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6-주후(고전15:55-58)
죄에 대한 지식2014-02-17조회 453추천 28
(설교원문)
20140216 주후
고린도전서 15:55-58
세례 성찬 준비로 오늘 죄에 대한 말씀을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성찬식은 세례 받으신 분들만 참석하는 것이고, 그래서 성찬식은 세례식의 연장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세례나 성찬은 그 중심이 예수님의 대속이고, 예수님 대속은 예수님의 고난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그 역사고, 그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그 역사는 죄와 관련된, 죄를 있는 죄를 형벌받아 다 도말하여 없애고 또 죄 없는 그 생애를 하신 것이 예수님의 고난의 생애 죽으심이고 마지막 목숨까지 바치신 생애와 고난이고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찬식을 준비한다 그러면 예수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생각해봐야 되고, 그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원인되는 죄를 생각해봐야 됩니다. 그래서 죄가 무엇인가? 죄는 어디서 생겨졌는가? 사람이 왜 죄를 짓게 되는가? 죄를 안 지을 수는 없는 것인가? 죄를 지으면 그 결과는 어찌 되는가? 또 그 죄를 없애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런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는 겁니다.
본문에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을 향해서 외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명상중에, 기도중에 그렇게 외쳤겠지요.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란 것은, 글자 그대로 말하면 죽고 망한다는 뜻이고 쉽게 말하면 사망이라는 말의 의미는 죽음을 뜻하는 겁니다. 사망은 죽음이라 그리 말합니다. 죽음이라 그러면 사람들이 다 생각하기 싫어하고 듣기를 싫어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단어고 그 일입니다.
기독교는 이종교와 다르지만은 그래도 하나의 종교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종교와 연결된 표현이 철학이라는 것이 종교와 연결된 게 있는가, 철학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니까 ‘철학이 무엇인가?’ 이게 많은 사람들이 철학이라는 말 자체도 어려운 말이고, ‘철학은 무엇이다’고 정의를 내리지를 못한다 그럽니다. 저는 공부를 많이 안해서 잘 모르는데, 공부한 사람들 말 들어보면 모든 학(學)중에서 가장 최고의 ‘학’, 가장 근본되는 ‘학’이 철학이다 그런답니다. 철학의 ‘철’자가 슬기, 지혜 이런 ‘철’자인데 말하자면. 그래서 철학이란 것은 지혜를 사랑하는 ‘애지(愛智)’라 그러던가요. 그것을 연구하는게 철학이다 그리 말한다는데, 이거는 좀 범위를 넓히면 인생에 대해서, 지혜에 대해서, 이 세상에 대해서 그런 것을 좀 폭넓게 살펴보는게 철학이다 그리 말한답니다. 그중에서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연구하는 것이지요. 인생. 인간이 사는 세상은 또 무엇인가? 또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되는가? 이런 것을 공부하는 일종의 인문학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데 또 모든 세상의 모든 ‘학’의 근본이 ‘철학’이라 그리 말한답니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우리는 종교인들입니다. 이종교와 다르지만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종교인들이고, 종교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 세상을 향하는 것이 아니고 사후세계, 내세를 지향하는 것이 종교고, 그러기 때문에 믿는 성도들은 이 세상보다는 죽음 너머 세계를 바라보고 그 세계를 준비하는 것이 믿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이 표현, 이 단어, 이 사실은 늘 우리가 염두해두고 사는 것이 지극히 마땅하다 그리 말할 수 있고, 그래서 성경에도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사람이 이것에 마음을 두고 살아라고 말씀을 하신 겁니다. 이런것을 우리가 하나의 교양적으로, 하나의 깨우치는 경고나 경성적으로만 듣고 지나갈 것이 아니고 우리가 잘 하지 못해도 사람이란 것은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고, 조삼모사라는 것은 원숭이들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사람들에게 꼭 같이 해당이 됩니다. 그 말은 원숭이를 가르치기 위해서 만들어낸 말이 아닙니다. ‘조삼모사’라는 말은, 원숭이를 비유해서 원숭이같은 그런, 우선은 우선 좋은 것 찾고, 우선 먹기에는 곶감이 달다 그런말도 있지요. 그러니까 나중을 생각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 이익만 찾고, 그것만 쫓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많고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그런 하나의 짐승들, 그들을 보고 비유적으로 말을 만들어낸 것이고, 그런 모든 말들은 인간사의 통계로써 나오는 겁니다. 많은 사람을 접해보니까, 사람들은 꼭 보니까 아침에 세 개 주고 저녁에 네 개 주면 난리를 피우다가 아침에 네 개 주고 저녁에 세 개 주면 사람들은 좋아하더라, 말하자면은 나중은 어찌되든지 지금 좋으면 좋아하더라 이것이 인간들의 대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더라고 통계적으로 살펴보니까 그렇다는 것을 하나, 그래서 그리되지 말라고 만들어낸 말들이 그런 말입니다. 한국 사람은 저 어릴때 종종 들은 말 중에서 ‘한국 사람은 외상이라 그러면, 공짜라 그러면 양잿물도 둘러마신다’, 양잿물이 뭔지 압니까? 학생들? 젊은분들 양잿물이 뭔지 압니까?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양잿물은 옛날에 비누 만드는 재료입니다, 비누. 아주 독한 그런 것중에 하나인데, 사람이 잘못먹으면 많이 먹으면 죽는 겁니다 그거. 그런데 공짜라 그러면 양잿물도 둘러마신다, 외상이라 그러면 소도 잡아 먹는다 그런 말들이 있습니다. 공짜니까, 외상이니까 당장 집안이 거덜나든지 우선에 급하니까. 그래서 특유의 한국사람의 카드빚같은 이런것도 일종의 외상이지 않습니까? 할부같은 것. 이거 전부 우리 나라 사람들의 특성중에 하나입니다. 나중을 생각지 못하고 우선 쓰고 보자. 먹고 보자. 가지고 보자. 우선 놀고 보자. 이게 한국 사람들의 대단히 좋지 않은 특성, 고쳐야 될 특성 중에 하나인데, 그러니까 이런 걸 좀 고쳐서 뒤를 생각하고 좀 멀리를 바라보고 궁극을 찾아 들어가는, 그중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종교인들이니까 이 세상만 보고 살지 말고, 세상 너머 나중에 어찌되는지, 죽음 너머를 바라보자 이게 기독자들의 기본적인 자세인데, 우리가 그래 살고 있습니까? 지금 뭐, 현실. 그래서 당장 직장생활이 당장 급하니까, 당장 장사가 바빠 죽겠는데, 공부할 시간도 없는데, 당장에 놀 시간도 없는데, 집안일이 바쁜데, 눈앞에 있는 그것 바쁘다 보니까 거기 매여서 하루하루 살아가다 보니까 1년이 금방 지나가고 참 세월이 빨리 간다는 것이, 젊을때는 그래 생각도 했습니다. ‘나이가 많으면 몸도 일을 많이 못할 것이고, 그러니 일을 많이 안할 것이고, 시간 좀 많이 남지 않겠는가? 어떤 분들은 보니까 할 일이 없어서 그러는데, 시간이 남아 지루해죽겠다는데 나이가 들어가면 시간이 없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도 해봤는데, 보니까, 나이가 들어가니까 시간이 어찌나 빨리 가는지. 젊을때 하루하고, 나이 5-60 되어서 하루가 틀립니다. 몸이 다르니까 시간이 다르더라 그말이지요. 여러 가지 생각해보니까 ‘왜 이렇게 하루가 빨리 지나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루에 한 것도 없는데 시간 다 지나가버리고, 한주간을 돌아보면 뭐 했는지 꼽아보면 한 것도 없는데도 시간은 다 지나가버렸습니다. 그리 생각해보면은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그게 몸이 옛날같지 않고 여러 가지 그런 작용들이 가만 보니까 있더라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사람이 그래가지고 시간이 그만 하루 하루 그래 지나보내는데 그게 1년가고 이태가고, 10년 20년가서 어느새 머리에 흰머리가 나고, 한 30대 후반만 되면 벌써 흰머리가 나올껄요? 40대되면 흰머리가 숭숭 나기 시작을 하고. 그러니까 그게 인생이니까, 그렇게 허무하게 지내보낼 것이 아니고 좀 생각 좀 해봐야 되겠다 그말입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무엇이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뭐냐? 6천년 인간 역사에 죽음을 이기는 용사가 없고, 죽음을 이긴 장사가 없고, 죽음을 이긴 머리 좋은 사람이 없고, 죽음을 돈으로 산 재벌이 없고, 죽음을 물리친 장군이 역사에 없으니, 6천년 인간역사에 그 사람 숫자가 상당히 많을건데, 전인류를 다 정복하고 집어삼키고 굴복시킨 죽음이라는 이놈이 도대체 무슨 수로, 무슨 무기를 가지고 모든 사람을 다 정복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뭐냐, 너의 무기가 도대체 뭐냐? 사망의 쏘는 것은 뭐라고요? 000? 사망의 쏘는 것은? 읽어봐요 성경. 크게. 죄라 그랬지요?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사망의 무기는 죄다. 그러면 죄가 있으면 사람은 어쨌든 죽는다 그말이지요. 죄를 두고 사망하지 않을 사람이 없고, 죄 없는 곳에 사망은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죄라는 것이 무엇이냐? 죄는 법을 어긴 것이 죄다 그리 말했습니다. 죄라는 것은 법을 어긴게 죄다. 법이란 것은 약속인데, 그러면 세상에는 법이 많고, 법이 많다 말은 죄가 많다 그말입니다. 나라마다 법이 있고, 단체마다 법이 있고, 사회마다 법이 있고, 그것을 어기는 그런 죄들이 많이 있는데 죄를 지으면, 사망이 되는 그런 법, 법이란 것은 죄를 죄로 정하는 잣대가 되고 기준이 되는 것이 법이다. 그래서 법이 있기 전에는 죄가 죄로 나타나지를 않았다 그랬습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라서, 사망이 사람을 삼키고 죽이는 그 무기가 죄인데, 그 죄를 죄로 정해서 영원히 사망시키는 그 법이란 것은 세상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법이라. 하나님이라는 분은 모든 존재의 근본이며 표현하자면 궁극이라. 그래서 하나님이 계신 그때부터 모든 존재는 있게 되어졌고 그러니까 그래서 어려운말로 무(無)가 먼저냐 유(有)가 먼저냐? 무엇이 먼저입니까? 무에서 유가 나왔느냐, 유에서 무가 나왔느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무라는 것은 없는 것이고 유라는 것은 있는 것인데, 뭔가 있고 그다음에 거기서 뭐가 나왔느냐? 무에서 유가 나왔느냐? 유에서 유가 나왔느냐? 그러니까 무에서 유가 나왔느냐? 유에서 유가 나왔느냐 그럴때, 무와 유를 왜 공부하는 겁니까? 사망이 있고 그다음 사망의 원인되는 죄가 있고, 죄의 정죄 기준이 되는 율법이 있고 그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 하나님이 바로 모든 존재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근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라는 분은 없다가 생긴것이 아니고 그분이 계신 그 이후로 모든게 있게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은 ‘무에서 유가 나왔다’ 이게 진화론자들이고 안 믿는 사람들의 이론입니다. 성경은 반대입니다. 유에서 유가 나왔다. 하나님이 계셨고, 그다음부터 모든 것이 다 있게 되어진 것이다 그리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근본이든지 모든 존재 근본 궁극을 발견하려면/ 찾아내려면,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인간의 궁극은 결코 나오지 못합니다. 인간역사 6천년이고, 주님 재림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겠지만은 어떻게 머리 좋은 사람도 아무리 오묘하게, 심오하게 깊이 파고들어가서 찾아봐도 하나님이라는 이 분을 찾지 못하고는 인간의 궁극의 의문점은 해결되지를 아니합니다. 그리고 신앙이란 것은, 하나님을 찾아야 비로소 신앙이고, 그 하나님을 찾되 자기 주관대로 찾으면 자기 주관에 갇히는 것이고 자기라는 것은 결국 무엇이 만들어낸 겁니까? 나라는, 자기 자신이라는 자기의 지식이라든지 지혜라든지 경험/체험이라든지 자기 아는 모든 것은 결국 이 세상이 만들어낸 것이고 세상 속에서 그런 걸 접하면서 만들어낸 자기기 때문에 그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뜨려지지 않으면 말씀과 하나되고, 말씀에 붙들려서, 그 말씀이 가르치는 하나님께 붙들린 그 자기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결코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이 당신을 스스로 알리신, 하나님이라는 분은 당신 자신이 당신을 알려서 우리가 알게 됐지, 인간이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 아니고, 발견할 수도 없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제된 믿음이란 것은 뭐라 그럽니까? 믿음은 뭐라 그러지요? 하나님을 아는 것은, 믿음이란 것은 하나님을 아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입니다. 그 하나님을 아는게 믿음 전제인데, 그 하나님을 알리는 것은 하나님 당신이 알려줘야 알지, 인간의 노력으로 알아지는게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제된 믿음이란 것은 뭐라고요? 000? 믿음은 뭐라고요? 믿음은 은혜며 선물이라 하는 겁니다. 믿음은 은혜고, 하나님이 그냥 주시는 것이고 선물이지, 인간의 소원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을 알아야 그때부터 신앙은 비로소 출발이 되어지는 것이고,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고, 거기서 모든게 나와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는 거기서 나오는 것이 참된 모든 것이 되고,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그 지식,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그 신앙생활의 그 여파가 인간의 모든 도덕과 인간관계와 자기 모든 생활에까지 미쳐 나가야만이 그게 바른 것이 되어지는 것이지, 하나님은 끊어지고 하나님 없는 인간끼리의 도덕이 아무리 바로 되었다 하더라도 이거는 생명이 없는 것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과 관계된, 하나님으로 인한, 말미암은 것이 뻗어나가서, 그게 뻗어나가가지고 그다음에 그것이 인간관계 도덕에도, 생활에도 다 미쳐나가는, 마치 예를 들자면 자동차가 도로를 붕 지나가면 자동차 지나감에 따라서 연기도 나고 먼지도 일어나는 것처럼, 그런데 그 먼지라는 것은 자동차가 딱 서면은 먼지는 어찌 됩니까? 000씨 먼지 어찌 되요? 요즘은 포장도로라서 먼지가 안나는데 비포장도로에 자동차 다니면 먼지 일어나지요? 그런데 자동차 딱 서면 먼지는 좀 있으면 싹 가라앉지요. 그러다 자동차 지나가면 또 일어나고. 자동차 지나가는데 일어나는 먼지는 자동차의 움직임으로 인해서 생겨지는 거지요. 기독자의 도덕이라는 것은, 인간관계에 도덕이란 것은, 인간과 인간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 관계에서 나와서 인간관계로 뻗어가야 그게 참된 기독교 신앙이고 도덕이 되는 겁니다. 그게 빛으로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이게 기독교 도덕뿐 아니고 믿는 성도의 모든 생활 전부다가 그러합니다. 성도의 인사성, 우리 학생들의 올바른 인사성이 기본적으로 타고난 착하고 예의바른 그런 학생이라서 인사 잘하는 것도 귀한데, 그보다 더 귀한 것은 그 학생이 원래는 막되먹은 학생인데 말씀을 듣고 하나님 말씀을 배워서 하나님을 알고나니까 하나님이 말씀이 예수 믿는 사람은 인사를 잘하라고 그러시더라 그래서 인사 잘합니다. 그 학생이 원래 착한 학생보다 몇 배나 더 귀한 학생입니다. 귀한 인사입니다. 이거는 하나는 하나님을 말미암은 것이고 하나는 그냥 인간으로 말미암은 거니까, 하나는 궁극의 뿌리가 영원에 박혀 있는 것이고 하나는 거기 뿌리가 없는 겁니다. 뿌리가 없는 것은 시간 지나면 말라버리는 겁니다. 뿌리가 있는 것은 안 마르는 겁니다. 모든 생활이 다 그렇고, 그러니까 신앙이란 것은 하나님에게서 다 뻗어나와야 되고 그래서 사망이 있고, 죄가 있고, 율법이 있고 하나님이 있는데 이 모든 사망도 죄도 율법도 파고 들어가면 어디서 나왔다는 말입니까? 결국은 하나님 한분에게서 다 나왔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자존하신 하나님이 무한하신 분인데, 무한하다 말은 영원하다 말이지요. 수명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지만은 그분이 계셨고, 그분이 수명이 천년 만년 끝이 없이 영원히 계속 되어지고 그분의 수명이 영원하니까 그분의 활동도 영원하고 그 범위는 끝없이 사방으로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무한한 그런 활동이 되어질 수 밖에 없고, 그래서 그분의 수명에 무한에 따라서 그분의 지식도 지혜도 모든 활동역사도 다 무한히 뻗어나가고, 그러므로 그분이 정해놓으신 그 법도 무한합니다. 정권자가 정권을 잡으면 아무리 민주주의 우리나라 그래도 5년, 제법 정치를 잘해도 그 정치 잘한 것을 가지고 계속 써먹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정권 잡은 사람이 정치를 굉장히 잘해서 국민들의 신뢰를 전폭적으로 받으면 다음에 대통령 나설 사람은 이번 정권을 힘입어서 이쪽편으로 줄을 설 겁니다. 그런데 지금 대통령이 인기가 없고 지금 대통령 줄 잡고 있다가는 다음 대통령 선거에 떨어질 것 같으면 딱 그만 대립을 딱 세워가지고 ‘나는 지금 대통령과 다르다’ 이건 뭐 우리가 몇 번을 보지 않습니까? 선거때마다. 그래 하는 겁니다.
그 권력이라는 것이 오래 안간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법이란 것은, 그래서 법이란 것은 사망에 쏘는 것은 죄고 죄의 권능은 율법인데, 율법의 권능 율법의 힘은 어디서 나오느냐? 법의 힘이란 것은 법을 세운 입법자의 권력에서 나오는게 법입니다. 그 입법자가 권력이 없으면, 힘이 없으면 법이란 것은 죽은 법이 되는 겁니다. 법은 세워놨는데 법 세운 그 사람이 힘이 없는데 ‘너 법 세웠어? 그 법 내가 깔아뭉갤꺼니까 한번 해봐’. 그러면 지금은 그래 되있지만은, 옛날에는 그랬잖습니까. 왕이 있는데, 그 왕이 힘이 없으면 역적이 일어나서 역성 일으켜가지고 왕 없애버리고 ‘내가 왕이야 할 말 있으면 해봐. 달려 들어봐. 모조리 그냥 할꺼니까’. 그러니까 법 세워봐야 아무 의미도 없는 거지요. ‘반역? 역적? 내가 왕이야. 네가 역적이지’. 그래서 법이란 것은 결국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법이란 것은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고 권력은 힘이라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기독교의 논리를 파고 들어가면 마지막에는 힘의 논리가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힘의 논리. 하나님을 이길 자가 있으면 나와봐. 그런데 그 힘의 논리가 하나님이 절대자고, 그분이 전능자인데, 그분이 주권자인데, 그래서 그분을 이길 존재가 없는데 인간이란 것은 생각이 있고 또 감정이 있는 것인데, 지성이 있는 것인데 힘만 가지고 누르면 자유성이 있는 것인데 인간이 원해서 따라 갑니까? 그러기 때문에 가장 강한 힘 있는 그분이 본성이 사랑이라, 본질이 사랑이라, 또 베푸는 시은자라, 또 그분이 지공과 지성이라. 그러니까 힘으로도 그분 능가할 자가 없고 사랑도 그분보다 큰 자가 없고, 공평도 그분보다 공평한 자가 없고, 완전도 그분보다 완전한 자가 없고 이러니까 어느면을 다 따져봐도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을수가 없는데 그 굴복이란 것이 강제 억지가 아니고, 논리로 따져보니까 원하고 원함으로 ‘과연 그러합니다’. 노아 홍수때 하나님께서 전인류를 홍수에 빠트려 여덟 식구 빼놓고 다 죽여도 그 사실이 모든 존재가 다 따져봐도, 우리는 몰라서 그러하지만은, 그 앞에 가면은 ‘과연 하나님이 그렇게 모조리 다 죽여 없애버리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게 선입니다.’ 그리 찬양할 수 밖에 없다 그말입니다. 우리는 몰라서 그러지만은. 앞으로 가면 그게 다 드러난다 그말이 되겠지요. 그래서 이 하나님에게서 모든게 다 나와서 그러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이 법을 정했고, 그 법은 하나님과 같이 지공과 지성의 법이고 사랑의 법이고 어느 곳에 다 맞춰도 틀림없는 진리의 법이고, 모든 존재가 다 자유할 수 있는 자유의 법이고, 끝이 없는 영원이 법이고 이 법을 하나님께서 재정해주셨고 이 법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말이고, 이 법을 어기면 이 법에 의해서 정죄 받아서 사망이 되는데, 하나님이 무한하시니 법도 무한하고 이 법이 무한하니 법을 어긴 죄도 무한하고 죄가 무한하니 사망도 무한하고 영원하고 이리 되는데 이 법을 유한한 인간이 지킬 자가 없고 어기지 않을 자가 없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법을 만드셨으나 이 법은 인간이 지킬 수 있는 법이 아니었습니다. 어길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이걸 하나님께서 계산에 다 넣고, 무한한 법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고 그 법을 지키라고 주신 분도 하나님이고, 유한한 인간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고, 그런데 인간이 그 법을 지키지 못할 줄 알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 법을 주셨는데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그 법을 지키다가 결국은 못 지키고 어겨서 정죄받아서 영원한 사망을 당하게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망한 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죄를 없애버리기 위해서 사람으로써는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이 법을 안 어길 수 있고 지킬 수 있으니까, 그래서 부득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는데,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지만은 하나님이 사람과 끊어지고, 사람 혼자만 있으면 그 사람은 또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돼서 일위가 되어서, 하나님인데 사람이고 사람인데 하나님이고, 이래 일위가 되신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공 지성의 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았고, 그래서 한면으로는 인간이 어긴 그 법의, 법을 어긴 죄의 값을 한면으로 대신 감당하는 대형으로 사신 것이 예수님의 생애고, 대형으로,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인성 입은 그 분이 하나님의 법을 그대로 다 지켜서 행하신 그게 또 한 생애고, 그래서 대형과 대행, 하나 더하면 하나님과 화친한 것이고, 이래가지고 이 세상에 사시고 마지막에 죽으시기까지 그래하신 이것이 예수님의 대속의 생애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대속의 공로를 입은 사람은, 예수님이 베푸신 대속의 공로를 입은 사람은 그 대속의 공로 안에 우리들의 모든 과거 지은 죄, 우리로 말하면 나기전, 오늘 여기있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예수님은 세상에 오셨었고, 그분이 오늘날 이 시대 태어날 우리들의 죄까지 하나님의 전지의 지혜로 미리 다 당겨서 예수님의 그 대형에 다 짊어지었고, 또 우리들의 남은때 평생 이 땅에서 살면서 지을 모든 죄를 나는 모르는데 하나님은 그를 아시기 때문에 내가 지을 죄를 다 미리 당겨가지고 예수님의 대형에다가 지워서 얹어가지고 대속의 공로를 다 베풀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이 세상생활은 예수님 십자가 대속의 공로로 인하여 죄로 인해서 눌리고 사망받는 그런게 다 없는, 찬송할 때 51장 할 때, ‘너희 죄 사해주사’ 3절에 그다음 뭡니까? ‘너희 죄 사해주사 기억도 안하시네’ 그 찬송할 때 참 한편으로 애매합니다. ‘하나님이 결코 잊어버리는 분이 아닌데 어떻게 우리 죄를 기억도 안한다 그럴까’ 하고 가사를 생각을 하는데 그대 느껴지는게 ‘아 주님의 대속의 역사로 적용시킨 그 죄,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대형의 공로를 베푸시므로 사죄의 공로 주신 그 대속역사에서 우리 죄는 그분이 기억도 안 하신다’는 그런. 그래서 우리들이 주님의 대속을 입은 우리들로써는 그 죄로 인한 영원한 형벌 그거는 우리가 완전히 다 주님 대형으로 다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붙들려서 법을 지키지 못하거나 또는 한번만 어기면 영원한 사망이 되어지는 것인데 우리들이 수도없이 어길수밖에 없는 그 평생의 모든 죄를 주님이 대신 짊어지고 값을 다 받았기 때문에 지옥의 형벌이 우리에게는 없다 그말입니다. 비유가 될지 모르겠는데, 공중에서 외줄을 하나 걸어놓고, 외줄 걸어놓고 이쪽에서 여기까지 높이 한 100m 높이에서 줄을 타고 건너갑니다, 예를 들면. 그럴일은 없는데 예를 들면 줄을 타고 건너가는데 그 줄을 타고 건너가는데 딱 떨어지면 바로 죽지 않습니까? 그런데 모든 사람이 줄을 타고 건너가는데, 그 줄을 타고 건너가는데 한번 딱 떨어지면 죽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줄을, 거기다가 떨어지면 다시 통 튀어올라가지고 다시 딱 서고, 또 떨어지면 톡 튀어올라 다시 서고 있는 그런 원줄에 매여있는 보조줄, 생명줄이 있어서 그 생명줄을 딱 걸고 있는 사람은 줄을 타고 가다가 떨어지면 줄이 탁 튀어올라서 다시 걷게 하고 다시 걷게 하고. 그 사람은 아무리 떨어져도 떨어져 죽을 염려는 없지 않습니까? 생명줄이 있으니까. 떨어져 죽을 염려가 없으니까 떨어지면 다시 올라가서 또 가고, 떨어지면 또 올라 또 가고 요래 될 수 있는 사람. 그런데 이 생명줄이 없는 사람은 줄을 타고 가다가 한번 똑 떨어지면 그길로 죽는, 말하자면 예를 들자면 이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데 주님 대속의 생명줄이 있어서 법을 지키다가 죄를 지으면 대속이 또 다시 우리에게 대속의 생명줄이 우리를 다시 끌어올려서 넘어졌으니까 또 다시 지켜라. 또 가다가 또 지키면 지키고 못 지키면 또 톡 떨어지면 또 다시 지켜라. 그래가지고 평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이 법을 지키는 그 연습을 시키시는 것이 우리들의 세상 생애고, 그 연습을 할 수 있도록 생명줄을 만들어주신 것이 주님의 대속이다 그말입니다. 이 대속이 없는 사람, 대속의 공로가 없는 사람들은, 아담의 범죄 한번으로 이미 영원한 사망에 떨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가 없는, 원래 그게 하나님의 법입니다. 무한한 법이니까. 10년동안 안 어기고 지켜도 10년만에 어기면 영원한 사망입니다. 외줄타고 가다가 100m를 가다가도 톡 떨어지면 죽는 것. 길이 너무 길어서 몇 키로 되는데, 1km 가다가 톡 떨어지면 죽고, 다 갔는데 톡 떨어지면 죽고 그리되는데 생명줄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떨어져도 다시 올라갈 수 있는 것처럼, 안 믿는 사람들 주님 대속을 입지 못한 사람들은 한번 범죄로 영원한 사망이 되는데 우리는 그 대속의 생명줄이 있기 때문에 현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리 죄를 지어도 그 죄로 인한 영원한 사망에 그런 끝이라는 것이 없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근거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들에게 현실을 만들어주신 것은 바로 이 세상 현실에서 내가 세상을 살아가다가 그 현실 속에 해당된 하나님 말씀을 계속 지켜 나가고, 지키다가 죄를 짓게 되면, 말씀을 어기게 되면 거기서 또 다시 죄라는 것은 ‘아 이게 이런 죄도 있구나. 또 이런 죄도 있구나’. 그 죄를 알게 하고, 한번 그 죄를 알았는데 싸워서 이기면 통과하고 못 이기면 그 다음에 또다시 그와 같은 현실을 주셔서 시간은 달라도 현실 주셔서 또 죄로 더불어 싸워서 이기게 만들고. 그래가지고 현실을 주시는 목적은 우리들이 내가 몰랐던 죄, 우리는 아직 살지 않았으니까, 내일 지을 죄를 내가 모르지 않습니까? 내일 내가 무슨 죄를 지을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아십니까? 내일은 아직 안 살았으니까 모릅니다. 그런데 내일 내가 지을 죄는 이미 내가 내일 죄를 지을지 안 지을지는 모르겠지만은 죄가 있다면 내일 지을 죄는 그 죄도 지으면 영원한 사망인데 그 죄는 어디 가있습니까? 주님의 대형의 공로에 내가 지을 죄가 다 사해졌으니까 그래서 오늘을 살았는데 오늘 몰랐던 죄, 내일을 살고 보니까 내일 만날 때 내일이 오늘 되고 살아가다보니까 죄를 하나 짓습니다. ‘아 이런 죄도 있구나. 내가 이런 죄를 짓도록 되어 있었구나. 이 죄도 예수님의 대형에 얹혀졌겠구나’. 그래서 죄를 알고 내가 짓는 죄 알고, 짓고 있는 죄를 알고, 그래서 다시는 또 다시 그럴때는 그 죄를 싸워서 죄를 안 이기게 만들고 그리고 그 죄를 사해주신 주님의 그 대속을 알게 하고, 죄를 알게 하고 죄와 싸워 이기게 하고 그리고 그 죄 형벌, 믿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 대속으로 사함 받았으니까 죄 지어도 아무런 문제가 안 생기던가요? 자, 잠깐 너무 감이 멀어서, 지금까지 설명드린 것은 하나님의 법은 무한한 법입니다. 하나님이 무한하시니까. 그분의 법은 무한합니다. 그분의 법이 무한하니까 그분의 법을 어긴 죄도 영원토록 계속됩니다. 천년 가도 죄인이고 만년 가도 죄인이고, 징역을 천년쯤 살면 죄가 없어져야 되는데 하나님의 법은 무한한 거라서 억만년을 살아도 억만년 뒤에도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안 없어지니까 억억만년 살아도 그때도 죄인입니다. 그래서 사망은 영원한 사망이고 이걸 면할 인간이 아무도 없다 그말이지요. 이걸 예수님이, 하나님이 사람되신 대속으로 다 면해주신 것인데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안 어길 수 없고 다 지킬수 없는 법을 예수님이 대신 해주셨고 대신 다 지키고, 있는 죄는 다 도말하셔서 이 대속을 우리에게 입혀주셨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영원한 사망의 두려움으로 인한, 사망의 위협으로 인한 그런 두려움이 없이 우리 믿는 사람들은 죄와 더불어 싸워서 이길수가 있다 그말입니다. 생명줄이 있으니까 ‘이거 건너 가봐라’ ‘겁이 나서 못가겠는데요’ 그래서 가다 한번 떡 떨어졌는데 다른 사람은 떨어져서 비명을 지르면서 천길 만길 낭떠러지로 떨어져죽는데, 어떤 사람 보니까 가다가 한번 툭 떨어졌는데 톡 튀어올라 다시 올라오고 또 가다 또 떨어져도 또 올라오고, 그걸 눈으로 보니까 ‘봐라, 저 사람 보니까 생명줄이 있으니까 떨어져도 올라오지 않느냐? 너도 생명줄 보이지? 여기 있으니까 안심하고 가라.’ ‘그렇습니까, 안심하고 가지요’. 그래 가는 겁니다. 가다가 보면은 미끄러져서 넘어지면 나는 넘어져서 비명을 질렀는데 생명줄이 톡 튀어올려서 다시 원줄에서 또 다시 가게 만들고 또 가게 만들고, 요래 계속 가니까 믿는 사람은 영원한 사망의 두려움으로, 사망의 위협이 우리를 해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다 베풀어서 구비시켜놨는데,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가다 죄를 지어도 아무 문제가 안 생깁니까? 죄를 지으면 어찌 됩니까? 믿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지금은 신령한 시대니까 구약시대는 죄를 지으면 바로 죽었지만은, 지금은 신령한 시대고 이치의 시대니까 죄를 지어도 기능만 죽지 몸은 살아있으니까 그러니까 안 죽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살아있고 심신의 기능 죽는 것은 안 보이는데 아는 사람은 알지만은 안 보임에도 불구하고 믿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간섭이 있고 징계가 있어서 아프다 그말이지요. ‘아 죄를 지으니까 이런 고통이 따르는구나. 아프구나.’ 이 고통은 이 세상에서 매를 때리는 채찍이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영원한 이 죄로 인한 영원한 사망은 끝 없는 그런 사망이 되겠구나. 그래서 몰랐는데 현실 만날 때 ‘하나님의 법을 기준해서 살다가 보니까 내가 말씀을 어기니까 죄가 됐고 이런 죄도 있구나. 나는 이런 말씀 어기는 죄인이구나’. 이걸 알게 하고, ‘이런 죄를 안 지어야 되겠다’ 그래서 죄와 더불어 싸워서 죄를 이기는 실력을 기르게 하고 그리고 난 다음에는 그 죄 형벌, 죄와 싸워서 지면은 하나님의 징계도 있고 영원한 형벌을 생각하게 되니까 죄에 형벌을 알게 하고, 그래서 그 영원한 죄 형벌을 면해주신, ‘이런 영원한 형벌에 만약에 주님의 대속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되었을 것인가? 생명줄이 없었다면 어찌 될 것인가?’ 주님의 그 대속의 생명줄을 알게 하고, 그래서 ‘주님이 필요하고 대속이 필요한 것이구나’ 이걸 깨닫게 하고, 그리고난 다음에는 이걸 아는 만큼 예수님에 대해서 그분의 대속에 대해서 한없는 감사가 날마다 날마다 우리가 어두워서 몰라 그러하지 죄를 지을때마다, 죄와 더불어 부딪힐때마다, 이길때마다 주님 대속에 대한 감사, 주님에 대한 감사가 날마다 새롭게 한없이 자꾸 나와서 그게 자기 속에 쌓여져서 대속에 감사하는 그런 사람이 되게하시는 이것이 우리를 이 세상에 두시는 하나님의 뜻이고 목적이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음주쯤 한번 공부할까 싶은데, 우리는 잘 모르는데 하나님이라는 분, 그분의 구원 역사, 우리나라에 삼국시대까지 통틀어서 우리 나라가 굉장히 가장 컸던 때가 언제입니까? 어느왕 시대때인가요? 역사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은 우리나라가 저 중국에, 000선생님 지금 어딥니까? 옛날 그 요동땅이라는게. 지금 상당히 크지요 아마? 중국나라에 거의 제법 많은 땅이 고구려땅이었다 그러지요. 광개토대왕 그때. 그러니까 그 사람의 실력, 왕이 실력있고, 그사람 젊은 나이에 아깝게 죽어서 그렇지. 좀 오래 살았으면. 그 뭐 다 말이지만은. 그 사람이 어떠냐에 따라서 옛날에 징기스칸 이란 사람도 그랬고, 또 로마에 율리우스라는 그 사람도 세계를 거의 다 정복하다시피 그렇게 정복을 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의 실력있는 사람, 능력있는 사람의 그게 활동 무대라는 겁니다. 삼천리 반도 내 마음에 안 찬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섬나라지만은 통이 커서, 전쟁을 좋아하는지 통이 커서 요즘 자꾸 그 나라 민족주의로 들어가는데 문제가 많이 생기지요. 원래 민족성이라는 게 그래서 사람이 참, 지방성 민족성이라는 건 속이지를 못하는 겁니다. 한번 그랬던거는 꼭 그러한다는 기질이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섬나라 좁은데 있으니까 대륙이 탐이나서 중국 잡아먹으려고 그렇게 난리를 치지 않습니까. 중국만 잡아먹었으면 만족했을건데 아마 일본이 중국만 잡아먹었으면 중국이 지금 일본화 안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중국만 가지고 양이 안차니까 자꾸 뻗어나가서 동남화를 거의 다 잡아먹다시피 다 삼켰었는데, 간이 부어가지고 이제는 미국까지 잡아먹으려 하다가 그만 망해버렸지요. 그게 말하자면은 그 사람의 능력, 활동 무대입니다, 활동무대. 어떤 사람은 좁은 그냥 자기 집한채 거기 만족이고, 어떤 사람은 자꾸 뻗어나가서, 기업하는 사람도 삼성같이 세계로 막 뻗어나가는 사람, 김우중씨같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그러니까 어쨌든 뻗어나가자. 세계 경영, 김우중씨의 표어가 ‘세계 경영’ 이었지요. 이 세계를 한번 다스려보자, 참 잘난 사람입니다. 실력있고 똑똑한 사람이고. 그런건데, 그런것이 말하자면 그 사람의 활동무대다 그말이지요, 활동무대. 하나님의 역사는, 그분의 활동무대는 영원이라는 겁니다. 인간도 한 사람이 지구지만은, 그 지구에서 어떤 사람은 지구 전부를 다스려야 양에 차는 그런 사람 있고 그 사람의 활동의 범위가 얼마나 넓겠습니까. 그 범위안에 들어가는 그 구조나 이런게, 조직체계가 또 얼마나 들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라는 그분의 구원의 세계를 우리가 좀 파고 들어가봐야 되겠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깊도다 하나님의 그 모든 세계, 오묘함. 이걸 인간이 도무지 측량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무한하신 하나님, 그분의 재정하신 그 법, 그 법을 어긴 인간의 죄, 영원한 사망 이게 전부 하나님에게서 뻗어나온 것인데 이 모든 것이 다 무한하신 하나님에게서 뻗어나온 인간의 범죄, 하나님의 무한한 법을 어긴 죄로 인한 영원한 사망의 모든 것을 역시 하나님이 사람되신 예수님의 대속으로 완벽하게 다 해결해주신, 그러기 때문에 그 대속의 범위가 하나님의 세계(?) 범위까지 다 뻗어서 어디까지 그 여파가 미쳐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무한히 영원히 뻗어나가는 것이 주님 대속이다 하는 겁니다. 죄라는 것도 그래서 영원히 영원히 가도 없어지지 않는게 하나님 율법을 어긴 죄고, 이러니까 죄에 대한 두려움도 우리는 알아야 되고 이 죄를 다 도말해주신 주님 대속도 알아야 되고 이래가지고 자꾸 말씀을 바탕으로 삼아서 성경 말씀은 많지만 이게 유한이고 이 말씀을 가지고 이 말씀 속에 들어가서 자꾸 기도하고 연결시켜보고 그래가지고 파고 들어가서 우리 자신의 범위를 넓혀가야 됩니다. 내가 몸으로 다니지 않아도 명상으로, 기도로 해서 우리 자신의 범위를 자꾸 넓혀서 그 넓이가 하나님의 구원 세계의 넓이로 자꾸 뻗어나가는 그런 우리들이 되어야 되겠다.
그래서 오늘 오전 오후에는 ‘죄에 대한 지식’이 말씀에 제목인데, 그 죄는 하나님의 무한성하고 연결되어있는 그런 죄라. 그러므로 그 죄의 모든 해결은 하나님만 해결하실 수 있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해결하셨고 그 해결은 하나님의 모든 구원 역사와 연결되어있고, 그러므로 기독교라는 것은 하나님 한분에게서 모든 것이 발원된 그분이 전부가 된 이것이 기독교고 거기 맞춰나가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하신 법이라는 그 법, 그 법은 하나님께서 모든 존재, 하나님과 모든 존재 전부에게 필요해서 재정해놓으신 법이고 규칙인데, 그 법은 약속인데 그 법을 어기면 바로 하나님과 모든 존재와 대립이 되어지니까, 열 명 다니는 작은 회사에서 정해놓은 법, 사칙이 있는데 한사람이 ‘나는 이 회사 법에 안 맞다. 내 마음대로 하겠다’ 그러면 그 한사람은 나머지 아홉명하고 마찰이 되는 것이고 마찰되다가 이 한사람이 이기면 아홉명을 점령하겠지만은 못 이기면 이 한 사람은 튕겨나가는 겁니다. 안 튕겨나가면 늘 마찰로 괴로워지는 것이고. 그래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성경이 아니고 신앙생활 아니고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가 아닌 이 세상 사는 법은 그냥 하여가처럼 그래 살면 되는 겁니다. 이런들 어떠며 저런들 어떠냐. 물결이 흘러가는대로 그냥 따라내려가면, 시대의 조류와 풍조 거기 따라서 몸을 맡겨놓고 흔들흔들 따라가면은 자연스럽게 따라가고 마찰없이 그냥 가는 그게 가장 편안한 세상 생애를 사는 법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로 말하면. 잘날 것 없고 못 날것 없고 적당히 숨어서 그냥 대세를 따라가지고 그렇게 따라가면 되는데, 믿는 사람은 그리 살 수가 없기 때문에 신앙과 관련된 것이 아니면 대세를 따라가고, 000선생님? 어떻게 하고? 신앙과 관련된 것이 아니면 대세를 따라가고, ‘군에 가서 열심히 훈련 받아 1등을 해서 훈장 받아야 되겠다’. 그거는 믿는 사람이 할 자세는 아닙니다. 거기서 안심하고 가서 잘하면 좋겠지만은. 거기는 그냥 대세를 따라가고 보호색을 입어야 되고 대세를 따라가고, 신앙과 관련된 것이면 이거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저는 못합니다. 그런일이 요즘 잘 없겠지만은. 세상 모든 생활이 다 그렇습니다. ‘공부는 끝을 봐야 되겠다. 기어코 내가 1등을 해서 해야 되겠다’. 그럴 필요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런 길을 만들어주십니다. ‘해봐라’ 그게 아니면 대세를 따라가는 겁니다. 신앙생활에 필요한만큼만 하고 나머지는 신앙생활에 전심전력을 하고. 신앙생활만큼은 양보하지 않고, 이것이 이 세상이란 것은 다 거기서 거기고 참 여러 가지 세상을 보면은 연구할게 많고 생각할게 많고 우리가 공부할것이 참 많습니다. 인간의 심리도 보면은 그렇고 일어나는 사건들도 보면 그렇고 다 거기서 거기고 거기서 거긴데, 그게 그건데 다 보면은 뭘 그렇게 악을 쓰고, 시대 변하면 다 변하는 것이고 그게 인간들의 심리고 마음이고, 원래 6천년 역사가 그런 것이고 하나님이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놨는데. 그 하나님 만들어놓은 그 세상을 거슬러가지고 제가 뭘 하겠다고. 하는만큼 고통입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내가 1등 해야 되겠다 싶은 사람은 의지는 좋고, 또 꿈도 좋고 목적도 좋습니다.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래가지고 열심히 최선 다하는데, 있는 힘을 다해서 하는 것 까지는 하고 그러나 마지막 결과는 1등이 안되면 큰일났다, 그래가지고 1등 안되면 죽을 것처럼 그렇게 달려드는 사람은 그 사람은 문제가 있는 겁니다. 욕망은 좋고 꿈은 좋은데, 그래서 저는 학생들 수능 시험을 친다든지 목표를 가지고 달려가면 저는 꼭 그래 말합니다. 안 믿는 세상말이지만은 뭐라 그러지요? ‘진인사대천명’이란다.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하되, 안 믿는 사람들이 하는 말인데 신앙과 연관이 되어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 하는 것이고 결과는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일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으되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다 이게 성경입니다. 그런데 기어코 내가 해야 되겠다 그러면 그게 바로 내가 바로 하나님이 되야 되겠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너 기어코 해야 되겠어? 나는 기어코 안되도록 하겠다’ 누가 이기겠습니까? 그래서 욕심이란 것은, 모든 사람의 고통은 욕심이 들어서 만드는 것이지 이것 뽑아내고 나면 이 세상을 그냥 복지부동으로 그냥 편안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맡겨놓으면. 그러기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겠다. 내 짐은 싣고 내 멍에는 가벼우니가 내게 와서 나한테 배워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만들어주겠다’. 주님이 지신 짐, 멍에는 우리하고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신 것만 했지요. 그게 우리들의 할 일입니다. 구원세계를 깨닫고 죄를 생각을 하고 관련된 하나님의 무한성, 거기서 뻗어나온 이 무한성을 좀 생각해봤습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것은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죄를 알게 하시고, 죄와 싸워서 이기는 실력을 기르게 하시고 죄의 형벌을 알게 하시고, 그러므로 주님의 대속의 필요성을 알게 하시고, 이 대속의 공로 베풀어주신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한없이 날마다 현실마다, 죄를 만날때마다 감사해서 날마다 감사로 감사로 새롭게 되어지는 이런 우리를 만드시기 위해서 이 세상을 주셨고 현실을 주신다는 것 기억하십시다.
20140216 주후
고린도전서 15:55-58
세례 성찬 준비로 오늘 죄에 대한 말씀을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성찬식은 세례 받으신 분들만 참석하는 것이고, 그래서 성찬식은 세례식의 연장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세례나 성찬은 그 중심이 예수님의 대속이고, 예수님 대속은 예수님의 고난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그 역사고, 그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그 역사는 죄와 관련된, 죄를 있는 죄를 형벌받아 다 도말하여 없애고 또 죄 없는 그 생애를 하신 것이 예수님의 고난의 생애 죽으심이고 마지막 목숨까지 바치신 생애와 고난이고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찬식을 준비한다 그러면 예수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생각해봐야 되고, 그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원인되는 죄를 생각해봐야 됩니다. 그래서 죄가 무엇인가? 죄는 어디서 생겨졌는가? 사람이 왜 죄를 짓게 되는가? 죄를 안 지을 수는 없는 것인가? 죄를 지으면 그 결과는 어찌 되는가? 또 그 죄를 없애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런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는 겁니다.
본문에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을 향해서 외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명상중에, 기도중에 그렇게 외쳤겠지요.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란 것은, 글자 그대로 말하면 죽고 망한다는 뜻이고 쉽게 말하면 사망이라는 말의 의미는 죽음을 뜻하는 겁니다. 사망은 죽음이라 그리 말합니다. 죽음이라 그러면 사람들이 다 생각하기 싫어하고 듣기를 싫어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단어고 그 일입니다.
기독교는 이종교와 다르지만은 그래도 하나의 종교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종교와 연결된 표현이 철학이라는 것이 종교와 연결된 게 있는가, 철학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니까 ‘철학이 무엇인가?’ 이게 많은 사람들이 철학이라는 말 자체도 어려운 말이고, ‘철학은 무엇이다’고 정의를 내리지를 못한다 그럽니다. 저는 공부를 많이 안해서 잘 모르는데, 공부한 사람들 말 들어보면 모든 학(學)중에서 가장 최고의 ‘학’, 가장 근본되는 ‘학’이 철학이다 그런답니다. 철학의 ‘철’자가 슬기, 지혜 이런 ‘철’자인데 말하자면. 그래서 철학이란 것은 지혜를 사랑하는 ‘애지(愛智)’라 그러던가요. 그것을 연구하는게 철학이다 그리 말한다는데, 이거는 좀 범위를 넓히면 인생에 대해서, 지혜에 대해서, 이 세상에 대해서 그런 것을 좀 폭넓게 살펴보는게 철학이다 그리 말한답니다. 그중에서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연구하는 것이지요. 인생. 인간이 사는 세상은 또 무엇인가? 또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되는가? 이런 것을 공부하는 일종의 인문학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데 또 모든 세상의 모든 ‘학’의 근본이 ‘철학’이라 그리 말한답니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우리는 종교인들입니다. 이종교와 다르지만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종교인들이고, 종교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 세상을 향하는 것이 아니고 사후세계, 내세를 지향하는 것이 종교고, 그러기 때문에 믿는 성도들은 이 세상보다는 죽음 너머 세계를 바라보고 그 세계를 준비하는 것이 믿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이 표현, 이 단어, 이 사실은 늘 우리가 염두해두고 사는 것이 지극히 마땅하다 그리 말할 수 있고, 그래서 성경에도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사람이 이것에 마음을 두고 살아라고 말씀을 하신 겁니다. 이런것을 우리가 하나의 교양적으로, 하나의 깨우치는 경고나 경성적으로만 듣고 지나갈 것이 아니고 우리가 잘 하지 못해도 사람이란 것은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고, 조삼모사라는 것은 원숭이들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사람들에게 꼭 같이 해당이 됩니다. 그 말은 원숭이를 가르치기 위해서 만들어낸 말이 아닙니다. ‘조삼모사’라는 말은, 원숭이를 비유해서 원숭이같은 그런, 우선은 우선 좋은 것 찾고, 우선 먹기에는 곶감이 달다 그런말도 있지요. 그러니까 나중을 생각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 이익만 찾고, 그것만 쫓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많고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그런 하나의 짐승들, 그들을 보고 비유적으로 말을 만들어낸 것이고, 그런 모든 말들은 인간사의 통계로써 나오는 겁니다. 많은 사람을 접해보니까, 사람들은 꼭 보니까 아침에 세 개 주고 저녁에 네 개 주면 난리를 피우다가 아침에 네 개 주고 저녁에 세 개 주면 사람들은 좋아하더라, 말하자면은 나중은 어찌되든지 지금 좋으면 좋아하더라 이것이 인간들의 대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더라고 통계적으로 살펴보니까 그렇다는 것을 하나, 그래서 그리되지 말라고 만들어낸 말들이 그런 말입니다. 한국 사람은 저 어릴때 종종 들은 말 중에서 ‘한국 사람은 외상이라 그러면, 공짜라 그러면 양잿물도 둘러마신다’, 양잿물이 뭔지 압니까? 학생들? 젊은분들 양잿물이 뭔지 압니까?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양잿물은 옛날에 비누 만드는 재료입니다, 비누. 아주 독한 그런 것중에 하나인데, 사람이 잘못먹으면 많이 먹으면 죽는 겁니다 그거. 그런데 공짜라 그러면 양잿물도 둘러마신다, 외상이라 그러면 소도 잡아 먹는다 그런 말들이 있습니다. 공짜니까, 외상이니까 당장 집안이 거덜나든지 우선에 급하니까. 그래서 특유의 한국사람의 카드빚같은 이런것도 일종의 외상이지 않습니까? 할부같은 것. 이거 전부 우리 나라 사람들의 특성중에 하나입니다. 나중을 생각지 못하고 우선 쓰고 보자. 먹고 보자. 가지고 보자. 우선 놀고 보자. 이게 한국 사람들의 대단히 좋지 않은 특성, 고쳐야 될 특성 중에 하나인데, 그러니까 이런 걸 좀 고쳐서 뒤를 생각하고 좀 멀리를 바라보고 궁극을 찾아 들어가는, 그중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종교인들이니까 이 세상만 보고 살지 말고, 세상 너머 나중에 어찌되는지, 죽음 너머를 바라보자 이게 기독자들의 기본적인 자세인데, 우리가 그래 살고 있습니까? 지금 뭐, 현실. 그래서 당장 직장생활이 당장 급하니까, 당장 장사가 바빠 죽겠는데, 공부할 시간도 없는데, 당장에 놀 시간도 없는데, 집안일이 바쁜데, 눈앞에 있는 그것 바쁘다 보니까 거기 매여서 하루하루 살아가다 보니까 1년이 금방 지나가고 참 세월이 빨리 간다는 것이, 젊을때는 그래 생각도 했습니다. ‘나이가 많으면 몸도 일을 많이 못할 것이고, 그러니 일을 많이 안할 것이고, 시간 좀 많이 남지 않겠는가? 어떤 분들은 보니까 할 일이 없어서 그러는데, 시간이 남아 지루해죽겠다는데 나이가 들어가면 시간이 없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도 해봤는데, 보니까, 나이가 들어가니까 시간이 어찌나 빨리 가는지. 젊을때 하루하고, 나이 5-60 되어서 하루가 틀립니다. 몸이 다르니까 시간이 다르더라 그말이지요. 여러 가지 생각해보니까 ‘왜 이렇게 하루가 빨리 지나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루에 한 것도 없는데 시간 다 지나가버리고, 한주간을 돌아보면 뭐 했는지 꼽아보면 한 것도 없는데도 시간은 다 지나가버렸습니다. 그리 생각해보면은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그게 몸이 옛날같지 않고 여러 가지 그런 작용들이 가만 보니까 있더라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사람이 그래가지고 시간이 그만 하루 하루 그래 지나보내는데 그게 1년가고 이태가고, 10년 20년가서 어느새 머리에 흰머리가 나고, 한 30대 후반만 되면 벌써 흰머리가 나올껄요? 40대되면 흰머리가 숭숭 나기 시작을 하고. 그러니까 그게 인생이니까, 그렇게 허무하게 지내보낼 것이 아니고 좀 생각 좀 해봐야 되겠다 그말입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무엇이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뭐냐? 6천년 인간 역사에 죽음을 이기는 용사가 없고, 죽음을 이긴 장사가 없고, 죽음을 이긴 머리 좋은 사람이 없고, 죽음을 돈으로 산 재벌이 없고, 죽음을 물리친 장군이 역사에 없으니, 6천년 인간역사에 그 사람 숫자가 상당히 많을건데, 전인류를 다 정복하고 집어삼키고 굴복시킨 죽음이라는 이놈이 도대체 무슨 수로, 무슨 무기를 가지고 모든 사람을 다 정복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뭐냐, 너의 무기가 도대체 뭐냐? 사망의 쏘는 것은 뭐라고요? 000? 사망의 쏘는 것은? 읽어봐요 성경. 크게. 죄라 그랬지요?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사망의 무기는 죄다. 그러면 죄가 있으면 사람은 어쨌든 죽는다 그말이지요. 죄를 두고 사망하지 않을 사람이 없고, 죄 없는 곳에 사망은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죄라는 것이 무엇이냐? 죄는 법을 어긴 것이 죄다 그리 말했습니다. 죄라는 것은 법을 어긴게 죄다. 법이란 것은 약속인데, 그러면 세상에는 법이 많고, 법이 많다 말은 죄가 많다 그말입니다. 나라마다 법이 있고, 단체마다 법이 있고, 사회마다 법이 있고, 그것을 어기는 그런 죄들이 많이 있는데 죄를 지으면, 사망이 되는 그런 법, 법이란 것은 죄를 죄로 정하는 잣대가 되고 기준이 되는 것이 법이다. 그래서 법이 있기 전에는 죄가 죄로 나타나지를 않았다 그랬습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라서, 사망이 사람을 삼키고 죽이는 그 무기가 죄인데, 그 죄를 죄로 정해서 영원히 사망시키는 그 법이란 것은 세상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법이라. 하나님이라는 분은 모든 존재의 근본이며 표현하자면 궁극이라. 그래서 하나님이 계신 그때부터 모든 존재는 있게 되어졌고 그러니까 그래서 어려운말로 무(無)가 먼저냐 유(有)가 먼저냐? 무엇이 먼저입니까? 무에서 유가 나왔느냐, 유에서 무가 나왔느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무라는 것은 없는 것이고 유라는 것은 있는 것인데, 뭔가 있고 그다음에 거기서 뭐가 나왔느냐? 무에서 유가 나왔느냐? 유에서 유가 나왔느냐? 그러니까 무에서 유가 나왔느냐? 유에서 유가 나왔느냐 그럴때, 무와 유를 왜 공부하는 겁니까? 사망이 있고 그다음 사망의 원인되는 죄가 있고, 죄의 정죄 기준이 되는 율법이 있고 그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 하나님이 바로 모든 존재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근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라는 분은 없다가 생긴것이 아니고 그분이 계신 그 이후로 모든게 있게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은 ‘무에서 유가 나왔다’ 이게 진화론자들이고 안 믿는 사람들의 이론입니다. 성경은 반대입니다. 유에서 유가 나왔다. 하나님이 계셨고, 그다음부터 모든 것이 다 있게 되어진 것이다 그리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근본이든지 모든 존재 근본 궁극을 발견하려면/ 찾아내려면,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인간의 궁극은 결코 나오지 못합니다. 인간역사 6천년이고, 주님 재림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겠지만은 어떻게 머리 좋은 사람도 아무리 오묘하게, 심오하게 깊이 파고들어가서 찾아봐도 하나님이라는 이 분을 찾지 못하고는 인간의 궁극의 의문점은 해결되지를 아니합니다. 그리고 신앙이란 것은, 하나님을 찾아야 비로소 신앙이고, 그 하나님을 찾되 자기 주관대로 찾으면 자기 주관에 갇히는 것이고 자기라는 것은 결국 무엇이 만들어낸 겁니까? 나라는, 자기 자신이라는 자기의 지식이라든지 지혜라든지 경험/체험이라든지 자기 아는 모든 것은 결국 이 세상이 만들어낸 것이고 세상 속에서 그런 걸 접하면서 만들어낸 자기기 때문에 그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뜨려지지 않으면 말씀과 하나되고, 말씀에 붙들려서, 그 말씀이 가르치는 하나님께 붙들린 그 자기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결코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이 당신을 스스로 알리신, 하나님이라는 분은 당신 자신이 당신을 알려서 우리가 알게 됐지, 인간이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 아니고, 발견할 수도 없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제된 믿음이란 것은 뭐라 그럽니까? 믿음은 뭐라 그러지요? 하나님을 아는 것은, 믿음이란 것은 하나님을 아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입니다. 그 하나님을 아는게 믿음 전제인데, 그 하나님을 알리는 것은 하나님 당신이 알려줘야 알지, 인간의 노력으로 알아지는게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제된 믿음이란 것은 뭐라고요? 000? 믿음은 뭐라고요? 믿음은 은혜며 선물이라 하는 겁니다. 믿음은 은혜고, 하나님이 그냥 주시는 것이고 선물이지, 인간의 소원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을 알아야 그때부터 신앙은 비로소 출발이 되어지는 것이고,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고, 거기서 모든게 나와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는 거기서 나오는 것이 참된 모든 것이 되고,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그 지식,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그 신앙생활의 그 여파가 인간의 모든 도덕과 인간관계와 자기 모든 생활에까지 미쳐 나가야만이 그게 바른 것이 되어지는 것이지, 하나님은 끊어지고 하나님 없는 인간끼리의 도덕이 아무리 바로 되었다 하더라도 이거는 생명이 없는 것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과 관계된, 하나님으로 인한, 말미암은 것이 뻗어나가서, 그게 뻗어나가가지고 그다음에 그것이 인간관계 도덕에도, 생활에도 다 미쳐나가는, 마치 예를 들자면 자동차가 도로를 붕 지나가면 자동차 지나감에 따라서 연기도 나고 먼지도 일어나는 것처럼, 그런데 그 먼지라는 것은 자동차가 딱 서면은 먼지는 어찌 됩니까? 000씨 먼지 어찌 되요? 요즘은 포장도로라서 먼지가 안나는데 비포장도로에 자동차 다니면 먼지 일어나지요? 그런데 자동차 딱 서면 먼지는 좀 있으면 싹 가라앉지요. 그러다 자동차 지나가면 또 일어나고. 자동차 지나가는데 일어나는 먼지는 자동차의 움직임으로 인해서 생겨지는 거지요. 기독자의 도덕이라는 것은, 인간관계에 도덕이란 것은, 인간과 인간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 관계에서 나와서 인간관계로 뻗어가야 그게 참된 기독교 신앙이고 도덕이 되는 겁니다. 그게 빛으로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이게 기독교 도덕뿐 아니고 믿는 성도의 모든 생활 전부다가 그러합니다. 성도의 인사성, 우리 학생들의 올바른 인사성이 기본적으로 타고난 착하고 예의바른 그런 학생이라서 인사 잘하는 것도 귀한데, 그보다 더 귀한 것은 그 학생이 원래는 막되먹은 학생인데 말씀을 듣고 하나님 말씀을 배워서 하나님을 알고나니까 하나님이 말씀이 예수 믿는 사람은 인사를 잘하라고 그러시더라 그래서 인사 잘합니다. 그 학생이 원래 착한 학생보다 몇 배나 더 귀한 학생입니다. 귀한 인사입니다. 이거는 하나는 하나님을 말미암은 것이고 하나는 그냥 인간으로 말미암은 거니까, 하나는 궁극의 뿌리가 영원에 박혀 있는 것이고 하나는 거기 뿌리가 없는 겁니다. 뿌리가 없는 것은 시간 지나면 말라버리는 겁니다. 뿌리가 있는 것은 안 마르는 겁니다. 모든 생활이 다 그렇고, 그러니까 신앙이란 것은 하나님에게서 다 뻗어나와야 되고 그래서 사망이 있고, 죄가 있고, 율법이 있고 하나님이 있는데 이 모든 사망도 죄도 율법도 파고 들어가면 어디서 나왔다는 말입니까? 결국은 하나님 한분에게서 다 나왔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자존하신 하나님이 무한하신 분인데, 무한하다 말은 영원하다 말이지요. 수명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지만은 그분이 계셨고, 그분이 수명이 천년 만년 끝이 없이 영원히 계속 되어지고 그분의 수명이 영원하니까 그분의 활동도 영원하고 그 범위는 끝없이 사방으로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무한한 그런 활동이 되어질 수 밖에 없고, 그래서 그분의 수명에 무한에 따라서 그분의 지식도 지혜도 모든 활동역사도 다 무한히 뻗어나가고, 그러므로 그분이 정해놓으신 그 법도 무한합니다. 정권자가 정권을 잡으면 아무리 민주주의 우리나라 그래도 5년, 제법 정치를 잘해도 그 정치 잘한 것을 가지고 계속 써먹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정권 잡은 사람이 정치를 굉장히 잘해서 국민들의 신뢰를 전폭적으로 받으면 다음에 대통령 나설 사람은 이번 정권을 힘입어서 이쪽편으로 줄을 설 겁니다. 그런데 지금 대통령이 인기가 없고 지금 대통령 줄 잡고 있다가는 다음 대통령 선거에 떨어질 것 같으면 딱 그만 대립을 딱 세워가지고 ‘나는 지금 대통령과 다르다’ 이건 뭐 우리가 몇 번을 보지 않습니까? 선거때마다. 그래 하는 겁니다.
그 권력이라는 것이 오래 안간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법이란 것은, 그래서 법이란 것은 사망에 쏘는 것은 죄고 죄의 권능은 율법인데, 율법의 권능 율법의 힘은 어디서 나오느냐? 법의 힘이란 것은 법을 세운 입법자의 권력에서 나오는게 법입니다. 그 입법자가 권력이 없으면, 힘이 없으면 법이란 것은 죽은 법이 되는 겁니다. 법은 세워놨는데 법 세운 그 사람이 힘이 없는데 ‘너 법 세웠어? 그 법 내가 깔아뭉갤꺼니까 한번 해봐’. 그러면 지금은 그래 되있지만은, 옛날에는 그랬잖습니까. 왕이 있는데, 그 왕이 힘이 없으면 역적이 일어나서 역성 일으켜가지고 왕 없애버리고 ‘내가 왕이야 할 말 있으면 해봐. 달려 들어봐. 모조리 그냥 할꺼니까’. 그러니까 법 세워봐야 아무 의미도 없는 거지요. ‘반역? 역적? 내가 왕이야. 네가 역적이지’. 그래서 법이란 것은 결국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법이란 것은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고 권력은 힘이라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기독교의 논리를 파고 들어가면 마지막에는 힘의 논리가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힘의 논리. 하나님을 이길 자가 있으면 나와봐. 그런데 그 힘의 논리가 하나님이 절대자고, 그분이 전능자인데, 그분이 주권자인데, 그래서 그분을 이길 존재가 없는데 인간이란 것은 생각이 있고 또 감정이 있는 것인데, 지성이 있는 것인데 힘만 가지고 누르면 자유성이 있는 것인데 인간이 원해서 따라 갑니까? 그러기 때문에 가장 강한 힘 있는 그분이 본성이 사랑이라, 본질이 사랑이라, 또 베푸는 시은자라, 또 그분이 지공과 지성이라. 그러니까 힘으로도 그분 능가할 자가 없고 사랑도 그분보다 큰 자가 없고, 공평도 그분보다 공평한 자가 없고, 완전도 그분보다 완전한 자가 없고 이러니까 어느면을 다 따져봐도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을수가 없는데 그 굴복이란 것이 강제 억지가 아니고, 논리로 따져보니까 원하고 원함으로 ‘과연 그러합니다’. 노아 홍수때 하나님께서 전인류를 홍수에 빠트려 여덟 식구 빼놓고 다 죽여도 그 사실이 모든 존재가 다 따져봐도, 우리는 몰라서 그러하지만은, 그 앞에 가면은 ‘과연 하나님이 그렇게 모조리 다 죽여 없애버리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게 선입니다.’ 그리 찬양할 수 밖에 없다 그말입니다. 우리는 몰라서 그러지만은. 앞으로 가면 그게 다 드러난다 그말이 되겠지요. 그래서 이 하나님에게서 모든게 다 나와서 그러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이 법을 정했고, 그 법은 하나님과 같이 지공과 지성의 법이고 사랑의 법이고 어느 곳에 다 맞춰도 틀림없는 진리의 법이고, 모든 존재가 다 자유할 수 있는 자유의 법이고, 끝이 없는 영원이 법이고 이 법을 하나님께서 재정해주셨고 이 법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말이고, 이 법을 어기면 이 법에 의해서 정죄 받아서 사망이 되는데, 하나님이 무한하시니 법도 무한하고 이 법이 무한하니 법을 어긴 죄도 무한하고 죄가 무한하니 사망도 무한하고 영원하고 이리 되는데 이 법을 유한한 인간이 지킬 자가 없고 어기지 않을 자가 없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법을 만드셨으나 이 법은 인간이 지킬 수 있는 법이 아니었습니다. 어길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이걸 하나님께서 계산에 다 넣고, 무한한 법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고 그 법을 지키라고 주신 분도 하나님이고, 유한한 인간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고, 그런데 인간이 그 법을 지키지 못할 줄 알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 법을 주셨는데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그 법을 지키다가 결국은 못 지키고 어겨서 정죄받아서 영원한 사망을 당하게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망한 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죄를 없애버리기 위해서 사람으로써는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이 법을 안 어길 수 있고 지킬 수 있으니까, 그래서 부득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는데,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지만은 하나님이 사람과 끊어지고, 사람 혼자만 있으면 그 사람은 또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돼서 일위가 되어서, 하나님인데 사람이고 사람인데 하나님이고, 이래 일위가 되신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공 지성의 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았고, 그래서 한면으로는 인간이 어긴 그 법의, 법을 어긴 죄의 값을 한면으로 대신 감당하는 대형으로 사신 것이 예수님의 생애고, 대형으로,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인성 입은 그 분이 하나님의 법을 그대로 다 지켜서 행하신 그게 또 한 생애고, 그래서 대형과 대행, 하나 더하면 하나님과 화친한 것이고, 이래가지고 이 세상에 사시고 마지막에 죽으시기까지 그래하신 이것이 예수님의 대속의 생애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대속의 공로를 입은 사람은, 예수님이 베푸신 대속의 공로를 입은 사람은 그 대속의 공로 안에 우리들의 모든 과거 지은 죄, 우리로 말하면 나기전, 오늘 여기있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예수님은 세상에 오셨었고, 그분이 오늘날 이 시대 태어날 우리들의 죄까지 하나님의 전지의 지혜로 미리 다 당겨서 예수님의 그 대형에 다 짊어지었고, 또 우리들의 남은때 평생 이 땅에서 살면서 지을 모든 죄를 나는 모르는데 하나님은 그를 아시기 때문에 내가 지을 죄를 다 미리 당겨가지고 예수님의 대형에다가 지워서 얹어가지고 대속의 공로를 다 베풀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이 세상생활은 예수님 십자가 대속의 공로로 인하여 죄로 인해서 눌리고 사망받는 그런게 다 없는, 찬송할 때 51장 할 때, ‘너희 죄 사해주사’ 3절에 그다음 뭡니까? ‘너희 죄 사해주사 기억도 안하시네’ 그 찬송할 때 참 한편으로 애매합니다. ‘하나님이 결코 잊어버리는 분이 아닌데 어떻게 우리 죄를 기억도 안한다 그럴까’ 하고 가사를 생각을 하는데 그대 느껴지는게 ‘아 주님의 대속의 역사로 적용시킨 그 죄,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대형의 공로를 베푸시므로 사죄의 공로 주신 그 대속역사에서 우리 죄는 그분이 기억도 안 하신다’는 그런. 그래서 우리들이 주님의 대속을 입은 우리들로써는 그 죄로 인한 영원한 형벌 그거는 우리가 완전히 다 주님 대형으로 다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붙들려서 법을 지키지 못하거나 또는 한번만 어기면 영원한 사망이 되어지는 것인데 우리들이 수도없이 어길수밖에 없는 그 평생의 모든 죄를 주님이 대신 짊어지고 값을 다 받았기 때문에 지옥의 형벌이 우리에게는 없다 그말입니다. 비유가 될지 모르겠는데, 공중에서 외줄을 하나 걸어놓고, 외줄 걸어놓고 이쪽에서 여기까지 높이 한 100m 높이에서 줄을 타고 건너갑니다, 예를 들면. 그럴일은 없는데 예를 들면 줄을 타고 건너가는데 그 줄을 타고 건너가는데 딱 떨어지면 바로 죽지 않습니까? 그런데 모든 사람이 줄을 타고 건너가는데, 그 줄을 타고 건너가는데 한번 딱 떨어지면 죽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줄을, 거기다가 떨어지면 다시 통 튀어올라가지고 다시 딱 서고, 또 떨어지면 톡 튀어올라 다시 서고 있는 그런 원줄에 매여있는 보조줄, 생명줄이 있어서 그 생명줄을 딱 걸고 있는 사람은 줄을 타고 가다가 떨어지면 줄이 탁 튀어올라서 다시 걷게 하고 다시 걷게 하고. 그 사람은 아무리 떨어져도 떨어져 죽을 염려는 없지 않습니까? 생명줄이 있으니까. 떨어져 죽을 염려가 없으니까 떨어지면 다시 올라가서 또 가고, 떨어지면 또 올라 또 가고 요래 될 수 있는 사람. 그런데 이 생명줄이 없는 사람은 줄을 타고 가다가 한번 똑 떨어지면 그길로 죽는, 말하자면 예를 들자면 이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데 주님 대속의 생명줄이 있어서 법을 지키다가 죄를 지으면 대속이 또 다시 우리에게 대속의 생명줄이 우리를 다시 끌어올려서 넘어졌으니까 또 다시 지켜라. 또 가다가 또 지키면 지키고 못 지키면 또 톡 떨어지면 또 다시 지켜라. 그래가지고 평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이 법을 지키는 그 연습을 시키시는 것이 우리들의 세상 생애고, 그 연습을 할 수 있도록 생명줄을 만들어주신 것이 주님의 대속이다 그말입니다. 이 대속이 없는 사람, 대속의 공로가 없는 사람들은, 아담의 범죄 한번으로 이미 영원한 사망에 떨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가 없는, 원래 그게 하나님의 법입니다. 무한한 법이니까. 10년동안 안 어기고 지켜도 10년만에 어기면 영원한 사망입니다. 외줄타고 가다가 100m를 가다가도 톡 떨어지면 죽는 것. 길이 너무 길어서 몇 키로 되는데, 1km 가다가 톡 떨어지면 죽고, 다 갔는데 톡 떨어지면 죽고 그리되는데 생명줄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떨어져도 다시 올라갈 수 있는 것처럼, 안 믿는 사람들 주님 대속을 입지 못한 사람들은 한번 범죄로 영원한 사망이 되는데 우리는 그 대속의 생명줄이 있기 때문에 현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리 죄를 지어도 그 죄로 인한 영원한 사망에 그런 끝이라는 것이 없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근거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들에게 현실을 만들어주신 것은 바로 이 세상 현실에서 내가 세상을 살아가다가 그 현실 속에 해당된 하나님 말씀을 계속 지켜 나가고, 지키다가 죄를 짓게 되면, 말씀을 어기게 되면 거기서 또 다시 죄라는 것은 ‘아 이게 이런 죄도 있구나. 또 이런 죄도 있구나’. 그 죄를 알게 하고, 한번 그 죄를 알았는데 싸워서 이기면 통과하고 못 이기면 그 다음에 또다시 그와 같은 현실을 주셔서 시간은 달라도 현실 주셔서 또 죄로 더불어 싸워서 이기게 만들고. 그래가지고 현실을 주시는 목적은 우리들이 내가 몰랐던 죄, 우리는 아직 살지 않았으니까, 내일 지을 죄를 내가 모르지 않습니까? 내일 내가 무슨 죄를 지을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아십니까? 내일은 아직 안 살았으니까 모릅니다. 그런데 내일 내가 지을 죄는 이미 내가 내일 죄를 지을지 안 지을지는 모르겠지만은 죄가 있다면 내일 지을 죄는 그 죄도 지으면 영원한 사망인데 그 죄는 어디 가있습니까? 주님의 대형의 공로에 내가 지을 죄가 다 사해졌으니까 그래서 오늘을 살았는데 오늘 몰랐던 죄, 내일을 살고 보니까 내일 만날 때 내일이 오늘 되고 살아가다보니까 죄를 하나 짓습니다. ‘아 이런 죄도 있구나. 내가 이런 죄를 짓도록 되어 있었구나. 이 죄도 예수님의 대형에 얹혀졌겠구나’. 그래서 죄를 알고 내가 짓는 죄 알고, 짓고 있는 죄를 알고, 그래서 다시는 또 다시 그럴때는 그 죄를 싸워서 죄를 안 이기게 만들고 그리고 그 죄를 사해주신 주님의 그 대속을 알게 하고, 죄를 알게 하고 죄와 싸워 이기게 하고 그리고 그 죄 형벌, 믿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 대속으로 사함 받았으니까 죄 지어도 아무런 문제가 안 생기던가요? 자, 잠깐 너무 감이 멀어서, 지금까지 설명드린 것은 하나님의 법은 무한한 법입니다. 하나님이 무한하시니까. 그분의 법은 무한합니다. 그분의 법이 무한하니까 그분의 법을 어긴 죄도 영원토록 계속됩니다. 천년 가도 죄인이고 만년 가도 죄인이고, 징역을 천년쯤 살면 죄가 없어져야 되는데 하나님의 법은 무한한 거라서 억만년을 살아도 억만년 뒤에도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안 없어지니까 억억만년 살아도 그때도 죄인입니다. 그래서 사망은 영원한 사망이고 이걸 면할 인간이 아무도 없다 그말이지요. 이걸 예수님이, 하나님이 사람되신 대속으로 다 면해주신 것인데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안 어길 수 없고 다 지킬수 없는 법을 예수님이 대신 해주셨고 대신 다 지키고, 있는 죄는 다 도말하셔서 이 대속을 우리에게 입혀주셨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영원한 사망의 두려움으로 인한, 사망의 위협으로 인한 그런 두려움이 없이 우리 믿는 사람들은 죄와 더불어 싸워서 이길수가 있다 그말입니다. 생명줄이 있으니까 ‘이거 건너 가봐라’ ‘겁이 나서 못가겠는데요’ 그래서 가다 한번 떡 떨어졌는데 다른 사람은 떨어져서 비명을 지르면서 천길 만길 낭떠러지로 떨어져죽는데, 어떤 사람 보니까 가다가 한번 툭 떨어졌는데 톡 튀어올라 다시 올라오고 또 가다 또 떨어져도 또 올라오고, 그걸 눈으로 보니까 ‘봐라, 저 사람 보니까 생명줄이 있으니까 떨어져도 올라오지 않느냐? 너도 생명줄 보이지? 여기 있으니까 안심하고 가라.’ ‘그렇습니까, 안심하고 가지요’. 그래 가는 겁니다. 가다가 보면은 미끄러져서 넘어지면 나는 넘어져서 비명을 질렀는데 생명줄이 톡 튀어올려서 다시 원줄에서 또 다시 가게 만들고 또 가게 만들고, 요래 계속 가니까 믿는 사람은 영원한 사망의 두려움으로, 사망의 위협이 우리를 해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다 베풀어서 구비시켜놨는데,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가다 죄를 지어도 아무 문제가 안 생깁니까? 죄를 지으면 어찌 됩니까? 믿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지금은 신령한 시대니까 구약시대는 죄를 지으면 바로 죽었지만은, 지금은 신령한 시대고 이치의 시대니까 죄를 지어도 기능만 죽지 몸은 살아있으니까 그러니까 안 죽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살아있고 심신의 기능 죽는 것은 안 보이는데 아는 사람은 알지만은 안 보임에도 불구하고 믿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간섭이 있고 징계가 있어서 아프다 그말이지요. ‘아 죄를 지으니까 이런 고통이 따르는구나. 아프구나.’ 이 고통은 이 세상에서 매를 때리는 채찍이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영원한 이 죄로 인한 영원한 사망은 끝 없는 그런 사망이 되겠구나. 그래서 몰랐는데 현실 만날 때 ‘하나님의 법을 기준해서 살다가 보니까 내가 말씀을 어기니까 죄가 됐고 이런 죄도 있구나. 나는 이런 말씀 어기는 죄인이구나’. 이걸 알게 하고, ‘이런 죄를 안 지어야 되겠다’ 그래서 죄와 더불어 싸워서 죄를 이기는 실력을 기르게 하고 그리고 난 다음에는 그 죄 형벌, 죄와 싸워서 지면은 하나님의 징계도 있고 영원한 형벌을 생각하게 되니까 죄에 형벌을 알게 하고, 그래서 그 영원한 죄 형벌을 면해주신, ‘이런 영원한 형벌에 만약에 주님의 대속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되었을 것인가? 생명줄이 없었다면 어찌 될 것인가?’ 주님의 그 대속의 생명줄을 알게 하고, 그래서 ‘주님이 필요하고 대속이 필요한 것이구나’ 이걸 깨닫게 하고, 그리고난 다음에는 이걸 아는 만큼 예수님에 대해서 그분의 대속에 대해서 한없는 감사가 날마다 날마다 우리가 어두워서 몰라 그러하지 죄를 지을때마다, 죄와 더불어 부딪힐때마다, 이길때마다 주님 대속에 대한 감사, 주님에 대한 감사가 날마다 새롭게 한없이 자꾸 나와서 그게 자기 속에 쌓여져서 대속에 감사하는 그런 사람이 되게하시는 이것이 우리를 이 세상에 두시는 하나님의 뜻이고 목적이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음주쯤 한번 공부할까 싶은데, 우리는 잘 모르는데 하나님이라는 분, 그분의 구원 역사, 우리나라에 삼국시대까지 통틀어서 우리 나라가 굉장히 가장 컸던 때가 언제입니까? 어느왕 시대때인가요? 역사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은 우리나라가 저 중국에, 000선생님 지금 어딥니까? 옛날 그 요동땅이라는게. 지금 상당히 크지요 아마? 중국나라에 거의 제법 많은 땅이 고구려땅이었다 그러지요. 광개토대왕 그때. 그러니까 그 사람의 실력, 왕이 실력있고, 그사람 젊은 나이에 아깝게 죽어서 그렇지. 좀 오래 살았으면. 그 뭐 다 말이지만은. 그 사람이 어떠냐에 따라서 옛날에 징기스칸 이란 사람도 그랬고, 또 로마에 율리우스라는 그 사람도 세계를 거의 다 정복하다시피 그렇게 정복을 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의 실력있는 사람, 능력있는 사람의 그게 활동 무대라는 겁니다. 삼천리 반도 내 마음에 안 찬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섬나라지만은 통이 커서, 전쟁을 좋아하는지 통이 커서 요즘 자꾸 그 나라 민족주의로 들어가는데 문제가 많이 생기지요. 원래 민족성이라는 게 그래서 사람이 참, 지방성 민족성이라는 건 속이지를 못하는 겁니다. 한번 그랬던거는 꼭 그러한다는 기질이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섬나라 좁은데 있으니까 대륙이 탐이나서 중국 잡아먹으려고 그렇게 난리를 치지 않습니까. 중국만 잡아먹었으면 만족했을건데 아마 일본이 중국만 잡아먹었으면 중국이 지금 일본화 안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중국만 가지고 양이 안차니까 자꾸 뻗어나가서 동남화를 거의 다 잡아먹다시피 다 삼켰었는데, 간이 부어가지고 이제는 미국까지 잡아먹으려 하다가 그만 망해버렸지요. 그게 말하자면은 그 사람의 능력, 활동 무대입니다, 활동무대. 어떤 사람은 좁은 그냥 자기 집한채 거기 만족이고, 어떤 사람은 자꾸 뻗어나가서, 기업하는 사람도 삼성같이 세계로 막 뻗어나가는 사람, 김우중씨같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그러니까 어쨌든 뻗어나가자. 세계 경영, 김우중씨의 표어가 ‘세계 경영’ 이었지요. 이 세계를 한번 다스려보자, 참 잘난 사람입니다. 실력있고 똑똑한 사람이고. 그런건데, 그런것이 말하자면 그 사람의 활동무대다 그말이지요, 활동무대. 하나님의 역사는, 그분의 활동무대는 영원이라는 겁니다. 인간도 한 사람이 지구지만은, 그 지구에서 어떤 사람은 지구 전부를 다스려야 양에 차는 그런 사람 있고 그 사람의 활동의 범위가 얼마나 넓겠습니까. 그 범위안에 들어가는 그 구조나 이런게, 조직체계가 또 얼마나 들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라는 그분의 구원의 세계를 우리가 좀 파고 들어가봐야 되겠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깊도다 하나님의 그 모든 세계, 오묘함. 이걸 인간이 도무지 측량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무한하신 하나님, 그분의 재정하신 그 법, 그 법을 어긴 인간의 죄, 영원한 사망 이게 전부 하나님에게서 뻗어나온 것인데 이 모든 것이 다 무한하신 하나님에게서 뻗어나온 인간의 범죄, 하나님의 무한한 법을 어긴 죄로 인한 영원한 사망의 모든 것을 역시 하나님이 사람되신 예수님의 대속으로 완벽하게 다 해결해주신, 그러기 때문에 그 대속의 범위가 하나님의 세계(?) 범위까지 다 뻗어서 어디까지 그 여파가 미쳐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무한히 영원히 뻗어나가는 것이 주님 대속이다 하는 겁니다. 죄라는 것도 그래서 영원히 영원히 가도 없어지지 않는게 하나님 율법을 어긴 죄고, 이러니까 죄에 대한 두려움도 우리는 알아야 되고 이 죄를 다 도말해주신 주님 대속도 알아야 되고 이래가지고 자꾸 말씀을 바탕으로 삼아서 성경 말씀은 많지만 이게 유한이고 이 말씀을 가지고 이 말씀 속에 들어가서 자꾸 기도하고 연결시켜보고 그래가지고 파고 들어가서 우리 자신의 범위를 넓혀가야 됩니다. 내가 몸으로 다니지 않아도 명상으로, 기도로 해서 우리 자신의 범위를 자꾸 넓혀서 그 넓이가 하나님의 구원 세계의 넓이로 자꾸 뻗어나가는 그런 우리들이 되어야 되겠다.
그래서 오늘 오전 오후에는 ‘죄에 대한 지식’이 말씀에 제목인데, 그 죄는 하나님의 무한성하고 연결되어있는 그런 죄라. 그러므로 그 죄의 모든 해결은 하나님만 해결하실 수 있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해결하셨고 그 해결은 하나님의 모든 구원 역사와 연결되어있고, 그러므로 기독교라는 것은 하나님 한분에게서 모든 것이 발원된 그분이 전부가 된 이것이 기독교고 거기 맞춰나가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하신 법이라는 그 법, 그 법은 하나님께서 모든 존재, 하나님과 모든 존재 전부에게 필요해서 재정해놓으신 법이고 규칙인데, 그 법은 약속인데 그 법을 어기면 바로 하나님과 모든 존재와 대립이 되어지니까, 열 명 다니는 작은 회사에서 정해놓은 법, 사칙이 있는데 한사람이 ‘나는 이 회사 법에 안 맞다. 내 마음대로 하겠다’ 그러면 그 한사람은 나머지 아홉명하고 마찰이 되는 것이고 마찰되다가 이 한사람이 이기면 아홉명을 점령하겠지만은 못 이기면 이 한 사람은 튕겨나가는 겁니다. 안 튕겨나가면 늘 마찰로 괴로워지는 것이고. 그래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성경이 아니고 신앙생활 아니고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가 아닌 이 세상 사는 법은 그냥 하여가처럼 그래 살면 되는 겁니다. 이런들 어떠며 저런들 어떠냐. 물결이 흘러가는대로 그냥 따라내려가면, 시대의 조류와 풍조 거기 따라서 몸을 맡겨놓고 흔들흔들 따라가면은 자연스럽게 따라가고 마찰없이 그냥 가는 그게 가장 편안한 세상 생애를 사는 법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로 말하면. 잘날 것 없고 못 날것 없고 적당히 숨어서 그냥 대세를 따라가지고 그렇게 따라가면 되는데, 믿는 사람은 그리 살 수가 없기 때문에 신앙과 관련된 것이 아니면 대세를 따라가고, 000선생님? 어떻게 하고? 신앙과 관련된 것이 아니면 대세를 따라가고, ‘군에 가서 열심히 훈련 받아 1등을 해서 훈장 받아야 되겠다’. 그거는 믿는 사람이 할 자세는 아닙니다. 거기서 안심하고 가서 잘하면 좋겠지만은. 거기는 그냥 대세를 따라가고 보호색을 입어야 되고 대세를 따라가고, 신앙과 관련된 것이면 이거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저는 못합니다. 그런일이 요즘 잘 없겠지만은. 세상 모든 생활이 다 그렇습니다. ‘공부는 끝을 봐야 되겠다. 기어코 내가 1등을 해서 해야 되겠다’. 그럴 필요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런 길을 만들어주십니다. ‘해봐라’ 그게 아니면 대세를 따라가는 겁니다. 신앙생활에 필요한만큼만 하고 나머지는 신앙생활에 전심전력을 하고. 신앙생활만큼은 양보하지 않고, 이것이 이 세상이란 것은 다 거기서 거기고 참 여러 가지 세상을 보면은 연구할게 많고 생각할게 많고 우리가 공부할것이 참 많습니다. 인간의 심리도 보면은 그렇고 일어나는 사건들도 보면 그렇고 다 거기서 거기고 거기서 거긴데, 그게 그건데 다 보면은 뭘 그렇게 악을 쓰고, 시대 변하면 다 변하는 것이고 그게 인간들의 심리고 마음이고, 원래 6천년 역사가 그런 것이고 하나님이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놨는데. 그 하나님 만들어놓은 그 세상을 거슬러가지고 제가 뭘 하겠다고. 하는만큼 고통입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내가 1등 해야 되겠다 싶은 사람은 의지는 좋고, 또 꿈도 좋고 목적도 좋습니다.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래가지고 열심히 최선 다하는데, 있는 힘을 다해서 하는 것 까지는 하고 그러나 마지막 결과는 1등이 안되면 큰일났다, 그래가지고 1등 안되면 죽을 것처럼 그렇게 달려드는 사람은 그 사람은 문제가 있는 겁니다. 욕망은 좋고 꿈은 좋은데, 그래서 저는 학생들 수능 시험을 친다든지 목표를 가지고 달려가면 저는 꼭 그래 말합니다. 안 믿는 세상말이지만은 뭐라 그러지요? ‘진인사대천명’이란다.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하되, 안 믿는 사람들이 하는 말인데 신앙과 연관이 되어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 하는 것이고 결과는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일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으되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다 이게 성경입니다. 그런데 기어코 내가 해야 되겠다 그러면 그게 바로 내가 바로 하나님이 되야 되겠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너 기어코 해야 되겠어? 나는 기어코 안되도록 하겠다’ 누가 이기겠습니까? 그래서 욕심이란 것은, 모든 사람의 고통은 욕심이 들어서 만드는 것이지 이것 뽑아내고 나면 이 세상을 그냥 복지부동으로 그냥 편안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맡겨놓으면. 그러기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겠다. 내 짐은 싣고 내 멍에는 가벼우니가 내게 와서 나한테 배워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만들어주겠다’. 주님이 지신 짐, 멍에는 우리하고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신 것만 했지요. 그게 우리들의 할 일입니다. 구원세계를 깨닫고 죄를 생각을 하고 관련된 하나님의 무한성, 거기서 뻗어나온 이 무한성을 좀 생각해봤습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것은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죄를 알게 하시고, 죄와 싸워서 이기는 실력을 기르게 하시고 죄의 형벌을 알게 하시고, 그러므로 주님의 대속의 필요성을 알게 하시고, 이 대속의 공로 베풀어주신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한없이 날마다 현실마다, 죄를 만날때마다 감사해서 날마다 감사로 감사로 새롭게 되어지는 이런 우리를 만드시기 위해서 이 세상을 주셨고 현실을 주신다는 것 기억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