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8-주후(계1:9-16)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2014-05-19조회 341추천 27
본문: 요한계시록 1장 9절-20절(요약/2014.05.18.주일)
제목: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
1. 주의할 신앙 사상
- 지금 시대는 염세주의, 고행주의는 별로 없을 것
- 지금 시대는 세상주의 신앙이 가장 큰 문제
- 기본 상식으로 염세주의, 고행주의도 알아야 할 것
2. 신앙과 세상
-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있고, 세상 임금은 악령
- 신앙은 하나님을 향하고 천국을 향하는 것
- 세상과 신앙은 근본과 방향이 반대이니
- 세상이 신앙을 찬성하거나 용인할 리는 절대 없는 것
- 세상에서 신앙의 걸음에 마찰, 고난은 필연임을 기억할 것
3. 신앙과 고난
- 세상에서 신앙 걸음에 고난은 필연이지만
- 우리의 시간, 정력, 소유의 자본이 유한하므로
- 불필요한 마찰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신앙 지혜
- 고행적, 실수적, 사욕적 고난은 당하지 않도록 할 것
- 그러다 평안주의, 무사주의, 안일주의로 넓은 길 가지 않도록 주의할 것
4. 사도요한의 환난
1)본문에서
①요한은 형제: 범죄도 대속도 같은, 책임도 의무도 소망도 같은
②예수의 환난: 죄 불의 불목을 멸하고, 사죄 칭의 화친 건설을 위한, 인한
③예수의 나라: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생활, 하나님께 통치 받는 생활
④예수의 참음: 환난과 나라의 생활을 참음으로 계속
2)사도요한의 환난
①원인: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②환난: 밧모섬에 귀양(거짓 신자들에 의해, 거짓 신자들의 고변, 박해)
5. 환난에서 발견한 새로운 세계
1)주의 날에: 밧모섬에서 맞이한 주일, 전혀 새로운 주일
2)성령에 감동: 전혀 새로운 감동, 새로운 영감
3)뒤에서 나는 음성: 자기와 반대,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깨달음
4)주님을 발견: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주님을 새로 발견
5)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자신의 모습을 새로 발견, 주님 앞에 자신을 새로
6)두려워 말라: 주님의 위로의 음성, 주님과 자신을 새로 발견하고 두려워할 때
7)네 본 것과: 계시록 계시, 계시록 기록
6.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1)신앙은 고행주의가 아니지만
2)신앙에 고난은 필연적이니
3)고행적 고난은 최대한 피할 것이나
4)신앙적 고난은 피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아야 할 것
5)고난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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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설교
20140519 주후
요한계시록 1:9-16
우리 신앙은 말 그대로 신앙주의가 바른 신앙입니다. 신앙주의라는 말은 하나님을 중심하고 소망하고 하나님 한분의 뜻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찾아가지고 그 뜻을 그대로 이루어드리는 거기에 주력하는 것이 신앙주의다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는 것이 올바른 신앙의 걸음인데 오전에 말씀드린대로 성경은 한권인데 또 성령은 한분이신데 이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그 동기와 목적이 각각 다르고 방편도 다르다보니까 성경이 말씀하신 바른 깨달음을 가지지 못하고 이리저리 다 치우치고 삐뚤어진 잘못된 그런 깨달음들을 많이 가진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염세주의라는 이런 신앙주의들 또 고행주의라는 이런 신앙주의들 이런 것들은 과거시대에는 이런 것들이 더러더러 많이 있었습니다. 염세주의도 더러 있었고 고행주의는 제법 상당히 많았고 그렇게 한 사람들도 많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시대가 변하고 보니까 염세주의라는 그런 신앙사상을 가진 믿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고 또 고행주의라는 그런 신앙주의도 별로 많지 않을 것이고 요즘 가장 많은 잘못된 신앙주의 신앙사상은 세상주의라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이거는 잘못된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세상주의 신앙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그게 예수 믿는 것으로 그렇게 오판하고 착각하는 그런 경우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염세주의는 세상을 싫어서 등지고 산 속에 들어가거나 굴 속에 들어앉거나 기도원에 들어가서 하는 그런 사람들이 염세주의인데 요즘은 세상이 워낙 좋아서 그리 하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아니하고 또 고행주의도 요즘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더욱이 경제가 발달하고 문화가 발달된 그런 사회 그런 국가일수록 염세주의나 고행주의는 그 수가 아주 극히 드물고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문화가 발달되고 경제가 발달된 그런 사회 그런 국가일수록 그 나라에는 세상주의 신앙이 많다 그리 볼 수 있습니다.
세상주의라 그말은, 주의라는 말은 공산주의 자본주의 무슨 주의 하는데 그 주의란 것은 쉽게 말하면 그 사람의 모든 생활과 행동을 움직이는 그런 능동적인 지식이라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주의라 그러면 이 세상을 중심으로 세상을 목적으로 소망으로 가장 크게 삼고 그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그런 예수 믿는 신앙주의가 세상주의인데 그런데 그렇게 믿는 사람들도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세상주의라 하지 않고 예수 믿는다 그리 말을 합니다. 예수님 생전에 구주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또 알고도 못박아 죽였던 외식하는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대제사장들 그들의 신앙은 틀림없는 세상주의였고 세본주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못박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잘 섬기는 것이다 그러고 못박아 죽였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다하여 못박아 죽였던 겁니다. 구약의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순교할 때 모두들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을 하고 죽이는 그런 일 할때 그 사람들이 전부다 그것이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바른 신앙이라고 그렇게 스스로 자인하고 오판하고 그래가지고 다 하나님의 참된 종들을 다 죽이고 그리 했던 겁니다.
지금 시대는 세상주의가 가장 많고 그 세상주의가 거의 기독교를 다 삼키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런 시대가 되어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런 속에 염세주의는 잘못된 신앙주의고 고행주의도 잘못된 주의라는 것을 알고는 있어야 되고 또 모든 세상 모든 교회들이 다 믿는 사람들이 그리 갈지라도 우리는 세상주의를 따라가지 않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신앙은 신앙주의고 신앙주의에서 나오는 것이 세상을 이용하는 용세주의고 또 천국을 소망하는 천국주의 이런것들은 신앙주의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그런 신앙사상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있고 세상 임금은 악령이 틀림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 되어진 세상 주체가 벌써 악령이고 그 악령의 관할 아래에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중심은 인간이고 그러나 궁극의 세상 중심은 악령이니까 그 악령은 하나님을 배반하는게 악령입니다. 악이라는 말의 정의는 피조물 중심이라 말인데 피조물 중심이라 말은 무엇과 대비하는 말인고 하니 무엇과 대비하는 말입니까? 피조물 중심이라 말은 무엇과 대비되는 말입니까?
백목사님께서 ‘기독교는 독재주의’라는 말을 일부러 독하게 쓰셨습니다. ‘기독교는 독재주의입니다’. 독재주의라는 말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기독교는 독재주의라 그러니까 모두 한창 민주화가 되어져가는 80년대 중반 이후에 우리나라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민주화바람이 불어서 아주 뭐 대모가 날마다 일어나고 봇물 터지듯이 그렇게 민주화가 일어나는 그런 시대에 백목사님의 말씀은 ‘기독교는 독재주의입니다’ 그러니까 다 싫어할 그런 말입니다. 그런데 독재주의라는 말의 반댓말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라는 말을 다른말로 바꾸면 인본주의라는 뜻이지요. 거기에 대해서 거기 대비되는 반대말로 그렇게 용어를 일부러 쓰신 겁니다. 피조물 중심이라 말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창조주 중심이라 말이겠지요. 하나님 중심. 그러기 때문에 악이라는 말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다 그뜻입니다. 하나님을 빼놓고 하나님 아닌 다른 것 중심이면 어떤 것이든 그게 다 악입니다. 그러니까 악령이 우리는 어떻게 생긴 놈인지 그 존재를 잘 몰라도 어쨌든 타락한 천사, 천사장 하나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제가 하나님이 되려고 범죄하고 타락해서 제 중심의 세계를 만들려고 한 것이 타락이고 거기 감염된 것이 인간의 범죄고 타락이고 그게 악이니까, 그게 그놈이 이 세상을 다 쥐고 있는 세상 주인이고 그놈의 관할아래 있는 악한 자 안에 있는 세상이니까 그 세상이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이 중심된 인본주의 세상이지만은 그 인본주의라는 속에 들어가면 바로 악령주의라 그런 말이 되는데, 안믿는 사람들 요즘은 모두 인식이 다 깨어있으니까 이런 말 하면은 환장을 하고 달려들겁니다. ‘우리가 그러면 악령 귀신의 수하라 말이며, 우리들이 귀신의 부하에 속한 앞잡이라 말이냐?’ 말해도 하거나 말거나 그들은 다 불택자들은 무조건 악령의 부하들이고 백성들이고 악령적인 그런 사람들이고 그들에게 이용되는 사람들이고 결국은 악령은 인본주의라는 간판을 내세워서 악령적인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이고 그거는 바로 하나님을 배반케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 목적은 표면적으로는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고 내면적으로는 세상 속에 있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그 성도들의 모든 천국 건설의 자본, 시간과 정력과 소유를 허비하게 만드는 것이 이 세상의 목적이고 악령의 목적입니다. 그리 되면 하나님의 뜻은 그만큼 성그러지게 되고 제뜻이 이루어지니까 그리 되어지는 겁니다. 우리들이 살고있는 세상이 이런 세상이고 이런 환경이고 그 세상의 주체가 악령이고 이러다보니까 그 속에 있는 성도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며 천국을 준비하는 이런 신앙생활이니까 세상과 신앙은 근본과 방향이 정반대일수밖에 없고 경우에 따라서 세상과 신앙 교회가 같은 면이 있지만은 도덕적 윤리적으로 비슷하게 나가는 그런 면이 있으나 그것 조차도 내면에 들어가보면 완전히 판이하게 다른 것이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이속에서 신앙생활하는 믿는 사람들이 최대한 마찰을 피하고 고난을 피하려고 노력을 하지만은 부득이함으로 당하는 그런 고난은 있을 수 밖에 없고 그런 고난은 필연적으로 맞이할 때 우리가 피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런 고난을 당할때는 억지로 마지 못해서가 아니고 감사와 기쁨으로 당하는 그런 우리들이 되어야 되겠다. 그래서 신앙적인 고난은 피할 수 없이 당연히 받아야 되지만은 그러나 고행적인 고난, 고행주의적인 그런 고행적인 고난 또 실수적인 고난 혹은 사욕적인 고난 불필요한 마찰들 이런 것들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우리 할 일이고 지혜라 하는 겁니다. 고행적인 고난, 실수적인 고난, 사욕적인 고난, 또 불필요한 그런 마찰들 이런 것은 피하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신앙적인 그런 고난은 당할 수 밖에 없고 당연히 피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당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걸음이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다 보면은 고행적인 고난, 실수적인 고난, 사욕적인 고난,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려고 하다 보면은 그면으로 애를 쓰다보면은 또 치우쳐서 자칫하면은 평안주의 무사주의 안일주의 넓은 신앙길 가기 쉬우니까 이런 면 특히 조심을 해야 되겠다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것은 교회란 것은 이 세상을 벗어나는 교회가 아니고 이 세상과 등지는 교회가 아니고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온 세상을 다 삼키고 있는 홍수 위에 떠서 노아 방주가 다니듯이 그래서 물이 홍수가 없으면 방주가 가치도 없고 필요도 없는 것처럼 교회라는 곳은 이 세상이라는 노아 홍수같은 이런 세상 속에서 떠있는 것이 교회니까 세상과 교회의 관계는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같이 해보실까요? 불가분의 관계. 무엇이 그렇다는 겁니까? 교회와 세상은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는 겁니다. 세상 안에. 신앙이란 것은 세상 속에서 신앙생활 하는 겁니다. 말하자면은 자기 현실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말이고, 우리가 사는 그 현실 그 세상이 바로 세상이니까 그 세상은 전부 교회가 몸 담고 있는 세상, 우리 신앙생활을 해야되는 우리 활동 무대며 우리 공간이 되며 활동무대가 되어있는 그 활동 무대인 그 세상이 바로 악한 자 안에 있고 악령이 임금된 세상이고 악령적인 세상을 건설하는 그런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전 세상이 다 그러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천국의 구원을 이루어가려는 신앙주의적인 그런 신앙생활을 하려고하면 많은 어려움과 마찰이 있게 마련이고 그 어려움 중에서도 가장 큰 어려움, 더 어려운 중에 더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외식 신자들 거짓부리 신자들 때문에 어려움을 더 당하게 되는 겁니다. 공통적으로 신앙생활을 단체속에서 계명을 지켜서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하던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공통적으로 다 그럽니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군에서, 사회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그런 청년들 그런 사람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하나같이 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이해를 한답니다. 계명 지키려 할때 ‘아 그 사람은 종교인이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그리 하는가보다.’ 이해를 다 하는데, 그 중에서 믿기를 외식으로 믿고 세상주의로 믿고 대충대충 믿고,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이런 말 제가 써서 될런가. 백목사님 표현을 빌어쓰면은, 더럽게 믿는 그런 사람들이 나서서 ‘우리는 안 그러는데 너희는 왜 그러냐? 나도 예수 믿는 사람인데, 우리 교회는 괜찮은데. 나는 그리 안해도 되는데 너는 왜 그렇게 별쓰럽게 믿느냐?’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들이 거기 동조하는 겁니다. ‘다같은 성경 아니냐? 다같은 교회 아니냐? 다같은 기독교 아니냐? 예수교 아니냐? 그런데 이 사람들 다니는 교회는 괜찮다 그러는데 너희 교회는 왜 그게 안된다 그러냐?’ 그러니까 핍박이 더 심해지고 더 어려움을 더 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거짓부리 신앙을 가리켜서 요한계시록에 새끼양이라 그랬습니다. 차라리 안 믿는 사람 같으면 이해를 하는데 믿어도 제대로 믿지 않고 가짜배기로 믿으니까 가짜배기로 믿는 그 사람들이 거의 대개보면은 세상과 하나된 그런 신앙 가지고 신앙생활하면서 이름만 믿는다는 거짓부리 예수를 이용하는 그런 신앙들이 들어서 참된 신앙들을 핍박을 하고 더 고통스럽게 만들고 그런 사람들이 마지막에 보면 거의 대개는 참된 신앙가들을 다 세상과 하나되어 가지고 잡아다 핍박을 하고 죽이고 거기다 앞장서는 그런 사람들. 그래서 성경도 그렇고 교회역사도 그렇고 순교자들의 순교 거의 대부분은 안 믿는 사람들에게 당한 것보다 거짓부리 외식 신자들에게 당한 것이 훨씬 많다 그말이지요. 예수님이 누구한테 죽었습니까? 예수님을 못박아 죽인 사람이 누굽니까? 빌라도 못박아 죽였는데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이려 그랬습니까, 나아주려 그랬습니까? 빌라도의 아내가 꿈을 꾸고, 빌라도 아내 맞지요? 꿈을 꾸고 ‘이 사람에게 간섭하지 마소서. 의인입니다.’ 그럴때 빌라도는 겁이 나서 나아주려 그랬는데, 거짓부리 신앙가들 외식하는 서기관 바리새인들 대제사장들 그것들이 들어서 예수님을 죽이라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습니다. 성경만 그런게 아니고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니고 구약시대 모든 선지자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진실되게 믿는 그런 신앙가들, 이번에도 우리 교회 청년이 군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안하니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은 다 이해를 하더랍니다. 그런데 주변에 있는 믿는 것들이란 것들이 전부다 하나같이 하는 말이 ‘우리 교회는 다 해도 된다는데 너희 교회는 이상한 교회 아니냐?’ 그러니까 어려움이 더 크고 핍박이 더 크다 그말이지요. 그런 것들이 전부다 가짜배기들 앞으로 그런 것들이 들어서 참된 신앙가들 다 죽이고 그리합니다. 그런데 오늘 고요한때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못하면 우리도 나중에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진실하게 믿는 사람, 진실하게 믿으면 내가 그리 못해도 살지 못해도 나는 그리 살지 못하고 나는 그렇게 못해도 그렇게 믿는 것이 옳다 그게 맞다 그게 양심이고 그게 신앙이고 그렇게 못해도 그게 지식진실이라도 되는건데 제가 못하니까 양심을 꺽어서 제 양심을 꺽어죽이고 남의 양심까지 꺽으려고 하는 그런 거짓부리 신앙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노력을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런 신앙의 걸음은 신앙이란 것은 세상이란 그 속에 환경 속에 활동무대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과 신앙은 근본과 방향이 반대입니다. 법칙도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아도 들어가보면 다 반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이 교회를 협조하고 옹호할 리가 없습니다. 교회이름을 걸고 목사이름을 걸고 믿는다는 신앙이름을 걸고 세상 운동하는 것은 모조리 다 가짜고 외식입니다. 그러니까 교파든 교회든 목사든 정치운동을 하고 나선다 백퍼센트 저거 가짜다 딱 찍어놓으면 됩니다. 무조건 가짜입니다 그거는. 외식신자들입니다. 교회가 나서든 교파가 나서든 목사가 나서든 나서면은 그거는 가짜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하나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교회를 결코 협조할 수 없고 교회를 찬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감동시키시면 경우에 따라서 협조하는 것 같이 보여지나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그들이 하나님께 눌려서 그렇게 하지 궁극적으로는 협조하고 찬성할 리가 없는 것이 세상이다 그말이지요. 그런줄 알고 우리는 세상 속에 살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기독자의 세상 생활은 이 세상을 신앙주의로 이용하는 것 이 세상은 우리 이용물입니다. 이용하는 것, 세상을 이기는 것 이게 우리 할 일이지 세상 속에 들어가서 세상과 하나되고 짝이 되고 또 세상과 같이 단합해서 뭘 해나가고 그러면 무조건 그거는 다 삼켜지고 만다는 것을, 이런 것이 우리 현실 생활하고 상관이 없는 것 같으나 이런게 전부다 우리 현실생활하고 다 연관이 되어있고 실제 생활에 연결시켜보면 다 연관이 되어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에 신앙생활에 고난은 필연이라는 것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이 고난을 싫어하고 피하면 참 어려운 말입니다. 고난을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피하는 사람은 신앙걸음을 끝까지 걸어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고행주의적인 고난을 자취할 필요는 없으되 자기를 연습시키고 연단시키기 위해서 고난을 자취하는 그런 연습은 필요하다. 고난을 내가 능동적으로 내가 주최되서 당하는 그런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구별해서 좀 생각해봐야 되겠습니다. 이 고난이 필연적으로 있는 것인데 그 고난은 고난만 있는게 아닙니다. 믿는 사람이 신앙생활하다 고난을 만날 때 그 고난을 피하지 아니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고난을 고난으로 바로 당할 때 어떤 결과가 있는가를 본문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른데도 많이 있지만은,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형제라는 말은 무엇을 강조한거라 했습니까? 형제라 말은 같다는 뜻입니다. 사도요한과 우리가 같다. 무엇이 같은가? 말하자면 사도요한도 사도요한의 사도성 그가 이룩한 위대한 그면, 그면만 보면은 우리는 형제라는 그말이 맞지 않습니다. 그거는 하나님이 붙들고 쓰시는 하나님이 주신 분량의 양 그면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에 관여할바가 아닙니다. 사도바울도 우리와 사도바울이 많이 다르지요. 그러나 그거는 사도바울을 바울로 쓰신 하나님께서 쓰신 하나님에 있는 하나님의 몫이지 우리 몫이 아닙니다. 우리가 계산할 것은 물론 하나님이 높이 쓰셨으니까 존경도 하고 배우고 따라가는 그런 걸 가지되 기본적으로 우리가 가질 것은 사도바울과 우리는 형제다. 사도요한과 우리는 형제다. 그도 원죄있는 죄인이고 나도 죄인이다. 그도 타락한 죄인이었고 나도 죄인이다. 그도 대속받은 사람이고 나도 대속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가 그렇게 되어진 것은 그가 주시는 그 자기 있는 그 위치에서 신앙주의에 신앙걸음을 걸어가고 만나지는 두려움을 피하지않고 갔기 때문에 그런 위대한 신앙가가 되었듯이 나도 내게 주어진 내 현실에서 내게 당면하는 신앙주의 걸음에서 만나지는 고난 역경 환난을 피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감당해 나가면 나도 사도바울 같은 사람이 될지 요한같은 사람이 될지는 몰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사람은 될 수 있다. 이게 동등성이다 그말입니다. 같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과 사도 요한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나 역사의 간섭이나 기대나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기대는 다 꼭 같습니다. 각도만 다를 뿐이고 쓰임새만 다를 뿐이지. 열 아들이 있으면 열 아들에 대한 부모님의 사랑과 헌신과 기대는 같지 다르질 않고 다만 열 아들중에서 첫째가 둘째가 특별히 머리가 좋고 똑똑하고 잘 나면 부모님이 기대를 ‘다른 아이들보다 이놈이 우리 집안에 뭐가 될런가?’ 하는 그런 기대는 좀 더 가질 수 있으되 그러나 그거는 그가 타고난 그런 것 때문에 있는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다른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거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것이지요. 꼭 같은 겁니다. 우리는 다 형제라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요한이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말씀하신 것은, 요한이 걸어간 그 걸음 그 당한 고난은 우리도 당해야 되고 우리도 걸어가야된다는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신 겁니다. 책임과 의무가 같다, 하나님의 역사가 같다 그말입니다.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 자라, 예수의 환난은 쉽게 말하면 세가지 환난이고 하나님의 의 때문에 당하는 환난입니다. 죄를 멸하기 위해서, 죄를 안 짓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 의인에게 주신 의인의 법칙이 되어지는 성경 말씀을 어기지 않으려고 하니까 당하는 여러 종류 여러 형태의 환난이고 고난이 바로 예수의 환난입니다. 예수는 죄를 멸하러 오신 분이 예수고, 죄를 멸하고 사죄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예수고 그것 때문에 환난 당한 환난이 예수의 환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환난에 동참한 사도 요한도 예수가 멸한 죄를 멸하고 예수가 건설한 사죄를 지키려고 하니까 당하는 환난, 여러 종류의 환난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의 환난입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안하려고 하니까 주변에서 심지어 협박까지 했다던가요. 우리는 참 여기서 모르는데 당하는 그 군인 거기서 말단 졸병인데 얼마나 겁도 나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뭐 이렇게 협박을 하고 해도 불러가지고 협박을 해도 ‘그래도 못합니다.’ 끄떡도 안하더랍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온 대한민국의 교회가 얼마나 많을건데, 예수 믿는 그 군에 있는 몇십만명 청년중에서 예수 믿는 청년이 많을건데, 아무도 그런걸 안 당하는데 문제가 안 생기는데 이 청년이 딱 당했다 그말이지요. 생겼으면 그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원인이 있고. 살펴보고. 그런데 어쨌든 불구하고 ‘그래도 못합니다.’ 아주 뭐 대단한 협박까지 하고 위협까지 했는데도 ‘그래도 못합니다’. 그렇게 당하는 것이 그게 생각하는바 여러 가지 생각할 수 있고 살펴도 봐야 되겠고 조심도 해야 되겠지만은 그게 순수하게 그렇게 된 것 같으면 그게 바로 예수의 환난입니다. 섞임없는 환난이다 그말이지요. 국기를 반대하는 것 아닙니다. 군대를 반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이비한 종교도처럼 여호와의 증인은 군대 안가는 사람들입니다. 국기도 반대합니다 그 사람들은. 전쟁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피 흘리면 안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지 않습니다. 국기 반대 안합니다. 군대도 반대 안합니다. 정부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단체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못하는 것은 경례라는 표현은 ‘공경할 경’자, ‘예도 례’자. 인격가진 사람이나 존재에게 표하는게 경롄데, 국기는 나라의 표상이고 상징이고 깃발일 뿐인데 어떤 젊은 사람들은 국기를 가지고 옷을 만들어 입고 다니는데. 국기를 마구 발로 짓밟고 불에 태우는데. 그렇게도 하는데, 그 국기에 대해서 우리는 반대하지 않고 소중히 취급하고 그렇게 하는데 경례하라 하기 때문에 인격 없는 존재에게,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경례하라 그러니까 그거는 양심상 신앙이 못합니다. 논리적으로 틀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당하는 고난 같으면 그거는 예수의 환난입니다. 이런 환난이 다 예수의 환난. 그러니까 그런 것들, 학교에서 또 회사에서 양심지키려고 주일 지키려고, 또 여러사람이 모여서 하나 좀 뒤로 빼먹자 하는 거기에 동참 안하려 하는 그런거. 이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있는 세상이고 이 세상은, 어떤 사람이 검사하고 대화하는데 검사가 그러더란가요? ‘한번 털어볼까요? 먼지 안나는가.’ 그러더라던가요? 한번 털어볼가요? 먼지 안나는가. 털어 먼지 안나는 것이 없는 그런 세상 속에, 그러니까 그말은 다시 말하면 무슨 뜻입니까? 법이란 것은 여기 갖다대면 여기 맞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법 갖다대면 대한민국에 적용안될 죄인 아닌 사람 단 하나도 있겠습니까? 그말은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 사람은 전부다 죄인들이고 범죄자들이다 그말이지요. 세상은 그런 세상이고 도둑놈 같은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죄 안짓고 하나님의 계명을 참 깨끗하게 바로 지키려고 하면은 많은 마찰이 있는데 예수의 환난은 이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 말씀하신 성경에 말씀하신 이 말씀 죄를 멸하는 죄 짓지 않는, 죄를 멸하는 또 주신 사죄를 지키는 이것 때문에 여러종류 여러형태로 고난 당할 때 그 고난을 예수의 환난이라 그리 말합니다. 예수의 환난. 사도요한이 여기에 동참을 했고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되는 그런 것인데, 이런 환난이 이런 외부적인 나 자신과 내 밖에 있는 객관에 세력들과 싸우는 신앙의 전투지요. 나와 객관이 전투하는 신앙에 전투, 이런 전투인데 이런 전투도 전투고 환난이고 그 속에 내면에 들어가면 그보다 더 어려울 수 있는 것은 자기와 자기가 싸우는 자기 속에 있는 자기 대적과 더불어 싸우는 그게 더 큰 전투가 될 수 있습니다. 외부적으로 보기에는 객관으로 더불어 전투하는 그 전투가 환난인데 내면속으로 들어가면 자기 속에 자기 아닌 자기, 옛사람 자기, 악성 악습으로 더불어 싸우는 그 전투가 더 큰 환난이 될 수 있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대외적인 그런 신앙전투를 두고는 탄식하거나 고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어떨때 그가 탄식을 했습니까? 자기 속에 두 자기가 있어서 자기 아닌 자기가 자기를 끌고 갈 때 그게 바로 자기 속에 악성이고 악습인데 그것이 끌고 갈 때 사도 바울은 탄식을 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두 사이에 끼어있다.’ 그것이 참 어려운 신앙의 전투입니다. 이 신앙전투가 있고 이 신앙 전투를 의식을 하고 인식을 하고 이렇게 싸워나가는 사람은 넘어져도 깨어있는 사람이고 이 신앙 전투 자체가 없는 사람들은 아득하게 승리한 사람이 아니면 자는 신앙을 가졌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깊이 생각해봐야 됩니다. 예수의 환난과 예수의 나라, 예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지배자로 주권자로 통치자로 모시고 그분에게 순종하는 그 나라가 예수의 나라입니다. 이런 생활 하나님께만 피동되는 생활, 아무것에게도 내가 피동되지 아니하고 지배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 한분에게만 지배받고 통치받는 그 생활 이 두 생활에 계속 되어지는 환난과 나라에 계속하는 여기 이 환난의 참음에 이 두가지를 계속하는 참음에 동참하는 이것이 사도요한의 생활이였고 이렇게 하다보니까 사도요한은 이것이 원인되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가 원인되어가지고 밧모섬에 귀향살이 갔는데 이때도 외부적으로는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갔지만은 내부적으로는 거짓부리 신자들에 의해서 갔다 그럽니다. 거짓부리 신자. 손양원 목사님을 공산주의자들에게 팔아먹은 인간들이 애양원내에 거짓부리 신자라 그러지요. 그런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게 됐습니다. 사도요한이 당한 환난입니다. 그런데 이런 환난, 하나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해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환난을 당했습니다. 환난을 당하면 그게 전부가 아니고 그 환난을 맞이할 때 여러 가지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환난을 당할 때 여러 가지 생각해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연단시키는 것인가 과정인가도 생각해보고 또 나한테 뭔가 내가 실수하거나 내 욕심이거나 내가 잘못처리해서 당하는 그런건 없는가, 고칠 것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고 그런데 어떤 형태든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예수의 증거 때문에 당하는 신앙 때문에 당하는 그런 환난을 맞이하게 되면 당하게 되면 그 당하는 과정은 고통스럽고 어렵지만은 그 너머에 들어가보면 그 세계에 들어가보면 새로운 세계가 발견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이 하나님 말씀과 예수의 증거 때문에 귀향살이가는 환난을 당했는데 그 귀향살이 유배간 밧모섬에서 주의 날을 맞이한 그 주의날은 다른 때 맞이한 주의 날과 확연하게 틀렸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의 날에, 주의 날을 맞이한다는 그 주일은 다른 날 맞이하는 주일과 틀렸습니다. 같은 주일이라도 하나님의 역사가 틀립니다. 성령에 감동되었는데 그때 성령에 감동된 그 감동은 다른 때 감동된 그 영감하고 틀렸습니다.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서 뒤에서 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예수의 증거 때문에 귀향살이 갔습니다. 환난 고난을 주님 때문에 신앙 때문에 당했고 그래서 귀향살이 갔고 귀향살이 가서 주일을 맞이했고 주일에 성령의 감동을 받았는데 뒤에서 나는 소리가 들렸는데, 뒤에서 난다 그말은 사도요한, 현재까지의 사도요한과 정반대라. 그때까지 사도요한이 듣지 못했던 깨닫지 못했던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새로운 깨달음을 가지게 되는 과정입니다. 전혀 새로운 것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뒤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말하는 음성을 알아보려고 몸을 돌이켜 뒤를 돌아보니까 누가 보였습니까? 일곱 금 촛대가 보였고 촛대 사이에 주님이 보였는데, 인자 같은 이가 보였는데 쭉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자기가 그 발 앞에 엎드려졌으니까 사도요한은 주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도입니다. 가장 주님이 아끼는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요한입니다. 예수의 품에 의지해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어떻게 마지막에 순교할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 품에 누워가지고 ‘주여 이 사람이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그랬습니까? 아니, 예수님이 사도요한을 보고 그랬지요. 그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있던 그 사도요한.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복음을 기록한 그 제자. 그 제자가 바로 사도요한 여기 요한계시록 기록한 사도요한이니까 예수님을 대면해서 본 사도고 잘 아는 사도입니다. 그랬는데 밧모섬에 가서 만난 그 주님은 살아생전 자기가 봤던 그 주님, 부활 후에 만났던 그 주님, 그때까지 자기가 전부 다 바쳐서 목숨 바쳐 섬겨오던 그 주님, 그 주님과 밧모섬에서 만난 주님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주님을 새롭게 발견했다 그말이지요. 그래서 주님을 보고나서 주님만 발견한 것이 아니고 주님을 발견함과 동시에 자기를 발견하니까 어찌 됐습니까? 그 발앞에 엎드러져서 죽은 자처럼 됐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위대한 분인줄, 두려운 분인줄, 깨끗한 분인줄 몰랐는데 그렇게 알았고 그 앞에 자기는 어떤 자기인것을 새로 알고나니까 주님을 보고 자기는 그 발 앞에 엎드러져서 죽은 자 같이 되어졌습니다. 그러고나니까 주님의 음성이 들렸고, 위로의 음성이 들렸고 요한계시록을 보고 기록을 하게 됐다 그말이지요. 이게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됐는데 그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그것이 어디서 그렇게 되었느냐? 귀향살이간 밧모섬에서. 왜 귀향살이 갔느냐?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 때문에. 말하자면은 신앙 때문에 하나님 말씀 뜻 계명 지키는 것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그 어려움을 피하지 아니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당해야 될 그 어려움을 자기를 포기하고 당했을때 외부적인 환난이 있는데 그 환난 속에 들어가보니까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발견이 되어졌다.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깨닫지 못했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됐다 그말입니다. 주일도 새 주일, 영감도 새 영감, 음성도 새 음성 새 깨달음, 주님도 새로운 주님 자기도 새로운 자기 완전히 새롭게 발견되어졌는데 아마 신앙의 경험을 해본 분들은 다 느낄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 성장이라는 것 신앙 발전이라는 것 신앙의 깊이로 한단계 더 들어가는 깊은 속에 주님과의 관계로 들어가는 그 깊이 들어가는 그 신앙의 발전 성장은 주님과 깊은 은밀한 영교 이것은 고난 없이는 되는수가 없습니다. 고난을 바로 통과할 때 그 고난 안에 고난 너머에 새로운 세계가 발견되는 그런 것이 있다 그말이지요. 평소생활도 그렇습니다. 자기와 더불어 싸우는 대내전 전투 거기서도 자기가 자기 속에 자기 아닌 자기, 자기 속에 들어있는 세상인 악성과 악습을 꺾고, 그것과 더불어 싸워 이겨서 그 고난을 이겨내고 싸워 승리했을 그때에 그때그때마다 하나님께 주시는 그런 깨달음이 있고 영감들이 있고 그게 크면 클수록 그 깨달음 영감은 더 크고 깊은 것인데 우리가 그런 것을 예사로 생각을 하고 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버리고나니까 우리 신앙이 항상 제자리 머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신앙은 고행주의가 아닙니다. 그렇지만은 신앙에 고난은 필연적으로 오게 되어있습니다. 고행적인 고난, 실수적인 고난, 사욕적인 고난, 불필요한 그런 고난 마찰을 최대한 피할 것은 피하는게 좋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고난을 맞이할때는 피해서도 안되고 두려워해서도 안되겠고 당당하게 맞서야 되겠고 그 신앙적인 고난을 당하게 되면 그 너머에는 그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발견되어진다는 이것을, 이거야 뭐 가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지식적으로는 성경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있으니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내가 이 세계에 들어가보는 것은 각자 자기 주신 그 현실에서 신앙적인 고난을 당해볼때 그리고 그 고난을 승리로 통과할 때 그때 알게되고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니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은 원리는 이러하다는 겁니다. 신앙의 고난을 피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들이 되어야 되겠다, 한번 더 우리 자신을 좀 돌아보고 다져보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 없습니다. 가감도 없고 변함도 없습니다. 틀림없는 불변의 진리고 이 진리는 사도요한에게만 해당되는게 아닙니다. 바울에게만 해당되는게 아니고 다니엘에게만 해당되는게 아닙니다. 다 우리는 형제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같이 해당이 되어집니다. 나는 신앙적인 고난을 얼마나 당했는가, 깊이 생각해보고, 고난을 피하지 않았는가 어려움을 피하지는 않았는가 돌아보고 신앙적인 고난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는 신앙에, 역경에 용감한 그런 신앙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제목: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
1. 주의할 신앙 사상
- 지금 시대는 염세주의, 고행주의는 별로 없을 것
- 지금 시대는 세상주의 신앙이 가장 큰 문제
- 기본 상식으로 염세주의, 고행주의도 알아야 할 것
2. 신앙과 세상
-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있고, 세상 임금은 악령
- 신앙은 하나님을 향하고 천국을 향하는 것
- 세상과 신앙은 근본과 방향이 반대이니
- 세상이 신앙을 찬성하거나 용인할 리는 절대 없는 것
- 세상에서 신앙의 걸음에 마찰, 고난은 필연임을 기억할 것
3. 신앙과 고난
- 세상에서 신앙 걸음에 고난은 필연이지만
- 우리의 시간, 정력, 소유의 자본이 유한하므로
- 불필요한 마찰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신앙 지혜
- 고행적, 실수적, 사욕적 고난은 당하지 않도록 할 것
- 그러다 평안주의, 무사주의, 안일주의로 넓은 길 가지 않도록 주의할 것
4. 사도요한의 환난
1)본문에서
①요한은 형제: 범죄도 대속도 같은, 책임도 의무도 소망도 같은
②예수의 환난: 죄 불의 불목을 멸하고, 사죄 칭의 화친 건설을 위한, 인한
③예수의 나라: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생활, 하나님께 통치 받는 생활
④예수의 참음: 환난과 나라의 생활을 참음으로 계속
2)사도요한의 환난
①원인: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②환난: 밧모섬에 귀양(거짓 신자들에 의해, 거짓 신자들의 고변, 박해)
5. 환난에서 발견한 새로운 세계
1)주의 날에: 밧모섬에서 맞이한 주일, 전혀 새로운 주일
2)성령에 감동: 전혀 새로운 감동, 새로운 영감
3)뒤에서 나는 음성: 자기와 반대,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깨달음
4)주님을 발견: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주님을 새로 발견
5)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자신의 모습을 새로 발견, 주님 앞에 자신을 새로
6)두려워 말라: 주님의 위로의 음성, 주님과 자신을 새로 발견하고 두려워할 때
7)네 본 것과: 계시록 계시, 계시록 기록
6.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1)신앙은 고행주의가 아니지만
2)신앙에 고난은 필연적이니
3)고행적 고난은 최대한 피할 것이나
4)신앙적 고난은 피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아야 할 것
5)고난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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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설교
20140519 주후
요한계시록 1:9-16
우리 신앙은 말 그대로 신앙주의가 바른 신앙입니다. 신앙주의라는 말은 하나님을 중심하고 소망하고 하나님 한분의 뜻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찾아가지고 그 뜻을 그대로 이루어드리는 거기에 주력하는 것이 신앙주의다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는 것이 올바른 신앙의 걸음인데 오전에 말씀드린대로 성경은 한권인데 또 성령은 한분이신데 이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그 동기와 목적이 각각 다르고 방편도 다르다보니까 성경이 말씀하신 바른 깨달음을 가지지 못하고 이리저리 다 치우치고 삐뚤어진 잘못된 그런 깨달음들을 많이 가진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염세주의라는 이런 신앙주의들 또 고행주의라는 이런 신앙주의들 이런 것들은 과거시대에는 이런 것들이 더러더러 많이 있었습니다. 염세주의도 더러 있었고 고행주의는 제법 상당히 많았고 그렇게 한 사람들도 많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시대가 변하고 보니까 염세주의라는 그런 신앙사상을 가진 믿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고 또 고행주의라는 그런 신앙주의도 별로 많지 않을 것이고 요즘 가장 많은 잘못된 신앙주의 신앙사상은 세상주의라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이거는 잘못된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세상주의 신앙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그게 예수 믿는 것으로 그렇게 오판하고 착각하는 그런 경우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염세주의는 세상을 싫어서 등지고 산 속에 들어가거나 굴 속에 들어앉거나 기도원에 들어가서 하는 그런 사람들이 염세주의인데 요즘은 세상이 워낙 좋아서 그리 하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아니하고 또 고행주의도 요즘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더욱이 경제가 발달하고 문화가 발달된 그런 사회 그런 국가일수록 염세주의나 고행주의는 그 수가 아주 극히 드물고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문화가 발달되고 경제가 발달된 그런 사회 그런 국가일수록 그 나라에는 세상주의 신앙이 많다 그리 볼 수 있습니다.
세상주의라 그말은, 주의라는 말은 공산주의 자본주의 무슨 주의 하는데 그 주의란 것은 쉽게 말하면 그 사람의 모든 생활과 행동을 움직이는 그런 능동적인 지식이라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주의라 그러면 이 세상을 중심으로 세상을 목적으로 소망으로 가장 크게 삼고 그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그런 예수 믿는 신앙주의가 세상주의인데 그런데 그렇게 믿는 사람들도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세상주의라 하지 않고 예수 믿는다 그리 말을 합니다. 예수님 생전에 구주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또 알고도 못박아 죽였던 외식하는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대제사장들 그들의 신앙은 틀림없는 세상주의였고 세본주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못박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잘 섬기는 것이다 그러고 못박아 죽였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다하여 못박아 죽였던 겁니다. 구약의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순교할 때 모두들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을 하고 죽이는 그런 일 할때 그 사람들이 전부다 그것이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바른 신앙이라고 그렇게 스스로 자인하고 오판하고 그래가지고 다 하나님의 참된 종들을 다 죽이고 그리 했던 겁니다.
지금 시대는 세상주의가 가장 많고 그 세상주의가 거의 기독교를 다 삼키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런 시대가 되어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런 속에 염세주의는 잘못된 신앙주의고 고행주의도 잘못된 주의라는 것을 알고는 있어야 되고 또 모든 세상 모든 교회들이 다 믿는 사람들이 그리 갈지라도 우리는 세상주의를 따라가지 않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신앙은 신앙주의고 신앙주의에서 나오는 것이 세상을 이용하는 용세주의고 또 천국을 소망하는 천국주의 이런것들은 신앙주의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그런 신앙사상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있고 세상 임금은 악령이 틀림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 되어진 세상 주체가 벌써 악령이고 그 악령의 관할 아래에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중심은 인간이고 그러나 궁극의 세상 중심은 악령이니까 그 악령은 하나님을 배반하는게 악령입니다. 악이라는 말의 정의는 피조물 중심이라 말인데 피조물 중심이라 말은 무엇과 대비하는 말인고 하니 무엇과 대비하는 말입니까? 피조물 중심이라 말은 무엇과 대비되는 말입니까?
백목사님께서 ‘기독교는 독재주의’라는 말을 일부러 독하게 쓰셨습니다. ‘기독교는 독재주의입니다’. 독재주의라는 말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기독교는 독재주의라 그러니까 모두 한창 민주화가 되어져가는 80년대 중반 이후에 우리나라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민주화바람이 불어서 아주 뭐 대모가 날마다 일어나고 봇물 터지듯이 그렇게 민주화가 일어나는 그런 시대에 백목사님의 말씀은 ‘기독교는 독재주의입니다’ 그러니까 다 싫어할 그런 말입니다. 그런데 독재주의라는 말의 반댓말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라는 말을 다른말로 바꾸면 인본주의라는 뜻이지요. 거기에 대해서 거기 대비되는 반대말로 그렇게 용어를 일부러 쓰신 겁니다. 피조물 중심이라 말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창조주 중심이라 말이겠지요. 하나님 중심. 그러기 때문에 악이라는 말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다 그뜻입니다. 하나님을 빼놓고 하나님 아닌 다른 것 중심이면 어떤 것이든 그게 다 악입니다. 그러니까 악령이 우리는 어떻게 생긴 놈인지 그 존재를 잘 몰라도 어쨌든 타락한 천사, 천사장 하나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제가 하나님이 되려고 범죄하고 타락해서 제 중심의 세계를 만들려고 한 것이 타락이고 거기 감염된 것이 인간의 범죄고 타락이고 그게 악이니까, 그게 그놈이 이 세상을 다 쥐고 있는 세상 주인이고 그놈의 관할아래 있는 악한 자 안에 있는 세상이니까 그 세상이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이 중심된 인본주의 세상이지만은 그 인본주의라는 속에 들어가면 바로 악령주의라 그런 말이 되는데, 안믿는 사람들 요즘은 모두 인식이 다 깨어있으니까 이런 말 하면은 환장을 하고 달려들겁니다. ‘우리가 그러면 악령 귀신의 수하라 말이며, 우리들이 귀신의 부하에 속한 앞잡이라 말이냐?’ 말해도 하거나 말거나 그들은 다 불택자들은 무조건 악령의 부하들이고 백성들이고 악령적인 그런 사람들이고 그들에게 이용되는 사람들이고 결국은 악령은 인본주의라는 간판을 내세워서 악령적인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이고 그거는 바로 하나님을 배반케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 목적은 표면적으로는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고 내면적으로는 세상 속에 있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그 성도들의 모든 천국 건설의 자본, 시간과 정력과 소유를 허비하게 만드는 것이 이 세상의 목적이고 악령의 목적입니다. 그리 되면 하나님의 뜻은 그만큼 성그러지게 되고 제뜻이 이루어지니까 그리 되어지는 겁니다. 우리들이 살고있는 세상이 이런 세상이고 이런 환경이고 그 세상의 주체가 악령이고 이러다보니까 그 속에 있는 성도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며 천국을 준비하는 이런 신앙생활이니까 세상과 신앙은 근본과 방향이 정반대일수밖에 없고 경우에 따라서 세상과 신앙 교회가 같은 면이 있지만은 도덕적 윤리적으로 비슷하게 나가는 그런 면이 있으나 그것 조차도 내면에 들어가보면 완전히 판이하게 다른 것이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이속에서 신앙생활하는 믿는 사람들이 최대한 마찰을 피하고 고난을 피하려고 노력을 하지만은 부득이함으로 당하는 그런 고난은 있을 수 밖에 없고 그런 고난은 필연적으로 맞이할 때 우리가 피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런 고난을 당할때는 억지로 마지 못해서가 아니고 감사와 기쁨으로 당하는 그런 우리들이 되어야 되겠다. 그래서 신앙적인 고난은 피할 수 없이 당연히 받아야 되지만은 그러나 고행적인 고난, 고행주의적인 그런 고행적인 고난 또 실수적인 고난 혹은 사욕적인 고난 불필요한 마찰들 이런 것들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우리 할 일이고 지혜라 하는 겁니다. 고행적인 고난, 실수적인 고난, 사욕적인 고난, 또 불필요한 그런 마찰들 이런 것은 피하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신앙적인 그런 고난은 당할 수 밖에 없고 당연히 피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당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걸음이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다 보면은 고행적인 고난, 실수적인 고난, 사욕적인 고난,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려고 하다 보면은 그면으로 애를 쓰다보면은 또 치우쳐서 자칫하면은 평안주의 무사주의 안일주의 넓은 신앙길 가기 쉬우니까 이런 면 특히 조심을 해야 되겠다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것은 교회란 것은 이 세상을 벗어나는 교회가 아니고 이 세상과 등지는 교회가 아니고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온 세상을 다 삼키고 있는 홍수 위에 떠서 노아 방주가 다니듯이 그래서 물이 홍수가 없으면 방주가 가치도 없고 필요도 없는 것처럼 교회라는 곳은 이 세상이라는 노아 홍수같은 이런 세상 속에서 떠있는 것이 교회니까 세상과 교회의 관계는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같이 해보실까요? 불가분의 관계. 무엇이 그렇다는 겁니까? 교회와 세상은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는 겁니다. 세상 안에. 신앙이란 것은 세상 속에서 신앙생활 하는 겁니다. 말하자면은 자기 현실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말이고, 우리가 사는 그 현실 그 세상이 바로 세상이니까 그 세상은 전부 교회가 몸 담고 있는 세상, 우리 신앙생활을 해야되는 우리 활동 무대며 우리 공간이 되며 활동무대가 되어있는 그 활동 무대인 그 세상이 바로 악한 자 안에 있고 악령이 임금된 세상이고 악령적인 세상을 건설하는 그런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전 세상이 다 그러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천국의 구원을 이루어가려는 신앙주의적인 그런 신앙생활을 하려고하면 많은 어려움과 마찰이 있게 마련이고 그 어려움 중에서도 가장 큰 어려움, 더 어려운 중에 더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외식 신자들 거짓부리 신자들 때문에 어려움을 더 당하게 되는 겁니다. 공통적으로 신앙생활을 단체속에서 계명을 지켜서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하던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공통적으로 다 그럽니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군에서, 사회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그런 청년들 그런 사람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하나같이 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이해를 한답니다. 계명 지키려 할때 ‘아 그 사람은 종교인이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그리 하는가보다.’ 이해를 다 하는데, 그 중에서 믿기를 외식으로 믿고 세상주의로 믿고 대충대충 믿고,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이런 말 제가 써서 될런가. 백목사님 표현을 빌어쓰면은, 더럽게 믿는 그런 사람들이 나서서 ‘우리는 안 그러는데 너희는 왜 그러냐? 나도 예수 믿는 사람인데, 우리 교회는 괜찮은데. 나는 그리 안해도 되는데 너는 왜 그렇게 별쓰럽게 믿느냐?’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들이 거기 동조하는 겁니다. ‘다같은 성경 아니냐? 다같은 교회 아니냐? 다같은 기독교 아니냐? 예수교 아니냐? 그런데 이 사람들 다니는 교회는 괜찮다 그러는데 너희 교회는 왜 그게 안된다 그러냐?’ 그러니까 핍박이 더 심해지고 더 어려움을 더 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거짓부리 신앙을 가리켜서 요한계시록에 새끼양이라 그랬습니다. 차라리 안 믿는 사람 같으면 이해를 하는데 믿어도 제대로 믿지 않고 가짜배기로 믿으니까 가짜배기로 믿는 그 사람들이 거의 대개보면은 세상과 하나된 그런 신앙 가지고 신앙생활하면서 이름만 믿는다는 거짓부리 예수를 이용하는 그런 신앙들이 들어서 참된 신앙들을 핍박을 하고 더 고통스럽게 만들고 그런 사람들이 마지막에 보면 거의 대개는 참된 신앙가들을 다 세상과 하나되어 가지고 잡아다 핍박을 하고 죽이고 거기다 앞장서는 그런 사람들. 그래서 성경도 그렇고 교회역사도 그렇고 순교자들의 순교 거의 대부분은 안 믿는 사람들에게 당한 것보다 거짓부리 외식 신자들에게 당한 것이 훨씬 많다 그말이지요. 예수님이 누구한테 죽었습니까? 예수님을 못박아 죽인 사람이 누굽니까? 빌라도 못박아 죽였는데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이려 그랬습니까, 나아주려 그랬습니까? 빌라도의 아내가 꿈을 꾸고, 빌라도 아내 맞지요? 꿈을 꾸고 ‘이 사람에게 간섭하지 마소서. 의인입니다.’ 그럴때 빌라도는 겁이 나서 나아주려 그랬는데, 거짓부리 신앙가들 외식하는 서기관 바리새인들 대제사장들 그것들이 들어서 예수님을 죽이라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습니다. 성경만 그런게 아니고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니고 구약시대 모든 선지자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진실되게 믿는 그런 신앙가들, 이번에도 우리 교회 청년이 군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안하니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은 다 이해를 하더랍니다. 그런데 주변에 있는 믿는 것들이란 것들이 전부다 하나같이 하는 말이 ‘우리 교회는 다 해도 된다는데 너희 교회는 이상한 교회 아니냐?’ 그러니까 어려움이 더 크고 핍박이 더 크다 그말이지요. 그런 것들이 전부다 가짜배기들 앞으로 그런 것들이 들어서 참된 신앙가들 다 죽이고 그리합니다. 그런데 오늘 고요한때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못하면 우리도 나중에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진실하게 믿는 사람, 진실하게 믿으면 내가 그리 못해도 살지 못해도 나는 그리 살지 못하고 나는 그렇게 못해도 그렇게 믿는 것이 옳다 그게 맞다 그게 양심이고 그게 신앙이고 그렇게 못해도 그게 지식진실이라도 되는건데 제가 못하니까 양심을 꺽어서 제 양심을 꺽어죽이고 남의 양심까지 꺽으려고 하는 그런 거짓부리 신앙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노력을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런 신앙의 걸음은 신앙이란 것은 세상이란 그 속에 환경 속에 활동무대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과 신앙은 근본과 방향이 반대입니다. 법칙도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아도 들어가보면 다 반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이 교회를 협조하고 옹호할 리가 없습니다. 교회이름을 걸고 목사이름을 걸고 믿는다는 신앙이름을 걸고 세상 운동하는 것은 모조리 다 가짜고 외식입니다. 그러니까 교파든 교회든 목사든 정치운동을 하고 나선다 백퍼센트 저거 가짜다 딱 찍어놓으면 됩니다. 무조건 가짜입니다 그거는. 외식신자들입니다. 교회가 나서든 교파가 나서든 목사가 나서든 나서면은 그거는 가짜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하나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교회를 결코 협조할 수 없고 교회를 찬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감동시키시면 경우에 따라서 협조하는 것 같이 보여지나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그들이 하나님께 눌려서 그렇게 하지 궁극적으로는 협조하고 찬성할 리가 없는 것이 세상이다 그말이지요. 그런줄 알고 우리는 세상 속에 살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기독자의 세상 생활은 이 세상을 신앙주의로 이용하는 것 이 세상은 우리 이용물입니다. 이용하는 것, 세상을 이기는 것 이게 우리 할 일이지 세상 속에 들어가서 세상과 하나되고 짝이 되고 또 세상과 같이 단합해서 뭘 해나가고 그러면 무조건 그거는 다 삼켜지고 만다는 것을, 이런 것이 우리 현실 생활하고 상관이 없는 것 같으나 이런게 전부다 우리 현실생활하고 다 연관이 되어있고 실제 생활에 연결시켜보면 다 연관이 되어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에 신앙생활에 고난은 필연이라는 것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이 고난을 싫어하고 피하면 참 어려운 말입니다. 고난을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피하는 사람은 신앙걸음을 끝까지 걸어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고행주의적인 고난을 자취할 필요는 없으되 자기를 연습시키고 연단시키기 위해서 고난을 자취하는 그런 연습은 필요하다. 고난을 내가 능동적으로 내가 주최되서 당하는 그런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구별해서 좀 생각해봐야 되겠습니다. 이 고난이 필연적으로 있는 것인데 그 고난은 고난만 있는게 아닙니다. 믿는 사람이 신앙생활하다 고난을 만날 때 그 고난을 피하지 아니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고난을 고난으로 바로 당할 때 어떤 결과가 있는가를 본문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른데도 많이 있지만은,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형제라는 말은 무엇을 강조한거라 했습니까? 형제라 말은 같다는 뜻입니다. 사도요한과 우리가 같다. 무엇이 같은가? 말하자면 사도요한도 사도요한의 사도성 그가 이룩한 위대한 그면, 그면만 보면은 우리는 형제라는 그말이 맞지 않습니다. 그거는 하나님이 붙들고 쓰시는 하나님이 주신 분량의 양 그면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에 관여할바가 아닙니다. 사도바울도 우리와 사도바울이 많이 다르지요. 그러나 그거는 사도바울을 바울로 쓰신 하나님께서 쓰신 하나님에 있는 하나님의 몫이지 우리 몫이 아닙니다. 우리가 계산할 것은 물론 하나님이 높이 쓰셨으니까 존경도 하고 배우고 따라가는 그런 걸 가지되 기본적으로 우리가 가질 것은 사도바울과 우리는 형제다. 사도요한과 우리는 형제다. 그도 원죄있는 죄인이고 나도 죄인이다. 그도 타락한 죄인이었고 나도 죄인이다. 그도 대속받은 사람이고 나도 대속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가 그렇게 되어진 것은 그가 주시는 그 자기 있는 그 위치에서 신앙주의에 신앙걸음을 걸어가고 만나지는 두려움을 피하지않고 갔기 때문에 그런 위대한 신앙가가 되었듯이 나도 내게 주어진 내 현실에서 내게 당면하는 신앙주의 걸음에서 만나지는 고난 역경 환난을 피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감당해 나가면 나도 사도바울 같은 사람이 될지 요한같은 사람이 될지는 몰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사람은 될 수 있다. 이게 동등성이다 그말입니다. 같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과 사도 요한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나 역사의 간섭이나 기대나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기대는 다 꼭 같습니다. 각도만 다를 뿐이고 쓰임새만 다를 뿐이지. 열 아들이 있으면 열 아들에 대한 부모님의 사랑과 헌신과 기대는 같지 다르질 않고 다만 열 아들중에서 첫째가 둘째가 특별히 머리가 좋고 똑똑하고 잘 나면 부모님이 기대를 ‘다른 아이들보다 이놈이 우리 집안에 뭐가 될런가?’ 하는 그런 기대는 좀 더 가질 수 있으되 그러나 그거는 그가 타고난 그런 것 때문에 있는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다른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거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것이지요. 꼭 같은 겁니다. 우리는 다 형제라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요한이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말씀하신 것은, 요한이 걸어간 그 걸음 그 당한 고난은 우리도 당해야 되고 우리도 걸어가야된다는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신 겁니다. 책임과 의무가 같다, 하나님의 역사가 같다 그말입니다.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 자라, 예수의 환난은 쉽게 말하면 세가지 환난이고 하나님의 의 때문에 당하는 환난입니다. 죄를 멸하기 위해서, 죄를 안 짓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 의인에게 주신 의인의 법칙이 되어지는 성경 말씀을 어기지 않으려고 하니까 당하는 여러 종류 여러 형태의 환난이고 고난이 바로 예수의 환난입니다. 예수는 죄를 멸하러 오신 분이 예수고, 죄를 멸하고 사죄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예수고 그것 때문에 환난 당한 환난이 예수의 환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환난에 동참한 사도 요한도 예수가 멸한 죄를 멸하고 예수가 건설한 사죄를 지키려고 하니까 당하는 환난, 여러 종류의 환난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의 환난입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안하려고 하니까 주변에서 심지어 협박까지 했다던가요. 우리는 참 여기서 모르는데 당하는 그 군인 거기서 말단 졸병인데 얼마나 겁도 나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뭐 이렇게 협박을 하고 해도 불러가지고 협박을 해도 ‘그래도 못합니다.’ 끄떡도 안하더랍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온 대한민국의 교회가 얼마나 많을건데, 예수 믿는 그 군에 있는 몇십만명 청년중에서 예수 믿는 청년이 많을건데, 아무도 그런걸 안 당하는데 문제가 안 생기는데 이 청년이 딱 당했다 그말이지요. 생겼으면 그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원인이 있고. 살펴보고. 그런데 어쨌든 불구하고 ‘그래도 못합니다.’ 아주 뭐 대단한 협박까지 하고 위협까지 했는데도 ‘그래도 못합니다’. 그렇게 당하는 것이 그게 생각하는바 여러 가지 생각할 수 있고 살펴도 봐야 되겠고 조심도 해야 되겠지만은 그게 순수하게 그렇게 된 것 같으면 그게 바로 예수의 환난입니다. 섞임없는 환난이다 그말이지요. 국기를 반대하는 것 아닙니다. 군대를 반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이비한 종교도처럼 여호와의 증인은 군대 안가는 사람들입니다. 국기도 반대합니다 그 사람들은. 전쟁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피 흘리면 안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지 않습니다. 국기 반대 안합니다. 군대도 반대 안합니다. 정부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단체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못하는 것은 경례라는 표현은 ‘공경할 경’자, ‘예도 례’자. 인격가진 사람이나 존재에게 표하는게 경롄데, 국기는 나라의 표상이고 상징이고 깃발일 뿐인데 어떤 젊은 사람들은 국기를 가지고 옷을 만들어 입고 다니는데. 국기를 마구 발로 짓밟고 불에 태우는데. 그렇게도 하는데, 그 국기에 대해서 우리는 반대하지 않고 소중히 취급하고 그렇게 하는데 경례하라 하기 때문에 인격 없는 존재에게,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경례하라 그러니까 그거는 양심상 신앙이 못합니다. 논리적으로 틀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당하는 고난 같으면 그거는 예수의 환난입니다. 이런 환난이 다 예수의 환난. 그러니까 그런 것들, 학교에서 또 회사에서 양심지키려고 주일 지키려고, 또 여러사람이 모여서 하나 좀 뒤로 빼먹자 하는 거기에 동참 안하려 하는 그런거. 이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있는 세상이고 이 세상은, 어떤 사람이 검사하고 대화하는데 검사가 그러더란가요? ‘한번 털어볼까요? 먼지 안나는가.’ 그러더라던가요? 한번 털어볼가요? 먼지 안나는가. 털어 먼지 안나는 것이 없는 그런 세상 속에, 그러니까 그말은 다시 말하면 무슨 뜻입니까? 법이란 것은 여기 갖다대면 여기 맞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법 갖다대면 대한민국에 적용안될 죄인 아닌 사람 단 하나도 있겠습니까? 그말은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 사람은 전부다 죄인들이고 범죄자들이다 그말이지요. 세상은 그런 세상이고 도둑놈 같은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죄 안짓고 하나님의 계명을 참 깨끗하게 바로 지키려고 하면은 많은 마찰이 있는데 예수의 환난은 이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 말씀하신 성경에 말씀하신 이 말씀 죄를 멸하는 죄 짓지 않는, 죄를 멸하는 또 주신 사죄를 지키는 이것 때문에 여러종류 여러형태로 고난 당할 때 그 고난을 예수의 환난이라 그리 말합니다. 예수의 환난. 사도요한이 여기에 동참을 했고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되는 그런 것인데, 이런 환난이 이런 외부적인 나 자신과 내 밖에 있는 객관에 세력들과 싸우는 신앙의 전투지요. 나와 객관이 전투하는 신앙에 전투, 이런 전투인데 이런 전투도 전투고 환난이고 그 속에 내면에 들어가면 그보다 더 어려울 수 있는 것은 자기와 자기가 싸우는 자기 속에 있는 자기 대적과 더불어 싸우는 그게 더 큰 전투가 될 수 있습니다. 외부적으로 보기에는 객관으로 더불어 전투하는 그 전투가 환난인데 내면속으로 들어가면 자기 속에 자기 아닌 자기, 옛사람 자기, 악성 악습으로 더불어 싸우는 그 전투가 더 큰 환난이 될 수 있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대외적인 그런 신앙전투를 두고는 탄식하거나 고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어떨때 그가 탄식을 했습니까? 자기 속에 두 자기가 있어서 자기 아닌 자기가 자기를 끌고 갈 때 그게 바로 자기 속에 악성이고 악습인데 그것이 끌고 갈 때 사도 바울은 탄식을 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두 사이에 끼어있다.’ 그것이 참 어려운 신앙의 전투입니다. 이 신앙전투가 있고 이 신앙 전투를 의식을 하고 인식을 하고 이렇게 싸워나가는 사람은 넘어져도 깨어있는 사람이고 이 신앙 전투 자체가 없는 사람들은 아득하게 승리한 사람이 아니면 자는 신앙을 가졌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깊이 생각해봐야 됩니다. 예수의 환난과 예수의 나라, 예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지배자로 주권자로 통치자로 모시고 그분에게 순종하는 그 나라가 예수의 나라입니다. 이런 생활 하나님께만 피동되는 생활, 아무것에게도 내가 피동되지 아니하고 지배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 한분에게만 지배받고 통치받는 그 생활 이 두 생활에 계속 되어지는 환난과 나라에 계속하는 여기 이 환난의 참음에 이 두가지를 계속하는 참음에 동참하는 이것이 사도요한의 생활이였고 이렇게 하다보니까 사도요한은 이것이 원인되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가 원인되어가지고 밧모섬에 귀향살이 갔는데 이때도 외부적으로는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갔지만은 내부적으로는 거짓부리 신자들에 의해서 갔다 그럽니다. 거짓부리 신자. 손양원 목사님을 공산주의자들에게 팔아먹은 인간들이 애양원내에 거짓부리 신자라 그러지요. 그런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게 됐습니다. 사도요한이 당한 환난입니다. 그런데 이런 환난, 하나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해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환난을 당했습니다. 환난을 당하면 그게 전부가 아니고 그 환난을 맞이할 때 여러 가지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환난을 당할 때 여러 가지 생각해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연단시키는 것인가 과정인가도 생각해보고 또 나한테 뭔가 내가 실수하거나 내 욕심이거나 내가 잘못처리해서 당하는 그런건 없는가, 고칠 것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고 그런데 어떤 형태든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예수의 증거 때문에 당하는 신앙 때문에 당하는 그런 환난을 맞이하게 되면 당하게 되면 그 당하는 과정은 고통스럽고 어렵지만은 그 너머에 들어가보면 그 세계에 들어가보면 새로운 세계가 발견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이 하나님 말씀과 예수의 증거 때문에 귀향살이가는 환난을 당했는데 그 귀향살이 유배간 밧모섬에서 주의 날을 맞이한 그 주의날은 다른 때 맞이한 주의 날과 확연하게 틀렸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의 날에, 주의 날을 맞이한다는 그 주일은 다른 날 맞이하는 주일과 틀렸습니다. 같은 주일이라도 하나님의 역사가 틀립니다. 성령에 감동되었는데 그때 성령에 감동된 그 감동은 다른 때 감동된 그 영감하고 틀렸습니다.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서 뒤에서 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예수의 증거 때문에 귀향살이 갔습니다. 환난 고난을 주님 때문에 신앙 때문에 당했고 그래서 귀향살이 갔고 귀향살이 가서 주일을 맞이했고 주일에 성령의 감동을 받았는데 뒤에서 나는 소리가 들렸는데, 뒤에서 난다 그말은 사도요한, 현재까지의 사도요한과 정반대라. 그때까지 사도요한이 듣지 못했던 깨닫지 못했던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새로운 깨달음을 가지게 되는 과정입니다. 전혀 새로운 것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뒤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말하는 음성을 알아보려고 몸을 돌이켜 뒤를 돌아보니까 누가 보였습니까? 일곱 금 촛대가 보였고 촛대 사이에 주님이 보였는데, 인자 같은 이가 보였는데 쭉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자기가 그 발 앞에 엎드려졌으니까 사도요한은 주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도입니다. 가장 주님이 아끼는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요한입니다. 예수의 품에 의지해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어떻게 마지막에 순교할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 품에 누워가지고 ‘주여 이 사람이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그랬습니까? 아니, 예수님이 사도요한을 보고 그랬지요. 그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있던 그 사도요한.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복음을 기록한 그 제자. 그 제자가 바로 사도요한 여기 요한계시록 기록한 사도요한이니까 예수님을 대면해서 본 사도고 잘 아는 사도입니다. 그랬는데 밧모섬에 가서 만난 그 주님은 살아생전 자기가 봤던 그 주님, 부활 후에 만났던 그 주님, 그때까지 자기가 전부 다 바쳐서 목숨 바쳐 섬겨오던 그 주님, 그 주님과 밧모섬에서 만난 주님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주님을 새롭게 발견했다 그말이지요. 그래서 주님을 보고나서 주님만 발견한 것이 아니고 주님을 발견함과 동시에 자기를 발견하니까 어찌 됐습니까? 그 발앞에 엎드러져서 죽은 자처럼 됐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위대한 분인줄, 두려운 분인줄, 깨끗한 분인줄 몰랐는데 그렇게 알았고 그 앞에 자기는 어떤 자기인것을 새로 알고나니까 주님을 보고 자기는 그 발 앞에 엎드러져서 죽은 자 같이 되어졌습니다. 그러고나니까 주님의 음성이 들렸고, 위로의 음성이 들렸고 요한계시록을 보고 기록을 하게 됐다 그말이지요. 이게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됐는데 그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그것이 어디서 그렇게 되었느냐? 귀향살이간 밧모섬에서. 왜 귀향살이 갔느냐?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 때문에. 말하자면은 신앙 때문에 하나님 말씀 뜻 계명 지키는 것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그 어려움을 피하지 아니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당해야 될 그 어려움을 자기를 포기하고 당했을때 외부적인 환난이 있는데 그 환난 속에 들어가보니까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발견이 되어졌다.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깨닫지 못했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됐다 그말입니다. 주일도 새 주일, 영감도 새 영감, 음성도 새 음성 새 깨달음, 주님도 새로운 주님 자기도 새로운 자기 완전히 새롭게 발견되어졌는데 아마 신앙의 경험을 해본 분들은 다 느낄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 성장이라는 것 신앙 발전이라는 것 신앙의 깊이로 한단계 더 들어가는 깊은 속에 주님과의 관계로 들어가는 그 깊이 들어가는 그 신앙의 발전 성장은 주님과 깊은 은밀한 영교 이것은 고난 없이는 되는수가 없습니다. 고난을 바로 통과할 때 그 고난 안에 고난 너머에 새로운 세계가 발견되는 그런 것이 있다 그말이지요. 평소생활도 그렇습니다. 자기와 더불어 싸우는 대내전 전투 거기서도 자기가 자기 속에 자기 아닌 자기, 자기 속에 들어있는 세상인 악성과 악습을 꺾고, 그것과 더불어 싸워 이겨서 그 고난을 이겨내고 싸워 승리했을 그때에 그때그때마다 하나님께 주시는 그런 깨달음이 있고 영감들이 있고 그게 크면 클수록 그 깨달음 영감은 더 크고 깊은 것인데 우리가 그런 것을 예사로 생각을 하고 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버리고나니까 우리 신앙이 항상 제자리 머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신앙은 고행주의가 아닙니다. 그렇지만은 신앙에 고난은 필연적으로 오게 되어있습니다. 고행적인 고난, 실수적인 고난, 사욕적인 고난, 불필요한 그런 고난 마찰을 최대한 피할 것은 피하는게 좋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고난을 맞이할때는 피해서도 안되고 두려워해서도 안되겠고 당당하게 맞서야 되겠고 그 신앙적인 고난을 당하게 되면 그 너머에는 그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발견되어진다는 이것을, 이거야 뭐 가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지식적으로는 성경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있으니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내가 이 세계에 들어가보는 것은 각자 자기 주신 그 현실에서 신앙적인 고난을 당해볼때 그리고 그 고난을 승리로 통과할 때 그때 알게되고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니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은 원리는 이러하다는 겁니다. 신앙의 고난을 피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들이 되어야 되겠다, 한번 더 우리 자신을 좀 돌아보고 다져보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 없습니다. 가감도 없고 변함도 없습니다. 틀림없는 불변의 진리고 이 진리는 사도요한에게만 해당되는게 아닙니다. 바울에게만 해당되는게 아니고 다니엘에게만 해당되는게 아닙니다. 다 우리는 형제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같이 해당이 되어집니다. 나는 신앙적인 고난을 얼마나 당했는가, 깊이 생각해보고, 고난을 피하지 않았는가 어려움을 피하지는 않았는가 돌아보고 신앙적인 고난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는 신앙에, 역경에 용감한 그런 신앙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