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4-주후(눅17:5-10)
믿음 더해지는 방법2013-11-25조회 485추천 30
본문: 눅17:5-10
제목: 믿음 더해지는 방법
요점:
1. 소망
- 기독교는 소망의 도
- 어떤 경우에도, 그 누구라도 소망을 버리지 말 것
- 자신이 어떻게 떨어져도 자신에 대한 소망도 버리지 말 것
- 살아 있으니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노력할 것
2. 믿음
-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혜->종자적인 믿음
- 믿음은 심신의 작용으로 되는 인적 요소
- 믿음의 작용은 하나님을 찾아 가는 것
-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믿음
- 하나님과 연결된 도로에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받는 것이 믿음
3. 겨자씨 믿음
- 믿음은 보배이니 크고 많고 강해야
- 겨자씨 믿음을 가지라 하셨는데 겨자씨 믿음은 무엇?
- 겨자씨 믿음은
①활동하는 믿음: 말씀을 알고 인정하고 행하는 생활의 계속
②환경을 삼키는 믿음: 생명의 활동이 있으면 환경을 삼키는 것은 필연
③자라가는 믿음: 생명의 활동으로 환경을 삼키면 자라가는 것도 필연
4. 무익한 종의 믿음
- 우리는 하나님의 종
- 종인 우리가 할 일은 밭갈고 양치는 일
- 밭가는 것은 자기 구원, 양치는 것은 인간 구원
- 집에 돌아와서는 또 주인 먹을 것 예비하고
- 주인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 할 일 다 한 후에는 무익한 종,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
- 이것이 믿음 더해지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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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원문)
20131124 주후
누가복음 17:5-10
기독교는 무슨 도(道)라고 했습니까? 믿음의 도입니다. 또 기독교는 무슨 도겠습니까? 기독교는 사은의 도라 그리말하고 또 기독교는 무슨 도입니까? 기독교는 소망의 도라 그리 말합니다. 같이 해보실까요? 소망의 도. 기독교는 소망의 도입니다. 소망이라 말은 바라본다 그 뜻입니다. 나쁜 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좋은 것을 바라봅니다. 좋은 미래를 바라보는 겁니다. 그게 기독교입니다. 가장 좋은 것, 가장 좋은 분은 하나님이고 가장 좋은 나라는 천국이고,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가장 좋은 것은 우리의 구원이다 그리 말하면 될런지요. 이 좋은 분, 이 좋은 나라, 이 좋은 것을 바라보는 소망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소망의 도입니다. 소망이란 것은 현재를 살면서 보다 나은 내일을 향해가는 미래를 향해가는 것이 소망입니다. 소망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낙망이나 절망이지요. 낙망 절망은, 절망이라 말은 낙망보다 더한거겠습니다. 낙망은 떨어지는 것이고 희망을 버리는 것이겠고 절망은 끝나버리는 그런것이 되겠습니다. 기독교는 소망의 도기 때문에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고 그 미래는 가장 좋은 앞날이고 또 동시에 그 좋은 앞날을, 그 좋은 분을, 그 좋은 나라를 바라보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현재 상황이, 현재 자신의 처한 모습이 어디까지 떨어져있을지라도 믿는 사람은 결코 낙망, 절망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죄 중에 제일 큰 죄가 무슨 죄입니까? 살인죕니까 음행죕니까 무슨 죄지요? 낙망죄가 가장 큰 죄다, 우리는 많이 듣고 알았습니다. 낙망죄는 가장 큰 죕니다. 이거는 예외가 없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낙망은 큰 죄고 그러므로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낙망은 가장 큰 금물입니다.
나 어느곳에 있든지 늘 마음이 편하다, 그 어느곳이라는 것은 장소만 말하는게 아닙니다. 어디있든지 장소도 해당이 되고 동시에 나 어느곳 그말은 아무리 어떻게 가난하여 나사로같은 가난한 지경에 있어도, 온몸에 병이 들어서 욥이 마귀가 하나님에게 허락받고 욥을 목숨만 붙어있을만큼 그렇게 온몸을 정수리부터 발끝까지를 쳐서 발바닥까지 쳐서 온몸에 악창이 나도록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어서 그리됐으면 보나마나 몸에 막 구더기가 기어다녔을겁니다. 안희숙 선생 오늘 찬송가 반주에 내일 일은 난 몰라요, 그 가사 지은 그분이 감옥에서 신사참배 항거요배 때문에 감옥에서 옥중생활을 많이 했는데 신사참배를 반대한 사람은 감옥에 들어가서 사지가 자유롭고 항거요배까지 동방요배까지 반대한 사람은 감옥안에서도 수족을 채워놨답니다 뒤로. 손을 채워놨다던가요. 손을, 발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손을 뒤로 묶어놨답니다. 그래서 밥 먹을때도 손이 뒤로 묶인채로 밥을 먹어야 됩니다. 어떻게 먹지요? 손을 이래 뒤로 묶어놨습니다. 밥을 어떻게 먹습니까? 앞에 밥이 있으면 입을 갖다대고 그렇게 동물처럼 짐승처럼 그래 밥을 먹었답니다. 수갑을 채워놔서 손목이 헐어가지고 손목에 구더기가 기어다녔답니다. 욥은 그보다 훨씬 더했을겁니다. 온몸에 악창이 나서 고름이 나서 기와조각으로 고름을 긁었으니까 얼마나 가렵고 고통스러웠으면. 차라리 죽는게 낫지요. 그런 지경에 있어도 욥은 소망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거기보면은 낙망같은 그런게 있어도 그래도 그 깊은 속에 들어가면 끝까지 소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낙망 절망하는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실수가 있고 이전보다 배나 더한 복을 주실 수가 있는겁니다.
죄를 지어서 이게 말씀이 말씀을 같이 들어도 이 말씀을 들을때 이 말씀을 뭘로 받아야 됩니까? 모든 말씀을 읽을때나 들을때나 말씀을 읽고 들을때 우리는 그 말씀을 무엇으로 받아야 됩니까? 복음으로 받아야 복이 있습니다. 말씀은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복음으로 받지 아니하고 엉뚱하게 죄 짓는데 위안죄로 삼으면 더 큰 문제가 되고 이 말씀가지고 남을 비판하면 큰 문제가 됩니다. 죄를 지어서 어디까지 타락해서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가지고 엉망이 되었어도 그 지경에서도 우리는 나 어느곳에 있든지 해당이 됩니다. 거기서 마음이 편할리 없겠지만은 거기서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말하면 환경이 어떻게 몰아쳐서 어떤 환경이 내게 몰아쳐도, 그 환경을 당면한 나 자신이 어떻게 비참한 처지에 곤경에 처해져도 어디까지 떨어져서 바닥까지 쳐박혀도 믿는 사람은 거기서 소망을 가지고 일어서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스스로도 그러하고 다른 사람 볼때도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그 누구라도 우리는 어떤 사람이라도 소망을 버리면 하나님 앞에 큰 책망을 받습니다. 소망을 버리는 것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소망버리는 것 ‘하나님이여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나이다’ 그 말속에 그 바리새인의 그 입을 하나님께서 콱 쥐어박아서 ‘야 이놈아 너는 얼마나 의인이길래 니 앞에선 세리를 너와 같지 않다고 그렇게 큰 소리 치느냐?’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그렇게 자기는 의인으로 알았는데 하나님은 그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더 의롭다고 판정을 한 것이 하나님의 판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나 자신은 죄없고 깨끗하고 어디까지 의인되고 성자 성녀되고 내 앞에 있는 어떤 사람은 어디까지 큰 죄를 지어서 ‘저것도 인간인가’ 싶은 그런 사람이 보여도 그 사람에 대해서 낙망을 하면 하나님 앞에 큰 책망을 받게 됩니다. ‘저도 나와 같은 사람인데 하나님이 나는 은혜를 주시니까 이만큼 됐는데 저에게도 은혜를 주시면 나보다 더 나은 의인이 될건데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니 내게 주신 은혜를 그에게도 주옵소서’ 요 마음을 가져야 하나님께서 내게도 은혜주시고 그도 긍휼이 여겨주시지 ‘나에게는 좋은 은혜주시고 이렇게 의인 만들어주시고 저 인간은 저렇게 막대먹은 인간 만들어주셨으니 나는 저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요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너 얼마나 의로운가보자’ 하고 그에게 주신 은혜를 빼앗아버리면 한순간에 저도 별 수 없는 타락한 죄인이 되고 맙니다. 사람이 그 천하없는 의인도 성자도 그에게서 몹쓸것만 쏙 뽑아내놓으면 천하 몹쓸 인간이 되고마는 것이고 아무리 몹쓸 죄인도 장점을 뽑아놓으면 그도 의인입니다. 이런 양면성이 없는 사람은 천하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 누구도 없습니다. 백목사님은 우리와 다른 차원의 말씀이지만은 설교 중에 그런 말씀하십니다. ‘나도 죄인입니다. 내 속에 있는 죄를 알면 여러분들이 기겁을 하고 도망칠 그런 죄도 나도 가지고 있습니다.’ 백목사님 설교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백목사님같은 의인은 시대 성자입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그분도 스스로 그렇게 알았습니다. 사도바울은요? 사도바울은 뭐라그랬습니까? ‘죄인중에는 내가 괴수다. 막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팔푼이다 그말이지요. 만삭되지 못해 났으니까. 당신 스스로 그래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성자라 그러는데 자기는 보니까 ‘성자?’ 그래서 신사참배 때문에 감옥에 갇혔던 많은 분들이 참된 분들은 밖에 나오니까 출옥성도라 그래서 막 대우하고 높이고 영광돌리는데 본인들은 고개를 못 든답니다. ‘아이고 말도 마십시오. 속에 있으면서 껍데기는 옥중성도인데 오만죄 다 짓습니다.’ 부끄러워서 고개도 못 든답니다. 그게 진정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런면을 가져야 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뼈를 깎는 아픔으로 죄가 있으면 회개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지만은 주님이 붙들어 주옵소서 이것 때문에 대속하지 않았나이까. 그래서 주님이 의원으로 오시지 않았나이까 나는 죄인이고 병자입니다. 나를 고쳐주옵소서. 소망가지고 간절히 매달릴것이고 그래서 어떤 지경에 처해도 우리는 낙망할 수 없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볼때도 그렇습니다. 그 어떤 흉악한 그런 죄인을 봐도 우리는 그 죄인에 대해서 긍휼이 여기고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고 그래서 자기 죄는 어쨌든 세밀하게 날카롭게 정죄해서 그걸 드러내고 없애려고 노력하고 다른 사람죄는 우리는 어쨌든 죄를 덮어주는 것보다는 어쨌든 이해를 하고 참고 기다리고 또 인내하고 그런 마음을 가지는 그게 우리 믿는 사람의 가질 자세입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래서 살아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살아있다는 말은 얼마든지 고칠 기회가 있다는 말입니다. 얼마든지 바로 살 수 있는 소망을 하나님께서 아직까지 버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소망의 도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나도 소망 가지고 모든 사람에 대해서 소망 가지고 기도하고 어떻게하면 저 사람이 내 주변 사람이 가족이 좀 신앙으로 일어설 수 있을까. 나쁜 생각을 습성을 생활을 좀 고쳐서 올바른 생활할 수 있을까를 자꾸 생각하면서 협조해주고 도와주고 위로해주고 이끌어주고 기도해주고 이게 하나님 앞에 복받을 우리들의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백목사님께서 가장 많이 설교하신 내용 보면은 신명기 28장, 누가복음 17장 이런 말씀들은 굉장히 많이 설교하셨고 집회에서도 많이 하셨기 때문에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알면 많이 아는 사람은 무엇이 많습니까? 지식이 많은 사람, 너희가 더욱 힘써 첫째는 믿음을 가지고 믿음에다가 덕을 가지고 덕에다가 지식을 가지고 그러고나서 네 번째가 뭡니까? 지식에다가 절제를 가져라. 아는 것이 많으면 무엇이 많아집니까? 아는 것이 많으면 말이 많아집니다. 말이 많아지니까 하나님께서 그 말을 좀 절제해라 그런 의미도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알아도 아는 것이 우리 구원되는 것 아닙니다. 아는 것이 첫째입니다. 알고 행치 않으면 심판이 더 많아짐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신앙이란 것은 무조건 첫째는 알아야 되는 겁니다. 모르면 신앙생활 못하니까 아는 것이 첫째입니다. 알아야 되는데 아는것가지고 되는게 아니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많이 들어서 알지만은 한번 더 또 살펴보고 우리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십시다.
믿음이 뭐냐?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은혜다 그말이지요.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됐지 은혜 아니면 믿을 자가 없습니다. 천하 없는 종교가, 철학가, 생각 많은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다른 거는 다 믿어도 예수는 못 믿습니다. 예수 믿는 것, 성경이 믿어지는 것은 이 사람들 보기에 허무맹랑한 이 사실이 믿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야 믿어지지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안 믿어집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존재해 계신다는 그 자체가 대개 인정이 되고 믿어진다는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로 우리는 믿음이라는 종자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믿음은 종자적인 믿음이고 기본적인 믿음이다 그리 표현을 합니다. 종자적인 믿음, 기본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이 믿어지는 그 믿음을 받았습니다. 종자를 가졌으면 그다음에 할 일이 뭡니까? 000? 종자, 종자가 뭔지 알지요? 씨앗이 종자고 모종이 종자인데 그다음 가졌으면 그다음 할 일은 뭐해야 됩니까? 심어서 가꾸고 점점 자라갈 수 있도록 키워나가야 되겠지요. 믿음의 종자를 받았습니다. 할 일이 뭡니까? 이 믿음을 점점 길러나가야 되는 겁니다. 키워나가야 됩니다. 믿음이란 것은 정의적으로 그 교리라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은 성경 정의적으로 말하면 백목사님께서 내려놓으신 정의가 믿음은 3가지, 알고, 인정하고, 행하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을 첫째는 내용을 알고 그다음에는 그 사실을 내 마음이 인정을 하고 그다음에는 그대로 실행을 하는게 사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의 기본적인 정의입니다. 그런데 요 믿음을 우리가 활용하는 써먹는 면으로 생각해볼때 믿음이란 무엇이냐.
믿음은 인적요소지요. 사람의 요소입니다. 믿음은 사람에게 있는 사람의 요소는 몇가지로 되어있습니까? 영과 마음과 몸인데, 영은 인적요소지만은 주격입니다. 기본적으로 되있는거고. 그러면 심신이란 것인데 믿음이란 것은 심신의 작용이지요. 내 마음과 몸이 믿는 믿음입니다. 내 심신이 눈이 하나님 말씀을 읽고 귀가 듣고 내 마음이 생각을 하는 겁니다. 따져보고 비판해보고 연구해보고 비교해보고 분석해보고 살펴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 사실들을 창세기를 읽어보고 출애굽기를 읽어보고 레위기를 읽어보고 마태복음을 읽어보고 거기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 이 사람 통해서 기록한 말씀 저 사람 통해서 기록한 말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기록한 말씀, 아주 오래전에 기록된 말씀, 사사기에 말씀, 어떤 사건의 말씀, 교훈의 말씀, 교리적인 말씀, 시적인 표현의 말씀 이런 말씀들을 내용을 살펴보면서 단어도 보고 문장도 보고 전체도 보고 보면서 이 말씀의 뜻이 뭐냐, 이 말씀이 가르치는게 뭐냐 이걸 자꾸 생각하는 겁니다. 연구해보고. 생각하면 깨달아지게 되고 깨달아지면 하나님의 은혜로 믿어지게 됩니다. 심신의 믿음이지요. 그리고나서 그 말씀대로 내 눈이 행하고 내 입이 행하고 내 수족이 행하고 내 몸 전체가 행하고 내 마음이 인정으로 행하고 내 피부가 행하고 이런것들이 믿음의 작용입니다.
그럼 그래가지고 믿음이 하는 일이 뭐냐? 믿음이란 것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믿음이 하는 일이 뭘까? 믿음이 뭐합니까? 믿음은 전능입니다. 귀신들린 아이를 아들입니까? 가진 아버지가 주님 제자들에게 와서 귀신을 쫓아내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아무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귀신이 그를 데리고 난리를 치는데 고치지 못하니까 주님이 소란스러우니까 오셨습니다. ‘무슨 일이냐?’ ‘귀신 들린 내 아들 데리고 왔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이 쫓아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뭘 좀 할 수 있으면 좀 도와주옵소서’ 주님 말씀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순복음교회 조형기 목사님이 가장 많이 써먹은 말씀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다. 믿음은 전능이다 그랬지요.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믿음은 전능이다. 그럼 그 믿음이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사람이 하는 작용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하나님을 말씀을 알고 인정하고 실행하는건데 그 믿음이 하는 일이 무엇이냐? 그 믿음을 가지고 뭐하느냐? 그 믿음을 어디다가 써먹느냐? 생각해보시지요? 믿음을 가지고 백화점에 가서 옷을 살 수 있습니까? 믿음을 가지고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습니까? 믿음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뭐합니까? 들어야 삽니다. 안 들으면 죽는겁니다. 말씀은 들어야 됩니다.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듣고 생각을 해야됩니다. 듣고. 믿음이 하는 일이 뭡니까? 믿음 가지고 뭐합니까? 생각해보셨습니까? 믿음을 가지고 하는 일이 뭐냐? 믿음은 그것 가지고 하는 일이 믿음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겁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찾는 역사다. 또 믿음은 하나님을 좀 더 가까이 만나게 하는 역사다. 가까이 가게 하는 것이고 믿음은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믿음은 그 믿음으로 하나님과 연결된 그 통로 위에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내가 받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생명의 정의는 하나님과 연결입니다. 하나님과 연결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인데 거기도 우리 노력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고 가까이 가는 것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하나님과 연결된 고리고 하나님과 연결된 거기서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다 받아가지는 부지런히 받아가지는 것이 믿음이니까 하나님과, 서울서 부산까지 도로 이름을 고속도로를 무슨 도로라 그러지요? 경부고속도로라 그럽니다. 그 경부고속도로 위에 자동차가 부지런히 다닙니다. 그 자동차는 뭔가 놀러다니는 사람도 많이 있겠지만은 화물차는 짐을 싣고 수출 수입 화물 짐을 싣고 업무를 하는 사람 그래가지고 부지런히 그 도로를 달리면 서울에서 부산에 오고 부산에서 서울 가고 짐을 싣고 왔다갔다 하고 사람이 업무로 왔다갔다 하고 통로를 왔다갔다 이렇게 왕래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통행이 되고 서로 왕래가 되고 물류가 되고 이래 흐름이 되는거지요. 그러면 서울에 있는게 부산가고 부산에 있는게 서울가고 만나기도 하고 오만 역사 다합니다. 이게 믿음이다 그말이지요.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 사람 사이에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 같은 이런 역사가 믿음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며 가까이 하는 것이며 만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것을 내가 받아가지는 것이 믿음이다.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그래서 믿음은 가장 귀한 것이고 보배입니다. 금보다 귀한 믿음, 보배입니다. 이 믿음을 우리는 종자를 가졌는데 종자적으로 가진 이 믿음을 우리는 부지런히 키워야되겠고 또 많게해야 되겠고 강하게 만드는 우리가 되야되겠는데 그 믿음이 더해지는 방법을 주님 말씀하신 겁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까 믿음이 있기는 있는데, 우리 믿음 있잖습니까? 믿음 있으니까 주일을 지키고 믿음 있으니까 기도하고 믿음 있으니까 양심에 가책을 받고 생활도 조심하고 믿음으로 사는 겁니다. 정도차이지 그래서 믿음은 사람마다 다 각각 다른 겁니다. 같지 아니하고. 그래서 믿음이 좀 약하고 작고 적으니까 우리에게 믿음 좀 키워주옵소서 강하게 해주옵소서. 아벨은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고, 타협하지 아니하다가 순교했고 순교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 하나님과 동행을 300년동안 계속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 120년동안 온 세상이 비웃고 조롱해도. 지금 이런 말씀 주님 재림에 대한 설교를 하는 강단 보기가 드뭅니다. 우리가 하는 이런 말씀들을 유명한 교회 목사님들은 666이 무엇이냐? 말세가 되면 온 세상은 다 똘똘 뭉쳐서 일곱 머리 열뿔이 하나가 되어진다 그래가지고 어린양을 대적한다. 이 세상은 죄악세상이면 세상의 주인은 현재는 마귀다, 이 세상은 불탈 세상이다 이 세상에는 정의라는 것이 없다 이런 설교를 순복음교회 소망교회 사랑의 교회 저런 교회에서 하면은 난리가 납니다 뒤집어지고. 그분들이 몰라서 안 하는 수도 있고 알아도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겁이 나서 함부로 못합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 설교를 들어보면 그냥 두루뭉실하고 주위만 빙빙 돌지, 핵심을 콕 찔러서 요거다 하는 말을 알아도 잘 못하고 몰라서 못하고 알아도 못합니다 겁이 나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백목사님 생전에 여러분들에게 전하는 이 복음이 지금 무슨 복음인지 여러분들 모른다는 말씀을 수도없이 했습니다. 목숨 내놓고 하는 설교라는 말씀을 수없이 했는데 그 밑에 앉아서 그렇게 들으면서도 그게 무슨말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분이 당하고나니까 그 뒤에 알았지요. 섬칫한 말씀입니다. 그 세계 제일의 주일학교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서부교회 강단, 부산에서 제일 크고 천국에서- . 모든 정보기관에서 여당 야당 우익좌익이 다 주시하는 그런 교회 그 강단에서 마구 외쳐댔으니까 목숨 걸고 하지요. 못합니다. 저도 만약에 그래 큰 교회 가있으면 겁이나서 어림도 없지요 못합니다. 그러니까 온세상이 대적이 될 수 있는 또 한편으로는 비웃고 조롱할 수 있는 그 생활을 노아가 몇 년했다고요? 120년을 방주 만든 생활은 그 생활입니다. 세상이 비웃고 조롱하는 겁니다. 비웃고 조롱하면서 반대하고 온세상이 조롱하는, 쌀이 생깁니까 돈이 생깁니까 명예가 생깁니까 권력이 생깁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한분 그분의 말씀 하나 믿고 평생을 다 받쳐 120년 세월을 배만 만들고 앉았으니 기가 찰 노릇이지요. ‘저 영감이 참 미쳤지, 정상이면 저짓 안할건데.’ 안 믿는 사람들이 여기 제대로 믿는 사람들 보면은 보나마나 우스울 겁니다. 그 사람의 행동거처나 생활모습을 보면 분명히 인격잔데, 참사람인데 그래서 감동되는 사람 있지만은 도무지 불택자들은 ‘저 참 아까운 사람이다, 그만 기독교라는 저기 빠져가지고 저렇게 하니까 참 아까운 사람이다.’ 이해를 못할 겁니다. 차마 사람이 바로 되있으니까 조롱하고 그래는 못해도 도무지 이해를 못하는거지요. 노아는 그런 생활을 120년 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슨 힘입니까? 믿음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이 말씀하신 말씀을 믿습니다. 그 말씀 속에 들어가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다 기록이 되있습니다. 생각하니까 그 말씀 속에 있는 성령이 나를 감동시켜서 하나님이 믿어지게 합니다. 깨달아지게 합니다. 말씀 속에 들어가니까 하나님의 목적세계 구원세계가 환하게 열립니다. 말씀을 듣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들어서 알고나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가 환하게 열리는데 그 구원이 얼마나 큰지를 말씀으로 알고 생각하고 따져보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양심을 통해서 밝혀주시는데 그 광대한 구원 세계가 믿어집니다. 하나님이 두렵습니다. 구원에 대한 소망이 큽니다. 이 세상이 허무합니다. 그러니 그 힘을 가지고 세상에 바라볼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과거에는 그런걸 몰랐는데 자꾸 세월이 가니까 느껴집니다. ‘보자, 내가 사는게 돈 보고 살겠나. 돈이 있으면 좋겠지만은 그 허무한 것 알고나니까. 권력을 얻겠나. 명예를 가지겠나. 향락을 누리겠나. 이 세상을 바라보면 뭐보고 살겠노. 그래서 신앙이 아니면 참 세상 살 맛이 안 나겠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구원 잘 이룬 사람들은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어서 떠나 주와 함께 거하기를 원하지만은 내가 땅에 있는것은 너희들 때문에 있다’ 백목사님도 그랬겠지요. 우리는 아직 거기까지는 안되도. 그런데 알고나면은 세상은 마음 둘 곳이 없는 곳이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믿음을 가지니까 노아는 120년동안 다른 사람이 조롱하거나 말거나 참 불쌍하다 안타깝다 세상 사람은 노아를 조롱하고 노아는 세상 사람을 조롱합니다.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그다음 뭐지요? 나도 역시 세상 사람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보니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그런 찬송들이 속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택함 받지 못하고 은혜 받지 못한 사람들이 참된 믿음의 사람을 보면 도무지 그 세계를 모르고 참된 믿음의 사람이 세상 속에 빠져사는 사람을 보면은 불쌍해서 견딜수가 없는 것이고 평행선이지요. 다른 차원입니다. 끝에 가보면 최후의 승자가 승자입니다. 마지막에 남는 사람이 승리자입니다. 마지막에 누가 남을지. 세상은 모르고 인생은 모르는데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성경이 참인것을 먹어보고 압니다. 내가 살아보니까 성경이 참이더라. 내가 죄짓지 아니하고 말씀대로 살아보니까 말씀대로 되더라. 하나님이 성령으로 내 양심을 감동시켜서 믿어지더라. 확신이 오더라. 담대도 오더라. 배짱도 있더라. 내 객관의 변화역사도 있더라. 요런 믿음의 능력이 있으면 세상을 이기는 겁니다. 노아의 120년 생활은 믿음에 능력이였습니다. 아브람이 걸어간 걸음 걸음도, 요셉의 걸음도 살펴보면 참 세상이 보면은 기구하지요. 성공되기 전까지는. 그런데 요셉은 그 속에서 단한번도 낙망하지 않았습니다.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이 겁이 나서. 하나님이 두려워서. 눈 앞에 미혹하는 보디발의 아름다운 그 아내 미혹보다 하나님의 심판이, 매가 더 겁이나서 죄를 짓지 못했습니다. 기약 없는 감옥속에서 하나님 말씀에 소망이 있으니까 낙망하지 않았습니다. 총리가 되어서 형들에게 깊은 복수는 안해도 한번 혼을 내줄만 하지만은 그러나 요셉의 마음은 형들의 잘못된 불목을 고치는 거기 다가 있었고 아버지 편애 바로 잡는 그걸 바로 잡는 거기 다 가있었지, 그래서 베냐민의 자루 속에 은잔 넣은 역사가 형들의 불목을 치료하는 역사가 아버지 편애를 고치는 그 역사입니다 요셉이. 전부 사랑의 역사입니다. 그 모든 것이 다 총리가 됐지만은 이제는 고진감래가 됐구나, 내 앞에는 평안만 있겠구나 두 다리 뻗고 이제는 누려보자 그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겁이 나서. 다윗도 그랬잖습니까? 다윗이 하나님이 자기 높여서 왕을 삼은줄을 다윗이 알았더라. 이걸 모르면 올라갔다가 순간에 떨어져버립니다. 사울이 그랬고 그런 사람 많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결코 그리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게 전부다 믿음의 힘이고 믿음의 능력이다.
그래서 믿음이란 것은 그 믿음은 무엇이 참믿음이냐? 겨자씨 믿음이 참믿음인데 그 겨자씨 믿음이 무엇이냐? 겨자씨 믿음은 한말로 말하면 생명있는 믿음 살아있는 믿음을 말하는데 생명있고 살아있다 그 말은 활동을 한다 그말이지요. 활동한다는 그말은 믿음이 활동한다, 역사하는 믿음, 활동하는 믿음, 움직이는 믿음을 가져라. 우리 심신이 가지는게 믿음입니다. 내 마음이 믿고 몸이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마음과 몸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인정하고 거기 따라 움직이는 것이 믿음의 작용입니다. 이게 살아있는 믿음이고 움직이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요 믿음을 가만 생각해보면 오전에 말씀드린대로 물에 사는 물고기의 활동은 어떤 활동이였습니까 기본적으로? 물에 사는 물고기 모든 어류들의 그 아가미로 숨쉬는 것 먹는 것 돌아다닌 것 모든 지느러미 헤엄치는 모든 작용은 무슨 작용입니까? 물 속에 빠져서 안 죽기 위한 작용입니다. 물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작용. 필연적인 본능적인 작용입니다. 그러니까 물고기가 움직이며 활동하는 것은 그게 살기위한 작용, 필연적인 작용입니다. 땅 속에 심겨져있는 겨자씨가 눈에는 안보이는데 달걀 보면은 유정란 있고 무정란 있지요? 씨앗도 보면은 그게 종자도 보면은 씨눈이 있는게 있고 없는게 있지요. 종자가 산거 있고 죽은 것 있습니다. 꼭 같이 보여도. 죽은 거는 심어놓으면 아무 생명의 작용이 없으니까 썩고 맙니다. 생명 있는 것은 땅 속에 심어놓으면 안 보이는데 그 속에서 생명이 작용을 합니다. 움직입니다. 그 움직이는 것은 그 생명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적인 몸부림이지요. 작용입니다. 그 생명 유지하기 위한 본능적인 모든 움직임. 사람이 사는 것은 우리 사람은 겉만 보이지요. 우리 심장이 하루에 펌프질 몇 번합니까? 우리 심장이 하루에 펌프질을 수도없이 많이 하지요? 그 심장에 나온 피가 동맥을 나와가지고 쭉 뻗어 온쪽으로 다 가면서 모세혈관을 통해서 구석구석 다 뻗어가는데 사람 몸속에 있는 혈관을, 혈관 길이가 얼마라 하던가요? 사람 몸속에 있는 혈관의 길이를 다 재면 그 길이가 지구를 두바퀴반을 도는데 10만키로랍니다. 10만키로. 지구를 두바퀴 반 돌고 도는 정도의 한 사람 몸속에 있는 혈관의 길이가 그리 길답니다. 얼마나 세밀한지. 그만큼 의사들이 계산해 나온 말이겠지요.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거랍니다. 그만큼 미세한데, 그 미세한 속에 혈관 안보내면 사람이 동맥경화 혈관 막힌거지요. 또 뇌출혈은 혈관이 탁 터진거지요? 막혀서 딱 끊어져버리면 그만 혈관 딱 막혀버리면 잘못하면 사람이 한순간에 죽지 않습니까? 3분만 호흡안하면 사람이 죽지 않습니까? 쉬지않고 움직이는 겁니다. 우리 몸속에 이 몸들이. 그게 전부 살기 위한 움직임, 작용들입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작용들. 그래 작용을 하면 그 생명이 그 생명이 자라갈 수 있는 그런 움직임이 되면서 동시에 그 움직임은 자기 환경을 먹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정상적으로 활동을 하면 그 사람은 자기 환경을 기본적으로 먹게 됩니다. 사람의 물질의 생명으로 말하면 그 생명이 작용을, 정상적인 몸의 모든 이것들이 몸의 모든 기관들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활동을 하면 밥도 먹고 공기도 마시고 내뱉기도하고 혈관도 보내고 이런 정상적인 작용을 하면은 그게 자기 객관에 있는 그 생명유지에 필요한 모든 것을 먹는다 그말이지요. 잡아먹습니다. 잡아먹으면 자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라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생명이 움직이는 움직임의 작용은 필연적인 생명유지, 보존유지에 작용이고 그 생명작용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면 환경은 필연적으로 잡아먹게 되어있고 환경을 잡아먹으면 자라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겁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사람의 믿음이 겨자씨 믿음이 돼서 작용하는 믿음, 움직이는 믿음, 믿는 사람의 마음과 몸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아니하고 늘 말씀을 읽고 듣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머릿속에 담아놓고 내 모든 몸의 움직임, 심신이 같이 움직이는 움직임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그 생활이 계속되면 그 믿음이 살아있는 겁니다. 믿는 사람의 믿음이 작용을 하는 겁니다. 그게 피와 성령과 진리로 사는 생활이 되는데 중생된 자의 생명으로 사는 것인데 그 생명이 그리 살면 그 생명은 두 번째 뭐합니까? 필연적으로 000샘 뭐한다고요? 환경을 잡아먹습니다. 자기 주변을 잡아먹습니다. 생명이 생명 작용을 하면 그 생명 보존 유지되기 위해서 환경에서 생명에 필요한 걸 다 잡아먹듯이 믿는 사람의 믿음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면 그 사람은 환경의 산물이 되지 아니합니다. 환경을 잡아먹습니다. 모든 환경을 잡아먹어서 자기의 밥으로 삼습니다. 겨자씨가 땅속에 심겨있으면, 생명으로 작용하면 땅속에 있는걸 다 잡아먹습니다. 영양분도 먹고 수분도 빨아먹고 온갖 온도도 먹고 다 먹습니다. 먹으니까 자랍니다. 믿음이 정상적으로 작용을 하면 그래서 겨자씨 믿음이라 그러면 어떤면으로 말하면 정상적인 믿음을 가져라, 믿음의 실제를 가져라 그말입니다. 말로만 믿지 말고 지식으로만 가지지 말고 말만 하지 말고 마음만 가지지 말고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는 것이고 아무리 말로 떡을 하면 온세상 천하사람이 다 먹고 남아도 말로 되는게 아니니까. 지식만 가지고 말로 실행하는 것도 있지만은 그것만 가지고 되는게 아니니까. 실제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서 하나님 말씀대로 움직여지는 그 생활이 겨자씨 믿음인데 그게 첫걸음이 사는 겁니다. 사는 것이고 그 생활이 계속 되어지면 그 움직이는 작용, 생명의 작용으로 인해서 우리 믿는 사람의 자기 환경을, 학생이 학교라는 곳을 가면 안 믿는 학생들이 많이 있는 그 환경 속에서 믿는 사람이 믿음으로 살면 그 환경을 친구들의 모든 것을 보고 먹지,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학생이 안 믿는 친구따라서 ‘야 우리 게임방에 가볼래? 어디가면 여학생 있다던데 한번 보러 갈래?’ 그런 말을 들을때 그 학생 속에 믿음이 있으면 ‘아 이거는 가면 안되는 것인데? 말씀에 어긋나는것인데?’ 판단해서 ‘나는 바빠서 못가겠다, 공부해야된다, 그런 곳에 가면 안좋겠다.’ 끊어서 ‘아 저런 학생은 저런데 가는구나. 저 가면 안되는건데’ 보고 배우고 자기가 그걸 먹고 그걸로 인해서 한층 더 자라가지 거기 따라가지 않습니다. 이게 겨자씨 믿음이다 그말이지요. 겨자씨 믿음은 그래서 3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살아서 움직이는 겁니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은 쉬지 않고 말씀을 읽고 듣고 인정하고 실행하는 그 생활이 계속되는 겁니다. 요래 되면 요 생활이 되면 자기 환경, 그 환경이 어떤 환경이든 예외가 없습니다. 모든 식물은 거름을 다 줘야되지요. 비료 주고. 그런데 저는 몰랐는데 고구마는 거름을 주면 안된답니다. 고구마는 맨땅에, 영양분 없는데 그런 맨땅에 심어놔야 고구마가 뿌리가 자란답니다. 고구마를 거름뿐이 많으면 이거는 고구마는 안 자라고 줄기하고 잎사귀만 자란답니다. 고구마 잎사귀 드셔보셨습니까? 그렇게 맛있는줄 몰랐습니다. 옛날에 저 어릴때 고구마 줄기 먹는거는 봤거든요. 그런데 고구마는 이번에 우리 집사님 중에 한분이 맛있습니다 하고 나물을 가져와서 먹어보니까 세상에 나물중에 저는 그만큼 맛있는 나물 처음 먹어봤습니다. 고구마 나물 입에 살살 녹는게. 그래서 물어보니까 아는 사람들은 그걸 이제 알았습니까? 고구마 나물 먹기 위해서 고구마 심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 뿌리는 영양분이 있으면 고구마 뿌리가 안 자란답니다. 그래서 이번에 올해 고구마 농사, 줄기 잎사귀 무성해서 올해 고구마 농사 좀 지어보겠다 싶었는데 캐보니까 고구마는 그냥 요만큼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큰거만 나오고 줄기하고 잎사귀만 무성하게 나왔지요. 그래서 물어보니까 그럽디다. 그런것도 있지만은 일반적으로 말하면 식물은 땅속에 거름이 많아야 되는데, 영양분이 많아야 되는데 생명이 튼튼하면 전부 다 잡아먹습니다. 그래서 식물을 땅속에 자꾸 심으면 몇 년 심고나면은 그만 애지간한 식물들은 한 2번 심고나면 땅을 바꿔주고 거름거리를 새로 만들어줘야되지 몇 년 땅속에 영양분 빼먹고 나면 영양분이 다 없어서 그 흙은 못쓴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래서 대토하고 자꾸 흙을 만들어줘야되지.
믿는 사람의 믿음이 튼튼하면 겨자씨 믿음이 돼서 하나님의 말씀이 머릿속에 늘 들어있고 알고 그 말씀을 인정하는 믿음이 있고 실행하는 그 노력이 계속이 되면 그 환경이 어떤 죄악속에 빠져도, 그래서 다니엘서 12장에 ‘땅에 티끌 가운데서 많이 깨어 구원 얻는 자도 있겠고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죄악이 아무리 많아도 생명력이 튼튼한 사람은 그 죄악 세상을 전부 잡아먹고 무럭무럭 자라는 좋은 터가 되고 땅이 되고 환경이 되지 거기 피동되지를 아니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환경에 피동이 되면 그 사람의 생명은 믿음의 생명은 전부 끊어지는 겁니다. 겨자씨 믿음은 없는 겁니다. 환경을 먹고 자라는게 겨자씨 믿음에 그거는 필연이고 본능입니다. 저절로 그리 되는 겁니다. 요게 겨자씨 믿음이다. 요것이 믿음이 자라는 법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믿음이니까 믿음의 작용이 끊임없이 계속 되는 겁니다. 계속이 되면 그 믿음은 환경을 잡아 먹습니다. 그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잡아먹고 욥 같은 환경이 되도 잡아먹고 나사로 같은 환경이 되도 잡아먹고 또 왕이 돼서 총리같은 환경들도 잡아먹고 부자가 되도 잡아먹고 가난해도 잡아먹고 바빠도 수월해도 슬퍼도 어디가든지 그 모든 환경을 잡아먹습니다. 누가 잡아먹습니까? 그 환경의 주인공이 잡아먹습니다. 이걸 다른말로 바꾸면 그게 뭐하는 겁니까? 응용 한번 해보시지요? 000샘? 그거 너무 큰걸로 하는 전체로 말한건데. 꼭 그대로 적용시키면 딱 맞는게 있습니다. 이걸 다른 말씀을 하면 그게 뭐하는 겁니까? 말씀을 들으면 바로 탁 통하는데. 000선생님? 000선생님 알겠어요? 여반에 또 물어볼까? 우리 저 신풍 학생 알겠습니까? 그게 뭐하는 것입니까? 겨자씨 믿음을 가지면 환경을 다 잡아먹습니다. 내가 주인이 돼서 이래 말하면 알겠습니까? 내가 주인이 되가지고 환경 다 잡아먹습니다. 이게 바로 다른 말로 말하면 뭐하는 겁니까? 그래도 모르시겠습니까? 현실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겁니다 그게. 그것이 바로 현실을 다스리는 겁니다. 내가 주인이 돼서 내 환경을 다스리는 겁니다. 좋아도 믿음, 슬퍼도 믿음, 나빠도 믿음, 괴로워도 믿음. 많아도 잡아먹고 외로워도 잡아먹고 그런 사람은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이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 되고 마는 겁니다. 환경이 그를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의 주관이, 그 사람 자체가 세상을 초월하고 세상을 다 잡아먹는 생명을 가졌고 이 세상 현실에 주인공이 됐으니까 그 주인공을 현실이 들어서 그 사람이 주인이니까 종들이 들어서 먹이들이 들어서 그 주인을 어떻게 하지를 못합니다. 믿음의 능력이고 겨자씨 믿음이란 것은 이런 것을 말합니다. 요 믿음을 가지면 믿음은 자라게 된다. 믿음이 자라는 것은 요래 가지고 자라는 겁니다. 이것이 아니면 결단코 자라지 않습니다. 기본 구원에 대한 말씀은 기본구원이면서 이걸 다시 돌아보면 건설구원에 적용되는 말씀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그게 점점 자라면 뽕나무가 뽑히는것 옮기는것 심어지는것 다 기적입니다. 내 속에 있는 도무지 뽑아버릴 수 없는 악성, 수십년 내 속에 뿌리박혀서 뽑아버리지 못하는 악습. 요 악성 악습 때문에 얼마나 큰 손해보는 그 악습. 그놈을 뽑아버리는 방법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바로 겨자씨 믿음을 가지면 됩니다. 다시 말하면 멀리갈 것 아닙니다. 큰 거 아닙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란 것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해라. 바로 평소 자기 현실입니다. 거기서 그 순간 순간에 내게 오는 그 현실 현실을 토막토막을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여기서 어떻게 할까? 웃을까 울까 슬퍼할까 괴로워할까 기도할까 하면 안되는 것 빼놓고 이런 환경주신 주님의 뜻이 무엇이냐를 찾아서 거기서 자기 할 수 있는 걸 찾아 하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 하고 그다음 순간 또 하고 또 하고. 그리하다보면 내 속에 있는 악성 악습이 오래토록 이것이 자라있으니까 강해서 끊임없이 나를 밀치고 들어옵니다 넘어뜨리려고. 그럴때 싸우는 겁니다. 모든 생명의 작용은 전투입니다. 모든 생명의 작용은 전부 전투입니다. 안죽기 위해서 싸우는 겁니다. 자기 안에 있는 것 하고 싸우고 밖에 있는 것 하고 싸우고 자기 스스로 싸우고. 내가 서야 된다, 일어서야 된다. 자기 스스로 싸우고 밖에서 들어온 것 싸우고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모든 환경이 되어진 상황들 이런 모든 것들이 나의 믿음을 넘으뜨리려고 오는데 말씀을 가지고 생각해 보는 겁니다. 생각해보면 다 나오지 않습니까? 모르는 사람은 몰라도 우리 이 복음을 들은 분들은 핑계하지 못할 겁니다. 벌써 하나님을 향한 지식 13가지 속에 이 말씀 다 들었습니다. 다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자존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나와있습니다. 그분의 목적이 첫째입니다 하나님 다음으로. 그 목적이 내 구원입니다. 그 목적 위해서 영원후까지 모든 존재 전부를 다 예정을 해놨습니다. 그 예정의 순서대로 전부 전개되는 겁니다. 거기 빠진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 앞에 닥친 것도 전부 다 그 속에 들었고 그 모든 것은 다 나를 지금보다 더 나은 고칠 것 고치고 모자란 것 가르치고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 주신 한 순간 현실이고 한 토막에 필요한 과정입니다. 요셉은 이걸 믿었기 때문에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약해서 가다보면은 한순간 넘어질 수 있고 피곤할 수 있지만은 말씀을 가지고 다시 생각해보면 이것도 예정 속에 든 것, 그 예정은 내 구원을 위한 것 하나님의 사랑, 내게 가장 좋은 것, 내 할 일은 주님의 뜻만 찾는 것, 이 생활이 어디까지 계속되도 또 하는 것, 120년이 계속되도 300년이 계속되도, 우리가 120년 살겠습니까? 300년 살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말씀을 깨닫고 세상을 보고, 그래서 평가를 해봐야 됩니다 많은 생각가지고. 보자 하나님과 피조물을 비교해보자. 하나님의 구원 세계와 이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 다 갖다 비교 한번해보자. 그래서 따져서 자기 깊은 양심 속에 들어가서 아무리 온 세상 지식 다 가지고 따져보고 따져보고 살펴보고 평가를 아무리 천번 만번 해도 하나님을 능가하는 존잰 없다, 그분의 구원보다 더 큰 것은 없다, 그분의 예정을 벗어나는 범위도 없다, 그 분의 주권 범위 벗어나는 것도 없다, 그래서 죄도 하나님 만들었고 마귀도 하나님 만들었다는 말을 담대하게 하는 겁니다. 그게 아니면 기독교가 안되는거니까 틀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따져들어가보면은 이 세상이란건 참 그러고나서 세상을 한번 봅니다. 세상에 귀한 사람도 있습니다. 참 훌륭하다 인격자다 위대하다 존경할 만하다 내가 만약에 예수 빼놓고 저 사람과 비교한다면 저 사람 발바닥도 못따라가겠다. 그런 사람 많습니다 훌륭한 사람들. 그런데 저 사람 보니까 예수가 없구나, 구원이 없구나, 생명이 없는 마네킹이네. 잘 다듬어놓은 인형이구나. 참 안타깝다. 나는 비록 오만것이 다 묻어 흉한 죄인이지만은 나는 주님 대속이 있으니까. 천국 소망이 있으니까. 하나님과 연결됐으니까. 그러고 세상을 돌아보면 세상은 참 아무것도 아닙니다. 참 모든 육체는 다 풀이다. 그 영광은 다 풀에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고 그러나 이 말씀은 세세토록 있는데 이 말씀이 곧 복음의 말씀이다. 따져보면 나오는데 우리가 안 따져봐서 안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래 가지고 알고난 다음에는 모든 생활 방향을 이리 정해놓고 이걸 위해서 모든 생활을 하는 겁니다. 준비도 하고. 이게 가장 가치있는 것이니까. 그런데 여기에 걸리면 여기 지장되면 없애버리지는 못해도 조절은 하는 겁니다. 여기 걸리면, 이거 참 직장이 중요한데 안다닐 수 없고 그만 둘 수 없으니까 하나님이 주신 현실이니까 여기서 좀 살펴 조절하자, 사업도 좀 조절하자, 공부도 좀 조절하자. 왜? 그것이 직장이 공부가 사업이 내 전업이 아니니까 주업이 아니니까 이거는 내 부업이니까, 내 주업은 구원이니까, 구원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이니까 조절 좀 해봐야되겠다.
이런 생각이 계속되고 하는 그것이 바로 겨자씨 믿음입니다. 여러분들 인생이란 것은, 인생은 깁니까 짧습니까? 세상말에 인생은 짧다 그러지요, 짧고 안믿는 사람의 예술은 길다 그러지만은 예술도 인생 있어야 예술이 있지 인생 없는 예술이 어디있습니까. 인생은 짧습니다. 길지 않습니다. 길을 가다보면 끝없이 들어갑니다. 하루 속이 돌아봐야 됩니다. 세상을 향해 가다보면은 어느거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누가복음 15장입니까? 어리석은 농부의 그 모습은 믿는 사람의 대다수가 전부다 그 속에 그 함정에 다 빠져있습니다. 한 걸음만 더 한 걸음만 더 한 걸음만 더 요것만 요것만 요것만 하다 보니까 어느새 백발이 되어있습니다. 자기 한번 돌아보시지요. 겨자씨 믿음을 기억하십시다. 겨자씨 믿음은 살아서 움직이는 믿음입니다. 움직이면 환경을 잡아먹습니다. 잡아먹으면 자랍니다. 그게 믿음이 자라가는 방법이다. 또 하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이거는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우리는 하나님의 종인걸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종입니다. 주님의 피에 팔린 종입니다. 주님이 만들었으니 주의 것이고 피에 팔렸으니 주의 종입니다. 종의 할 일을 본문에 보면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밭갈고 양치는 겁니다. 밭가는 것은 자기 구원, 양치는 것은 인간구원입니다. 이 두가지만 우리 할 일입니다. 이 두가지를 힘들게 한 사건 한 사건 그날그날 해놔놓고 하고난다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저녁에 와서 ‘보자, 이제 하루 종일 자기를 만들기 위해서, 인간 형제구원 위해서 살았으니까 저녁에 두다리 뻗고 좀 자볼까?’ 그러면 와서 먹는 겁니다. 주님 뜻은 먹어라 하겠느냐 먹지아니하고 주인 먹을 것 또 예비합니다. ‘보자 오늘 하루는 이렇게 살았는데 내일은 어떻게 살아야되나, 내일은 어떻게 살아야 내 구원이 바로 되나’ 내일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은 주님 뜻을 찾아봅니다. 내일은 어떻게 인간구원에 힘을 써야 되나. 주님의 뜻을 또 찾아보고 그리고나서 또 자기 할 일 하고. 그러고난 다음에 이만큼 수고했으니까 이제는 좀 대우도 받고 보상도 받고 그러면 무익한 종은 아닙니다. 나는 무익한 종이라. 왜 무익한 종입니까? 이것도 깨달아 봐야 됩니다. 왜 많은 성도들이 무익한 종이라 그럽니까. 외식이 아닙니다. 천하 없는 성도가 이 세상에 사도바울이 일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많은 사도들이 많은 교회를 세우고 수많은 사람을 전도하고 많은 일을 했는데 깊이 기도속에 들어가보니까 나는 무익한 종이라. 왜 무익한 종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세워서 하긴 했는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이 거들면,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를 인간이 거들면 도움이 됩니까 방해됩니까? 아버지가 하는 일을 아버지가 아주 잘 하는 그 일을 어린 아들이 돕는다고 거들면 아버지가 ‘그래 좀 도와다오. 도우면 힘이 되겠지’ 말은 그래하지만은 도움됩니까 방해됩니까? 방해됩니다. 시집 보낼 딸을 둔 친정어머니가 하면 더 잘하는데 그 딸에게 시키면 답답하고 속터지고 일도 안되고 하는데 시킵니다. 왜 시킵니까? 그 기르기 위해서. 그러니까 그 딸은 무익한 딸입니다 그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하실 역사를 사람이 하면 방해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기르시기 위해서 일을 시킵니다. 그러니까 그 사실을 깨닫고 나면 아무리 하고나서도 하나님이 하시면 이것하고 비교하시겠습니까?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내가 들어서 오히려 막은 것이 없는지. 그러니 결국 무익한 종입니다. 나는 무익한 종이라. 그런데 하나님이 시키니까 할 수 밖에 없는 마땅히 할 일 한 것 뿐입니다. 대접받을 일이 아닙니다. 대우 받을 일이 아닙니다. 요런 자세가 논리적인 깨달음으로 자기에게 논리로 따져서 나와야 됩니다. 그럴 수 밖에 없도록. 이걸 알고나면 사람은 양심이 있기 때문에 결코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사울은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넘어졌습니다. 솔로몬은 알았다가 잊어버려서 넘어졌습니다. 노아도 알았다가 뒤에는 실패했습니다. 다윗은 한번 넘어졌지만은 끝까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한 종이 다윗입니다. 아브라함도 끝까지 알았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가 이겁니다.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모든 건 다 하나님의 은혜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요 깨달음 자세가 믿음이 중단되지 아니하고 계속 자라가는 방법입니다.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겨자씨 믿음 가질 것, 무익한 종의 믿음을 가질것. 요래 가지고 토막토막을 이겨나가면 믿음은 자꾸 자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주셨으면 우리는 소망이 있는 겁니다. 살려주셨으니까 소망이 있다는 뜻이고 살려두셨으니까 아직까지 고치고 배우고 만들어나갈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소망을 두고 계십니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은 주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내가 힘껏 노력안해서 그렇습니다. 있는 힘 다해서 내 현실을 생각하면서 힘껏 말씀으로 겨자씨 믿음 생활 하고 그 겨자씨 믿음의 활동으로 환경을 전부 잡아먹고, 남의 환경 볼 거는 아닙니다. 내 현실 내 환경을 봅니다. 잡아먹고 그러면 믿음 자라는 것은 세월속에 저절로 자랍니다. 생명은 한순간에 자라지 않지 않습니까? 생명자라는 것은 세월이 걸립니다. 젖먹이가 빨딱빨딱 젖먹으면서 또 기어다니면서 울고 불고 떼를 쓰니까 빨리 좀 크면 좋겠다, 빨리 큽니까? 세월이 가야 되지요? 생명입니다. 믿음이란 것은. 그러기 때문에 겨자씨 믿음을 가지고 또박또박 하루하루 살아나가면 그래가지고 한주일 살면 속에서 자기 주관에 변화가 있습니다. ‘아 이번 한주간은 바로 살았다’ 용기가 나옵니다. 담대가 나오고. 한달만 살면 객관이 변합니다. 3개월을 살면 다른 사람이 압니다. ‘저사람 변했다’ 더 살면 능력이 나옵니다. 이게 믿음이 자라가는 방법이다. 기억하고 힘을 써보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말씀을 복음으로 받아서 이 말씀을 생각해보십시다. 일단 논리적으로 알아서 따져봐야 됩니다 살펴봐야 됩니다 깊이 생각해보고 우리 믿음을 돌아보고 주님 앞에 믿음을 구하는 우리가 되십시다.
제목: 믿음 더해지는 방법
요점:
1. 소망
- 기독교는 소망의 도
- 어떤 경우에도, 그 누구라도 소망을 버리지 말 것
- 자신이 어떻게 떨어져도 자신에 대한 소망도 버리지 말 것
- 살아 있으니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노력할 것
2. 믿음
-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혜->종자적인 믿음
- 믿음은 심신의 작용으로 되는 인적 요소
- 믿음의 작용은 하나님을 찾아 가는 것
-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믿음
- 하나님과 연결된 도로에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받는 것이 믿음
3. 겨자씨 믿음
- 믿음은 보배이니 크고 많고 강해야
- 겨자씨 믿음을 가지라 하셨는데 겨자씨 믿음은 무엇?
- 겨자씨 믿음은
①활동하는 믿음: 말씀을 알고 인정하고 행하는 생활의 계속
②환경을 삼키는 믿음: 생명의 활동이 있으면 환경을 삼키는 것은 필연
③자라가는 믿음: 생명의 활동으로 환경을 삼키면 자라가는 것도 필연
4. 무익한 종의 믿음
- 우리는 하나님의 종
- 종인 우리가 할 일은 밭갈고 양치는 일
- 밭가는 것은 자기 구원, 양치는 것은 인간 구원
- 집에 돌아와서는 또 주인 먹을 것 예비하고
- 주인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 할 일 다 한 후에는 무익한 종,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
- 이것이 믿음 더해지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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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원문)
20131124 주후
누가복음 17:5-10
기독교는 무슨 도(道)라고 했습니까? 믿음의 도입니다. 또 기독교는 무슨 도겠습니까? 기독교는 사은의 도라 그리말하고 또 기독교는 무슨 도입니까? 기독교는 소망의 도라 그리 말합니다. 같이 해보실까요? 소망의 도. 기독교는 소망의 도입니다. 소망이라 말은 바라본다 그 뜻입니다. 나쁜 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좋은 것을 바라봅니다. 좋은 미래를 바라보는 겁니다. 그게 기독교입니다. 가장 좋은 것, 가장 좋은 분은 하나님이고 가장 좋은 나라는 천국이고,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가장 좋은 것은 우리의 구원이다 그리 말하면 될런지요. 이 좋은 분, 이 좋은 나라, 이 좋은 것을 바라보는 소망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소망의 도입니다. 소망이란 것은 현재를 살면서 보다 나은 내일을 향해가는 미래를 향해가는 것이 소망입니다. 소망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낙망이나 절망이지요. 낙망 절망은, 절망이라 말은 낙망보다 더한거겠습니다. 낙망은 떨어지는 것이고 희망을 버리는 것이겠고 절망은 끝나버리는 그런것이 되겠습니다. 기독교는 소망의 도기 때문에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고 그 미래는 가장 좋은 앞날이고 또 동시에 그 좋은 앞날을, 그 좋은 분을, 그 좋은 나라를 바라보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현재 상황이, 현재 자신의 처한 모습이 어디까지 떨어져있을지라도 믿는 사람은 결코 낙망, 절망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죄 중에 제일 큰 죄가 무슨 죄입니까? 살인죕니까 음행죕니까 무슨 죄지요? 낙망죄가 가장 큰 죄다, 우리는 많이 듣고 알았습니다. 낙망죄는 가장 큰 죕니다. 이거는 예외가 없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낙망은 큰 죄고 그러므로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낙망은 가장 큰 금물입니다.
나 어느곳에 있든지 늘 마음이 편하다, 그 어느곳이라는 것은 장소만 말하는게 아닙니다. 어디있든지 장소도 해당이 되고 동시에 나 어느곳 그말은 아무리 어떻게 가난하여 나사로같은 가난한 지경에 있어도, 온몸에 병이 들어서 욥이 마귀가 하나님에게 허락받고 욥을 목숨만 붙어있을만큼 그렇게 온몸을 정수리부터 발끝까지를 쳐서 발바닥까지 쳐서 온몸에 악창이 나도록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어서 그리됐으면 보나마나 몸에 막 구더기가 기어다녔을겁니다. 안희숙 선생 오늘 찬송가 반주에 내일 일은 난 몰라요, 그 가사 지은 그분이 감옥에서 신사참배 항거요배 때문에 감옥에서 옥중생활을 많이 했는데 신사참배를 반대한 사람은 감옥에 들어가서 사지가 자유롭고 항거요배까지 동방요배까지 반대한 사람은 감옥안에서도 수족을 채워놨답니다 뒤로. 손을 채워놨다던가요. 손을, 발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손을 뒤로 묶어놨답니다. 그래서 밥 먹을때도 손이 뒤로 묶인채로 밥을 먹어야 됩니다. 어떻게 먹지요? 손을 이래 뒤로 묶어놨습니다. 밥을 어떻게 먹습니까? 앞에 밥이 있으면 입을 갖다대고 그렇게 동물처럼 짐승처럼 그래 밥을 먹었답니다. 수갑을 채워놔서 손목이 헐어가지고 손목에 구더기가 기어다녔답니다. 욥은 그보다 훨씬 더했을겁니다. 온몸에 악창이 나서 고름이 나서 기와조각으로 고름을 긁었으니까 얼마나 가렵고 고통스러웠으면. 차라리 죽는게 낫지요. 그런 지경에 있어도 욥은 소망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거기보면은 낙망같은 그런게 있어도 그래도 그 깊은 속에 들어가면 끝까지 소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낙망 절망하는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실수가 있고 이전보다 배나 더한 복을 주실 수가 있는겁니다.
죄를 지어서 이게 말씀이 말씀을 같이 들어도 이 말씀을 들을때 이 말씀을 뭘로 받아야 됩니까? 모든 말씀을 읽을때나 들을때나 말씀을 읽고 들을때 우리는 그 말씀을 무엇으로 받아야 됩니까? 복음으로 받아야 복이 있습니다. 말씀은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복음으로 받지 아니하고 엉뚱하게 죄 짓는데 위안죄로 삼으면 더 큰 문제가 되고 이 말씀가지고 남을 비판하면 큰 문제가 됩니다. 죄를 지어서 어디까지 타락해서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가지고 엉망이 되었어도 그 지경에서도 우리는 나 어느곳에 있든지 해당이 됩니다. 거기서 마음이 편할리 없겠지만은 거기서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말하면 환경이 어떻게 몰아쳐서 어떤 환경이 내게 몰아쳐도, 그 환경을 당면한 나 자신이 어떻게 비참한 처지에 곤경에 처해져도 어디까지 떨어져서 바닥까지 쳐박혀도 믿는 사람은 거기서 소망을 가지고 일어서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스스로도 그러하고 다른 사람 볼때도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그 누구라도 우리는 어떤 사람이라도 소망을 버리면 하나님 앞에 큰 책망을 받습니다. 소망을 버리는 것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소망버리는 것 ‘하나님이여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나이다’ 그 말속에 그 바리새인의 그 입을 하나님께서 콱 쥐어박아서 ‘야 이놈아 너는 얼마나 의인이길래 니 앞에선 세리를 너와 같지 않다고 그렇게 큰 소리 치느냐?’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그렇게 자기는 의인으로 알았는데 하나님은 그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더 의롭다고 판정을 한 것이 하나님의 판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나 자신은 죄없고 깨끗하고 어디까지 의인되고 성자 성녀되고 내 앞에 있는 어떤 사람은 어디까지 큰 죄를 지어서 ‘저것도 인간인가’ 싶은 그런 사람이 보여도 그 사람에 대해서 낙망을 하면 하나님 앞에 큰 책망을 받게 됩니다. ‘저도 나와 같은 사람인데 하나님이 나는 은혜를 주시니까 이만큼 됐는데 저에게도 은혜를 주시면 나보다 더 나은 의인이 될건데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니 내게 주신 은혜를 그에게도 주옵소서’ 요 마음을 가져야 하나님께서 내게도 은혜주시고 그도 긍휼이 여겨주시지 ‘나에게는 좋은 은혜주시고 이렇게 의인 만들어주시고 저 인간은 저렇게 막대먹은 인간 만들어주셨으니 나는 저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요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너 얼마나 의로운가보자’ 하고 그에게 주신 은혜를 빼앗아버리면 한순간에 저도 별 수 없는 타락한 죄인이 되고 맙니다. 사람이 그 천하없는 의인도 성자도 그에게서 몹쓸것만 쏙 뽑아내놓으면 천하 몹쓸 인간이 되고마는 것이고 아무리 몹쓸 죄인도 장점을 뽑아놓으면 그도 의인입니다. 이런 양면성이 없는 사람은 천하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 누구도 없습니다. 백목사님은 우리와 다른 차원의 말씀이지만은 설교 중에 그런 말씀하십니다. ‘나도 죄인입니다. 내 속에 있는 죄를 알면 여러분들이 기겁을 하고 도망칠 그런 죄도 나도 가지고 있습니다.’ 백목사님 설교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백목사님같은 의인은 시대 성자입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그분도 스스로 그렇게 알았습니다. 사도바울은요? 사도바울은 뭐라그랬습니까? ‘죄인중에는 내가 괴수다. 막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팔푼이다 그말이지요. 만삭되지 못해 났으니까. 당신 스스로 그래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성자라 그러는데 자기는 보니까 ‘성자?’ 그래서 신사참배 때문에 감옥에 갇혔던 많은 분들이 참된 분들은 밖에 나오니까 출옥성도라 그래서 막 대우하고 높이고 영광돌리는데 본인들은 고개를 못 든답니다. ‘아이고 말도 마십시오. 속에 있으면서 껍데기는 옥중성도인데 오만죄 다 짓습니다.’ 부끄러워서 고개도 못 든답니다. 그게 진정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런면을 가져야 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뼈를 깎는 아픔으로 죄가 있으면 회개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지만은 주님이 붙들어 주옵소서 이것 때문에 대속하지 않았나이까. 그래서 주님이 의원으로 오시지 않았나이까 나는 죄인이고 병자입니다. 나를 고쳐주옵소서. 소망가지고 간절히 매달릴것이고 그래서 어떤 지경에 처해도 우리는 낙망할 수 없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볼때도 그렇습니다. 그 어떤 흉악한 그런 죄인을 봐도 우리는 그 죄인에 대해서 긍휼이 여기고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고 그래서 자기 죄는 어쨌든 세밀하게 날카롭게 정죄해서 그걸 드러내고 없애려고 노력하고 다른 사람죄는 우리는 어쨌든 죄를 덮어주는 것보다는 어쨌든 이해를 하고 참고 기다리고 또 인내하고 그런 마음을 가지는 그게 우리 믿는 사람의 가질 자세입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래서 살아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살아있다는 말은 얼마든지 고칠 기회가 있다는 말입니다. 얼마든지 바로 살 수 있는 소망을 하나님께서 아직까지 버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소망의 도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나도 소망 가지고 모든 사람에 대해서 소망 가지고 기도하고 어떻게하면 저 사람이 내 주변 사람이 가족이 좀 신앙으로 일어설 수 있을까. 나쁜 생각을 습성을 생활을 좀 고쳐서 올바른 생활할 수 있을까를 자꾸 생각하면서 협조해주고 도와주고 위로해주고 이끌어주고 기도해주고 이게 하나님 앞에 복받을 우리들의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백목사님께서 가장 많이 설교하신 내용 보면은 신명기 28장, 누가복음 17장 이런 말씀들은 굉장히 많이 설교하셨고 집회에서도 많이 하셨기 때문에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알면 많이 아는 사람은 무엇이 많습니까? 지식이 많은 사람, 너희가 더욱 힘써 첫째는 믿음을 가지고 믿음에다가 덕을 가지고 덕에다가 지식을 가지고 그러고나서 네 번째가 뭡니까? 지식에다가 절제를 가져라. 아는 것이 많으면 무엇이 많아집니까? 아는 것이 많으면 말이 많아집니다. 말이 많아지니까 하나님께서 그 말을 좀 절제해라 그런 의미도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알아도 아는 것이 우리 구원되는 것 아닙니다. 아는 것이 첫째입니다. 알고 행치 않으면 심판이 더 많아짐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신앙이란 것은 무조건 첫째는 알아야 되는 겁니다. 모르면 신앙생활 못하니까 아는 것이 첫째입니다. 알아야 되는데 아는것가지고 되는게 아니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많이 들어서 알지만은 한번 더 또 살펴보고 우리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십시다.
믿음이 뭐냐?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은혜다 그말이지요.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됐지 은혜 아니면 믿을 자가 없습니다. 천하 없는 종교가, 철학가, 생각 많은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다른 거는 다 믿어도 예수는 못 믿습니다. 예수 믿는 것, 성경이 믿어지는 것은 이 사람들 보기에 허무맹랑한 이 사실이 믿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야 믿어지지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안 믿어집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존재해 계신다는 그 자체가 대개 인정이 되고 믿어진다는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로 우리는 믿음이라는 종자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믿음은 종자적인 믿음이고 기본적인 믿음이다 그리 표현을 합니다. 종자적인 믿음, 기본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이 믿어지는 그 믿음을 받았습니다. 종자를 가졌으면 그다음에 할 일이 뭡니까? 000? 종자, 종자가 뭔지 알지요? 씨앗이 종자고 모종이 종자인데 그다음 가졌으면 그다음 할 일은 뭐해야 됩니까? 심어서 가꾸고 점점 자라갈 수 있도록 키워나가야 되겠지요. 믿음의 종자를 받았습니다. 할 일이 뭡니까? 이 믿음을 점점 길러나가야 되는 겁니다. 키워나가야 됩니다. 믿음이란 것은 정의적으로 그 교리라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은 성경 정의적으로 말하면 백목사님께서 내려놓으신 정의가 믿음은 3가지, 알고, 인정하고, 행하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을 첫째는 내용을 알고 그다음에는 그 사실을 내 마음이 인정을 하고 그다음에는 그대로 실행을 하는게 사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의 기본적인 정의입니다. 그런데 요 믿음을 우리가 활용하는 써먹는 면으로 생각해볼때 믿음이란 무엇이냐.
믿음은 인적요소지요. 사람의 요소입니다. 믿음은 사람에게 있는 사람의 요소는 몇가지로 되어있습니까? 영과 마음과 몸인데, 영은 인적요소지만은 주격입니다. 기본적으로 되있는거고. 그러면 심신이란 것인데 믿음이란 것은 심신의 작용이지요. 내 마음과 몸이 믿는 믿음입니다. 내 심신이 눈이 하나님 말씀을 읽고 귀가 듣고 내 마음이 생각을 하는 겁니다. 따져보고 비판해보고 연구해보고 비교해보고 분석해보고 살펴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 사실들을 창세기를 읽어보고 출애굽기를 읽어보고 레위기를 읽어보고 마태복음을 읽어보고 거기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 이 사람 통해서 기록한 말씀 저 사람 통해서 기록한 말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기록한 말씀, 아주 오래전에 기록된 말씀, 사사기에 말씀, 어떤 사건의 말씀, 교훈의 말씀, 교리적인 말씀, 시적인 표현의 말씀 이런 말씀들을 내용을 살펴보면서 단어도 보고 문장도 보고 전체도 보고 보면서 이 말씀의 뜻이 뭐냐, 이 말씀이 가르치는게 뭐냐 이걸 자꾸 생각하는 겁니다. 연구해보고. 생각하면 깨달아지게 되고 깨달아지면 하나님의 은혜로 믿어지게 됩니다. 심신의 믿음이지요. 그리고나서 그 말씀대로 내 눈이 행하고 내 입이 행하고 내 수족이 행하고 내 몸 전체가 행하고 내 마음이 인정으로 행하고 내 피부가 행하고 이런것들이 믿음의 작용입니다.
그럼 그래가지고 믿음이 하는 일이 뭐냐? 믿음이란 것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믿음이 하는 일이 뭘까? 믿음이 뭐합니까? 믿음은 전능입니다. 귀신들린 아이를 아들입니까? 가진 아버지가 주님 제자들에게 와서 귀신을 쫓아내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아무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귀신이 그를 데리고 난리를 치는데 고치지 못하니까 주님이 소란스러우니까 오셨습니다. ‘무슨 일이냐?’ ‘귀신 들린 내 아들 데리고 왔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이 쫓아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뭘 좀 할 수 있으면 좀 도와주옵소서’ 주님 말씀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순복음교회 조형기 목사님이 가장 많이 써먹은 말씀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다. 믿음은 전능이다 그랬지요.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믿음은 전능이다. 그럼 그 믿음이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사람이 하는 작용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하나님을 말씀을 알고 인정하고 실행하는건데 그 믿음이 하는 일이 무엇이냐? 그 믿음을 가지고 뭐하느냐? 그 믿음을 어디다가 써먹느냐? 생각해보시지요? 믿음을 가지고 백화점에 가서 옷을 살 수 있습니까? 믿음을 가지고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습니까? 믿음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뭐합니까? 들어야 삽니다. 안 들으면 죽는겁니다. 말씀은 들어야 됩니다.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듣고 생각을 해야됩니다. 듣고. 믿음이 하는 일이 뭡니까? 믿음 가지고 뭐합니까? 생각해보셨습니까? 믿음을 가지고 하는 일이 뭐냐? 믿음은 그것 가지고 하는 일이 믿음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겁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찾는 역사다. 또 믿음은 하나님을 좀 더 가까이 만나게 하는 역사다. 가까이 가게 하는 것이고 믿음은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믿음은 그 믿음으로 하나님과 연결된 그 통로 위에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내가 받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생명의 정의는 하나님과 연결입니다. 하나님과 연결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인데 거기도 우리 노력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고 가까이 가는 것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하나님과 연결된 고리고 하나님과 연결된 거기서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다 받아가지는 부지런히 받아가지는 것이 믿음이니까 하나님과, 서울서 부산까지 도로 이름을 고속도로를 무슨 도로라 그러지요? 경부고속도로라 그럽니다. 그 경부고속도로 위에 자동차가 부지런히 다닙니다. 그 자동차는 뭔가 놀러다니는 사람도 많이 있겠지만은 화물차는 짐을 싣고 수출 수입 화물 짐을 싣고 업무를 하는 사람 그래가지고 부지런히 그 도로를 달리면 서울에서 부산에 오고 부산에서 서울 가고 짐을 싣고 왔다갔다 하고 사람이 업무로 왔다갔다 하고 통로를 왔다갔다 이렇게 왕래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통행이 되고 서로 왕래가 되고 물류가 되고 이래 흐름이 되는거지요. 그러면 서울에 있는게 부산가고 부산에 있는게 서울가고 만나기도 하고 오만 역사 다합니다. 이게 믿음이다 그말이지요.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 사람 사이에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 같은 이런 역사가 믿음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며 가까이 하는 것이며 만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것을 내가 받아가지는 것이 믿음이다.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그래서 믿음은 가장 귀한 것이고 보배입니다. 금보다 귀한 믿음, 보배입니다. 이 믿음을 우리는 종자를 가졌는데 종자적으로 가진 이 믿음을 우리는 부지런히 키워야되겠고 또 많게해야 되겠고 강하게 만드는 우리가 되야되겠는데 그 믿음이 더해지는 방법을 주님 말씀하신 겁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까 믿음이 있기는 있는데, 우리 믿음 있잖습니까? 믿음 있으니까 주일을 지키고 믿음 있으니까 기도하고 믿음 있으니까 양심에 가책을 받고 생활도 조심하고 믿음으로 사는 겁니다. 정도차이지 그래서 믿음은 사람마다 다 각각 다른 겁니다. 같지 아니하고. 그래서 믿음이 좀 약하고 작고 적으니까 우리에게 믿음 좀 키워주옵소서 강하게 해주옵소서. 아벨은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고, 타협하지 아니하다가 순교했고 순교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 하나님과 동행을 300년동안 계속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 120년동안 온 세상이 비웃고 조롱해도. 지금 이런 말씀 주님 재림에 대한 설교를 하는 강단 보기가 드뭅니다. 우리가 하는 이런 말씀들을 유명한 교회 목사님들은 666이 무엇이냐? 말세가 되면 온 세상은 다 똘똘 뭉쳐서 일곱 머리 열뿔이 하나가 되어진다 그래가지고 어린양을 대적한다. 이 세상은 죄악세상이면 세상의 주인은 현재는 마귀다, 이 세상은 불탈 세상이다 이 세상에는 정의라는 것이 없다 이런 설교를 순복음교회 소망교회 사랑의 교회 저런 교회에서 하면은 난리가 납니다 뒤집어지고. 그분들이 몰라서 안 하는 수도 있고 알아도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겁이 나서 함부로 못합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 설교를 들어보면 그냥 두루뭉실하고 주위만 빙빙 돌지, 핵심을 콕 찔러서 요거다 하는 말을 알아도 잘 못하고 몰라서 못하고 알아도 못합니다 겁이 나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백목사님 생전에 여러분들에게 전하는 이 복음이 지금 무슨 복음인지 여러분들 모른다는 말씀을 수도없이 했습니다. 목숨 내놓고 하는 설교라는 말씀을 수없이 했는데 그 밑에 앉아서 그렇게 들으면서도 그게 무슨말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분이 당하고나니까 그 뒤에 알았지요. 섬칫한 말씀입니다. 그 세계 제일의 주일학교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서부교회 강단, 부산에서 제일 크고 천국에서- . 모든 정보기관에서 여당 야당 우익좌익이 다 주시하는 그런 교회 그 강단에서 마구 외쳐댔으니까 목숨 걸고 하지요. 못합니다. 저도 만약에 그래 큰 교회 가있으면 겁이나서 어림도 없지요 못합니다. 그러니까 온세상이 대적이 될 수 있는 또 한편으로는 비웃고 조롱할 수 있는 그 생활을 노아가 몇 년했다고요? 120년을 방주 만든 생활은 그 생활입니다. 세상이 비웃고 조롱하는 겁니다. 비웃고 조롱하면서 반대하고 온세상이 조롱하는, 쌀이 생깁니까 돈이 생깁니까 명예가 생깁니까 권력이 생깁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한분 그분의 말씀 하나 믿고 평생을 다 받쳐 120년 세월을 배만 만들고 앉았으니 기가 찰 노릇이지요. ‘저 영감이 참 미쳤지, 정상이면 저짓 안할건데.’ 안 믿는 사람들이 여기 제대로 믿는 사람들 보면은 보나마나 우스울 겁니다. 그 사람의 행동거처나 생활모습을 보면 분명히 인격잔데, 참사람인데 그래서 감동되는 사람 있지만은 도무지 불택자들은 ‘저 참 아까운 사람이다, 그만 기독교라는 저기 빠져가지고 저렇게 하니까 참 아까운 사람이다.’ 이해를 못할 겁니다. 차마 사람이 바로 되있으니까 조롱하고 그래는 못해도 도무지 이해를 못하는거지요. 노아는 그런 생활을 120년 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슨 힘입니까? 믿음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이 말씀하신 말씀을 믿습니다. 그 말씀 속에 들어가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다 기록이 되있습니다. 생각하니까 그 말씀 속에 있는 성령이 나를 감동시켜서 하나님이 믿어지게 합니다. 깨달아지게 합니다. 말씀 속에 들어가니까 하나님의 목적세계 구원세계가 환하게 열립니다. 말씀을 듣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들어서 알고나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가 환하게 열리는데 그 구원이 얼마나 큰지를 말씀으로 알고 생각하고 따져보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양심을 통해서 밝혀주시는데 그 광대한 구원 세계가 믿어집니다. 하나님이 두렵습니다. 구원에 대한 소망이 큽니다. 이 세상이 허무합니다. 그러니 그 힘을 가지고 세상에 바라볼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과거에는 그런걸 몰랐는데 자꾸 세월이 가니까 느껴집니다. ‘보자, 내가 사는게 돈 보고 살겠나. 돈이 있으면 좋겠지만은 그 허무한 것 알고나니까. 권력을 얻겠나. 명예를 가지겠나. 향락을 누리겠나. 이 세상을 바라보면 뭐보고 살겠노. 그래서 신앙이 아니면 참 세상 살 맛이 안 나겠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구원 잘 이룬 사람들은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어서 떠나 주와 함께 거하기를 원하지만은 내가 땅에 있는것은 너희들 때문에 있다’ 백목사님도 그랬겠지요. 우리는 아직 거기까지는 안되도. 그런데 알고나면은 세상은 마음 둘 곳이 없는 곳이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믿음을 가지니까 노아는 120년동안 다른 사람이 조롱하거나 말거나 참 불쌍하다 안타깝다 세상 사람은 노아를 조롱하고 노아는 세상 사람을 조롱합니다.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그다음 뭐지요? 나도 역시 세상 사람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보니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그런 찬송들이 속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택함 받지 못하고 은혜 받지 못한 사람들이 참된 믿음의 사람을 보면 도무지 그 세계를 모르고 참된 믿음의 사람이 세상 속에 빠져사는 사람을 보면은 불쌍해서 견딜수가 없는 것이고 평행선이지요. 다른 차원입니다. 끝에 가보면 최후의 승자가 승자입니다. 마지막에 남는 사람이 승리자입니다. 마지막에 누가 남을지. 세상은 모르고 인생은 모르는데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성경이 참인것을 먹어보고 압니다. 내가 살아보니까 성경이 참이더라. 내가 죄짓지 아니하고 말씀대로 살아보니까 말씀대로 되더라. 하나님이 성령으로 내 양심을 감동시켜서 믿어지더라. 확신이 오더라. 담대도 오더라. 배짱도 있더라. 내 객관의 변화역사도 있더라. 요런 믿음의 능력이 있으면 세상을 이기는 겁니다. 노아의 120년 생활은 믿음에 능력이였습니다. 아브람이 걸어간 걸음 걸음도, 요셉의 걸음도 살펴보면 참 세상이 보면은 기구하지요. 성공되기 전까지는. 그런데 요셉은 그 속에서 단한번도 낙망하지 않았습니다.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이 겁이 나서. 하나님이 두려워서. 눈 앞에 미혹하는 보디발의 아름다운 그 아내 미혹보다 하나님의 심판이, 매가 더 겁이나서 죄를 짓지 못했습니다. 기약 없는 감옥속에서 하나님 말씀에 소망이 있으니까 낙망하지 않았습니다. 총리가 되어서 형들에게 깊은 복수는 안해도 한번 혼을 내줄만 하지만은 그러나 요셉의 마음은 형들의 잘못된 불목을 고치는 거기 다가 있었고 아버지 편애 바로 잡는 그걸 바로 잡는 거기 다 가있었지, 그래서 베냐민의 자루 속에 은잔 넣은 역사가 형들의 불목을 치료하는 역사가 아버지 편애를 고치는 그 역사입니다 요셉이. 전부 사랑의 역사입니다. 그 모든 것이 다 총리가 됐지만은 이제는 고진감래가 됐구나, 내 앞에는 평안만 있겠구나 두 다리 뻗고 이제는 누려보자 그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겁이 나서. 다윗도 그랬잖습니까? 다윗이 하나님이 자기 높여서 왕을 삼은줄을 다윗이 알았더라. 이걸 모르면 올라갔다가 순간에 떨어져버립니다. 사울이 그랬고 그런 사람 많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결코 그리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게 전부다 믿음의 힘이고 믿음의 능력이다.
그래서 믿음이란 것은 그 믿음은 무엇이 참믿음이냐? 겨자씨 믿음이 참믿음인데 그 겨자씨 믿음이 무엇이냐? 겨자씨 믿음은 한말로 말하면 생명있는 믿음 살아있는 믿음을 말하는데 생명있고 살아있다 그 말은 활동을 한다 그말이지요. 활동한다는 그말은 믿음이 활동한다, 역사하는 믿음, 활동하는 믿음, 움직이는 믿음을 가져라. 우리 심신이 가지는게 믿음입니다. 내 마음이 믿고 몸이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마음과 몸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인정하고 거기 따라 움직이는 것이 믿음의 작용입니다. 이게 살아있는 믿음이고 움직이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요 믿음을 가만 생각해보면 오전에 말씀드린대로 물에 사는 물고기의 활동은 어떤 활동이였습니까 기본적으로? 물에 사는 물고기 모든 어류들의 그 아가미로 숨쉬는 것 먹는 것 돌아다닌 것 모든 지느러미 헤엄치는 모든 작용은 무슨 작용입니까? 물 속에 빠져서 안 죽기 위한 작용입니다. 물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작용. 필연적인 본능적인 작용입니다. 그러니까 물고기가 움직이며 활동하는 것은 그게 살기위한 작용, 필연적인 작용입니다. 땅 속에 심겨져있는 겨자씨가 눈에는 안보이는데 달걀 보면은 유정란 있고 무정란 있지요? 씨앗도 보면은 그게 종자도 보면은 씨눈이 있는게 있고 없는게 있지요. 종자가 산거 있고 죽은 것 있습니다. 꼭 같이 보여도. 죽은 거는 심어놓으면 아무 생명의 작용이 없으니까 썩고 맙니다. 생명 있는 것은 땅 속에 심어놓으면 안 보이는데 그 속에서 생명이 작용을 합니다. 움직입니다. 그 움직이는 것은 그 생명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적인 몸부림이지요. 작용입니다. 그 생명 유지하기 위한 본능적인 모든 움직임. 사람이 사는 것은 우리 사람은 겉만 보이지요. 우리 심장이 하루에 펌프질 몇 번합니까? 우리 심장이 하루에 펌프질을 수도없이 많이 하지요? 그 심장에 나온 피가 동맥을 나와가지고 쭉 뻗어 온쪽으로 다 가면서 모세혈관을 통해서 구석구석 다 뻗어가는데 사람 몸속에 있는 혈관을, 혈관 길이가 얼마라 하던가요? 사람 몸속에 있는 혈관의 길이를 다 재면 그 길이가 지구를 두바퀴반을 도는데 10만키로랍니다. 10만키로. 지구를 두바퀴 반 돌고 도는 정도의 한 사람 몸속에 있는 혈관의 길이가 그리 길답니다. 얼마나 세밀한지. 그만큼 의사들이 계산해 나온 말이겠지요.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거랍니다. 그만큼 미세한데, 그 미세한 속에 혈관 안보내면 사람이 동맥경화 혈관 막힌거지요. 또 뇌출혈은 혈관이 탁 터진거지요? 막혀서 딱 끊어져버리면 그만 혈관 딱 막혀버리면 잘못하면 사람이 한순간에 죽지 않습니까? 3분만 호흡안하면 사람이 죽지 않습니까? 쉬지않고 움직이는 겁니다. 우리 몸속에 이 몸들이. 그게 전부 살기 위한 움직임, 작용들입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작용들. 그래 작용을 하면 그 생명이 그 생명이 자라갈 수 있는 그런 움직임이 되면서 동시에 그 움직임은 자기 환경을 먹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정상적으로 활동을 하면 그 사람은 자기 환경을 기본적으로 먹게 됩니다. 사람의 물질의 생명으로 말하면 그 생명이 작용을, 정상적인 몸의 모든 이것들이 몸의 모든 기관들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활동을 하면 밥도 먹고 공기도 마시고 내뱉기도하고 혈관도 보내고 이런 정상적인 작용을 하면은 그게 자기 객관에 있는 그 생명유지에 필요한 모든 것을 먹는다 그말이지요. 잡아먹습니다. 잡아먹으면 자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라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생명이 움직이는 움직임의 작용은 필연적인 생명유지, 보존유지에 작용이고 그 생명작용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면 환경은 필연적으로 잡아먹게 되어있고 환경을 잡아먹으면 자라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겁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사람의 믿음이 겨자씨 믿음이 돼서 작용하는 믿음, 움직이는 믿음, 믿는 사람의 마음과 몸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아니하고 늘 말씀을 읽고 듣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머릿속에 담아놓고 내 모든 몸의 움직임, 심신이 같이 움직이는 움직임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그 생활이 계속되면 그 믿음이 살아있는 겁니다. 믿는 사람의 믿음이 작용을 하는 겁니다. 그게 피와 성령과 진리로 사는 생활이 되는데 중생된 자의 생명으로 사는 것인데 그 생명이 그리 살면 그 생명은 두 번째 뭐합니까? 필연적으로 000샘 뭐한다고요? 환경을 잡아먹습니다. 자기 주변을 잡아먹습니다. 생명이 생명 작용을 하면 그 생명 보존 유지되기 위해서 환경에서 생명에 필요한 걸 다 잡아먹듯이 믿는 사람의 믿음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면 그 사람은 환경의 산물이 되지 아니합니다. 환경을 잡아먹습니다. 모든 환경을 잡아먹어서 자기의 밥으로 삼습니다. 겨자씨가 땅속에 심겨있으면, 생명으로 작용하면 땅속에 있는걸 다 잡아먹습니다. 영양분도 먹고 수분도 빨아먹고 온갖 온도도 먹고 다 먹습니다. 먹으니까 자랍니다. 믿음이 정상적으로 작용을 하면 그래서 겨자씨 믿음이라 그러면 어떤면으로 말하면 정상적인 믿음을 가져라, 믿음의 실제를 가져라 그말입니다. 말로만 믿지 말고 지식으로만 가지지 말고 말만 하지 말고 마음만 가지지 말고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는 것이고 아무리 말로 떡을 하면 온세상 천하사람이 다 먹고 남아도 말로 되는게 아니니까. 지식만 가지고 말로 실행하는 것도 있지만은 그것만 가지고 되는게 아니니까. 실제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서 하나님 말씀대로 움직여지는 그 생활이 겨자씨 믿음인데 그게 첫걸음이 사는 겁니다. 사는 것이고 그 생활이 계속 되어지면 그 움직이는 작용, 생명의 작용으로 인해서 우리 믿는 사람의 자기 환경을, 학생이 학교라는 곳을 가면 안 믿는 학생들이 많이 있는 그 환경 속에서 믿는 사람이 믿음으로 살면 그 환경을 친구들의 모든 것을 보고 먹지,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학생이 안 믿는 친구따라서 ‘야 우리 게임방에 가볼래? 어디가면 여학생 있다던데 한번 보러 갈래?’ 그런 말을 들을때 그 학생 속에 믿음이 있으면 ‘아 이거는 가면 안되는 것인데? 말씀에 어긋나는것인데?’ 판단해서 ‘나는 바빠서 못가겠다, 공부해야된다, 그런 곳에 가면 안좋겠다.’ 끊어서 ‘아 저런 학생은 저런데 가는구나. 저 가면 안되는건데’ 보고 배우고 자기가 그걸 먹고 그걸로 인해서 한층 더 자라가지 거기 따라가지 않습니다. 이게 겨자씨 믿음이다 그말이지요. 겨자씨 믿음은 그래서 3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살아서 움직이는 겁니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은 쉬지 않고 말씀을 읽고 듣고 인정하고 실행하는 그 생활이 계속되는 겁니다. 요래 되면 요 생활이 되면 자기 환경, 그 환경이 어떤 환경이든 예외가 없습니다. 모든 식물은 거름을 다 줘야되지요. 비료 주고. 그런데 저는 몰랐는데 고구마는 거름을 주면 안된답니다. 고구마는 맨땅에, 영양분 없는데 그런 맨땅에 심어놔야 고구마가 뿌리가 자란답니다. 고구마를 거름뿐이 많으면 이거는 고구마는 안 자라고 줄기하고 잎사귀만 자란답니다. 고구마 잎사귀 드셔보셨습니까? 그렇게 맛있는줄 몰랐습니다. 옛날에 저 어릴때 고구마 줄기 먹는거는 봤거든요. 그런데 고구마는 이번에 우리 집사님 중에 한분이 맛있습니다 하고 나물을 가져와서 먹어보니까 세상에 나물중에 저는 그만큼 맛있는 나물 처음 먹어봤습니다. 고구마 나물 입에 살살 녹는게. 그래서 물어보니까 아는 사람들은 그걸 이제 알았습니까? 고구마 나물 먹기 위해서 고구마 심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 뿌리는 영양분이 있으면 고구마 뿌리가 안 자란답니다. 그래서 이번에 올해 고구마 농사, 줄기 잎사귀 무성해서 올해 고구마 농사 좀 지어보겠다 싶었는데 캐보니까 고구마는 그냥 요만큼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큰거만 나오고 줄기하고 잎사귀만 무성하게 나왔지요. 그래서 물어보니까 그럽디다. 그런것도 있지만은 일반적으로 말하면 식물은 땅속에 거름이 많아야 되는데, 영양분이 많아야 되는데 생명이 튼튼하면 전부 다 잡아먹습니다. 그래서 식물을 땅속에 자꾸 심으면 몇 년 심고나면은 그만 애지간한 식물들은 한 2번 심고나면 땅을 바꿔주고 거름거리를 새로 만들어줘야되지 몇 년 땅속에 영양분 빼먹고 나면 영양분이 다 없어서 그 흙은 못쓴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래서 대토하고 자꾸 흙을 만들어줘야되지.
믿는 사람의 믿음이 튼튼하면 겨자씨 믿음이 돼서 하나님의 말씀이 머릿속에 늘 들어있고 알고 그 말씀을 인정하는 믿음이 있고 실행하는 그 노력이 계속이 되면 그 환경이 어떤 죄악속에 빠져도, 그래서 다니엘서 12장에 ‘땅에 티끌 가운데서 많이 깨어 구원 얻는 자도 있겠고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죄악이 아무리 많아도 생명력이 튼튼한 사람은 그 죄악 세상을 전부 잡아먹고 무럭무럭 자라는 좋은 터가 되고 땅이 되고 환경이 되지 거기 피동되지를 아니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환경에 피동이 되면 그 사람의 생명은 믿음의 생명은 전부 끊어지는 겁니다. 겨자씨 믿음은 없는 겁니다. 환경을 먹고 자라는게 겨자씨 믿음에 그거는 필연이고 본능입니다. 저절로 그리 되는 겁니다. 요게 겨자씨 믿음이다. 요것이 믿음이 자라는 법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믿음이니까 믿음의 작용이 끊임없이 계속 되는 겁니다. 계속이 되면 그 믿음은 환경을 잡아 먹습니다. 그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잡아먹고 욥 같은 환경이 되도 잡아먹고 나사로 같은 환경이 되도 잡아먹고 또 왕이 돼서 총리같은 환경들도 잡아먹고 부자가 되도 잡아먹고 가난해도 잡아먹고 바빠도 수월해도 슬퍼도 어디가든지 그 모든 환경을 잡아먹습니다. 누가 잡아먹습니까? 그 환경의 주인공이 잡아먹습니다. 이걸 다른말로 바꾸면 그게 뭐하는 겁니까? 응용 한번 해보시지요? 000샘? 그거 너무 큰걸로 하는 전체로 말한건데. 꼭 그대로 적용시키면 딱 맞는게 있습니다. 이걸 다른 말씀을 하면 그게 뭐하는 겁니까? 말씀을 들으면 바로 탁 통하는데. 000선생님? 000선생님 알겠어요? 여반에 또 물어볼까? 우리 저 신풍 학생 알겠습니까? 그게 뭐하는 것입니까? 겨자씨 믿음을 가지면 환경을 다 잡아먹습니다. 내가 주인이 돼서 이래 말하면 알겠습니까? 내가 주인이 되가지고 환경 다 잡아먹습니다. 이게 바로 다른 말로 말하면 뭐하는 겁니까? 그래도 모르시겠습니까? 현실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겁니다 그게. 그것이 바로 현실을 다스리는 겁니다. 내가 주인이 돼서 내 환경을 다스리는 겁니다. 좋아도 믿음, 슬퍼도 믿음, 나빠도 믿음, 괴로워도 믿음. 많아도 잡아먹고 외로워도 잡아먹고 그런 사람은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이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 되고 마는 겁니다. 환경이 그를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의 주관이, 그 사람 자체가 세상을 초월하고 세상을 다 잡아먹는 생명을 가졌고 이 세상 현실에 주인공이 됐으니까 그 주인공을 현실이 들어서 그 사람이 주인이니까 종들이 들어서 먹이들이 들어서 그 주인을 어떻게 하지를 못합니다. 믿음의 능력이고 겨자씨 믿음이란 것은 이런 것을 말합니다. 요 믿음을 가지면 믿음은 자라게 된다. 믿음이 자라는 것은 요래 가지고 자라는 겁니다. 이것이 아니면 결단코 자라지 않습니다. 기본 구원에 대한 말씀은 기본구원이면서 이걸 다시 돌아보면 건설구원에 적용되는 말씀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그게 점점 자라면 뽕나무가 뽑히는것 옮기는것 심어지는것 다 기적입니다. 내 속에 있는 도무지 뽑아버릴 수 없는 악성, 수십년 내 속에 뿌리박혀서 뽑아버리지 못하는 악습. 요 악성 악습 때문에 얼마나 큰 손해보는 그 악습. 그놈을 뽑아버리는 방법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바로 겨자씨 믿음을 가지면 됩니다. 다시 말하면 멀리갈 것 아닙니다. 큰 거 아닙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란 것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해라. 바로 평소 자기 현실입니다. 거기서 그 순간 순간에 내게 오는 그 현실 현실을 토막토막을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여기서 어떻게 할까? 웃을까 울까 슬퍼할까 괴로워할까 기도할까 하면 안되는 것 빼놓고 이런 환경주신 주님의 뜻이 무엇이냐를 찾아서 거기서 자기 할 수 있는 걸 찾아 하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 하고 그다음 순간 또 하고 또 하고. 그리하다보면 내 속에 있는 악성 악습이 오래토록 이것이 자라있으니까 강해서 끊임없이 나를 밀치고 들어옵니다 넘어뜨리려고. 그럴때 싸우는 겁니다. 모든 생명의 작용은 전투입니다. 모든 생명의 작용은 전부 전투입니다. 안죽기 위해서 싸우는 겁니다. 자기 안에 있는 것 하고 싸우고 밖에 있는 것 하고 싸우고 자기 스스로 싸우고. 내가 서야 된다, 일어서야 된다. 자기 스스로 싸우고 밖에서 들어온 것 싸우고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모든 환경이 되어진 상황들 이런 모든 것들이 나의 믿음을 넘으뜨리려고 오는데 말씀을 가지고 생각해 보는 겁니다. 생각해보면 다 나오지 않습니까? 모르는 사람은 몰라도 우리 이 복음을 들은 분들은 핑계하지 못할 겁니다. 벌써 하나님을 향한 지식 13가지 속에 이 말씀 다 들었습니다. 다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자존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나와있습니다. 그분의 목적이 첫째입니다 하나님 다음으로. 그 목적이 내 구원입니다. 그 목적 위해서 영원후까지 모든 존재 전부를 다 예정을 해놨습니다. 그 예정의 순서대로 전부 전개되는 겁니다. 거기 빠진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 앞에 닥친 것도 전부 다 그 속에 들었고 그 모든 것은 다 나를 지금보다 더 나은 고칠 것 고치고 모자란 것 가르치고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 주신 한 순간 현실이고 한 토막에 필요한 과정입니다. 요셉은 이걸 믿었기 때문에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약해서 가다보면은 한순간 넘어질 수 있고 피곤할 수 있지만은 말씀을 가지고 다시 생각해보면 이것도 예정 속에 든 것, 그 예정은 내 구원을 위한 것 하나님의 사랑, 내게 가장 좋은 것, 내 할 일은 주님의 뜻만 찾는 것, 이 생활이 어디까지 계속되도 또 하는 것, 120년이 계속되도 300년이 계속되도, 우리가 120년 살겠습니까? 300년 살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말씀을 깨닫고 세상을 보고, 그래서 평가를 해봐야 됩니다 많은 생각가지고. 보자 하나님과 피조물을 비교해보자. 하나님의 구원 세계와 이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 다 갖다 비교 한번해보자. 그래서 따져서 자기 깊은 양심 속에 들어가서 아무리 온 세상 지식 다 가지고 따져보고 따져보고 살펴보고 평가를 아무리 천번 만번 해도 하나님을 능가하는 존잰 없다, 그분의 구원보다 더 큰 것은 없다, 그분의 예정을 벗어나는 범위도 없다, 그 분의 주권 범위 벗어나는 것도 없다, 그래서 죄도 하나님 만들었고 마귀도 하나님 만들었다는 말을 담대하게 하는 겁니다. 그게 아니면 기독교가 안되는거니까 틀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따져들어가보면은 이 세상이란건 참 그러고나서 세상을 한번 봅니다. 세상에 귀한 사람도 있습니다. 참 훌륭하다 인격자다 위대하다 존경할 만하다 내가 만약에 예수 빼놓고 저 사람과 비교한다면 저 사람 발바닥도 못따라가겠다. 그런 사람 많습니다 훌륭한 사람들. 그런데 저 사람 보니까 예수가 없구나, 구원이 없구나, 생명이 없는 마네킹이네. 잘 다듬어놓은 인형이구나. 참 안타깝다. 나는 비록 오만것이 다 묻어 흉한 죄인이지만은 나는 주님 대속이 있으니까. 천국 소망이 있으니까. 하나님과 연결됐으니까. 그러고 세상을 돌아보면 세상은 참 아무것도 아닙니다. 참 모든 육체는 다 풀이다. 그 영광은 다 풀에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고 그러나 이 말씀은 세세토록 있는데 이 말씀이 곧 복음의 말씀이다. 따져보면 나오는데 우리가 안 따져봐서 안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래 가지고 알고난 다음에는 모든 생활 방향을 이리 정해놓고 이걸 위해서 모든 생활을 하는 겁니다. 준비도 하고. 이게 가장 가치있는 것이니까. 그런데 여기에 걸리면 여기 지장되면 없애버리지는 못해도 조절은 하는 겁니다. 여기 걸리면, 이거 참 직장이 중요한데 안다닐 수 없고 그만 둘 수 없으니까 하나님이 주신 현실이니까 여기서 좀 살펴 조절하자, 사업도 좀 조절하자, 공부도 좀 조절하자. 왜? 그것이 직장이 공부가 사업이 내 전업이 아니니까 주업이 아니니까 이거는 내 부업이니까, 내 주업은 구원이니까, 구원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이니까 조절 좀 해봐야되겠다.
이런 생각이 계속되고 하는 그것이 바로 겨자씨 믿음입니다. 여러분들 인생이란 것은, 인생은 깁니까 짧습니까? 세상말에 인생은 짧다 그러지요, 짧고 안믿는 사람의 예술은 길다 그러지만은 예술도 인생 있어야 예술이 있지 인생 없는 예술이 어디있습니까. 인생은 짧습니다. 길지 않습니다. 길을 가다보면 끝없이 들어갑니다. 하루 속이 돌아봐야 됩니다. 세상을 향해 가다보면은 어느거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누가복음 15장입니까? 어리석은 농부의 그 모습은 믿는 사람의 대다수가 전부다 그 속에 그 함정에 다 빠져있습니다. 한 걸음만 더 한 걸음만 더 한 걸음만 더 요것만 요것만 요것만 하다 보니까 어느새 백발이 되어있습니다. 자기 한번 돌아보시지요. 겨자씨 믿음을 기억하십시다. 겨자씨 믿음은 살아서 움직이는 믿음입니다. 움직이면 환경을 잡아먹습니다. 잡아먹으면 자랍니다. 그게 믿음이 자라가는 방법이다. 또 하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이거는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우리는 하나님의 종인걸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종입니다. 주님의 피에 팔린 종입니다. 주님이 만들었으니 주의 것이고 피에 팔렸으니 주의 종입니다. 종의 할 일을 본문에 보면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밭갈고 양치는 겁니다. 밭가는 것은 자기 구원, 양치는 것은 인간구원입니다. 이 두가지만 우리 할 일입니다. 이 두가지를 힘들게 한 사건 한 사건 그날그날 해놔놓고 하고난다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저녁에 와서 ‘보자, 이제 하루 종일 자기를 만들기 위해서, 인간 형제구원 위해서 살았으니까 저녁에 두다리 뻗고 좀 자볼까?’ 그러면 와서 먹는 겁니다. 주님 뜻은 먹어라 하겠느냐 먹지아니하고 주인 먹을 것 또 예비합니다. ‘보자 오늘 하루는 이렇게 살았는데 내일은 어떻게 살아야되나, 내일은 어떻게 살아야 내 구원이 바로 되나’ 내일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은 주님 뜻을 찾아봅니다. 내일은 어떻게 인간구원에 힘을 써야 되나. 주님의 뜻을 또 찾아보고 그리고나서 또 자기 할 일 하고. 그러고난 다음에 이만큼 수고했으니까 이제는 좀 대우도 받고 보상도 받고 그러면 무익한 종은 아닙니다. 나는 무익한 종이라. 왜 무익한 종입니까? 이것도 깨달아 봐야 됩니다. 왜 많은 성도들이 무익한 종이라 그럽니까. 외식이 아닙니다. 천하 없는 성도가 이 세상에 사도바울이 일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많은 사도들이 많은 교회를 세우고 수많은 사람을 전도하고 많은 일을 했는데 깊이 기도속에 들어가보니까 나는 무익한 종이라. 왜 무익한 종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세워서 하긴 했는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이 거들면,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를 인간이 거들면 도움이 됩니까 방해됩니까? 아버지가 하는 일을 아버지가 아주 잘 하는 그 일을 어린 아들이 돕는다고 거들면 아버지가 ‘그래 좀 도와다오. 도우면 힘이 되겠지’ 말은 그래하지만은 도움됩니까 방해됩니까? 방해됩니다. 시집 보낼 딸을 둔 친정어머니가 하면 더 잘하는데 그 딸에게 시키면 답답하고 속터지고 일도 안되고 하는데 시킵니다. 왜 시킵니까? 그 기르기 위해서. 그러니까 그 딸은 무익한 딸입니다 그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하실 역사를 사람이 하면 방해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기르시기 위해서 일을 시킵니다. 그러니까 그 사실을 깨닫고 나면 아무리 하고나서도 하나님이 하시면 이것하고 비교하시겠습니까?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내가 들어서 오히려 막은 것이 없는지. 그러니 결국 무익한 종입니다. 나는 무익한 종이라. 그런데 하나님이 시키니까 할 수 밖에 없는 마땅히 할 일 한 것 뿐입니다. 대접받을 일이 아닙니다. 대우 받을 일이 아닙니다. 요런 자세가 논리적인 깨달음으로 자기에게 논리로 따져서 나와야 됩니다. 그럴 수 밖에 없도록. 이걸 알고나면 사람은 양심이 있기 때문에 결코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사울은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넘어졌습니다. 솔로몬은 알았다가 잊어버려서 넘어졌습니다. 노아도 알았다가 뒤에는 실패했습니다. 다윗은 한번 넘어졌지만은 끝까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한 종이 다윗입니다. 아브라함도 끝까지 알았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가 이겁니다.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모든 건 다 하나님의 은혜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요 깨달음 자세가 믿음이 중단되지 아니하고 계속 자라가는 방법입니다.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겨자씨 믿음 가질 것, 무익한 종의 믿음을 가질것. 요래 가지고 토막토막을 이겨나가면 믿음은 자꾸 자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주셨으면 우리는 소망이 있는 겁니다. 살려주셨으니까 소망이 있다는 뜻이고 살려두셨으니까 아직까지 고치고 배우고 만들어나갈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소망을 두고 계십니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은 주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내가 힘껏 노력안해서 그렇습니다. 있는 힘 다해서 내 현실을 생각하면서 힘껏 말씀으로 겨자씨 믿음 생활 하고 그 겨자씨 믿음의 활동으로 환경을 전부 잡아먹고, 남의 환경 볼 거는 아닙니다. 내 현실 내 환경을 봅니다. 잡아먹고 그러면 믿음 자라는 것은 세월속에 저절로 자랍니다. 생명은 한순간에 자라지 않지 않습니까? 생명자라는 것은 세월이 걸립니다. 젖먹이가 빨딱빨딱 젖먹으면서 또 기어다니면서 울고 불고 떼를 쓰니까 빨리 좀 크면 좋겠다, 빨리 큽니까? 세월이 가야 되지요? 생명입니다. 믿음이란 것은. 그러기 때문에 겨자씨 믿음을 가지고 또박또박 하루하루 살아나가면 그래가지고 한주일 살면 속에서 자기 주관에 변화가 있습니다. ‘아 이번 한주간은 바로 살았다’ 용기가 나옵니다. 담대가 나오고. 한달만 살면 객관이 변합니다. 3개월을 살면 다른 사람이 압니다. ‘저사람 변했다’ 더 살면 능력이 나옵니다. 이게 믿음이 자라가는 방법이다. 기억하고 힘을 써보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말씀을 복음으로 받아서 이 말씀을 생각해보십시다. 일단 논리적으로 알아서 따져봐야 됩니다 살펴봐야 됩니다 깊이 생각해보고 우리 믿음을 돌아보고 주님 앞에 믿음을 구하는 우리가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