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6-주후(눅16:19-31)
부자와 나사로2014-01-26조회 418추천 32
본문: 눅16:19-31
제목: 홍포 입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
요점:
1.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
- 기독교가 이종교와 다른 것은 하나님이 계신 것
- 이종교는 그들이 알든 모르든 인간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며
-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사후 세계는 추측이며 추론, 짐작일 뿐
- 기독교는 하나님이 계시니 하나님을 찾아 아는 것이 신앙
- 하나님은 완전 전지 전능 무한하신 분이신데 말씀으로 알리심
2. 본문은
- 비유가 아닌 사후 세계의 실상
- 두 사람의 생애는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의 양 극단
-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생애 그 사이에 있는 우리들
- 본문은 사람의 세상 생활과 사후 세계의 결과를 교훈
3. 두 사람의 세상 생활
1)홍포 입은 부자
- 원죄 생활에 충실했던 사람
- 부자로 살았고,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은 자기를 꾸민 것
- 자기를 꾸몄다는 것은 자기 명예, 위신, 인격을 꾸몄다는 것
- 따라서 부자의 생애는 도덕적, 윤리적, 인격적으로 흠이 없다 할 정도일 것
-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한 것은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 부른 것이 아니고
- 고급의 수준 높은 재미, 취미를 가지고 산 것
- 문제는 그 모든 생활에 하나님이 없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었다는 것
- 사람은 누구나 이 부자처럼 사는 것
- 자기를 꾸미며 자기를 좋게 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생활
- 인생은 자유성이 있으며 그 자유에 대한 책임의 심판이 있으니
- 더욱이 구속 받은 성도는 예수님 대속으로 재생의 기회를 받았으니
-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부인하고 순종으로 살아야
- 부자의 생애는 하나님이 없는 생애, 자기가 하나님 된 생애이니
- 본문에 말씀하신 대로 '네 좋은 것을 받았고'인 것
2)거지 나사로
- 거지로 살았으니 아무것도 없는 사람
- 재물도 건강도 지식도 지위도 활동도 사람도 없는 거지
- 극도의 빈곤, 극난의 고통, 극도의 고독 속에서도
- 감사로, 말씀 순종으로 인한 고난으로 산 생애
- 우리의 그 누구도 어떤 형편도 나사로보다는 나을 것
4. 내세의 결과를 두고
- 하나님은 공평의 하나님
-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 받은 것은 그만한 원인이 있고
- 나사로가 낙원에서 위로 받은 것 역시 그만한 배경이 있는 것
5. 깨닫고 배울 교훈
1)부자를 보고
- 자기를 꾸미는 것은 영원한 수치
-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은 영원한 고통
2)나사로를 보고
- 어떤 형편에서도 감사하는 생활
- 주를 위한 고난은 영원한 위로
3)세상 생활은 영원의 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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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설교)
20140126 주후
누가복음 16:19-31
본문에 있는 말씀을 일반상식으로 우리가 알고 있다가 오전에 말씀을 좀 생각해보셨다면 의문이 안 생길수가 없을 겁니다. 기독교가 일반세상에 이종교와 다른 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원래 종교라는 것은 사후세계를 연구하고 알던지 모르던지 사후세계를 지향하는 그게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사후세계라 말은 죽음 너머, 전도서에 보면 신후사라는 말이 나오는데, 죽음 너머 세계 그 너머를 말하는 겁니다. 모든 종교는 다 적어도 경전상으로, 그들의 교리상으로는 인간의 죽음 너머를 말하고 있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아는대로 사람이 죽으면 그로써 끝나는 것이고, 죽었다가 살아오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사후세계를 아는 사람은 성경을 보지 못하고 믿지 않는 사람으로써는 아무도 없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모든 이종교에서 말하는 사후세계는 다 하나의 추측이며 추론이며 짐작이지, 실제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러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이란 것은 하나의 인간의 그 원하는 바고, 아이들 말로 희망사항이지, 실제 그들이 생각하는대로 사후세계가 이루어지지를 않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 그걸 알고 있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믿음이 극단에 가면 모든 이종교의 믿음은 극단에 가면 다 중단될 수 밖에 없고, 포기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 근본바탕이 빈약하고 없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런데 기독교라는 것은, 우리가 다 모르고 다 믿지 못해도, 객관이신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인간의 그 모든 지식과 인간의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는, 내 주관이 아닌, 내 밖에서 하나님이라는 분의 활동역사가 나에게 임하기 때문에 내 의지를 넘어설 수 있고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그게 기독교입니다. 이런걸 가리켜서 기적이라 표적이라 그리 말하고, 그러기 때문에 신앙은 전부다 기적이고 표적이지, 기적 아닌 신앙은 없다할만큼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또 한번 질문 드려 봅니다.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너무 막연한 질문이지요? 이런 질문을 답할 수 있는 건 잘 없겠지요. 그런데 앞에 처음부터 말씀드린 걸 가만히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것 하고 연결시켜보면 무엇이겠습니까? 기독교가 이종교와 다른게 무엇이라 그랬던가요, 제가? 크게, 000이 크게. 하나님이 계시는 것. 그래서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 00이가 올해 2학년 올라가지? 중학교. 2학년 올라가는데 요즘 말씀을 잘 들어, 보니까. 이제 중학교 2학년이니까 알만하지만, 그래도 안들으면 아무리 머리 좋은 사람도 모르는데 들으니까 질문하니까 바로 알잖습니까? 기독교 신앙에 그러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겁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그런데 하나님이라는 이분은 완전자고, 전지전능자고, 또 영원불변하신 분이신데, 이분은 알지 못하심이 없고 능치 못함이 없고, 계시지 않는 곳이 없는 무소부재하신 이런 하나님이신데, 이분은 무형의 하나님이라서 사람 눈에 보이지를 아니합니다. 그러니 알기가 어렵고,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이 어떤 분이신 줄을 스스로 아시고, 인간은 또 어떤 어둡고, 또 미약한 그런 인간인 줄 아는고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우리 인간들에게 나타내실 때, 막연하게 사람이 추측으로 추론으로 구름 잡는 것처럼 그렇게 알리지를 아니하시고, 사람이 노력만 하면, 힘만 쓰면, 마음만 가지면 알 수 있도록 알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고, 또 그 길 속에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직접 하고 계시니, 하나님이 당신을 알려주신 그 알려주심을 우리는 뭐라고 공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을 알리시는 것은 우리에게, 그러기 때문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하나님의 이름을 말씀이라고 한 것은, 그 말씀이라는 그 이름이 가장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리시는데 적합한 이름이다. 지난 성탄절입니까? 그때 000선생님 설명하실 때 그래 했지요. 일반적으로, 성경적으로 가장 맞게 그때 설명 참 잘하셨는데. 그게 말하자면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이라는 이름, 그 이름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리시는, 당신 알리시는 가장 정확하고 좋은 방편이고 이름이기 때문에, 당신의 이름까지 말씀이라고 하신 겁니다. 그래서 말씀이 당신을 우리에게 알리실 때 말씀으로 우리를 알리신다.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이름인데. 그래서 ‘말씀’과 ‘말씀’은 다릅니다. 찬송가 27장, 여호와의 말씀이 육신을 입어, 그렇습니까? 날 구원한 구주가 되셨도다. 근데 그 찬송가 가사는, 가사 소절적으로 말하면, 문장적으로 말하면 고쳐야 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니지요.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러면, 말씀이 여호와의 소유처럼 그렇게 표현이 되는데, 그리 되면 말 문장적으로 맞지 않지 않습니까? 000선생님 어떻습니까? 안맞지요? 그러면 고쳐야 됩니다. 우리가 임의로 할 만큼 그만한 그게 안되니까 그렇지만은, 알고는 있어야 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육신이 된게 아닙니다. 여호와라는 이름, 또 다른 이름으로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지 여호와의 말씀이 육신이 됐다 그러면 마치 하나님의 말씀, 우리에게 말씀하신 말씀이, 성경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됐다 그뜻인데 이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름이 말씀이고, 말씀이란 이름을 가지신 하나님이 육신이 됐다 그뜻이고, 말씀이라는 하나님이 당신을 나타내는 방법을 말씀으로 나타내신 겁니다. 그러면 말씀 하나는 하나님을 나타낸 것이고, 또 하나 말씀하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을 말하는 겁니다. 말씀이 둘입니다. 이것은 한글로 말하면 똑같고, 영어에는 두 개 분명히 구별이 되어 있을 겁니다. 말씀이라는, 한글로는 두 개다 말씀이지만 영어 성경 이런데는 분명히 구별이 되어 있을 겁니다. 한문 성경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은 그것도 구별이 되어 있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완전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하신 그 하나님이 어둡고, 부족한 우리들이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당신이 알리실 때, 사람은 그렇습니다, 사람은, 백목사님 설교록에 보면 ‘쪼를 뺀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쪼를 뺀다. 쪼 뺀다 그말이 그게 나쁜말이 아니고, 말 자체, 행동 자체는 나쁜 행동이 뭐냐하면은, 말하자면은 으스댄다 그뜻입니다. 자기를 아주 목을 길게 빼고 으쓱거리면서 잘난체 한다 그뜻입니다. 자기를 높인다, 자기를 세운다 그런걸 가리켜 쪼를 뺀다 그래 표현을 했는데 사람은 마치 말하자면 자기를 높이고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일부러 숨기고, 그래서 높은 사람은 은행 가면은 제일 앞에 창구에는 누가 있습니까? 동사무소, 은행, 저 무슨 공공기관에 가면은 제일 앞에 창구에, 대면 창구에는 말단의 직원들, 또 회사 들어가면은 제일 말단에 수위는 정문 앞에, 그 다음 안에 들어가면 좀 높은 사람, 가장 높은 은행장이나 그 기관의 장은 얼굴을 좀처럼 안내밀지요. 그래서 높은 사람이 오든지, 아주 그런 중대한 일이 있어야 그때 얼굴을 내미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를 높이고 세우고,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자기를 쉽게 드러내지 않으니까 일부러 좀 신비스럽게 감추고 그리하는게 인간이지만은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하고 하나님은 당신을 인간들에게 최대한 알리시려고 노력을 하시지만은, 인간이 워낙 부족하고 무지하고, 하나님은 워낙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잘 알기 어려워서,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알리시는 가장 적합하고 알기 쉬운 방법을 선택하신 것이 말씀이다 그말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우리가 읽고 듣고 알아서, 말씀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면 기독교 신앙이란 것은, 그 신앙의 깊은 세계는 전혀 들어가지 못합니다. 같이 한번 해보실까요? ‘말씀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발견해야 됩니다’. 말씀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찾아 만나야 비로소 신앙세계를 아는 것이고, 신앙의 눈을 뜨게 됩니다. 이것이 구름잡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게 되야 비로소 신앙이 되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이 비로소 이게 열리게 되는 겁니다. 이걸 알 때, 오전 말씀이 이해가 될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 두 사람이 나와 있지요. 홍포 입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 두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두사람의 형편은,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말하자면 좀 전체로 말하자면은, 창세 이후부터 주님 재림하시기까지 인간 역사 세계 전부를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천하 모든 인생, 그 인생살이 사는 천하 모든 역사의 인생 전부를 말하자면 다 털어서 최고의 사람은 최고의 조건, 환경,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가진 사람은 말하자면 홍포 입은 부자. 또 사람으로 날 수 있는 가장 비참하고 가련한 처지는 거지 나사로. 양극단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고, 나머지 사람은 그 가운데 전부 다 들어있으니까 양극단을 알면 가운데는 저절로 알 수가 있게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양극의 두 사람을 통해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천하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고 있으며, 그 산 생활의 결과는, 두 사람의 결과를 통해서 결과는 어떻게 되어지느냐를 여기 본문에서 우리가 알 수가 있다 그말입니다.
여기 이 말씀은 비유가 아니고 실상이라 그럽니다. 비유가 아니고 실상이다. 이 부자와 나사로가 어느 시대에 살았는지, 어느 지방에 살았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알기 어렵지만은, 알 수 없지만은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세상에 살았고, 그리고 산 모습은 그러했고, 마지막에 결과는 그렇게 되어졌다는 것을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러면 이 두사람의 이 본문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서, 세상에 사는 인간살이는 홍포 입은 부자와 꼭 같거나 비슷하거나, 좀 더 비슷하거나 덜 비슷하거나 그렇고, 하나는 나사로와 같거나 나사로와 비슷하거나 그런 것이지, 말하자면은 가운데쯤 있고, 한 가운데 중심이 있고, 그 중심에서 양쪽으로 뻗어나가면 왼쪽에는 홍포 입은 부자, 오른쪽에는 나사로 요래 있으면, 가운데가 있으면, 이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말하자면은 홍포 입은 부자에 좀 가깝고, 형편이나 생활이 가깝고, 더 가깝고 더 가깝고 이렇거나 아니면 나사로 쪽에 더 가깝고 더 가깝고 이렇거나 그 정도차이지 모든 사람은 전부다 홍포 입은 부자와 같은 형편과 그 생활모습, 아니면 나사로와 같은 형편과 그 생활 모습, 이 둘 중에 하나다. 속에서 어느 정도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 각각 다르지만은, 그런 모습이고, 그 산 모습에 따라 결과는 홍포 입은 부자처럼, 아니면 나사로처럼 그런 결과를 맺게 되어지는 것을 여기 성경에서 말씀을 하신 겁니다. 성경은 이치를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다 배우지 못합니다.
학교 다니면서, 학교 다니면서 밥 하는 것 배웁니까? 학교 수업시간에 밥 하는 것 나오는가요? 혹시 학교 교과목에? 여학생들? 학교 교과목에, 000선생님 밥 하는 것 나오나요? 빨래하는 것 나오나요? 또 세탁기 돌리는 것 나오나요? 안 나오지요, 그런것. 남학생들은 집 짓는것 나옵니까? 그런것 안 나오지요? 땅 파는 것 안나오지요? 학교에서는 말하자면은, 학교 교과목에서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한 기본적인 그런것을 이치로, 논리로 그리 배우는 겁니다. 그러나 그걸 가지고 응용을 하면 세상을 살아가는데 많은 것이 다 있는 겁니다. 이것처럼, 성경에는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구원 이루어가는데 필요한 이치를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다 기록되지 않아도 응용해보면 다 알 수가 있다 그말입니다.
두 사람의 생애에서, 부자의 생애를 보면, 홍포 입은 부자는 부자였습니다. 부자니까 부자는 뭔가 많은 겁니다. 돈이 많든지, 지식이 많든지, 권세가 있든지 어쨌든 많이 가진 사람, 남보다 뭔가 많이 가진 사람입니다. 많이 가졌는데, 부자가 많이 가진 것이, 부자 제가 보기에는 부모에게 유산으로 받았든지, 노력을 했든지, 또 안 믿는 사람들 표현으로 재수가 좋았던 어쨌던 자기는 많이 가졌습니다. 많이 가진 그것이 사람들 보기에는, 인간적으로 시대적으로 환경적으로 많이 가졌다 하지만은 궁극에 들어가보면, 부자가 가진 모든 전부는 결국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이라 그말이지요. 그 앞에 보면, 청지기 비유가 나오는데 그 청지기가 바로 그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위임 맡아서 총무 노릇만 하는 것이고, 청지기 노릇하지, 제가 주인은 아니다 그말이지요. 이 부자도, 제가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건강해도, 지식이 많아도 제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셔서 저한테 맡겨놓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어쨌든 이 부자는 많은 것을 가진 부자입니다. 많으니까 뭐든지 많이 할 수 있습니다. 부잔데, 이 부자가 많은 것을 가지고 뭘 했느냐? 많은 것을 가지고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다. 이게 표현인데, 부자라는 것도 하나의 표현이고, 부자라는 글자 속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이 사람은 많이 가졌다, 뭔가를 많이 가졌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재물을, 많은 재물을 가졌다. 그러면 가진 것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부자니까 많이 있으니까. 또 이 사람이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다. 자색옷이라 말은, 붉은 옷, 붉은 옷을 홍포라 그랬지요, 홍포. 고운 베옷은 아주 부드러운 그런 옷입니다. 아주 세밀한 거니까. 자색옷과 고운베옷을 입었으니까, 옷이란 것은 사람을 모양을 꾸미는, 그 사람을 꾸미는 그런 외형인데, 이 사람은 자기를 꾸미기를 아주 잘 꾸몄다, 아주 화려하게, 보기좋게, 세밀하게, 빈틈없이 자기를 잘 꾸몄다 그말이지요. 말하자면은, 자기를 잘 꾸미는걸 요즘말로 뭐라 그럽니까? 자기를 잘 꾸미는 걸 요즘 사람들 말로 뭐한다 그럽니까? 젊은 사람들 많이 쓰던데요 그런말? 뭐하는 겁니까? 자기를 자기, 같이 해보실까요? ‘자기 관리’. 자기 관리한다 안 그럽니까? 이름을 관리하고, 명예를 관리하는 거지요. 명예를 관리하는 것. 그래서 자기를 아주 잘 꾸며서 자기 관리를 잘해서, 혹시나 누가 나한테 흉을 볼란가, 또 나한테 대해서 안 좋은 마음을 가질란가, 섭섭하련가, 여러 가지 형태로 자기를 어쨌든 꾸며서 아름답게, 다른 사람이 볼때 ‘참 보기 좋다, 아름답다, 화려하다’ 그런 면으로 자기를 꾸민 것이 자색옷과 고운베옷을 입은 겁니다. 그러면 그 자기를 꾸미려고 하면, 그 꾸미는 것이 옷만 입고 꾸미고,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뭐와 같다고요? 성경에 찾아보면 좋겠는데, 잠언에 나올겁니다 아마.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니라’ 그런가요?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않는다 그 말은, 행동을 함부로 하는 것은 마치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걸어놓은 것처럼 그렇게 서로 어울리지를 아니한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자가 재물이 많고, 홍포를 입었으니까 지위도, 권세도 가진 사람이고, 그렇다면 보나 안보나 이 사람은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고, 유식한 사람,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 그뜻입니다. 이 사람이 자기를 꾸몄으니까, 자기 가진 그것을 가지고 꾸몄으니까 그 꾸몄을때, 자기, 여러 가지 자기를 나타내는, 자기를 아주 좋게 드러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좋은 것은 국민들이 나라의 정치가를 뽑는 것인데, 국회의원이 되면은, 옛날에 좀 미개할때는 국회 선거철만 되면 그들이 나타났지만은, 지금은 사람들이 계산을 좀 더 할 줄 알게 되니까, 평소에도 다음에 국회 선거 나설 사람들은 평소부터 자기 관리를 하는 겁니다. 이미지 관리, 이름 관리를 하는 겁니다. 그래 하려면 그 사람이 행동을 잘못하든지, 뇌물을 받아먹든지, 청탁을 하든지 잘못하면 소문이 나서 이름이 실추되니까, 그러니까 평소 자기 행동을 굉장히 조심을 안할 수가 없다 그말이지요. 지금도 선거 나설 사람들 보면은 이미지 관리 굉장히 많이 하고 있지요, 자기 관리를. 이 부자가 자기를 꾸몄으니까, 자기 관리를 굉장히 많이 했으니까 이 부자의 평소의 언행이, 평소 인간관계가, 평소에 자기 개인 생활이 어떠했겠습니까? 자기를 명예롭게,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도록 그렇게 자기를 꾸몄으니까 이 부자의 평소 행동은 굉장히 신중했을 것이고, 조심스러웠을 것이고, 언행에 별로 흠이 없었을 것이고, 인간관계 참 잘 했을 겁니다, 아마. 베풀기도 하고, 돕기도 하고, 양보도 하고, 봉사도 하고, 희생도 하고, 수고도 하고, 굉장히 그렇게 이 세상에서 잘 살았을 것이다. 이게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십니까? 과연 그러했겠습니까, 이 부자가? 자기를 꾸몄으니까, 자색옷과 고운베옷은 옷이니까, 옷이란 것은 사람을 꾸미는 것이고 나타내는 것이고, 이렇게 표현했으니까 그 사람이 옷을 가지고 꾸몄겠습니까? 옷으로 표현했지만은 그 사람 자기의 언행과 자기 생활, 자기라는 사람을, 자기 생애를 꾸미지 않았겠습니까? 그래가지고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고, 많은 사람에게 높임 받고, 많은 사람의 인정받고, 신용받는 그런 사람이 되었을꺼니까 그런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말이지요. 이 사람은 자기 절제가,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인간관계적으로 별로 흠이 없는,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그런 사람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겁니다. 그 뒤에 형제 관계를 봐도 그렇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음부에서 고통중에, 물 한방울을 먹지 못해서 고통중에 있으면서 아브라함에게 부탁하기를,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여기 그렇게까지 할 분 계십니까? 자기가 죽을 지경이 됐는데, ‘내가 지금 죽을 지경인데, 내가 죽을판인데, 형이 무슨, 동생이 무슨, 나부터 살고 봐야지’. 그게 대부분의 사람들인데, 좀 형제 우애가 특별하다 그러면, 부모자녀간에는 안그래도 형제간에는, 참 한다리가 천리라고 그런게 있잖습니까. 그래도 이 부자는 형제애가 특심했고, 다른 형제들은 이 부자처럼 됐는지 모르겠지만은 이 사람은 특심했습니다. 그래가지고 자기 그런 고통중에서도 형제들을, 그 형제들은 이곳에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보내달라 그랬으니까 얼마나 형제사랑이 특심했겠습니까? 이런 인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인데, 이렇게 산 사람인데 왜 음부에 갔을까 그말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한 것이,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다. 호화롭다 그말은, 크고 빛나고, 화려하고, 크게 이말이지요. 그런데 호화롭게 연락했다 그러니까, 글자 그대로만 보면 날마다 진수성찬 차려놓고 걸팡지게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부르고 놀고 그래살았다고 오해하기 쉬우나 그거는 전혀 아니라 그뜻입니다. 날마다 호화롭게 연락했다 그말은, 통 크게, 아주 빛나게, 그렇게 자기 생활 했다 그말인데, 그게 나쁜 뜻으로 하는게 아니고, 안에 궁극을 들어가보면 또 다른 것이 있지만은, 외견상으로는 아주 통크게 살았고, 말하자면은 다른 사람에게 기부해도 보통 사람들은 몇십만원, 몇백만원 이래하면 이 사람은 몇천만원, 몇억씩 기부도 하고, 또 아주 뭐 다른 사람은 가서 일일봉사하지만은 이 사람은 가서 몇 달씩 가서 땀 흘려서 일 해주고, 또 남을 위해 수고하고, 양보도 많이 하고, 어쨌든 그렇게 살았다 그말이지요. 날마다 호화롭게 연락했는데, 아주 통 크게, 빛 나게 그래 살았는데, 연락이라는 말이 뭐냐하니, 연락이라 말이 뭐라고요? 연락이라 말은 즐겁게 잔치한다 그말인데, 즐겁게 잔치하는 것이, 사람이란 것이, 전에 몇 번 말씀 드렸지요? 백목사님께서 조사님으로 계실 때, 구덕산 기도원에 가서 고요한 장소 숲속에서 아주 새소리, 물소리 들으면서 기도하고 주님 만나니까 그렇게 좋더랍니다. 기도하고 참 좋아서 기도하고 내려오니까 어떤 교인이 “조사님 어디 갔다오십니까?” 하고 물어서 어디 갔다 온다고요? “예, 좋은데 갔다 왔습니다.” 그랬다지요. 좋은데 갔다옵니다. 그러니까 이 분이, ‘조사님이 좋은데 갔다’, 자기 생각에 좋은데는 노래부르는데, 춤추는데 이런데가 좋은데거든요? 그러니까 “세상에, 조사님도 춤추러 다니는갑더라, 노래 부르는데 갔는갑더라. 좋은데 갔다왔다 하시더라” 자기 수준에서 좋은데는 춤추는 것이고, 노래부르는 것이고, 먹고 마시는 건데, 백조사님의 좋은데는 자연이 좋고, 새소리 좋고, 물소리 좋고, 거기서 고요하게 기도하고 주님 만나고 말씀 연구하고 깨달으니까 그게 좋은 것인데, 자기 수준에는, 좋은 것이면 술먹는게 좋고 노래 부르고 춤 추는게 좋으니까 조사님도 그런데 갔는가보다, 그리 생각을 말하자면은 하듯이, 그게 실화입니다. 그런 일이 있었답니다. 그리하듯이, 이 부자가 즐겁게 잔치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알기를, 걸팡지게 날마다 진수성찬 차려놓고, ‘부어라, 마셔라, 먹어라, 불러라, 춤을 춰라, 북치고 장구쳐라’ 그게 아니다 그말입니다. 즐겁게 잔치했다 그말은, 자기 마음을 즐겁게 기쁘게 했다 그말인데, 그 사람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관과 취미와 그 사람의 성향이 어떠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즐겁고, 기쁜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말입니다. 사람이 입맛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고기 좋아하는 사람, 어떤 사람은 채소 좋아하는 사람, 고기만 먹으면 몸에 두드러기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그렇게 맛있게 좋아하는 사람이, 그 이야기가 있습니까? 누구하고 누구요? 이솝 우화에? 이거는 좀 다른건데, 두루미하고 여웁니까? 서로 초대해가지고, 두루미가 여우를 초대해서 음식을 어디 내놨다고요? 호리병, 주둥이 이만한 호리병안에 음식 넣어놓고 ‘우리 서로 맛있게 먹어, 나 맛있게 먹을거니까 자네 맛있게 먹어’. 먹을 수 있습니까, 주둥이가 안들어가는데. 여우는 또 그래 반대로 그래했듯이. 그러니까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남도 다 좋아한다, 그걸 뭐라 그럽니까? 내가 좋아하니까, 내가 고기를 좋아하니까 세상 모든 사람은 전부다 고기를 좋아할 것이다. 이런걸 뭐라 그럽니까? 그걸 가리켜서 주관이라 그럽니다. 객관성이 없다 그럽니다. 내가 채소를 좋아하니까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채소를 좋아할 것이다. 큰 착각이고 오판입니다. 거기서 더하면, 어떤 사람은 ‘내가 채소 좋아하니까 세상 모든 사람은 채소를 좋아할 것이다’ 정도가 아니고 ‘내가 채소를 좋아하니까 세상 모든 사람도 채소를 좋아해야 된다’ 요래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가지고 그래 안하면, 채소를 못 먹으면 화를 냅니다. ‘채소를 못 먹어?’.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 ‘나는 고기 먹으면 두드러기 납니다’. 그러면 ‘고기를 못 먹어?’ 하고 화를 낸다 그말이지요. 그런 주관에 딱 붙들리고 객관성 없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이 부자가 즐겁게 잔치했다 그러니까, 그 잔치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됩니다. 그러면 앞에, 자색옷과 고운베옷을 입었고, 형제를 그렇게 생각한 것을 보니까 이 부자의 인격은 굉장히 고차원입니다, 세상에서. 그래서 이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인간관계적으로 사람으로 가장 최고의 인품 있는 사람, 가장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사람, 그런 정도의 사람으로 생각해볼 수가 있는 겁니다. 이 부자를 말씀하신 것은. 그래서 그래가지고 자기를 관리하고 그렇게 살았는데, 어느정도로 그래 살았느냐? 물한방울도 허비 없을만큼 그렇게 살았는데, 그 산 모든 것이 전부다 나온 그 뿌리가 무엇이였느냐? 그 뿌리가 전부, 문제는 이렇게 잘 살았는데, 그래서 세상에서 말하자면은 노벨평화상을 받을만큼, 노벨도덕상있으면 도덕상을 받을만큼, 공자만큼, 공자가 천국 갔습니까? 지옥 갔습니까? 공자가 천국 갔습니까, 지옥 갔습니까? 불택자라면 지옥갔겠지요. 석가모니는요? 석가모니는 천국 갔습니까, 지옥 갔습니까? 지옥 갔겠지요. 난리가 나겠지요, 이러면. 이거 세상에 요즘 내놓으면 인터넷판에 올라가서 난리를 피우겠지요. 하거나 말거나 성경에 말한대로 예수 안 믿었으면 지옥 갔지요. 이런걸 말하자면은, 이 부자가, 홍포입은 부자가 택자라면 천국 갔겠지만은, 예를 들자면 공자 같은 사람, 석가모니같은, 그만큼 이 사람은 이 세상에서 흠과 점이 없을만큼 자기 생애로 잘 산 사람이다 그말이지요. 그렇게 잘 산 이 사람 생활속에 뭐가 빠졌습니까? 뭐가 빠졌다고요? 하나님이 빠졌습니다. 그렇게 잘 살았는데, 하나님이 빠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없다 그말이지요. 하나님 없이 도덕으로, 윤리로, 인간관계로, 빈틈없는, 실수없는, 자기 생활로, 흠과 점이 없는 그런 생활로 살았지만은 그 산 모든게 뿌리가, 원동이 근본이 전부 자기로 말미암았고, 자기로 인했고, 자기 때문이었고, 자기를 위해서 했고, 그리 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어서, 그의 모든 생애와 전부다는 모조리 가서, 전부 음부에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이란 것은 하나님을 발견하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은 눈을 뜨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찾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없으니까 그에게는 말하자면, 또 없는 걸 찾아보면 하나님이 없었고, 이 부자에게는 천국도 없었고, 주님 대속도 없었고, 대속이 없다 그러면 불택자라 생각하기 쉽겠지만은 택자라면, 백목사님의 마지막 해석은, 홍포입은 부자는 택자로 말씀하신 게 맞습니다. 택자라면 대속이 있는데 어떤 면으로 없다 말입니까? 건설면으로 없다 그말입니다. 건설구원적으로 대속은 하나도 없습니다. 없었고, 대속이 없으니까 진리 영감도 없었고, 말씀이 없었고, 그러니 그의 생활은 전부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는, 성령과는 상관없는, 주님 대속과는 상관없는, 오로지 세상이 전부였고 그래서 하나님 계실 그 자리에 김일성 살아생전에 북한 사람들이 말하기를, ‘성경에다가 하나님빼고 김일성 딱 넣으면 딱 맞습니다’ 그럴만큼 이 부자의 생애는 하나님 대신에 자기가 그 자리를 다 차지 했습니다. 하나님 없고 자기가 하나님이고, 천국 없고 세상이 천국이고 이 사람은. 주님 대속이 없고 인간 방편이 전부였고, 인간지식이 전부였고, 모든 판단의 근거는 자기 지식이였고. 요래가지고 평생을 살았으니까 마지막에 주님이 그를 심판하실때는, ‘얘, 너는 살았을때 너 좋은 것을 받았고,’ 성경이 말합니다. ‘얘, 너는 살았을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홍포입은 부자는 항변할 겁니다. ‘나도 살아생전에 내 돈 가지고 남을 도왔고, 희생도 했고, 수고도 했고, 봉사도 했고 다 했습니다.’ 그러면 ‘그래 한번 따져들어가보자’. 절대예정과 자유성을 두고 말할 때, 토기장이 비유가 나오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왜 자유성을 줘놓고 죄짓게 만들었습니까? 그 자유성은 예정 아닙니까?’ ‘그래 자유성도 예정이다. 내가 예정해서 내 마음대로 하는데 니가 무슨 상관이냐?’ ‘그럴수가 있습니까?’ ‘너는 안그러느냐? 너는 니 멋대로 고기 잡아먹고 쌀 다 밥해서 쪄먹고, 개미 같은거 밟아죽이고 풀을 뜯고, 너는 왜 니 마음대로 하냐?’ ‘그거는 하나에 미생물이고 생물이고’, ‘나도, 너도 내 앞에는 미생물밖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 논리할 때, 인간은 하나님앞에 할말이 없는건데, 천국가가지고 이 부자가 하나님 앞에, 나도 세상에서 이런 봉사하고, 이런 희생하고, 이런 뭐하고 뭐하고 다 열거하면 ‘그랬느냐? 한번 뒤집어볼까? 빛이 있으니까 다 파헤쳐보면은 너 이거 뭐 때문에 했지?’ 속에 들어가보면 전부다 자기 중심, 자기 위주, ‘이게 너 때문에 한 거 아니냐?’ ‘형제 사랑했습니다.’ ‘누구 형제라서?’ ‘내 형제라서.’ ‘남의 형제도 사랑했습니다.’ ‘그 남의 형제가 누구라서?’ ‘너도 인간이고 그도 인간이니까.’ 따지고 들어가보면 결국 들어가보면 전부 자기가 그 속에 근본이였고, 출발이였고, 원인이였고, 원동이였고, 자기 때문에 전부다 했다 그말입니다. 참 어렵습니다. 이걸 찾아들어가서 이것까지 찾아서 해부해가지고 해결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에, 수많은 신앙생활을 속기가 대단히 쉽습니다. 이게 이해가 되야 비로소 신앙의 차원에서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까지 들어가가지고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순전히 주님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한 그게 되야 된다 그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부자에게는 아브라함 통해서 이리 말씀하신 겁니다. ‘얘 너는 살았을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할때 이 부자가 뭐라 그랬습니까? 항변했습니까, 입을 딱 닫았습니까? 000 뭐라 그랬어요, 부자가? ‘얘 너는 살았을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하니까 부자가 뭐라 그랬지요? 할말이 없었지요, 뭐. 입을 딱 닫아버리고 다른 말 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사로를 보내서 내가 여기서 고통 받는 것은 내가 그랬으니까 할말이 없습니다, 그뜻이지요. 당연합니다, 지당합니다, 마땅합니다. 할 말이 없는 겁니다. 이것이 홍포입은 부자의 생애입니다. 세상에서 그래 살았으니까, 행한대로 영원히 갚으시는 사후세계에서 이런 결과를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인데, 이 말씀을 정말로 믿으면 우리 생활이 변화되야되는데 참 어렵지요. 그들은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노엽게 했지만은, 그들은 우상 숭배 했지만은, 그들을 거울로 삼아서 우리는 그들처럼 우상숭배하지 말자. 그들은 음행해서 죄를 지었지만은, 하루에 23천명이 죽었지만 우리는 그런 죄를 짓지 말자.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받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그래 말씀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거울을 보면서도, 거울을 보니까 얼굴에 검정이 묻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세수를 하든지, 물수건으로 닦아내든지, 아니면 요즘 나오는 물티슈로 닦아내든지, 얼굴을 닦아내야 되지 않겠습니까? 거울을 보니까 머리가 헝클어졌으면 빗으로 빗어서 단정하게 하는게, 그게 거울이고 정상적인 생활인데, 거울을 보고 얼굴에 검정이 묻었는데 ‘검정 묻었네’ 묻었거나 말거나. 그것이 우리 모습이 아닌가 그말이지요.
부자의 이 세상에서의 생애와 사후세계 결과를 성경에 기록해서 우리에게 펼쳐놨습니다. 홍포 입은 부자라는 사람이 땅 위에서 이렇게 살았다. 그래서 죽고난 다음에 결과가 이래 되었다. 그러니 너희들은 어떻게 살아야되겠냐고 우리에게 이렇게 또렷이 보여주는데도, 오늘 우리 생활은 닥치면 전부 내가 우선이고, 내가 먼저고, 아이들 차 탈 때 보면은 전부 자기 좋은 자리 차지하려 하고. 그런데 이것이, 이것이 말하자면은 본능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 생명 가진 피조물의 본능이고,식물, 동물, 모든 존재 다 이렇습니다. 사람만 이런 것이 아니고. 잡초를 뽑아가지고 땅에 휙 던져놓으면, 풀을 뽑아가지고 땅위에 던져놓으면 그 풀이, 그 다음날 되면은 어찌됩니까? 마른땅에 아스팔트위에 던져놓으면 말라 죽습니다. 그런데 그 풀이 그냥 말라죽겠습니까, 어떻게 죽겠습니까? 그 풀이 뭘하겠습니까? 뽑아가지고 아스팔트위에 던져놓으면? 시멘트 위에 던져놓으면 뭐하겠습니까? 안죽으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말라 죽습니다. 그냥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풀을 뽑아가지고 흙 위에 던져놓으면, 그 다음날 되면요? 풀이 뿌리를 땅 속에 콱 박아서 살아납니다. 산다 그말이지요. 또 이것이, 풀이 자라는데 풀이파리가 얄궂게 흐트러져, 사람이 인위적으로 풀이파리 얄궂게 한쪽에 쿡 쳐박아놓든지, 좀 굽혀놓으면 이게 제 힘껏은 그 모양을 펴서 원래 보기 좋은 모양으로 돌아갑니다. 그게 뭐하는 겁니까? 나무이파리를 이상하게 나뭇가지를 꺽어놓으면, 제 있는 힘껏 그걸 본모습으로 돌립니다. 나무라는 것이, 생명있는 것이. 그게 전부 자기를 꾸미는 겁니다. 자기를 꾸미고, 그게 생애 본능이고, 그게 모든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의 본능이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식물이든, 동물이든, 인간이든 모든 존재는 살려고 하는 것, 자기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본능입니다. 그러면 인간도 그래 본능으로 사는게 당연한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지으심 받은 만물의 영장 인간은, 타락한 인간이 요런 본능이 있고, 그 본능대로 살 자유가 있지만은, 그 자유를 가지고 자기 본능대로 살았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은 물으시는 것이고, 왜? 그 본능으로 살다가 타락해 죽은 인생을 주님이 대형하심으로, 대속으로 구원해주셔서, 대생의 기회를 주셨으니까 그거는 자기 생애가 아니니까. 그래서 주님이 한번 죽은 인생을 다시 살려 주셨고, 대생의 기회를 주셨는데, 그때도 자기 자유성 가지고 타락한 인간의 원죄성 본능으로 자기 꾸미는 그 생애로 살면 두 번 기회는 주지를 않는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부자처럼 세상을 살면, 마지막 사후세계는 그리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을 하고, 하나님을 발견하고 찾아서 그분에게 순종하는 우리가 되도록 무진 애를 써야 됩니다. 그래서 누차 수도없이 성경에 말했고, 말씀드린 것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해라.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원죄는 자기입니다. 하나님이 계실 그 자리에 자기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타락한 것이고, 그게 모든 죄악의 뿌리고 근본입니다. 모든 본죄의 뿌리는 원죄고, 그 원죄라는 것은 자기라는 겁니다. 자기가 하나님 되는 겁니다. 나 자신, 자기 자신. 하나님의 말씀에 배치되는 자기 자신을 뽑아내지 않으면,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말씀을 가지고 모든 걸 비판하고 따져서, 말씀을 잣대 삼고, 법칙 삼아서 그 말씀에 자기를 끼어맞추고, 복종시키고, 자기를 쳐서 그 말씀에 맞춰 나가는 이것이 신앙생활인데, 수많은 사람이 신앙생활 하다보면,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도 가고 싶으면 가고, 나 가기 싫으면 안가는 것이고, 예배도 드리고 싶으면 드리고 말고 싶으면 안 듣는 것이고. 앉는 자리도 나 앉고 싶은 자리에 앉고 앉기 싫으면 안 앉는 것이고. 찬송도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마는 것이고. 그게 전부 신앙생활하는데 자기 주관대로, 마음대로 신앙생활하니까 그게 무슨 신앙이냐 그말이지요.
내가 하고 싶든지 하기 싫든지, 내 형편이 어떠하든지 그거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무화과 나무 저주하신게 그거 아니겠습니까? 배가 고파서 시장에서, 먹을 것 무화과 나무를, 무화과 열매를 자시려고 가니까 무화과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데, 이유가 뭐냐? 무화과 맺을 때가 아님이라. 4월달, 5월달에 가니까 무화과가 아직 안 열었습니다. 한 8월, 9월 되야 열지요. 4월달되니까 잎사귀는 무성한데 열매 없으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했다고요? ‘저주 받아라’. 무화과 나무 저주했습니다. 왜? 무화과 나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무화과 열매의 때가 맺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그 섭리인데 왜 저주 합니까? 자기 형편은 상관치 않는다 그말입니다. 창조주가 오시면, 그분이 원하면 내놔라 그말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은 하나님이 전부라는 겁니다. 하나님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그말이지요. 이 부자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우리도 세상에 살 때 그리 살면 그리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당신과 당신의 모든 것을 알려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있으니까, 그 말씀이 우리에게 가장 가깝게 오신 하나님이니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서 그분의 뜻, 그분의 요구, 그분의 생각, 그분의 소원, 그분이 하고자 하시는 이걸 찾아가지고 나를 거기 받쳐드려서 나는 산제물로 받쳐드리고, 그분의 뜻만 세워 이루어드리는 이것이 신앙이고, 그래 연습해서 만들어지는 나 자신이 성화된 나 자신이고, 그 성화된 자신이 바로 구원인데, 이게 되지 않으면 구원은 아마득하게 멀어지는 겁니다.
반대로 나사로는, 홍포 입은 부자와 반대로 살았습니다. 나사로는 내놓을것이 아무것도 없는 거지였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지, 병든 몸, 활동성 없는 것, 무식한 것, 둔한 것, 병이 들었고 아무도 없는 고독한 외로움, 세상에서 사람들이 불행이라 여길 수 있는 것은 나사로는 전부 다 가질만큼 그렇게 비참하고 가련해서, 여기 우리 아무리 가련해도 비참해도 나사로보다 못한 분 계십니까? 그럴수는 없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사로는 하나님을 알고 믿었기 때문에 원망하지 않았고, 불만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라도, 어떤 이유에서라도 원망하면 죄다. 원망은 하나님의 예정과 주권섭리를 믿지 않는 죄니까. 나사로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나사로가 그런 형편에 원망하며 살았다면 하나님께서 나사로를 천사들 보내서 받들어서 그렇게 데려가지 않습니다.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감사로. 고난을 받았는데,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제 이것을 기억해라’. 왜 고난 받았습니까? 000샘, 나사로가 왜 고난 받았을까요? 나사로 고난 받은 것이 아들 딸 키우기 위해서요? 돈 많이 벌기 위해서? 자녀 기르기 위해서 그랬겠습니까? 아니면 직장생활 때문에 머리 아파 그랬겠습니까? 나사로가 고난 받은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습니다. 이제 저기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하나님께서 많은, 영원한 위로를 주셨는데 왜 그런 위로 주십니까? 기독교는 고행주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유없는 보상하지 않습니다. 나사로가 고난받은 것은, 홍포 입은 부자가 즐겁게 잔치했다 그러니까, 홍포 입은 부자는 고난을 안 받았겠습니까? 세상에서 자기 이름을 유명하게, 존경받는 이름을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됩니까? 얼마나 수고를 많이 해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러니까, 홍포입은 부자는 항상 웃고 산게 아닙니다. 마음을 즐겁게 산게 아니고. 그도 많은 고난, 역경을 겪었지만은 그 뿌리가 전부 자기에게 나왔기 때문에 그리 표현한 것이고,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 것이고, 나사로는 고난 받은 것이, 말하자면은 홍포입은 부자의 고난과 나사로 고난이 꼭 같아도 근본이 다르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보상이 나온겁니다.
나사로는 그의 모든 생애 전부는 가진 것이 없으니까, 아는 것이 없으니까, 병이 들었으니까 해봐야 얼마나 했겠습니까, 나사로가. 예수님이 하신 생애는 33년 4개월입니다. 길다면 길지만은 짧다면 짧고. 공생활은 3년 4개월입니다. 3년 4개월 복음 전하고 활동해봐야 예수님이 얼마나 했겠습니까? 예수님이 돌아다닌 것이 미국을 갔습니까? 영국 갔습니까? 한국을 왔습니까? 일본에 왔습니까? 예수님이 팔레스타인 지방 그 좁은데서 33년 4개월 뱅뱅 돌아다니고 복음 전했는데, 그게 전분데, 왜 예수님은 영원토록 구주가 되시는 겁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주어진 거기서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다, 하나님이 함께 오신 신인양성이라서 그런 것이고 우리 대속역사니까 전부 다 짊어지니까 그런 것이고, 이 나사로는 가진 것이 없고, 무식하고, 몸에 병이 들었고, 활동성 없으니까 활동해봐야 별 것 없는데, 그런데 그에게 주신 그 생애에서 평생을 빈틈없이 하나님 한분만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순종하고, 감사하면서 말씀으로 사는 그 생활에 고난을 받아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제는 이 세상 끝났으니까 마음껏 그에게 위로를 주셨다 그말이지요.
사람이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그 좋은 환경속에서도 마음에 늘 원망, 불만 불평, 괴로움이 있는 사람이 있고, 나사로 같은 어떤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늘 감사와 찬송으로 사는 사람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셔서, 내가 너를 광야로 인도하신 것을 기억해라. 뭘 기억하란 말입니까? 내가 너를 광야로 인도해서 너로 주리게 하시며, 목마르게 하신 것을 기억해라. 또 만나 주신 것도 기억해라. 메추라기 주신 것도 기억해라. 그리하신 것은 너를 낮추시며 너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지 안하는지, 계명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를 알리려 하심이라.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를 통과케 하시면서 온갖 환경 만들어서 그 가운데로 통과케하신 그 이유는 그 속에서 그들 스스로, 그들 자신이, 그들의 마음에 생각이, 인식이, 그들의 깨달음이, 그리고 그들의 모든 생활이, 중심이 전부 하나님으로 인해서만 움직이고 요동하지, 하나님 아닌 어떤 것에게도 흔들리지 않고 피동되지 않는 그들을 만드시기 위해서 그래 하신것처럼,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고 온갖 환경 주시는 것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하나님 한분으로 전부 삼아서 그분으로만 동하고 정하는 그런 우리를 만드시기 위해서, 그러기 때문에 결국 나만 만들어지면,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시험이란 것은 어려움입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어려움 당하니까 힘들고 괴롭고, 고달프고, 죽을 지경입니다. 어려움이 뭐 때문에 나온다고요? 오직 각사람이 시험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라. 들어가보면 별에별 종류의 욕심, 자기 때문에 시험을 다 당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런 자기를 바꿔서, 변화시켜서, 연습시키고, 연단시켜서 어떠한 외부 환경이 몰아쳐도, 피조물 무엇이 와도, 어떤 것이 천하가 다 달려들어도 요동하지 않는 하나님 앞에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시기 위해서 이 세상을 만드셨고, 우리를 세상에 두시고 인도하고 계신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만 완전히 하나님 앞에 변함없는 사람이 되어지면 더 이상 시험에서 해도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 뭐 때문에 시험을 하시겠는가 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장차 온 세상이 임하여 온 세상을 시험할 때라. 그러나 작은 능력 가지고 주님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 그 시험을 면하게 된다. 시험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시험이 오되 시험이 시험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는. 교과서를 완전히 달통을 하고, 수능시험 출제내는 그 수능시험을 뛰어넘은 그런 사람은 시험치는 것이 기다려지지요. ‘수능시험, 한번 즐겨보지. 내가 한번 실력을 뽐내주지.’ 웃으면서 휘파람 불면서 가서 앉아서 여유있게 다 해놓고 만점 받겠지요. 그런 실력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에게는 시험이 시험거리가 되지를 아니합니다. 되지 못하니까,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는게 뜻이다 그말이지요.
나사로는 그리 살았습니다. 이래 사니까 나사로는 세상에서 고난을 받았지만은 그 고난이 전부 감사로 다 바꾸어졌고, 그래 평생 사니까 세상에서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 앞에서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영원히 위로받는 이런 사람이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는 장소가 상관이 없습니다. 시대가 상관이 없고, 남녀 성별이 상관없고, 연령이 상관 없습니다. 나아만 집에 팔려간 계집종은 열대여섯살되는 어린 계집종인데, 포로로 잡혀간 종된 계집 종, 거기서도 하나님이 역사해서 크게 영광을 드러내신 겁니다. 다니엘도 포로로 잡혀간 사람입니다. 요셉은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장소가, 시대가, 성별이, 유무식이, 건강하고 병약함이 상관이 없다 그말이지요. 자기에게 주어진 거기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있고, 현실이 있으니까 그 말씀따라서 나를 부인하고 순종해나가고, 믿음만 지켜나가면 역사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겁니다. 나사로 같은 형편에서도 이런 일이 이루어지는데, 우리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말씀을 기억하고, 이세상에서 우리는 홍포 입은 부자처럼 하나님 없는 자기, 천국 없는 세상, 주님 대속 없는 세상에 어떤 수단과 방편, 하나님 말씀 없는 인간의 모든 지식 아무런 가치없고 사후세계에 물한방울도 쓸모없는 결과를 만들고 마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세상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나사로처럼 어떤 환경에서도 원망, 불평없이 감사로, 기쁨으로, 하나님을 믿으니까. 말씀으로 알려주신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과 지혜와, 그분의 사랑과, 약속의 신실하심을 믿으니까, 그분의 목적과 구원세계를 알고 믿으니까. 그리로 나를 인도하시는 그 사랑을 믿으니까 감사가 나올 수 밖에 없는 거지요. 오늘도 믿는 사람들은 부족하지만은 그리 삽니다. 가다가 넘어져도 또 회개하고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그러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합니다. 어떤 시련줘도, 그 시련이 고통스러워 부르짖어도 좀더 기도하고 돌아서고 나면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라, 사랑이라 깨닫고 또 찬송을 하고 회개하고 또 그리 돌아서고, 그래가지고 자꾸 자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깊이 깊이 좀 생각해보십시다. 우리의 구원이 무엇인지, 이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신앙생활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을 찾아 만나야 됩니다. 그 하나님은 말씀 속에 담아주셨습니다. 말씀을 깨닫고, 믿음으로 살아나가면 나사로 같은 상황이 닥쳐도, 결과는 하나님의 영원한 위로, 아브라함의 품에 받들려 위로받는 이런 결과를 맺게되고, 부자처럼 살면 참으로 세상에 살때는 좋았을지 모르나, 영원한 수치, 고통이 있게 된다는 것을 오늘 기억하고 지혜롭게 사는 우리가 되십시다.
제목: 홍포 입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
요점:
1.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
- 기독교가 이종교와 다른 것은 하나님이 계신 것
- 이종교는 그들이 알든 모르든 인간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며
-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사후 세계는 추측이며 추론, 짐작일 뿐
- 기독교는 하나님이 계시니 하나님을 찾아 아는 것이 신앙
- 하나님은 완전 전지 전능 무한하신 분이신데 말씀으로 알리심
2. 본문은
- 비유가 아닌 사후 세계의 실상
- 두 사람의 생애는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의 양 극단
-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생애 그 사이에 있는 우리들
- 본문은 사람의 세상 생활과 사후 세계의 결과를 교훈
3. 두 사람의 세상 생활
1)홍포 입은 부자
- 원죄 생활에 충실했던 사람
- 부자로 살았고,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은 자기를 꾸민 것
- 자기를 꾸몄다는 것은 자기 명예, 위신, 인격을 꾸몄다는 것
- 따라서 부자의 생애는 도덕적, 윤리적, 인격적으로 흠이 없다 할 정도일 것
-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한 것은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 부른 것이 아니고
- 고급의 수준 높은 재미, 취미를 가지고 산 것
- 문제는 그 모든 생활에 하나님이 없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었다는 것
- 사람은 누구나 이 부자처럼 사는 것
- 자기를 꾸미며 자기를 좋게 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생활
- 인생은 자유성이 있으며 그 자유에 대한 책임의 심판이 있으니
- 더욱이 구속 받은 성도는 예수님 대속으로 재생의 기회를 받았으니
-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부인하고 순종으로 살아야
- 부자의 생애는 하나님이 없는 생애, 자기가 하나님 된 생애이니
- 본문에 말씀하신 대로 '네 좋은 것을 받았고'인 것
2)거지 나사로
- 거지로 살았으니 아무것도 없는 사람
- 재물도 건강도 지식도 지위도 활동도 사람도 없는 거지
- 극도의 빈곤, 극난의 고통, 극도의 고독 속에서도
- 감사로, 말씀 순종으로 인한 고난으로 산 생애
- 우리의 그 누구도 어떤 형편도 나사로보다는 나을 것
4. 내세의 결과를 두고
- 하나님은 공평의 하나님
-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 받은 것은 그만한 원인이 있고
- 나사로가 낙원에서 위로 받은 것 역시 그만한 배경이 있는 것
5. 깨닫고 배울 교훈
1)부자를 보고
- 자기를 꾸미는 것은 영원한 수치
-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은 영원한 고통
2)나사로를 보고
- 어떤 형편에서도 감사하는 생활
- 주를 위한 고난은 영원한 위로
3)세상 생활은 영원의 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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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설교)
20140126 주후
누가복음 16:19-31
본문에 있는 말씀을 일반상식으로 우리가 알고 있다가 오전에 말씀을 좀 생각해보셨다면 의문이 안 생길수가 없을 겁니다. 기독교가 일반세상에 이종교와 다른 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원래 종교라는 것은 사후세계를 연구하고 알던지 모르던지 사후세계를 지향하는 그게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사후세계라 말은 죽음 너머, 전도서에 보면 신후사라는 말이 나오는데, 죽음 너머 세계 그 너머를 말하는 겁니다. 모든 종교는 다 적어도 경전상으로, 그들의 교리상으로는 인간의 죽음 너머를 말하고 있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아는대로 사람이 죽으면 그로써 끝나는 것이고, 죽었다가 살아오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사후세계를 아는 사람은 성경을 보지 못하고 믿지 않는 사람으로써는 아무도 없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모든 이종교에서 말하는 사후세계는 다 하나의 추측이며 추론이며 짐작이지, 실제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러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이란 것은 하나의 인간의 그 원하는 바고, 아이들 말로 희망사항이지, 실제 그들이 생각하는대로 사후세계가 이루어지지를 않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 그걸 알고 있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믿음이 극단에 가면 모든 이종교의 믿음은 극단에 가면 다 중단될 수 밖에 없고, 포기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 근본바탕이 빈약하고 없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런데 기독교라는 것은, 우리가 다 모르고 다 믿지 못해도, 객관이신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인간의 그 모든 지식과 인간의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는, 내 주관이 아닌, 내 밖에서 하나님이라는 분의 활동역사가 나에게 임하기 때문에 내 의지를 넘어설 수 있고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그게 기독교입니다. 이런걸 가리켜서 기적이라 표적이라 그리 말하고, 그러기 때문에 신앙은 전부다 기적이고 표적이지, 기적 아닌 신앙은 없다할만큼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또 한번 질문 드려 봅니다.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너무 막연한 질문이지요? 이런 질문을 답할 수 있는 건 잘 없겠지요. 그런데 앞에 처음부터 말씀드린 걸 가만히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것 하고 연결시켜보면 무엇이겠습니까? 기독교가 이종교와 다른게 무엇이라 그랬던가요, 제가? 크게, 000이 크게. 하나님이 계시는 것. 그래서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 00이가 올해 2학년 올라가지? 중학교. 2학년 올라가는데 요즘 말씀을 잘 들어, 보니까. 이제 중학교 2학년이니까 알만하지만, 그래도 안들으면 아무리 머리 좋은 사람도 모르는데 들으니까 질문하니까 바로 알잖습니까? 기독교 신앙에 그러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겁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그런데 하나님이라는 이분은 완전자고, 전지전능자고, 또 영원불변하신 분이신데, 이분은 알지 못하심이 없고 능치 못함이 없고, 계시지 않는 곳이 없는 무소부재하신 이런 하나님이신데, 이분은 무형의 하나님이라서 사람 눈에 보이지를 아니합니다. 그러니 알기가 어렵고,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이 어떤 분이신 줄을 스스로 아시고, 인간은 또 어떤 어둡고, 또 미약한 그런 인간인 줄 아는고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우리 인간들에게 나타내실 때, 막연하게 사람이 추측으로 추론으로 구름 잡는 것처럼 그렇게 알리지를 아니하시고, 사람이 노력만 하면, 힘만 쓰면, 마음만 가지면 알 수 있도록 알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고, 또 그 길 속에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직접 하고 계시니, 하나님이 당신을 알려주신 그 알려주심을 우리는 뭐라고 공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을 알리시는 것은 우리에게, 그러기 때문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하나님의 이름을 말씀이라고 한 것은, 그 말씀이라는 그 이름이 가장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리시는데 적합한 이름이다. 지난 성탄절입니까? 그때 000선생님 설명하실 때 그래 했지요. 일반적으로, 성경적으로 가장 맞게 그때 설명 참 잘하셨는데. 그게 말하자면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이라는 이름, 그 이름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리시는, 당신 알리시는 가장 정확하고 좋은 방편이고 이름이기 때문에, 당신의 이름까지 말씀이라고 하신 겁니다. 그래서 말씀이 당신을 우리에게 알리실 때 말씀으로 우리를 알리신다.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이름인데. 그래서 ‘말씀’과 ‘말씀’은 다릅니다. 찬송가 27장, 여호와의 말씀이 육신을 입어, 그렇습니까? 날 구원한 구주가 되셨도다. 근데 그 찬송가 가사는, 가사 소절적으로 말하면, 문장적으로 말하면 고쳐야 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니지요.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러면, 말씀이 여호와의 소유처럼 그렇게 표현이 되는데, 그리 되면 말 문장적으로 맞지 않지 않습니까? 000선생님 어떻습니까? 안맞지요? 그러면 고쳐야 됩니다. 우리가 임의로 할 만큼 그만한 그게 안되니까 그렇지만은, 알고는 있어야 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육신이 된게 아닙니다. 여호와라는 이름, 또 다른 이름으로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지 여호와의 말씀이 육신이 됐다 그러면 마치 하나님의 말씀, 우리에게 말씀하신 말씀이, 성경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됐다 그뜻인데 이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름이 말씀이고, 말씀이란 이름을 가지신 하나님이 육신이 됐다 그뜻이고, 말씀이라는 하나님이 당신을 나타내는 방법을 말씀으로 나타내신 겁니다. 그러면 말씀 하나는 하나님을 나타낸 것이고, 또 하나 말씀하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을 말하는 겁니다. 말씀이 둘입니다. 이것은 한글로 말하면 똑같고, 영어에는 두 개 분명히 구별이 되어 있을 겁니다. 말씀이라는, 한글로는 두 개다 말씀이지만 영어 성경 이런데는 분명히 구별이 되어 있을 겁니다. 한문 성경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은 그것도 구별이 되어 있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완전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하신 그 하나님이 어둡고, 부족한 우리들이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당신이 알리실 때, 사람은 그렇습니다, 사람은, 백목사님 설교록에 보면 ‘쪼를 뺀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쪼를 뺀다. 쪼 뺀다 그말이 그게 나쁜말이 아니고, 말 자체, 행동 자체는 나쁜 행동이 뭐냐하면은, 말하자면은 으스댄다 그뜻입니다. 자기를 아주 목을 길게 빼고 으쓱거리면서 잘난체 한다 그뜻입니다. 자기를 높인다, 자기를 세운다 그런걸 가리켜 쪼를 뺀다 그래 표현을 했는데 사람은 마치 말하자면 자기를 높이고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일부러 숨기고, 그래서 높은 사람은 은행 가면은 제일 앞에 창구에는 누가 있습니까? 동사무소, 은행, 저 무슨 공공기관에 가면은 제일 앞에 창구에, 대면 창구에는 말단의 직원들, 또 회사 들어가면은 제일 말단에 수위는 정문 앞에, 그 다음 안에 들어가면 좀 높은 사람, 가장 높은 은행장이나 그 기관의 장은 얼굴을 좀처럼 안내밀지요. 그래서 높은 사람이 오든지, 아주 그런 중대한 일이 있어야 그때 얼굴을 내미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를 높이고 세우고,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자기를 쉽게 드러내지 않으니까 일부러 좀 신비스럽게 감추고 그리하는게 인간이지만은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하고 하나님은 당신을 인간들에게 최대한 알리시려고 노력을 하시지만은, 인간이 워낙 부족하고 무지하고, 하나님은 워낙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잘 알기 어려워서,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알리시는 가장 적합하고 알기 쉬운 방법을 선택하신 것이 말씀이다 그말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우리가 읽고 듣고 알아서, 말씀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면 기독교 신앙이란 것은, 그 신앙의 깊은 세계는 전혀 들어가지 못합니다. 같이 한번 해보실까요? ‘말씀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발견해야 됩니다’. 말씀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찾아 만나야 비로소 신앙세계를 아는 것이고, 신앙의 눈을 뜨게 됩니다. 이것이 구름잡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게 되야 비로소 신앙이 되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이 비로소 이게 열리게 되는 겁니다. 이걸 알 때, 오전 말씀이 이해가 될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 두 사람이 나와 있지요. 홍포 입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 두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두사람의 형편은,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말하자면 좀 전체로 말하자면은, 창세 이후부터 주님 재림하시기까지 인간 역사 세계 전부를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천하 모든 인생, 그 인생살이 사는 천하 모든 역사의 인생 전부를 말하자면 다 털어서 최고의 사람은 최고의 조건, 환경,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가진 사람은 말하자면 홍포 입은 부자. 또 사람으로 날 수 있는 가장 비참하고 가련한 처지는 거지 나사로. 양극단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고, 나머지 사람은 그 가운데 전부 다 들어있으니까 양극단을 알면 가운데는 저절로 알 수가 있게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양극의 두 사람을 통해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천하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고 있으며, 그 산 생활의 결과는, 두 사람의 결과를 통해서 결과는 어떻게 되어지느냐를 여기 본문에서 우리가 알 수가 있다 그말입니다.
여기 이 말씀은 비유가 아니고 실상이라 그럽니다. 비유가 아니고 실상이다. 이 부자와 나사로가 어느 시대에 살았는지, 어느 지방에 살았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알기 어렵지만은, 알 수 없지만은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세상에 살았고, 그리고 산 모습은 그러했고, 마지막에 결과는 그렇게 되어졌다는 것을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러면 이 두사람의 이 본문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서, 세상에 사는 인간살이는 홍포 입은 부자와 꼭 같거나 비슷하거나, 좀 더 비슷하거나 덜 비슷하거나 그렇고, 하나는 나사로와 같거나 나사로와 비슷하거나 그런 것이지, 말하자면은 가운데쯤 있고, 한 가운데 중심이 있고, 그 중심에서 양쪽으로 뻗어나가면 왼쪽에는 홍포 입은 부자, 오른쪽에는 나사로 요래 있으면, 가운데가 있으면, 이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말하자면은 홍포 입은 부자에 좀 가깝고, 형편이나 생활이 가깝고, 더 가깝고 더 가깝고 이렇거나 아니면 나사로 쪽에 더 가깝고 더 가깝고 이렇거나 그 정도차이지 모든 사람은 전부다 홍포 입은 부자와 같은 형편과 그 생활모습, 아니면 나사로와 같은 형편과 그 생활 모습, 이 둘 중에 하나다. 속에서 어느 정도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 각각 다르지만은, 그런 모습이고, 그 산 모습에 따라 결과는 홍포 입은 부자처럼, 아니면 나사로처럼 그런 결과를 맺게 되어지는 것을 여기 성경에서 말씀을 하신 겁니다. 성경은 이치를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다 배우지 못합니다.
학교 다니면서, 학교 다니면서 밥 하는 것 배웁니까? 학교 수업시간에 밥 하는 것 나오는가요? 혹시 학교 교과목에? 여학생들? 학교 교과목에, 000선생님 밥 하는 것 나오나요? 빨래하는 것 나오나요? 또 세탁기 돌리는 것 나오나요? 안 나오지요, 그런것. 남학생들은 집 짓는것 나옵니까? 그런것 안 나오지요? 땅 파는 것 안나오지요? 학교에서는 말하자면은, 학교 교과목에서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한 기본적인 그런것을 이치로, 논리로 그리 배우는 겁니다. 그러나 그걸 가지고 응용을 하면 세상을 살아가는데 많은 것이 다 있는 겁니다. 이것처럼, 성경에는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구원 이루어가는데 필요한 이치를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다 기록되지 않아도 응용해보면 다 알 수가 있다 그말입니다.
두 사람의 생애에서, 부자의 생애를 보면, 홍포 입은 부자는 부자였습니다. 부자니까 부자는 뭔가 많은 겁니다. 돈이 많든지, 지식이 많든지, 권세가 있든지 어쨌든 많이 가진 사람, 남보다 뭔가 많이 가진 사람입니다. 많이 가졌는데, 부자가 많이 가진 것이, 부자 제가 보기에는 부모에게 유산으로 받았든지, 노력을 했든지, 또 안 믿는 사람들 표현으로 재수가 좋았던 어쨌던 자기는 많이 가졌습니다. 많이 가진 그것이 사람들 보기에는, 인간적으로 시대적으로 환경적으로 많이 가졌다 하지만은 궁극에 들어가보면, 부자가 가진 모든 전부는 결국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이라 그말이지요. 그 앞에 보면, 청지기 비유가 나오는데 그 청지기가 바로 그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위임 맡아서 총무 노릇만 하는 것이고, 청지기 노릇하지, 제가 주인은 아니다 그말이지요. 이 부자도, 제가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건강해도, 지식이 많아도 제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셔서 저한테 맡겨놓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어쨌든 이 부자는 많은 것을 가진 부자입니다. 많으니까 뭐든지 많이 할 수 있습니다. 부잔데, 이 부자가 많은 것을 가지고 뭘 했느냐? 많은 것을 가지고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다. 이게 표현인데, 부자라는 것도 하나의 표현이고, 부자라는 글자 속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이 사람은 많이 가졌다, 뭔가를 많이 가졌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재물을, 많은 재물을 가졌다. 그러면 가진 것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부자니까 많이 있으니까. 또 이 사람이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다. 자색옷이라 말은, 붉은 옷, 붉은 옷을 홍포라 그랬지요, 홍포. 고운 베옷은 아주 부드러운 그런 옷입니다. 아주 세밀한 거니까. 자색옷과 고운베옷을 입었으니까, 옷이란 것은 사람을 모양을 꾸미는, 그 사람을 꾸미는 그런 외형인데, 이 사람은 자기를 꾸미기를 아주 잘 꾸몄다, 아주 화려하게, 보기좋게, 세밀하게, 빈틈없이 자기를 잘 꾸몄다 그말이지요. 말하자면은, 자기를 잘 꾸미는걸 요즘말로 뭐라 그럽니까? 자기를 잘 꾸미는 걸 요즘 사람들 말로 뭐한다 그럽니까? 젊은 사람들 많이 쓰던데요 그런말? 뭐하는 겁니까? 자기를 자기, 같이 해보실까요? ‘자기 관리’. 자기 관리한다 안 그럽니까? 이름을 관리하고, 명예를 관리하는 거지요. 명예를 관리하는 것. 그래서 자기를 아주 잘 꾸며서 자기 관리를 잘해서, 혹시나 누가 나한테 흉을 볼란가, 또 나한테 대해서 안 좋은 마음을 가질란가, 섭섭하련가, 여러 가지 형태로 자기를 어쨌든 꾸며서 아름답게, 다른 사람이 볼때 ‘참 보기 좋다, 아름답다, 화려하다’ 그런 면으로 자기를 꾸민 것이 자색옷과 고운베옷을 입은 겁니다. 그러면 그 자기를 꾸미려고 하면, 그 꾸미는 것이 옷만 입고 꾸미고,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뭐와 같다고요? 성경에 찾아보면 좋겠는데, 잠언에 나올겁니다 아마.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니라’ 그런가요?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않는다 그 말은, 행동을 함부로 하는 것은 마치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걸어놓은 것처럼 그렇게 서로 어울리지를 아니한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자가 재물이 많고, 홍포를 입었으니까 지위도, 권세도 가진 사람이고, 그렇다면 보나 안보나 이 사람은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고, 유식한 사람,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 그뜻입니다. 이 사람이 자기를 꾸몄으니까, 자기 가진 그것을 가지고 꾸몄으니까 그 꾸몄을때, 자기, 여러 가지 자기를 나타내는, 자기를 아주 좋게 드러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좋은 것은 국민들이 나라의 정치가를 뽑는 것인데, 국회의원이 되면은, 옛날에 좀 미개할때는 국회 선거철만 되면 그들이 나타났지만은, 지금은 사람들이 계산을 좀 더 할 줄 알게 되니까, 평소에도 다음에 국회 선거 나설 사람들은 평소부터 자기 관리를 하는 겁니다. 이미지 관리, 이름 관리를 하는 겁니다. 그래 하려면 그 사람이 행동을 잘못하든지, 뇌물을 받아먹든지, 청탁을 하든지 잘못하면 소문이 나서 이름이 실추되니까, 그러니까 평소 자기 행동을 굉장히 조심을 안할 수가 없다 그말이지요. 지금도 선거 나설 사람들 보면은 이미지 관리 굉장히 많이 하고 있지요, 자기 관리를. 이 부자가 자기를 꾸몄으니까, 자기 관리를 굉장히 많이 했으니까 이 부자의 평소의 언행이, 평소 인간관계가, 평소에 자기 개인 생활이 어떠했겠습니까? 자기를 명예롭게,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도록 그렇게 자기를 꾸몄으니까 이 부자의 평소 행동은 굉장히 신중했을 것이고, 조심스러웠을 것이고, 언행에 별로 흠이 없었을 것이고, 인간관계 참 잘 했을 겁니다, 아마. 베풀기도 하고, 돕기도 하고, 양보도 하고, 봉사도 하고, 희생도 하고, 수고도 하고, 굉장히 그렇게 이 세상에서 잘 살았을 것이다. 이게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십니까? 과연 그러했겠습니까, 이 부자가? 자기를 꾸몄으니까, 자색옷과 고운베옷은 옷이니까, 옷이란 것은 사람을 꾸미는 것이고 나타내는 것이고, 이렇게 표현했으니까 그 사람이 옷을 가지고 꾸몄겠습니까? 옷으로 표현했지만은 그 사람 자기의 언행과 자기 생활, 자기라는 사람을, 자기 생애를 꾸미지 않았겠습니까? 그래가지고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고, 많은 사람에게 높임 받고, 많은 사람의 인정받고, 신용받는 그런 사람이 되었을꺼니까 그런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말이지요. 이 사람은 자기 절제가,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인간관계적으로 별로 흠이 없는,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그런 사람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겁니다. 그 뒤에 형제 관계를 봐도 그렇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음부에서 고통중에, 물 한방울을 먹지 못해서 고통중에 있으면서 아브라함에게 부탁하기를,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여기 그렇게까지 할 분 계십니까? 자기가 죽을 지경이 됐는데, ‘내가 지금 죽을 지경인데, 내가 죽을판인데, 형이 무슨, 동생이 무슨, 나부터 살고 봐야지’. 그게 대부분의 사람들인데, 좀 형제 우애가 특별하다 그러면, 부모자녀간에는 안그래도 형제간에는, 참 한다리가 천리라고 그런게 있잖습니까. 그래도 이 부자는 형제애가 특심했고, 다른 형제들은 이 부자처럼 됐는지 모르겠지만은 이 사람은 특심했습니다. 그래가지고 자기 그런 고통중에서도 형제들을, 그 형제들은 이곳에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보내달라 그랬으니까 얼마나 형제사랑이 특심했겠습니까? 이런 인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인데, 이렇게 산 사람인데 왜 음부에 갔을까 그말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한 것이,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다. 호화롭다 그말은, 크고 빛나고, 화려하고, 크게 이말이지요. 그런데 호화롭게 연락했다 그러니까, 글자 그대로만 보면 날마다 진수성찬 차려놓고 걸팡지게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부르고 놀고 그래살았다고 오해하기 쉬우나 그거는 전혀 아니라 그뜻입니다. 날마다 호화롭게 연락했다 그말은, 통 크게, 아주 빛나게, 그렇게 자기 생활 했다 그말인데, 그게 나쁜 뜻으로 하는게 아니고, 안에 궁극을 들어가보면 또 다른 것이 있지만은, 외견상으로는 아주 통크게 살았고, 말하자면은 다른 사람에게 기부해도 보통 사람들은 몇십만원, 몇백만원 이래하면 이 사람은 몇천만원, 몇억씩 기부도 하고, 또 아주 뭐 다른 사람은 가서 일일봉사하지만은 이 사람은 가서 몇 달씩 가서 땀 흘려서 일 해주고, 또 남을 위해 수고하고, 양보도 많이 하고, 어쨌든 그렇게 살았다 그말이지요. 날마다 호화롭게 연락했는데, 아주 통 크게, 빛 나게 그래 살았는데, 연락이라는 말이 뭐냐하니, 연락이라 말이 뭐라고요? 연락이라 말은 즐겁게 잔치한다 그말인데, 즐겁게 잔치하는 것이, 사람이란 것이, 전에 몇 번 말씀 드렸지요? 백목사님께서 조사님으로 계실 때, 구덕산 기도원에 가서 고요한 장소 숲속에서 아주 새소리, 물소리 들으면서 기도하고 주님 만나니까 그렇게 좋더랍니다. 기도하고 참 좋아서 기도하고 내려오니까 어떤 교인이 “조사님 어디 갔다오십니까?” 하고 물어서 어디 갔다 온다고요? “예, 좋은데 갔다 왔습니다.” 그랬다지요. 좋은데 갔다옵니다. 그러니까 이 분이, ‘조사님이 좋은데 갔다’, 자기 생각에 좋은데는 노래부르는데, 춤추는데 이런데가 좋은데거든요? 그러니까 “세상에, 조사님도 춤추러 다니는갑더라, 노래 부르는데 갔는갑더라. 좋은데 갔다왔다 하시더라” 자기 수준에서 좋은데는 춤추는 것이고, 노래부르는 것이고, 먹고 마시는 건데, 백조사님의 좋은데는 자연이 좋고, 새소리 좋고, 물소리 좋고, 거기서 고요하게 기도하고 주님 만나고 말씀 연구하고 깨달으니까 그게 좋은 것인데, 자기 수준에는, 좋은 것이면 술먹는게 좋고 노래 부르고 춤 추는게 좋으니까 조사님도 그런데 갔는가보다, 그리 생각을 말하자면은 하듯이, 그게 실화입니다. 그런 일이 있었답니다. 그리하듯이, 이 부자가 즐겁게 잔치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알기를, 걸팡지게 날마다 진수성찬 차려놓고, ‘부어라, 마셔라, 먹어라, 불러라, 춤을 춰라, 북치고 장구쳐라’ 그게 아니다 그말입니다. 즐겁게 잔치했다 그말은, 자기 마음을 즐겁게 기쁘게 했다 그말인데, 그 사람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관과 취미와 그 사람의 성향이 어떠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즐겁고, 기쁜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말입니다. 사람이 입맛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고기 좋아하는 사람, 어떤 사람은 채소 좋아하는 사람, 고기만 먹으면 몸에 두드러기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그렇게 맛있게 좋아하는 사람이, 그 이야기가 있습니까? 누구하고 누구요? 이솝 우화에? 이거는 좀 다른건데, 두루미하고 여웁니까? 서로 초대해가지고, 두루미가 여우를 초대해서 음식을 어디 내놨다고요? 호리병, 주둥이 이만한 호리병안에 음식 넣어놓고 ‘우리 서로 맛있게 먹어, 나 맛있게 먹을거니까 자네 맛있게 먹어’. 먹을 수 있습니까, 주둥이가 안들어가는데. 여우는 또 그래 반대로 그래했듯이. 그러니까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남도 다 좋아한다, 그걸 뭐라 그럽니까? 내가 좋아하니까, 내가 고기를 좋아하니까 세상 모든 사람은 전부다 고기를 좋아할 것이다. 이런걸 뭐라 그럽니까? 그걸 가리켜서 주관이라 그럽니다. 객관성이 없다 그럽니다. 내가 채소를 좋아하니까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채소를 좋아할 것이다. 큰 착각이고 오판입니다. 거기서 더하면, 어떤 사람은 ‘내가 채소 좋아하니까 세상 모든 사람은 채소를 좋아할 것이다’ 정도가 아니고 ‘내가 채소를 좋아하니까 세상 모든 사람도 채소를 좋아해야 된다’ 요래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가지고 그래 안하면, 채소를 못 먹으면 화를 냅니다. ‘채소를 못 먹어?’.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 ‘나는 고기 먹으면 두드러기 납니다’. 그러면 ‘고기를 못 먹어?’ 하고 화를 낸다 그말이지요. 그런 주관에 딱 붙들리고 객관성 없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이 부자가 즐겁게 잔치했다 그러니까, 그 잔치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됩니다. 그러면 앞에, 자색옷과 고운베옷을 입었고, 형제를 그렇게 생각한 것을 보니까 이 부자의 인격은 굉장히 고차원입니다, 세상에서. 그래서 이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인간관계적으로 사람으로 가장 최고의 인품 있는 사람, 가장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사람, 그런 정도의 사람으로 생각해볼 수가 있는 겁니다. 이 부자를 말씀하신 것은. 그래서 그래가지고 자기를 관리하고 그렇게 살았는데, 어느정도로 그래 살았느냐? 물한방울도 허비 없을만큼 그렇게 살았는데, 그 산 모든 것이 전부다 나온 그 뿌리가 무엇이였느냐? 그 뿌리가 전부, 문제는 이렇게 잘 살았는데, 그래서 세상에서 말하자면은 노벨평화상을 받을만큼, 노벨도덕상있으면 도덕상을 받을만큼, 공자만큼, 공자가 천국 갔습니까? 지옥 갔습니까? 공자가 천국 갔습니까, 지옥 갔습니까? 불택자라면 지옥갔겠지요. 석가모니는요? 석가모니는 천국 갔습니까, 지옥 갔습니까? 지옥 갔겠지요. 난리가 나겠지요, 이러면. 이거 세상에 요즘 내놓으면 인터넷판에 올라가서 난리를 피우겠지요. 하거나 말거나 성경에 말한대로 예수 안 믿었으면 지옥 갔지요. 이런걸 말하자면은, 이 부자가, 홍포입은 부자가 택자라면 천국 갔겠지만은, 예를 들자면 공자 같은 사람, 석가모니같은, 그만큼 이 사람은 이 세상에서 흠과 점이 없을만큼 자기 생애로 잘 산 사람이다 그말이지요. 그렇게 잘 산 이 사람 생활속에 뭐가 빠졌습니까? 뭐가 빠졌다고요? 하나님이 빠졌습니다. 그렇게 잘 살았는데, 하나님이 빠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없다 그말이지요. 하나님 없이 도덕으로, 윤리로, 인간관계로, 빈틈없는, 실수없는, 자기 생활로, 흠과 점이 없는 그런 생활로 살았지만은 그 산 모든게 뿌리가, 원동이 근본이 전부 자기로 말미암았고, 자기로 인했고, 자기 때문이었고, 자기를 위해서 했고, 그리 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어서, 그의 모든 생애와 전부다는 모조리 가서, 전부 음부에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이란 것은 하나님을 발견하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은 눈을 뜨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찾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없으니까 그에게는 말하자면, 또 없는 걸 찾아보면 하나님이 없었고, 이 부자에게는 천국도 없었고, 주님 대속도 없었고, 대속이 없다 그러면 불택자라 생각하기 쉽겠지만은 택자라면, 백목사님의 마지막 해석은, 홍포입은 부자는 택자로 말씀하신 게 맞습니다. 택자라면 대속이 있는데 어떤 면으로 없다 말입니까? 건설면으로 없다 그말입니다. 건설구원적으로 대속은 하나도 없습니다. 없었고, 대속이 없으니까 진리 영감도 없었고, 말씀이 없었고, 그러니 그의 생활은 전부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는, 성령과는 상관없는, 주님 대속과는 상관없는, 오로지 세상이 전부였고 그래서 하나님 계실 그 자리에 김일성 살아생전에 북한 사람들이 말하기를, ‘성경에다가 하나님빼고 김일성 딱 넣으면 딱 맞습니다’ 그럴만큼 이 부자의 생애는 하나님 대신에 자기가 그 자리를 다 차지 했습니다. 하나님 없고 자기가 하나님이고, 천국 없고 세상이 천국이고 이 사람은. 주님 대속이 없고 인간 방편이 전부였고, 인간지식이 전부였고, 모든 판단의 근거는 자기 지식이였고. 요래가지고 평생을 살았으니까 마지막에 주님이 그를 심판하실때는, ‘얘, 너는 살았을때 너 좋은 것을 받았고,’ 성경이 말합니다. ‘얘, 너는 살았을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홍포입은 부자는 항변할 겁니다. ‘나도 살아생전에 내 돈 가지고 남을 도왔고, 희생도 했고, 수고도 했고, 봉사도 했고 다 했습니다.’ 그러면 ‘그래 한번 따져들어가보자’. 절대예정과 자유성을 두고 말할 때, 토기장이 비유가 나오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왜 자유성을 줘놓고 죄짓게 만들었습니까? 그 자유성은 예정 아닙니까?’ ‘그래 자유성도 예정이다. 내가 예정해서 내 마음대로 하는데 니가 무슨 상관이냐?’ ‘그럴수가 있습니까?’ ‘너는 안그러느냐? 너는 니 멋대로 고기 잡아먹고 쌀 다 밥해서 쪄먹고, 개미 같은거 밟아죽이고 풀을 뜯고, 너는 왜 니 마음대로 하냐?’ ‘그거는 하나에 미생물이고 생물이고’, ‘나도, 너도 내 앞에는 미생물밖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 논리할 때, 인간은 하나님앞에 할말이 없는건데, 천국가가지고 이 부자가 하나님 앞에, 나도 세상에서 이런 봉사하고, 이런 희생하고, 이런 뭐하고 뭐하고 다 열거하면 ‘그랬느냐? 한번 뒤집어볼까? 빛이 있으니까 다 파헤쳐보면은 너 이거 뭐 때문에 했지?’ 속에 들어가보면 전부다 자기 중심, 자기 위주, ‘이게 너 때문에 한 거 아니냐?’ ‘형제 사랑했습니다.’ ‘누구 형제라서?’ ‘내 형제라서.’ ‘남의 형제도 사랑했습니다.’ ‘그 남의 형제가 누구라서?’ ‘너도 인간이고 그도 인간이니까.’ 따지고 들어가보면 결국 들어가보면 전부 자기가 그 속에 근본이였고, 출발이였고, 원인이였고, 원동이였고, 자기 때문에 전부다 했다 그말입니다. 참 어렵습니다. 이걸 찾아들어가서 이것까지 찾아서 해부해가지고 해결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에, 수많은 신앙생활을 속기가 대단히 쉽습니다. 이게 이해가 되야 비로소 신앙의 차원에서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까지 들어가가지고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순전히 주님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한 그게 되야 된다 그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부자에게는 아브라함 통해서 이리 말씀하신 겁니다. ‘얘 너는 살았을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할때 이 부자가 뭐라 그랬습니까? 항변했습니까, 입을 딱 닫았습니까? 000 뭐라 그랬어요, 부자가? ‘얘 너는 살았을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하니까 부자가 뭐라 그랬지요? 할말이 없었지요, 뭐. 입을 딱 닫아버리고 다른 말 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사로를 보내서 내가 여기서 고통 받는 것은 내가 그랬으니까 할말이 없습니다, 그뜻이지요. 당연합니다, 지당합니다, 마땅합니다. 할 말이 없는 겁니다. 이것이 홍포입은 부자의 생애입니다. 세상에서 그래 살았으니까, 행한대로 영원히 갚으시는 사후세계에서 이런 결과를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인데, 이 말씀을 정말로 믿으면 우리 생활이 변화되야되는데 참 어렵지요. 그들은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노엽게 했지만은, 그들은 우상 숭배 했지만은, 그들을 거울로 삼아서 우리는 그들처럼 우상숭배하지 말자. 그들은 음행해서 죄를 지었지만은, 하루에 23천명이 죽었지만 우리는 그런 죄를 짓지 말자.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받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그래 말씀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거울을 보면서도, 거울을 보니까 얼굴에 검정이 묻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세수를 하든지, 물수건으로 닦아내든지, 아니면 요즘 나오는 물티슈로 닦아내든지, 얼굴을 닦아내야 되지 않겠습니까? 거울을 보니까 머리가 헝클어졌으면 빗으로 빗어서 단정하게 하는게, 그게 거울이고 정상적인 생활인데, 거울을 보고 얼굴에 검정이 묻었는데 ‘검정 묻었네’ 묻었거나 말거나. 그것이 우리 모습이 아닌가 그말이지요.
부자의 이 세상에서의 생애와 사후세계 결과를 성경에 기록해서 우리에게 펼쳐놨습니다. 홍포 입은 부자라는 사람이 땅 위에서 이렇게 살았다. 그래서 죽고난 다음에 결과가 이래 되었다. 그러니 너희들은 어떻게 살아야되겠냐고 우리에게 이렇게 또렷이 보여주는데도, 오늘 우리 생활은 닥치면 전부 내가 우선이고, 내가 먼저고, 아이들 차 탈 때 보면은 전부 자기 좋은 자리 차지하려 하고. 그런데 이것이, 이것이 말하자면은 본능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 생명 가진 피조물의 본능이고,식물, 동물, 모든 존재 다 이렇습니다. 사람만 이런 것이 아니고. 잡초를 뽑아가지고 땅에 휙 던져놓으면, 풀을 뽑아가지고 땅위에 던져놓으면 그 풀이, 그 다음날 되면은 어찌됩니까? 마른땅에 아스팔트위에 던져놓으면 말라 죽습니다. 그런데 그 풀이 그냥 말라죽겠습니까, 어떻게 죽겠습니까? 그 풀이 뭘하겠습니까? 뽑아가지고 아스팔트위에 던져놓으면? 시멘트 위에 던져놓으면 뭐하겠습니까? 안죽으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말라 죽습니다. 그냥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풀을 뽑아가지고 흙 위에 던져놓으면, 그 다음날 되면요? 풀이 뿌리를 땅 속에 콱 박아서 살아납니다. 산다 그말이지요. 또 이것이, 풀이 자라는데 풀이파리가 얄궂게 흐트러져, 사람이 인위적으로 풀이파리 얄궂게 한쪽에 쿡 쳐박아놓든지, 좀 굽혀놓으면 이게 제 힘껏은 그 모양을 펴서 원래 보기 좋은 모양으로 돌아갑니다. 그게 뭐하는 겁니까? 나무이파리를 이상하게 나뭇가지를 꺽어놓으면, 제 있는 힘껏 그걸 본모습으로 돌립니다. 나무라는 것이, 생명있는 것이. 그게 전부 자기를 꾸미는 겁니다. 자기를 꾸미고, 그게 생애 본능이고, 그게 모든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의 본능이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식물이든, 동물이든, 인간이든 모든 존재는 살려고 하는 것, 자기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본능입니다. 그러면 인간도 그래 본능으로 사는게 당연한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지으심 받은 만물의 영장 인간은, 타락한 인간이 요런 본능이 있고, 그 본능대로 살 자유가 있지만은, 그 자유를 가지고 자기 본능대로 살았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은 물으시는 것이고, 왜? 그 본능으로 살다가 타락해 죽은 인생을 주님이 대형하심으로, 대속으로 구원해주셔서, 대생의 기회를 주셨으니까 그거는 자기 생애가 아니니까. 그래서 주님이 한번 죽은 인생을 다시 살려 주셨고, 대생의 기회를 주셨는데, 그때도 자기 자유성 가지고 타락한 인간의 원죄성 본능으로 자기 꾸미는 그 생애로 살면 두 번 기회는 주지를 않는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부자처럼 세상을 살면, 마지막 사후세계는 그리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을 하고, 하나님을 발견하고 찾아서 그분에게 순종하는 우리가 되도록 무진 애를 써야 됩니다. 그래서 누차 수도없이 성경에 말했고, 말씀드린 것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해라.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원죄는 자기입니다. 하나님이 계실 그 자리에 자기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타락한 것이고, 그게 모든 죄악의 뿌리고 근본입니다. 모든 본죄의 뿌리는 원죄고, 그 원죄라는 것은 자기라는 겁니다. 자기가 하나님 되는 겁니다. 나 자신, 자기 자신. 하나님의 말씀에 배치되는 자기 자신을 뽑아내지 않으면,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말씀을 가지고 모든 걸 비판하고 따져서, 말씀을 잣대 삼고, 법칙 삼아서 그 말씀에 자기를 끼어맞추고, 복종시키고, 자기를 쳐서 그 말씀에 맞춰 나가는 이것이 신앙생활인데, 수많은 사람이 신앙생활 하다보면,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도 가고 싶으면 가고, 나 가기 싫으면 안가는 것이고, 예배도 드리고 싶으면 드리고 말고 싶으면 안 듣는 것이고. 앉는 자리도 나 앉고 싶은 자리에 앉고 앉기 싫으면 안 앉는 것이고. 찬송도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마는 것이고. 그게 전부 신앙생활하는데 자기 주관대로, 마음대로 신앙생활하니까 그게 무슨 신앙이냐 그말이지요.
내가 하고 싶든지 하기 싫든지, 내 형편이 어떠하든지 그거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무화과 나무 저주하신게 그거 아니겠습니까? 배가 고파서 시장에서, 먹을 것 무화과 나무를, 무화과 열매를 자시려고 가니까 무화과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데, 이유가 뭐냐? 무화과 맺을 때가 아님이라. 4월달, 5월달에 가니까 무화과가 아직 안 열었습니다. 한 8월, 9월 되야 열지요. 4월달되니까 잎사귀는 무성한데 열매 없으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했다고요? ‘저주 받아라’. 무화과 나무 저주했습니다. 왜? 무화과 나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무화과 열매의 때가 맺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그 섭리인데 왜 저주 합니까? 자기 형편은 상관치 않는다 그말입니다. 창조주가 오시면, 그분이 원하면 내놔라 그말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은 하나님이 전부라는 겁니다. 하나님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그말이지요. 이 부자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우리도 세상에 살 때 그리 살면 그리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당신과 당신의 모든 것을 알려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있으니까, 그 말씀이 우리에게 가장 가깝게 오신 하나님이니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서 그분의 뜻, 그분의 요구, 그분의 생각, 그분의 소원, 그분이 하고자 하시는 이걸 찾아가지고 나를 거기 받쳐드려서 나는 산제물로 받쳐드리고, 그분의 뜻만 세워 이루어드리는 이것이 신앙이고, 그래 연습해서 만들어지는 나 자신이 성화된 나 자신이고, 그 성화된 자신이 바로 구원인데, 이게 되지 않으면 구원은 아마득하게 멀어지는 겁니다.
반대로 나사로는, 홍포 입은 부자와 반대로 살았습니다. 나사로는 내놓을것이 아무것도 없는 거지였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지, 병든 몸, 활동성 없는 것, 무식한 것, 둔한 것, 병이 들었고 아무도 없는 고독한 외로움, 세상에서 사람들이 불행이라 여길 수 있는 것은 나사로는 전부 다 가질만큼 그렇게 비참하고 가련해서, 여기 우리 아무리 가련해도 비참해도 나사로보다 못한 분 계십니까? 그럴수는 없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사로는 하나님을 알고 믿었기 때문에 원망하지 않았고, 불만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라도, 어떤 이유에서라도 원망하면 죄다. 원망은 하나님의 예정과 주권섭리를 믿지 않는 죄니까. 나사로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나사로가 그런 형편에 원망하며 살았다면 하나님께서 나사로를 천사들 보내서 받들어서 그렇게 데려가지 않습니다.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감사로. 고난을 받았는데,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제 이것을 기억해라’. 왜 고난 받았습니까? 000샘, 나사로가 왜 고난 받았을까요? 나사로 고난 받은 것이 아들 딸 키우기 위해서요? 돈 많이 벌기 위해서? 자녀 기르기 위해서 그랬겠습니까? 아니면 직장생활 때문에 머리 아파 그랬겠습니까? 나사로가 고난 받은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습니다. 이제 저기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하나님께서 많은, 영원한 위로를 주셨는데 왜 그런 위로 주십니까? 기독교는 고행주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유없는 보상하지 않습니다. 나사로가 고난받은 것은, 홍포 입은 부자가 즐겁게 잔치했다 그러니까, 홍포 입은 부자는 고난을 안 받았겠습니까? 세상에서 자기 이름을 유명하게, 존경받는 이름을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됩니까? 얼마나 수고를 많이 해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러니까, 홍포입은 부자는 항상 웃고 산게 아닙니다. 마음을 즐겁게 산게 아니고. 그도 많은 고난, 역경을 겪었지만은 그 뿌리가 전부 자기에게 나왔기 때문에 그리 표현한 것이고,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 것이고, 나사로는 고난 받은 것이, 말하자면은 홍포입은 부자의 고난과 나사로 고난이 꼭 같아도 근본이 다르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보상이 나온겁니다.
나사로는 그의 모든 생애 전부는 가진 것이 없으니까, 아는 것이 없으니까, 병이 들었으니까 해봐야 얼마나 했겠습니까, 나사로가. 예수님이 하신 생애는 33년 4개월입니다. 길다면 길지만은 짧다면 짧고. 공생활은 3년 4개월입니다. 3년 4개월 복음 전하고 활동해봐야 예수님이 얼마나 했겠습니까? 예수님이 돌아다닌 것이 미국을 갔습니까? 영국 갔습니까? 한국을 왔습니까? 일본에 왔습니까? 예수님이 팔레스타인 지방 그 좁은데서 33년 4개월 뱅뱅 돌아다니고 복음 전했는데, 그게 전분데, 왜 예수님은 영원토록 구주가 되시는 겁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주어진 거기서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다, 하나님이 함께 오신 신인양성이라서 그런 것이고 우리 대속역사니까 전부 다 짊어지니까 그런 것이고, 이 나사로는 가진 것이 없고, 무식하고, 몸에 병이 들었고, 활동성 없으니까 활동해봐야 별 것 없는데, 그런데 그에게 주신 그 생애에서 평생을 빈틈없이 하나님 한분만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순종하고, 감사하면서 말씀으로 사는 그 생활에 고난을 받아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제는 이 세상 끝났으니까 마음껏 그에게 위로를 주셨다 그말이지요.
사람이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그 좋은 환경속에서도 마음에 늘 원망, 불만 불평, 괴로움이 있는 사람이 있고, 나사로 같은 어떤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늘 감사와 찬송으로 사는 사람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셔서, 내가 너를 광야로 인도하신 것을 기억해라. 뭘 기억하란 말입니까? 내가 너를 광야로 인도해서 너로 주리게 하시며, 목마르게 하신 것을 기억해라. 또 만나 주신 것도 기억해라. 메추라기 주신 것도 기억해라. 그리하신 것은 너를 낮추시며 너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지 안하는지, 계명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를 알리려 하심이라.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를 통과케 하시면서 온갖 환경 만들어서 그 가운데로 통과케하신 그 이유는 그 속에서 그들 스스로, 그들 자신이, 그들의 마음에 생각이, 인식이, 그들의 깨달음이, 그리고 그들의 모든 생활이, 중심이 전부 하나님으로 인해서만 움직이고 요동하지, 하나님 아닌 어떤 것에게도 흔들리지 않고 피동되지 않는 그들을 만드시기 위해서 그래 하신것처럼,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고 온갖 환경 주시는 것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하나님 한분으로 전부 삼아서 그분으로만 동하고 정하는 그런 우리를 만드시기 위해서, 그러기 때문에 결국 나만 만들어지면,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시험이란 것은 어려움입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어려움 당하니까 힘들고 괴롭고, 고달프고, 죽을 지경입니다. 어려움이 뭐 때문에 나온다고요? 오직 각사람이 시험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라. 들어가보면 별에별 종류의 욕심, 자기 때문에 시험을 다 당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런 자기를 바꿔서, 변화시켜서, 연습시키고, 연단시켜서 어떠한 외부 환경이 몰아쳐도, 피조물 무엇이 와도, 어떤 것이 천하가 다 달려들어도 요동하지 않는 하나님 앞에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시기 위해서 이 세상을 만드셨고, 우리를 세상에 두시고 인도하고 계신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만 완전히 하나님 앞에 변함없는 사람이 되어지면 더 이상 시험에서 해도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 뭐 때문에 시험을 하시겠는가 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장차 온 세상이 임하여 온 세상을 시험할 때라. 그러나 작은 능력 가지고 주님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 그 시험을 면하게 된다. 시험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시험이 오되 시험이 시험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는. 교과서를 완전히 달통을 하고, 수능시험 출제내는 그 수능시험을 뛰어넘은 그런 사람은 시험치는 것이 기다려지지요. ‘수능시험, 한번 즐겨보지. 내가 한번 실력을 뽐내주지.’ 웃으면서 휘파람 불면서 가서 앉아서 여유있게 다 해놓고 만점 받겠지요. 그런 실력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에게는 시험이 시험거리가 되지를 아니합니다. 되지 못하니까,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는게 뜻이다 그말이지요.
나사로는 그리 살았습니다. 이래 사니까 나사로는 세상에서 고난을 받았지만은 그 고난이 전부 감사로 다 바꾸어졌고, 그래 평생 사니까 세상에서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 앞에서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영원히 위로받는 이런 사람이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는 장소가 상관이 없습니다. 시대가 상관이 없고, 남녀 성별이 상관없고, 연령이 상관 없습니다. 나아만 집에 팔려간 계집종은 열대여섯살되는 어린 계집종인데, 포로로 잡혀간 종된 계집 종, 거기서도 하나님이 역사해서 크게 영광을 드러내신 겁니다. 다니엘도 포로로 잡혀간 사람입니다. 요셉은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장소가, 시대가, 성별이, 유무식이, 건강하고 병약함이 상관이 없다 그말이지요. 자기에게 주어진 거기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있고, 현실이 있으니까 그 말씀따라서 나를 부인하고 순종해나가고, 믿음만 지켜나가면 역사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겁니다. 나사로 같은 형편에서도 이런 일이 이루어지는데, 우리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말씀을 기억하고, 이세상에서 우리는 홍포 입은 부자처럼 하나님 없는 자기, 천국 없는 세상, 주님 대속 없는 세상에 어떤 수단과 방편, 하나님 말씀 없는 인간의 모든 지식 아무런 가치없고 사후세계에 물한방울도 쓸모없는 결과를 만들고 마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세상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나사로처럼 어떤 환경에서도 원망, 불평없이 감사로, 기쁨으로, 하나님을 믿으니까. 말씀으로 알려주신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과 지혜와, 그분의 사랑과, 약속의 신실하심을 믿으니까, 그분의 목적과 구원세계를 알고 믿으니까. 그리로 나를 인도하시는 그 사랑을 믿으니까 감사가 나올 수 밖에 없는 거지요. 오늘도 믿는 사람들은 부족하지만은 그리 삽니다. 가다가 넘어져도 또 회개하고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그러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합니다. 어떤 시련줘도, 그 시련이 고통스러워 부르짖어도 좀더 기도하고 돌아서고 나면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라, 사랑이라 깨닫고 또 찬송을 하고 회개하고 또 그리 돌아서고, 그래가지고 자꾸 자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깊이 깊이 좀 생각해보십시다. 우리의 구원이 무엇인지, 이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신앙생활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을 찾아 만나야 됩니다. 그 하나님은 말씀 속에 담아주셨습니다. 말씀을 깨닫고, 믿음으로 살아나가면 나사로 같은 상황이 닥쳐도, 결과는 하나님의 영원한 위로, 아브라함의 품에 받들려 위로받는 이런 결과를 맺게되고, 부자처럼 살면 참으로 세상에 살때는 좋았을지 모르나, 영원한 수치, 고통이 있게 된다는 것을 오늘 기억하고 지혜롭게 사는 우리가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