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9-주후(빌3:4-12)
작성중2014-03-10조회 479추천 32
(설교원문)
20140309 주후
빌립보서 3:4-12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마지막에 복음 역사를 다 끝내고 감옥에 갇혀서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을 앞둔 그 시점에서 한 말씀이 있습니다. 관제란 것은 제사에 붓는 술인데, 관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흥이 되고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달리고 길을 다 마쳤기 때문에 이제 세상에 할 일은 다 끝냈고 이제 남은 것은 주님 앞에 가서 의의 면류관, 그것만 바랄 뿐인데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니고 주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주실 그 면류관만 기다릴 뿐이라고 거기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에는 아직까지 12절에 보니까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현재진행하고 있다 그말입니다. 아직까지 달려갈 길을 달려가고 있는 중이라 그런 말씀입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아는대로 믿음의 도라 그럽니다. 믿음의 도. 믿음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아는 것이 전제고, 아는 그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을 하고 알고 인정하면은 필연적으로 그대로 자기 생활과 행동이 따라가게 되는 것이 믿음이고, 그래서 믿음은 지식과 인정과 행함이 하나가 되는 이것이 참된 믿음인데, 기독교의 믿음은 성경을 믿는 믿음입니다. 성경을 읽어서 알고, 성경이 소개하고 가르쳐주는 모든 내용을 알아서 그 사실을 그대로 인정을 하고 그다음 거기 그대로 모든 존재를 상대하고, 두려워할 것은 두려워하고 또 따라갈 것은 따라가고, 중하게 여길 것은 중하게 여기고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또 자기 모든 생활을 성경이 말씀하신 그대로 생활을 맞춰나가고 자기 모든 개인 언행심사를 그리 맞추고 대외 모든 존재와의 관계를 성경이 말씀하신 그 말씀에 따라서 살아나가는 것이 기독자들의 믿음생활에 가장 기본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믿어지는 믿음, 성경이 읽어지고 성경속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자기에게 인정이 되어지고,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지는 이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야 되지 인간에 소원과 노력, 인간의 힘으로 되어지지를 아니합니다. 이걸 가리켜서 기본구원이라 그리 말합니다. 주님 대속을 입은 것도 기본구원이고, 그 대속의 효력을 입고 사는 것은 건설구원입니다. 이거는 인간의 노력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물론 그 속에 궁극에 들어가면 인간의 노력까지도 인간의 자유의지까지도 전부 하나님의 역사지만은, 인간 우리들의 범위에서 인간의 노력이 있어야 되는 것이 건설구원이고 주님 대속의 효력을 입는 것도 그러하고, 기본적으로 받은 그 믿음을 우리가 길러서 성장시켜 나가는 것도 우리들의 몫입니다.
하나님이 주님 십자가 대속의 공로를 근거하여 성령과 진리로 우리를 중생시키시고 때가 되면 우리를 불러서 믿는 사람이 되게 하시는, 그래서 중생 시켜서 예수 믿게 만드는 거기까지는 하나님의 은혜라야 되는 것이고, 그다음 중생이 돼서 예수를 믿는 믿음 생활을 시작을 하게되면 그때부터는 우리들의 몫으로, 우리의 노력에 따라서 이미 받은 기본적인 그, 종자적인 그 믿음을 얼마만큼 길러가느냐 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길러가는 것은 우리 몫이다 그말입니다. 우리들이 노력해서 길러가야 될 우리들의 몫입니다. 그러면 그 길러가는 그 믿음이 건설구원이고, 그 건설구원 믿음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 각각 차이가 나고 달라지게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믿음이란 것은 하나님께 받은 기본적인 믿음은 사도바울의 믿음이나 오늘 우리 믿음이나 이제 믿는 사람들의 믿음이나 그 차이가 없이 꼭 같습니다. 우리도 사도바울만큼 자랄 수 있는 그런 종자적인 믿음은 우리도 다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가서 핑계 대지를 못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쓰시는 그 분량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눈으로 쓰시고 어떤 사람은 입으로 쓰시고, 어떤 사람은 새끼 발가락으로 쓰시고 어떤 사람은 머리카락 하나 정도로 쓰시고, 우리가 다 주님의 몸에 지체니까 쓰임 받는 그 중요성-사람들 보기에 정도는 각각 다를지라도, 그러나 어느 한 지체도 주님 몸된 교회, 주님의 몸 구원에 붙어있는 그 몸이 자기역할을 다 할 때 온전한 몸이 되어지는 것인데 그 온전한 몸이 되어서 자기 역할을 다 하는 자기를 만드는 것이 우리 몫이라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적게 받았으니까 나는 사도바울처럼 그만한 선천 후천에 타고난 그런 조건이 없으니까 나는 못한다고 포기하는 것이 바로 한달란트 받은 자의 불충이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결과를 맺은 그와 같이 되는 겁니다. 자기에게 주신 분량만 다하면 나사로처럼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는 그런 믿음이 되어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할 일은 하나님이 내 영을 중생시켜서 내가 성경을 읽게 됐고, 모태 신앙이든지 아니면 어릴때 선생님 통해서 주일학교때부터 믿었던지, 청년때 믿었던지 무슨 집안에 사고 생겨서 믿게 되었든지 어찌 되었든, 어떤 동기, 계기에 의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던지 믿었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고, 그때부터 우리들이 할 일은 그 상황에서 힘을 써서 우리 믿음을 길러나가는 것이 우리 할 일입니다.
사도바울 역시, 어릴때부터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의 나라에서 태어났으니까 모태신앙이었고, 그리 되어졌으나 그러나 사도바울의 건설구원은 언제부터냐? 사도바울의 건설구원은 스데반이 죽는 모습을 본 그때, 의문을 품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님 만난 그때부터 비로소 사도바울의 건설구원은 시작이 되어졌다 그래 볼 수 있고, 그전까지 사도바울의 열심, 충성,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건 전부다 그거는 껍데기였지 건설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라, 다만 율법을 지키는 그런 익숙한 것이 있기 때문에, 이게 조금 오해가 될 수 있는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불교 믿는 사람이 불교에서 열심히 도를 닦고 참선을 하고 자기 수양, 자기 절제를 하고 전심으로 불교를 믿던 그 사람이 개종을 해서 기독교로 딱 돌아서면, 진정 기독교로 돌아서면 그 사람은 돌아서는 그 다음 주일 바로 집사 임명을 해도 괜찮을 수 있다 그럽니다. 왜 그런가? 불교에 그렇게 정진한 사람이 기독교로 개종을 해서 그리됐다는 말은 이거는 하나님의 역사고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 속에 믿음이란 것은 그냥 어영부영 믿는 둥 마는 둥 믿는 그런 믿음하고는 차원이 다른 겁니다. 그런 사람은 몰라서 방향을 잘못 틀어 그리 갔지 방향만 돌아지고 나면 그때부터는 불교에 총력을 기울여 믿듯이 그다음부터는 기독교 신앙으로 주님을 자기 전부를 다해서 섬기는 그런 사람이 되어진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세상적인 조건이 많았습니다. 오전에 몇가지 였습니까, 세상적인 조건이? 일곱가지였습니다. 그 일곱가지는 이거는 어찌보면은 신앙입니다 전부다. 팔일만에 할례를 받았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 거슬리는 모든 걸 다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그 표시가 나자마자 팔일만에 할례 받는 그겁니다. 구약시대때. 오늘날 말하면 세례인데. 그 표시를 받았고. 두 번째는 이스라엘 족속이다. 하나님의 구원 받은 선민입니다. 택함 받은 선민. 천하에 많은 민족이 있고 족속이 많고 나라가 많은데 그 당시 택함 받은 족속, 그때나 지금이나 인구는 상당히 많습니다. 많을 때입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민족은 이스라엘 유대민족 한 민족 밖에 없습니다. 그 자부심이란 것은 말로 못하지요. 1등이 영광스럽고 귀한 것은 1등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뭐든지 귀하면 값이 올라가는 겁니다. 금이라도 많으면 값은 떨어지는 겁니다. 선택받은 민족이 많다면 자부심 가질게 별로 없겠는데, 온 천하 세계에 많은 족속이 있는 중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민족은 이스라엘 족속밖에 없습니다. 그 이스라엘 족속이 바로 바울이 그 족속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족속이다. 하나님의 선민이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사랑을, 애호를 많이 받았던 베냐민의 지파다. 똑똑하고 실력있는 베냐민 지파다. 그 베냐민 지파 중에서도 바울은 똑똑한 사람이니까 천하에 얼마나 똑똑한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다. 문화가 최고로 아주 발달된 그런 히브리인, 그중에서도 참 토종으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다. 말하자면 꽃 중에 꽃이다, 왕 중에 왕이다 하는 것처럼,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흠이 없이 지켰다 그말이지요. 천주교는 원래 계통이, 천주교를 거슬러 올라가면 누가 나옵니까? 천주교를 거슬러 올라가면 위에 누가 나옵니까? 바울이 나오는 겁니다. 바울이 나오고 바울을 거슬러 올라가면 바리새인이 나오는 겁니다. 바울이 천주교를 만들었다 말이 아니고 타락한 천주교가 말하자면 그게 타락을 해서 문제가 된 것이지 내려오기는 바울로부터 내려오는 겁니다. 중간에 타락해서 변질되서 문제가 됐지. 천주교 빼놓은 루터 칼빈이 있습니까? 오늘날 정통 기독교에 천주교 빼고 나면 중간에 천년이 비는 겁니다. 내려올 수가 없는 거지요. 정통이라 뜻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정통이란 것은, 정통성이란 것은 세상을 아는 사람들은 굉장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야곱이 장자명분을 목숨을 걸만큼 기를 쓰고, 형의 장자 명분을 뺏으려고 했던것이 그게 정통성 때문에 그런겁니다. 장자를 통해서 내려가는 거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그리 아닌데도 사람 보기엔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서도 그런거 우리나라 왕조 조선시대나 왕조 역사에 역성혁명 이런, 조선시대는 없었지요. 그런 혁명이 그 지방 안에서 혁명이 일어났는데 정통성을 부여받지 못한 그런 왕들은, 계통을 바로 이어 받지 못한 말하자면은 소위 아주 안 좋은 말로 곁가지가 본둥지에서 왕이 된 그런 경우는 자기 스스로 자기 속에 캥기는 그런 것이 있기 때문에 공연히 트집을 잡고 그걸 세우기 위해서 아주 무리를 쓰는 그런 수가 많이 있게 되는 겁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다. 바리새인이 정통 교파였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 속한 사람이 없고, 그리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해서, 그러면 사울이 교회를 핍박한 것은 그때 사울의 깨달음으로써 사울은 바리새파에 속해있었고 그당시 유대인의 전부, 정권이나, 종교국가입니다. 중교 국가니까 로마 식민지에 속해있지만은 일종에 자치국처럼 그리 되어 있었을건데 그 나라를 전부 지도하고 지배하는 권력자, 정권자들은 전부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그들입니다. 그게 바리새 교파들이고 거기 사울은 젊은 나이인데 소속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줄기에 들어있고 그 파에 속해있고 거기 들어서 그것을 배우고 듣고 그길을 따라가니까 그들의 주장은 하나님의 모세 율법 지키는 이것이 정통이고 이대로 지켜야 되는데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그 정통성 있는 바리새인을 모조리 부정하다시피 외식이라고 다 꾸짖고 정죄하고 마구 난도질하고 다 틀렸다고 하니까, 그들에게 누명쓰고 정죄받아서 예수님은 나사렛 이단이라, 그 당시 이단이면 무조건 죽이는 겁니다. 천주교가 천년 동안 수십만명을 죽인 것은, 그 뒤에 타락한 다음에, 수십만명 죽인 그 죄목은 전부다 이단입니다. 이단으로 정죄해가지고 다 모조리 다 죽인 겁니다. 그때 한창 천주교가 종교개혁 일어날 그 시점, 그때 사람들 죽여나갈때는 전부 이단, 악마, 마녀, 마녀사냥이란 말 있지요. 그래가지고 마녀라 그리 누명 씌워가지고 모조리 죽이는 것이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모릅니다. 이단이라고 정죄되면 무조건 죽이는 겁니다. 이때도 그럤는데,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는 나사렛 이단의 괴수고, 그 따르는 사람은 그 무리들이니까 다 모조리 죽여 없애 버려야 된다고 그리 그들이 말하자면 하나의 정책적으로 그리 정해놓고 유대나라 국가적으로 처리를 해버리니까 다 죽이는 그러 상황에 그 파에 속했고, 그 줄기에 속해있는, 그 흐름속에 들어있는 사울이 역시 똑같이 그들처럼 그리 사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예수는 죽어 마땅하고 예수 믿는 사람은 죽여야 이것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것이고 하나님의 도를 바로 세우는 것이고 이게 옳은 것이라고 그렇게 세뇌가 된 상태고 그리 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믿는 사람은 어쨌든 죽이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이런 사람이 사울이였습니다.
이 사울이 어찌보면은 신앙으로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 율법을 말하고 의를 말하고 이러니까 신앙 있는 것 같지만은 내면을 들여다보면은 그 줄기 전체가, 그 당시 그 모든 위에 머리부터 밑에까지 모든 사람이 전부 하나님은 이용해먹고 외식하고 자기들 교권, 세상 권력, 부귀 영화 이런 것 마련하는데 급급하고 그것 유지하는데 급급했지 참 생명있는 신앙은 없는 상황이었는데 사울은 그 속에 중심은 그러지 않았는데, 하나님을 진정 바로 섬기고 싶은 그런 중심으로 섬겨 나갔는데 배우기를 그리 배웠고 자기 노선을 그줄에 서있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참된 교회가 되는 예수 구주가 되는 예수를 죽이는 그길에 서있었다 그말이지요. 그런데 그 중심에 발랐고 깨끗했기 때문에, 또 하나님께 영원전 뽑아낸 그릇이기 때문에 사울을 돌이킨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이런 세상적으로 좋은 탁월한 조건을 가졌던 사울이 그 모든 선천적인 조건, 타고난 민족적으로 지파적으로, 집안적으로 또 자기 개인적으로, 자기 마음과 몸에 지혜나 지식이나, 능력이나 성품이나, 또 활동성이나 실력이나 이런 모든 면으로 이런 탁월한 모든 것을 가졌던 이 사울이기 때문에 그런 모든 걸 가진 그 사울이 가진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서있는 노선줄이 그쪽으로 서있고, 그리 배워놓으니까 달려가는게 전부 그길을 달려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성경전체를 두고 보니까 그가 달려가는 길은 천국이 아니고 세상이었고,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를 세워나가는 그런 길이었다 그말입니다.
이런 상황에 그래서 자기딴에는 천국 향해서 간다고 가고, 하나님 향해서 간다고 갔는데 실제는 그는 세상을 마련하고 있었고 또 자기를 세우고 있었고, 그래서 자기와 자기 세상 건설하는 거기에 필요한 것은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사람까지 죽이는 이런 일을 거침없이 하는데, 자기 그 탁월한 지능의 실력에 전부 다 기울여서 힘껏 달려가고 있는 그 걸음을 가는데, 그 가는 중에 하나 때가 되니까 부딪힌 것이 뭐가 부딪혔다고요? 스데반을 죽인게 딱 걸린겁니다. 스데반을 스스럼없이 다른 무리들과 함께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돌로 쳐서 죽였는데, 돌에 맞아 죽어가던 그 스데반이 마지막에 스데반이 전하는 예수의 복음도 듣고, 죽어가면서 전한 그 복음도 듣고 또 죽어가면서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 모습을 보고, 하늘을 우러러 하늘문이 열리고 주 예수께서 서신 것을 본다는 그런 말을 들을때 그때까지 사울이 자기 속한 그 세계, 그 노선, 자기활동하는 그 활동, 자기가 그때까지 하나님 섬기는 그 신앙에서 한번도 보지 못했던, 전혀 다른 세계의 것을 그때 봤다 그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열어주셨고, 때가 되니까 열어주시니까 보였고, 전혀 다른 것을 본 겁니다. 자기는 지금 하나님의 도를 세우고 하기 위해서 사람을 때리고 감옥 가두고 죽이고 있는데, 죽어가면서 자기를 죽이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런, 인간을 참 사랑하는 저게 도무지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인가, 있을수가 있는 일인가 전혀 다른 세계를 보게 되어진 겁니다.
그래서 그때 충격 받고, 정신이, 깊은, 몸은 움직이지만은 머릿속에 의문에 의문을 꼬리 물고 또 스데반이 외친 그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듣고, 구구절절이 틀린 말이 없거든요? 자기 아는 성경으로 다 들어볼대. 사울은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입니다. 율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니까. 실력있는 사람, 공부 많이 한 사람이니까. 스데반이 죽으면서 예수님 오시기까지 십자가 못박혀 죽기까지 모든 과정을 나열해서 설명하는데 그걸 다 사울이 들어볼때 틀림이 없는 말이고 그리고 죽어가면서 그리하는 모습을 볼때 그 모든 말들과 스데반의 겉모습 이런 것들이 사울의 마음 속에, 머릿속에 맴돌면서 많은 걸 생각을 하게 되고 연결시켜보게 되고 그러니까 그때까지 자기가 달려오던 그 걸음에 완전히 일대 대혼선이 일어나게 된겁니다. 의문을 품었고 혼선을 품었고 정신을 못차리고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게 된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리되니까 깊은 속에 들어가니까 마음은 그만큼 밝아졌겠지요, 심령은. 그리 된 상황에서 다메섹 가다가, 다메섹 가는 몸은, 지금 가는 목적은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려고 가고 있는데 마음 속에는 의문을 품고 가고 있고, 그리된 상태에서 주님이 나타나셔서 사울을 부르시니까 결정적으로 망설임 없이 그만 돌이키게 된 겁니다. 돌아서고 난 다음에는 자기 눈으로 스데반을 봤고, 주님 나타나신 음성을 들었고 빛을 봤고, 눈이 멀었고 아나니아가 와서 눈을 띄웠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눈을 띄웠고, 이런 걸 확실히 보고 난 다음, 그리고난다음에는 망설이지 아니하고, 성경기록상으로는 그러고나서 바로 예루살렘으로 간것처럼 보이는데,갈라디아서에 보면은 그러고난다음에 아라비아에 가서 3년을 거기서 기도하며 회개했다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3년동안 하나님 앞에 그동안에 자기가 했던 그런 모든 잘못된 길을 회개하고 기도하고 3년을 그리하고 난 다음에 그의 남은 평생은 전부다 오직 하나,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 전부를 다 받친, 변화되기 전까지 세상을 향해 달려갔던 그 걸음이, 변화되고 나니까 이제는 정반대로 그리스도를 향해서 전심전력 달려간 그런 사람이 되어진 겁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좀 극단적인 예지만은, 불교를 전심전력 믿던 그 사람은 불교에 인간에 참 구원의 도가 있는줄 알고 그리 믿어나가다가 그게 허무함을 어느순간 깨닫고 ‘이게 아니다’ 하고 돌아서서 개종해서 기독교의 참 도를 발견하고 나면은 불교에서 전심전력했던 그만큼 기독교는 더 하게 되어있고, 거기서 실력있는만큼 여기는 실력있게 일을 하게 되어지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으로 힘있게 나가던 그 사람이 깨달음을 가지고 하나님 은혜를 받아서 세상에 의문 품고 이게 아니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서고 나면은 그만큼 신앙으로 힘있게 돌아서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일반입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믿는 사람중에 참 대단히 많습니다. 모두 많이 그래가지고 신앙으로 돌아서서 다 그리 매진하는 겁니다. 백목사님 같은 경우도, 25살까지 젊은 나이에 머리가 좋으니까 온갖 세상경험 다해보고 돈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벌어보고, 온갖 재미향락 다 누려보고 그 속에 늘 그래도 허무함을 가지고 있다가 복음을 듣고 난 다음에 하나님 은혜로 깨닫고 난 다음에는 평생 55년 동안을 그냥 이 길 향해서 전부다 바쳐서 달려간 겁니다. 오늘도 복음의 일꾼들은 다 정도 차이는 있어도, 사람이 주신 분량이 다르니까 가다 넘어지기도 하고 또 쉬기도 하고 시험도 들고 하지만은 그래도 깨닫고 나면은 모두 자기에게 주신 분량대로는 전심전력 다 기울여서 달려가는 그 걸음은 내면에 들어가보면은 그리스도를 향한 이 걸음이다 그리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변화된 것, 본문에 나타내보면은 아라비아에서 3년을 기도하며 회개하고 그리고 난다음에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때부터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고 그때까지 자기가 유익하던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기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 그러니까 그 이후부터 사도바울의 주어진 모든 세상, 그의 선천, 후천에 가졌던 세상에 모든 좋은 그런 가지고 있는 자기 조건이라 말은 실력이라 말이고 자기 세상 배경이라 말이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자기 활동 무대고 터가 되는 것이고 자본인데, 그 모든 자본들을 없는 사람보다 많이 있으면 그만큼 일을 많이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모든 자본들을 그때부터는 배설물로 여겨서 뭘로 가졌느냐? 마태복음 13장에 보니까,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그 보화를 발견하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밭을 샀습니다. 보화만 살 수 없으니까, 밭을 사면은 그 밭 속에 보화가 들어있으니까. 그 사람이 밭을 산 것은 밭이 목적이 아니고 보화가 목적입니다. 그 밭이 뭐냐? 그 밭이 바로 자기 가진 세상 모든 자본입니다. 자기 세상. 사도바울이 가진 모든, 사울이 가졌던 모든 세상 온갖 본문에 일곱가진데, 이것뿐이 아니고 더 많겠죠. 이 많은 것. 그 모든 것을 사울이 바울이 되고 난 다음,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난 다음에는 그 모든 것은 마치 그 속에 있는 보화를 캐내기 위한 밭으로 사용한 것이고 말하자면은 기름을 짜내기 위해서 기름 짜내는 그 나머지는 깻목으로 다 버려버리듯이, 보화를 캐내고 나면 다른 것은 필요가 없듯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자기 수입하는 거기만 이용하고 나머지는 전부다 재물도, 명예도, 권세도, 세상 온갖 배경도 모든 것도 다 헛된 것이라는 것을 비로소 안 누려봐도 거기 어느정도, 바울은 보면은 그럴 수 있는 그런 자질과 실력을 다 가졌는데 그대로 나가면 바울의 출세길은 말하자면은 대제사장이 되어서 유대나라에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가 될 지 모르겠지요. 타락한 교회의 통치자 그리 됐을지 모르겠지요. 그렇지만은 그렇게 가기전에 그 끝을 보고 깨닫고, 솔로몬은 다 누려보고 깨달았는데, 그래서 허비가 많았는데, 사울은 가다가 하나님 은혜로 중간에서 보고 깨닫고 돌아서서 그리스도 수입으로 완전히 돌아서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여기에, 왜? 그것이 가장 고상하니까. 깨닫고나서 보니까 세상에서 그리스도 예수보다, 그리스도보다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없고 더 가치있는 것이 없고 더 영원하고 완전하고 영광스럽고 흠과 점이 없는 그것이 없더라 그말이지요. 알고나서 보니까. 그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그가 되기 위해서, 또 그리스도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에 참예하기 위해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힘을 다해서 달려갔다 이게 사울이 바울되고 난, 변화된 그 소망이었고 소원이었고 노력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전체가 다 한말로 말하면 그리스도인데 그리스도가 무엇인가? 그리스도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기름부음 받은 것이고, 이것 좀, 그리스도 깊이 좀 새벽에는 좀 공부를 해봐야 되겠는데. 기름 부음 받은 것은 몇가지 직책입니까? 그리스도는 다 아시는대로 제사장, 선지, 왕직입니다. 그러면 이 제사장, 선지, 왕직이 무엇인가? 이걸 한말로 말하면 사랑인데, 이 직책에 동기와 작용과, 이게 전부다 사랑의 동기고 사랑의 작용, 사랑의 역사인데 제사장이란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사이를 결합시켜 주는 거지요. 범죄함으로 하나님께 버림 받았고 하나님께 버림 받았으니까 생명도 없고 행복도 없고 평강도 없고 기쁨도 없고 저주밖에 없는, 하나님께 버림 받고 하나님께 저주 받는, 하나님의 축복은 아무것도 없는 그런 상태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쳐서, 제물을 바쳐, 양을 제물로 드리는데 양을 제물로 잡아 드리는데 그 양은 바로 구주 예수고 그분이 그리스도인데 그 양, 예수님 당신을 제물로 받쳐서 하나님 백성을 하나님께로 붙여 연결시켜서 살려주신 건데, 화목시켜 주신 것인데 그 제물이 바로 왕인데 구약시대때 그 제물을 받쳐드리고 집두하는 그 주관자가 바로 제사장입니다. 그러면 그 제사장은 짐승을 잡아서 드리는 것이지만은 예표로 어린양되신 주님을 표시하는 짐승을 잡아서 드리는 것이지만은 실제로 말하면 그 제사장 자기가 자신을 잡아드리는 것 하고 같은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사장은 바로, 오늘날 제사장이라 그러면 주님이 당신을 받쳐 드림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시켜 연결맺어주신 이걸 터로 삼아서 우리들이 주님 피, 대속의 공로 그걸 힘입어서 그걸 근거해가지고 터를 삼아서 하나님의 백성들하고 하나님 사이를 내가 먼저 하나님과 연결되어가지고 하나님 백성 하나님 사이를 붙여주는, 하나님께로 끌여붙여서 화목시켜주고, 그래서 하나님과 연결시켜서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런 관계로 만들어주는 이것이 제사장의 역할이고 이것을 위해서 자기를 여러 형태로 받쳐서 드리는 겁니다. 자기가 땀 흘려 번 제물을 받쳐 드릴 수도 있고 자기 재주 기능을, 사람을 하나님께로 끌어붙이기 위해서 그 사람에게 공부를 가르쳐줄 수도 있고 기술 가르쳐줄 수도 있고, 그 집에가서 봉사 해줄 수도 있고 위문해줄수도 있고, 위로 해줄수도 있고 여러 가지 방법을 가지고 내게, 내 주변에 있는 나와 관련된 내게 주어진 그 범위에 있는 여러 형태의 많은 사람을 어쨌든 하나님께로 끌여붙여서, 그래서 그들이 그들의 범죄함으로 잘못으로 하나님을 진노케 하고 하나님과 끊어져있고 멀어져있는 그들에게 어쨌든 가르쳐서 하나님과 붙여주는, 하나님께로 끌여붙이는 이 일을 위해서 자기를 여러 형태로 받쳐드리는 이게 바로 제사장직이라 그말입니다. 제사장 역할.
중간반 학생들이 돌아다니면서 죄를 저지르고 그러니까,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은, 내가 맡은 학생이 보니까 이런 저런 죄를 저질러서 주변 사람들에게 지탄도 받고 그러니까 찾아가서 대신 사과도 하고 또 더 어떤 학생들은 경찰서 들락거리니까 거기 가서 또 그 학생이 누명이면 벗겨도 주고 살펴주고 하는 거니까, 나하고 피한방울 안섞였고, 그래봐야 그 아이들이 나한테 밥 한그릇 사줄수 없는 아이들이고 내가 밥 사줘야 되고 내가 챙겨야 되고, 그런데 일도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하고 찾아가서 그 아이들을 하나씩 하나씩 챙겨주는 그 이유는, 그래가지고 돈을 얻기 위해서 명예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깨달아 아는대로는 세상에서, 가정에서 세상에서 참 버림받아시피한, 학교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이런 아이들을 챙겨서 어쨌든 실력껏, 그런데 보면은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제대로 된 가정에 똑똑한 아이들, 자기대로의 자기 앞날을 생각을 하고 제 앞가림을 제대로 하는 그런 학생들은 참 좋은 학생들인데 대개 그런 학생들은 교회를 안 나옵니다. 예수를 잘 안 믿습니다. 나가야 될 필요성을 못 느끼니까. 요즘 시대는.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요즘 시대는 다 그렇진 않은데 안 믿는 그런 가정에서 제 앞가림을 제대로 하고 부모님을 제대로 만난 그런 가정에 학생들은 공부하기 바쁘고 제 앞날 준비하기 바쁘기 때문에 죄를 안 저지릅니다. 교회도 잘 안나옵니다. 학교가는데 바쁘고 공부하기 바쁘고 학원다니기 바쁘니까 교회 올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전도하다 보면은, 길거리 있는 아이들 전도하다 보면은 전부 하나같이 대개 보면은 이거 뭐 집안에서도 그렇고, 학교에서도 그렇고 버려놓다시피 한 그런 아이들만 많다 보니까, 꼭 같은 생명인데, 그런 아이들 전도해서 이걸 교회 데려다가 하나님을 가르치려보니까 거기에 많은 시간과 노력과 자본이 안 들어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속에 들어가보면 그게 명예를 위해서, 자기 물질 수입을 위해서, 세상적으로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고, 내게 있는 자기에게 있는 정력만 물질만 쏟아져들어가는데도 불구하고 깨달아 아는대로는 그것이 그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쳐주고 조금이라도 하나님과 가까이 붙여서 구원해보겠다는 그게 그렇게 쓰여지는 그 시간과 노력과 마음과 물질이 전부 제사장 노릇에 쓰여지는 그런 생활, 바로 그것이다 그말입니다. 그것이 제사장 역할인데 그 속에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순수하게 그게 그리 된다면 그건 전부다 사랑의 작용에서, 주님이 날 그리 구원하셨기 때문에 나도 그리 하는 겁니다. 여기 우리 계신분들, 복음의 일꾼들 다 모두 그리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는 겁니다. 제사장 역할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하나님과 떨어져있는 사람, 하나님과 끊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복음은 없는 겁니다. 세상에서 자기대로 잘산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반반한 제대로된 가정과 직장을 가지고 경제생활 하고 보기에 남부럽지 않게 사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그 가정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거기는 사람볼때는 그냥 사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축복은 은혜는 없는 가정이니까 그 가정에 하나님을 알리고 연결시켜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사는 그런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자기를 받쳐 드리는 것이 제사장 노릇입니다. 여기에 섞임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사울이 스데반에게서 발견한 것이 바로 이면입니다. 왜 자기를 죽이는 원수를 위해서 왜 기도를 하느냐? 그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그말이지요. 그런데 스데반이 전하는 그 복음과 죽어가면서 직접 자기가 전하는 그 사실을 사울이 볼 때에 예수라는 복음이 바로 이런 복음이고 그리스도라는 것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사울이 어렴풋이 짐작을 했고 다메섹 가다 확신했고, 그리고 3년 기도하면서 더욱 더 확실해졌고 그래서 그의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돌아서게 된 겁니다.
세상에서,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생각을 많이 해야 됩니다. 멀리 보고 전체를 보면서 이 세상에서 나가는 잘난 사람들, 실력 있는 사람들, 세상을 잘 사는 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아는 겁니다, 다.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우리는 대개 보면은 우리의 타고난 선천적인 실력도, 후천적인 노력도, 맺어지는 결과도 세상으로 내놓고 본다면 우리 자신들이, 우리가 뭐 요즘, 참 옛날에 9급 공무원 5급 공무원인데 옛날로 말하면 그거 직업 중에서도 중간정도 직업이 될란가, 지금 9급 공무원은 80년대 초까지만해도 그 직업은 그냥 고만고만한 직업이었습니다. 학교 교사도 고만고만한 직업이었고, 대기업에 모두 다 그랬고 전가 이런거 한 사람들이지. 그런데 요즘 9급 공무원 되기도 어렵고, 학교 교사 되기는 참 하늘의 별따기 처럼 더 어렵고, 거기 더 올라가긴 더 어려운데. 우리가 그만한 그런 실력, 그만한 그런 실력이 안될지라도, 그만큼 세상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 달려가는 그만큼 우리들의 선천 후천의 노력과 결과가 그리 맺어지지 못했을지라도 그래도 우리들이 보는 시야는 가질 수 있습니다. 판단해볼 수는 있는 겁니다. 보면은 아는 겁니다. 그 속에 안들어가봐도 보면 알지 않습니까? 독약을 먹어봐야 아는 겁니까? 안 먹어봐도 먹으면 죽는다는 것은 알아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걸 가지고 세상을 보면은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라는 것을 안 믿는 사람들, 그들은 아무리 보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눈을 감겨놨기 때문에 안보이고 그들은 모릅니다. 그래서 그것만 죽자고 달려가는 겁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은 눈을 열어놨기 때문에 생각해보면 아는 겁니다. 세상으로 달려가다가 보면은 하나님께서 은혜주실 때가 있으면 ‘아 이것이 아니로구나. 내가 지금 길을 잘못 달려가고 있구나’ 그러고나면 그때부터 방향이 달라지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달라지고 나서 신앙세계에서 눈을 뜨고보면, 이 세상은 사람은 사람인데 세상 사람, 참 표현하기 그렇지만은 예수 안믿는 사람, 겉모습은 사람인데 다 그런건 아니겠고 속속들이 들어가봐야겠지만은 참 허무하기 짝이 없고, 세상 모든 것 다 보면은 이거는 참 가치로 둘만한 것이 없는, 저런것에 자기 평생을 다 쏟아서 무엇할 것인가? 모두들 다 자기 위해서 사는 것이고 넓으면 좀 바로되면 자기 가정, 가족 위해서 사는 것이고, 2세 3세 위해서 사는 것이고. 좀 실력있으면 자기 명예 위해서 사는 것이고, 더 실력 있으면 나라에서 권력 잡아 보는 것이고, 휘둘러 보는 것이고 더 잘난 사람이면 세계를 정복해 보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데 그래본들 역사세계에서 이 세계를 쥐고 흔들었던 그런 세계적인 역사적인 그런 인물을 우리가 공부해본들 그들이 지금 어디가 있으며, 그 시대를 쥐고 흔든 것이 얼마나 되었으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어졌으며, 우리들이 가면은 잘나봐야 그길 밖에 더 가겠는가. 있는 힘 다해서 우리들이 달려가봐야 남자같으면 예를 들면은 한나라 대통령, 여반같으면 박근혜 대통령만큼 될만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리되봐야 5년 지나고 나서, 또 법이 바뀌어 더한다고해도 지나고나면 그만인 것을. 이름 남아봐야 그 이름이 시대 따라 어떻게 변할지 모를 것을. 그러니까 재물 가져봐야 그 재물 마지막에 세상 떠날 때 다 두고 갈 것을, 명예 가져봐야 그 명예 시대 따라 어찌될지 모를 것을. 권력 가져봐야 그 권력으로 인해서 잘못하면 치여서 멸문지화될 수도 있는 것을. 뻔한데. 그것밖에 없는 것인데. 그런데 그게 안보일때는 그리만 달려가는 겁니다. 그리 달려가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어느때인가 거기 대한 의문을 가질때가 있습니다. 회의를 품을때도 있고. 이것이 아닌가? 그때가봐야 하나님께서 사울을 바울로 돌이킬때처럼 그런 돌이키는 때고. 그러면 돌아서고나서 세상을 보면은 이 세상과 성경속에 세상은, 구원 세상은 하늘과 땅 차이 이거는 완전히 별세계이기 때문에 이 세상은 내가 그리 못 살아도 내가 복음대로 다 살지 못하고 믿은 말씀대로 다 살지 못하고 백분지 일, 천분지 일, 만분지 일도 못 살아도 우리의 판단은 이 세상은 사망이고 허무한 것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이 구원은 참이고 진짜고 이게 정말이고 사람이 살려면 이래 살아야되는 것이고 가치는 이것이 참 가치고 하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인식이 바꿔지면 그때부터 그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분량에 따라, 자기 믿음의 노력의 정도에 따라서 완전히 새롭게 사람이 변화가 되어지고 생활이 다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모두들 복음의 일꾼으로 다 그리 나서고 그리 다 하는 겁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사이를 연결시키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서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에게 자기 힘껏 노력하고 기도하고 공부하고 연구해서 전해주고 그리 살게 만들고, 그리고 하나님만 왕으로 모시고 그분에게 순종하는 그런 왕의 직, 이 세가지 직, 이걸 위해서 노력하는데 이 노력에는 전부다 그 바탕이 섞임없는 주님 사랑같은, 그리스도의 사랑같은 그 사랑이 그 속에 바탕이 되야 되는데 깨닫고 나면 이 사랑이 참 사랑이고, 이 사랑으로 이 세가지 역할하는 이것이 인간의 참 가치고 구원 받은 사람의 마땅한 도리고 책무고, 여기 전력을 다 기울일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겁니다. 하늘나라는 그러기 때문에, 하늘나라는 어떤 나라냐? 하늘나라는 그리스도가 건설하는 나라가 하늘나라입니다. 제사장, 선지자, 왕, 그리스도가 건설하는 나라가 하늘나라고, 그리스도들만 사는 나라가 하늘나라고, 그리스도 생활만 하는 나라가 하늘나라고, 그리스도 직책만 하는 나라가 그 나라고, 그래서 그 나라는 사랑의 나라고 시은의 나라다. 이 그리스도 실력이 없는 사람은 그 나라에 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지무능한 사람, 받기만 하고 줄 줄 모르는 사람, 이런 사람이 되고야마는 겁니다.
오늘 이 말씀에서 우리들의 인생의 방향을 한번 더 돌아보십시다. 학생들이면 학생들대로 내가 지금 이대로 가는 것이 과연 끝까지 이대로 가서 이것이 인생 끝을 두고, 인생 사후 영원을 두고 후회하지 않을 길인가? 세상에 직장 가지고 사업하는 분들은 그길 그것이 과연 후회하지 않을 길인가? 자기대로 여러 목적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주어진 현실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밖에 없지만은 전체 인생의 궁극의 목표는 한번 돌이켜보면서 잘못됐으면 바로 잡아야 되고 옳다고 확정되면 계속해서달려가면 되는 것이고. 깊이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사울이 바울되게 된 그 계기, 바울되기 전까지 사울의 생활. 결국 종교국가 안에서, 율법안에서 살았지만은 그의 방향은 세상이었고 자기였습니다. 몰랐습니다. 그게 전부인 줄 알고 가치인 줄 알고 달려갔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날 돌아보고 나니까 아니였습니다. 잘못한 것을 깨닫고는 돌아섰고, 돌아서서 바른 길 잡고난 다음에는 전부 다 받쳐서 바른 길을, 그리스도 수입을 향해서 달려간 사도바울의 변화, 소망, 생애를 기억하고 우리 한번 돌아보십시다.
20140309 주후
빌립보서 3:4-12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마지막에 복음 역사를 다 끝내고 감옥에 갇혀서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을 앞둔 그 시점에서 한 말씀이 있습니다. 관제란 것은 제사에 붓는 술인데, 관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흥이 되고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달리고 길을 다 마쳤기 때문에 이제 세상에 할 일은 다 끝냈고 이제 남은 것은 주님 앞에 가서 의의 면류관, 그것만 바랄 뿐인데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니고 주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주실 그 면류관만 기다릴 뿐이라고 거기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에는 아직까지 12절에 보니까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현재진행하고 있다 그말입니다. 아직까지 달려갈 길을 달려가고 있는 중이라 그런 말씀입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아는대로 믿음의 도라 그럽니다. 믿음의 도. 믿음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아는 것이 전제고, 아는 그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을 하고 알고 인정하면은 필연적으로 그대로 자기 생활과 행동이 따라가게 되는 것이 믿음이고, 그래서 믿음은 지식과 인정과 행함이 하나가 되는 이것이 참된 믿음인데, 기독교의 믿음은 성경을 믿는 믿음입니다. 성경을 읽어서 알고, 성경이 소개하고 가르쳐주는 모든 내용을 알아서 그 사실을 그대로 인정을 하고 그다음 거기 그대로 모든 존재를 상대하고, 두려워할 것은 두려워하고 또 따라갈 것은 따라가고, 중하게 여길 것은 중하게 여기고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또 자기 모든 생활을 성경이 말씀하신 그대로 생활을 맞춰나가고 자기 모든 개인 언행심사를 그리 맞추고 대외 모든 존재와의 관계를 성경이 말씀하신 그 말씀에 따라서 살아나가는 것이 기독자들의 믿음생활에 가장 기본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믿어지는 믿음, 성경이 읽어지고 성경속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자기에게 인정이 되어지고,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지는 이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야 되지 인간에 소원과 노력, 인간의 힘으로 되어지지를 아니합니다. 이걸 가리켜서 기본구원이라 그리 말합니다. 주님 대속을 입은 것도 기본구원이고, 그 대속의 효력을 입고 사는 것은 건설구원입니다. 이거는 인간의 노력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물론 그 속에 궁극에 들어가면 인간의 노력까지도 인간의 자유의지까지도 전부 하나님의 역사지만은, 인간 우리들의 범위에서 인간의 노력이 있어야 되는 것이 건설구원이고 주님 대속의 효력을 입는 것도 그러하고, 기본적으로 받은 그 믿음을 우리가 길러서 성장시켜 나가는 것도 우리들의 몫입니다.
하나님이 주님 십자가 대속의 공로를 근거하여 성령과 진리로 우리를 중생시키시고 때가 되면 우리를 불러서 믿는 사람이 되게 하시는, 그래서 중생 시켜서 예수 믿게 만드는 거기까지는 하나님의 은혜라야 되는 것이고, 그다음 중생이 돼서 예수를 믿는 믿음 생활을 시작을 하게되면 그때부터는 우리들의 몫으로, 우리의 노력에 따라서 이미 받은 기본적인 그, 종자적인 그 믿음을 얼마만큼 길러가느냐 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길러가는 것은 우리 몫이다 그말입니다. 우리들이 노력해서 길러가야 될 우리들의 몫입니다. 그러면 그 길러가는 그 믿음이 건설구원이고, 그 건설구원 믿음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 각각 차이가 나고 달라지게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믿음이란 것은 하나님께 받은 기본적인 믿음은 사도바울의 믿음이나 오늘 우리 믿음이나 이제 믿는 사람들의 믿음이나 그 차이가 없이 꼭 같습니다. 우리도 사도바울만큼 자랄 수 있는 그런 종자적인 믿음은 우리도 다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가서 핑계 대지를 못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쓰시는 그 분량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눈으로 쓰시고 어떤 사람은 입으로 쓰시고, 어떤 사람은 새끼 발가락으로 쓰시고 어떤 사람은 머리카락 하나 정도로 쓰시고, 우리가 다 주님의 몸에 지체니까 쓰임 받는 그 중요성-사람들 보기에 정도는 각각 다를지라도, 그러나 어느 한 지체도 주님 몸된 교회, 주님의 몸 구원에 붙어있는 그 몸이 자기역할을 다 할 때 온전한 몸이 되어지는 것인데 그 온전한 몸이 되어서 자기 역할을 다 하는 자기를 만드는 것이 우리 몫이라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적게 받았으니까 나는 사도바울처럼 그만한 선천 후천에 타고난 그런 조건이 없으니까 나는 못한다고 포기하는 것이 바로 한달란트 받은 자의 불충이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결과를 맺은 그와 같이 되는 겁니다. 자기에게 주신 분량만 다하면 나사로처럼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는 그런 믿음이 되어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할 일은 하나님이 내 영을 중생시켜서 내가 성경을 읽게 됐고, 모태 신앙이든지 아니면 어릴때 선생님 통해서 주일학교때부터 믿었던지, 청년때 믿었던지 무슨 집안에 사고 생겨서 믿게 되었든지 어찌 되었든, 어떤 동기, 계기에 의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던지 믿었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고, 그때부터 우리들이 할 일은 그 상황에서 힘을 써서 우리 믿음을 길러나가는 것이 우리 할 일입니다.
사도바울 역시, 어릴때부터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의 나라에서 태어났으니까 모태신앙이었고, 그리 되어졌으나 그러나 사도바울의 건설구원은 언제부터냐? 사도바울의 건설구원은 스데반이 죽는 모습을 본 그때, 의문을 품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님 만난 그때부터 비로소 사도바울의 건설구원은 시작이 되어졌다 그래 볼 수 있고, 그전까지 사도바울의 열심, 충성,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건 전부다 그거는 껍데기였지 건설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라, 다만 율법을 지키는 그런 익숙한 것이 있기 때문에, 이게 조금 오해가 될 수 있는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불교 믿는 사람이 불교에서 열심히 도를 닦고 참선을 하고 자기 수양, 자기 절제를 하고 전심으로 불교를 믿던 그 사람이 개종을 해서 기독교로 딱 돌아서면, 진정 기독교로 돌아서면 그 사람은 돌아서는 그 다음 주일 바로 집사 임명을 해도 괜찮을 수 있다 그럽니다. 왜 그런가? 불교에 그렇게 정진한 사람이 기독교로 개종을 해서 그리됐다는 말은 이거는 하나님의 역사고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 속에 믿음이란 것은 그냥 어영부영 믿는 둥 마는 둥 믿는 그런 믿음하고는 차원이 다른 겁니다. 그런 사람은 몰라서 방향을 잘못 틀어 그리 갔지 방향만 돌아지고 나면 그때부터는 불교에 총력을 기울여 믿듯이 그다음부터는 기독교 신앙으로 주님을 자기 전부를 다해서 섬기는 그런 사람이 되어진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세상적인 조건이 많았습니다. 오전에 몇가지 였습니까, 세상적인 조건이? 일곱가지였습니다. 그 일곱가지는 이거는 어찌보면은 신앙입니다 전부다. 팔일만에 할례를 받았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 거슬리는 모든 걸 다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그 표시가 나자마자 팔일만에 할례 받는 그겁니다. 구약시대때. 오늘날 말하면 세례인데. 그 표시를 받았고. 두 번째는 이스라엘 족속이다. 하나님의 구원 받은 선민입니다. 택함 받은 선민. 천하에 많은 민족이 있고 족속이 많고 나라가 많은데 그 당시 택함 받은 족속, 그때나 지금이나 인구는 상당히 많습니다. 많을 때입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민족은 이스라엘 유대민족 한 민족 밖에 없습니다. 그 자부심이란 것은 말로 못하지요. 1등이 영광스럽고 귀한 것은 1등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뭐든지 귀하면 값이 올라가는 겁니다. 금이라도 많으면 값은 떨어지는 겁니다. 선택받은 민족이 많다면 자부심 가질게 별로 없겠는데, 온 천하 세계에 많은 족속이 있는 중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민족은 이스라엘 족속밖에 없습니다. 그 이스라엘 족속이 바로 바울이 그 족속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족속이다. 하나님의 선민이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사랑을, 애호를 많이 받았던 베냐민의 지파다. 똑똑하고 실력있는 베냐민 지파다. 그 베냐민 지파 중에서도 바울은 똑똑한 사람이니까 천하에 얼마나 똑똑한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다. 문화가 최고로 아주 발달된 그런 히브리인, 그중에서도 참 토종으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다. 말하자면 꽃 중에 꽃이다, 왕 중에 왕이다 하는 것처럼,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흠이 없이 지켰다 그말이지요. 천주교는 원래 계통이, 천주교를 거슬러 올라가면 누가 나옵니까? 천주교를 거슬러 올라가면 위에 누가 나옵니까? 바울이 나오는 겁니다. 바울이 나오고 바울을 거슬러 올라가면 바리새인이 나오는 겁니다. 바울이 천주교를 만들었다 말이 아니고 타락한 천주교가 말하자면 그게 타락을 해서 문제가 된 것이지 내려오기는 바울로부터 내려오는 겁니다. 중간에 타락해서 변질되서 문제가 됐지. 천주교 빼놓은 루터 칼빈이 있습니까? 오늘날 정통 기독교에 천주교 빼고 나면 중간에 천년이 비는 겁니다. 내려올 수가 없는 거지요. 정통이라 뜻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정통이란 것은, 정통성이란 것은 세상을 아는 사람들은 굉장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야곱이 장자명분을 목숨을 걸만큼 기를 쓰고, 형의 장자 명분을 뺏으려고 했던것이 그게 정통성 때문에 그런겁니다. 장자를 통해서 내려가는 거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그리 아닌데도 사람 보기엔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서도 그런거 우리나라 왕조 조선시대나 왕조 역사에 역성혁명 이런, 조선시대는 없었지요. 그런 혁명이 그 지방 안에서 혁명이 일어났는데 정통성을 부여받지 못한 그런 왕들은, 계통을 바로 이어 받지 못한 말하자면은 소위 아주 안 좋은 말로 곁가지가 본둥지에서 왕이 된 그런 경우는 자기 스스로 자기 속에 캥기는 그런 것이 있기 때문에 공연히 트집을 잡고 그걸 세우기 위해서 아주 무리를 쓰는 그런 수가 많이 있게 되는 겁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다. 바리새인이 정통 교파였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 속한 사람이 없고, 그리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해서, 그러면 사울이 교회를 핍박한 것은 그때 사울의 깨달음으로써 사울은 바리새파에 속해있었고 그당시 유대인의 전부, 정권이나, 종교국가입니다. 중교 국가니까 로마 식민지에 속해있지만은 일종에 자치국처럼 그리 되어 있었을건데 그 나라를 전부 지도하고 지배하는 권력자, 정권자들은 전부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그들입니다. 그게 바리새 교파들이고 거기 사울은 젊은 나이인데 소속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줄기에 들어있고 그 파에 속해있고 거기 들어서 그것을 배우고 듣고 그길을 따라가니까 그들의 주장은 하나님의 모세 율법 지키는 이것이 정통이고 이대로 지켜야 되는데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그 정통성 있는 바리새인을 모조리 부정하다시피 외식이라고 다 꾸짖고 정죄하고 마구 난도질하고 다 틀렸다고 하니까, 그들에게 누명쓰고 정죄받아서 예수님은 나사렛 이단이라, 그 당시 이단이면 무조건 죽이는 겁니다. 천주교가 천년 동안 수십만명을 죽인 것은, 그 뒤에 타락한 다음에, 수십만명 죽인 그 죄목은 전부다 이단입니다. 이단으로 정죄해가지고 다 모조리 다 죽인 겁니다. 그때 한창 천주교가 종교개혁 일어날 그 시점, 그때 사람들 죽여나갈때는 전부 이단, 악마, 마녀, 마녀사냥이란 말 있지요. 그래가지고 마녀라 그리 누명 씌워가지고 모조리 죽이는 것이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모릅니다. 이단이라고 정죄되면 무조건 죽이는 겁니다. 이때도 그럤는데,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는 나사렛 이단의 괴수고, 그 따르는 사람은 그 무리들이니까 다 모조리 죽여 없애 버려야 된다고 그리 그들이 말하자면 하나의 정책적으로 그리 정해놓고 유대나라 국가적으로 처리를 해버리니까 다 죽이는 그러 상황에 그 파에 속했고, 그 줄기에 속해있는, 그 흐름속에 들어있는 사울이 역시 똑같이 그들처럼 그리 사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예수는 죽어 마땅하고 예수 믿는 사람은 죽여야 이것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것이고 하나님의 도를 바로 세우는 것이고 이게 옳은 것이라고 그렇게 세뇌가 된 상태고 그리 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믿는 사람은 어쨌든 죽이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이런 사람이 사울이였습니다.
이 사울이 어찌보면은 신앙으로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 율법을 말하고 의를 말하고 이러니까 신앙 있는 것 같지만은 내면을 들여다보면은 그 줄기 전체가, 그 당시 그 모든 위에 머리부터 밑에까지 모든 사람이 전부 하나님은 이용해먹고 외식하고 자기들 교권, 세상 권력, 부귀 영화 이런 것 마련하는데 급급하고 그것 유지하는데 급급했지 참 생명있는 신앙은 없는 상황이었는데 사울은 그 속에 중심은 그러지 않았는데, 하나님을 진정 바로 섬기고 싶은 그런 중심으로 섬겨 나갔는데 배우기를 그리 배웠고 자기 노선을 그줄에 서있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참된 교회가 되는 예수 구주가 되는 예수를 죽이는 그길에 서있었다 그말이지요. 그런데 그 중심에 발랐고 깨끗했기 때문에, 또 하나님께 영원전 뽑아낸 그릇이기 때문에 사울을 돌이킨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이런 세상적으로 좋은 탁월한 조건을 가졌던 사울이 그 모든 선천적인 조건, 타고난 민족적으로 지파적으로, 집안적으로 또 자기 개인적으로, 자기 마음과 몸에 지혜나 지식이나, 능력이나 성품이나, 또 활동성이나 실력이나 이런 모든 면으로 이런 탁월한 모든 것을 가졌던 이 사울이기 때문에 그런 모든 걸 가진 그 사울이 가진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서있는 노선줄이 그쪽으로 서있고, 그리 배워놓으니까 달려가는게 전부 그길을 달려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성경전체를 두고 보니까 그가 달려가는 길은 천국이 아니고 세상이었고,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를 세워나가는 그런 길이었다 그말입니다.
이런 상황에 그래서 자기딴에는 천국 향해서 간다고 가고, 하나님 향해서 간다고 갔는데 실제는 그는 세상을 마련하고 있었고 또 자기를 세우고 있었고, 그래서 자기와 자기 세상 건설하는 거기에 필요한 것은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사람까지 죽이는 이런 일을 거침없이 하는데, 자기 그 탁월한 지능의 실력에 전부 다 기울여서 힘껏 달려가고 있는 그 걸음을 가는데, 그 가는 중에 하나 때가 되니까 부딪힌 것이 뭐가 부딪혔다고요? 스데반을 죽인게 딱 걸린겁니다. 스데반을 스스럼없이 다른 무리들과 함께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돌로 쳐서 죽였는데, 돌에 맞아 죽어가던 그 스데반이 마지막에 스데반이 전하는 예수의 복음도 듣고, 죽어가면서 전한 그 복음도 듣고 또 죽어가면서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 모습을 보고, 하늘을 우러러 하늘문이 열리고 주 예수께서 서신 것을 본다는 그런 말을 들을때 그때까지 사울이 자기 속한 그 세계, 그 노선, 자기활동하는 그 활동, 자기가 그때까지 하나님 섬기는 그 신앙에서 한번도 보지 못했던, 전혀 다른 세계의 것을 그때 봤다 그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열어주셨고, 때가 되니까 열어주시니까 보였고, 전혀 다른 것을 본 겁니다. 자기는 지금 하나님의 도를 세우고 하기 위해서 사람을 때리고 감옥 가두고 죽이고 있는데, 죽어가면서 자기를 죽이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런, 인간을 참 사랑하는 저게 도무지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인가, 있을수가 있는 일인가 전혀 다른 세계를 보게 되어진 겁니다.
그래서 그때 충격 받고, 정신이, 깊은, 몸은 움직이지만은 머릿속에 의문에 의문을 꼬리 물고 또 스데반이 외친 그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듣고, 구구절절이 틀린 말이 없거든요? 자기 아는 성경으로 다 들어볼대. 사울은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입니다. 율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니까. 실력있는 사람, 공부 많이 한 사람이니까. 스데반이 죽으면서 예수님 오시기까지 십자가 못박혀 죽기까지 모든 과정을 나열해서 설명하는데 그걸 다 사울이 들어볼때 틀림이 없는 말이고 그리고 죽어가면서 그리하는 모습을 볼때 그 모든 말들과 스데반의 겉모습 이런 것들이 사울의 마음 속에, 머릿속에 맴돌면서 많은 걸 생각을 하게 되고 연결시켜보게 되고 그러니까 그때까지 자기가 달려오던 그 걸음에 완전히 일대 대혼선이 일어나게 된겁니다. 의문을 품었고 혼선을 품었고 정신을 못차리고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게 된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리되니까 깊은 속에 들어가니까 마음은 그만큼 밝아졌겠지요, 심령은. 그리 된 상황에서 다메섹 가다가, 다메섹 가는 몸은, 지금 가는 목적은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려고 가고 있는데 마음 속에는 의문을 품고 가고 있고, 그리된 상태에서 주님이 나타나셔서 사울을 부르시니까 결정적으로 망설임 없이 그만 돌이키게 된 겁니다. 돌아서고 난 다음에는 자기 눈으로 스데반을 봤고, 주님 나타나신 음성을 들었고 빛을 봤고, 눈이 멀었고 아나니아가 와서 눈을 띄웠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눈을 띄웠고, 이런 걸 확실히 보고 난 다음, 그리고난다음에는 망설이지 아니하고, 성경기록상으로는 그러고나서 바로 예루살렘으로 간것처럼 보이는데,갈라디아서에 보면은 그러고난다음에 아라비아에 가서 3년을 거기서 기도하며 회개했다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3년동안 하나님 앞에 그동안에 자기가 했던 그런 모든 잘못된 길을 회개하고 기도하고 3년을 그리하고 난 다음에 그의 남은 평생은 전부다 오직 하나,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 전부를 다 받친, 변화되기 전까지 세상을 향해 달려갔던 그 걸음이, 변화되고 나니까 이제는 정반대로 그리스도를 향해서 전심전력 달려간 그런 사람이 되어진 겁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좀 극단적인 예지만은, 불교를 전심전력 믿던 그 사람은 불교에 인간에 참 구원의 도가 있는줄 알고 그리 믿어나가다가 그게 허무함을 어느순간 깨닫고 ‘이게 아니다’ 하고 돌아서서 개종해서 기독교의 참 도를 발견하고 나면은 불교에서 전심전력했던 그만큼 기독교는 더 하게 되어있고, 거기서 실력있는만큼 여기는 실력있게 일을 하게 되어지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으로 힘있게 나가던 그 사람이 깨달음을 가지고 하나님 은혜를 받아서 세상에 의문 품고 이게 아니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서고 나면은 그만큼 신앙으로 힘있게 돌아서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일반입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믿는 사람중에 참 대단히 많습니다. 모두 많이 그래가지고 신앙으로 돌아서서 다 그리 매진하는 겁니다. 백목사님 같은 경우도, 25살까지 젊은 나이에 머리가 좋으니까 온갖 세상경험 다해보고 돈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벌어보고, 온갖 재미향락 다 누려보고 그 속에 늘 그래도 허무함을 가지고 있다가 복음을 듣고 난 다음에 하나님 은혜로 깨닫고 난 다음에는 평생 55년 동안을 그냥 이 길 향해서 전부다 바쳐서 달려간 겁니다. 오늘도 복음의 일꾼들은 다 정도 차이는 있어도, 사람이 주신 분량이 다르니까 가다 넘어지기도 하고 또 쉬기도 하고 시험도 들고 하지만은 그래도 깨닫고 나면은 모두 자기에게 주신 분량대로는 전심전력 다 기울여서 달려가는 그 걸음은 내면에 들어가보면은 그리스도를 향한 이 걸음이다 그리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변화된 것, 본문에 나타내보면은 아라비아에서 3년을 기도하며 회개하고 그리고 난다음에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때부터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고 그때까지 자기가 유익하던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기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 그러니까 그 이후부터 사도바울의 주어진 모든 세상, 그의 선천, 후천에 가졌던 세상에 모든 좋은 그런 가지고 있는 자기 조건이라 말은 실력이라 말이고 자기 세상 배경이라 말이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자기 활동 무대고 터가 되는 것이고 자본인데, 그 모든 자본들을 없는 사람보다 많이 있으면 그만큼 일을 많이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모든 자본들을 그때부터는 배설물로 여겨서 뭘로 가졌느냐? 마태복음 13장에 보니까,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그 보화를 발견하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밭을 샀습니다. 보화만 살 수 없으니까, 밭을 사면은 그 밭 속에 보화가 들어있으니까. 그 사람이 밭을 산 것은 밭이 목적이 아니고 보화가 목적입니다. 그 밭이 뭐냐? 그 밭이 바로 자기 가진 세상 모든 자본입니다. 자기 세상. 사도바울이 가진 모든, 사울이 가졌던 모든 세상 온갖 본문에 일곱가진데, 이것뿐이 아니고 더 많겠죠. 이 많은 것. 그 모든 것을 사울이 바울이 되고 난 다음,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난 다음에는 그 모든 것은 마치 그 속에 있는 보화를 캐내기 위한 밭으로 사용한 것이고 말하자면은 기름을 짜내기 위해서 기름 짜내는 그 나머지는 깻목으로 다 버려버리듯이, 보화를 캐내고 나면 다른 것은 필요가 없듯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자기 수입하는 거기만 이용하고 나머지는 전부다 재물도, 명예도, 권세도, 세상 온갖 배경도 모든 것도 다 헛된 것이라는 것을 비로소 안 누려봐도 거기 어느정도, 바울은 보면은 그럴 수 있는 그런 자질과 실력을 다 가졌는데 그대로 나가면 바울의 출세길은 말하자면은 대제사장이 되어서 유대나라에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가 될 지 모르겠지요. 타락한 교회의 통치자 그리 됐을지 모르겠지요. 그렇지만은 그렇게 가기전에 그 끝을 보고 깨닫고, 솔로몬은 다 누려보고 깨달았는데, 그래서 허비가 많았는데, 사울은 가다가 하나님 은혜로 중간에서 보고 깨닫고 돌아서서 그리스도 수입으로 완전히 돌아서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여기에, 왜? 그것이 가장 고상하니까. 깨닫고나서 보니까 세상에서 그리스도 예수보다, 그리스도보다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없고 더 가치있는 것이 없고 더 영원하고 완전하고 영광스럽고 흠과 점이 없는 그것이 없더라 그말이지요. 알고나서 보니까. 그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그가 되기 위해서, 또 그리스도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에 참예하기 위해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힘을 다해서 달려갔다 이게 사울이 바울되고 난, 변화된 그 소망이었고 소원이었고 노력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전체가 다 한말로 말하면 그리스도인데 그리스도가 무엇인가? 그리스도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기름부음 받은 것이고, 이것 좀, 그리스도 깊이 좀 새벽에는 좀 공부를 해봐야 되겠는데. 기름 부음 받은 것은 몇가지 직책입니까? 그리스도는 다 아시는대로 제사장, 선지, 왕직입니다. 그러면 이 제사장, 선지, 왕직이 무엇인가? 이걸 한말로 말하면 사랑인데, 이 직책에 동기와 작용과, 이게 전부다 사랑의 동기고 사랑의 작용, 사랑의 역사인데 제사장이란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사이를 결합시켜 주는 거지요. 범죄함으로 하나님께 버림 받았고 하나님께 버림 받았으니까 생명도 없고 행복도 없고 평강도 없고 기쁨도 없고 저주밖에 없는, 하나님께 버림 받고 하나님께 저주 받는, 하나님의 축복은 아무것도 없는 그런 상태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쳐서, 제물을 바쳐, 양을 제물로 드리는데 양을 제물로 잡아 드리는데 그 양은 바로 구주 예수고 그분이 그리스도인데 그 양, 예수님 당신을 제물로 받쳐서 하나님 백성을 하나님께로 붙여 연결시켜서 살려주신 건데, 화목시켜 주신 것인데 그 제물이 바로 왕인데 구약시대때 그 제물을 받쳐드리고 집두하는 그 주관자가 바로 제사장입니다. 그러면 그 제사장은 짐승을 잡아서 드리는 것이지만은 예표로 어린양되신 주님을 표시하는 짐승을 잡아서 드리는 것이지만은 실제로 말하면 그 제사장 자기가 자신을 잡아드리는 것 하고 같은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사장은 바로, 오늘날 제사장이라 그러면 주님이 당신을 받쳐 드림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시켜 연결맺어주신 이걸 터로 삼아서 우리들이 주님 피, 대속의 공로 그걸 힘입어서 그걸 근거해가지고 터를 삼아서 하나님의 백성들하고 하나님 사이를 내가 먼저 하나님과 연결되어가지고 하나님 백성 하나님 사이를 붙여주는, 하나님께로 끌여붙여서 화목시켜주고, 그래서 하나님과 연결시켜서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런 관계로 만들어주는 이것이 제사장의 역할이고 이것을 위해서 자기를 여러 형태로 받쳐서 드리는 겁니다. 자기가 땀 흘려 번 제물을 받쳐 드릴 수도 있고 자기 재주 기능을, 사람을 하나님께로 끌어붙이기 위해서 그 사람에게 공부를 가르쳐줄 수도 있고 기술 가르쳐줄 수도 있고, 그 집에가서 봉사 해줄 수도 있고 위문해줄수도 있고, 위로 해줄수도 있고 여러 가지 방법을 가지고 내게, 내 주변에 있는 나와 관련된 내게 주어진 그 범위에 있는 여러 형태의 많은 사람을 어쨌든 하나님께로 끌여붙여서, 그래서 그들이 그들의 범죄함으로 잘못으로 하나님을 진노케 하고 하나님과 끊어져있고 멀어져있는 그들에게 어쨌든 가르쳐서 하나님과 붙여주는, 하나님께로 끌여붙이는 이 일을 위해서 자기를 여러 형태로 받쳐드리는 이게 바로 제사장직이라 그말입니다. 제사장 역할.
중간반 학생들이 돌아다니면서 죄를 저지르고 그러니까,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은, 내가 맡은 학생이 보니까 이런 저런 죄를 저질러서 주변 사람들에게 지탄도 받고 그러니까 찾아가서 대신 사과도 하고 또 더 어떤 학생들은 경찰서 들락거리니까 거기 가서 또 그 학생이 누명이면 벗겨도 주고 살펴주고 하는 거니까, 나하고 피한방울 안섞였고, 그래봐야 그 아이들이 나한테 밥 한그릇 사줄수 없는 아이들이고 내가 밥 사줘야 되고 내가 챙겨야 되고, 그런데 일도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하고 찾아가서 그 아이들을 하나씩 하나씩 챙겨주는 그 이유는, 그래가지고 돈을 얻기 위해서 명예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깨달아 아는대로는 세상에서, 가정에서 세상에서 참 버림받아시피한, 학교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이런 아이들을 챙겨서 어쨌든 실력껏, 그런데 보면은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제대로 된 가정에 똑똑한 아이들, 자기대로의 자기 앞날을 생각을 하고 제 앞가림을 제대로 하는 그런 학생들은 참 좋은 학생들인데 대개 그런 학생들은 교회를 안 나옵니다. 예수를 잘 안 믿습니다. 나가야 될 필요성을 못 느끼니까. 요즘 시대는.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요즘 시대는 다 그렇진 않은데 안 믿는 그런 가정에서 제 앞가림을 제대로 하고 부모님을 제대로 만난 그런 가정에 학생들은 공부하기 바쁘고 제 앞날 준비하기 바쁘기 때문에 죄를 안 저지릅니다. 교회도 잘 안나옵니다. 학교가는데 바쁘고 공부하기 바쁘고 학원다니기 바쁘니까 교회 올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전도하다 보면은, 길거리 있는 아이들 전도하다 보면은 전부 하나같이 대개 보면은 이거 뭐 집안에서도 그렇고, 학교에서도 그렇고 버려놓다시피 한 그런 아이들만 많다 보니까, 꼭 같은 생명인데, 그런 아이들 전도해서 이걸 교회 데려다가 하나님을 가르치려보니까 거기에 많은 시간과 노력과 자본이 안 들어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속에 들어가보면 그게 명예를 위해서, 자기 물질 수입을 위해서, 세상적으로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고, 내게 있는 자기에게 있는 정력만 물질만 쏟아져들어가는데도 불구하고 깨달아 아는대로는 그것이 그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쳐주고 조금이라도 하나님과 가까이 붙여서 구원해보겠다는 그게 그렇게 쓰여지는 그 시간과 노력과 마음과 물질이 전부 제사장 노릇에 쓰여지는 그런 생활, 바로 그것이다 그말입니다. 그것이 제사장 역할인데 그 속에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순수하게 그게 그리 된다면 그건 전부다 사랑의 작용에서, 주님이 날 그리 구원하셨기 때문에 나도 그리 하는 겁니다. 여기 우리 계신분들, 복음의 일꾼들 다 모두 그리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는 겁니다. 제사장 역할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하나님과 떨어져있는 사람, 하나님과 끊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복음은 없는 겁니다. 세상에서 자기대로 잘산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반반한 제대로된 가정과 직장을 가지고 경제생활 하고 보기에 남부럽지 않게 사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그 가정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거기는 사람볼때는 그냥 사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축복은 은혜는 없는 가정이니까 그 가정에 하나님을 알리고 연결시켜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사는 그런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자기를 받쳐 드리는 것이 제사장 노릇입니다. 여기에 섞임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사울이 스데반에게서 발견한 것이 바로 이면입니다. 왜 자기를 죽이는 원수를 위해서 왜 기도를 하느냐? 그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그말이지요. 그런데 스데반이 전하는 그 복음과 죽어가면서 직접 자기가 전하는 그 사실을 사울이 볼 때에 예수라는 복음이 바로 이런 복음이고 그리스도라는 것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사울이 어렴풋이 짐작을 했고 다메섹 가다 확신했고, 그리고 3년 기도하면서 더욱 더 확실해졌고 그래서 그의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돌아서게 된 겁니다.
세상에서,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생각을 많이 해야 됩니다. 멀리 보고 전체를 보면서 이 세상에서 나가는 잘난 사람들, 실력 있는 사람들, 세상을 잘 사는 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아는 겁니다, 다.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우리는 대개 보면은 우리의 타고난 선천적인 실력도, 후천적인 노력도, 맺어지는 결과도 세상으로 내놓고 본다면 우리 자신들이, 우리가 뭐 요즘, 참 옛날에 9급 공무원 5급 공무원인데 옛날로 말하면 그거 직업 중에서도 중간정도 직업이 될란가, 지금 9급 공무원은 80년대 초까지만해도 그 직업은 그냥 고만고만한 직업이었습니다. 학교 교사도 고만고만한 직업이었고, 대기업에 모두 다 그랬고 전가 이런거 한 사람들이지. 그런데 요즘 9급 공무원 되기도 어렵고, 학교 교사 되기는 참 하늘의 별따기 처럼 더 어렵고, 거기 더 올라가긴 더 어려운데. 우리가 그만한 그런 실력, 그만한 그런 실력이 안될지라도, 그만큼 세상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 달려가는 그만큼 우리들의 선천 후천의 노력과 결과가 그리 맺어지지 못했을지라도 그래도 우리들이 보는 시야는 가질 수 있습니다. 판단해볼 수는 있는 겁니다. 보면은 아는 겁니다. 그 속에 안들어가봐도 보면 알지 않습니까? 독약을 먹어봐야 아는 겁니까? 안 먹어봐도 먹으면 죽는다는 것은 알아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걸 가지고 세상을 보면은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라는 것을 안 믿는 사람들, 그들은 아무리 보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눈을 감겨놨기 때문에 안보이고 그들은 모릅니다. 그래서 그것만 죽자고 달려가는 겁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은 눈을 열어놨기 때문에 생각해보면 아는 겁니다. 세상으로 달려가다가 보면은 하나님께서 은혜주실 때가 있으면 ‘아 이것이 아니로구나. 내가 지금 길을 잘못 달려가고 있구나’ 그러고나면 그때부터 방향이 달라지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달라지고 나서 신앙세계에서 눈을 뜨고보면, 이 세상은 사람은 사람인데 세상 사람, 참 표현하기 그렇지만은 예수 안믿는 사람, 겉모습은 사람인데 다 그런건 아니겠고 속속들이 들어가봐야겠지만은 참 허무하기 짝이 없고, 세상 모든 것 다 보면은 이거는 참 가치로 둘만한 것이 없는, 저런것에 자기 평생을 다 쏟아서 무엇할 것인가? 모두들 다 자기 위해서 사는 것이고 넓으면 좀 바로되면 자기 가정, 가족 위해서 사는 것이고, 2세 3세 위해서 사는 것이고. 좀 실력있으면 자기 명예 위해서 사는 것이고, 더 실력 있으면 나라에서 권력 잡아 보는 것이고, 휘둘러 보는 것이고 더 잘난 사람이면 세계를 정복해 보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데 그래본들 역사세계에서 이 세계를 쥐고 흔들었던 그런 세계적인 역사적인 그런 인물을 우리가 공부해본들 그들이 지금 어디가 있으며, 그 시대를 쥐고 흔든 것이 얼마나 되었으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어졌으며, 우리들이 가면은 잘나봐야 그길 밖에 더 가겠는가. 있는 힘 다해서 우리들이 달려가봐야 남자같으면 예를 들면은 한나라 대통령, 여반같으면 박근혜 대통령만큼 될만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리되봐야 5년 지나고 나서, 또 법이 바뀌어 더한다고해도 지나고나면 그만인 것을. 이름 남아봐야 그 이름이 시대 따라 어떻게 변할지 모를 것을. 그러니까 재물 가져봐야 그 재물 마지막에 세상 떠날 때 다 두고 갈 것을, 명예 가져봐야 그 명예 시대 따라 어찌될지 모를 것을. 권력 가져봐야 그 권력으로 인해서 잘못하면 치여서 멸문지화될 수도 있는 것을. 뻔한데. 그것밖에 없는 것인데. 그런데 그게 안보일때는 그리만 달려가는 겁니다. 그리 달려가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어느때인가 거기 대한 의문을 가질때가 있습니다. 회의를 품을때도 있고. 이것이 아닌가? 그때가봐야 하나님께서 사울을 바울로 돌이킬때처럼 그런 돌이키는 때고. 그러면 돌아서고나서 세상을 보면은 이 세상과 성경속에 세상은, 구원 세상은 하늘과 땅 차이 이거는 완전히 별세계이기 때문에 이 세상은 내가 그리 못 살아도 내가 복음대로 다 살지 못하고 믿은 말씀대로 다 살지 못하고 백분지 일, 천분지 일, 만분지 일도 못 살아도 우리의 판단은 이 세상은 사망이고 허무한 것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이 구원은 참이고 진짜고 이게 정말이고 사람이 살려면 이래 살아야되는 것이고 가치는 이것이 참 가치고 하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인식이 바꿔지면 그때부터 그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분량에 따라, 자기 믿음의 노력의 정도에 따라서 완전히 새롭게 사람이 변화가 되어지고 생활이 다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모두들 복음의 일꾼으로 다 그리 나서고 그리 다 하는 겁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사이를 연결시키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서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에게 자기 힘껏 노력하고 기도하고 공부하고 연구해서 전해주고 그리 살게 만들고, 그리고 하나님만 왕으로 모시고 그분에게 순종하는 그런 왕의 직, 이 세가지 직, 이걸 위해서 노력하는데 이 노력에는 전부다 그 바탕이 섞임없는 주님 사랑같은, 그리스도의 사랑같은 그 사랑이 그 속에 바탕이 되야 되는데 깨닫고 나면 이 사랑이 참 사랑이고, 이 사랑으로 이 세가지 역할하는 이것이 인간의 참 가치고 구원 받은 사람의 마땅한 도리고 책무고, 여기 전력을 다 기울일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겁니다. 하늘나라는 그러기 때문에, 하늘나라는 어떤 나라냐? 하늘나라는 그리스도가 건설하는 나라가 하늘나라입니다. 제사장, 선지자, 왕, 그리스도가 건설하는 나라가 하늘나라고, 그리스도들만 사는 나라가 하늘나라고, 그리스도 생활만 하는 나라가 하늘나라고, 그리스도 직책만 하는 나라가 그 나라고, 그래서 그 나라는 사랑의 나라고 시은의 나라다. 이 그리스도 실력이 없는 사람은 그 나라에 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지무능한 사람, 받기만 하고 줄 줄 모르는 사람, 이런 사람이 되고야마는 겁니다.
오늘 이 말씀에서 우리들의 인생의 방향을 한번 더 돌아보십시다. 학생들이면 학생들대로 내가 지금 이대로 가는 것이 과연 끝까지 이대로 가서 이것이 인생 끝을 두고, 인생 사후 영원을 두고 후회하지 않을 길인가? 세상에 직장 가지고 사업하는 분들은 그길 그것이 과연 후회하지 않을 길인가? 자기대로 여러 목적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주어진 현실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밖에 없지만은 전체 인생의 궁극의 목표는 한번 돌이켜보면서 잘못됐으면 바로 잡아야 되고 옳다고 확정되면 계속해서달려가면 되는 것이고. 깊이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사울이 바울되게 된 그 계기, 바울되기 전까지 사울의 생활. 결국 종교국가 안에서, 율법안에서 살았지만은 그의 방향은 세상이었고 자기였습니다. 몰랐습니다. 그게 전부인 줄 알고 가치인 줄 알고 달려갔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날 돌아보고 나니까 아니였습니다. 잘못한 것을 깨닫고는 돌아섰고, 돌아서서 바른 길 잡고난 다음에는 전부 다 받쳐서 바른 길을, 그리스도 수입을 향해서 달려간 사도바울의 변화, 소망, 생애를 기억하고 우리 한번 돌아보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