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3-주후(고전15:49)
부활 소망의 생활2014-03-23조회 306추천 29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35절-49절 (요약/2014.03.23.주일)
제목: 부활 소망의 생활
1. 기독교는 부활 소망의 도
1)기독교는 믿음의 도
①믿음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믿는 것
②자기와 세상을 부인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일
③기본 믿음의 터 위에 건설 믿음으로 자라가야
2)기독교는 부활 소망의 도
①성경에 기록된 많은 말씀 중 부활을 믿는 신앙
신앙생활은 기본적으로 사후, 부활 후를 바라보며 믿는 것
②예수 믿어 받은 땅의 복은 표적일 뿐 / 사두개 교인들
표적은 믿지 않는 자를 위해 있는 것 / 말뿐인 바리새교인들
③기본회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평생회개: 돌아선 걸음에서 평생 달려가는 것
소망을 하늘에 두고, 부활 후에 소망 두고 그리 향해 가는 것이 평생회개
④부활이 없으면 가장 불쌍한 사람들
부활 소망이 우리 소망, 부활의 손익 계산
부활을 보며 사는 생활이 우리 생활
2. 부활의 세계
1)영계와 우주가 통일된 세계
2)무한, 완전, 영원한 세계
3)가장 고차원의 세계
- 빛의 세계, 공의의 세계, 진리의 세계
- 침해가 없고 침해 받을 수도 없는 세계,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세계
- 자유의 세계, 사랑의 세계
4)변동이 없는 불변의 세계
①그 나라 자체도 불변
②순위 변동이 없는, 고정된 순위에서 영원히 자라가는 세계
3. 부활 세계의 차이
1)세상의 차이
- 세상에서도 차이 없는 곳은 없고
- 차이가 있는 것이 공평이요 공의
- 차이는 있을 수밖에 없는 필연이며 자연 계시
2)본문의 설명(부활과 부활 영광의 차이)
①부활이 있는 것-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②뿌릴 때(심을 때)는 알갱이, 싹이 나 자라면 형체를 가진 식물
③형체와 형체의 차이는 무한/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④부활의 소망을 바라며 심는 생활
⑤표준은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
3)부활 세계의 차이
①부활의 차이는 무한한 차이
②부활의 차이는 권능의 차이
③부활의 권능은 하나님 중심, 형제 구원
④부활의 권능의 성격은 영광, 영광은 감사, 희생 봉사, 시은, 필요
4. 부활 소망을 준비하는 생활
1)부활의 날을 기억하고 소망할 것
2)모든 생활을 부활의 날에 맞출 것
5. 정리
1)기독교는 부활 소망의 도입니다.
2)부활의 세계를 기억합시다.
3)부활의 세계의 차이를 기억합시다.
4)부활의 세계를 준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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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원문)
20140323 주후
고린도전서 15:49-49
35절부터 다 봉독을 해야되는데, 한절만 봉독했습니다. 오전에 크게 네가지를 말씀드렸는데, 두가지는 좀 설명을 드렸고 나머지 두가지는 간단하게만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소망의 도라는 것이 첫째였는데, 거기서 기독교는 부활소망의 도인데 그전에 앞서 기독교는 믿음의 도다, 기독교는 믿음의 도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을 믿음이라 하느냐. 하나님이 성경에 기록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모든 구원의 세계를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고 인정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가장 첫째 믿음이란 것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거기 믿는다는 말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읽어서 아는 지식을 전제로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무엇이 기록됐는지 알게되겠고 알면 그 사실을 내가 마음으로 받아드려서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대부분의 모든 말씀들이 사람이 이해할 수도 없고 알기도 어렵고, 더욱이 믿기는 불가능한 그런 말씀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끝장까지 거의 대부분 모든 말씀이 다 그러합니다. 발람이 발락의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이 금하시는 걸음을 부귀영화가 탐이 나서 발락이 있는 곳으로 갈 때 뭘 타고 갔습니까? 나귀를 타고 갔는데, 천사가 앞에 섰으니까 발람은 그 사실을 보지 못하고 나귀 눈에는 보이니까, 나귀가 천사가 칼을 들고 있으니까 겁이 나서 3번을 피하다가 안되니까 자기 주인 발람을 담벼락에 발을 비벼서 발을 상하게 만들었고 그때 발람이 화가 나서 지팡이로 나귀를 두드려패니까 그다음 어떻게 됐지요? 당나귀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사람이 하는 말을 했습니다. 당나귀 말한 것이 아니고 발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사람의 말을 나귀가 했는데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소립니까? 당나귀가 사람의 말하는거는 동화에나 나오는 이야기고 만화에나 나오는 이야기고 전설에나 나오는 말이지 실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실제 그러했습니다. 그 나귀는 사람의 말을 한거고, 그래서 발람이 그 나귀 말을 들었습니다. 대화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 가득 찬 것이 성경입니다. 좀 허무맹랑한 물에 넣어도 붓지 않을 거짓말 같은 그런 말들로 가득 찬 것이 성경이니까, 이거는 믿을 수 없다 그말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그런데 이 사실을 믿어야 그게 믿음인데, 그런데 믿으려고 해도 사람이 도무지 이해도 안되고 상식에도 안 맞고 자연이치나 과학에도 안 맞으니까 믿을 수 없는데 이것이 믿어지는 역사가 있으니 그게 하나님의 은혜다. 그래서 기독교는 믿음의 도라 그럴때 첫째, 성경에 있는 사실을 그대로 믿는 것이 믿음이다. 그런데 이거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오전과 조금 순서를 바꾸면, 믿을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이거는 두 번째, 하나님이 은혜로 믿어지도록 해야 믿어지지 하나님이 은혜주지 않으면 믿을 수가 없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사실이 건설 믿음적으로 다 믿어지지 않아서 믿음생활을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래도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고 내세를 믿고 있는 우리들이니까 우리가 안 믿는 사람들, 믿음 없는 사람들,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때 말을 하지만은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불쌍히 여길 것이지 나는 믿어지는데 너는 왜 안 믿어지느냐 하고 그들을 무시하고 그래할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참 답답한 노릇이 있는데, 종종 말씀을 드리지요. 나는 아는데, 언제 보니까 이것도 신문에서 봤던가요. 어떤 부부가 있는데 이 남편이 머리가 좋고 대학 교수랍니다. 대학 교수인데, 아주 머리 좋고 공부 잘했겠지요 교수니까. 그런데 자기 아들들이 있는데, 아들 딸들이 있는데 아들 딸들이 수학 문제를 몰라서 물어보면 아버지 하는 말씀, 뭐라 그럽니까? ‘어떻게 이것을 모를 수가 있지? 이런 쉬운 문제를 왜 모르지?’ 모른다는 그 사실을 이해를 못한다는 거지요. 아버지는 아는데, 아들딸들은 모르니까 ‘이걸 왜 몰라?’ 당연히, 자기는 그 나이때 알았다 이겁니다. 모르니까 아이들은 환장을 하는 거지요. 모르니까 물어보는건데, 설명해주면 되는데, ‘이걸 어떻게 모를 수 있어? 너희들이 공부해서 알아봐’ 이러니까 자녀들하고 아버지하고 담이 딱 막혀서 대화가 안된답니다. 그 아버지 나중에 가면은, 이제 세월 지나가면 나이가 많아지면 요즘 세월 지나서 나이 많아지면은, 이사 가면 할아버지들 어떻게 한다고요? 할아버지들이 먼저 이삿짐 조수석에 딱 타고 앉았답니다. 할머니 아내가 재활용센터에 재활용품하고 같이 갖다버리고 갈까 싶어서 겁이 나서 먼저 타고 앉았답니다. 그 할아버지는 그래도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시대를 모르는거지요. 그 교수님 나이 많아지면 뱅뱅 돌려서 아내한테 버림받고 자녀한테 버림받고 외톨이가 됩니다. 그런걸 가리켜서 주관이라 그럽니다. 사람은 얼굴이 다른 것처럼 생각도 다르고 지혜도 다르고 지식도 다르고 사고방식 모든게 다른 것이 사람입니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내가 이러니까 너도 이래야 된다, 누구만 할 수 있는 말입니까?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말입니다. 사람은 그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이 ‘나는 믿어지는데 이 사실이 왜 안 믿어져?’ 그러면 그 사람이 아까 그 교수님하고 꼭 같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그래서는 안되겠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된 허무맹랑한 모든 말씀들은 일반 상식으로 사람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도무지 믿어서는 안되고, 안 믿어져야 정상인 그 모든 사실이 믿어지게 된다 그말이지요. 여기 앉아계시는 우리, 저를 포함해서 여러분들 모두 정상이라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정상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이 사실을 믿는다고 앉아있는데 우리가 정상입니까? 안 믿는 사람들이 볼때는 이상한 사람들로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믿는 우리가 보면 그들이 불쌍한 겁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안 주시면 믿어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라야 믿어지고 이걸 가리켜 기본구원이라 합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도입니다.
그다음 세 번째는, 이 기본구원 위에다가, 종자적인 믿음이니까 기본믿음은, 이 기본믿음을 우리가 받았으니까, 하나님이 그냥 주셔서 공짜배기로 값 없이 은혜로 받은 겁니다. 받았으면 이걸 가지고 까먹지 말고 이걸 가지고 땅 속에 심어서 파묻어 놓지 말고, 공중에 매달아놓지 말고 이걸 잘 길러야 됩니다. 믿음을 잘 길러야 되는데, 이 믿음을 길러나갈 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자기와 세상을 부인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되지 않으면 믿음이 자라가지 않습니다. 성경에 모든 것이 전부 다 그러합니다. 이게 기독교는 믿음의 도라는 것에 하나의 상식으로 세가지로 한번 정리를 해본겁니다. 그다음 큰 첫 번째에서 두 번째로, 기독교는 동시에 부활 소망의 도다. 기독교 신앙이란 것은, 기독교는 부활의 도입니다. 이게 기본이고 상식입니다. 그러니까 사두개 교파들을 엄밀하게 따지면 기독교가 아니고,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는 따지고 들어가보면 그 사람들 기독교 아닙니다. 부활을 믿는 것, 예수님 부활과 우리 부활과 내세를 믿는 것이 기독교라는 예수교라는 신앙의 기본 바탕입니다. 원래 성격이 그러한 겁니다. 얼른 예가 잘 안 나서 그런데, 자본주의라는 그 세상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경쟁사회고, 실력껏 먹고 살아라, 억울하면 출세해라 그게 자본주의의 바탕입니다. 단, 법 안에서 법 테두리 안에서 남한테 피해를 끼치지 마라. 피해를 끼치되 법 테두리 벗어나지 마라, 좀 강하게 말하면 그정도 나갈 수 있겠지요. 그게 자본주의의 기본상식이고, 공산주의는 이것과 정반대라서 같이 농사짓고 같이 만들어파고 갈라먹자 이게 기본 상식입니다. 깔린 바탕입니다 이게. 이슬람 국가는 그 나라에 건국이념이 말하자면은, 종교국가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래서 외부에서 뭐라그러던지, 또 어느 나라에,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 국회의원들이 법을 하나 통과시켰는데 무슨 법을 통과 시켰느냐? 남자가 부부에서 남편이 아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다른 여자를 하나 더 데려올때, 일부다처제, 하나 더 데려올때 옛날에는 본부인의 동의를 얻도록 그래했는데 법을 개정해서 남자가 마음 먹으면 본부인의 동의 필요없고 두 번째 부인을 알아서 얻도록 그렇게 법을 개정을 했다 그러죠. 합법입니다 그게. 그 나라는 그게 법입니다. 그러니까 여자 국회의원들은 목숨 걸고 투쟁을 하겠지만은, 세상은 무슨 주의입니까? 민주주의 사회는 무슨 주의입니까? 종다수주의니까, 남자 국회위원이 60명 여자 국회위원이 예를 들어 40명이면은 무슨 법이든 통과시키는게 민주주의입니다. 그러니까 민주주의는 그게 잘되면 잘될수록 타락하지 잘 될 리가 없습니다. 종다수주의라는 것은 대개 그런 것이고, 이 세상은 원죄가 가득찬 세상이니까 원죄를 충족시키는게 그게 많은 사람이 좋아하니까 바로 설 리가 없는 거지요. 그게 세상 법입니다. 코메디지요. 요즘 우리나라 대통령이 규제철폐를 마구 외치고 있는데 공무원들은 웃고 앉았다 그러지요. 대통령 임기는 앞으로 4년만 하면 끝난다. 우리는 60세까지야. 끄떡없어 그러고 앉았다 그러지요. 뻔히 아닌 줄 알면서도 밥통이 달렸으니까 꼼짝도 안하고 있는 그게 민주주의입니다. 독재국가는요? 대번에 ‘감옥 보내.’ 감옥 가야죠 뭐. ‘말 안들어? 감옥 보내.’ 그래서 나라경제가 발전될때는 독재를 해야 경제가 발전이 되지, 무조건 그런건 아니지만은 민주주의 해가지고 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으나 쉽지가 않습니다. 그 나라 국민성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지요.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다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부활 소망의 도입니다. 말하자면은 자본주의 국가는 경쟁체제, 공산주의 국가는 공동생산 공동분배 같이 갈라먹는 것, 이슬람 국가는 코란인가 그걸 믿는 그게 기본적인 국가입니다. 그게 거기 맞춰서 모든걸 해나가듯이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부활을 향하는 것이 기본 상식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부활을 안 믿거나 부활 넘어 세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 믿는 사람 아닙니다 그사람. 기독교인 아닙니다. 우리가 실제 생활에서 그래 못해도 부활은 있다. 그런데 멀리 있으니까, 현재가 급해서 준비 못해서 그렇지 부활은 틀림없이 있고 준비해야 되는게 맞다, 이게 예수 믿는 기독교인들의 기본 상식이고 기본 자세입니다. 이렇게 되어있으면 믿음생활에서 양심의 가책이라도 받고 조금이라도 준비하는 사람이 되고, 아예 부활자체를 관심도 없고 신경 안쓰고 남의 일처럼 여기면 그 사람은 이름만 걸어놓지 실제는 예수 안 믿는 사람하고 별 다를바가 없게 됩니다. 부활 소망의 도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많은 말씀 중에서, 믿는 사람은 부활을 믿는 것 이게 아주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후 세계를 알고, 믿고 그 세계를 준비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바탕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어서, 잘 믿어서 복을 받는 것은 두 종류가 있어서, 하나는 예수 잘 믿어서 이 세상 복, 살아생전 물질의 복, 가정 화목의 복, 자녀 복, 평안의 복, 건강의 복 이런 복을 받는 거 하나 있고, 하나는 이 복 말고 그 너머에 천국의 복을 받는 것이 있는데, 세상 복을 주시는 것은 이유가 뭐냐? 하나님 계명 지키면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해주시겠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런데 아마 십중팔구라 해도 맞을만큼, 지나치지 않을만큼 이 세상에서 예수 잘 믿어서 물질의 복을 받은 사람 치고, 그 물질 복을 천국 복으로 연결시키고 성화시켜서 나가는 사람은 열에 한 둘 있을까 말까하고 거의 대다수는 세상복을 받으면 거기 다 주저앉아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어찌보면 예수 잘 믿어서 세상복 받는게 필요도 하고 좋은 면도 있던데, 어떤 면에서 보면은 대단히 불행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차라리 예수 잘 믿어갖고 이 세상 복을 별로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가서 천국을 깨닫고 그 나라 준비하는 그게 훨씬 더 복있는 사람이 되는데, 갖다붙이는건지 몰라도 백목사님 생전 서부교회나 총공회 전체를 두고 정말 바로 믿는 그런 교회, 서부교회 별명이 무슨 교회라고요? 지게꾼 교회였습니다. 지게꾼 교회. 거기 잘 믿는 사람 꽉 찼는데. 거기도 물론 훌륭한 잘난 사람들 있었습니다. 의사도 있었고 교수도 있었고 박사도 있었고 또 검사도 있었고 고위직에 있는 사람 있었는데 3,4천명 중에 그런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만큼 몇 사람이 안되고, 나머지는 전부다 대개는 노가다 하는 사람, 자영업 하는 사람, 그냥 예수 믿기 위해서 먹고 사는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거기 가치를 두지 않으니까. 이 세상에 가치 두지를 아니하니까. 이걸 수지계산을 따져가지고 잘 살펴봐야 됩니다. 세상복은 좋고 필요합니다. 돈이 없으면 안되는 거지요. 직장이 없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이거는 아무리 많이 가져보고 오래가지고 잘 가져도 결국 하나의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고, 흔적일 뿐입니다. 이거는 지나가는 겁니다. 우리가 영원히 가질 수도 없고 가질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있다가 없어질 것, 두고 갈 것, 떠나가야 될 이 세상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런 광대한 구원 세계를 예정하지 않았고, 목적하지 않았고, 이것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되어 와서 피 흘려 죽지를 않았습니다. 이거는 별 가치가 그렇게 없다고 말은 못하겠지만은 그래 가치가 크지를 아니합니다. 이거는 다만 영원한 천국을 위해서 준비하는 이용물밖에 되지를 않는다는 요걸 인식이 바꿔져야 됩니다. 그래서 이걸 가르켜 3번째 기본회개라 그럽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본토, 이 세상을 말합니다. 친척 아비집, 인간 피조물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바라보고 욕망할 것 많습니다. 알아주는 것 많습니다. 별에별 일이 다 있는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 하나님이 은혜로 기본믿음을 넣어주지 않은 사람들은 그게 전부니까 거기 도취되어서 살 수 밖에 없고, 우리들도 만약에 그랬다면 그래 살 수 밖에 없고 깨닫기 전에는 우리도 그리 살던 우리들입니다. 그게 전부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종자적인 기본 믿음을 받고나서 하나님을 알았고 천국의 구원을 알았고, 주님 대속을 알았고 무궁세계 부활의 세계를 깨달아서 알고나니까, 눈이 열려지고 나니까 그때부터는 사도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바울처럼 그래 매진해 달려가지는 못해도 우리 소망은 그리 있고, 그러기 때문에 늘 바울이 약할 때 말했던 것처럼 두 사이에 끼여 사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다, 부활의 세계를 바라보고 그리 향해서 매진해야 되는데, 내 속에는 악성과 악습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고 세상은 강하니까, 성령은 중생된 영을 통해서 나를 부활세계로 끌어당기는데 악령은 내 속에 있는 악성 악습을 붙들고, 세상을 다 붙들고 나를 세상으로 잡아 당겨서 둘 사이에 끼여서 죽을 지경이라, 곤고한 자라. 이 싸움이 성도의 싸움이고 여기서 믿음에 능력있는 사람은 그 세력, 세상과 악령 악성 악습의 세력을 뿌리치고 부활세계를 소망을 하고 그리 순간순간을 달려가는 이게 신앙생활이고 믿음의 세계다. 그러니까 기본회개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식을 바꾸는 겁니다. 사고방식을 아예 바꿔서 우리는, 나는 이 세상을 바라보고 살 사람이 아니다. 이 세상은 없어질 세상이고 불 탈 세상이고 썩어질 세상이고, 떠나서 두고 갈 세상이고 나는 떠날 사람이다. 천국에 영원한 천국, 부활 넘어 세계가 우리의 영주처고 그 나라를 향해 가는 것이 우리의 믿는 사람의 당연한 생활이다. 이 인식을 가지고 그다음 평생을 전투하면서 싸워가면서 노력해서 기본회개로 방향을 돌아선 그 상태에서 계속 달려가는 것이 그게 믿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이라. 이게 평생 회개라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부활의 날의 모든 소망을 두고, 가치를 두고, 모든 계산을 그날의 손익계산을 따져서 그때를 생각하며 오늘을 사는 이것이 기독자들의 신앙생활 이게 부활 소망의 생활이고 부활 소망의 도다 하는 걸 이걸 크게 첫 번째 생각해봤습니다.
그다음 두 번째는, 그러면 부활의 세계를 어떤 세계냐. 다시 말하면,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죽음 너머의 사후세계는 있다치고, 그러면 그 세계는 어떤 곳인가? 그 세계는 첫 번째, 영계와 물질계가 통일된 나라다, 하나다. 대단히 크지요. 굉장히 큽니다. 우주도 큰데, 영계는 무한히 더 큽니다. 첫 번째. 우주와 영계가 통일된 나라. 하나로 통일된 그 나라. 그 나라가 부활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경계가 없이 무한합니다. 넓고 광대합니다. 끝이 없습니다. 무한하고 그다음, 거기 있는 모든 존재나 모든 역사나 모든 것들은 다 흠과 점이 없는 완전입니다. 그런 것들만 가기 때문에 완전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영원무궁토록 이어지는 겁니다. 끝없이 계속되어지는 나라가 그 나라다. 무한하며 완전하며 영원히 계속되는 그 나라가 부활의 세계다 이걸 알고나면 이 세상을 함부로 살 수가 없는데, 이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세상에 붙들려서 그냥 함부로 살고 있기 때문에 귀신 들린 아이에 아비의 부르짖음이 자꾸 생각이 나는 겁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부활의 세계가 믿어져야 되고, 그 믿어지는 믿어짐이 오늘 현실생활에 나한테 와가지고 내 마음에 모든 욕망과 욕심과 몸의 습성을 다 꺽어 누르고 이길만큼 그 믿음이 강해야되는데, 뜨거운 불이 타는데 그 불 속에 원수가 나서 나를 불 속에 집어넣으려 그러면 발을 버투고 원수의 얼굴을 할퀴면서, 손을 물어 뜯으면서 발버둥을 치면서 죽을 힘을 다해서 불 속에 안 들어가려고 애를 쓰지 않겠습니까? 왜요? 불 속에 던져지면 타 죽으니까. 아니까. 부활의 세계가 믿어지면, 오늘 이 세상에 천천금은 억만금이 있어도 믿음을 져버릴 수가 없을 것인데, 그 사실이 믿는다하나 그 믿음의 정도 강도가 약해서, 현실 생활을 현상 세계를 넘어서지 못하니까 내가 믿나이다 그러나 믿음이 부족하니까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런 소원이 있습니까? 이런 부르짖음이 속에서 나오시는 겁니까? 기도를 안 할 수가 없겠지요.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세 번째 그 나라 세계는, 가장 고차원의 세계. 가장 고차원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 나라 이름이 무엇이라고요? 가장 고차원의 세계라서 그 나라 이름을 천국이다. 하늘나라다. 공중에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가장 높은 최고의 최귀의 최영의 가장 존귀한 영광스러운 그 나라, 무엇이 그렇게 영광스러운가. 존귀한가? 그 나라에 가는 사람들, 그 나라에 있는 모든 일들, 모든 관계들. 그 나라는 빛의 세계다. 빛이라 말은, 모든게 환하게 드러난다 말이죠. 빛의 반대는 암흙이고 어두움입니다. 어두움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어둡다. 옛날에, 요즘은 자영업이 너무 많아서 투명하게 되가지고 수입이 대개는 좀 적지요. 옛날에는 시장바닥에 나물 팔고서, 나물 파는 그 장사 가지고 자녀 대학 공부 다 시키고 생선 몇 마리 갖다놓고 파는데 그걸 가지고,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저게 장사가 되나 싶은데 월급쟁이보다, 죄송합니다 표현이, 월급 직장 다니는 사람보다 몇 배나 더 많이 벌었답니다.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데. 양전에서 생선 몇 마리 갖다놓고 파는 그거 보기에 저게 돈이 되나 싶고, 직장 다니며 넥타이 매고 가방들고 신사처럼 그래 다니니까, 직장 다니면 반듯한데, 시장바닥에 나물 팔고 생선 파는 거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그게 어두워서 가려져서 몰라서 그렇지 그게 직장 다니는 사람들 몇배를 더 벌었다 말이죠 옛날에는. 그런데 지금은 다 밝아져서 다 드러나고 나니까, 너무 많으니까 그게 별로 없다. 그래서 옛날에는 장사가, 저도 많이 들은 말로, 장사는 참 장사가 어둡다 그럽디다. 장사가 어둡다, 그말은 수입이 많은데 사람들이 모른다, 안 드러났다 그뜻입니다. 어둡다는 말은, 숨은 것이 많고 드러나지 않은 것이 많다 그말이지요. 어두운 것은 좋은게 아닙니다. 밝은게 좋겠지요. 빛으로 나와라. 나타나는 것마다 빛이다. 그래서 믿음생활 신앙생활 바로 하면 그 사람이 모든 면에 투명해집니다. 밝아지고 깨끗해지고 마음에 숨기는 것이 없고 밝고 맑고 깨끗하면 그 사람은 자신감이 생기고 얼굴이 밝아집니다. 하늘나라는 밝고 맑은 거룩한 길, 그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 나라는 천국은 빛의 나라, 숨김이 없습니다. 가리는 것이 없고 모든게 다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면서 그 나라는 공의의 나라입니다. 공의라 말은 공평이다, 치우침이 없다 그말입니다. 어느 한쪽이 치우침이 없다. 그러니까 환하게 드러나면서 공의가 있으니까 그곳에는 차별이 있어도 시비곡직이 없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하고 저는 저렇게 하고, 자기 행한대로 산 그게 고스란히 다 드러나니까 아무도 항변을 못하고 거기 대해서 말을 못하는 거지요. 아무도 침해 받을 수도 없고 침해할 수도 없는, 말이 없는 세계, 무언의 세계, 그런데 다 통하는 그런 세계. 그러면서 사랑의 세계, 자유의 세계, 진리의 세계. 그 나라가 부활의 세계인데 이런 세계는 이 세상에 없고, 그런데 이것이 이론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요 이치 논리를 가지고 실제 생활을 써보면 과연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나가면 천국이 건설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 나라는 또 다시 말하면 영광의 나라다. 우리 구원은 영광의 구원이다. 영광이란 것은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 영광입니다. 그래 될 수 밖에 없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가장 고차원의 세계다.
네 번째 부활의 세계는, 변동이 없는 불변의 세계라 그랬는데, 첫째 뭐가 변동이 없습니까? 그 나라 자체가 변동이 없고 두 번째는요? 순위가 변동이 없는 여기서 사람이 환장을 하는 겁니다. 순위변동이 없다. 그 나라는 정해진 순위가 변동이 없습니다. 먼저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될 자가 많다 이거는 이 세상에서 해당되는 말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다 이것도 이 세상에서 해당되는 말입니다. 천국에는 순위가 영원토록 뒤바껴지는 법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나라는 새로운 종자가 생겨나는 법이 없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뿌려진 종자가 영원토록 자라기만 하는데, 어떻게 뿌렸느냐에 따라서 그 자라는 차이가 점점 영원히 다 벌어지는 그게 그 나라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실이 우리에게 바로 믿어진다면 여기에 전부 다 받치지 않는 것이 비정상이고 깨달은 사도바울이 이걸 깨닫고 난 다음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부활의 권능을 위해서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여’ 그리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도바울의 신앙이었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겠지요. 우리가 그리 되지 못하는 것은 깨달음이 부족하고 믿음이 부족한 연고입니다.
크게 세 번째는, 부활의 세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만 차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도 이 차이는 많이 존재합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차이는 없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이건 상식입니다. 사람들이 다 덮어가리고 아전인수격으로 그리 해석을 해서 제 좋도록 해석을 하고 저한테 맞춰 그래 해석을 하고 끼워맞추니까 이래저래 말장난하는 것이지, 어느 곳이든지 이 세상에는 가정도 그렇고 어디든지 세상에는 차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 차이가 있는 것이 정상이고 당연한 겁니다. 그게 공의입니다. 세상 어디든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거는 필연입니다. 자연 계시입니다. 부활의 세계는 차이가 더 많습니다. 본문에 잠깐 보면, 35절부터 성경 보시겠습니다. 35절,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래 말합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두 가지를 물었지요. 그러니까 36절에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땅 속에 씨앗을 뿌리면 일단 죽는 겁니다 땅 속에서. 죽는데 거기서 살아나는 겁니다. 땅 속에 묻혀서 썩은 것 같은데 죽은 것 같은데 거기서 싹이 나고 살아난다 그말이지요.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그래서 죽어야 산다. 부활이란 것은 죽음 너머에 있는 것이고 죽으면 반드시 부활이 있다, 필연성입니다. 그다음 37절에,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소나무를 심을때 제일 처음에 소나무를 심는 것이 아니고 솔씨를 심습니다. 벼 이삭인 볏대, 볏짚단, 볏대 벼 이삭을 심는 것이 아니고 나락 알을 심는 겁니다. 콩대, 콩낫까리 콩 그 껍데기 콩깍지 그걸 심는 것이 아니고 콩알 그걸 심는 겁니다. 그런데 알을, 알갱이를 심었는데 이거 죽었다가 날때는 형체가 심은 알갱이하고 난 형체는 전혀 다른게 나지 않습니까? 전혀 다르지요. 심을때는 그게 씨앗을 심었는데 날때는 그게 채소가 되고 나무가 된다 그말입니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그 종자마다 형체를 주시느니라. 그러면 여기서 첫째, 부활은 있다. 죽어야 산다. 사람이 죽으면 부활은 필연이다. 마치 알갱이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두 번째, 이 세상에서 사는 것하고 부활후의 모습은 전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심을때는 알갱이를 심었는데, 이 세상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살았던지 부활 넘어 세계에서는 이 세상 사는 모습하고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두 번째입니다. 그다음 세 번째, 그리고 부활후에 나타난 그 형체, 육체, 그 형체는 이 세상과 차이가 무한하게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네가지를 육체를 두고 말했는데, 육체는 육체라는 이름은 같고, 고깃덩어리라는 이름은 같은데 다 같으냐? 사람의 육체하고 짐승의 육체하고 또 하나는 뭡니까? 공중의 새 육체하고, 하나는요? 물고기 육체하고, 네가지 예를 들었는데, 사람의 육체하고 소하고 값이 같으며 가치가 같으며 비중이 같으며 상대가 같은가? 사람하고 소가 꼭 같은 고깃덩어리인데 사람과 소가 같으냐? 사람과 짐승이 같으냐? 다르지 않느냐. 사람하고 공중의 새가 같으냐? 다르지 않느냐. 사람보다 짐승은 더 못할 것이고 짐승보다 새는 더 못할 것이고 새보다 물고기는 더 불완전하고 더 못할 것이고. 꼭 같은 육체인데 이렇게 차이가 나듯이, 부활의 육체는 같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지만은 부활후 육체는 차이가 굉장히 나는데 그 정도가 어느 정도냐? 형체랑 이름은 같아서 하늘에 해도 있고 달도 있고 별도 있는데, 그것들의 영광과 가치가 다 다르고, 별끼리도 영광이 다 다르지 아니하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아서 차이가 그만큼 많이 난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그래서 깨달은 사람들은 썩을 것을 가지고 어떻게 한다고요? 이 부활의 차이를 아는 사람들은 썩을 것을 심어서 썩지 아니할 것으로 살고, 욕된 것을 심어서 영광스러운 것으로 거두고, 육의 몸을 심어서 신령한 몸으로 거두고, 약한 것을 심어서 강한 것으로 거두는 이것이 부활의 세계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전부다 썩을 것, 또 욕된 것, 약한 것, 육의 것인데 이걸 심으면 전부 썩지 아니할 것, 신령한 것, 영광스러운 것, 강한 것으로 부활의 세계에서 다시 살아나니까 이걸 깨달은 사람들은 여기 심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차이를 알고나니까. 그러면 이 부활의 차이가 있고, 부활의 이 소망을 바라보는 우리 표준은 어디가 표준이냐? 우리 표준은, 그다음 45절부터 보면은 첫사람 아담이 나오고 둘째 아담이 나오고, 땅에 속한, 흙에 속한 자가 나오고 하늘에 속한 자가 나오니까 우리의 표준은, 우리가 첫 사람 아담의 형상을 입은 것처럼, 둘째 아담 하늘에 속한 자 예수님의 형상 입고 우리의 부활 세계 표준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 우리 표준이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을 정리해보면 우리가 다섯가지를 여기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부활은 필연적으로 있다. 두 번째, 이 세상과 부활세계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람을 평가할 때 눈에 보이는 것 보고 평가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현재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전부가 아니고 그 사람 마음을 봐야 되겠고 인격을 봐야 되겠고 신앙을 봐야 됩니다. 보이지 않는 내면을 보는 사람이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그다음 세 번째, 형체와 형체는 차이가 심히 많다. 네 번째, 그러기 때문에 이 차이를 아는 사람들은 부활을 소망하고 심는 생활을 하고, 다섯 번째, 우리 부활의 소망은 표준은 주님처럼 되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는 이것이 우리 표준이다 요래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러면 부활 세계 차이는 어떤 차이냐? 부활 세계 차이는 무한한 차이인데, 그 나라 차이는 무한의 차이인데 무슨 차이냐? 권능의 차이다. 부활의 권능, 권능의 차이인데 그 권능은 무슨 권능이냐? 두가지로 말할 수 있으니, 하나는 하나님을 중심하는 그 차이다. 하나님을 얼마만큼 알았느냐. 얼마만큼 그분을 자기 모든 생활에 중심으로 주격으로 모시고 살았느냐, 그분과 함께 살았느냐 그 차이고, 또 하나는 얼마만큼 형제 구원을 위해서 애를 썼느냐 그 차이고 이것이 부활의 권능의 차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부활의 권능의 성격은 영광이고 그 속에는 부활의 권능을 마련하는데는 필연적으로 십자가라는 자기 희생이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 제가 질문 한 번 드려보겠습니다. 그냥 설교로 강연으로 저만 할 것이 아니고, 부활 세계 차이를 네가지 말씀드렸는데, 첫째는 무한한 차이입니다. 두 번째는 그 차이는 권능, 권세와 능력 권능의 차이입니다. 여기 따라서 가치와 대우 영광이 다 달라집니다. 세 번째 이 권능은 두가지, 하나님 중심과 형제 구원이 권능이다. 맞습니까? 성경 본문에 명문되어 있지 않는데 이걸 해석해보면 하나님 중심, 하나님을 모시고. 부활의 세계는. 그래서 천국은 표현하자면, 사람들이 하도 독재를 싫어하니까 그런데 하늘나라는 독재국가인데 그 독재가 완전한 독재라서 자유의 모든 존재에 자유의지에 의한 독재, 참 모순인 것 같은데. 그런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은 하나님 한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인간들이 자기 중심으로 타락한 자기 중심의 독재자들이 이걸 가려가지고 전부다 천국을 가리고 있는데 하나님은 완전자입니다. 사랑이시고. 사랑이기 때문에 당신 전부를 다 받쳤고 이런 분이 당신한테 맞춰야 되는 그게 천국인데, 그러기 때문에 그분이 주인으로 왕으로 통치자로 영원한 생명과 행복에 근원으로 계시는 그 나라기 때문에 그분에게 모든 걸 다 맞춰야만이 그 나라에는 가치가 있고 쓸모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중심이라 말은 세상에서 얼마만큼 하나님을 알았느냐, 그분을 깨달았느냐, 모시고 살았느냐, 그 분 중심위주로 살았느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인데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가지고 자기 아는대로는 모든 말이나 일처리나 모든 손익계산이나 수지 타산이나 비판 평가 전부다를 전부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에게 맞춰가지고 모든 생활을 하는 겁니다. 그게 그 나라의 가치고 권능이고 하나는 내가 그래 사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그리 끌어오기 위해서 노력하는 건데, 이 세계는 돈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강제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중심으로 바로 살면서 내가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가 낮아져야 되고 희생되야 되고 죽어져야 되는 십자가적인 희생이 들어가야 형제구원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래가지고 형제구원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놓고 얼마만큼 바른 중심 가지고 힘을 썼느냐가 그 나라의 권능이고 그 나라의 가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나라 권능, 부활의 권능의 성격은 영광이다. 아무런 대가없이.
세상도 이타주의를 말합니다. 이타주의를 말하는데, 세상이 말하는 이타는 논리적으로 성립이 될 수가 없다. 모순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리 말하지요.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을 했으면 말 그대로 순수하게 아무것도 바라지 아니하고 아무것도 안 먹고 그냥 자기 전부를 다 받쳐서 남을 위해서 자기 전부를 다 받쳐야 되는데 석가모니라는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고 부하로 들어가서 남을 위해서 희생했다. 얼마나 희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 사람한테 눈깔 사탕 얻어먹은 것도 없고 도움 받은 것도 없으니까. 모르겠는데 그 사람도 결국 그 자기에 그 교리나 생애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에게 얻어먹은게 많으니까 그것도 들어가보면 이기주의가 되겠지요. 세상에 모든 이타주의는 전부, 그래서 이기주의적인 이타주의가 되야 성립이 된다. 복잡하지만은 그래 말하는데, 기독교도 이기주의 같으나 이타주의고, 이타주의 같으나 그게 이기주의인데 그 이기주의가 바로 자기 위한 이기가 아니고 남을 위한 이기주의가 되는 이것이 신비한, 오묘한 기독교의 그 속에 들어있는 그런 영광의 세계라는 겁니다. 완전자 중심이라하는 거기서부터 이게, 그래서 하나님을 바로 아는 거기서 이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라서 그래서 부활 권능의 성격은 영광의 성격이다. 자기 가진 것을 상대방 위해서 다 내어놓으니까 영광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좀 생각해보시고.
크게 네 번째, 그러기 때문에 우리 생활은 부활 소망을 준비하는 생활인데 두가지로 준비하면 되겠습니다. 하나는, 첫째는 부활의 날을 기억하고 소망할 것. 두 번째는 우리 모든 생활을 전부 그날에 맞출 것. 모든 계산도 또 모든 소망도 욕망도 노력도 전부 부활 세계 그날에 맞춰가지고 모든 생활하는 이것이 부활의 날을 준비하는 이런 준비 생활이 되어지겠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베드로후서 3장에 말씀하신 것처럼, 부활의 날을 바라보면서 그날에 가치있을 것을 오늘에 마련하고 그날에 쓸모없을 것은 오늘에 다 정리해서 버리고, 그날에 귀할 것을 오늘에 마련하고 그날에 영광스러울 것을 오늘에 마련하는 이것이 부활 소망의 준비 생활, 이런 생활이 되겠다 하는 겁니다.
크게 정리하면 네가지입니다. 첫째, 기독교는 부활 소망의 도다. 두 번째, 부활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기억을 하십시다. 부활의 세계. 세 번째, 부활 세계 차이는 어떠한가. 네 번째, 부활 준비는 어떻게 할 것인가. 네가지로 기억을 하고, 문제는 이 모든 사실을 알아도 지식으로 논리로 알아도 이것이 내 속에 믿어져야 되는데, 믿어지지 않으니까 지식 따로 생활 따로 되어지는 겁니다. 내 말과 행동이 따로 되어지고 생활과 지식이 따로 되니까 죽을 지경입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믿음을 구하고 부활의 소망을 두고 그 날을 바라보며 오늘을 사는 우리가 되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믿는 사람이 복이 있다. 성경입니다. 안 믿었는데 120년후 홍수가 나서 닥치고 보니까 사실이었습니다. 그때는 믿어봐야 소용이 없었습니다. 기독교는 예고의 도고, 예비의 도입니다. 미리 알려주시고 미리 준비하게 하시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오늘에 믿음 달라고 기도하고 믿음을 가지고 부활을 소망하고 준비하는 그런 우리 생활이 되도록 하십시다.
제목: 부활 소망의 생활
1. 기독교는 부활 소망의 도
1)기독교는 믿음의 도
①믿음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믿는 것
②자기와 세상을 부인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일
③기본 믿음의 터 위에 건설 믿음으로 자라가야
2)기독교는 부활 소망의 도
①성경에 기록된 많은 말씀 중 부활을 믿는 신앙
신앙생활은 기본적으로 사후, 부활 후를 바라보며 믿는 것
②예수 믿어 받은 땅의 복은 표적일 뿐 / 사두개 교인들
표적은 믿지 않는 자를 위해 있는 것 / 말뿐인 바리새교인들
③기본회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평생회개: 돌아선 걸음에서 평생 달려가는 것
소망을 하늘에 두고, 부활 후에 소망 두고 그리 향해 가는 것이 평생회개
④부활이 없으면 가장 불쌍한 사람들
부활 소망이 우리 소망, 부활의 손익 계산
부활을 보며 사는 생활이 우리 생활
2. 부활의 세계
1)영계와 우주가 통일된 세계
2)무한, 완전, 영원한 세계
3)가장 고차원의 세계
- 빛의 세계, 공의의 세계, 진리의 세계
- 침해가 없고 침해 받을 수도 없는 세계,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세계
- 자유의 세계, 사랑의 세계
4)변동이 없는 불변의 세계
①그 나라 자체도 불변
②순위 변동이 없는, 고정된 순위에서 영원히 자라가는 세계
3. 부활 세계의 차이
1)세상의 차이
- 세상에서도 차이 없는 곳은 없고
- 차이가 있는 것이 공평이요 공의
- 차이는 있을 수밖에 없는 필연이며 자연 계시
2)본문의 설명(부활과 부활 영광의 차이)
①부활이 있는 것-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②뿌릴 때(심을 때)는 알갱이, 싹이 나 자라면 형체를 가진 식물
③형체와 형체의 차이는 무한/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④부활의 소망을 바라며 심는 생활
⑤표준은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
3)부활 세계의 차이
①부활의 차이는 무한한 차이
②부활의 차이는 권능의 차이
③부활의 권능은 하나님 중심, 형제 구원
④부활의 권능의 성격은 영광, 영광은 감사, 희생 봉사, 시은, 필요
4. 부활 소망을 준비하는 생활
1)부활의 날을 기억하고 소망할 것
2)모든 생활을 부활의 날에 맞출 것
5. 정리
1)기독교는 부활 소망의 도입니다.
2)부활의 세계를 기억합시다.
3)부활의 세계의 차이를 기억합시다.
4)부활의 세계를 준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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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원문)
20140323 주후
고린도전서 15:49-49
35절부터 다 봉독을 해야되는데, 한절만 봉독했습니다. 오전에 크게 네가지를 말씀드렸는데, 두가지는 좀 설명을 드렸고 나머지 두가지는 간단하게만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소망의 도라는 것이 첫째였는데, 거기서 기독교는 부활소망의 도인데 그전에 앞서 기독교는 믿음의 도다, 기독교는 믿음의 도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을 믿음이라 하느냐. 하나님이 성경에 기록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모든 구원의 세계를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고 인정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가장 첫째 믿음이란 것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거기 믿는다는 말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읽어서 아는 지식을 전제로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무엇이 기록됐는지 알게되겠고 알면 그 사실을 내가 마음으로 받아드려서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대부분의 모든 말씀들이 사람이 이해할 수도 없고 알기도 어렵고, 더욱이 믿기는 불가능한 그런 말씀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끝장까지 거의 대부분 모든 말씀이 다 그러합니다. 발람이 발락의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이 금하시는 걸음을 부귀영화가 탐이 나서 발락이 있는 곳으로 갈 때 뭘 타고 갔습니까? 나귀를 타고 갔는데, 천사가 앞에 섰으니까 발람은 그 사실을 보지 못하고 나귀 눈에는 보이니까, 나귀가 천사가 칼을 들고 있으니까 겁이 나서 3번을 피하다가 안되니까 자기 주인 발람을 담벼락에 발을 비벼서 발을 상하게 만들었고 그때 발람이 화가 나서 지팡이로 나귀를 두드려패니까 그다음 어떻게 됐지요? 당나귀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사람이 하는 말을 했습니다. 당나귀 말한 것이 아니고 발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사람의 말을 나귀가 했는데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소립니까? 당나귀가 사람의 말하는거는 동화에나 나오는 이야기고 만화에나 나오는 이야기고 전설에나 나오는 말이지 실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실제 그러했습니다. 그 나귀는 사람의 말을 한거고, 그래서 발람이 그 나귀 말을 들었습니다. 대화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 가득 찬 것이 성경입니다. 좀 허무맹랑한 물에 넣어도 붓지 않을 거짓말 같은 그런 말들로 가득 찬 것이 성경이니까, 이거는 믿을 수 없다 그말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그런데 이 사실을 믿어야 그게 믿음인데, 그런데 믿으려고 해도 사람이 도무지 이해도 안되고 상식에도 안 맞고 자연이치나 과학에도 안 맞으니까 믿을 수 없는데 이것이 믿어지는 역사가 있으니 그게 하나님의 은혜다. 그래서 기독교는 믿음의 도라 그럴때 첫째, 성경에 있는 사실을 그대로 믿는 것이 믿음이다. 그런데 이거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오전과 조금 순서를 바꾸면, 믿을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이거는 두 번째, 하나님이 은혜로 믿어지도록 해야 믿어지지 하나님이 은혜주지 않으면 믿을 수가 없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사실이 건설 믿음적으로 다 믿어지지 않아서 믿음생활을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래도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고 내세를 믿고 있는 우리들이니까 우리가 안 믿는 사람들, 믿음 없는 사람들,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때 말을 하지만은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불쌍히 여길 것이지 나는 믿어지는데 너는 왜 안 믿어지느냐 하고 그들을 무시하고 그래할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참 답답한 노릇이 있는데, 종종 말씀을 드리지요. 나는 아는데, 언제 보니까 이것도 신문에서 봤던가요. 어떤 부부가 있는데 이 남편이 머리가 좋고 대학 교수랍니다. 대학 교수인데, 아주 머리 좋고 공부 잘했겠지요 교수니까. 그런데 자기 아들들이 있는데, 아들 딸들이 있는데 아들 딸들이 수학 문제를 몰라서 물어보면 아버지 하는 말씀, 뭐라 그럽니까? ‘어떻게 이것을 모를 수가 있지? 이런 쉬운 문제를 왜 모르지?’ 모른다는 그 사실을 이해를 못한다는 거지요. 아버지는 아는데, 아들딸들은 모르니까 ‘이걸 왜 몰라?’ 당연히, 자기는 그 나이때 알았다 이겁니다. 모르니까 아이들은 환장을 하는 거지요. 모르니까 물어보는건데, 설명해주면 되는데, ‘이걸 어떻게 모를 수 있어? 너희들이 공부해서 알아봐’ 이러니까 자녀들하고 아버지하고 담이 딱 막혀서 대화가 안된답니다. 그 아버지 나중에 가면은, 이제 세월 지나가면 나이가 많아지면 요즘 세월 지나서 나이 많아지면은, 이사 가면 할아버지들 어떻게 한다고요? 할아버지들이 먼저 이삿짐 조수석에 딱 타고 앉았답니다. 할머니 아내가 재활용센터에 재활용품하고 같이 갖다버리고 갈까 싶어서 겁이 나서 먼저 타고 앉았답니다. 그 할아버지는 그래도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시대를 모르는거지요. 그 교수님 나이 많아지면 뱅뱅 돌려서 아내한테 버림받고 자녀한테 버림받고 외톨이가 됩니다. 그런걸 가리켜서 주관이라 그럽니다. 사람은 얼굴이 다른 것처럼 생각도 다르고 지혜도 다르고 지식도 다르고 사고방식 모든게 다른 것이 사람입니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내가 이러니까 너도 이래야 된다, 누구만 할 수 있는 말입니까?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말입니다. 사람은 그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이 ‘나는 믿어지는데 이 사실이 왜 안 믿어져?’ 그러면 그 사람이 아까 그 교수님하고 꼭 같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그래서는 안되겠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된 허무맹랑한 모든 말씀들은 일반 상식으로 사람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도무지 믿어서는 안되고, 안 믿어져야 정상인 그 모든 사실이 믿어지게 된다 그말이지요. 여기 앉아계시는 우리, 저를 포함해서 여러분들 모두 정상이라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정상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이 사실을 믿는다고 앉아있는데 우리가 정상입니까? 안 믿는 사람들이 볼때는 이상한 사람들로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믿는 우리가 보면 그들이 불쌍한 겁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안 주시면 믿어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라야 믿어지고 이걸 가리켜 기본구원이라 합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도입니다.
그다음 세 번째는, 이 기본구원 위에다가, 종자적인 믿음이니까 기본믿음은, 이 기본믿음을 우리가 받았으니까, 하나님이 그냥 주셔서 공짜배기로 값 없이 은혜로 받은 겁니다. 받았으면 이걸 가지고 까먹지 말고 이걸 가지고 땅 속에 심어서 파묻어 놓지 말고, 공중에 매달아놓지 말고 이걸 잘 길러야 됩니다. 믿음을 잘 길러야 되는데, 이 믿음을 길러나갈 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자기와 세상을 부인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되지 않으면 믿음이 자라가지 않습니다. 성경에 모든 것이 전부 다 그러합니다. 이게 기독교는 믿음의 도라는 것에 하나의 상식으로 세가지로 한번 정리를 해본겁니다. 그다음 큰 첫 번째에서 두 번째로, 기독교는 동시에 부활 소망의 도다. 기독교 신앙이란 것은, 기독교는 부활의 도입니다. 이게 기본이고 상식입니다. 그러니까 사두개 교파들을 엄밀하게 따지면 기독교가 아니고,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는 따지고 들어가보면 그 사람들 기독교 아닙니다. 부활을 믿는 것, 예수님 부활과 우리 부활과 내세를 믿는 것이 기독교라는 예수교라는 신앙의 기본 바탕입니다. 원래 성격이 그러한 겁니다. 얼른 예가 잘 안 나서 그런데, 자본주의라는 그 세상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경쟁사회고, 실력껏 먹고 살아라, 억울하면 출세해라 그게 자본주의의 바탕입니다. 단, 법 안에서 법 테두리 안에서 남한테 피해를 끼치지 마라. 피해를 끼치되 법 테두리 벗어나지 마라, 좀 강하게 말하면 그정도 나갈 수 있겠지요. 그게 자본주의의 기본상식이고, 공산주의는 이것과 정반대라서 같이 농사짓고 같이 만들어파고 갈라먹자 이게 기본 상식입니다. 깔린 바탕입니다 이게. 이슬람 국가는 그 나라에 건국이념이 말하자면은, 종교국가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래서 외부에서 뭐라그러던지, 또 어느 나라에,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 국회의원들이 법을 하나 통과시켰는데 무슨 법을 통과 시켰느냐? 남자가 부부에서 남편이 아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다른 여자를 하나 더 데려올때, 일부다처제, 하나 더 데려올때 옛날에는 본부인의 동의를 얻도록 그래했는데 법을 개정해서 남자가 마음 먹으면 본부인의 동의 필요없고 두 번째 부인을 알아서 얻도록 그렇게 법을 개정을 했다 그러죠. 합법입니다 그게. 그 나라는 그게 법입니다. 그러니까 여자 국회의원들은 목숨 걸고 투쟁을 하겠지만은, 세상은 무슨 주의입니까? 민주주의 사회는 무슨 주의입니까? 종다수주의니까, 남자 국회위원이 60명 여자 국회위원이 예를 들어 40명이면은 무슨 법이든 통과시키는게 민주주의입니다. 그러니까 민주주의는 그게 잘되면 잘될수록 타락하지 잘 될 리가 없습니다. 종다수주의라는 것은 대개 그런 것이고, 이 세상은 원죄가 가득찬 세상이니까 원죄를 충족시키는게 그게 많은 사람이 좋아하니까 바로 설 리가 없는 거지요. 그게 세상 법입니다. 코메디지요. 요즘 우리나라 대통령이 규제철폐를 마구 외치고 있는데 공무원들은 웃고 앉았다 그러지요. 대통령 임기는 앞으로 4년만 하면 끝난다. 우리는 60세까지야. 끄떡없어 그러고 앉았다 그러지요. 뻔히 아닌 줄 알면서도 밥통이 달렸으니까 꼼짝도 안하고 있는 그게 민주주의입니다. 독재국가는요? 대번에 ‘감옥 보내.’ 감옥 가야죠 뭐. ‘말 안들어? 감옥 보내.’ 그래서 나라경제가 발전될때는 독재를 해야 경제가 발전이 되지, 무조건 그런건 아니지만은 민주주의 해가지고 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으나 쉽지가 않습니다. 그 나라 국민성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지요.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다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부활 소망의 도입니다. 말하자면은 자본주의 국가는 경쟁체제, 공산주의 국가는 공동생산 공동분배 같이 갈라먹는 것, 이슬람 국가는 코란인가 그걸 믿는 그게 기본적인 국가입니다. 그게 거기 맞춰서 모든걸 해나가듯이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부활을 향하는 것이 기본 상식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부활을 안 믿거나 부활 넘어 세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 믿는 사람 아닙니다 그사람. 기독교인 아닙니다. 우리가 실제 생활에서 그래 못해도 부활은 있다. 그런데 멀리 있으니까, 현재가 급해서 준비 못해서 그렇지 부활은 틀림없이 있고 준비해야 되는게 맞다, 이게 예수 믿는 기독교인들의 기본 상식이고 기본 자세입니다. 이렇게 되어있으면 믿음생활에서 양심의 가책이라도 받고 조금이라도 준비하는 사람이 되고, 아예 부활자체를 관심도 없고 신경 안쓰고 남의 일처럼 여기면 그 사람은 이름만 걸어놓지 실제는 예수 안 믿는 사람하고 별 다를바가 없게 됩니다. 부활 소망의 도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많은 말씀 중에서, 믿는 사람은 부활을 믿는 것 이게 아주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후 세계를 알고, 믿고 그 세계를 준비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바탕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어서, 잘 믿어서 복을 받는 것은 두 종류가 있어서, 하나는 예수 잘 믿어서 이 세상 복, 살아생전 물질의 복, 가정 화목의 복, 자녀 복, 평안의 복, 건강의 복 이런 복을 받는 거 하나 있고, 하나는 이 복 말고 그 너머에 천국의 복을 받는 것이 있는데, 세상 복을 주시는 것은 이유가 뭐냐? 하나님 계명 지키면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해주시겠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런데 아마 십중팔구라 해도 맞을만큼, 지나치지 않을만큼 이 세상에서 예수 잘 믿어서 물질의 복을 받은 사람 치고, 그 물질 복을 천국 복으로 연결시키고 성화시켜서 나가는 사람은 열에 한 둘 있을까 말까하고 거의 대다수는 세상복을 받으면 거기 다 주저앉아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어찌보면 예수 잘 믿어서 세상복 받는게 필요도 하고 좋은 면도 있던데, 어떤 면에서 보면은 대단히 불행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차라리 예수 잘 믿어갖고 이 세상 복을 별로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가서 천국을 깨닫고 그 나라 준비하는 그게 훨씬 더 복있는 사람이 되는데, 갖다붙이는건지 몰라도 백목사님 생전 서부교회나 총공회 전체를 두고 정말 바로 믿는 그런 교회, 서부교회 별명이 무슨 교회라고요? 지게꾼 교회였습니다. 지게꾼 교회. 거기 잘 믿는 사람 꽉 찼는데. 거기도 물론 훌륭한 잘난 사람들 있었습니다. 의사도 있었고 교수도 있었고 박사도 있었고 또 검사도 있었고 고위직에 있는 사람 있었는데 3,4천명 중에 그런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만큼 몇 사람이 안되고, 나머지는 전부다 대개는 노가다 하는 사람, 자영업 하는 사람, 그냥 예수 믿기 위해서 먹고 사는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거기 가치를 두지 않으니까. 이 세상에 가치 두지를 아니하니까. 이걸 수지계산을 따져가지고 잘 살펴봐야 됩니다. 세상복은 좋고 필요합니다. 돈이 없으면 안되는 거지요. 직장이 없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이거는 아무리 많이 가져보고 오래가지고 잘 가져도 결국 하나의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고, 흔적일 뿐입니다. 이거는 지나가는 겁니다. 우리가 영원히 가질 수도 없고 가질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있다가 없어질 것, 두고 갈 것, 떠나가야 될 이 세상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런 광대한 구원 세계를 예정하지 않았고, 목적하지 않았고, 이것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되어 와서 피 흘려 죽지를 않았습니다. 이거는 별 가치가 그렇게 없다고 말은 못하겠지만은 그래 가치가 크지를 아니합니다. 이거는 다만 영원한 천국을 위해서 준비하는 이용물밖에 되지를 않는다는 요걸 인식이 바꿔져야 됩니다. 그래서 이걸 가르켜 3번째 기본회개라 그럽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본토, 이 세상을 말합니다. 친척 아비집, 인간 피조물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바라보고 욕망할 것 많습니다. 알아주는 것 많습니다. 별에별 일이 다 있는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 하나님이 은혜로 기본믿음을 넣어주지 않은 사람들은 그게 전부니까 거기 도취되어서 살 수 밖에 없고, 우리들도 만약에 그랬다면 그래 살 수 밖에 없고 깨닫기 전에는 우리도 그리 살던 우리들입니다. 그게 전부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종자적인 기본 믿음을 받고나서 하나님을 알았고 천국의 구원을 알았고, 주님 대속을 알았고 무궁세계 부활의 세계를 깨달아서 알고나니까, 눈이 열려지고 나니까 그때부터는 사도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바울처럼 그래 매진해 달려가지는 못해도 우리 소망은 그리 있고, 그러기 때문에 늘 바울이 약할 때 말했던 것처럼 두 사이에 끼여 사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다, 부활의 세계를 바라보고 그리 향해서 매진해야 되는데, 내 속에는 악성과 악습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고 세상은 강하니까, 성령은 중생된 영을 통해서 나를 부활세계로 끌어당기는데 악령은 내 속에 있는 악성 악습을 붙들고, 세상을 다 붙들고 나를 세상으로 잡아 당겨서 둘 사이에 끼여서 죽을 지경이라, 곤고한 자라. 이 싸움이 성도의 싸움이고 여기서 믿음에 능력있는 사람은 그 세력, 세상과 악령 악성 악습의 세력을 뿌리치고 부활세계를 소망을 하고 그리 순간순간을 달려가는 이게 신앙생활이고 믿음의 세계다. 그러니까 기본회개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식을 바꾸는 겁니다. 사고방식을 아예 바꿔서 우리는, 나는 이 세상을 바라보고 살 사람이 아니다. 이 세상은 없어질 세상이고 불 탈 세상이고 썩어질 세상이고, 떠나서 두고 갈 세상이고 나는 떠날 사람이다. 천국에 영원한 천국, 부활 넘어 세계가 우리의 영주처고 그 나라를 향해 가는 것이 우리의 믿는 사람의 당연한 생활이다. 이 인식을 가지고 그다음 평생을 전투하면서 싸워가면서 노력해서 기본회개로 방향을 돌아선 그 상태에서 계속 달려가는 것이 그게 믿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이라. 이게 평생 회개라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부활의 날의 모든 소망을 두고, 가치를 두고, 모든 계산을 그날의 손익계산을 따져서 그때를 생각하며 오늘을 사는 이것이 기독자들의 신앙생활 이게 부활 소망의 생활이고 부활 소망의 도다 하는 걸 이걸 크게 첫 번째 생각해봤습니다.
그다음 두 번째는, 그러면 부활의 세계를 어떤 세계냐. 다시 말하면,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죽음 너머의 사후세계는 있다치고, 그러면 그 세계는 어떤 곳인가? 그 세계는 첫 번째, 영계와 물질계가 통일된 나라다, 하나다. 대단히 크지요. 굉장히 큽니다. 우주도 큰데, 영계는 무한히 더 큽니다. 첫 번째. 우주와 영계가 통일된 나라. 하나로 통일된 그 나라. 그 나라가 부활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경계가 없이 무한합니다. 넓고 광대합니다. 끝이 없습니다. 무한하고 그다음, 거기 있는 모든 존재나 모든 역사나 모든 것들은 다 흠과 점이 없는 완전입니다. 그런 것들만 가기 때문에 완전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영원무궁토록 이어지는 겁니다. 끝없이 계속되어지는 나라가 그 나라다. 무한하며 완전하며 영원히 계속되는 그 나라가 부활의 세계다 이걸 알고나면 이 세상을 함부로 살 수가 없는데, 이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세상에 붙들려서 그냥 함부로 살고 있기 때문에 귀신 들린 아이에 아비의 부르짖음이 자꾸 생각이 나는 겁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부활의 세계가 믿어져야 되고, 그 믿어지는 믿어짐이 오늘 현실생활에 나한테 와가지고 내 마음에 모든 욕망과 욕심과 몸의 습성을 다 꺽어 누르고 이길만큼 그 믿음이 강해야되는데, 뜨거운 불이 타는데 그 불 속에 원수가 나서 나를 불 속에 집어넣으려 그러면 발을 버투고 원수의 얼굴을 할퀴면서, 손을 물어 뜯으면서 발버둥을 치면서 죽을 힘을 다해서 불 속에 안 들어가려고 애를 쓰지 않겠습니까? 왜요? 불 속에 던져지면 타 죽으니까. 아니까. 부활의 세계가 믿어지면, 오늘 이 세상에 천천금은 억만금이 있어도 믿음을 져버릴 수가 없을 것인데, 그 사실이 믿는다하나 그 믿음의 정도 강도가 약해서, 현실 생활을 현상 세계를 넘어서지 못하니까 내가 믿나이다 그러나 믿음이 부족하니까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런 소원이 있습니까? 이런 부르짖음이 속에서 나오시는 겁니까? 기도를 안 할 수가 없겠지요.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세 번째 그 나라 세계는, 가장 고차원의 세계. 가장 고차원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 나라 이름이 무엇이라고요? 가장 고차원의 세계라서 그 나라 이름을 천국이다. 하늘나라다. 공중에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가장 높은 최고의 최귀의 최영의 가장 존귀한 영광스러운 그 나라, 무엇이 그렇게 영광스러운가. 존귀한가? 그 나라에 가는 사람들, 그 나라에 있는 모든 일들, 모든 관계들. 그 나라는 빛의 세계다. 빛이라 말은, 모든게 환하게 드러난다 말이죠. 빛의 반대는 암흙이고 어두움입니다. 어두움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어둡다. 옛날에, 요즘은 자영업이 너무 많아서 투명하게 되가지고 수입이 대개는 좀 적지요. 옛날에는 시장바닥에 나물 팔고서, 나물 파는 그 장사 가지고 자녀 대학 공부 다 시키고 생선 몇 마리 갖다놓고 파는데 그걸 가지고,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저게 장사가 되나 싶은데 월급쟁이보다, 죄송합니다 표현이, 월급 직장 다니는 사람보다 몇 배나 더 많이 벌었답니다.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데. 양전에서 생선 몇 마리 갖다놓고 파는 그거 보기에 저게 돈이 되나 싶고, 직장 다니며 넥타이 매고 가방들고 신사처럼 그래 다니니까, 직장 다니면 반듯한데, 시장바닥에 나물 팔고 생선 파는 거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그게 어두워서 가려져서 몰라서 그렇지 그게 직장 다니는 사람들 몇배를 더 벌었다 말이죠 옛날에는. 그런데 지금은 다 밝아져서 다 드러나고 나니까, 너무 많으니까 그게 별로 없다. 그래서 옛날에는 장사가, 저도 많이 들은 말로, 장사는 참 장사가 어둡다 그럽디다. 장사가 어둡다, 그말은 수입이 많은데 사람들이 모른다, 안 드러났다 그뜻입니다. 어둡다는 말은, 숨은 것이 많고 드러나지 않은 것이 많다 그말이지요. 어두운 것은 좋은게 아닙니다. 밝은게 좋겠지요. 빛으로 나와라. 나타나는 것마다 빛이다. 그래서 믿음생활 신앙생활 바로 하면 그 사람이 모든 면에 투명해집니다. 밝아지고 깨끗해지고 마음에 숨기는 것이 없고 밝고 맑고 깨끗하면 그 사람은 자신감이 생기고 얼굴이 밝아집니다. 하늘나라는 밝고 맑은 거룩한 길, 그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 나라는 천국은 빛의 나라, 숨김이 없습니다. 가리는 것이 없고 모든게 다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면서 그 나라는 공의의 나라입니다. 공의라 말은 공평이다, 치우침이 없다 그말입니다. 어느 한쪽이 치우침이 없다. 그러니까 환하게 드러나면서 공의가 있으니까 그곳에는 차별이 있어도 시비곡직이 없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하고 저는 저렇게 하고, 자기 행한대로 산 그게 고스란히 다 드러나니까 아무도 항변을 못하고 거기 대해서 말을 못하는 거지요. 아무도 침해 받을 수도 없고 침해할 수도 없는, 말이 없는 세계, 무언의 세계, 그런데 다 통하는 그런 세계. 그러면서 사랑의 세계, 자유의 세계, 진리의 세계. 그 나라가 부활의 세계인데 이런 세계는 이 세상에 없고, 그런데 이것이 이론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요 이치 논리를 가지고 실제 생활을 써보면 과연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나가면 천국이 건설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 나라는 또 다시 말하면 영광의 나라다. 우리 구원은 영광의 구원이다. 영광이란 것은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 영광입니다. 그래 될 수 밖에 없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가장 고차원의 세계다.
네 번째 부활의 세계는, 변동이 없는 불변의 세계라 그랬는데, 첫째 뭐가 변동이 없습니까? 그 나라 자체가 변동이 없고 두 번째는요? 순위가 변동이 없는 여기서 사람이 환장을 하는 겁니다. 순위변동이 없다. 그 나라는 정해진 순위가 변동이 없습니다. 먼저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될 자가 많다 이거는 이 세상에서 해당되는 말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다 이것도 이 세상에서 해당되는 말입니다. 천국에는 순위가 영원토록 뒤바껴지는 법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나라는 새로운 종자가 생겨나는 법이 없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뿌려진 종자가 영원토록 자라기만 하는데, 어떻게 뿌렸느냐에 따라서 그 자라는 차이가 점점 영원히 다 벌어지는 그게 그 나라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실이 우리에게 바로 믿어진다면 여기에 전부 다 받치지 않는 것이 비정상이고 깨달은 사도바울이 이걸 깨닫고 난 다음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부활의 권능을 위해서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여’ 그리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도바울의 신앙이었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겠지요. 우리가 그리 되지 못하는 것은 깨달음이 부족하고 믿음이 부족한 연고입니다.
크게 세 번째는, 부활의 세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만 차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도 이 차이는 많이 존재합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차이는 없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이건 상식입니다. 사람들이 다 덮어가리고 아전인수격으로 그리 해석을 해서 제 좋도록 해석을 하고 저한테 맞춰 그래 해석을 하고 끼워맞추니까 이래저래 말장난하는 것이지, 어느 곳이든지 이 세상에는 가정도 그렇고 어디든지 세상에는 차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 차이가 있는 것이 정상이고 당연한 겁니다. 그게 공의입니다. 세상 어디든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거는 필연입니다. 자연 계시입니다. 부활의 세계는 차이가 더 많습니다. 본문에 잠깐 보면, 35절부터 성경 보시겠습니다. 35절,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래 말합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두 가지를 물었지요. 그러니까 36절에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땅 속에 씨앗을 뿌리면 일단 죽는 겁니다 땅 속에서. 죽는데 거기서 살아나는 겁니다. 땅 속에 묻혀서 썩은 것 같은데 죽은 것 같은데 거기서 싹이 나고 살아난다 그말이지요.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그래서 죽어야 산다. 부활이란 것은 죽음 너머에 있는 것이고 죽으면 반드시 부활이 있다, 필연성입니다. 그다음 37절에,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소나무를 심을때 제일 처음에 소나무를 심는 것이 아니고 솔씨를 심습니다. 벼 이삭인 볏대, 볏짚단, 볏대 벼 이삭을 심는 것이 아니고 나락 알을 심는 겁니다. 콩대, 콩낫까리 콩 그 껍데기 콩깍지 그걸 심는 것이 아니고 콩알 그걸 심는 겁니다. 그런데 알을, 알갱이를 심었는데 이거 죽었다가 날때는 형체가 심은 알갱이하고 난 형체는 전혀 다른게 나지 않습니까? 전혀 다르지요. 심을때는 그게 씨앗을 심었는데 날때는 그게 채소가 되고 나무가 된다 그말입니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그 종자마다 형체를 주시느니라. 그러면 여기서 첫째, 부활은 있다. 죽어야 산다. 사람이 죽으면 부활은 필연이다. 마치 알갱이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두 번째, 이 세상에서 사는 것하고 부활후의 모습은 전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심을때는 알갱이를 심었는데, 이 세상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살았던지 부활 넘어 세계에서는 이 세상 사는 모습하고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두 번째입니다. 그다음 세 번째, 그리고 부활후에 나타난 그 형체, 육체, 그 형체는 이 세상과 차이가 무한하게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네가지를 육체를 두고 말했는데, 육체는 육체라는 이름은 같고, 고깃덩어리라는 이름은 같은데 다 같으냐? 사람의 육체하고 짐승의 육체하고 또 하나는 뭡니까? 공중의 새 육체하고, 하나는요? 물고기 육체하고, 네가지 예를 들었는데, 사람의 육체하고 소하고 값이 같으며 가치가 같으며 비중이 같으며 상대가 같은가? 사람하고 소가 꼭 같은 고깃덩어리인데 사람과 소가 같으냐? 사람과 짐승이 같으냐? 다르지 않느냐. 사람하고 공중의 새가 같으냐? 다르지 않느냐. 사람보다 짐승은 더 못할 것이고 짐승보다 새는 더 못할 것이고 새보다 물고기는 더 불완전하고 더 못할 것이고. 꼭 같은 육체인데 이렇게 차이가 나듯이, 부활의 육체는 같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지만은 부활후 육체는 차이가 굉장히 나는데 그 정도가 어느 정도냐? 형체랑 이름은 같아서 하늘에 해도 있고 달도 있고 별도 있는데, 그것들의 영광과 가치가 다 다르고, 별끼리도 영광이 다 다르지 아니하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아서 차이가 그만큼 많이 난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그래서 깨달은 사람들은 썩을 것을 가지고 어떻게 한다고요? 이 부활의 차이를 아는 사람들은 썩을 것을 심어서 썩지 아니할 것으로 살고, 욕된 것을 심어서 영광스러운 것으로 거두고, 육의 몸을 심어서 신령한 몸으로 거두고, 약한 것을 심어서 강한 것으로 거두는 이것이 부활의 세계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전부다 썩을 것, 또 욕된 것, 약한 것, 육의 것인데 이걸 심으면 전부 썩지 아니할 것, 신령한 것, 영광스러운 것, 강한 것으로 부활의 세계에서 다시 살아나니까 이걸 깨달은 사람들은 여기 심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차이를 알고나니까. 그러면 이 부활의 차이가 있고, 부활의 이 소망을 바라보는 우리 표준은 어디가 표준이냐? 우리 표준은, 그다음 45절부터 보면은 첫사람 아담이 나오고 둘째 아담이 나오고, 땅에 속한, 흙에 속한 자가 나오고 하늘에 속한 자가 나오니까 우리의 표준은, 우리가 첫 사람 아담의 형상을 입은 것처럼, 둘째 아담 하늘에 속한 자 예수님의 형상 입고 우리의 부활 세계 표준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 우리 표준이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을 정리해보면 우리가 다섯가지를 여기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부활은 필연적으로 있다. 두 번째, 이 세상과 부활세계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람을 평가할 때 눈에 보이는 것 보고 평가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현재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전부가 아니고 그 사람 마음을 봐야 되겠고 인격을 봐야 되겠고 신앙을 봐야 됩니다. 보이지 않는 내면을 보는 사람이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그다음 세 번째, 형체와 형체는 차이가 심히 많다. 네 번째, 그러기 때문에 이 차이를 아는 사람들은 부활을 소망하고 심는 생활을 하고, 다섯 번째, 우리 부활의 소망은 표준은 주님처럼 되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는 이것이 우리 표준이다 요래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러면 부활 세계 차이는 어떤 차이냐? 부활 세계 차이는 무한한 차이인데, 그 나라 차이는 무한의 차이인데 무슨 차이냐? 권능의 차이다. 부활의 권능, 권능의 차이인데 그 권능은 무슨 권능이냐? 두가지로 말할 수 있으니, 하나는 하나님을 중심하는 그 차이다. 하나님을 얼마만큼 알았느냐. 얼마만큼 그분을 자기 모든 생활에 중심으로 주격으로 모시고 살았느냐, 그분과 함께 살았느냐 그 차이고, 또 하나는 얼마만큼 형제 구원을 위해서 애를 썼느냐 그 차이고 이것이 부활의 권능의 차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부활의 권능의 성격은 영광이고 그 속에는 부활의 권능을 마련하는데는 필연적으로 십자가라는 자기 희생이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 제가 질문 한 번 드려보겠습니다. 그냥 설교로 강연으로 저만 할 것이 아니고, 부활 세계 차이를 네가지 말씀드렸는데, 첫째는 무한한 차이입니다. 두 번째는 그 차이는 권능, 권세와 능력 권능의 차이입니다. 여기 따라서 가치와 대우 영광이 다 달라집니다. 세 번째 이 권능은 두가지, 하나님 중심과 형제 구원이 권능이다. 맞습니까? 성경 본문에 명문되어 있지 않는데 이걸 해석해보면 하나님 중심, 하나님을 모시고. 부활의 세계는. 그래서 천국은 표현하자면, 사람들이 하도 독재를 싫어하니까 그런데 하늘나라는 독재국가인데 그 독재가 완전한 독재라서 자유의 모든 존재에 자유의지에 의한 독재, 참 모순인 것 같은데. 그런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은 하나님 한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인간들이 자기 중심으로 타락한 자기 중심의 독재자들이 이걸 가려가지고 전부다 천국을 가리고 있는데 하나님은 완전자입니다. 사랑이시고. 사랑이기 때문에 당신 전부를 다 받쳤고 이런 분이 당신한테 맞춰야 되는 그게 천국인데, 그러기 때문에 그분이 주인으로 왕으로 통치자로 영원한 생명과 행복에 근원으로 계시는 그 나라기 때문에 그분에게 모든 걸 다 맞춰야만이 그 나라에는 가치가 있고 쓸모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중심이라 말은 세상에서 얼마만큼 하나님을 알았느냐, 그분을 깨달았느냐, 모시고 살았느냐, 그 분 중심위주로 살았느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인데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가지고 자기 아는대로는 모든 말이나 일처리나 모든 손익계산이나 수지 타산이나 비판 평가 전부다를 전부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에게 맞춰가지고 모든 생활을 하는 겁니다. 그게 그 나라의 가치고 권능이고 하나는 내가 그래 사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그리 끌어오기 위해서 노력하는 건데, 이 세계는 돈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강제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중심으로 바로 살면서 내가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가 낮아져야 되고 희생되야 되고 죽어져야 되는 십자가적인 희생이 들어가야 형제구원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래가지고 형제구원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놓고 얼마만큼 바른 중심 가지고 힘을 썼느냐가 그 나라의 권능이고 그 나라의 가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나라 권능, 부활의 권능의 성격은 영광이다. 아무런 대가없이.
세상도 이타주의를 말합니다. 이타주의를 말하는데, 세상이 말하는 이타는 논리적으로 성립이 될 수가 없다. 모순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리 말하지요.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을 했으면 말 그대로 순수하게 아무것도 바라지 아니하고 아무것도 안 먹고 그냥 자기 전부를 다 받쳐서 남을 위해서 자기 전부를 다 받쳐야 되는데 석가모니라는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고 부하로 들어가서 남을 위해서 희생했다. 얼마나 희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 사람한테 눈깔 사탕 얻어먹은 것도 없고 도움 받은 것도 없으니까. 모르겠는데 그 사람도 결국 그 자기에 그 교리나 생애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에게 얻어먹은게 많으니까 그것도 들어가보면 이기주의가 되겠지요. 세상에 모든 이타주의는 전부, 그래서 이기주의적인 이타주의가 되야 성립이 된다. 복잡하지만은 그래 말하는데, 기독교도 이기주의 같으나 이타주의고, 이타주의 같으나 그게 이기주의인데 그 이기주의가 바로 자기 위한 이기가 아니고 남을 위한 이기주의가 되는 이것이 신비한, 오묘한 기독교의 그 속에 들어있는 그런 영광의 세계라는 겁니다. 완전자 중심이라하는 거기서부터 이게, 그래서 하나님을 바로 아는 거기서 이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라서 그래서 부활 권능의 성격은 영광의 성격이다. 자기 가진 것을 상대방 위해서 다 내어놓으니까 영광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좀 생각해보시고.
크게 네 번째, 그러기 때문에 우리 생활은 부활 소망을 준비하는 생활인데 두가지로 준비하면 되겠습니다. 하나는, 첫째는 부활의 날을 기억하고 소망할 것. 두 번째는 우리 모든 생활을 전부 그날에 맞출 것. 모든 계산도 또 모든 소망도 욕망도 노력도 전부 부활 세계 그날에 맞춰가지고 모든 생활하는 이것이 부활의 날을 준비하는 이런 준비 생활이 되어지겠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베드로후서 3장에 말씀하신 것처럼, 부활의 날을 바라보면서 그날에 가치있을 것을 오늘에 마련하고 그날에 쓸모없을 것은 오늘에 다 정리해서 버리고, 그날에 귀할 것을 오늘에 마련하고 그날에 영광스러울 것을 오늘에 마련하는 이것이 부활 소망의 준비 생활, 이런 생활이 되겠다 하는 겁니다.
크게 정리하면 네가지입니다. 첫째, 기독교는 부활 소망의 도다. 두 번째, 부활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기억을 하십시다. 부활의 세계. 세 번째, 부활 세계 차이는 어떠한가. 네 번째, 부활 준비는 어떻게 할 것인가. 네가지로 기억을 하고, 문제는 이 모든 사실을 알아도 지식으로 논리로 알아도 이것이 내 속에 믿어져야 되는데, 믿어지지 않으니까 지식 따로 생활 따로 되어지는 겁니다. 내 말과 행동이 따로 되어지고 생활과 지식이 따로 되니까 죽을 지경입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믿음을 구하고 부활의 소망을 두고 그 날을 바라보며 오늘을 사는 우리가 되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믿는 사람이 복이 있다. 성경입니다. 안 믿었는데 120년후 홍수가 나서 닥치고 보니까 사실이었습니다. 그때는 믿어봐야 소용이 없었습니다. 기독교는 예고의 도고, 예비의 도입니다. 미리 알려주시고 미리 준비하게 하시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오늘에 믿음 달라고 기도하고 믿음을 가지고 부활을 소망하고 준비하는 그런 우리 생활이 되도록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