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3-주후(고전11:23-26)---작성 중
예수님의 대속2014-02-25조회 425추천 31
본문: 고전11:23-26
제목: 예수님의 대속
(설교원문)
20140223 주후
고린도전서 11:23-26
성찬식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성찬식에 먹는 떡과 잔은 예수님의 몸, 다시 말하면 고난의 생애와 예수님의 피, 죽으심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것을 먹고 마심으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의 그 근본을 파고 들어가서 그 원인과 과정과 또 맺어진 결과까지를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생각하고 연구해보고 그것을 아는 가운데서 감사하고 찬양하고 그 대속을 강직하는 이런 생활을 하며 그 대속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이런 기념예식을 하게 되는 겁니다. 어떤 교회들은 성찬식을 1년에 몇 번하는 교회도 있고, 천주교는 아마 우리와 다른 종교가 됐지만은 매주 하지요 아마 이걸. 매주 그리하고. 그리하는데 어쨌든 그들은 교리가 틀려도 그런 것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어쨌든 성찬식은 주님 고난과 죽으심의 그 생애를 생각하는 것이고, 연구하는 겁니다. 또 기억하는 것, 되새기는 겁니다. 되새겨 생각해서 깨달아서 알고, 아는 가운데서 우리 자신들이 대속의 사람이 되게 하려는 이것이 궁극의 목적이다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찬식은 한말로 말하면 ‘대속을 기념하는 예식’이다 그말입니다. 성찬식은 예수님 대속을 기념하는 예식이다.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도 예수님 대속을, 이거는 표시하는, 대속에 동참하는 그런 표에 예식이다 그리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다음주 성찬식을 앞두고 지난주부터 말씀을 생각해보는 것은, 예수님 대속을 지금 계속해서 생각해보는 것이고, 대속을 생각한다 그말은, 대속은 죄와 연결이 되어있고, 죄는 사망의 형벌과 또 연결이 되어있는 것이고, 그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법하고 바로 연결이 되어져있기 때문에 지난 주간에 한주간동안 법에 대해서, 세상법을 함께 우리들이 살펴보면서,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윤곽적으로 그 원리를 한번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법과 연결해서 생각을 해봤습니다.
오늘은 주님 대속을 좀 오전에 이어서 오후에도 한번 더 생각해보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번 한주간 우리들의 생활은 좀 특별히 이면을 생각을 하고, 예수님의 대속에 동참하는, 고난과 죽으심에 동참하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우리들의 모든 생활을 평소와 좀 다르게 조심을 해서 고행주의적인 그런 생활까지는 하지를 않아도 평소보다 자신을 조금 단속을 하고 모든 생활과 언행심사와 대외관계를 삼가고 조심하고 좀 근신하며 자중하는 그런 한주간의 생활로 살았으면 합니다. 좀 요란스런 일이라든지, 좀 복잡한 그런 일을 잠시 좀 접어두고, 또 많이 웃고 떠드는 이런 일을 좀 자중하고 또 즐기는 그런 것을 좀 삼가고, 마음을 좀 무겁게 해서 모든 생활을 조심하는 그런 한주간이 되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대속의 은혜를 생각해봤습니다. 대속의 은혜를 3가지 면으로, 첫째, 대속이 뭐냐? 대속이 무엇인가? 대속이란 것은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글자들, 단어들을 국어사전적인 의미로 그대로 해석하지는 않아도, 국어사전에 설명된 이런 단어들이 다 성경에 그대로 인용이 되었고 이용이 되어져있기 때문에 많은 의미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국어라는 한국말을 만드신 분도 사람이 만들었고 세종대왕이 만들었다 그러나 들어가보면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고, 또 한자도 역시 사람들이 만들었지만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고, 히브리어, 헬라어만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고, 각 나라에 모든 언어는 들어가보면 전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아주 우리가 중요하게 참고할 수 있는 겁니다.
‘대속’이라 할때 그 ‘대’자는 ‘대신할 대’자, 대리한다 하는 그런 ‘대’자, 그다음 ‘속’자는 ‘속할 속’자인데 이거는 자기를 받쳐드려서 대신 구출한다는 그런 의미를 담은 ‘속’자입니다. 그래서 ‘대속’이라 말은, 그 의미가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받쳐서 우리를 구원하신 일, 이게 대속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받쳐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일이 바로 대속이다. 이게 대속이라는 글자의 의미고 뜻이다. 정의라고 말하기에는 좀 어떨지 모르겠으나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대속은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받쳐서 우리를 구원하신, 말하자면 받쳤다 말은, 당신을 대신 드렸다, 재물로 받쳤다 그 뜻이고, 당신을 받치므로 값을 대신 내셨다 그래서 속량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속량 받은 것이 되는 겁니다. 이게 대속입니다. 그 대속의 내용은 윤곽적으로 우리가 많이 배워 아는대로 대속의 내용은 사죄, 칭의, 화친, 소망인데, 사죄라는 것은 죄를 용서한 것인데, 일반적으로 죄 용서라 하나 그보다 더 강한 표현이 ‘사죄’고, 그 사죄는 단순히 죄 용서가 아니고 죄를 아예 도말해서 없애버린것이 사죄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모든 죄를 다 없애버렸는데 죄를 없애버리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무엇입니까? 죄를 없이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죄 없이 하는 방법은 형벌을 죄에 값인, 값을 내면 됩니다. 죗값은, 하나님 말씀을 어긴 죄의 값은 영원한 사망의 형벌이고 그 사망의 형벌, 죽음을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 죄를 없이 해 주신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죄 없는 자가 된 것이 사죄인데, 그 사죄는 대형을 근거로 한 겁니다. 대형을 하므로 사죄가 되어져서, 대형의 사죄고, 그다음 두 번째는 우리에게는 의가 없고,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다 이행할 수 없는 불완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되셔서 우리 대신에 하나님의 모든 법을 다 이행을 하신 이게 ‘대행’입니다. 우리 대신 하나님의 법을 다 행했다 그 뜻입니다. 그래서 그 대행을 우리를 대신해서 하셨으므로 그 의를 우리에게 입혀서 우리를 이제는 의가 없는 우리들, 원래 죄인이었던 우리를 죄를 다 벗겨내서 사죄 입히시고 그래서 죄없는 자를 만드시고, 그다음에 의가 없는데 주님이 대신 의를 만들어 행하시므로 의를 이루어서 그 의를 우리에게 입혀주셔서 우리가 의인되었기 때문에 의롭다고 하셨다, 의롭다고 불렀다는 의미로 ‘칭의’라 그러고, 그 칭의는 대행이 근거된 것이 칭의입니다. 그리고 대화친이라 말은, 죄가 있고 불의가 있으니까 하나님과 끊어져 원수가 된 우리를, 하나님과 원수가 됐던 우리를 주님이 십자가로 다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시켜주신, 말하자면은 하나님에게서 끊어져서 원수가 됐던 우리들인데 주님이 우리 대신에 하나님과 화목을 하시되 죽기까지 화친하신, 불목된 원수된 죄를 한편으로 값을 받으시면서 한편으로는 당신의 목숨 다 받쳐서 하나님과 화목을 놓지 아니한, 대화목 대화친의 이 공로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친한 하나님의 아들, 생명 가진 아들이 된 것이고, 그리고 여기까지 했으면 죄 없는 자 되었고 의로운 자 되었고 하나님 아들된 생명 가진 자가 되었으나 영원히 살아갈 그것을 가지고 실제 활동에서 살아갈 것은 없는 것인데, 주님이 죽으신 인성이 죽은 가운데서 다시 그 인성을 부활하는 그 인성을 입고, 그래서 영원히 사람의 몸을 입고 신인양성일위로 부활하신 그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산소망을, 영원한 산소망을 주신 것이 부활의 소망, 하나님을 향한 소망입니다. 이 네가지, 대형의 사죄, 두 번째는요? 대행의 칭의, 세 번째는요? 이런 단어들, 용어들을 기억을 하고 그다음 그 의미를 자꾸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연결시켜봐야 되고. 제일 첫째 뭡니까, 대속은? 대형의 사죄, 대행의 칭의, 대화친의 영생, 부활의 소망, 요 네가지가 예수님이 사활하심으로 주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입니다. 이 대속의 가치, 대속 역사의 의미, 중대성을 생각한다면 이거는 하나님 구원역사에 가장 중심이다. 대속 역사가 없으면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이 대속이란 그 속에 많은 것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대속은 하나님의 사랑의 집약이며 절정이다 그리 말할 수 있고, 기독교에는 대속이 전부다 할만큼 대속이 중요합니다.
대속 없는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없습니다. 대속 없는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없는 겁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우리’라는 그 속에 가장 중요하게 들어있는 것이 예수님의 대속입니다. 대속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를 수 있지, 대속이 없으면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안됩니다. 대속 없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도 없고, 대속 없는 성령과 진리도 없고, 대속 없는 구원도 없고, 대속 없는 믿음도 없고, 대속 없는 기도도 없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할 때, 예수님의 이름은 뭘 말합니까? 기도하실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요? 예수님의 이름은 뭘 말합니까? 예수님의 대속의 역사를 말하는 겁니다. 공로. 예수님 공로 의지하여, 그 공로는 대속의 공로고 그 대속의 공로가 몇 가지입니까? 나의 죄를 대형하신 대형의 사죄, 대행의 칭의, 대화친의 영생, 부활의 소망, 이 사활 대속의 공로를 의지해서, 이 공로가 있으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고, 이 공로가 있으니까 죄인이지만은 의인으로 설 수 있고,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있고, 이런 것이 있기 때문에 담대하게 기도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모든 역사, 구원의 모든 역사가 그 속에 다 들어있는게 대속입니다. 그래서 대속을 연구하는데, 구체적인 연구로 첫째 대속 연구할 때, 첫째 연구한 것이 뭐였습니까? 대속의 사랑을 연구해봤습니다. 대속의 사랑이라 그럴때, 대속의 사랑이라 그말은, 대속을 이룬 사랑, 대속 역사 공로 속에 들어간 하나님의 사랑 그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범죄한 것은 이거는 하나님의 예정 속에 들어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 속에 들어있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계획 속에 들어있는 인간의 범죄며 타락이며 모든 선악과며 마귀 미혹이며 사망이며 모든 그런 것들입니다. 인간은 원래부터 불완전하게 지음받았기 때문에 환전하신 하나님의 법을 다 지킬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법을 지키라 하셨고, 인간에게 그리 관계를 맺어놓으셨고, 그리고 예정 속에서 에덴동산에서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도록, 뱀을 보내도록, 따먹도록 미혹받도록 그리 되어져있었고 그래서 순서를 따라 선악과를 따먹었고, 따먹었으니까 영원히 사망을 했고, 사망했으니까 이제는 인간은 영원한 사망을 당했는데, 그 영원한 사망을 당한 거기서 구출하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되고,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되셔서 이 대속역사를 하셨는데, 이래 하는데는 자유성 가진 인간에게 그 자유성으로 하여금 하나남의 형상 닮은 인간의 자유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결과를 깨달아 알게 하시고, 실제 경험/체험을 하게 하심으로 스스로 깨달아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지 않을 수 있는, 그래서 법을 어기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은 자기가 스스로 생각해서 법을 어기지 못하는 면도 있고 한편으로는 법을 순종할게 있는 그런 좋은 것을 함께 우리에게 알려서 법을 어긴 사망의 멸망과 법을 순종한 영생복락의 이것을 양면을 같이 가르쳐가지고 인간 스스로 이 모든 것을 연구하고 생각하고 판단해서 어느 것이 복있는 길이며 가치 있는 길이며 사는 길이냐를 인간의 자유의지가 깨달아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을 금하고 법에 순종하는 이런 사람 만드시기 위해서 이런 모든 과정을 만든 것이고 거기에 중대하게 들어간 자본이 바로 도성인신, 사활의 대속 역사고 그 속에는 하나님의 한없는 희생이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이런 모든 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무한한 그 희생이 들어가야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이런 양면에 지식을 구비시켜야 인간이 영원토록 의문없이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런 존재가 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모든 과정을 하신 것이고 한없는 희생을 하신 것이고, 그 희생 배경에는 무한하신 사랑이 그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하는 겁니다.
논리적으로 좀 이해가 되셨습니까? 쉽지 않겠지만은 좀 생각해보십시다. 그래서 대속의 사랑이라는 그 사랑에는, 이 사랑을 연구할때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얼마나 높으신 분인지, ‘존귀’라 그말은 높고 귀하다는 뜻이지요. 존귀하신 분인지, 얼마나 그분이 영화롭고 영광스러운 분인지, 귀하다, 참 귀하다는 말이 있는데, 귀공자다, 귀한 그런 사람이다, 참 귀할수록 멸시천대 받는 것을 힘들어하고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귀하고 귀하신 그 하나님이 그 어리신 예수 눌 자리 없어 아름다우신 몸이 구유에 있는 그런 찬송처럼, 하나님은 참 높으신 분인데, 너무도 높으신 분인데, 인간에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가장 높은 지고에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낮아지셨고 가장 고귀한 그런 하나님이신데, 그분이 참 천하게 되셨고 가장 영화로운 그분인데, 그분이 천하게 돼서 멸시천대, 가난, 조롱, 이런 걸 다 감수하셨는데 우리는 사람이니까 인간 차원에서만 생각하니까 잘 실감이 없지만은 그래서 여러 가지 세상에서 저렇게 높은 사람이 저렇게 낮아지고, 저렇게 귀한 사람이 저렇게 되어지고. 일반적으로 보면은 존귀한 사람이 실패하든지 잘못되서 미끄러져 내려가면 불쌍하다 그럽니다. 참 불쌍하다, 비참하다 그리 말합니다. 실패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존귀한 사람이 스스로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어서 내려왔을때는 그것을 또 귀하게 그렇게 보는 그런 면도 없지 않는데,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그래도 결국 속에 들어가보면 높은 사람이 내려온다든지, 어떤 철학자가 있는데 그 철학자는 평생을 통해서 철학을 자기 본 천직으로 삼고 그렇게 연구를 평생 했답니다. 누구 뭐, 칸트? 어제 신문에 보니까 그 사람을 넘어서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면서 그리 했다 그러데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느 유명한 대학에 교수로 있으면서 다른 교수의 강의를 청강해서 듣기로 했다 그런답니다. 아주 유명한 교수가 동급에 있는 다른 교수, 어찌 보면 자기보다 못할 수 있는 그런 교수밑에 학생으로 배운다는 것은 이게 보통 마음으로는 어렵지요. 교수들, 제가 모르기는 모르겠습니다만은 굉장히 교만할거거든요, 교수라 그러면 가르치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굉장히 교만하고 자존심 세고 위신이 세고 체면이 강할건데 그거 다 던져버리고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서 배운다는 것이 쉽지 않지요. 그래서 그 사람의 부인이 하는 말이, 그의 모든 성품이나 하는 것이 아이같다 그런답니다. 우리 남편은 꼭 아이 같고 그렇다고 그런면이 있다 그러면서 그렇게 칭찬하고 그래 신문에 나왔던데, 그런것도 결국 자기가 낮아졌는데 그거는 자기 평생을 그래 살면서 자기대로의 뭔가 목적가지고 하는 것이지, 남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은 그것도 아니다 그말이지요. 사람이 부모가 자녀 위해서 낮아질 수 있고, 체면 자존심 벗어던질 수가 있고 희생할 수가 있지만은, 그것도 참 경우에 따라 쉬운일을 아닌데 그래도 한다 그러지만은, 형제만 되도 그리되기가 쉽지가 않을 것이고, 피가 한방울 섞이지 아니한 이웃을 위해서 내가 뭔가 희생한다는게 쉬운일이 아닌데, 어찌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우리의 주인이시니까 그리할 수 있다 그러지만은, 이게 사랑이 없으면은 그리 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사람이 내가 만든 어떤 물건을 위해서, 그걸 물건을 만들므로, 아니면 동물이나 식물을 내가 기르므로, 뭔가를 하므로 자기를 만족하기 위해서 애완견도 기르고, 새도 기르고, 고기도 기르고, 화초도 기르고 하는 것은 자기 만족을 위해서 거기 정성을 쏟는 것이지 진정 섞임없는 그 대상을 위해서 그리하지는 않을 것인데, 결국 들어가보면 전부 자기 만족인데, 하나님도 한편으로 보면 그런 것이 없지 않으나 그러나 성격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그말이지요. 그래서 그분은 당신이 만드신 우리들의 그 온전함을 위해서 우리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그 높고 귀하고 영화로운, 부요한 모든 것을 다 내놓고 낮아졌고 천해졌고 멸시 받았고 가난해진, 그리고 고난 받으신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도 무한인데, 몸으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이나 그거는 어찌보면 그거는 큰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도성인신 그게 큰 것이지, 그렇게 높은 분이 낮아지셨다는 것이 얼마나 크고 귀한 것인지, 이게 하나님의 대속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대속을 연구할때는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 분인지, 존귀하신 분인지, 영화로운 분인지, 크신 분인지 이걸 아는 만큼 그분이 낮아진 인간에게까지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게되는 것이고, 그렇게 귀한 분이 날 위해서 어떻게 되셨다는 이걸 생각을 하고, 그다음 그 효력이 어디까지 미쳐졌다는 그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가 어디까지 뻗쳐져있다는 이 세가지면으로 우리가 자꾸 생각을 하고 연구를 좀 해봐야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사랑에 감사하고 간격해서 대속의 사랑에 감동이 되어 사는 이것이 신앙생활에 가장 원동이 되는 것이고 피곤하지 않는 그런 생활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앙 생활에 가장 기본은, 가장 기본은 이 대속의 사랑을 깨달아 아는 겁니다. 하나님이 날 위해서 사람 되셨고, 가난해졌고 멸시 천대 받았고, 고난 받고 죽으셨다는 이 관계를 깨달아서 이 사랑에 감동된, 감격한 여기 감동되고 녹아져가지고 이 땅위에 사는 동안에 그분이 그렇게 하셨으니까 내가 낮아지지 못할 것이 뭐가 있으며, 내 자존심 세울 것이 뭐가 있으며, 내 체면이 그분앞에 뭐가 있으며, 내가 내놓지 못하고 손해 보지 못하고 희생 당하지 못할 물질이 뭐가 있으며 받쳐드리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 대속의 사랑 거기 감동되어서 자기 소유, 몸과 생명을 다 받쳐드리는 이것이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고, 이걸 깨달아서 신앙생활 하면은 그 신앙은 어디까지가도 피곤치 않을 수 있고, 가다가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고, 반사생활이든지 권찰일이든지 목회든지 인간구원에 모든 것이 다 여기서 나와야 됩니다. 그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그리 말씀하신건데 이게 주님이 가신 그걸음을 우리들이 걸어가는 생활이 되는거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그 대속의 사랑에 감격하고 감동되서 사는 것이 뭐하는 거라고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그런 생활이 되는 것이고 그게 바로 참된 양식이고 참된 음료가 되어지는 겁니다.
두 번째 대속의 범위는 어떤 분들 조금 생소하게 들렸을지 모르겠습니다, 오전에 말씀드릴때. 대속의 범위를 생각할 때 첫째 뭘 말씀드렸습니까? 말씀을 듣는 각도를 제가 좀 말씀을 드리는건데 오전예배때 대속의 범위를 생각하며 첫째 뭘 말했습니까? 인간의 모든 활동. 인간의 모든 활동은 세상으로 말하자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모든, 대개의 모든 생활이 다 무엇과 관련이 있다고요? 대한민국의 법하고 다 연관이 되어져있습니다. 다시말하면 법이란 것은, 자기 혼자 살면 마음대로 살아도 되지요. 자기 혼자 살면 법이란 것은 별로 크게, 자기 단속을 위해서 스스로 자기 혼자 법을 세운 것은 모르겠지만은 혼자 살면 법이란 것은 별, 사회법이란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사회라는 것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고 더불어 산다는 그런 뜻이지 않습니까? 그 속에, 사회속에 국가속에 법을 만들어놓은 것은, 그 법이란 것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나란 사람이 살 때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있다 그 뜻입니다. 그러면 내가 세상을 사는 것이 내가 사는데 나 혼자만 독불장군으로 살 수 없고, 내가 사는 모든 생활은 나 아닌 다른 사람들하고 모든 관계가 다 있는 생활이기 때문에 내가 말하고 행동하고 법으로 제정되어있습니다. 아파트 사시는 분들, 법이 정해졌지요 아마, 올해 법이 통과가 되었지요 그거 아마. 높은 층에서 콩콩 굴려서 낮은 층에 피해가 가면 낮은 층에서 우리 윗층에 시끄러워서 정신적, 물질적으로 피해입었으니까 배상해주십시오 하고 법원에 청구하면 윗층에서 벌금이 얼마던가요? 안들으셨습니까? 아파트 사시는 분들 아셔야 될 것 같은데요? 벌금이 팔십몇만원입니까? 팔십몇만원부터 이백몇십만원까지던가요? 그래 벌금이 정해져있습니다. 어지간하면 다 걸릴걸요 아차하면은. 그러니까 그것이 사람이란 것이 아파트 살면, 1층도 있고 2층도 있는데, 3층도 있는데 3층에 사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쿵쿵 하니까 2층에 사는 사람들이 시끄러워서 못살겠습니다. 밤에 세탁기를 돌리고 운동한다고 쿵쿵거리니까 잠은 못자겠습니다.’ 그러면 법을 딱 정해가지고, 그전까지는 법이 없었으니까 좀 자유로운데 ‘이제는 법이 정해졌으니까 3층 사는 당신만 사는 곳이 아니고 2층에 사람이 사는데 당신들 괜찮다고 쿵 굴리고 밤에 그렇게 시끄럽게 하면 아랫사람들이 잠을 못자지 않는가? 벌금을 내시오.’ 조심을 시키는 겁니다. 그게 법이고 인간관계라는 겁니다. 그러면 3층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가 3층에 살고, 내 집에서 내가 살고 내가 운동을 하고 내가 세탁기 살고 내가 사는게 2층에 무슨 상관이냐?’ ‘당신이 사는 곳이 산이면 괜찮고 들판이면 괜찮은데 당신 사는 그 밑에 사람이 가정, 사람이 살고 있으니까 당신이 사는 그 생활이 밑에 사람을 시끄럽게 만들어서 피해를 주니까 안된다 그말이고, 그게 법으로 제정하니까 범법이 되는 겁니다. 벌금을 내시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거의 모든 생활이 보면은 우리 나라의 법하고 연관없는 생활이 별로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우리 000선생님 어떻습니까? 생각해보셨습니까? 들으실만한 분이 들으셔야 되지요. 듣고 생각을 해보셔야지요. 삼성에도 전부 몰라도 삼성그룹안에 전부 법이 다 정해져있겠지요. 그러니까 말하자면은 이런 것이 인간 관계, 그래서 사람이 세상에 사는 것은, 사람이 세상에 사는 것은 자기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사는 모든 생활은 어찌 되었다고요? 나 아닌 다른 사람들, 혹은 다른 존재들 하고 다 부딪히게 되있다 말이지요. 관계를 다 맺고 있다 그말이지요. 좋은 관계든 나쁜 관계든,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선의로, 본의아니게 상관없이 그들에게 유익을 끼칠때도 많이 있고 해를 끼칠때도 많이 있는데 그게 너무 많으니까 세상 법적으로 다 일일이 제재를 다 못하고 간섭을 못하니까, 사람이 다 서로서로 그런것이니까 어느정도는 융통성을 두자, 그러나 너무 심하면 법으로 제재를 가해서 그렇게까지는 못하게 하자고 약속을 해놓은 것이 전부다 인간의 법이고, 그래서 가장 인간의 기본적인 양심으로 만든 것이 인간의 법이다 그리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법을 만드신 분이 바로, 세상 법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바로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걸 가지고 우리를 가르치는 것은 우리들의 모든 생활은 이 세상 법은 그래도 다 그래 놨으니까 얼마든지 그 법을 빠져나갈 수도 있고 법이 허용된 것도 있고, 또 서로 그러니까 제재 못하는것도 있겠지만은 문제는 하나님의 법이란 것은 하나님이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은 완전한 법이다, 이 법은 빈틈이 없다, 뭐가 없다고요? 빈틈이 없다 말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그말입니다. 그말은 다시 말하면 내가 태어나서부터, 무덤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나의 모든 심신의 활동전부는 단 하나도 빠짐없이 눈한번 깜빡이는 것까지 전부다가 하나님의 법하고 다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그 말은 다시 말하면 내가 알게 모르게 내 심신의 모든 움직임 전부는 전부다가 나 아닌 다른 객관의 존재들과 관계를 다 가지고 있고 그 모든 관계를 하나님의 법이다 심사를 하고 있고 마지막에는 그 법에 의해서 전부 낱낱이 심사해서 판단해서 보상할거는 보상을 하고 또 받을거는 받고, 이런 마지막에 살피는 그런 심판이 있는데, 그 심판을 가리켜서 만물 심판이라 그리 말합니다. 만물 심판. 모든 만물들이 그러니까 참 믿기 어려운 일이지요. 기독교의 모든 것은, 제가 어제도 설교록 교정을 보면서 기록된 내용이 그렇습니다. 백목사님 설교에, ‘성경이 믿어집니까?’ ‘믿어집니다’ ‘여러분들 영생이 믿어집니까?’ ‘믿어집니다.’ 새벽기도때 백목사님 뭐라 하신지 아십니까? 표현이 ‘미쳤구만’. 아닙니까? ‘영생이 믿어진다고?’ ‘믿어집니다.’ ‘모두 미쳤구만.’ ‘하늘에서 내리는 주사를 맞아서 약에 중독이 됐구만.’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게 믿어집니까?’ ‘믿어집니다.’ ‘하늘 주사를 맞아서 중독이 됐구만.’ 그게 아닌가요? 누가복음 17장 겨자씨믿음 말씀하실 때, ‘뽕나무야 뽑혀라’ 손도 안데고 기계고 안데고 말로 뽑혀라 그러니까 뽕나무가 쑥 뽑혀갖고, 바다까지 옮겨가서 뽕나무가 걸어가서 철철 흘러내려가는 물에 ‘심겨라’ 푹 심기고 그말이 믿어집니까? 그와 꼭 같은, 그보다 천배만배 더 말도 안되는 그런 사실이 수두룩하게 기록된 것이 성경인데 이 성경이 믿어진다고요? 모두 미쳤구만. 하늘 주사를 맞아 중독이 됐구만. 그렇지 않고는 믿어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이 믿어진다는 사실은 이 세상 사람들이 볼때는 정상은 분명 아닙니다. 설명을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것은 은혜며 선물이며 인간의 어떤 이론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기독교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당신을 택한 백성에게 믿음을 주지 않으시면 결단코 믿어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라 하는 겁니다. 이런것들이 가득찼는데 이제 말씀드리는 인간의 모든 평생에 나서부터 죽는날까지의 우리들의 모든 언행심사 전부 하나하나가 하나도 빠짐없이 그래서 기능구원을 자꾸 말할 때 인간의 세포조직 숫자를 자꾸 말하는 것이 수도없이 많은 무한은 아니로되, 무한에 가까울만큼 그 많은 세포조직 움직임 그 전부 하나하나 요소가 전부다가 다 존재 그걸 다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 움직임들 전부가 모든 존재와의 관계를 다 맺고 있는 것이고 그 모든 관계가 우리는 말없이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물도 마시고 밥도 먹고 온갖 것 다 먹는데 내게 입에 들어가는 음식물 하나하나 전부다가 내게 씹히면서 소화되면서 내 피와 살이 되면서 그게 전부다 자유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서 호소를 한다고 하는 그게 성경인데 그 모든 사실이 믿어지며,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가 그말입니다. 이게 사실이라고 그리 되어질때 인간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 수가 있겠습니까? 살아갈 수 있는, 그렇다면 그 모든 전부다 하나하나가 나한테 호소하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리 산다면 인간이 한발짝을 움직일 수 있겠으며, 발한번 움직이면 그 밑에 내가 밟는 땅에, 그 흙에 있는 그 모든 흙속에 있는 수많은 흙덩이들이, 모래 알갱이들이, 흙에 그 모든 알갱이들이 전부 나한테 ‘왜 나를 밟았냐’고 호소할건데, 평생을 통해서 밟고 다닌 그 흙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데. 내가 평생 마신 공기 숫자가 얼마나 많은데. 내가 평생 먹은 밥알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데. 그런것들이 전부다 나한테 호소한다고 그러면 이게 사실로 믿어지는 겁니까? 아니면 성경이 틀렸던지. 그러니까 이거는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고, 그래서 이런 무한의 모든 문제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완벽하게 영원 끝까지, 무한 끝까지 전부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래알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래알 하나만 우리들이 잘못해서 그것을 해를 끼쳐도 하나님 앞에 지공법에 의해서 정죄가 되는 것이고 그 정죄는 영원한 사망이 되는 것인데, 천번 만번 억만번 억억만번 사망하고도 남는 것이 인간의 사망인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모든 것을 전부다 주님이 대형하셔서 감당해서 그걸 다 갚았으니까 주님의 그 대형의 범위가 얼마나 넓으며 길이가 얼마나 길며, 깊이가 얼마나 깊으며 얼마나 세밀하게까지 뻗어가있으며, 그러기 때문에 천년만년 억억만년 가도 그 대속은 거기까지 뻗어있고, 천억만년가도 대속의 역사는 거기까지 뻗어있고, 거기까지 우리들이 미쳐서 하나님의 지공 지성법에 정죄받아서 떨어질 우리들을 거기까지 또 미쳐서 대속의 공로가 거기까지도 효력이 미쳐있고. 그래서 대속의 범위는 무한하다 하는 겁니다.
자, 이 말씀이 논리적으로, 000샘? 내일 입대를 해야되는데, 논리적으로 이해가 됩니까? 논리적으로 이것이 일단 믿어지고 안 믿어지고는 그 다음이고, 논리적으로 성경을 근거해서 이것이 이해가 되고, 그리고 난다음에 생각해보면 참, 기가 찬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게 대속의 범위다. 그래서 우리들의 모든 언행심사, 인간의 모든 언행심사의 활동에 무한에 가까운 것. 하나님의 지공 지성법하고 막바로 연결이 되어져서 인간의 모든 움직임 하나하나 전부다를 하나님의 지공 지성법이 낱낱이 살펴서 심사를 다해서 보응과 보상을 하신다는 것. 그러므로 인간은 결코 벗어날 수가 없는데 이 모든 것은 주님의 대속이 완벽하게 다 해결해주셨다는 것. 이게 주님의 대속의 범위입니다. 얼마나 큰지. 그리고 세 번째는 이 대속으로 주신 소망이, 대속의 공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아들이 된 것이고, 대속의 역사 공로가 있기 때문에 영생을 하게 된 것이고 대속의 공로가 있기 때문에 영계와 우주 전부를 다 상속받아 나의 영원한 활동무대로, 사람이 감옥에 갇히면 괴롭습니다. 왜 괴롭습니까? 감옥에 들어가면 추운 겨울에 감옥에 들어가면 공짜로 밥 주지요, 따뜻하게 보일러 피워서 따뜻하게 요즘 감옥은 워낙 좋아서. 겨울에 괴로운 사람들은 일부러 도적질 하고, 왜 도적질 했습니까? 감옥 가고 싶어서. 감옥이 뭐가 좋아서? 감옥 가면 따뜻하게 해주지요, 밥 주지요, 운동 시켜 주지요, 텔레비전 보여주지요, 힘들게 일 안해도 되지요. 감옥이 좋은데. 그런데 왜 사람들 감옥을 싫어합니까? 감옥의 의미는 뭡니까? 000선생님 아주 예배를 잘보는데, 감옥의 의미가 뭐지요? 크게? 갇혀있다는 말을 좀 더 풀면? 자유가 없는 것. 감옥의 의미는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자유가 없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감옥에 갇혔는데 왜 자유가 없습니까? 감옥에서 얼마든지 생각해도 되고, 텔레비전 봐도 되고 할 수 있는데. 자유의 활동이 제한을 받는 겁니다. 공간이 제한을 받아서. 나가고 싶은데 감옥에 있으니까 못 나가는 거지요. 넓은 운동장 가고 싶은데 안돼. 바닷가 가고 싶은데 안돼. 너는 여기 안에만 있어야 돼. 갇혀있는 겁니다. 활동의 제한. 감옥에 안가도 감옥 갇힌 사람 많습니다. 미국 가면은 여기 계신 많은 분들, 미국 가면은 눈이 있어도 소경이고,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고, 입이 있어도 벙어리고. 왜 그렇습니까? 영어를 못하니까. 그게 활동의 제한입니다. 어디든지 돌아다니지만은 돌아다니고 싶어도 이거 뭐 어디 가는 차인지, 벌로 돌아다니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연세 많은 분들이 돈 많은 아들 딸들이 성공해서 모시겠습니다 하고 미국에 모셔가도 ‘아이고 나는 여기 감옥이다, 우리 고향 가서 살련다’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그 좋은 나라, 미국 데려다 놔도 감옥생활이니까 차라리 우리 고향 시골 거기 가서 사는게 낫지 그 좋은 미국에 못 살겠다. 그게 하나의 감옥입니다.
천국 감옥. 그런데 그것이 뭐냐? 자기 활동 무대가 없는 겁니다. 왜 무대가 없습니까? 천국에서 하나님께서 마음껏 천국은 우주와 영계 통일된 그 나라니까, 마음껏 돌아다니고 마음껏 활동하고 마음껏 살아라, 그런데 할 줄 알아야지요. 갈 줄 알아야지요. 어디있는지 붙어있는지 모르겠는데. 활동성이 없는 사람들은 그런게 있지요. 저도 활동성이 별로 없어서 부산에 살아도 항상 있던데만 있으니까 어디가 어딘지 딴 동네 가보면 여기가 어딘지도 모릅니다. 동래쪽에 가면은 여기가 어디지? 그만 길을 헤맵니다. 해운대 가도 그렇고, 태종대 가도 그렇고. 그러니까 윤곽적으로는 알지만은, 다니는데는 아는데 안다녀본데는 모르는 겁니다. 자기가 안 해본 것, 이 땅에서 마련하지 않은 그거는 천국에 가도, 영계와 우주니까 얼마나 넓겠습니까마는, 세상에서 전부 홍포 입은 부자처럼 자기 중심으로만 살았고 땅에것만 보고 살았으니까 너를 위해서만 살았으니까, 천국에는 전부 다른 사람에게 주는 나라인데, 시은의 실력이 천국 실력인데. 같이 해보실까요? ‘시은의 실력’. 시은이 무슨 뜻입니까? 은혜를 베푼다 그뜻이지요? 그 나라는 은혜 베푸는 나라가 그 나라 실력인데 땅 위에 사는 동안 평생을 통해서 제것으로만 살았고 저를 위해 살았지, 남 위해서 한번도 살아보지 않았으니까, 천국 가서 마음껏 살아라 그러는데 땅위에서 한번 줘봤어야지요. 그러니까 천국 갔지만은 딱 갇혀 감옥에 살아야 되고 남에게 받아 먹고만 살아야 되고. 받아먹는 사람, 얻어먹는 사람을 거지라 그러지요. 그러니까 영계와 우주를 우리에게 주셨으나 이땅위에서 잘못살면 그것도 참, 가기만 하지 활동이 없는. 그런데 주님의 대속의 공로를 근거해서 얼마든지 그 나라를 자기 나라 삼을 수 있는 이런 모든 기반을 닦아주신게 주님의 대속입니다. 이 대속의 사랑과 본의와 그 소망이 어떠한지를 평생을 통해서 생각을 하고 연구하고 이 대속 속에 빠져 사는 사람이 참성도들이고 그런 성도들 더러더러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피곤하지 않고 아깝지 않고 달려가는 겁니다.
그다음 크게 하나 더 말하면, 대속의 보증이 있으니 이 대속을 우리에게 이 대속이 어떤 대속이며 이 대속을 우리에게 알려주며 책임지고 우리에게 알리시고 입혀주는 그 역사가 있으니까 그게 둘인데, 하나는 진리고 하나는 영감이다 성령이다. 그래서 진리는 하나님 말씀인데, 독자적인 권능을 가져서 우주 전부를 다 창조하신 그 진리가 우리에게 주님 대속을 증거하고 있고, 그 진리가 우리를 주님 대속으로 인도하고 있고, 우리로 하여금 그 대속을 입고 살게 하고 성령이 진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대속을 알려주고 있고 우리로 하여금 그 대속을 입고 살게 하는 이런 역사를 하고 있는, 그래서 주님의 대속과 그 대속을 보증하는 성령과 진리가 함께 있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대속을 기념하는 사람으로 살아야되는데 대속을 기념하는 것은 네가지로 생각해봤습니다. 대속을 기념한다 말은,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기념하라. 기념은 과거에 있었던 일을 한번 더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이고 계승해나가는 것인데, 대속을 기념하는 것은 첫째, 대속에 대해서 아는 겁니다. 대속의 사랑을 알고, 대속의 범위를 알고 소망을 아는 것. 두 번째는 이 대속을 나만 알 것이 아니고 전하여 알리는 겁니다. 입으로 전하여 알리고, 또 내 모든 생활로 알리는 겁니다. 세 번째는 대속의 사람으로 사는 겁니다. 내가 대속의 사람이 되는 것이고, 하나 더 말하면 대속의 사람을 만드는 겁니다. 이것이 대속을 전하는 것이고 기념하는 겁니다. 이 대속을 깨달아서 알고, 그다음 알리고, 대속으로 살아 대속의 사람이 되고, 대속의 사람을 만들어나가는 이것이 대속을 기념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이 대속을 기념하는 이 생활 속에 필연적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대속을 기념하는 생활에 반드시 들어가는 것, 대속을 기념한다 그말은 대속을, 주님이 만드신 대속을 나도 그와같이 내가 새로 만드는 건 아닌데 그 대속을 근거해서 내게 분량된 대속을 만드는 것인데 그 대속을 만드는데 반드시 들어가야 될 한 역사, 요소 무엇입니까? 그정도 했으면 알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이지요? 주님이 대속을 완성했는데 그 완성은 뭘로 완성했습니까? 대속의 완성은 십자가로 완성을 한겁니다, 십자가. 당신의 모든 것 다 받친 십자가. 우리에게도 이 대속을 기념하는 생활에는 반드시 들어가는 요소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진리 구원을 위해서 내가 녹아지는 것이고 희생하는 것이고 죽어지는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내 챙길 것 다 챙기고 내 이익 다 챙기고, 내 자존심 위신 체면 내 욕심 다 챙기고는 대속을 결코 기념할 수가 없는 겁니다. 내가 손해보지 않으면, 내가 낮아지지 않으면, 내가 죽어지지 않으면 대속은 기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주님의 떡을 먹으면서, 잔을 마시면서 대속을 기념하라 그말은 더욱 더 주님 대속을 기념하기 위해서 내가 더 낮아져야 되겠다, 더 희생해야 되겠다, 더 죽어야 되겠다, 더 꺾어야 되겠다 이게 기본적으로 그 속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이걸 기억하면서 예수님 대속을 알고 성찬을 준비하는 한주가 되도록 하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논리적으로 먼저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대속이 뭐냐, 대속의 의미. 대속의 내용. 그 대속이 어디까지 뻗어가있는가. 대속의 사랑, 대속의 범위. 대속의 소망. 대속의 보증, 대속의 기념 이런 것들을 말씀드린 걸 근거해서 좀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제목: 예수님의 대속
(설교원문)
20140223 주후
고린도전서 11:23-26
성찬식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성찬식에 먹는 떡과 잔은 예수님의 몸, 다시 말하면 고난의 생애와 예수님의 피, 죽으심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것을 먹고 마심으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의 그 근본을 파고 들어가서 그 원인과 과정과 또 맺어진 결과까지를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생각하고 연구해보고 그것을 아는 가운데서 감사하고 찬양하고 그 대속을 강직하는 이런 생활을 하며 그 대속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이런 기념예식을 하게 되는 겁니다. 어떤 교회들은 성찬식을 1년에 몇 번하는 교회도 있고, 천주교는 아마 우리와 다른 종교가 됐지만은 매주 하지요 아마 이걸. 매주 그리하고. 그리하는데 어쨌든 그들은 교리가 틀려도 그런 것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어쨌든 성찬식은 주님 고난과 죽으심의 그 생애를 생각하는 것이고, 연구하는 겁니다. 또 기억하는 것, 되새기는 겁니다. 되새겨 생각해서 깨달아서 알고, 아는 가운데서 우리 자신들이 대속의 사람이 되게 하려는 이것이 궁극의 목적이다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찬식은 한말로 말하면 ‘대속을 기념하는 예식’이다 그말입니다. 성찬식은 예수님 대속을 기념하는 예식이다.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도 예수님 대속을, 이거는 표시하는, 대속에 동참하는 그런 표에 예식이다 그리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다음주 성찬식을 앞두고 지난주부터 말씀을 생각해보는 것은, 예수님 대속을 지금 계속해서 생각해보는 것이고, 대속을 생각한다 그말은, 대속은 죄와 연결이 되어있고, 죄는 사망의 형벌과 또 연결이 되어있는 것이고, 그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법하고 바로 연결이 되어져있기 때문에 지난 주간에 한주간동안 법에 대해서, 세상법을 함께 우리들이 살펴보면서,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윤곽적으로 그 원리를 한번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법과 연결해서 생각을 해봤습니다.
오늘은 주님 대속을 좀 오전에 이어서 오후에도 한번 더 생각해보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번 한주간 우리들의 생활은 좀 특별히 이면을 생각을 하고, 예수님의 대속에 동참하는, 고난과 죽으심에 동참하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우리들의 모든 생활을 평소와 좀 다르게 조심을 해서 고행주의적인 그런 생활까지는 하지를 않아도 평소보다 자신을 조금 단속을 하고 모든 생활과 언행심사와 대외관계를 삼가고 조심하고 좀 근신하며 자중하는 그런 한주간의 생활로 살았으면 합니다. 좀 요란스런 일이라든지, 좀 복잡한 그런 일을 잠시 좀 접어두고, 또 많이 웃고 떠드는 이런 일을 좀 자중하고 또 즐기는 그런 것을 좀 삼가고, 마음을 좀 무겁게 해서 모든 생활을 조심하는 그런 한주간이 되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대속의 은혜를 생각해봤습니다. 대속의 은혜를 3가지 면으로, 첫째, 대속이 뭐냐? 대속이 무엇인가? 대속이란 것은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글자들, 단어들을 국어사전적인 의미로 그대로 해석하지는 않아도, 국어사전에 설명된 이런 단어들이 다 성경에 그대로 인용이 되었고 이용이 되어져있기 때문에 많은 의미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국어라는 한국말을 만드신 분도 사람이 만들었고 세종대왕이 만들었다 그러나 들어가보면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고, 또 한자도 역시 사람들이 만들었지만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고, 히브리어, 헬라어만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고, 각 나라에 모든 언어는 들어가보면 전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아주 우리가 중요하게 참고할 수 있는 겁니다.
‘대속’이라 할때 그 ‘대’자는 ‘대신할 대’자, 대리한다 하는 그런 ‘대’자, 그다음 ‘속’자는 ‘속할 속’자인데 이거는 자기를 받쳐드려서 대신 구출한다는 그런 의미를 담은 ‘속’자입니다. 그래서 ‘대속’이라 말은, 그 의미가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받쳐서 우리를 구원하신 일, 이게 대속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받쳐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일이 바로 대속이다. 이게 대속이라는 글자의 의미고 뜻이다. 정의라고 말하기에는 좀 어떨지 모르겠으나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대속은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받쳐서 우리를 구원하신, 말하자면 받쳤다 말은, 당신을 대신 드렸다, 재물로 받쳤다 그 뜻이고, 당신을 받치므로 값을 대신 내셨다 그래서 속량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속량 받은 것이 되는 겁니다. 이게 대속입니다. 그 대속의 내용은 윤곽적으로 우리가 많이 배워 아는대로 대속의 내용은 사죄, 칭의, 화친, 소망인데, 사죄라는 것은 죄를 용서한 것인데, 일반적으로 죄 용서라 하나 그보다 더 강한 표현이 ‘사죄’고, 그 사죄는 단순히 죄 용서가 아니고 죄를 아예 도말해서 없애버린것이 사죄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모든 죄를 다 없애버렸는데 죄를 없애버리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무엇입니까? 죄를 없이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죄 없이 하는 방법은 형벌을 죄에 값인, 값을 내면 됩니다. 죗값은, 하나님 말씀을 어긴 죄의 값은 영원한 사망의 형벌이고 그 사망의 형벌, 죽음을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 죄를 없이 해 주신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죄 없는 자가 된 것이 사죄인데, 그 사죄는 대형을 근거로 한 겁니다. 대형을 하므로 사죄가 되어져서, 대형의 사죄고, 그다음 두 번째는 우리에게는 의가 없고,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다 이행할 수 없는 불완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되셔서 우리 대신에 하나님의 모든 법을 다 이행을 하신 이게 ‘대행’입니다. 우리 대신 하나님의 법을 다 행했다 그 뜻입니다. 그래서 그 대행을 우리를 대신해서 하셨으므로 그 의를 우리에게 입혀서 우리를 이제는 의가 없는 우리들, 원래 죄인이었던 우리를 죄를 다 벗겨내서 사죄 입히시고 그래서 죄없는 자를 만드시고, 그다음에 의가 없는데 주님이 대신 의를 만들어 행하시므로 의를 이루어서 그 의를 우리에게 입혀주셔서 우리가 의인되었기 때문에 의롭다고 하셨다, 의롭다고 불렀다는 의미로 ‘칭의’라 그러고, 그 칭의는 대행이 근거된 것이 칭의입니다. 그리고 대화친이라 말은, 죄가 있고 불의가 있으니까 하나님과 끊어져 원수가 된 우리를, 하나님과 원수가 됐던 우리를 주님이 십자가로 다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시켜주신, 말하자면은 하나님에게서 끊어져서 원수가 됐던 우리들인데 주님이 우리 대신에 하나님과 화목을 하시되 죽기까지 화친하신, 불목된 원수된 죄를 한편으로 값을 받으시면서 한편으로는 당신의 목숨 다 받쳐서 하나님과 화목을 놓지 아니한, 대화목 대화친의 이 공로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친한 하나님의 아들, 생명 가진 아들이 된 것이고, 그리고 여기까지 했으면 죄 없는 자 되었고 의로운 자 되었고 하나님 아들된 생명 가진 자가 되었으나 영원히 살아갈 그것을 가지고 실제 활동에서 살아갈 것은 없는 것인데, 주님이 죽으신 인성이 죽은 가운데서 다시 그 인성을 부활하는 그 인성을 입고, 그래서 영원히 사람의 몸을 입고 신인양성일위로 부활하신 그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산소망을, 영원한 산소망을 주신 것이 부활의 소망, 하나님을 향한 소망입니다. 이 네가지, 대형의 사죄, 두 번째는요? 대행의 칭의, 세 번째는요? 이런 단어들, 용어들을 기억을 하고 그다음 그 의미를 자꾸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연결시켜봐야 되고. 제일 첫째 뭡니까, 대속은? 대형의 사죄, 대행의 칭의, 대화친의 영생, 부활의 소망, 요 네가지가 예수님이 사활하심으로 주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입니다. 이 대속의 가치, 대속 역사의 의미, 중대성을 생각한다면 이거는 하나님 구원역사에 가장 중심이다. 대속 역사가 없으면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이 대속이란 그 속에 많은 것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대속은 하나님의 사랑의 집약이며 절정이다 그리 말할 수 있고, 기독교에는 대속이 전부다 할만큼 대속이 중요합니다.
대속 없는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없습니다. 대속 없는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없는 겁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우리’라는 그 속에 가장 중요하게 들어있는 것이 예수님의 대속입니다. 대속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를 수 있지, 대속이 없으면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안됩니다. 대속 없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도 없고, 대속 없는 성령과 진리도 없고, 대속 없는 구원도 없고, 대속 없는 믿음도 없고, 대속 없는 기도도 없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할 때, 예수님의 이름은 뭘 말합니까? 기도하실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요? 예수님의 이름은 뭘 말합니까? 예수님의 대속의 역사를 말하는 겁니다. 공로. 예수님 공로 의지하여, 그 공로는 대속의 공로고 그 대속의 공로가 몇 가지입니까? 나의 죄를 대형하신 대형의 사죄, 대행의 칭의, 대화친의 영생, 부활의 소망, 이 사활 대속의 공로를 의지해서, 이 공로가 있으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고, 이 공로가 있으니까 죄인이지만은 의인으로 설 수 있고,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있고, 이런 것이 있기 때문에 담대하게 기도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모든 역사, 구원의 모든 역사가 그 속에 다 들어있는게 대속입니다. 그래서 대속을 연구하는데, 구체적인 연구로 첫째 대속 연구할 때, 첫째 연구한 것이 뭐였습니까? 대속의 사랑을 연구해봤습니다. 대속의 사랑이라 그럴때, 대속의 사랑이라 그말은, 대속을 이룬 사랑, 대속 역사 공로 속에 들어간 하나님의 사랑 그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범죄한 것은 이거는 하나님의 예정 속에 들어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 속에 들어있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계획 속에 들어있는 인간의 범죄며 타락이며 모든 선악과며 마귀 미혹이며 사망이며 모든 그런 것들입니다. 인간은 원래부터 불완전하게 지음받았기 때문에 환전하신 하나님의 법을 다 지킬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법을 지키라 하셨고, 인간에게 그리 관계를 맺어놓으셨고, 그리고 예정 속에서 에덴동산에서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도록, 뱀을 보내도록, 따먹도록 미혹받도록 그리 되어져있었고 그래서 순서를 따라 선악과를 따먹었고, 따먹었으니까 영원히 사망을 했고, 사망했으니까 이제는 인간은 영원한 사망을 당했는데, 그 영원한 사망을 당한 거기서 구출하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되고,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되셔서 이 대속역사를 하셨는데, 이래 하는데는 자유성 가진 인간에게 그 자유성으로 하여금 하나남의 형상 닮은 인간의 자유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결과를 깨달아 알게 하시고, 실제 경험/체험을 하게 하심으로 스스로 깨달아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지 않을 수 있는, 그래서 법을 어기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은 자기가 스스로 생각해서 법을 어기지 못하는 면도 있고 한편으로는 법을 순종할게 있는 그런 좋은 것을 함께 우리에게 알려서 법을 어긴 사망의 멸망과 법을 순종한 영생복락의 이것을 양면을 같이 가르쳐가지고 인간 스스로 이 모든 것을 연구하고 생각하고 판단해서 어느 것이 복있는 길이며 가치 있는 길이며 사는 길이냐를 인간의 자유의지가 깨달아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을 금하고 법에 순종하는 이런 사람 만드시기 위해서 이런 모든 과정을 만든 것이고 거기에 중대하게 들어간 자본이 바로 도성인신, 사활의 대속 역사고 그 속에는 하나님의 한없는 희생이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이런 모든 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무한한 그 희생이 들어가야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이런 양면에 지식을 구비시켜야 인간이 영원토록 의문없이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런 존재가 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모든 과정을 하신 것이고 한없는 희생을 하신 것이고, 그 희생 배경에는 무한하신 사랑이 그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하는 겁니다.
논리적으로 좀 이해가 되셨습니까? 쉽지 않겠지만은 좀 생각해보십시다. 그래서 대속의 사랑이라는 그 사랑에는, 이 사랑을 연구할때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얼마나 높으신 분인지, ‘존귀’라 그말은 높고 귀하다는 뜻이지요. 존귀하신 분인지, 얼마나 그분이 영화롭고 영광스러운 분인지, 귀하다, 참 귀하다는 말이 있는데, 귀공자다, 귀한 그런 사람이다, 참 귀할수록 멸시천대 받는 것을 힘들어하고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귀하고 귀하신 그 하나님이 그 어리신 예수 눌 자리 없어 아름다우신 몸이 구유에 있는 그런 찬송처럼, 하나님은 참 높으신 분인데, 너무도 높으신 분인데, 인간에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가장 높은 지고에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낮아지셨고 가장 고귀한 그런 하나님이신데, 그분이 참 천하게 되셨고 가장 영화로운 그분인데, 그분이 천하게 돼서 멸시천대, 가난, 조롱, 이런 걸 다 감수하셨는데 우리는 사람이니까 인간 차원에서만 생각하니까 잘 실감이 없지만은 그래서 여러 가지 세상에서 저렇게 높은 사람이 저렇게 낮아지고, 저렇게 귀한 사람이 저렇게 되어지고. 일반적으로 보면은 존귀한 사람이 실패하든지 잘못되서 미끄러져 내려가면 불쌍하다 그럽니다. 참 불쌍하다, 비참하다 그리 말합니다. 실패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존귀한 사람이 스스로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어서 내려왔을때는 그것을 또 귀하게 그렇게 보는 그런 면도 없지 않는데,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그래도 결국 속에 들어가보면 높은 사람이 내려온다든지, 어떤 철학자가 있는데 그 철학자는 평생을 통해서 철학을 자기 본 천직으로 삼고 그렇게 연구를 평생 했답니다. 누구 뭐, 칸트? 어제 신문에 보니까 그 사람을 넘어서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면서 그리 했다 그러데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느 유명한 대학에 교수로 있으면서 다른 교수의 강의를 청강해서 듣기로 했다 그런답니다. 아주 유명한 교수가 동급에 있는 다른 교수, 어찌 보면 자기보다 못할 수 있는 그런 교수밑에 학생으로 배운다는 것은 이게 보통 마음으로는 어렵지요. 교수들, 제가 모르기는 모르겠습니다만은 굉장히 교만할거거든요, 교수라 그러면 가르치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굉장히 교만하고 자존심 세고 위신이 세고 체면이 강할건데 그거 다 던져버리고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서 배운다는 것이 쉽지 않지요. 그래서 그 사람의 부인이 하는 말이, 그의 모든 성품이나 하는 것이 아이같다 그런답니다. 우리 남편은 꼭 아이 같고 그렇다고 그런면이 있다 그러면서 그렇게 칭찬하고 그래 신문에 나왔던데, 그런것도 결국 자기가 낮아졌는데 그거는 자기 평생을 그래 살면서 자기대로의 뭔가 목적가지고 하는 것이지, 남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은 그것도 아니다 그말이지요. 사람이 부모가 자녀 위해서 낮아질 수 있고, 체면 자존심 벗어던질 수가 있고 희생할 수가 있지만은, 그것도 참 경우에 따라 쉬운일을 아닌데 그래도 한다 그러지만은, 형제만 되도 그리되기가 쉽지가 않을 것이고, 피가 한방울 섞이지 아니한 이웃을 위해서 내가 뭔가 희생한다는게 쉬운일이 아닌데, 어찌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우리의 주인이시니까 그리할 수 있다 그러지만은, 이게 사랑이 없으면은 그리 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사람이 내가 만든 어떤 물건을 위해서, 그걸 물건을 만들므로, 아니면 동물이나 식물을 내가 기르므로, 뭔가를 하므로 자기를 만족하기 위해서 애완견도 기르고, 새도 기르고, 고기도 기르고, 화초도 기르고 하는 것은 자기 만족을 위해서 거기 정성을 쏟는 것이지 진정 섞임없는 그 대상을 위해서 그리하지는 않을 것인데, 결국 들어가보면 전부 자기 만족인데, 하나님도 한편으로 보면 그런 것이 없지 않으나 그러나 성격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그말이지요. 그래서 그분은 당신이 만드신 우리들의 그 온전함을 위해서 우리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그 높고 귀하고 영화로운, 부요한 모든 것을 다 내놓고 낮아졌고 천해졌고 멸시 받았고 가난해진, 그리고 고난 받으신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도 무한인데, 몸으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이나 그거는 어찌보면 그거는 큰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도성인신 그게 큰 것이지, 그렇게 높은 분이 낮아지셨다는 것이 얼마나 크고 귀한 것인지, 이게 하나님의 대속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대속을 연구할때는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 분인지, 존귀하신 분인지, 영화로운 분인지, 크신 분인지 이걸 아는 만큼 그분이 낮아진 인간에게까지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게되는 것이고, 그렇게 귀한 분이 날 위해서 어떻게 되셨다는 이걸 생각을 하고, 그다음 그 효력이 어디까지 미쳐졌다는 그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가 어디까지 뻗쳐져있다는 이 세가지면으로 우리가 자꾸 생각을 하고 연구를 좀 해봐야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사랑에 감사하고 간격해서 대속의 사랑에 감동이 되어 사는 이것이 신앙생활에 가장 원동이 되는 것이고 피곤하지 않는 그런 생활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앙 생활에 가장 기본은, 가장 기본은 이 대속의 사랑을 깨달아 아는 겁니다. 하나님이 날 위해서 사람 되셨고, 가난해졌고 멸시 천대 받았고, 고난 받고 죽으셨다는 이 관계를 깨달아서 이 사랑에 감동된, 감격한 여기 감동되고 녹아져가지고 이 땅위에 사는 동안에 그분이 그렇게 하셨으니까 내가 낮아지지 못할 것이 뭐가 있으며, 내 자존심 세울 것이 뭐가 있으며, 내 체면이 그분앞에 뭐가 있으며, 내가 내놓지 못하고 손해 보지 못하고 희생 당하지 못할 물질이 뭐가 있으며 받쳐드리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 대속의 사랑 거기 감동되어서 자기 소유, 몸과 생명을 다 받쳐드리는 이것이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고, 이걸 깨달아서 신앙생활 하면은 그 신앙은 어디까지가도 피곤치 않을 수 있고, 가다가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고, 반사생활이든지 권찰일이든지 목회든지 인간구원에 모든 것이 다 여기서 나와야 됩니다. 그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그리 말씀하신건데 이게 주님이 가신 그걸음을 우리들이 걸어가는 생활이 되는거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그 대속의 사랑에 감격하고 감동되서 사는 것이 뭐하는 거라고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그런 생활이 되는 것이고 그게 바로 참된 양식이고 참된 음료가 되어지는 겁니다.
두 번째 대속의 범위는 어떤 분들 조금 생소하게 들렸을지 모르겠습니다, 오전에 말씀드릴때. 대속의 범위를 생각할 때 첫째 뭘 말씀드렸습니까? 말씀을 듣는 각도를 제가 좀 말씀을 드리는건데 오전예배때 대속의 범위를 생각하며 첫째 뭘 말했습니까? 인간의 모든 활동. 인간의 모든 활동은 세상으로 말하자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모든, 대개의 모든 생활이 다 무엇과 관련이 있다고요? 대한민국의 법하고 다 연관이 되어져있습니다. 다시말하면 법이란 것은, 자기 혼자 살면 마음대로 살아도 되지요. 자기 혼자 살면 법이란 것은 별로 크게, 자기 단속을 위해서 스스로 자기 혼자 법을 세운 것은 모르겠지만은 혼자 살면 법이란 것은 별, 사회법이란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사회라는 것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고 더불어 산다는 그런 뜻이지 않습니까? 그 속에, 사회속에 국가속에 법을 만들어놓은 것은, 그 법이란 것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나란 사람이 살 때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있다 그 뜻입니다. 그러면 내가 세상을 사는 것이 내가 사는데 나 혼자만 독불장군으로 살 수 없고, 내가 사는 모든 생활은 나 아닌 다른 사람들하고 모든 관계가 다 있는 생활이기 때문에 내가 말하고 행동하고 법으로 제정되어있습니다. 아파트 사시는 분들, 법이 정해졌지요 아마, 올해 법이 통과가 되었지요 그거 아마. 높은 층에서 콩콩 굴려서 낮은 층에 피해가 가면 낮은 층에서 우리 윗층에 시끄러워서 정신적, 물질적으로 피해입었으니까 배상해주십시오 하고 법원에 청구하면 윗층에서 벌금이 얼마던가요? 안들으셨습니까? 아파트 사시는 분들 아셔야 될 것 같은데요? 벌금이 팔십몇만원입니까? 팔십몇만원부터 이백몇십만원까지던가요? 그래 벌금이 정해져있습니다. 어지간하면 다 걸릴걸요 아차하면은. 그러니까 그것이 사람이란 것이 아파트 살면, 1층도 있고 2층도 있는데, 3층도 있는데 3층에 사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쿵쿵 하니까 2층에 사는 사람들이 시끄러워서 못살겠습니다. 밤에 세탁기를 돌리고 운동한다고 쿵쿵거리니까 잠은 못자겠습니다.’ 그러면 법을 딱 정해가지고, 그전까지는 법이 없었으니까 좀 자유로운데 ‘이제는 법이 정해졌으니까 3층 사는 당신만 사는 곳이 아니고 2층에 사람이 사는데 당신들 괜찮다고 쿵 굴리고 밤에 그렇게 시끄럽게 하면 아랫사람들이 잠을 못자지 않는가? 벌금을 내시오.’ 조심을 시키는 겁니다. 그게 법이고 인간관계라는 겁니다. 그러면 3층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가 3층에 살고, 내 집에서 내가 살고 내가 운동을 하고 내가 세탁기 살고 내가 사는게 2층에 무슨 상관이냐?’ ‘당신이 사는 곳이 산이면 괜찮고 들판이면 괜찮은데 당신 사는 그 밑에 사람이 가정, 사람이 살고 있으니까 당신이 사는 그 생활이 밑에 사람을 시끄럽게 만들어서 피해를 주니까 안된다 그말이고, 그게 법으로 제정하니까 범법이 되는 겁니다. 벌금을 내시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거의 모든 생활이 보면은 우리 나라의 법하고 연관없는 생활이 별로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우리 000선생님 어떻습니까? 생각해보셨습니까? 들으실만한 분이 들으셔야 되지요. 듣고 생각을 해보셔야지요. 삼성에도 전부 몰라도 삼성그룹안에 전부 법이 다 정해져있겠지요. 그러니까 말하자면은 이런 것이 인간 관계, 그래서 사람이 세상에 사는 것은, 사람이 세상에 사는 것은 자기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사는 모든 생활은 어찌 되었다고요? 나 아닌 다른 사람들, 혹은 다른 존재들 하고 다 부딪히게 되있다 말이지요. 관계를 다 맺고 있다 그말이지요. 좋은 관계든 나쁜 관계든,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선의로, 본의아니게 상관없이 그들에게 유익을 끼칠때도 많이 있고 해를 끼칠때도 많이 있는데 그게 너무 많으니까 세상 법적으로 다 일일이 제재를 다 못하고 간섭을 못하니까, 사람이 다 서로서로 그런것이니까 어느정도는 융통성을 두자, 그러나 너무 심하면 법으로 제재를 가해서 그렇게까지는 못하게 하자고 약속을 해놓은 것이 전부다 인간의 법이고, 그래서 가장 인간의 기본적인 양심으로 만든 것이 인간의 법이다 그리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법을 만드신 분이 바로, 세상 법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바로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걸 가지고 우리를 가르치는 것은 우리들의 모든 생활은 이 세상 법은 그래도 다 그래 놨으니까 얼마든지 그 법을 빠져나갈 수도 있고 법이 허용된 것도 있고, 또 서로 그러니까 제재 못하는것도 있겠지만은 문제는 하나님의 법이란 것은 하나님이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은 완전한 법이다, 이 법은 빈틈이 없다, 뭐가 없다고요? 빈틈이 없다 말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그말입니다. 그말은 다시 말하면 내가 태어나서부터, 무덤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나의 모든 심신의 활동전부는 단 하나도 빠짐없이 눈한번 깜빡이는 것까지 전부다가 하나님의 법하고 다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그 말은 다시 말하면 내가 알게 모르게 내 심신의 모든 움직임 전부는 전부다가 나 아닌 다른 객관의 존재들과 관계를 다 가지고 있고 그 모든 관계를 하나님의 법이다 심사를 하고 있고 마지막에는 그 법에 의해서 전부 낱낱이 심사해서 판단해서 보상할거는 보상을 하고 또 받을거는 받고, 이런 마지막에 살피는 그런 심판이 있는데, 그 심판을 가리켜서 만물 심판이라 그리 말합니다. 만물 심판. 모든 만물들이 그러니까 참 믿기 어려운 일이지요. 기독교의 모든 것은, 제가 어제도 설교록 교정을 보면서 기록된 내용이 그렇습니다. 백목사님 설교에, ‘성경이 믿어집니까?’ ‘믿어집니다’ ‘여러분들 영생이 믿어집니까?’ ‘믿어집니다.’ 새벽기도때 백목사님 뭐라 하신지 아십니까? 표현이 ‘미쳤구만’. 아닙니까? ‘영생이 믿어진다고?’ ‘믿어집니다.’ ‘모두 미쳤구만.’ ‘하늘에서 내리는 주사를 맞아서 약에 중독이 됐구만.’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게 믿어집니까?’ ‘믿어집니다.’ ‘하늘 주사를 맞아서 중독이 됐구만.’ 그게 아닌가요? 누가복음 17장 겨자씨믿음 말씀하실 때, ‘뽕나무야 뽑혀라’ 손도 안데고 기계고 안데고 말로 뽑혀라 그러니까 뽕나무가 쑥 뽑혀갖고, 바다까지 옮겨가서 뽕나무가 걸어가서 철철 흘러내려가는 물에 ‘심겨라’ 푹 심기고 그말이 믿어집니까? 그와 꼭 같은, 그보다 천배만배 더 말도 안되는 그런 사실이 수두룩하게 기록된 것이 성경인데 이 성경이 믿어진다고요? 모두 미쳤구만. 하늘 주사를 맞아 중독이 됐구만. 그렇지 않고는 믿어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이 믿어진다는 사실은 이 세상 사람들이 볼때는 정상은 분명 아닙니다. 설명을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것은 은혜며 선물이며 인간의 어떤 이론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기독교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당신을 택한 백성에게 믿음을 주지 않으시면 결단코 믿어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라 하는 겁니다. 이런것들이 가득찼는데 이제 말씀드리는 인간의 모든 평생에 나서부터 죽는날까지의 우리들의 모든 언행심사 전부 하나하나가 하나도 빠짐없이 그래서 기능구원을 자꾸 말할 때 인간의 세포조직 숫자를 자꾸 말하는 것이 수도없이 많은 무한은 아니로되, 무한에 가까울만큼 그 많은 세포조직 움직임 그 전부 하나하나 요소가 전부다가 다 존재 그걸 다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 움직임들 전부가 모든 존재와의 관계를 다 맺고 있는 것이고 그 모든 관계가 우리는 말없이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물도 마시고 밥도 먹고 온갖 것 다 먹는데 내게 입에 들어가는 음식물 하나하나 전부다가 내게 씹히면서 소화되면서 내 피와 살이 되면서 그게 전부다 자유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서 호소를 한다고 하는 그게 성경인데 그 모든 사실이 믿어지며,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가 그말입니다. 이게 사실이라고 그리 되어질때 인간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 수가 있겠습니까? 살아갈 수 있는, 그렇다면 그 모든 전부다 하나하나가 나한테 호소하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리 산다면 인간이 한발짝을 움직일 수 있겠으며, 발한번 움직이면 그 밑에 내가 밟는 땅에, 그 흙에 있는 그 모든 흙속에 있는 수많은 흙덩이들이, 모래 알갱이들이, 흙에 그 모든 알갱이들이 전부 나한테 ‘왜 나를 밟았냐’고 호소할건데, 평생을 통해서 밟고 다닌 그 흙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데. 내가 평생 마신 공기 숫자가 얼마나 많은데. 내가 평생 먹은 밥알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데. 그런것들이 전부다 나한테 호소한다고 그러면 이게 사실로 믿어지는 겁니까? 아니면 성경이 틀렸던지. 그러니까 이거는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고, 그래서 이런 무한의 모든 문제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완벽하게 영원 끝까지, 무한 끝까지 전부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래알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래알 하나만 우리들이 잘못해서 그것을 해를 끼쳐도 하나님 앞에 지공법에 의해서 정죄가 되는 것이고 그 정죄는 영원한 사망이 되는 것인데, 천번 만번 억만번 억억만번 사망하고도 남는 것이 인간의 사망인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모든 것을 전부다 주님이 대형하셔서 감당해서 그걸 다 갚았으니까 주님의 그 대형의 범위가 얼마나 넓으며 길이가 얼마나 길며, 깊이가 얼마나 깊으며 얼마나 세밀하게까지 뻗어가있으며, 그러기 때문에 천년만년 억억만년 가도 그 대속은 거기까지 뻗어있고, 천억만년가도 대속의 역사는 거기까지 뻗어있고, 거기까지 우리들이 미쳐서 하나님의 지공 지성법에 정죄받아서 떨어질 우리들을 거기까지 또 미쳐서 대속의 공로가 거기까지도 효력이 미쳐있고. 그래서 대속의 범위는 무한하다 하는 겁니다.
자, 이 말씀이 논리적으로, 000샘? 내일 입대를 해야되는데, 논리적으로 이해가 됩니까? 논리적으로 이것이 일단 믿어지고 안 믿어지고는 그 다음이고, 논리적으로 성경을 근거해서 이것이 이해가 되고, 그리고 난다음에 생각해보면 참, 기가 찬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게 대속의 범위다. 그래서 우리들의 모든 언행심사, 인간의 모든 언행심사의 활동에 무한에 가까운 것. 하나님의 지공 지성법하고 막바로 연결이 되어져서 인간의 모든 움직임 하나하나 전부다를 하나님의 지공 지성법이 낱낱이 살펴서 심사를 다해서 보응과 보상을 하신다는 것. 그러므로 인간은 결코 벗어날 수가 없는데 이 모든 것은 주님의 대속이 완벽하게 다 해결해주셨다는 것. 이게 주님의 대속의 범위입니다. 얼마나 큰지. 그리고 세 번째는 이 대속으로 주신 소망이, 대속의 공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아들이 된 것이고, 대속의 역사 공로가 있기 때문에 영생을 하게 된 것이고 대속의 공로가 있기 때문에 영계와 우주 전부를 다 상속받아 나의 영원한 활동무대로, 사람이 감옥에 갇히면 괴롭습니다. 왜 괴롭습니까? 감옥에 들어가면 추운 겨울에 감옥에 들어가면 공짜로 밥 주지요, 따뜻하게 보일러 피워서 따뜻하게 요즘 감옥은 워낙 좋아서. 겨울에 괴로운 사람들은 일부러 도적질 하고, 왜 도적질 했습니까? 감옥 가고 싶어서. 감옥이 뭐가 좋아서? 감옥 가면 따뜻하게 해주지요, 밥 주지요, 운동 시켜 주지요, 텔레비전 보여주지요, 힘들게 일 안해도 되지요. 감옥이 좋은데. 그런데 왜 사람들 감옥을 싫어합니까? 감옥의 의미는 뭡니까? 000선생님 아주 예배를 잘보는데, 감옥의 의미가 뭐지요? 크게? 갇혀있다는 말을 좀 더 풀면? 자유가 없는 것. 감옥의 의미는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자유가 없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감옥에 갇혔는데 왜 자유가 없습니까? 감옥에서 얼마든지 생각해도 되고, 텔레비전 봐도 되고 할 수 있는데. 자유의 활동이 제한을 받는 겁니다. 공간이 제한을 받아서. 나가고 싶은데 감옥에 있으니까 못 나가는 거지요. 넓은 운동장 가고 싶은데 안돼. 바닷가 가고 싶은데 안돼. 너는 여기 안에만 있어야 돼. 갇혀있는 겁니다. 활동의 제한. 감옥에 안가도 감옥 갇힌 사람 많습니다. 미국 가면은 여기 계신 많은 분들, 미국 가면은 눈이 있어도 소경이고,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고, 입이 있어도 벙어리고. 왜 그렇습니까? 영어를 못하니까. 그게 활동의 제한입니다. 어디든지 돌아다니지만은 돌아다니고 싶어도 이거 뭐 어디 가는 차인지, 벌로 돌아다니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연세 많은 분들이 돈 많은 아들 딸들이 성공해서 모시겠습니다 하고 미국에 모셔가도 ‘아이고 나는 여기 감옥이다, 우리 고향 가서 살련다’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그 좋은 나라, 미국 데려다 놔도 감옥생활이니까 차라리 우리 고향 시골 거기 가서 사는게 낫지 그 좋은 미국에 못 살겠다. 그게 하나의 감옥입니다.
천국 감옥. 그런데 그것이 뭐냐? 자기 활동 무대가 없는 겁니다. 왜 무대가 없습니까? 천국에서 하나님께서 마음껏 천국은 우주와 영계 통일된 그 나라니까, 마음껏 돌아다니고 마음껏 활동하고 마음껏 살아라, 그런데 할 줄 알아야지요. 갈 줄 알아야지요. 어디있는지 붙어있는지 모르겠는데. 활동성이 없는 사람들은 그런게 있지요. 저도 활동성이 별로 없어서 부산에 살아도 항상 있던데만 있으니까 어디가 어딘지 딴 동네 가보면 여기가 어딘지도 모릅니다. 동래쪽에 가면은 여기가 어디지? 그만 길을 헤맵니다. 해운대 가도 그렇고, 태종대 가도 그렇고. 그러니까 윤곽적으로는 알지만은, 다니는데는 아는데 안다녀본데는 모르는 겁니다. 자기가 안 해본 것, 이 땅에서 마련하지 않은 그거는 천국에 가도, 영계와 우주니까 얼마나 넓겠습니까마는, 세상에서 전부 홍포 입은 부자처럼 자기 중심으로만 살았고 땅에것만 보고 살았으니까 너를 위해서만 살았으니까, 천국에는 전부 다른 사람에게 주는 나라인데, 시은의 실력이 천국 실력인데. 같이 해보실까요? ‘시은의 실력’. 시은이 무슨 뜻입니까? 은혜를 베푼다 그뜻이지요? 그 나라는 은혜 베푸는 나라가 그 나라 실력인데 땅 위에 사는 동안 평생을 통해서 제것으로만 살았고 저를 위해 살았지, 남 위해서 한번도 살아보지 않았으니까, 천국 가서 마음껏 살아라 그러는데 땅위에서 한번 줘봤어야지요. 그러니까 천국 갔지만은 딱 갇혀 감옥에 살아야 되고 남에게 받아 먹고만 살아야 되고. 받아먹는 사람, 얻어먹는 사람을 거지라 그러지요. 그러니까 영계와 우주를 우리에게 주셨으나 이땅위에서 잘못살면 그것도 참, 가기만 하지 활동이 없는. 그런데 주님의 대속의 공로를 근거해서 얼마든지 그 나라를 자기 나라 삼을 수 있는 이런 모든 기반을 닦아주신게 주님의 대속입니다. 이 대속의 사랑과 본의와 그 소망이 어떠한지를 평생을 통해서 생각을 하고 연구하고 이 대속 속에 빠져 사는 사람이 참성도들이고 그런 성도들 더러더러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피곤하지 않고 아깝지 않고 달려가는 겁니다.
그다음 크게 하나 더 말하면, 대속의 보증이 있으니 이 대속을 우리에게 이 대속이 어떤 대속이며 이 대속을 우리에게 알려주며 책임지고 우리에게 알리시고 입혀주는 그 역사가 있으니까 그게 둘인데, 하나는 진리고 하나는 영감이다 성령이다. 그래서 진리는 하나님 말씀인데, 독자적인 권능을 가져서 우주 전부를 다 창조하신 그 진리가 우리에게 주님 대속을 증거하고 있고, 그 진리가 우리를 주님 대속으로 인도하고 있고, 우리로 하여금 그 대속을 입고 살게 하고 성령이 진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대속을 알려주고 있고 우리로 하여금 그 대속을 입고 살게 하는 이런 역사를 하고 있는, 그래서 주님의 대속과 그 대속을 보증하는 성령과 진리가 함께 있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대속을 기념하는 사람으로 살아야되는데 대속을 기념하는 것은 네가지로 생각해봤습니다. 대속을 기념한다 말은,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기념하라. 기념은 과거에 있었던 일을 한번 더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이고 계승해나가는 것인데, 대속을 기념하는 것은 첫째, 대속에 대해서 아는 겁니다. 대속의 사랑을 알고, 대속의 범위를 알고 소망을 아는 것. 두 번째는 이 대속을 나만 알 것이 아니고 전하여 알리는 겁니다. 입으로 전하여 알리고, 또 내 모든 생활로 알리는 겁니다. 세 번째는 대속의 사람으로 사는 겁니다. 내가 대속의 사람이 되는 것이고, 하나 더 말하면 대속의 사람을 만드는 겁니다. 이것이 대속을 전하는 것이고 기념하는 겁니다. 이 대속을 깨달아서 알고, 그다음 알리고, 대속으로 살아 대속의 사람이 되고, 대속의 사람을 만들어나가는 이것이 대속을 기념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이 대속을 기념하는 이 생활 속에 필연적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대속을 기념하는 생활에 반드시 들어가는 것, 대속을 기념한다 그말은 대속을, 주님이 만드신 대속을 나도 그와같이 내가 새로 만드는 건 아닌데 그 대속을 근거해서 내게 분량된 대속을 만드는 것인데 그 대속을 만드는데 반드시 들어가야 될 한 역사, 요소 무엇입니까? 그정도 했으면 알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이지요? 주님이 대속을 완성했는데 그 완성은 뭘로 완성했습니까? 대속의 완성은 십자가로 완성을 한겁니다, 십자가. 당신의 모든 것 다 받친 십자가. 우리에게도 이 대속을 기념하는 생활에는 반드시 들어가는 요소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진리 구원을 위해서 내가 녹아지는 것이고 희생하는 것이고 죽어지는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내 챙길 것 다 챙기고 내 이익 다 챙기고, 내 자존심 위신 체면 내 욕심 다 챙기고는 대속을 결코 기념할 수가 없는 겁니다. 내가 손해보지 않으면, 내가 낮아지지 않으면, 내가 죽어지지 않으면 대속은 기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주님의 떡을 먹으면서, 잔을 마시면서 대속을 기념하라 그말은 더욱 더 주님 대속을 기념하기 위해서 내가 더 낮아져야 되겠다, 더 희생해야 되겠다, 더 죽어야 되겠다, 더 꺾어야 되겠다 이게 기본적으로 그 속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이걸 기억하면서 예수님 대속을 알고 성찬을 준비하는 한주가 되도록 하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논리적으로 먼저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대속이 뭐냐, 대속의 의미. 대속의 내용. 그 대속이 어디까지 뻗어가있는가. 대속의 사랑, 대속의 범위. 대속의 소망. 대속의 보증, 대속의 기념 이런 것들을 말씀드린 걸 근거해서 좀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