상급과 같은 것이고 복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이란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은혜라 그렇게 말할 수 있고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이다고도 말할 수 있고 또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지능 그 이상에 은혜를 주시는 것 이게 복이라 말할 수 있고 하나님이 친히 지극히 큰 능력으로 우리를 잘 되도록 해주시는 이런 역사를 가리켜서 복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영육간에 복이 다 그러한겁니다.
그러면 복이란 것은 받을만한 행동이 있어야 복을 받고 복을 받을만한 생활을 해야 복을 받고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복을 받지,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런 행동 생활 그런 사람이 되어있지 못하면 복은 줄 수가, 받을 수가 없는 것은 필연한 것입니다. 공부를 꼴찌하는 사람에게 상을 줄 수 있는가? 상을 줄 수 있겠습니다. 무슨 상을 줄까요? 공부 꼴찌했으면 무슨 상을 주겠습니까? 격려상이라 그래 줄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거는 상이, 상이란 것은 영광이라야 되는데 못해서 힘내라고 받는 상은 수치가 되어지겠지요. 부끄러운 상입니다 그런것들은. 복이란 것은 하나님이 받을 수 있는 그런 언행심사를 하고 그런 생활을 하고 그런 사람이 된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지 아무렇게나 복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귀한 것이고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흔하게 되면 더 이상 귀하다 하지를 아니합니다. 아무리 값비싼 것이라도 흔하게 되면 값이 떨어지는 것이 필연이고 흔하면 귀하다 하지 않습니다. 축복은 귀한 것이고 하나님 은혜는 귀한 것입니다. 성경에 복을 많이 말씀했지만은 정작 복을 받은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우리 중에도 모두 영육간에 복을 받은 분들이 더러더러 계실건데 그 받은 복들이 보면은 대개 한정이 되어있고 제한적이고 다 지업적이고 이러하지 전체적으로 원만하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영육간의 복을 다 받은 사람은 참 보기가 쉽지를 아니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공부하면서 집사님 기도하신대로 복을 받기로 원하고 실제 복을 받는 여덟가지 복을 받아가지는 우리가 되는 것이 이 말씀을 공부하는 목적이고 여덟가지 복을 받아 가지려고 하면 이 복을 받을 수 있는 우리 사람이 되어야 되고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복 받을 수 있는 생활을 하고 언행심사를 하면 되는 것이고 그 복 받을 수 있는 생활을 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방법을 알아서 기준도 알고 내용도 알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는지 알아가지고 노력을 하면 되는 겁니다.
팔복에 첫 번째 복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찬송가, 우리 찬송가에는 없지요 아마. 그게 가본에 있을건데. 마음이 빈 자는 복이 있는 잘세 천국이 저들의 것임이요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마음이 빈 자는 복 있는 자라. 심령은 쉽게 말하면 마음이라 그 뜻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그냥 마음이 아니고 영에게 속한 마음, 영에게 붙들린 마음을 심령이라 그리 말합니다. 이거는 교리적인데 깨닫기 어려운데 백목사님 설교록에 그렇게 해석되어 나옵니다. 영에게 속한 마음, 영에게 붙들린 마음을 ‘심령’이라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그 이유는 그 마음이 영에게 붙들렸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것이고, 영에게 붙들렸다 그 말은 하나님께 붙들렸다는 뜻이고 영과 하나님은 항상 동행입니다. 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에게 붙들린 마음은 하나님께 붙들린 마음이 되고 하나님에게 붙들렸다는 그말은 하나님이 그 마음을 주인으로 움직이신다는 그런 말이고 그러면 그 마음에 대해서 나 자신은 마음에 대해서 주권이 없다는 말이고 그러므로 그 자체적으로 심령이 가난한 그런 것이 되어지겠고,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봤습니다. 사람이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마음에 대해서 자기가 주인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그 마음에 주인되는 것이 심령에 가난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걸리는게 뭐냐하면 마음을 자기가 마음대로 한다.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진 않겠지만은 드물지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내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 그 마음을 지켜야되는데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못합니다. 그런데 왜 마음에 주권을 자기가 가지고 아니면 하나님께 맡긴다 하느냐? 내가 내 마음을 마음대로 못하는데. 내가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하면 또 하나님이 그 마음을 붙들지 못하면 그러면 그 마음은 누가 붙들고 있는 겁니까? 자기 마음을 자기가 붙들지 못하면 그런데 하나님이 그 마음에 주인이 되지 못했다면 그 마음은 누가 붙들고 있는 겁니까? 악령이 붙들고 있습니다. 마음이란 것은 독립 독행할 수 없는 존재고 어떤 것에게 붙들려 피동으로 사는 것이 움직이는 것이 마음인데, 하나님께 붙들리지 않았으면 악령에게 붙들린 것이고 그 악령은 악령이 내 마음을 붙들었는데 악령이 내 마음을 악령의 것이니까 강제하나 예수님의 대속이 없는 사람은 마음을 악령이 강제하나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사람은 성도의 마음은 결코 악령이 강제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내 마음을 악령이 강제한다 그말은 내가 그 마음을 악령에게 내어줬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네가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켜라’ 그거는 내가 하나님께 붙들린 마음으로 지킨다는 뜻이고 하나님께 붙들린 마음으로 지키지 못하면 그 마음은 막바로 악령에 붙들린 마음이 되어진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은 바로 악령에게 붙들린 마음인데 제가 그 마음에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에서 주인이 되어있는 것이니까 그 마음의 주인은 자기고 그러면 그 마음이 자기가 주인된 마음이 많으면 그 마음은 부요한 마음이 될 수 밖에 없게 되어있습니다. 필연입니다. 그러면 내 마음을 내가 붙들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붙들리고 영에게 붙들리면 그 마음은 심령이고 그 심령은 가난한 심령이 되는 겁니다. 어디에 대해서 가난하게 되느냐? 물질에 대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장 가난을 느끼는 것은 물질에 대한 가난입니다. 어쨌든 돈은 먹고 죽어도 좋으니까 돈만 좀 많았으면 좋겠다. 돈에 깔려 죽어도 돈 좀 많았으면 좋겠다. 돈에 치여죽어도 돈 좀 많았으면 좋겠다, 그게 돈에 포원진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 돈에 대해서 가난이고 가난은 갈급을 부르는 겁니다. 가난은 갈증과 갈급, 굶주림과 갈급을 부르게 되는 것이 가난입니다. 돈에 대해서 마음이 가난하면 그 마음은 돈을 갈구하게 되고 찾아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마음이 돈에 대해서 갈급해서 돈을 갈망하고 갈구하는 그 마음이 과연 복있는 마음이겠는가? 복이 없는 마음입니다. 돈에 대해서는 갈망하지 않아도 어떤 사람은 돈이 많으니까 권력을 지고 싶어서 이거는 여기 있는 우리들은 권력에 대한 욕망이 없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권력이란 것은 국가의 권력도 권력이고 교회의 권력을 교권이라 그러고 가정에도 권력이 있고 사람 몇 사람 모이면 거기도 권력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모이면 학교에서 아이들이 주먹싸움하는 소위 말하는 일진이니 이진이니 삼진이니 하는 그 아이들의 장난하는 그런 것도 하나의 권력다툼 주먹싸움 그것도 권력입니다. 제가 머리 되고 싶고 뭐든지 제가 주장되고 제 마음대로 하고 싶은 그게 권력의 욕심인데, 권력에 맛을 들여놓으면 그것도 아편만큼이나 끊기가 어렵다 그럽니다. 권력의 욕심. 권력에 갈급한 사람은 요즘 선거하는데 제가 계산 한번 해봤습니다. 선거하는데 있어서 선거운동원들을 보나마나 자원봉사자라는 이름으로 쓸건데, 한사람 앞에 하루에 여자분들 암만 못줘도 7만원은 줘야 될 것 같은데 하루에. 하루에 칠만원. 그러면 부산시의원 한다 그러면 부산시전역에 그 사람들을 다 풀어놔야 되는데 그러면 하루에 칠만원 열명이면 칠십만원, 백명 가지고 부산시에 다 풀어놓겠습니까? 백명이면은 하루에 칠백만원. 열흘이면은 얼마입니까? 칠천만원. 그런데 이백명이면 일억사천만원. 그래서 선거는 돈이 없는 사람은 선거 못하는 겁니다. 돈이 엄청나게 깨집니다. 그래서 어지간한 돈 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원 선거 한번 나서고 떨어지면 그날로 집안이 망합니다. 그런 사람들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가지고 집안 말아먹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집안을 말아먹어도 권력을 한번 잡아보겠다. 권력에 가까이 가보겠다. 권력에 욕심입니다. 명예욕이 있는 사람들은 돈을 싸들고 가서 학위도 받고 명예를 또 얻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돈보다 명예를 얻어라 그래되어있는데 명예 그것도 일종에 욕심입니다. 자기 위신욕 과시욕 별에별 종류의 사람의 욕심 소원 소망 이게 전부 마음에 뭔가 자기가 갈망하고 가난해서 그것을 찾고 얻고 취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가난이고 가난이 갈망과 갈구를 부르고 갈급을 부르고 그것을 향해서 노력을 하게 되는 겁니다. 학벌을 원하는 사람도, 그래서 시험쳐서 일류대학에 시험쳐서 떨어지면 재수하고 삼수하고 몇 수를 해도 기어코 일류대학을 가야되고 또 고시치는 사람들은 옛날에 그 고시가 옛날으로 말하면 급제하는건데, 과거급제인데 요즘 말하면 사법고시 행정고시 그게 옛날로 말하면 과거 급제인데 거기 평생을 그래 매달린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한자리 좀 해보겠다고. 그것도 일종에 가난입니다. 평생 시간 세월 자기 정력 노력 물질 다 투자해서 그래 얻는데 얻어봐야 가보면, 옛날에는 참 고시 급제하면 팔자를 고치는데 요즘은 그것도 쉽지 않지요 아마. 요즘 사법고시 합격해봐야 판사 검사 되기가 하늘에 별따기처럼 어렵다 그러지요. 수만명이 시험쳐서 그중에서 열명이나 되는가 모르겠습니다 합격하는 사람이. 그만큼 어려운데 되어봐야 몇 년 지나고나면 그렇고 먹고 사는 거는 먹고 살기 위해서 같으면 그 머리 가지고 또 다른 것 하면 길은 얼마든지 있을건데 외길로만 가는 그것도 참 어떻게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은. 별에별 그런 사람의 갈급 심령의 가난 이런것이 있는데 마음의 가난인데 심령의 가난, 영에게 붙들린 그 마음에 가난은 그런 것에 대해서 가난하질 아니하고 한말로 말하면 천국에 대해서 가난입니다. 그런데 묘한게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것임이라 그랬으니까 이 사람은 천국이 없는 사람입니까 천국을 가진 사람입니까?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그랬으니까 천국이 이미 저희 것이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천국이 저희 것이 되어있는데 뭐 천국에 대해서 가난한가? 그래서 묘한 겁니다. 세상 것은 가지면 가질수록 가진만큼 그것이 그릇이 차게 되고 더 이상 들어올 자리가 없게 되고 올라가고 올라가서 다 올라가고 나면 더 이상 올라갈 자리가 없고 떨어져 내려오는 것만 있는게 세상 권력이고 자리고 물질은 많아서 자꾸 많아지고 채우는데 욕심이 끝이 없지만은 차고 나면 그다음에는 또 그게 없어지고 이래되는 그게 물질이고 세상 것은 또 어느정도 잡아보고 나면 권태나고 별 것 아닌 것이 세상에 대한 것인데 천국에 대한 것은 신기하게도 이거는 가지면 가질수록 점점 더 갈급이 더 심해지는게 천국의 것이고 그런데 세상에도 이런 성격이 있는데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은 것 더 누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거는 그리 될수록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이고 자기를 패망시키는 그런 것인데 천국에 속한 것은 가지면 가질수록 많아질수록 더 갈급하고 갈망한데 거기 대해서 느끼는 자기 느낌이나 자기라는 사람은 점점 더 인격적으로 도덕적으로 지능적으로 구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지면서 신비스러운 그런 온전함에서 나오는 그런 신비한 그런 쾌락이 있으면서 더 기쁘면서 더 갈급하면서 더 고급스럽고 더 고차원적이고 더 인격적이고 더 영광스럽고 좋은 말은 다 갖다붙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꾸 갈급이 생기니까 기도를 자꾸 하면 치우친 기도 아니고 바른 기도, 가끔 한번씩 말씀을 드렸습니다만은 백목사님께서 남해에 남해 내산? 집사님 남해 내산이 있습니까? 남해에 내산이라는 곳이 있습니까, 내산? 남해에 내산이란 곳이 있답니다, 내산. 남해 내산 기도원에 몇일 금식기도하고 갔다오면서 버스에서 가만히 생각을 해봤답니다. 생각해보니까 참 교인들 일반 사람들은 하루만 기도하려 그래도 직장을 비워야 되지요 결근계를 내야 되지요 사업을 못하지요 가정에 청소 집안일 못하지요. 큰 문제가 생기니까 기도하기 어려운데 교역자가 되놓으니까 기도를 많이 다닐수록 교인은 더 좋아하지요. 다른 사람 성경 읽는게 그리 힘이 드는데 성경 읽을수록 더 좋아하지요. 또 심방 전도 많이 할수록 더 좋아하지요. 그러니까 하늘의 상급이 많지요, 자기 신앙으로 성화되어 지지요, 교인들 다 좋아하지요, 하나님 기뻐하시지요. 이거는 뭐 일거양득이 아니라 전체적인 면으로 좋은 것 유익된 것만 다 갖췄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이런 길을 들어섰는가 하고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래 오셨다고. 설교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어디 속한 것이라고요? 이런게 바로 천국에 속한 겁니다. 그래서 천국에 속한 갈급은 이런 갈급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가져도 가져도 차지 아니하고 실제는 자꾸 찹니다. 자꾸 차는데 자기는 더 갈급해지고 차면은 빈자리가 자꾸 줄어드는데 빈자리는 자꾸 더 넓어지고 차면은 사람이 그만큼 교만해지고 오만해지기 쉬운데 더 조심스러워지고 내가 많이 가지면 다른 사람들은 자기 것을 빼앗기니까 못가지니까 시기 질투를 할건데, 천국에서는 내가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다른 사람들이 더 좋아하고 더 존경하고 더 감사하고 하나님 더 좋아하시니까 만고에 참 좋은 이게 천국에 속한 심령이 가난한 자가 가지는 천국에 가난이다 그말입니다. 이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복을 생각해보셨습니까? 이런 복을 가져보시고 맛을 보셨습니까? 이게 참된 천국의 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복. 그러기 때문에 이런 복을 이런 천국에 속한 것을 가져보고 맛을 보고 누려본 사람들은 세상에 어떤 것을 줘도 그거는 꾸린내가 나서 악취가 나서 또 수준이 낮아서 그거는 너무 수치스러워서 거기 대해서는 눈을 돌리지를 아니합니다. 이 세계를 맛을 봐본 사람들은 아멘이 되고 동감이 되어질 것입니다. 이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천국이 저희것임이요. 천국은 바로 이 사람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은 하나님이 통치자 주권자 왕이 되시고 하나님의 절대 불변의 자유의 율법인 진리가 그 나라 법이고 지공지성의 그 나라 법이고 빛이 있어 공의가 있고 사랑이 넘치는 그리고 끝이 없는 알파와 오메가의 영원무궁한 그 나라가 천국이다. 이 나라는 그 나라의 사람이 돼서 그 나라에 대한 갈급이 있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다. 이 사람이 천국 사람이고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신앙생활에, 지난 주일에 아브라함의 신앙 공부하면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신앙출발이고 방향전환입니다. 예수 믿는 겉모습은 내면적으로 택하심을 입고 중생이 되고 때가 되면 부르심 받아서 교회를 다닙니다. 겉모습입니다. 그런데 교회 다니기까지는 하나님 은혜로써 신앙출발의 겉모습인데, 실제로 신앙출발을 한 사람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다. 무엇과 무엇이 바뀐 겁니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다 말은 무엇과 무엇을 바꾼 겁니까? 소속과 소망을 바꾼 겁니다. 이 세상에 땅에 피조물에게 소속이 되고, 소속이라 말은 자기가 거기 박혀 있다 그말입니다. 뿌리가 거기니까 그것에 따라 움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수박을 딸 때 수박을 저기서 땄는데 그 수박에 넝쿨이 몇미터 뻗어나갔는데, 호박도 그렇고 그 뿌리 찾아보니까 몇미터 저 쪽에 뿌리는 있는데 넝쿨이 뻗어나가서 저쪽에 있다 그말이죠. 그러니까 그걸 들면 뿌리를 찾아 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뿌리 쏙 뽑아버리면 몇 미터 밖에 있는 수박이 다 말라 죽지 않겠습니까? 뿌리가 뽑혔으니까. 그게 소속입니다. 자기가 어디 소속했느냐? 신앙 노선도 일종에 소속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소속되고 천국에 소속된 이것으로 방향을 소속을 바꾸고, 방향이라 말은 소망입니다. 자기가 나아가는 방향. 어디를 향해서 나아가느냐? 천국을 향해서 가느냐 세상 향해 가느냐?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다 물어보지요? ‘하나님을 믿습니까?’ ‘아 믿지요. 당연히 믿습니다.’ ‘예수 믿습니까?’ ‘믿습니다.’ ‘성경 믿습니까?’ ‘믿습니다.’ ‘하늘나라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소망합니까?’ ‘당연히 소망하지요.’ 그런데 천국을 소망하고 방향 삼고 소망 삼고 방향으로 나아가고 뿌리가 천국이라 하나님이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인식이 바뀌어야 됩니다. 인식은 자기 주관이 된 지식입니다. 자기를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그 지식이 바로 인식입니다. 자기를 끌고 가는 그 지식 그게 인식인데 인식이 바뀌면 신앙중심에 소속과 소망이 바꾸어진 그 사람의 인식이 바꿔진 그 사람은 인식이 바꾸어지면 생활 모습이 달라집니다. 생활의 방편이 달라집니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우선순위가 변해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기 때문에 우선 순위가 자기보다 하나님, 모든 사람보다 하나님의 뜻, 보이는 조건보다 하나님의 축복이 우선이였고, 롯은 몸은 따라갔는데 내면적으로 본토 친척 아비집을 실제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막상 딱 닥치니까 우선 순위가 바꾸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롯의 신앙모습으로 사는 예수 믿는 사람들, 겉은 믿고 천국 소망하고 성경 믿는다 하는데 내면적으로 실제 인식과 생활, 모습, 생활의 가치, 우선 순위 이게 바뀌지 않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거의 대다수라 할만큼 그렇게 많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사람은 약한게 사람입니다. 약하면 쉽게 넘어집니다. 그러니까 이게 바꾸어져도 가다보면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꾸어져서 가다가 넘어지는 사람하고 아예 바뀌지 아니하고 근본적으로 그냥 그 자리 있는 사람하고는 완전히 틀립니다. 이거는 성경 가지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 압니다. 여기서 이것이 뿌리되고 원동이 되어서 나타나는 것이 자기 모든 일상생활이 전부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모든 취사선택, 이게 어려운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뭔가를 골라서 가지고 취하고 버리는 선택 또 모든 사리에 판단하는 것, 비판하고 평가하고 처리하는 것. 자기 모든 생활, 학교 생활, 직장 생활, 사업 생활, 처소 마련, 자녀 생산, 자녀 양육, 결혼 이 모든 전부다가 다 여기서 뿌리되서 나오는 겁니다. 그 보면은 이 생활 전부 이게 되어가지고 나오는 그 사람하고, 그러니까 외부로 드러나는 그 사람의 생활 가정 모습을 보면은 그 사람이 과연 바뀌었는지 안 바뀌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말입니다. 넘어지는 사람하고 약해서 넘어지는 사람하고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은 사람은 틀립니다.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고 천국에 속한 사람이 돼서 천국을 차지하는 이런 우리가 되어야 되겠고,
두 번째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애통이라 말은 슬퍼하고 아파하는 겁니다. 몸입니까, 마음입니까? 애통이란 말은 그 대상이 몸이겠습니까 마음이겠습니까? 마음이겠지요. 애통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슬프고 마음이 아픈 겁니다. 왜 슬프고, 슬픔이 지나치니까 아픈 고통이 따라옵니다. 왜 마음이 그렇게 겉으로 슬프고 아프게 되어지느냐? 사랑하는 가족이 큰 변을 당하면 슬프고 고통스럽고 일반적으로 보니까 이별은 슬픔을 부릅니다. 사랑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하고 떨어져 이별하면은 슬프고 아픕니다. 또 그런 말을 듣고 그런 상황을 보면 또 마음이 슬프고 고통스럽고 아픕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위로를 합니다. 그거 복입니까? 가족을 잃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그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음이 슬프고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니까 주변 사람이 와서 조문 오고 위로 합니다. 복입니까? 또 사랑하는 사람하고 헤어졌습니다. 이별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주변에 와서 위로해줍니다. 복입니까? 그거는 복이 아닙니다. 그거는 불행이지요. 불행이니까 위로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그랬습니다. 그 애통이 무슨 애통이길래, 또 위로는 무슨 위로길래 그게 복이 되는가? 복이라 말은 나쁜 겁니까, 좋은 겁니까? 복은 좋은 겁니다. 귀한 겁니다. 그러면 무슨 애통이 무엇이길래? 위로는 무엇이길래. 이 애통이란 것은 반드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 애통은 나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두가지를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는 자기의 죄 혹은 불의 불충, 자기 잘못된 것, 하나님 앞에 삐뚤어진 것, 하나님의 진노를 쌓은 것 이것 하나있고, 또 하나는 뭘 생각해야 됩니까? 사람이 슬프고 고통스러울때 필연적으로 슬프고 고통스러운 이유는 원인은 연결되는건데, 사람이 죽었습니다. 슬픕니다. 왜 슬픕니까? 죽은 사람을 살리지를 못하니까 슬픈 겁니다. 헤어졌습니다. 슬픕니다. 왜 슬픕니까? 다시 만나면 되지요.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슬픈 겁니다. 그게 인간의 무지무능의 연약성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도 애통이란 것은 두가지 면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 자기가 잘못한 겁니다. 죄를 지었든지, 하나님의 뜻을 져버렸든지, 다른 사람에게 신앙의 손해를 끼쳤던지, 덕을 끼치지 못했던지 어쨌든 하나님의 노를 쌓은 것 하나, 그런데 두 번째는 자기가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겁니다. 자기 연약성. 그래서 자기 죄악성과 자기 연약성 이 두가지를 하나님 앞에서 발견할 때 비로소 애통이 나오는 것이고 이 발견한 것이 크고 강할수록 애통은 크고 강하게 되는 것이고, 애통이 크고 강할수록 하나님의 위로는 그만큼 간절하게 임하게 된다 그말입니다. 성경이 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배반하고 고기 잡으러 갔던 베드로를 심방오신 주님이 깊은데 가서 그물 내려 고기를 잡으라. 베드로 마음 속에 ‘선생이여 내가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은 하도 선생님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되지도 않는 말이지만은 하니까 선생님 앞면을 차마 무시 못하겠고 대우해서 내가 그물 내려보기는 내려보겠지만은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마음속으로 그렇게 다짐을 하고 그물을 내렸으니까 예수님을 속으로 무시했고 깔봤고 멸시했고 그래 했지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무시했잖습니까? 선생이여, 하고 그랬으니까 무시했고 말씀을 믿지 않았고 깔봤고 차마 그냥 막 좇아내지는 못했지만은 실제는 쫓아냈다 그말이지요. 아주 불경하게 그래 한겁니다. 그러니까 버르장 머리 없이 차마 인격적으로 말은 했지만은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고기 잡히고 나니까 베드로가 정신이 번쩍 들었지요. 내가 주님을 배반했는데 주님 배반하고 져버리고 돌아온 것, 주님 말씀을 무시한 것, 주님 자체를 무시한 것, 불신한 것, 그동안에 말씀으로 살지 못한 것, 이런 걸 생각하니까 기가 찬 겁니다. 원통하고 마음이 슬프고 아픈 겁니다. 그래서 주님 발 앞에 엎드려 졌는데 그 마음이 애통이 되니까, 주님이 애통을 넘어서 두려워하기까지 하니까 주님이 두려워하지 말아라고 위로를 하신 거지요.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가서 고비고비 넘어서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이 돼서 주님을 발견하고 나서,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님 앞에 자기를 발견하고 보니까 옛날하고 전혀 다른 주님이였습니다. 그 주님은 두려워하지마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그 말은 나는 변하지 않았다. 주님은 변하지 않는 분입니다. 누가 변했습니까? 누가 변했습니까? 주님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변한 겁니까? 사도 요한이 변했는데, 어떻게 변했습니까? 눈이 그만큼 밝아졌습니다. 눈이, 우리 눈에 이게 돌아다니는 공기 중에 돌아다니는 병균이 우리 눈에 안보이지 않습니까? 우리 손톱 밑에 세균이 우글우글 하다 그러지요. 보입니까? 그런데 현미경으로 갖다대면 우글우글하게 보인다 그러지요. 눈이 어두워서 안보이는 겁니다. 자연계시입니다. 주님은 그대로인데 눈이 어두워서 그분을 몰랐는데, 밧모섬에 주를 위한 말씀 때문에 고난받고 성령에 감동되서 전에 모르던 그 음성 듣고 알아보고 주님을 보니까 주님이 보였는데 옛날하고는 전혀 다른 주님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앞에 기절해버렸습니다. 너무 겁이 나서. 이런 분인데 내가 멋도 모르고 그 앞에서 품에 의지해서 드러누워서 ‘선생님~’하고 어리광도 부리고 그랬잖습니까? 그러니까 죄송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너무 겁이 나서 기절하고 쓰러져버리니까 이거는 애통을 넘어서 기절해 죽어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어떻게 하셨다고요? 손을 얹고 위로 하신 겁니다. 이런 애통이 있을때 우리에게 주님 위로는 온다는 겁니다. 비유지만은 자녀가 잘못을 저지르고 부모님한테 바락바락 달라듭니다. ‘내가 뭐 잘못했는데요?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나만 잘못했습니까?’ 하고 목을 딱 고개를 들고 달려들면 부모님이 그냥 귀싸대기를 그냥 한 대 쎄려주고 싶겠지요. ‘이놈 자식, 버르장머리 없이 잘못했으면 용서를 빌고 잘못을 알아야지. 그러고도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그렇게 대들껀데, 작은 잘못을 하나 잘못인데 열 개나 잘못한 것처럼 그만 무릎 끓고,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옵소서.’ 하고 진정으로 빌면은 어지간하면 부모님이 제법 큰 사고를 쳐도 ‘야야 사람이 그럴 수 있는 거 아니가. 힘을 내자’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게 인지상정이라는 세상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고 사람의 마음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애통하는 자’ 잘못을 저지르고 애통하는 것, 연결이 되는데 세상적인 그런 것 때문에 애통하는 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그거는. 억울하다 분하다 내가 계산 잘못해서 돈 몇백만원 손해봤다 억울하다 분하다 이거는 가치가 없습니다. ‘이번에 내가 승진할 수 있는 자리인데, 내 경쟁자 저 사람이 나 대신 올라갔구나. 분하다. 잠이 안 온다.’ ‘이번에 거래처에 우리 회사에서 그 일거리 수주할 수 있는데 놓쳤다, 분하다.’ 이런거는 가치가 없습니다, 그거는. 거기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지 않습니다. 자기 죄를 발견했을 때, 하나님 앞에 자기 잘못, 삐뚤어진 것, 잘못된 것, 부족한 것 이걸 발견하고 연약해서 넘어진 자기 연약성 이걸 발견해서 마음이 진정 슬플때, 괴로울 때, 두려움까지 가면 더 좋겠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를 결코 버리지를 아니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회개하는 걸음에는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죄인에 대해서는 소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지 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회개가 끊어지는 그 순간, 하나님은 그에 대해서 버릴 수도 있습니다. 방림해 버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죄를 크게 많게 지어도 회개가 끊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은 결코 소망을 버리지를 아니합니다. 이것을 악용하면 문제가 되지만은 악용하지 아니하고 꼭 붙들고 있으면, 그래서 성도들은 약한 사람들은 많이 속으로 웁니다. 울다가 웃다가, 기뻐하다 슬퍼하다가, 괴롭다 즐겁다가 이것이 인격 대 인격의 교제, 신인교제 신앙생활에 이런 맛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신앙생활 하겠습니까? 이런 맛이 있으니까 잘못 했으니까 용서 빌고 또 다시 한참 잘못했다가도 하나님께서 잘못이 된 걸 보여주시니까 하나님이 지금 화가 나셨구나, 매를 대셨구나, 정신 차려야 되는데 안되니까 괴롭고 괴롭고 그러다 은혜 주시면 또 정신 차리고 또 한단계 올라가고, 그래가지고 자꾸 단계 단계 올라가고 몰랐던 것 깨닫게 되고 느끼게 되고 주님과 점점 가까워지고 성화되어지고 그래가지고 변화되는 것이 우리 구원이고 그러다보니까 세월은 유한한데 허비되는 것이 많으니까 아까운 것이 많지요. 징계가 많으면 허비가 많습니다. 그러나 약하니까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애통이 있으면 하나님이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위로.
그다음 세 번째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온유라는 말은 여유라는 말입니다. 넉넉함에서 나오는 여유. 넉넉함이란 것은 많이 있다는 겁니다. 모든 면에 다 그러합니다. 사람이 내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논리를 가지고 있으면 상대할 때 넉넉함이 나옵니다. 어떤 논리를 갖다대보십시오. 내가 다 이깁니다. 그런데 논리가 약하면 사람이 조급해지게 되는 겁니다. 논리도 그렇고 돈도 그렇고 어떤 자기 권력도 그렇고 힘도 그렇고 모든 면이 다 그렇습니다. 본문에 온유라는 것은 하나님을 배경 삼는, 예수님의 대속을 근거한 이걸 배경 삼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약속 이런 것을 근거해서 이런 걸 배경 삼음으로 세상 현실을 상대하는 그 상대에 대한 자세입니다. 그러니까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 그말은 땅을 상으로 주신다는 말도 들어있고 이 세상을 상급으로 주신다 그말은 세상을 내가 대해서 이겼기 때문에 그 세상을 내 밥으로 양식으로 주신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이 세상이란 것은 현실이고 그 현실 속에는 많은 것이 들어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현실을 내가 온유함으로 현실을 다스리고 지켜서 이기면 밥으로 삼아 먹으면 그 모든 현실 전부는 내 것이 되는 것이고 영원한 천국의 자본이 되어지는 것이라. 온유 이거 참 좋은 겁니다. 그러니까 온유의 반대말은 초조함이고 조급함이고 이런 것이 온유의 반대지요. 그러기 때문에 원망하지 말아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온유하면은 원망이란 게 없는 겁니다. 온유는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이게 전부 온유하고 연결이 되어지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고문고형을 하고 톱으로 켜고 가죽을 벗기고 어떻게 해도 믿음으로 인해서 요동치 아니하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라, 그게 온유함입니다.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런 극단의 어려움을 평소 우리 생활에서 온유함으로 자꾸 연습해나가는 거기서 이런 극단의 어려움까지 이길 수 있는 그런 온유가 연습되어지고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온유함이 있는 사람은 화를 내지 않습니다. 감정을 내지 않습니다. 충분히 얼마든지 능가할 수 있으니까. 오전에 말씀드린대로 정권을 잡은 그 사람이 자기 정권 잡을때 극단적으로 방해했던 사람은 잡아다가 사형선고 판결을 딱 내려놓고 얼마지나고 난다음에 그 사람은 석방을 시켰습니다. 다 아는 사람입니다. 여기 이정도 말하면 아마 세상 정치 아는 분들 다 누군지 알겁니다. 말은 안해도. 그럴때 목사님께서 ‘자신 있다는 말이지. 충분히 제어할 수 있는 다스릴 수 있는 자신감이 있다는 말이니까 좋은 것이다’. 그러니까 힘이 없는 사람은 베풀지를 못합니다. 안 그런가요? 돈이 없는 사람은 남에게 돈으로 도와주지를 못하고 지식이 없는 사람은 남에게 가르쳐주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용서라 말도 그렇다 하데요. 용서라는 것은 힘이 있는 자가 하는 것이다. 베푸는 것은 힘이 있고 여유가 있는 사람이 베푸는 것이지 여유 없으면 베풀지 못합니다. 우리는, 나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재물이 있습니까? 힘이 있습니까? 지식이 있습니까? 배경이 있습니까? 없는데 하나님을 배경 삼으니까 하나님이 내 배경이고 모든 전부다가 하나님의 것이니까 그분을 배경삼고 믿으므로, 주님 대속 근거해서 전부다 내것이니까 그러니까 무슨, 찬송가 115장,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그 다음 뭡니까? 내 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그 다음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또? 믿음으로 사는 자는? 그다음? 제가 기억이 안나 그럽니다.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그게 온유입니다, 온유. 그러니 그 사람은 조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관계 때문에 조급할 수 있는데, 그거 아니면, 그래서 애통이 있어야 애통이라는 과정을 통과해야 온유가 나옵니다. 애통이라는 과정을 통과하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난 다음에 비로소 온유함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사람을 대하든지 사건을 대하든지 모든 면에 대해서 넉넉하고 여유있고 배짱도 있고 조급하지 않고 감사하고 기쁨으로 상대할 수 있다.
네 번째,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거기에 갈급하고 배 고픈 그 사람, 그 사람은 거기 주력할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넘치도록 이루어져서 배부른 사람이 될 것이고 그 의인은 결코 세상적으로 배를 굶는 일이 없다. 의인의 자손이 걸식하는 법이 없다.
다섯 번째,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은 한말로 말하면 사랑인데, 다른 사람을 자기처럼 사랑하는 걸 긍휼이라 그리 말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야고보서 2장 13절, 긍휼이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이게 바로 긍휼이 여기는 자는 긍휼이 여김을 받는다는 바로 같은 뜻입니다. 긍휼이 모든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내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면 나는 하나님 앞에 긍휼 받고 용서 받습니다. 결코 손해가는 거래가 아닙니다. 그런데 무섭게도 내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내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이 도리를 깨닫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용서 못할 죄가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빚진 동감 비유를 생각해야 됩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형제는 우리 주변 사람들입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하리이까? 몇 번입니까? 하루 일곱 번까지 하면 되겠습니까? 하루 일곱 번씩 하면 많지 않습니까? 하루 일곱 번이면 이틀이면 열네번, 열흘이면 칠십번, 얼마나 많습니까? 하루 일곱 번쯤 용서해주면 됩니까? 주님 말씀은 일곱 번이 아니고 일흔번씩 일곱 번이니까 끝이 없습니다. 만수에, 하나님수에 또 하나님 수를 곱했으니까 끝이 없는 거지요 이거는. 그러니까 끝없이 용서해주라. 그러고 난다음에 나온 비유가 빚진 동관 비유입니다. 일만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하도 빌어서 용서해 탕감해 주었더니 저한테 백데나리온 빚진 자기와 동급의 관리 하나를 붙들고 목을 붙잡고 ‘빚을 갚아라’ ‘갚겠습니다. 기다려주옵소서’ 빨리 갚으라고 감옥에 넣어버리니까 주인이 ‘아 나쁜놈, 참 나쁜 놈이네’ 안 그렇겠습니까? ‘나는 너한테 일만달란트 빚을 갚아줬는데, 겨우 백데나리온 빚 그걸 안 갚는다고 감옥에 넣어? 너는 일만달란트 갚아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바로 말씀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내 죄를 용서하지 않는데, 사람이 나한테 죄를 지어봐야 얼마나 큰 죽을 죄를 짓겠습니까? 그걸 용서 못하면 하나님은 우리는 영원히 지옥 갈 그 죄를 하나님은 우리는 영원히 지옥 갈 그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겠다는 성경입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내가 사람은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다 그말입니다. 참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단 것이 아니고 되로 주고 이거는 뭐 몇 가마니로 받는 비교 못하는 그런 것이겠지요.
여섯 번째,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청결이라 말은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고 맑다는 말은 거기 이물질이 섞여있지 않다 그말입니다.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 들어있지 않다는게 맑은 것이고 깨끗이라 말은 원래 그 모습 본질 본성 그대로를 깨끗하다 그래 말합니다. 날씨로 딱 생각해보면 바로 알고 물로 생각해보면 압니다. 맑은 물에는 찌꺼기가 없습니다. 맑은 물은 다 거슬리고. 그런데 찌꺼기 있는 물은 휘저으면 대반에 더러워지지요. 그게 맑고 깨끗하지 않아서 그런겁니다. 맑은 날에는 구름도 안끼고 황사도 없습니다. 먼지도 없고. 먼지가 뿌옇게 끼면은 날이 맑지 못합니다. 구름도 끼어도 그렇고. 그거는 다른 것이 끼어서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마음이 청결하다 그말은 우리 마음속에 사사로운 것이, 하나님이 허락지 않은 그런것이 마음속에 들어오면 마음이 지저분해지고 찌꺼기가 들어서 그 마음이 변질된 마음이 되면은 청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가리워있으니까 하나님과 자기 사이가 가리었으니까 하나님이 안보이겠지요. 마음이 청결하면 하나님은 보입니다. 자, 하나님 보셨습니까? 나는 하나님을 만나봤는가. 만나보지 못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 마음은 불결하구나. 청결하지 못하구나. 이렇게 단정을 지으면 거의 틀림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별로 만나지 못했다. 성경은 보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본다 그랬는데 나는 마음이 하나님이 안보이는 것 보니까 내 마음은 더럽구나. 이렇게 판단하면 별로 틀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판단하고 자기 마음을 살펴야 됩니다. 같이 한번 해보실까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그다음 일곱 번째,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이거는 바로 내가 예수님처럼 대우 받는다 그말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만물 사이를 붙이는 화목시키는 이것도 주일학교때 가르치데요 보니까. 마귀가 에덴동산에서 제일 처음에 한 일이 뭡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벌어트린, 이간질 시키는 겁니다. 벌어트리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물질 사이를 벌어트리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일입니다. 붙이는 겁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하나님께로 끌어붙이고, 사람과 사람을 붙이고, 사람과 만물을 붙이려고 화목케하려고 노력하는 우리가 되야되지 이걸 벌어트리면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에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았다. 천국은 의인의 나라고 의의 나라라. 우리는 의에 거하는바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도다. 천국은 바로 의에 나라고 의인에 나라입니다. 천국에 속한 사람은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여덟가지 팔복, 앞에 세가지는 좀 말씀을 드렸고 뒤에 다섯가지는 대충 했는데 새벽기도때 또 계속해서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팔복의 말씀을 생각을 하고 이 말씀을 잣대로 삼아서 거울로 삼아서 이 말씀에 나의 모든 언행심사를, 생활을 한번 대조해보십시다. 이 말씀과 맞지 않으면 바로 우리는 이 말씀에서 어긋나는 사람이고 이 말씀에 어긋나면 이 말씀이 약속하시는 복은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팔복을 받는 우리가 되도록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