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2-주후(롬5:3-4)
소망2014-01-13조회 640추천 52
(설교원문)
20140112 주후
로마서 5:3-4
이런 말씀들은 요절로 외워두는게 좋겠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우리 같이 한번 해보실까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룹니다”.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 만든다 이 말씀은,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받고, 피동이 되고 더하여 지배를 받는다 그말입니다. 일반적인 말이고, 일반적이라 말은 통계라는 뜻이고, 통계라는 말은 역사라는 말도 됩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 속에 사람이 땅위에 살고, 사람이 사는 생활을 가만히 지켜보니까 1년, 10년, 20년, 30년 또 한 세대가 가면 역사가 글이 있어서 문자가 있어서 이게 기록된 과거 역사를 또 보니까 사람일이, 인간사가, 사람들의 사는 세상 모습이 어떻게 되어지는지, 어떻게 변해지는지 이런것을 현시대를 보고 평생 수십년을 살면서 어릴적을 보고, 또 청년때를 보고 노년을 보고, 자기가 먼저 산 인생의 앞선 사람들을 보고, 자기 시대를 보고, 또 그 전 시대를 기록을 통해서 혹은 소문을 통해서 듣고 그렇게 알아서 이런 말들이 생겨지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에 우리나라는 주로 한문 문화권, 중국권 이러니까 주로 고사성어 혹은 속담, 이런걸로 생겨진 사자성어 이런말들, 그런말들이 그냥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진 말이 아니고 세월속에서, 오랜 세월속에서 사람들이 경험하고 체험한 그런 통계, 역사 이런 걸 다 모아가지고 나온 그런 결론이 그런 말들입니다. 그래서 사람이란 것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영향을 받는다. 이게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환난은 인내를 만든다’ 그리 말씀하셨는데, 세상이 역사로 통계로 만들어진 그런 우리 귀에 들리는 성어나 속담이나 이런 말들은 참고하면서 대개 그게 일반적으로 그러니까 지식으로 가질만 할 것이고, 성경에 기록된 것은 그대로 확정을 지어버리면 되는 겁니다. 세상 모든 말들은 그게 역사라도, 통계라도 혹 틀릴 수가 있고, 아닐 수가 있을 수 있는데, 성경은 틀림없으니까 그대로 단정을 지어버리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환난은 인내를 만든다 이럴때, 이말을 좀 해석을 하면 사람이란 것은 환경에, 주변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그래 말씀하신거니까 신앙으로 초월해야될 과제중에 하나지만은 일반적으로는 그러하다 그렇게 단정을 지을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대개 보면은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는 그런 강인함이 그 속에 들어있고 또 처세가 일반적으로 보면 좀 능하기보다는 잘 한다, 어릴적부터 그리 살아오니까 그게 몸에 베여져서 저절로 그래되어지는 그런 것을 일반적으로 많이 보는 겁니다. 추운데 사는 사람은 몸도 정신도 강하고, 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보면은 몸도 정신도 좀 무르고, 좀 안좋게 말하면 나태하고 그게 그래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추우면 오그라들고 땅땅 뭉쳐지게 되고, 더우면 풀어지게 되는게 모든 사람의 공통입니다. 물건도 그렇습니다. 여름에는 물건이 어찌됩니까? 여름에는 쪼그라듭니까? 늘어납니까? 여름에는 물질이 더워서 늘어나지요. 늘어나고, 겨울이 되면은 따글따글하게 오그라들게 되는 겁니다. 오그라들면 그게 단단하게 굳을 수 밖에 없는 거지요. 사람도 그런겁니다. 그러니까 추운 지방에 오래 살면 아주 사람이 따글따글하게 야물러질 수 밖에 없고, 더운 지방에 오래 살면 사람이 물러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환경이 그래 만들어지는 거니까. 좁은 지방에 살면 사람이 좁을 수 밖에 없고, 넓은 지방에 살면 마음도 넓어지게 됩니다. 대개 보면은 어릴적에 경제가 좀 넉넉한 부잣집에 사는, 부잣집에서 자란 그런 사람들이 대개 보면은 마음에 여유가 있습니다. 사람이 인품이나 이런게. 아이들도 보면 그렇고, 여유가 있고. 어릴적에 가난하게, 힘들게 그래살면 자기도 모르게 뭔가를 좀 웅크리고 거머쥐고 인색해지는 그런 것이 몸에 저절로 베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사람이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환난을 만나면 사람이, 환난을 자꾸 만나면, 그 환난을 자꾸 겪다보면은 그만큼 사람이 그런 것을 극복해나가는, 그런걸 헤쳐나가는 그런 정신력과 몸의 힘이 저절로 생겨지게 된다 그말이지요. 그래서 환난이란 것은 인내를 만들게 되고, 환난을 자꾸 겪다보면 하는 수없이 겪어나가야 되니까 그 헤쳐나가는게 몸에 익어지게 되는 것이고, 그러다보면 그 인내가 그 몸에 익어져있으면 그 사람은 인내로 계속하다 보면 연단이 되어지게 되고, 연단이 되게 되면 사람은 뭐든지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겁니다. 모든 세상 일은 사람이 어떠냐에 따라서 일은, 승패는, 모든 승패는 사람의 어떠함에 따라 달렸기 때문에 그런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시키시는 그런 연단, 인내는 연단을 이룬다, 야고보서 1장에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시련이라 말은 시험하고 연단한다 말이지요. 믿음의 시련이 뭘 만듭니까?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줄 앎이라’. 그리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시키시는 그 연단의 모습이 바로 그러합니다. 우리를 단단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단단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그래서 이 말씀의 순서대로 보면은, 우리를 연단시키기 위해서, 단련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하고, 그 인내가 필요하니까 인내를 기르시기 위해서 여러 가지 환난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리 말할 수 있고, 그러면 왜 인내가 필요하냐? 인내가 왜 필요하냐? 인내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리 결론이 되겠습니다. 인내는 소망을 위해서 필요하다. 소망 없는 인내, 소망을 향하지 아니하고 소망을 바라보지 않는, 소망이 없는 인내는 필요가 없고 의미가 없는 겁니다. 소망이 없는 인내는 필요없는 인내고, 헛수고 헛고생이고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다 소망으로 사는 것이다. 소망으로 산다 그말은, 낙으로 산다 그말입니다. 무슨 낙으로. 그러면 모든 사람은 세상에 사는데, 낙이 없으면 세상에 살 맛이 없을 것이고, 낙이란 것은 즐거움이고 기쁨이고 이런 것인데, 그런 낙이 있고 즐거움이 있어야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고, 더욱이 어려움을 만날 때, 그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그 배경에는, 그 어려움을 헤쳐나가야될만한 그런 이유가 있어야 되는데, 그 이유가 뭐냐? 왜 이런 어려움이 왔으며, 어려움을 헤쳐나가야되는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가 바로 지금 이 어려움을 통해서 자기 앞에 이루어질 미래의 좋은 결과를 바라보고 그렇게 현재 어려움을 헤쳐나가는데, 현재 당면한 어려움에, 이 어려움 너머에 미래에 좋은 것이 오지 는다면, 좋은 결과가 맺어지지 아니한다면 현재 어려움을 맞이할 필요가 없고, 이겨서 헤쳐나가야될 이유가 없는 겁니다.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보고 이른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길이 참으라’. 오래 참고 길이 참으라. 욥은 인내한 것이, 앞날이 어찌될 줄 모르는데 욥은 인내를 했지요. 욥의 인내를 들었고. 그런데 그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몰랐지만은 거기서 범죄하지 아니하니까 하나님께서 좋은 결과를 주셨는데, 일반적으로 볼때, 진리를 아는 욥이니까 그리 할 수 밖에 없었겠지요.
일반적으로 볼때 사람이란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무런 낙이 없으면, 재미가 없으면, 우리 교회 중간반 학생들이 오늘 오전에도 뒤에 좀 소란스러웠지요. 그런데 중간반 학생들은 데려오는데, 여기 우리 앉아계신 분들, 예배 보는 분들은 오는 것이 좀 늦게 오고 예배 방해되고 소란스러운 그 면만 크게 부각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을 전도해서, 심방해서 매 주일 데려오는 그 수고는 우리가 앉아 예배볼 때 방해받는 그 수고에 비할바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수십배 더 큰 수고가 들어가서 그 아이들이 오는 겁니다. 요즘 세상에 놀러다닐 곳, 갈 곳이 천지인데 예배당에 와서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무슨 말인지 모르는 지루한 예배시간 늦게라도 와서 앉아있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교회로 발걸음을 향한다는 그 자체가 기적이고 그들이 매주 와서 조금이라도 앉아있다는 그 자체가 사람의 힘으로 되는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 그렇게 만드는데 들어가는 그 시간과, 사람의 수고와, 경제 비용이 굉장히 많이 들어갑니다. 알게 모르게. 굉장히 많이 들어가는데 그래봐야 몇 달을 데려와봐야 어떤 아이들은 몇 년 데려와봐야 항상 거기서 거기 같고, 도무지 자라는 모습이 안 보여지는 것 같은데, 그런데도 그 수고를 계속하는 것은 왜 합니까? 왜 그런 수고를 계속 합니까? 언젠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도무지 안 될 것 같은데, 어느날 말씀 한마디에 혹은 은혜를 받고 변화가 되든지, 또는 아닌 것 같은데 꽁꽁 언 겨울에 온 사방천지가 꽁꽁 얼어붙어있는데, 삭풍이 부는데, 봄이 오는 것 같지 않은데 봄이 오는 줄 모르게 봄이 오는 것처럼, 아이들이 자라면 자라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가요? 식물을 기르면, 식물은 좀 빨리 자라니까, 1년초 같은 이런거는 좀 빨리 자라니까 하루가 다르게 보이는 그런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든지 동물이든지 생명이 자라는 것은 보면은 눈에 안보이지요. 요즘은 촬영기법이 워낙 좋아서 세밀하게 촬영해서 텔레비전같은 거 보면 쑥쑥 자라는게 보이는 것 같지만은 그게 그냥 그런 것이 아니고, 그것이 오랜 세월 되는 것을 다른 기술적인 방법으로 한눈에 보여져서 그렇지 그게 눈에 보이는게 아니다 그말이지요. 그런데 안보이는데, 아기가 매일같이 젖 먹고, 자고 놀고, 먹고 자고 놀고 그래가지고 세월이 하루, 이틀, 한달 두달 지나고나니까 어느새, 언제보니까 컸고, 언제보니까 기어다니고, 언제보니까 일어서고, 언제보니까 걸음마를 떼고, 말 한마디 두마디 하고, 그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명이란 것이니까, 그게 생명이 속에 들어있으니까 그게 자라면서 점점 생명의 작용을 하니까 조금씩 사람 모습을 갖추어 가는 것처럼, 예배당에 와서 몇 년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은데, 그래가지고 몇 년 지나고 난 다음에, 밖에 나가서 신앙생활하는 걸 딱 보면은 이게 벌써 구별성을 가져서, 주일은 저렇게 지키는게 아닌데? 예배는 저렇게 보는게 아닌데? 자기들은 주일을 그렇게 지키지도 못하고, 예배는 그렇게 보지도 못하면서 벌써 아닌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그런 지식이 머릿속에 박혀있다 그말입니다. 알게 모르게 한마디씩 자꾸 들어가가지고. 예배도 보는 것 같지 않고, 와봐야 항상 장난만 치고, 자기나 하고 그리 하는데도 불구하고 세월이 지나가니까 그게 조금씩, 본인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도 모르게 그렇게 변화되는 그런 역사가 들어가 있다 그말입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은, 변화되면 이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런 소망을 바라보고 현재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적인 효과가 없는, 먼 미래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오늘에 많은 노력을, 투자를 아낌없이 하고, 그 수고에 대해서 피곤하지만은 피곤한 줄 모르고 그렇게 하게 되는 겁니다.
만약에 불택자인줄 안다면, 이거는 암만 해봐야 안되는 줄로 확신한다면 우리는 그런데 헛수고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기독교는 모험의 도가 아닌 것이고, 고행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뻔히 아닌 줄 알고 안되는 줄 알면 거기는 투자하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는 철저한 영리주의고, 계산주의입니다. 그러니까 유익없는 곳에 투자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다 그말이지요. 세상 계산법이 달라서 그러하지, 그런 모든 것들이 다 미래 소망을 바라보고, 소망이 있으니까 오늘에 그런 많은 투자를 하는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세상에서 뭘 하든지, 철이 없어서 그냥 부모님 슬하에서 먹고, 자고, 공부하는 그리하는 학생, 어릴때 학생때는 그런 개념이, 생각이 없을 수 있고 그냥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세계에도 나름대로 가보면, 그래도 그들 안에서도 자기 세계에서 재미가 있고, 낙이 있고 그런게 있으니까 세상을 살지, 단순히 그런 것이 아무것도 없이 부모님 밑에서 눌려가지고 아무런 낙이 없고 재미 없이 그리 살면은 그 생활은 참 견디기 힘드는 겁니다. 그러니까 뭘 하든지 간에, 사람이란 것은 일반적으로, 본능적으로 그런게 있는 것이고, 또 어느 정도 자라고나면 눈에 보이는 그 수준에서도, 가장 낮은 수준이지만은 눈에 보이는 그 수준, 그 수준에서도 ‘저거 좋아보인다. 나도 저걸 가져봤으면’ ‘저거 참 좋아보인다, 나도 저걸 누려봤으면, 취해봤으면, 나도 저렇게 되어봤으면’ 하는 그런 눈에 보이는 가장 저급의 가치관이라도 그런걸 보고, 좋아보이고 자기도 그리 되고 싶으니까 그것을 취하기 위해서, 얻기 위해서, 그리 되고 싶어서 노력을 하고, 세상에서 여러 가지 힘을 쓰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다 그말입니다. 다 종류가 다르고, 정도 차이지 모든 사람은 한말로 말하면 소망으로 사는 것이다. 소망이 없다면 사람은 세상에 살 맛이 없는 겁니다. 오늘을 사는데,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없다면, 오늘보다 나은 미래가 보장되지 아니한다면, 보장되지 않지요, 사람이 미래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복권을 사는 것이 죕니까? 그렇게 물었는데, 복권을 사는게 죄다, 복권 사는 그거는 따져보면, 성경 말씀 바로 어기는 죄는 아닐지라도, 복권은 노름과 꼭 같은 것이라서 그건 바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복권 사는 것 따져보면, 수많은 사람 돈 모아가지고 몇 사람에게 나눠주고, 나머지 복권 산 사람 돈 다 날리는 거니까 노름하고 다를 바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합법적으로 위장했지만은, 포장 했지만은 다 그건데, 그런데 거기에 그 사는 사람들이 ‘나도 한번 걸리기만 하면 팔자 고친다’는 그 하나, 참 가능성이 평생을 두고 될 가능성이 없는, 몇십만분지 일이 될까 하는 그런 가능성을 두고도 그 복권을 사는 사람이 전국에서 수만명, 수십만명이 되니까 몇 억, 몇 십억 돈이 생겨지겠지요. 그만큼 많은 사람이 그런 허황된 꿈인데도, 돼지 꿈을 꾸고나면 ‘복권 당첨 될란가’ 그래가지고 사고 사고하는 그것도 전부 헛된 꿈인데도 불구하고 그 보다 나은 앞날을 바라보고 그런 일들을 하는 겁니다. 그거는 헛된, 허황된 꿈이니까 그렇지만은, 일반적으로 사는 사람이 ‘지금은 가난해도 쥐구멍에도 볕뜰날이 있다더라. 지금은 가난해도 열심히 일하고 알뜰하게 모으면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자녀를 교육을 잘 시키면 ‘이놈이 앞으로 부모를 잘 모실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보다 더 나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꿈을 꾸면서, 소망하면서, 그날에 누릴 것을 생각하면서 오늘에 모든 생활과 고생을 하는 것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다 무엇으로 산다고요? 소망으로 산다, 꿈을 먹고 산다 그리 말하지요. 꿈을 먹고 살고, 낙을 위해서 산다. 성경에도 그리 나옵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그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기쁨이 없으면, 낙이 없으면 세상에 살 아무런 맛이 없는 겁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낙이 없으면 세상을 살 맛이 없습니다. 그러면 좀 생각해볼 수 있는 연령층에 있는 분들은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나는 무슨 낙으로 사는가? 한번 물어볼까요? 나는 세상을 무슨 재미로 사는가? 대부분의 가장들은 가족들 먹여살리는 그 재미, 집에 돌아가면 아내 있고 자식들 있고 가족들이 화목하게 사는 그 재미, 그 낙으로 사는 사람도 많고. 여러 가지 낙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어쨌든 모든 사람 다 그런 낙을 가지고 살고, 재미를 가지고 살고, 그 낙과 재미가 지금처럼 계속되기를 바라고 혹은 좀더 좋아지고 나아지기를 바라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현재를 사는 것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고 우리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다 그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거기서 한단계 더 들어가면, 모든 사람이 그런 재미, 취미, 낙, 즐거움, 인생의 기쁨, 이런 맛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사람이 다 각각 제잘난멋에 사는 것이고, 제멋에 사는 것이고, 자기 기쁜대로, 자기 좋은데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인데,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것을 보고 좀 판단을 한번 해봐야겠지요. 사람들이 누리는 그 낙이나 기쁨이나, 취미나 재미나, 즐거움이나 바라보는 소망이나 이런 것들이 과연 그것이 예수 믿는 우리들도 저걸 가지고 그대로 평생 살만한 것이냐 아니면 좀 따져봐야 될 것이냐. 일반적으로 우리도 세상 사람들처럼 그렇게 그리 누리고 사는 부분도 없지 않으나, 그러나 우리들이 그런 걸 좀 구분하고 좀 따져서 살펴가지고 보다 더 가치있는, 보다 더 쓸모있고 가치있고, 좀 오래갈 수 있고, 더 나은, 좀 더 구비하고 온전한 그런 재미나 그런 취미나, 그런 기쁨이나 소망을 찾아가지고 나아가야 되겠다 그말인데, 그것을 찾는 방법이 뭐냐? 그것을 찾는 방법이 말하자면은, 눈으로 보는 것. 그냥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대로 혹은 귀에 들리는대로, 몸이 아는대로 그 정도에서 기쁨도 재미도, 낙도 소망도 가지는 그런 차원이 있고, 그래서 자기 눈에 보니까 좋아보이고, 크니까 좋아보이고, 아름다우니까 좋아보이고, 화려하니까 좋아보이고, 많으니까 좋아보이고 그래서 ‘나도 저렇게 많았으면 좋겠다, 컸으면 좋겠다, 높았으면 좋겠다, 나도 저리 되어봤으면 좋겠다’ 하는 눈에 보이는 그 정도가 있는데 그거는 아주 저급의 것. 사람의 육안으로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하는 그것은 아주 낮은 정도, 그런것은 오래가지 않고 쉽게 무너지는 그런 것들이겠고, 그보다 좀 더 안으로 좀더 고차원으로 들어간다면 눈에 보이는 그것을 마음 이성을 가지고 따져보고 생각해보는, 돈을 많이 가지면 좋겠는데, 은행 가서 은행에 가니까 돈이 현금이 왔다갔다하니까, 돈이 많으면 좋겠지만은 그 현금을 많으면 좋으니까 덥썩 쥐고 내 주머니에 집에 넣으면 그게 감옥가는 것이지 좋을 것이 없다 그말이지요. 그러면 돈이 많으면 좋겠지만은, 그 많으면 어떻게 많아지게 해야 되느냐? 많아지는 방법도 생각을 해보고, 또 많으면 이걸 어떻게 써야 되느냐? 많으면 왜 이것이 유익되어지느냐? 돈이든지 뭐든 여러 가지 면으로 자기 마음의 생각가지고, 이성가지고 생각해보고 따져보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런 기쁨, 누리는 낙, 취미, 즐거움 또 소망하는 것, 이런 것을 좀 시간적으로 생각해보고, 또 유익적으로 생각해보고, 범위적으로도 생각해보고, 그래서 이게 좋으면 얼마나 좋으며 어떻게 좋으며, 어디까지 좋은가? 기쁘면 얼마만큼 기쁘며, 언제까지 기쁠 것인가? 내가 기쁘면 또 다른 사람은 어찌 될 것인가? 즐거우면 이 즐거움은 또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또 뭔가 크면은 이 큰 것이 어떻게 해서 좋은 것인가? 언제까지 또 클 것인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다 부러워하고 가지는 그런 기쁨이나 낙이나, 그것 때문에 세상을 사는 것인데 그 사는 그 욕망을 두고, 그것을 생각해서 그것이 어디까지 좋으며, 언제까지 좋으며 이런 것들 좀 따져보는, 생각해보는 이게 이성으로 생각하는 것이니까 마음의 이성을 가지고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바라보는 소망을 한번 살펴볼 것이고. 그러면 눈에 보이게 좋은 그것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고급의 그런 걸로 올라갈 겁니다. 그래서 그것도 역시 지식인데, 사람이 아는만큼 범위가 넓어지게 되는 거니까, 그러니까 물질만 아는 사람, 명예까지 아는 사람, 물질과 명예와 권력까지 아는 사람, 거기서 좀 더 들어가서 역사까지 아는 사람, 더 들어가서 인생의 참 믿는 사람 아니라도, 그래도 가치를 알아서 사람의 도리를 아는 사람, 그 아는 정도에 따라서 자기가 그 누리는 낙이나 즐기는 그 취미가 다를 것이다 그말이지요. 지금 술을 먹는 사람이 술 먹는 그 맛이 있지만, 좀 생각해보면은 술 먹고 난 다음에 술 취해서 실수하는 것이라든지, 몸 버리는 것이든지 이런 것 생각하면 이것 참 술먹고 좋은 것은 참 좋은 것이 아니겠다. 또 노름하는 그거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고. 바둑이나 장기두는 것도 그때그때 머리쓰고 긴장하고 하는 그런 것은 또 좋겠지만은 그것도 좀 지나고나면은, 이거 해가지고 남는 것이 뭔가? 유익이 뭔가? 실익이 무엇인가? 그리 따져보면 또 그것도 허무할 것이고. 조금더 가치있는 걸로 들어간다면 그래도 사람이 사람이니까 자기 앞날을 생각하면서 나를 좀 실력있는 사람을 만들자 혹은 돈을 좀 모아놓으면 그래도 좀 쓸모있으니까 돈을 좀 모으자. 그래도 돈은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이니까 돈을 좀 알뜰하게 모아놓으면 많은 일 할 수 있을거니까 돈을 좀 모으자. 돈을 모으려고 하니까 좀 기술 익히고 뭔가 좀 일을 좀 해보자. 그래가지고 돈 모으는 그런 재미, 또 지식을 좀 자꾸 배워가지고 습득해서 좀 머릿속에 좀 많이 넣어서 많이 좀 아는 사람이 되어보자. 뭔가 좀 기능있는 사람이 좀 되어보자. 그래서 자격증도 이것 따고 저것 따고 많이 따고 그런 사람들. 그리고, 그런거는 좀 건전하잖습니까 그런게. 그래가지고 이제 가정이 있으면, 우리 가족들이 좀 따뜻하게, 근심 걱정 없이 행복하게 먹고 살 수 있는 그런 가정을 좀 만들어보자. 그래서 우리 자녀들도 교육을 잘 시키고, 내 노년에 잘 봉양할 수 있는 그런 가정을 만들고, 그래서 행복한, 평안한, 근심 걱정이 덜한 그런 세상을 살고, 그런 노년을 좀 준비하고 그리 해보자. 그런것도 하나에 다 소망을 가지고 노력하는 그런것이 되겠습니다. 그래도 그런것은 정상적인 사람의 조금 보통 일반적으로 바로 된 그런 욕망이고 그런 준비고, 그런 노력이라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거기서 좀더 양심을 가지고 그 모든 것 생각해본다면, 양심으로 보면 사람이란 것이 나만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도 있고, 우리 가족만이 아니고 다른 가족도 있고, 범위가 점점 넓어지는 그런게 있고, 있는데, 이제 양심으로 따진다 그럴때 양심은 마음에 가장 밝은 부분이 양심인데도 불구하고 양심이란 것은 지식의 지배를 받는 것이 양심이니까, 자기 속에 들어있는 지식을 어떤 지식을 가장 주인된 그 지식으로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지식에 주격된 그 지식에 따라 양심이 피동되어지니까 세상의 모든 양심은 그 사람에 따라서, 그 사람이 속해있는 거기 따라서 양심이 제각각 달라져있어서, 그래서 원래 양심이란 것은 어떤 것에게도 붙들리지 아니하고 가장 옳고 바른 것을 찾아가는 그 속성이, 그 마음 요소가 양심인데, 지식의 지배를 받다보니까 이게 불교 믿는 사람들은 불교적인 지식으로 양심을 붙드니까 불교를 위해서 양심이 붙들려있으니까 불교적인 양심이 되고 불교적인 거기 어긋나는 양심은 다 그만 삐뚤어진 것처럼 그렇게 보게 되는 것이고, 유교적인 그런 양심이 된 사람은 양심이 유교적이니까 유교에 맞지 않는 것은 다 틀린 것처럼 그리 보게 되는 것이고, 또 다른 사상, 공산주의나 그런 사람들은 거기 양심 붙들리니까 그리 되어진 것이고, 그러니까 양심으로 보면은 이성비판보다 좀더 밝게, 멀리까지 볼 수 있는데 문제는 그 양심이 전부다 죽은 양심, 화인 맞은 양심이 되다 보니까 불신자들의 모든 양심은 그리 되있고,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신앙 양심이 있으니까 그 양심이 살아있으니까 양심으로 생각해봐야 되고.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다 한말로 말하면 소망으로 사는 사람이고, 소망 때문에 살고, 소망을 위해서 살고, 소망으로 인해서 사는 것이 모든 사람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그렇다면 나는 어떤 것을 바라보고 무엇을 욕망을 하고 오늘을 사느냐 그말이지요. 내 미래에 꿈이 뭐냐? 어릴적에 아이들이 가지는 꿈도 꿈이고, 희망이고, 오늘 우리들이 가지는 그 욕망이 뭔지 그걸 돌아보고, 그 다음에 생각할 것은 그런데 그렇다면 내가 가진 그 소망이, 내가 원하는바가, 내가 이루어지고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원하는 바가 과연 그것이 정말 끝없이 가도 후회되지 아니할 그런 것인가를 한번 살펴보되, 그 살펴보는 것이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는 이성 비판 자기 마음으로 생각을 하고 따져봐야 되고, 그 따져보는 거기 들어가서 양심을 써서 이게 정말 과연 욕망할만한 것이냐, 가치둘만한 것이냐, 내 취미로 가질만한 것이냐, 누릴만한 것이냐를 따져보고, 그다음에 거기서 한단계 더 들어가면은 하나님의 성경 말씀 가지고 안약을 삼아서 이 말씀을, 성경을 가지고 그 모든 것을 본다 그말입니다. 성경 말씀하고 비교해보면 이 취미는 어떠냐, 이 기쁨은 어떠냐, 이 낙은 어떠냐, 내가 가치두고 노력한 이것이 성경 말씀에 연결시켜보니까 과연 이것이 후회없이, 가치가 없이 가질만한 것이냐. 믿음을 가지고 성경말씀을 보고 이걸 가지고 대조해보고, 더 나아가면 어렵지만은 이제 영감으로 본다 그러는데 우리가 너무 어렵고, 이래가지고 우리는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 내가 향하여 나아가는 나의 걸어가는 향방, 나의 목표, 나의 목적지, 그게 어디로 향하는지, 향하고 있는 그것이 바로 가고 있는지, 후회되는지. 자동차를 몰고 달리는 사람이 ‘내가 지금 어디 가고있지?’ 모르면 방황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배를 멀고 가는 배선장이 그 배가 가야되는 목적지를 모르면 바다에서 방황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비행기도 그럴 것이고, 알아도 그걸 잊어버리면 못 찾는 것이고 그리 되는 겁니다. 이게 비유가 안되니까.
그래서 우리는 첫째는, 모든 사람은 다 소망으로 산다 이걸 우리가 기억을 해야 되겠고, 두 번째는 나도 소망으로 사는데, 그러면 내가 가진 소망은 뭐냐? 내 욕망은 뭐냐? 나는 내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자녀들에 대해서, 내 앞날 미래에 대해서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이 세상을 살고 있느냐 이걸 한번 꺼내어 살펴봐야 되겠습니다. 내 인생의 목표는 무엇이냐. 내 소망은 뭐냐. 소망이 없으면, 그냥 그냥 살면은 생각없이 사는 사람이고 되는대로 사는 사람이니까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걸로 비유하면 되겠네요. 잘하든 못하든 좀 소망을 생각해봐야 되겠는데, 어떤 경영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그래놨데요. 그 유명한 이야기라 그러던데 저는 처음 들었지만은. 어떤 산악 등반대가 높은 산에 가서 눈사태를 만났고, 눈보라를 만나서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길을 잃어버렸답니다. 길을 잃어버렸는데, 알프스 산에서 그랬다던가요? 알프스산 올라가서, 등반대 몇 사람이 갔는데 길을 잃어버렸답니다. 산에서 길을 잃어버렸으니까 꼼짝없이 죽었겠지요. 길을 잃어버리고 어쩔 줄 모르고 거기서 시간을 한참 보내고 있는데, 어떤 대원중에 하나가 배낭을 뒤적뒤적하더니 지도를 하나 딱 꺼내더랍니다. 지도에 딱 보니까 길이 나와있어서 ‘이 지도 따라서 가면 되겠다’ 하고 지도를 보고 길을 찾아갔는데 마침 인가가 나와서 모두 구조가 다 되었답니다, 그 지도를 따라서 갔는데. 그런데 그 지도를 따라서 갔는데 구조 되고 나서 그 지도를 가만히 살펴보니까 그 지도가 알프스산 지도가 아니고 피넬레 산이라던가? 전혀 다른 나라, 다른 지방의 산을 그린 지도더랍니다. 전혀 안 맞는 거지요. 그런데 그 지도 따라가서 보니까 어쨌든 구조가 됐다 그말이죠.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뭐든지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이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 틀린 것이라도 하는게 낫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그러면서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뭐든지 하는게 낫다. 어려움 처해있을때 그 어려움을 방향을 잘못나가면 다 죽는데, 그 구조대가, 산악등반대가 거기서 앉아있으면 어찌 됩니까? 앉아있어도 얼어죽는 겁니다. 얼어죽고, 가다 죽어도 죽는 것이면, 그러면 가다 죽으면 살 확률이 있는 것이고 얼어죽으면 앉아서 그대로 고스란히 죽는 겁니다. 그런데 그래서 그 지도를 보고 찾아갔는데 그 지도가 전혀 엉뚱한 지도인데도 가다 보니까 살았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가만히 앉아 죽는것 보다는 가다 죽는게 낫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사람이 내가 지금 세상을 사는데 ‘나는 왜 살지? 무엇 때문에 살지? 내 인생의 목표는 무엇이지?’ 한번 생각해봐야 됩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정하든지, 또 생각해서 정하든지, 신앙양심으로 정하든지, 말씀으로 정하든지 어쨌든 세상을 사는 사람이, 길을 가는 사람이 목적 없이, 목표 없이 길을 가는 것보다 안타까운 일은 없는 겁니다. 하루 하루 세월을 지나가는 게 인생길을 가는 것인데 내가 인생길을 가는데 내가 지금 무엇을 향해서 하루 하루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 좀 해보자 그말이지요. 이걸 생각해보고, 1차입니다. 그다음 2차는, 내가 이거 생각해보니까 내 목표는 이것인데, 그 목표가 과연 가능한 것이냐? 가능한 것이면 그 목표는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이냐? 그것을 달성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며, 얼마만큼 오래 갈 것이며, 범위는 어떻게 될 것이며, 이걸 따져보되 그 따지는 방법을 두고 눈에 보이는 걸로만 따지지 말고, 눈에 보이는 것에서 좀 깊이 들어가서 이성가지고 생각해서 따져보고, 이성가지고 생각하는 거기서 그치지 말고 양심을 써서 한번 생각해보고, 양심을 써 생각해보면 상당히 깊이 들어간 것인데 그보다 더한 것은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가지고, 성경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성경의 눈을 가지고 내가 정한 그 목표를 보고, 내가 정한 그 목표 뿐만 아니고 성경을 가지고 천하 모든 사람들이 욕망을 하고 바라보고 불철주야 노력하는 그 모든 소망들을 이 성경 가지고 살펴보면은 과연 땅위에서 취미두고 기뻐하고, 재미 누리고 낙을 누릴만한 그런 것이 있는가? 그걸 얻어서 달성해서, 누려서 이루어서, 가지는 그 기쁨이 얼마만큼 갈 것인가, 어디까지 갈 것인가를 생각해본다면 예수 믿는 사람으로써 이 세상에 그 무엇을 이루어도 만족함이 있을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경에서 찾아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찾아야 비로소 만족이 되고 길을 바로 알고 달려가는 그게 되는 것이지, 예수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어떤 소망을 붙들어도 가다보면은 다 막히고 막히고 끝이 있고 이리저리 문제 생기고 다 그런 것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말입니다. 이래가지고 우리의 참 소망을 잡아야 되겠고, 그러면 그래가지고 나오는 소망은 뭐냐? 소망은 말하면,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말로 믿는 사람이 가질 소망은 한말로 말하면 구원인데, 그 구원이 무엇일까? 그 구원을 말하면, 오늘 오후에는 간단하게 이걸 좀 말하고 싶은데 시간이 다 됐는데, 한말로 말하면 구원인데 그 구원은 자체구원이 있습니다, 자체. 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라는 사람이 변화가 되어져서 내 인격이, 나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된, 하나님 닮은 사람이 되는 것이 첫째고, 그게 가장 좋은 구원이겠고. 그다음에는 내 실력이, 내 지능의 실력이 무엇을 맡겨도 다 할 수 있는, 뭘 물어봐도 다 알고, 무엇을 맡겨도 다 할 수 있는 그런 전지전능의 참, 말은 쉬워도 실제는 어려울 것인데, 이런 실력을 갖추는 것이 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위치를 가진다면, 내 위치가 지금은 인간세계에서 보잘 것 없는 한 서민이고, 별로 유식하지 못한 사람이고, 가정에서나 좀 그럴까 별 쓸모없는 그런 사람 같은데, 이 구원을 잘 이루어나가면 하나님 다음, 예수 그리스도 다음에 그 위치에 앉을 수 있는 이런, 하나님 보좌 우편 그다음 위치 앉을 수 있는 이런 위치고 그래서 모든 천상천하, 모든 만물을 다 내가 통치하고 은혜 베푸는 시은자의 위치될 수 있는 이런 위치고 그 활동의 범위를 생각하면 영계와 우주 전부고, 소유를 생각하면 역시 영계와 물질계 전부가 다 내것 되는 것이고 이러니까 이것을 우리 소망으로 삼는데, 문제는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우리 소망의 실상인데도 불구하고 이 성경을 우리가 모르니까 문제고, 알아도 이것을 읽어도 내가 믿어지지 않으니까 문제니까 그래서 믿음의 눈을 가지고 성경을 통해서 이 소망을 잡을때, 우리는 이것만이 유일의 소망이 되지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만족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고 진리를 깨달았다가, 이 구원의 소망을 잡았다가 그만 중단이 되고, 중도에서 타락한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을 다 넘어서서 만족함이 없는걸 넘어서서 이걸 잡았다가 놓쳤기 때문에 그 사람을 붙들 수 있는 방법은 세상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다가 낙심하고 나면은 천하에 몹쓸 사람이 될 수 있고 천하에 희망 없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런데 거기서 바로 깨닫고 나면은, 이걸 바로 붙들고 나면은, 그 예수 안에 있는 소망을 붙든 그 소망보다 더 큰 소망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을 넘어뜨리거나 미혹시킬만한 그런 세상의 무엇도 없다 그말이지요. 이것이 우리들이 가질 소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이 소망이 우리 소망입니다. 영원한 소망, 하늘의 소망. 세상을 넘어서고, 인간을 넘어서고, 모든 피조물 넘어서고, 물질계를 다 넘어서는, 눈에 보이는 거 다 따져보고, 천하 모든 지식가지고 다 따져보고, 그래서 세상 모든 지식을 다 통달하지 않아도 몇가지를 보면 알듯이, 이거는 확률이지만은, 물건을 납품할 때 불량품을 가려내는 방법은 무작위로 그냥 한주먹 집어보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조사해보고 몇퍼센트 이상 불량이 나오면 모조리 다 불량이다. 확률적으로 그렇게 따집니다. 그러나 이거는 그렇게 아니라도 뻔한거니까, 세상지식을 구석구석 다 안 봐봐도 그 지식으로, 그 지식이 만들어내는, 세상 6천년 역사 인간 지식이 만들어내는, 세상에서 나온 발달된 그 지식이 생산해내는 것이 인간의 모든 활동이고, 인간의 모든 언행심사고, 인간의 그 모든 언행심사는 인간이 바라보는 욕망이고, 그 욕망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인생의 가는 것이고, 그래서 천하 6천년 역사에 땅에 가득찬 인간의 모든 지식 전부는 그 지식이 만들어내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고, 그 욕망을 향해 가는 것이 인간의 모든 세상 생활이고 그게 과학이고 문화고 문명이고 발전이고 다 그런 것이기 때문에 현상세계 눈에 보이는 나타난 것 모든 것만 봐도 그 속에 보이지 않는 우리들이 모르는 인간의 지식의 그 깊이나 이런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그말입니다. 맞습니까? 아닌가요 그게? 이게 무슨 말인지 생각이 좀 되십니까?
그러기 때문에 세상을 다 안 돌아다녀봐도, 세상에 가득찬 그 책을 안 읽어봐도 크게 현재 나타난 그런 것만 봐도 인간의 근본과 마지막 최종과 인간의 한계를 알 수가 있다 그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정치든지 또 교육이든지 경제계든지, 문화든지 어느 계층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다 노력하는 거는 전부 인간을 좀더 나은 그런 생활, 보다 더 나은 생활을 위해서, 보다 더 유익된 생활 위해서, 보다 더 사람다운 그런 것을 위해서 그렇게 6천년 동안 사람들이 전부다 노력해왔고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과학이고 발전시킨 것이고 현재 발달된 이 세상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 모습 위에서 인간들이 하고 있는게 뭐냐 그말이지요. 그게 인생들이 모두 낙을 누리는 그게 전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누리는 낙의 모습을 보면, 무엇을 누리고 있습니까? 기껏 한껏 해봐야 도덕이고, 넓은 범위 해봐야 인간의 박애고, 인류 평화고 박애고,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그래서 온갖 법을 만들고, 죄도 만들고, 서로 연대를 하고, 조직을 만들고 온갖 걸 다 주장을 하고 해봐야 마지막에는 사람을 좀 사람답게, 좀 즐겁게 기쁘게, 낙을 누리면서 불편없이 그리 살도록 만드는 그게 전부 아닙니까? 6천년의 과학이 만든 목적이 그거다 말이죠. 그러니까 좀 종교성 있는 사람들이 볼때, 기독교 아니더라도 종교를 가지고 인생을 깊이 아는 사람이 볼때 이 세상에 과학의 발전도, 돈 많은 것도 그 어떤 것도 보면은 ‘참 허무하다. 참 별 거 없다.’ 깊이가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너무 너무 얕아서. 결국은 인간의 본능에 충실하고 본능을 만족시키는 그거 이상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 세상 전부다 그말이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천하 모든 사람들은 거기 모든 걸 다 걸어놓고 평생을 다 매진하는데, 안 믿는 사람들에게야 눈을 막아놨으니까 그렇지만은, 예수 믿고 그 세계를 깨뜨리려고 언덕을 떠나서 그 깊은 세계 그보다 더 한없이 무한히 위에 있는 예수 안에 있는 이 세계를 발견하고도 믿음이 부족하니까 그리 달려가는데, 그런데도 복음을 좀 바로 받고, 좀 생각있는 사람들은 알고나면, 그래서 백목사님 가시고 나니까, 백목사님 밑에 교인들로 있던 많은 분들이 자기 하던 거 전부다 접어놓고 결국 돌아서는게 전부다, 마지막 가는 길은 ‘인간구원하는 목회로 나서는게 그래도 가장 낫다’ 그래 나선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복음을 받고 따지고 들어가보니까 그거 말고는 가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없는 거니까. 그 은혜를 안 받았으면, 안 받은 일반적으로 있는 분들 중에서는 믿음 생활, 나 믿음 생활 잘하고, 내 자녀들 믿음으로 잘 기르고, 후손들 믿음으로 기르고, 내게 주신 범위안에서 많은 사람을 믿음으로 길러 천국준비하게 하는 이보다 더 가치있는 것은 세상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결론이 나지 않을수가 없는 겁니다. 이렇게 결론이 안 나오면 아직까지 예수믿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겁니다. 따져보면 그렇게 나올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는 성경을 받은 사람들이고, 이 성경은 우리 안약입니다. 이 성경가지고 인생의 근본과 과정, 결과를 보고, 세상을 보면은 다 보인다 그말입니다. 부분적으로 따져보면 이것이 다 이상한 그런 것이 있겠지만은, 전체를 다 살펴볼때 마지막 가는 결과는 다 거기서 거기고 다 그리로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본문의 말씀에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왜 환난중에 즐거워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 환난은 마지막에 가는 곳은 소망으로 가는 거니까, 그 소망이 영원한 소망이고 끝없는 소망이고, 하나님의 목적이고 그게 우리 인생의 목표고 영원한 우리의 것이니까. 그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예수 믿는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 생활에 온갖 어려움이 있어도, 가다가 넘어질지라도 마지막은 또 다시 돌아오고 믿음으로 사는 그 생활을 그렇게 해나가는 겁니다. 새벽기도 나오는게 그렇게 힘이 들어도, 막 오만소리 듣고 그래도 또 또, 넘어지면 또 일어서고 또 일어서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다 약하니까. 약해도 넘어지면 일어서고 또 일어서고. 그래서 우리는 다 약한 사람들입니다, 여러 가지로. 그렇지만은 아무리 약해도 소망없는 사람은 없는 거니까 소망을 가지고 현재 있는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하나님이 주신 이 구원의 소망, 영원한 영광의 소망 여기에 가치를 두고 이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나가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인내로 끝까지 계속해서 소망을 실제로 이루어가는 그런 우리가 되어야 되겠다 하는 말씀으로 생각해보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 드리겠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사람은 다 누구나 기쁨으로 삽니다, 낙으로 삽니다. 즐거움이 있고 취미가 있으니까 사는데, 그것을 이루는게 소망입니다. 소망 없으면 세상을 살 맛이 없는데 그러면 나는, 나는 무슨 낙으로 사는가? 무슨 재미로 사는가? 무엇을 위해서 살며, 무엇을 바라보며 사는가를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그리고 난 다음에, 내가 가진 소망이 있다면 이 소망은 과연 언제까지 계속 될 것인가? 얼마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 소망을 이루고 난 다음에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걸 다 계산해보되, 그 계산법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이성으로, 그보다 양심으로, 그보다는 성경을 믿음으로 그래가지고 보면서 우리 소망을 찾고 확정짓고, 그 소망을 위한 과정, 수많은 난관 역경들을 인내로 계속하는, 믿음으로 사는 우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