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5-주후(눅9:51-62)
기독자의 단일 소망2013-09-15조회 409추천 27
본문: 눅9:51-62
제목: 기독자의 단일 소망
요점:
1. 자기를 부인하자
- 찬송가 136장의 후렴에서
- 언덕을 떠나는 것은 자기, 기존지식, 선입적 관념을 떠나는 것
- 구원은 자기를 고치는 자기 성화가 구원
- 자기를 고치는 표준은 주님, 기준은 말씀
- 자기를 고치려면 자기를 아는 것이 필수
- 자기를 모르면 고칠 수 없는 것, 따라서 신앙은 자기를 아는 것
- 말씀의 객간으로 자기 주관을 살피고 알아 고쳐야 할 것
2. 신앙의 결심
- 본문은 크게 두 토막으로 되어 있으나 세 가지로 공부
①신앙의 결심
②능력 있는 사람이 되려면
③단일 소망
- 신앙생활에 결심은 대단히 중요한 것
- 자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결심을 할 것
- 성경 읽기, 기도, 새벽기도, 아침 잠 등 실제 생활에서 결심을
3. 능력 있는 사람이 되려면
-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사마리아인들이 막음
- 야고보와 요한의 무자비한 대응-불을 명하여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 예수님은 저희를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심
- 능력 있는 사람이 되려면
①능력을 감당할 사람이 되어야
②그런 사람이 되려면 사람을 아껴 사랑하고, 겸손을 가져야
4. 단일 소망에 기억할 3가지
1)자기 위한 생활은 금물
-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 주님을 따라가서 주님같이 되겠다는 좋은 소망
-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 주님 따라 가는 길에 자기 위한 생애는 금물
2)대속의 사은이 모든 사은의 근본이며 원동
-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례케 허락하옵소서
-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 부친 장례는 사은의 마지막 생활이지만
- 주님 따라가는 단일의 소망이 아닌 사은은 죽은 자들이 하는 것
- 대속의 은혜로 산 자 된 우리는 대속의 사은이 근본이며 원동
3)주님 따르는 소망은 뒤를 돌아 보지 말아야
- 나로 먼저 가서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 가족 작별은 사람의 마지막 책임
- 사람의 두 가지 큰 도리는 사은과 책임
- 주님 따라가는 단일 소망은 뒤를 돌아보면 갈 수 없는 길, 그것이 가족에 대한 마지막 책임일지라도
- 주님 따라가는 단일 소망은 앞으로만 달려가야 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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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설교)
누가복음 9:51-62
찬송가 136장을 한번 펴보실까요? 여기 후렴에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띄워 여기 이 언덕이 뭐라그랬습니까? 백목사님 생전에 가장 많이 부른 찬송중에 하나가 이 136장입니다. 5장을 많이 하셨고 137장을 많이 하셨고 또 136장도 백목사님께서 굉장히 많이 하신 찬송입니다. 여기 언덕이 무엇이 언덕입니까?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띄워. 창파는 푸른 바다입니다. 언덕이 뭡니까? 언덕을 떠나라. 언덕은 뭐라고요? 언덕은 자기를 떠나라 그말이고 또 자기속에 있는 기존지식 선입적인 관념 자기 중심 또 피조물 세계 말하자면은 갇혀 있는 감옥을 벗어나라 그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그 은혜의 세계 속으로 구원의 도리의 세계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떠나라 벗어나라 그말입니다.
이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수없이 많이 말씀드린건데 우리 신앙생활은 구원이 목적이고 구원을 이루어가는게 신앙이고 그러면 구원이 무엇이냐. 구원이 무엇입니까? 구원은 무엇이 구원입니까? 자 고개를 들고 학생들 어깨를 펴고 앞에를 쳐다봅니다. 필기하는 분들은 필기하지만은. 구원이 무엇이 구원인가요? 이거는 제가 여기서 아마 수백번도 더 말했을것같은데. 구원이 무엇이 구원입니까? 구원은 자기가 변화되는 것. 자기 변화. 자기를 고쳐서 온전한 자기 온전한 사람을 만드는게 구원입니다. 자타의 구원이라 그럴때 자기와 다른사람의 구원이라 그말인데 구원은 자기 구원이 먼저고 그다음 다른 사람의 구원이라 그말은 자기가 구원이 된 것만큼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가 있지 자기가 모르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은 자기 구원이 우선입니다. 내가 된 것만큼 다른 사람을 만들 수 있습니다. 세상에 훈련시키는 것, 공부하는 이런것은 말하자면 운동선수들 운동하는 그런 감독들 또 사람이나 동물을 훈련시키는 그런 조련사들 그런 사람들이 자기는 그 선수들만큼 못합니다. 그래도 그들은 훈련을 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가 안되면 다른 사람을 바꾸지를 못합니다.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이거는 절대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은 내 구원이 먼저고 내 구원이란 것은 나라는 사람이 자꾸 고쳐져서 어제는 낙제점으로 사람으로 말하면 점수로 따진다면 30점짜리 밖에 안되었던 내가 1년 예수 믿고 나니까 40점짜리가 되고 또 한 10년 믿고 나니까 50점짜리가 되고 또 한 20년 믿고 나니까 60점짜리가 되고 그래가지고 믿은 세월이 오래 갈수록 그 사람이 점점 말이나 또 행동이나 마음가짐이나 그의 모든 사리판단이나 비판평가나 또 취사선택이나 모든 사람 상대하는 모든 생활들 그의 인식이나 가치관이나 그 모든 것들이 점점 변화가 되어져서 사람이 자꾸 변화가 되는 겁니다.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리되면 자기 스스로 생각할 때 자기는 죄인이 됩니까 의인이 됩니까? 사람이 점점 성화가 되어서 거룩하게 변화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면 자기 스스로 자기를 돌아볼때는 자기는 점점 죄인됩니까 의인됩니까? 성경에 보면 어찌됩니까? 자기는 점점 죄인이 됩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점점 의인이 되고 거룩한 사람이 되고 자꾸 존경스러운게 자꾸 많아지고 본받고 따라가고 배우고 싶은게 많아지는데 자기 스스로는 자기를 돌아볼때 자꾸 죄인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실질적으로는 자기는 자꾸 변화가 되어서 죄없는 사람이 더 되어져가는데 자기 스스로는 자꾸 더 죄인이 됩니다. 그게 겸손으로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니까 잘 믿어갈수록 올라갈수록 겸손하기 위해서 그래서 겸손을 나타내기 위해서 나는 죄인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고등외식자입니다. 그러지 않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볼때는 자꾸 깨끗해지는데 왜 자기가 볼때는 점점 더 많은 죄인이 되어집니까? 왜 그렇습니까? 사도바울이 나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자다. 그말은 그냥 겸손의 말이 아닙니다. 그게 사도바울이 보는 자기 모습입니다. 왜 그리됩니까? 점점 변화가 되어져 갈수록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하나님과 가까워질수록 점점 눈이 밝아집니다. 눈이 밝아지니까 옛날에 어두울때 안보였던 죄가 자꾸 많이 보여지니까 하나님앞에 가까이 갈수록 실질적으로는 점점 의인인데 자기 눈에는 자꾸 죄가 많이 보여집니다. 그래서 자꾸 죄인이 더 되어지고 그러니 더 조심하고 더 겸손하고 더 열심히 매달리고 그런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게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일은 한계점이 있어서 절정이 있어서 이만큼 올라갔으니까 됐다 이게 있는데 우리 신앙생활은 그게 없습니다. 언제가 그 정점이냐 하면 사도바울의 정점은 언제였습니까? 감옥에 들어가서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집행날짜 받아놓고 그때가서 이제야 내가 나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믿음을 지켰다. 그래서 남은 것은 의의 면류관만 남았다 이제는 세상 끝이 다 되었으니까. 그전까지는 늘 죄인입니다. 올라가기만 하지 멈추는 것도 없고 내려가는 것은 더 없는 겁니다. 무엇이 그렇다는 말입니까? 무엇이 올라가기만 하고 멈추지도 않고 내려가는 것이 없다는게 무엇이 그렇다는 말입니까? 무엇이 그렇다는 말인가요? 자기를 돌아보고 고치는 그 생활이 쉬지않고 끝이 없이 올라간다 그말입니다. 이게 우리 구원입니다.
자기를 고친다는 것은 기준이 있습니다. 잣대가 있고 모든 것이 옳다 그르다 할때는 옳은 것도 기준이 있고 틀린 것도 기준이 있습니다. 무엇이 틀렸느냐? 옳다는 그런 정의가 없으면 틀린 것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이 있기 전에는 뭐가 없다고요? 율법이 있기 전에는 죄도 없는 겁니다. 율법이란 것은 죄를 정하는 기준이 되는 겁니다. 죄라는 것은 법이 있을때 죄가 있는거지 법이 없으면 죄가 없는 겁니다. 도둑질을 해도 법을 정하기를 도둑질을 해도 100만원어치 밑으로 도둑질하는 것은 괜찮다고 법을 정해놓으면 999,000원까지는 죄가 안되지요. 법을 그래놓으면. 그게 세상의 모든 법입니다. 그러니까 옳다 그르다는 것은 정죄하는 그런 그 옳고 그름의 기준이 있습니다. 나를 나라는 사람을 고쳐야 되는데 바른 사람을 만들어가야 되는데 나를 고치는 기준이 누구냐? 기준이 무엇이냐? 기준은 주님이 기준이고 예수님이 기준입니다. 기준이고 그 기준을 향해 나아가는 목표 향해 나아가는 잣대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 이 말씀은 법이지요. 규칙입니다. 성경에 명문되어 있습니다. 또 성경에 명문안된것은 양심을 써보면 다 안다 그랬습니다. 우리 속에 신앙양심이 있으니까.
그래서 이 말씀을 가지고 나를 말씀대로의 사람으로 점점 고쳐나가는게 신앙이다. 그러면 가슴에 손을 얹고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시지요? 나는 오늘까지 예수 믿으면서 나를 얼마나 고쳤느냐? 하나님 앞에 내 평소의 나의 생각 나의 성격 나의 취미 나의 욕심 내 감정 좋을때는 누구나 다 좋습니다. 그런데 감정이 폭발할 그때에 옛날에는 예를 들면은 누가 나한테 내 성질 성미 건드리는 말 한번만 하면 폭발했는데 예수 믿고 나니까 아 이거 좀 참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한 1년 믿고 나니까 1년 정도 바로 믿고 나니까 나를 건드리는 말이 한 두세마디 나와도 참습니다. 그러면 그만큼 변화가 된겁니다. 옛날에는 억울한 소리 한번 들으면 못 견디고 사생결단하고 함께 싸웠는데 예수를 한 1년 믿고 나니까 이제는 억울한 소리 해도 그것을 사실 확인은 하고 밝히기는 밝히되 거기 대해서 막 화를 내고 분을 내고 이러지는 않고 차분하게 감정보다는 이성적 대응을 하는 사람으로 바꾸어졌습니다. 그러면 그게 변화가 되어진 겁니다. 그래가지고 모든 면을 우리의 수도없이 많은 모든 면을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고쳐나가는게 신앙이고 이게 구원이다. 이런걸 합리적이다 이성적이다 지성적이다 그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감정이란 것은 그거는 분위기를 만들때 마음을 좀 일으킬 필요가 있을때 그럴때 써먹는게 감정이지 감정이 이성보다 앞서면 반드시 사고를 치게 되어 있습니다. 고쳐야 됩니다 그런것은. 그래서 구원이란 것은 우리 자신을 고쳐서 온전한 사람 만드는 것이 구원이다. 그 잣대는 말씀이다. 그 말씀은 내 주관이 아닙니다. 객관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라는 게 있어서 주관이 있어서 객관이 그 주관속에 들어오지 못하면 항상 그 주관에 갇혀 있습니다.
자주 말씀드리는데 사람하고 대화를 해보면 말을 하면 그 말을 같은 말을 아무리 해도 안 듣습니다. 자기한테 필요한 말만 듣고 상대방의 말을 안 듣는다 그말이지요. 그게 체질적으로 성향적으로 그래가지고 그런 말이 안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관이 굉장히 강한 겁니다. 그 주관을 깨고 그것을 벗어나기 전에는 그 면으로 구원이 이루어지질 않고 그게 안 고쳐집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은 자기가 또렷하게 살아있는 동시에 주님을 따라갈 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첫째 뭐하라 그랬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첫째 뭐해야 됩니까? 주님을 따라가려 할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내 제자가 되려거든 혹시 좀 내용이 다를지 모르겠습니다만은 같은 의미인데 첫째는 뭐라고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그다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마태복음 거기 나옵니까 16장인가 거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은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자주 말씀드리지만은 우리 교인들은 자기가 굉장히 강합니다. 자기 부인을 좀처럼 못하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참 신앙들이 좋은데 어느 한순간에 가면 자기에게 딱 막혀서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게 많습니다. 이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게 무슨 말인가 내가 그런 것이 아닌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면 바로 그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나는 저러지 않다고 생각되면 자기가 그런 사람인줄 알아야 됩니다. 그 자기를 부인해라. 언덕을 떠나라 자기를 부인해라. 신앙생활에 대한 말씀에 대한 기존지식 자기 속에 자기 주관대로 들어와있는 그 지식 선입적 관념 그것을 뽑아내지 않으면 말씀이 들어가지를 아니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디에 가서나 무슨 일을 만날때든지 어떤 일을 취사, 취사라 말은 취하고 버린다는 말이지요. 선택하는 것. 어떤 일을 판단하는 것. 또 모든 일을 행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을 가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게 나한테 유익이냐 손해냐 이 사람이 나하고 가까우냐 머냐 내가 좋으냐 나쁘냐 이거는 인본입니다. 그걸 가지고 선하게 모든 일에 판단하면 그거는 비양심입니다. 모든 일을 판단할 때 기준은 이것이 옳으냐 그르냔데 그래서 제가 어떤 일들을 두고 말씀드릴때 감정을 다 배제하고 자기 감정 다 배제하고 또 손익을 다 떠나서 말씀을 가지고 따져서 옳고 그름을 먼저 따져보십시다 그리 말합니다. 옳으냐 그르냐 말씀을 가지고 옳으냐 그르냐를 따져봐야 됩니다.
이 설교 강단에 목사가 서지 않고 반사 선생님이 설교를 하면 그 선생님이 나이가 젊으면 어리면 교인들 중에 잘 믿고 잘 아는 교인들은 예배 시간에 눈을 감고 비스듬하게 예배 태도가 딱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굉장히 진노하실 태도입니다. 누가 섰든지 여기 섰으면 하나님의 대언잡니다. 그걸 그 사람의 나이를 보고 외모를 보면 인본입니다. 그게 바로 인본입니다. 그거 보지 말고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아니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은 인간은 외모봅니다. 그래서 학벌이 좋으니까 서부교회 교인들의 대다수가 그 담임목사님 초청할 때 그 목사님이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한국에서 유명한 박사 그 간판 보고 그 목사님을 초청해서 모셨는데 오늘날 서부교회 모습은 백목사님 노선에서 완전히 탈선했습니다. 다 벗어나버렸습니다. 본인들은 그 속에 있으니까 모릅니다. 간판보면 인본입니다. 인본을 보는 결과는 인본으로 가는 겁니다. 설교강단에 설교하는 사람이 나이가 어리든 못났든 여반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뭘 봐야됩니까? 그 전하는 말씀을 따져봐야 됩니다. 말씀을 들어보니까 말씀이 틀렸네. 그러면 목사가 설교해도 들을만한 가치가 없는 겁니다. 미국에서 유명한 목사님이 빌리그리암 아마 그분인가 모르겠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부흥사가 한국에 와서 수십만명 모아놓고 설교했습니다. 설교하는데 백목사님 판단은 우리 교회 주일학생보다 못하다 그랬습니다. 백목사님은 실없는 말씀하는 분이 아닙니다. 강조하는 게 아닙니다. 내막을 들어보면 그때 주일학생들 중에서 그 세계적으로 유명한 부흥사보다 설교하면 잘 할 주일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허무하다 그뜻입니다.
그러니까 간판보고 들을 게 아닙니다. 들어보고 말씀이 성경에 어긋나면 들을만한 가치가 없고 틀렸으면 더한 것이고 누가 전하든 말씀이 맞으면 그게 바로 은혭니다. 말씀의 은혜. 그래서 감정기분에서 떠나서 뭐에다 굳게 세웁니까? 믿으라 믿으라 감정기분에서 떠나 어디에다 굳게 세워요? 말씀에다 굳게 세워. 말씀에 굳게 세웁니다. 사도바울이 아시아를 떠나면서 그 교인들에게 그 교인들을 두 군데 부탁했습니다. 어디어디 부탁했습니까? 내가 지금 너희를 주님에게 부탁한다 또 하나는요? 말씀에 부탁한다. 내가 지금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에 말씀에게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워서 거룩히 하심을 입은 자 가운데 얻을 기업을 얻게 하시리라. 말씀이라야 됩니다. 그 말씀은 이치고 이치는 들어보면 압니다. 논리를 따져보면 옳으냐 그르냐가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안듣고 안따져보면 죽는날까지 믿어도 믿는 세계는 모르는 겁니다. 신앙이란 것은 말씀이 전붑니다. 그 말씀의 기준은 성경이고 그 성경속에 알맹이는 무엇입니까? 성경의 알맹이는 무엇입니까? 말씀의 기준은 성경이고 성경의 알맹이는요? 예수님의 대속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우리 구원이고. 이러니까 들어보면 아는 겁니다. 그럴때 우리가 이걸 따질때 자기를 부인해야 됩니다. 이미 내가 알고있는 것. 내가 생각하는 것. 내 속에 있는 것. 이걸 가지고 막아놓고 암만 들어도 안들립니다. 이걸 놓고 그래서 사람과 사람 판단할 때 일단 한 걸음 물러나서 두 사람이 문제가 생기면 두 사람은 갑과 을은 서로 자기 주장하니까 원고는 원고주장 피고는 피고주장 할꺼니까 판사가 나서서 양쪽 말 다 들어보고 판결합니다. 갑과 을이 문제가 생기면 갑은 자기 말만 하는 겁니다. 을은 자기 말만 하고. 그러면 병이 나서서 갑 너는 니 말하고 을 너는 니 말하니까 두 사람이 평행선 달리는데 제 3자는 두사람에게 있는 그 주관이 없으니까 객관적으로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생각을 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하자 이것이 다른 사람이 나를 판단하기 전에 내가 나를 부인하고 내가 객관이 돼서 나 스스로를 판단할 수 있어야 그게 신앙생활이 되는 것이고 옳은 걸 찾아갈 수가 있는 것이지 항상 자기라는 사람은 자기한테 갇혀있고 다른 사람은 나를 예를 들면 이렇게 보는데 나는 다른 사람이 보는 내 모습을 내가 보지 못하면 그게 바로 주관입니다. 소경입니다 그면으로는. 그러면 못 고칩니다. 보여야 고치지요. 병이라는 것이 큰 병은 알아도 못 고치는데. 몰라서 원인 몰라서 못 고치는 병이 대부분이고 불치병은 알아도 현대의학이 못 고치는 게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인간병은 알아야 고치는데 원인조차 모르면 못 고칩니다. 근데 그 모르는 것이 다른 사람이 보면 압니다. 자기는 모릅니다. 큰 병입니다. 그게 주관입니다. 근데 그 자기 모르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말을 해주면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입니다. 인정을 안 합니다. 그리고 그게 무슨 말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 면으로 늘 신앙이 늘 보면은 불구적인 신앙 치우친 신앙 기형적인 신앙 그런 신앙으로 되어있는게 많습니다. 이게 참 오늘 본 설교와 다른건데 이거 좀 깊이 깊이 좀 생각해야 됩니다. 신앙은 구원은 나를 고치는게 구원이다. 연보 많이 하는 것, 성경 많이 읽는 것, 기도 많이 하는 것, 다 중요하고 좋은 겁니다. 그런데 그런 거 아무리 해도 자기를 안 고치면 그거 전부다 헛일입니다. 해봐도. 자기를 고쳐야 그 모든게 가치가 있고 그게 다 필요하게 되는 겁니다. 나 고치는 게 신앙입니다. 자신을 고치는게. 그러면 나 고치는게 신앙이면 내가 어디가 틀렸느냐? 나의 무엇이 잘못되었느냐를 말씀을 가지고 살펴봐야 됩니다. 그래야 구원이 이루어지고 자기를 고칠 수 있는 겁니다. 좀 깊이 좀 생각해보십시다. 이거는 뭐 항상 하는 말씀이고 끝도 없는 거니까.
자 여기 본문에서 거기 하나 더 빠진 거 좀 덧붙이면은 자기 고치는 거기에 오전에 빚지고 돈 모으는 예를 들었는데 사람이 희로애락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좀 다른 이야긴데, 어떤 신문에서 본건데 공직에 있다가 퇴직을 했는가 그랬는데 이분이 조용히 살고싶어서 서울 변두린가 어디 마을로 좀 조용한 곳으로 이사를 갔답니다. 이사 갔는데 이사 가서 첫날 자기 집앞에 골목에 보니까 악취나는 쓰레기가 골목 한가득 가득 들어있더랍니다. 아무도 안 치우더랍니다. 몇 날 며칠 지나도. 그래서 이분이 백리터짜리 쓰레기봉투를 자기 돈 들여가지고 사가지고 그걸 가따가 분리수거를 해가지고 싹 다 치웠답니다. 자기 돈 들여서 자기 노력으로 다 치웠답니다. 다 치우고 나니까 며칠 지나고 나니까 또 그래 또 모이더랍니다. 또 치웠답니다. 그래가지고 한 서너번 다 치우고 나니까 그다음부터는 골목이 깨끗하게 되더랍니다. 안 믿는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안 믿는 사람이 하는 일. 믿는 사람은 그보다 더 할 수 있는 희생이 복음 위해서라면 필요하면 해야 되겠지요. 예배당 청소할 때 제가 일주일에 한 두세번 이야기하니까 한번만 해도 됩니다 할때 제가 생각이 그 생각이 자꾸 났습니다. 예배당 주변 청소할 때 주변에 피해만 안되면 매일 새벽마다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래는 못해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하면 좋겠다 싶은데 한번만 해도 충분합니다 그런 말씀들 하실 때 제 마음속에 안 믿는 사람도 자기 돈 들여서 골목길을 그렇게 다 청소해서 새 동네를 만드는데 교회가 주변에 피해를 본의 아니게 끼치는데 새벽 일주일에 한두번 정도 세사람이 나가서 5분만 하면 요동네 깨끗해집니다 요 주변에. 제 혼자 나가서 주일날 새벽에 쓸면은 한 15분정도 20분정도 걸리면 어지간한 쓰레기 많지 않으면 깨끗하게 치웁니다. 그런데 한 세 사람이 나가서 5분만 하면은 요 주변 다 깨끗하게 됩니다. 그거 일주일에 두 번만 하면은 요 주변이 깨끗해지고 그 노력이 앞으로 우리 교회에 어떤 이점으로 돌아올지 모릅니다 복음 운동에. 그런데 다른 뜻도 있겠지만은 그걸 말할 때 한번만 해도 됩니다 그럴때 그 생각이 나더라 그말이지요.
좀 다른 경우였는데 사람이 천국을 누가 만드느냐? 천국을 자기가 만듭니다. 지옥을 누가 만드느냐? 지옥을 자기가 만듭니다. 어떤 사람이 그 집에 가면 그 교회 가면 그 모임에 가면 그 모임이 천국이 되고 천국된 거기에 그 사람이 빠져나가고 또 한 사람이 들어가면 그 모임이 지옥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그 모임에 가면 그 모임이 점잖은 그런 모임으로 변화가 되고 어떤 사람이 그 모임에 가면 그 모임이 타락해서 난잡한 그런 모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은 다 사람에 따라 되는 겁니다. 병이 들어서 곧 죽을 병이 들어도 얼굴에 웃음꽃이 피고 남에게 부담을 안주려는 그런 사람도 있고 눈꼽만큼 아파가지고 손가락만 살짝 베여도 온 집안 식구를 못살게 만드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 자기라는 사람에 달린 겁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냐. 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 끼치는 것은 열가지 백가지를 끼쳐도 하나도 기억이 안나고 남이 나한테 피해 끼치는 것은 한번만 피해를 입으면 평생 깽아리라 그러죠. 깨갱이를 딱 가지고 딱 걸어가지고 그걸 마음속에 담아놓고 평생 안 잊어버립니다. 자기 중심입니다. 내가 남에게 피해 끼친것은 열 번 백번을 끼쳐도 내가 그랬는가 기억이 없고. 네로가 그랬다 그러지요 네로가. 수많은 사람을 잡아죽이고 제 손이 베여서 피가 나니까 눈물 흘리니까 내 몸에서 피가 난다 그게 진짠지는 모르지만은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악한 인간 중에 악인입니다. 그게 가장 큰 악입니다. 내가 남에게 피해 끼친 것은 하나만 작은 걸 끼쳐도 잠을 못잘만큼 내가 남에게 피해를 끼쳤다 손해를 끼쳤다 힘들게 만들었다 그리 되야 되고 남이 나한테 피해끼친 것은 사람이 그럴 수 있지. 열 번 백번을 피해끼쳐도 다 품을 수 있는 그게 그것이 주님을 따라 가는 길입니다. 그게 신앙의 길이고. 그러면 나는 어떤가? 나라는 사람은 이 말씀을 가지고 보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자기 스스로를 살펴봐야 되는데 그런데 자기중심의 사람은 남에게 피해 끼친거는 모르고 자기 피해 입은거만 아는 그 사람은 자기를 돌아볼 줄 모릅니다. 그러니 큰 문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은 첫째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두 번째는 뭐라고요? 자기를 아는게 신앙입니다. 자기 모르면 신앙생활은 없는 겁니다.
본문에 잠깐 들어가보시겠습니다. 여기 본문에 보면 크게 두 단락으로 되있는데 세가지를 말씀드린 겁니다. 크게 말하면 두 단락인데 하나는 뭐냐?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을 하셨다 요걸 하나로 따로 땠는데 그 다음에 같이 연결됩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은 신앙생활할 때 항상 자기를 새롭게 하는 결심이 필요하다.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로 살기를 결심하고 어제보다 좀 더 나를 고쳐 온전한 사람 만들기를 결심하고 그래서 좀 어제보다 좀 더 게으름을 버리고 좀 부족함을 채우고 좀 더 열심히 살고 좀 더 나은 자기를 만들기 위해서 쉬지않고 자기를 살펴서 굳게 결심하는 신앙의 결심이 중요하다. 같이 한번 해보실까요? ‘결심’ ‘결심’. 결심이라 말은 마음을 다 잡는다 그 뜻입니다. 마음을 다 잡아서 나는 예배시간에 많이 존다고 목사님한테 지적을 많이 받았다. 이제는 예배시간에 한번 안 졸아봐야되겠다 마음을 다지면 그것도 결심입니다.
우리 중간반 학생들 주일학생들은 예배시간에 앉았다가 예배 보다가도 보면은 자주 나가고 예배당에 찬송하다 나가고. 볼일보러 나가겠지만은 예배당에 앉아있으면 찬송준비할때쯤되면 밖에 안 나가야 되고 예배시간에는 휴대폰을 받는게 아닙니다. 세상에 저는 예배보다가 휴대폰 받는 사람 보면 저는 도무지 이해를 못합니다. 저는 어지간히 이해성이 넓고 이해성이 넓다고 저는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어느 정도 사람들에게. 안 그런 면도 있지만은. 그런데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것중에 하나는 예배 보다가 전화받으러 나가는 분들 어른들도 있습니다. 여기 보면 다 보이거든요? 장년반들도. 세상에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다가 전화를 받아? 상식적으로 도무지 저는 상상을 못할 일입니다. 제가 오늘까지 모태신앙부터 믿어오면서 여기서 그 모습 처음 봤습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서. 서부교회. 시골에는 뭐 휴대폰이 없었으니까. 옛날에 또 없었으니까 그렇겠지만은. 예배보다가 휴대폰 받으러 나가는 모습을 여기서 처음 봤습니다. 그거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배 시간에 앉았다가 자주 들락날락했는데 이제는 내가 좀 그거는 안해야 되겠다 끊어야 되겠다. 이런것도 작정 결심을 하는 겁니다. 결심할 게 한가지 두가지 겠습니까? 굉장히 많지요.
신앙생활에 굳게 결심하시니라 중요합니다. 이것이 연결되는데 예수님께서 어디를 향해 가신다고요? 학생들? 예루살렘 향해 가십니다. 어디를 거쳐 가려 그랬습니까?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는데 어디를 통과하려고 했습니까 처음에? 사마리아인의 한 촌을 통과하려고 그랬습니다. 그랬는데 그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했다고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동네로 못 지나갑니다. 막았습니다. 왜 막았습니까? 사마리아인하고 유대인들은 서로 적대관계처럼 그리되어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런 유대인을 굉장히 싫어했고 그래서 아주 사이가 안좋아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니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야고보 요한이 감히 우리 선생님을 배척을 해? 어떤 분인지 맛을 보여주지. 하늘에서 불을 명해서 내려와서 이놈들 모조리 다 태워버리라고 할까요? 자비입니까 무자비입니까? 무자비이지요. 잔인입니다. 내 마음에 안드니까. 나를 해꼬지 하니까. 나를 때리니까. 나한테 피해입히니까. 나도 같이 너희들 너는 나 한 대 때렸으니까 나는 두 대 때리지. 너는 나를 손바닥으로 때리면 나는 너를 주먹으로 때리지. 너는 나를 손으로 때리면 나는 너를 발로 차버리지. 그게 무자비입니다. 세상법이고 지옥의 법입니다. 그래 말하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다고요? 혼을 냈습니다. 틀려먹었다. 그거는 안 믿는 사람의 법이지 내 법은 그게 아니다. 그래가지고 공연한 마찰을 피해서 다른 마을로 돌아서 가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운 것이 하나님의 능력, 불을 명해서 하늘에서 내려와서 태우면 이게 능력 아닙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어떤 사람에게 온다고요? 그 능력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되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싶어서 복을 주시기 위해서 부모님이 실력있는 부모님은 재산을 많이 가졌든지 자녀에게 주고 싶은게 많은 부모님은 자녀에게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고 속이 탑니다. 내가 지금 이만큼 많이 가졌는데 저 아이에게 좀 줘서 맡겨야 되겠는데 줬다가는 다 까먹어버리고 줬다가는 저걸 가지고 난리를 칠꺼니까 못주는 겁니다. 안타깝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우리 통해서 나타내서 하나님의 영광 드러내기를 얼마나 소원하고 계시는데 그럴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도 보면 잘못보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이 세상에는 학벌이 높은 사람 언변 좋은 사람 실력 있는 사람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 넘칠만큼 많습니다. 모든 면에. 믿는 사람 중에서도 인물도 좋고 학벌도 좋고 말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또 실천력도 있고 의지도 강하고 끈기도 있고 추진력도 있고 이런 사람이 꽉 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걸 보면 도무지 하나님이 붙들고 쓰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안 보이는가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런 교회들 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있는 것 같은데 들어가보면 아니고 그러니까 잘난 사람들이 믿음 가지고 잘하면은 일을 열배 백배는 할건데 그런 사람은 다 자기 주관으로 가버리고 못난 사람 붙들고 하나님께서 하시려니까 참 어렵지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감당할만한 실력만 되면 그래서 우리 반사 선생님 구역장도 그렇습니다. 학생을 보내줄 그만한 사람이 되야 보내주지 학생을 보내줄 사람이 안됐는데 보내줄 수가 있겠습니까? 복을 주고 싶어도 복을 주면 그 복에 갇혀서 하늘의 복을 던져버리던지 그 복에 치여서 큰 낭패가 날거니까 복을 주고 싶어도 못 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능력은 감당할만한 사람이 되야 주지 감당할만한 사람이 안되면 안되는 겁니다. 사람이 되는게 중요하다. 그러니까 일자리가 없다. 돈이 없다. 뭐가 없다. 전부 핑곕니다. 사람만 되있으면 지금도 필요한 인물은 인재가 없어서 세계 곳곳에 다 돌아다닌다 그러지요 인재가 없어서. 우리가 그걸 찾을 건 아니지만은. 하나님 앞에 사람만 되면 그 사람을 통해서 뭐든지 다 할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못하는 겁니다. 탄식입니다.
그 사람이 되는 결정적인 두가지 요소가 뭐냐? 첫째가 뭐라고요? 첫째가 뭡니까? 사람을 사랑하는 겁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은 사람을 아끼는 겁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요소가 사람을 아끼는 거. 그래서 성경에 위대한 인물은 하나같이 보면은 사람을 다 아꼈습니다. 아브라함도 롯을 그렇게 아꼈고. 다윗도 솔로몬을 참 아꼈고. 요셉도 사람을 참 아꼈고. 또 예수님 육신의 부친 요셉도 사람을 참 아꼈고. 사도바울도 그랬고. 성경에 위대한 인물은 사람을 굉장히 아낍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겁니다. 사랑하고 그다음에는 자기를 바로 아는 겸손입니다. 이 두가지를 가질때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된다. 이게 전부는 아니지만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두가지다 그리 볼 수 있습니다. 요걸 여기 크게 하나 말씀을 하고.
그다음에 크게 두 번째는 소망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가시니까 어떤 사람이 주님에게 찾아와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럴때 이 사람의 말이 좋은 말이고 좋은 소망입니다. 주님을 좇겠습니다 그 말은 주님을 따라가서 주와 같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아주 좋은 소망입니다. 그 소망을 말씀하실 때 본문에서 주님이 세가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네가 나를 따라오고 싶으냐. 나를 따라와서 나에게 와서 나처럼 되고 싶으냐. 주님같이 되고 싶으냐. 그러면 첫째는 뭡니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 그말은 나를 따라오고 싶으냐 가장 먼저 조심할 것은 뭘 하지 마라고요? 자기 위한 생애는 절대 금물이다. 나를 따라오고 싶으면 너 자신을 완전히 부인을 해야 된다. 자기를 위한 생애가 있으면 주님은 따라가지 못합니다. 참 어렵습니다. 천하 모든 사람이 다 자기 중심이고 자기만 위해서 사는데 이게 모든 사람인데 여기에 역항적으로 완전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아닌 하나님과 하나님 원하시는 인간 구원을 위해서 자기 한 몸 완전히 불살라 버리는, 십자가 지는 이 자세가 아니면 주님을 따라갈 수가 없다는 것을 첫째로 말씀했습니다. 그리 살 수 있겠습니까? 그리 사셨습니까?이게 주님 가신 걸음이고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이 걸어갈 걸음입니다. 우리들이 걸어가야 될 걸음입니다. 그런데 이런 걸음을 걸어가기 위해서 말 한 마디도 어떤 일 하나도 침 한번 삼키는 것도 눈 한번 깜빡이는 것도 자기 위해서는 할 수 없는 게 주님 가신 걸음인데 이 걸음을 걸어가는 우리들이 나를 좀 위하지 않는다고, 나 높여 주지 않는다고, 나 드러내서 영광스럽게 하지 않는다고, 나한테 억울한 누명을 씌운다고, 애매한 소리 한다고, 나 듣기 싫고 속 썩이는 말 한다고 분을 내고 시험에 들고 분을 삭이지 못하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주님 따라가는 길과 천리 만리 거리가 먼 겁니다. 너 자신 위한 생애는 하나도 할 수 없다, 예를 든 겁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집이 있고 다 그리 살지만 인자는, 주님은 머리 둘 곳이 없다,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다 당신 자신 위한 생애는 하나도 없다, 이는 주님이 가신 길이고,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서 주와 같이 되는 소망을 이루려면 먼저 요걸 가져야 합니다. 나를 위한 생애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먹어도 입어도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다, 이게 성도의, 구속 받은 성도의 걸음입니다. 어렵지만 걸어가야 되고 가는 분들은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는 주님이 어떤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라 하시니까 그 사람이 내가 먼저 가서,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마는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해 주옵소서 부친 장례는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사은의 마지막입니다. 마지막 사은, 사람이 사람인 것은 은혜를 알기 때문에 사람입니다.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갚는 생활을 사은이라 그러는데 사은 중에 가장 큰 사은은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것입니다. 임금님 섬기는 것보다 스승 존경보다 가장 먼저 할 일이 부모님께 효도입니다. 이 효도의 마지막이 부모님 장례입니다. 그래서 부모 장례를 아무리 간소하게 해도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어서 정성껏 장례를 치르는 게 부모님에 대한 사은의 도리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장례하고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그거는 죽은 자들이 하는 것이다,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 이 너라는 사람은 그러면 어떤 사람이라 말입니까? 이걸 지금 논리적으로 안 들으니까 자꾸 잠이 오지요. 나를 따라 오라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나로, 먼저라는 말이 있습니다. 먼저, 주님 따라가는 것보다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 대답이 그 할 일을, 먼저 할 일이니까 그 할 일이 뭐냐? 세상에 학교를 가야 됩니다, 학원을 가야 됩니다, 도장을 가야 됩니다, 출근해야 됩니다, 계약이 있습니다, 뭐 해야 됩니다, 그거는 아주 시시껄껄한 것이고 사람이 가장 아무도 반대할 수 없는, 사람의 탈을 쓰고 가장 중요한 아버지 장례입니다, 이거 반대하면 천하가 다 몹씁 사람이라 하겠지요. 그거는 반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버지 장례도 주님 따라가는 게 먼저고 그걸 위해서 하는 것이지 주님 따라가는 것 빼놓고 아버지 장례가 우선이면 주님 따라가는 것은 못한다, 그거는 죽은 자들이 하는 거다. 그러면 이 사람은 어떤 자라는 말입니까? 산 자라 말이지요? 산 사람은 어떤 사람을 산 사람이라 합니까? 성경에 산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택함 받고 중생된 사람, 믿는 사람, 여기 있는 우리는 산 사람 아닙니까? 주님의 대속을 입어서 중생된 산 사람, 너는 주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너 대신 주님이 죽으시고 그 죽음으로 너를 살려 준, 너는 죽음으로 빚진, 생명의 빚을 진 너다, 그렇게 살아야 할 너니까 그 대속의 공로 받지 못한 죽은 자들과는 다르다, 그러니 주님 따라가는 일을 먼저 하지 않고 다른 걸 먼저 하는 것은 죽은 자들이 하는 것이고, 대속을 받은 너는 그 사은이 첫째니까 주님 따라가는 그 일이 먼저고 그 일에 필요하여 장례도 치르고 그 일을 위해서 장례도 치르는 것이지 이것 끊어 놓고 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 따라가는 일, 말하자면 우리 소망입니다. 주님 같이 되는 소망, 이 소망보다 앞세울 것은 없고 이 소망보다 먼저 할 것이 없고 이 소망을 제쳐 놓고 세상에서 할 일은 없다는 것을 여기서 하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또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주를 따라가겠습니다마는 나로 먼저, 여기도 먼저가 나옵니다.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가족은 책임이지요. 사람의 가장 큰 두 가지가 하나는 사은이고 하나는 책임인데, 책임 중에는 가정을 보살피는 책임이 가장 큽니다. 남반들은 잘 기억해야 됩니다. 남반들은, 가정을 책임진 남자가 가정을 바로 돌보지 않으면 불신자보다 더 악하니라, 성경입니다. 가정에 책임을 지는데, 가정에 대한 남자의 책임, 가족을 작별케,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가족을 작별해야 됩니다. 마지막 책임인데, 주님 말씀하시기를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쟁기가 뭔지 압니까? 쟁기는 앞에 소가, 소 뒤에 묶어 가지고 큰, 그 뭐라 그럽니까? 기역자로 된 것으로 밭을 가는 게 쟁기입니다. 소가 끌고 가고 뒤에서 막 푹 파서 소 힘으로 밭을 갈아나가는, 옛날에, 요즘처럼 경운기나 트랙터 이런 게 없을 때 소 힘으로 할 때, 사람 힘으로 할 때 그때 밭을 가는 게 쟁기입니다. 쟁기를 잡고, 그때는 소가 앞만 보고 가니까 앞만 보고 가는 것이지 뒤를 돌아보면 이게 막 옆으로 이상하게 되니까 안 되는 것이지요.
주님을 따라가는 그 걸음은, 하늘나라 향한 걸음, 주님 향한 그 걸음은 앞만 보고 가는 것이지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걸 말씀합니다. 신앙의 걸음입니다. 신앙은 전진이지, 피곤하면 쉬어갈 수 있고 그렇지만 뒤로 돌아보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할 것이다,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크게 첫째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되려면 사람이 되어야 된다, 그 사람이 되는 데는 사람을 사랑하고 겸손해야 된다, 크게 하나, 그 앞에 결심은 부수적인 것이고, 그 다음에 하나는 주님을 향한 소망, 단일 소망에 기억할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님을 따라가는 소망을 이루어 가는 데 하나는 자기 위한 생애는 절대 금물이다, 두 번째는 어떤 중차대한 일이라도 주님 따라가는 것보다 먼저 있을 수는 없다 앞설 수 없다, 세 번째는 주님을 따라가는 걸음은 앞만 보고 가는 것이지 뒤를 돌아보면서, 두고 온 재산이 아까워서 뒤를 돌아보다가 뭐가 되었다고요?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처럼, 그게 딱 그겁니다. 믿는 사람이 주님을 따라가다가 두고 온 돈이 아까워서, 뭐가 아까워서 뒤를 돌아보면 주님 따라가는 걸음은 걸어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앞만 보고 달려갈 것이다, 세 가지를 말씀했습니다.
우리 소망과 우리 소망을 향해 걸어가는 걸음이 어떤 걸음인가? 참 어렵고 어려운 걸음입니다. 그래도 이것이 좁은 길이고 생명길이고 우리들이 걸어갈 구원의 길이라 기억하고 힘을 써보십시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다. 이것이 과연 구름 잡는 말이냐?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냐? 세상 땅의 말이냐 아니면 과연 하늘의 복음이냐? 깊이 좀 생각해 보십시다.
제목: 기독자의 단일 소망
요점:
1. 자기를 부인하자
- 찬송가 136장의 후렴에서
- 언덕을 떠나는 것은 자기, 기존지식, 선입적 관념을 떠나는 것
- 구원은 자기를 고치는 자기 성화가 구원
- 자기를 고치는 표준은 주님, 기준은 말씀
- 자기를 고치려면 자기를 아는 것이 필수
- 자기를 모르면 고칠 수 없는 것, 따라서 신앙은 자기를 아는 것
- 말씀의 객간으로 자기 주관을 살피고 알아 고쳐야 할 것
2. 신앙의 결심
- 본문은 크게 두 토막으로 되어 있으나 세 가지로 공부
①신앙의 결심
②능력 있는 사람이 되려면
③단일 소망
- 신앙생활에 결심은 대단히 중요한 것
- 자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결심을 할 것
- 성경 읽기, 기도, 새벽기도, 아침 잠 등 실제 생활에서 결심을
3. 능력 있는 사람이 되려면
-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사마리아인들이 막음
- 야고보와 요한의 무자비한 대응-불을 명하여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 예수님은 저희를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심
- 능력 있는 사람이 되려면
①능력을 감당할 사람이 되어야
②그런 사람이 되려면 사람을 아껴 사랑하고, 겸손을 가져야
4. 단일 소망에 기억할 3가지
1)자기 위한 생활은 금물
-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 주님을 따라가서 주님같이 되겠다는 좋은 소망
-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 주님 따라 가는 길에 자기 위한 생애는 금물
2)대속의 사은이 모든 사은의 근본이며 원동
-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례케 허락하옵소서
-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 부친 장례는 사은의 마지막 생활이지만
- 주님 따라가는 단일의 소망이 아닌 사은은 죽은 자들이 하는 것
- 대속의 은혜로 산 자 된 우리는 대속의 사은이 근본이며 원동
3)주님 따르는 소망은 뒤를 돌아 보지 말아야
- 나로 먼저 가서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 가족 작별은 사람의 마지막 책임
- 사람의 두 가지 큰 도리는 사은과 책임
- 주님 따라가는 단일 소망은 뒤를 돌아보면 갈 수 없는 길, 그것이 가족에 대한 마지막 책임일지라도
- 주님 따라가는 단일 소망은 앞으로만 달려가야 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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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설교)
누가복음 9:51-62
찬송가 136장을 한번 펴보실까요? 여기 후렴에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띄워 여기 이 언덕이 뭐라그랬습니까? 백목사님 생전에 가장 많이 부른 찬송중에 하나가 이 136장입니다. 5장을 많이 하셨고 137장을 많이 하셨고 또 136장도 백목사님께서 굉장히 많이 하신 찬송입니다. 여기 언덕이 무엇이 언덕입니까?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띄워. 창파는 푸른 바다입니다. 언덕이 뭡니까? 언덕을 떠나라. 언덕은 뭐라고요? 언덕은 자기를 떠나라 그말이고 또 자기속에 있는 기존지식 선입적인 관념 자기 중심 또 피조물 세계 말하자면은 갇혀 있는 감옥을 벗어나라 그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그 은혜의 세계 속으로 구원의 도리의 세계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떠나라 벗어나라 그말입니다.
이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수없이 많이 말씀드린건데 우리 신앙생활은 구원이 목적이고 구원을 이루어가는게 신앙이고 그러면 구원이 무엇이냐. 구원이 무엇입니까? 구원은 무엇이 구원입니까? 자 고개를 들고 학생들 어깨를 펴고 앞에를 쳐다봅니다. 필기하는 분들은 필기하지만은. 구원이 무엇이 구원인가요? 이거는 제가 여기서 아마 수백번도 더 말했을것같은데. 구원이 무엇이 구원입니까? 구원은 자기가 변화되는 것. 자기 변화. 자기를 고쳐서 온전한 자기 온전한 사람을 만드는게 구원입니다. 자타의 구원이라 그럴때 자기와 다른사람의 구원이라 그말인데 구원은 자기 구원이 먼저고 그다음 다른 사람의 구원이라 그말은 자기가 구원이 된 것만큼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가 있지 자기가 모르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은 자기 구원이 우선입니다. 내가 된 것만큼 다른 사람을 만들 수 있습니다. 세상에 훈련시키는 것, 공부하는 이런것은 말하자면 운동선수들 운동하는 그런 감독들 또 사람이나 동물을 훈련시키는 그런 조련사들 그런 사람들이 자기는 그 선수들만큼 못합니다. 그래도 그들은 훈련을 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가 안되면 다른 사람을 바꾸지를 못합니다.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이거는 절대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은 내 구원이 먼저고 내 구원이란 것은 나라는 사람이 자꾸 고쳐져서 어제는 낙제점으로 사람으로 말하면 점수로 따진다면 30점짜리 밖에 안되었던 내가 1년 예수 믿고 나니까 40점짜리가 되고 또 한 10년 믿고 나니까 50점짜리가 되고 또 한 20년 믿고 나니까 60점짜리가 되고 그래가지고 믿은 세월이 오래 갈수록 그 사람이 점점 말이나 또 행동이나 마음가짐이나 그의 모든 사리판단이나 비판평가나 또 취사선택이나 모든 사람 상대하는 모든 생활들 그의 인식이나 가치관이나 그 모든 것들이 점점 변화가 되어져서 사람이 자꾸 변화가 되는 겁니다.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리되면 자기 스스로 생각할 때 자기는 죄인이 됩니까 의인이 됩니까? 사람이 점점 성화가 되어서 거룩하게 변화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면 자기 스스로 자기를 돌아볼때는 자기는 점점 죄인됩니까 의인됩니까? 성경에 보면 어찌됩니까? 자기는 점점 죄인이 됩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점점 의인이 되고 거룩한 사람이 되고 자꾸 존경스러운게 자꾸 많아지고 본받고 따라가고 배우고 싶은게 많아지는데 자기 스스로는 자기를 돌아볼때 자꾸 죄인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실질적으로는 자기는 자꾸 변화가 되어서 죄없는 사람이 더 되어져가는데 자기 스스로는 자꾸 더 죄인이 됩니다. 그게 겸손으로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니까 잘 믿어갈수록 올라갈수록 겸손하기 위해서 그래서 겸손을 나타내기 위해서 나는 죄인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고등외식자입니다. 그러지 않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볼때는 자꾸 깨끗해지는데 왜 자기가 볼때는 점점 더 많은 죄인이 되어집니까? 왜 그렇습니까? 사도바울이 나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자다. 그말은 그냥 겸손의 말이 아닙니다. 그게 사도바울이 보는 자기 모습입니다. 왜 그리됩니까? 점점 변화가 되어져 갈수록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하나님과 가까워질수록 점점 눈이 밝아집니다. 눈이 밝아지니까 옛날에 어두울때 안보였던 죄가 자꾸 많이 보여지니까 하나님앞에 가까이 갈수록 실질적으로는 점점 의인인데 자기 눈에는 자꾸 죄가 많이 보여집니다. 그래서 자꾸 죄인이 더 되어지고 그러니 더 조심하고 더 겸손하고 더 열심히 매달리고 그런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게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일은 한계점이 있어서 절정이 있어서 이만큼 올라갔으니까 됐다 이게 있는데 우리 신앙생활은 그게 없습니다. 언제가 그 정점이냐 하면 사도바울의 정점은 언제였습니까? 감옥에 들어가서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집행날짜 받아놓고 그때가서 이제야 내가 나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믿음을 지켰다. 그래서 남은 것은 의의 면류관만 남았다 이제는 세상 끝이 다 되었으니까. 그전까지는 늘 죄인입니다. 올라가기만 하지 멈추는 것도 없고 내려가는 것은 더 없는 겁니다. 무엇이 그렇다는 말입니까? 무엇이 올라가기만 하고 멈추지도 않고 내려가는 것이 없다는게 무엇이 그렇다는 말입니까? 무엇이 그렇다는 말인가요? 자기를 돌아보고 고치는 그 생활이 쉬지않고 끝이 없이 올라간다 그말입니다. 이게 우리 구원입니다.
자기를 고친다는 것은 기준이 있습니다. 잣대가 있고 모든 것이 옳다 그르다 할때는 옳은 것도 기준이 있고 틀린 것도 기준이 있습니다. 무엇이 틀렸느냐? 옳다는 그런 정의가 없으면 틀린 것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이 있기 전에는 뭐가 없다고요? 율법이 있기 전에는 죄도 없는 겁니다. 율법이란 것은 죄를 정하는 기준이 되는 겁니다. 죄라는 것은 법이 있을때 죄가 있는거지 법이 없으면 죄가 없는 겁니다. 도둑질을 해도 법을 정하기를 도둑질을 해도 100만원어치 밑으로 도둑질하는 것은 괜찮다고 법을 정해놓으면 999,000원까지는 죄가 안되지요. 법을 그래놓으면. 그게 세상의 모든 법입니다. 그러니까 옳다 그르다는 것은 정죄하는 그런 그 옳고 그름의 기준이 있습니다. 나를 나라는 사람을 고쳐야 되는데 바른 사람을 만들어가야 되는데 나를 고치는 기준이 누구냐? 기준이 무엇이냐? 기준은 주님이 기준이고 예수님이 기준입니다. 기준이고 그 기준을 향해 나아가는 목표 향해 나아가는 잣대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 이 말씀은 법이지요. 규칙입니다. 성경에 명문되어 있습니다. 또 성경에 명문안된것은 양심을 써보면 다 안다 그랬습니다. 우리 속에 신앙양심이 있으니까.
그래서 이 말씀을 가지고 나를 말씀대로의 사람으로 점점 고쳐나가는게 신앙이다. 그러면 가슴에 손을 얹고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시지요? 나는 오늘까지 예수 믿으면서 나를 얼마나 고쳤느냐? 하나님 앞에 내 평소의 나의 생각 나의 성격 나의 취미 나의 욕심 내 감정 좋을때는 누구나 다 좋습니다. 그런데 감정이 폭발할 그때에 옛날에는 예를 들면은 누가 나한테 내 성질 성미 건드리는 말 한번만 하면 폭발했는데 예수 믿고 나니까 아 이거 좀 참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한 1년 믿고 나니까 1년 정도 바로 믿고 나니까 나를 건드리는 말이 한 두세마디 나와도 참습니다. 그러면 그만큼 변화가 된겁니다. 옛날에는 억울한 소리 한번 들으면 못 견디고 사생결단하고 함께 싸웠는데 예수를 한 1년 믿고 나니까 이제는 억울한 소리 해도 그것을 사실 확인은 하고 밝히기는 밝히되 거기 대해서 막 화를 내고 분을 내고 이러지는 않고 차분하게 감정보다는 이성적 대응을 하는 사람으로 바꾸어졌습니다. 그러면 그게 변화가 되어진 겁니다. 그래가지고 모든 면을 우리의 수도없이 많은 모든 면을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고쳐나가는게 신앙이고 이게 구원이다. 이런걸 합리적이다 이성적이다 지성적이다 그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감정이란 것은 그거는 분위기를 만들때 마음을 좀 일으킬 필요가 있을때 그럴때 써먹는게 감정이지 감정이 이성보다 앞서면 반드시 사고를 치게 되어 있습니다. 고쳐야 됩니다 그런것은. 그래서 구원이란 것은 우리 자신을 고쳐서 온전한 사람 만드는 것이 구원이다. 그 잣대는 말씀이다. 그 말씀은 내 주관이 아닙니다. 객관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라는 게 있어서 주관이 있어서 객관이 그 주관속에 들어오지 못하면 항상 그 주관에 갇혀 있습니다.
자주 말씀드리는데 사람하고 대화를 해보면 말을 하면 그 말을 같은 말을 아무리 해도 안 듣습니다. 자기한테 필요한 말만 듣고 상대방의 말을 안 듣는다 그말이지요. 그게 체질적으로 성향적으로 그래가지고 그런 말이 안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관이 굉장히 강한 겁니다. 그 주관을 깨고 그것을 벗어나기 전에는 그 면으로 구원이 이루어지질 않고 그게 안 고쳐집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은 자기가 또렷하게 살아있는 동시에 주님을 따라갈 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첫째 뭐하라 그랬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첫째 뭐해야 됩니까? 주님을 따라가려 할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내 제자가 되려거든 혹시 좀 내용이 다를지 모르겠습니다만은 같은 의미인데 첫째는 뭐라고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그다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마태복음 거기 나옵니까 16장인가 거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은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자주 말씀드리지만은 우리 교인들은 자기가 굉장히 강합니다. 자기 부인을 좀처럼 못하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참 신앙들이 좋은데 어느 한순간에 가면 자기에게 딱 막혀서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게 많습니다. 이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게 무슨 말인가 내가 그런 것이 아닌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면 바로 그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나는 저러지 않다고 생각되면 자기가 그런 사람인줄 알아야 됩니다. 그 자기를 부인해라. 언덕을 떠나라 자기를 부인해라. 신앙생활에 대한 말씀에 대한 기존지식 자기 속에 자기 주관대로 들어와있는 그 지식 선입적 관념 그것을 뽑아내지 않으면 말씀이 들어가지를 아니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디에 가서나 무슨 일을 만날때든지 어떤 일을 취사, 취사라 말은 취하고 버린다는 말이지요. 선택하는 것. 어떤 일을 판단하는 것. 또 모든 일을 행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을 가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게 나한테 유익이냐 손해냐 이 사람이 나하고 가까우냐 머냐 내가 좋으냐 나쁘냐 이거는 인본입니다. 그걸 가지고 선하게 모든 일에 판단하면 그거는 비양심입니다. 모든 일을 판단할 때 기준은 이것이 옳으냐 그르냔데 그래서 제가 어떤 일들을 두고 말씀드릴때 감정을 다 배제하고 자기 감정 다 배제하고 또 손익을 다 떠나서 말씀을 가지고 따져서 옳고 그름을 먼저 따져보십시다 그리 말합니다. 옳으냐 그르냐 말씀을 가지고 옳으냐 그르냐를 따져봐야 됩니다.
이 설교 강단에 목사가 서지 않고 반사 선생님이 설교를 하면 그 선생님이 나이가 젊으면 어리면 교인들 중에 잘 믿고 잘 아는 교인들은 예배 시간에 눈을 감고 비스듬하게 예배 태도가 딱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굉장히 진노하실 태도입니다. 누가 섰든지 여기 섰으면 하나님의 대언잡니다. 그걸 그 사람의 나이를 보고 외모를 보면 인본입니다. 그게 바로 인본입니다. 그거 보지 말고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아니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은 인간은 외모봅니다. 그래서 학벌이 좋으니까 서부교회 교인들의 대다수가 그 담임목사님 초청할 때 그 목사님이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한국에서 유명한 박사 그 간판 보고 그 목사님을 초청해서 모셨는데 오늘날 서부교회 모습은 백목사님 노선에서 완전히 탈선했습니다. 다 벗어나버렸습니다. 본인들은 그 속에 있으니까 모릅니다. 간판보면 인본입니다. 인본을 보는 결과는 인본으로 가는 겁니다. 설교강단에 설교하는 사람이 나이가 어리든 못났든 여반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뭘 봐야됩니까? 그 전하는 말씀을 따져봐야 됩니다. 말씀을 들어보니까 말씀이 틀렸네. 그러면 목사가 설교해도 들을만한 가치가 없는 겁니다. 미국에서 유명한 목사님이 빌리그리암 아마 그분인가 모르겠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부흥사가 한국에 와서 수십만명 모아놓고 설교했습니다. 설교하는데 백목사님 판단은 우리 교회 주일학생보다 못하다 그랬습니다. 백목사님은 실없는 말씀하는 분이 아닙니다. 강조하는 게 아닙니다. 내막을 들어보면 그때 주일학생들 중에서 그 세계적으로 유명한 부흥사보다 설교하면 잘 할 주일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허무하다 그뜻입니다.
그러니까 간판보고 들을 게 아닙니다. 들어보고 말씀이 성경에 어긋나면 들을만한 가치가 없고 틀렸으면 더한 것이고 누가 전하든 말씀이 맞으면 그게 바로 은혭니다. 말씀의 은혜. 그래서 감정기분에서 떠나서 뭐에다 굳게 세웁니까? 믿으라 믿으라 감정기분에서 떠나 어디에다 굳게 세워요? 말씀에다 굳게 세워. 말씀에 굳게 세웁니다. 사도바울이 아시아를 떠나면서 그 교인들에게 그 교인들을 두 군데 부탁했습니다. 어디어디 부탁했습니까? 내가 지금 너희를 주님에게 부탁한다 또 하나는요? 말씀에 부탁한다. 내가 지금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에 말씀에게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워서 거룩히 하심을 입은 자 가운데 얻을 기업을 얻게 하시리라. 말씀이라야 됩니다. 그 말씀은 이치고 이치는 들어보면 압니다. 논리를 따져보면 옳으냐 그르냐가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안듣고 안따져보면 죽는날까지 믿어도 믿는 세계는 모르는 겁니다. 신앙이란 것은 말씀이 전붑니다. 그 말씀의 기준은 성경이고 그 성경속에 알맹이는 무엇입니까? 성경의 알맹이는 무엇입니까? 말씀의 기준은 성경이고 성경의 알맹이는요? 예수님의 대속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우리 구원이고. 이러니까 들어보면 아는 겁니다. 그럴때 우리가 이걸 따질때 자기를 부인해야 됩니다. 이미 내가 알고있는 것. 내가 생각하는 것. 내 속에 있는 것. 이걸 가지고 막아놓고 암만 들어도 안들립니다. 이걸 놓고 그래서 사람과 사람 판단할 때 일단 한 걸음 물러나서 두 사람이 문제가 생기면 두 사람은 갑과 을은 서로 자기 주장하니까 원고는 원고주장 피고는 피고주장 할꺼니까 판사가 나서서 양쪽 말 다 들어보고 판결합니다. 갑과 을이 문제가 생기면 갑은 자기 말만 하는 겁니다. 을은 자기 말만 하고. 그러면 병이 나서서 갑 너는 니 말하고 을 너는 니 말하니까 두 사람이 평행선 달리는데 제 3자는 두사람에게 있는 그 주관이 없으니까 객관적으로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생각을 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하자 이것이 다른 사람이 나를 판단하기 전에 내가 나를 부인하고 내가 객관이 돼서 나 스스로를 판단할 수 있어야 그게 신앙생활이 되는 것이고 옳은 걸 찾아갈 수가 있는 것이지 항상 자기라는 사람은 자기한테 갇혀있고 다른 사람은 나를 예를 들면 이렇게 보는데 나는 다른 사람이 보는 내 모습을 내가 보지 못하면 그게 바로 주관입니다. 소경입니다 그면으로는. 그러면 못 고칩니다. 보여야 고치지요. 병이라는 것이 큰 병은 알아도 못 고치는데. 몰라서 원인 몰라서 못 고치는 병이 대부분이고 불치병은 알아도 현대의학이 못 고치는 게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인간병은 알아야 고치는데 원인조차 모르면 못 고칩니다. 근데 그 모르는 것이 다른 사람이 보면 압니다. 자기는 모릅니다. 큰 병입니다. 그게 주관입니다. 근데 그 자기 모르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말을 해주면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입니다. 인정을 안 합니다. 그리고 그게 무슨 말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 면으로 늘 신앙이 늘 보면은 불구적인 신앙 치우친 신앙 기형적인 신앙 그런 신앙으로 되어있는게 많습니다. 이게 참 오늘 본 설교와 다른건데 이거 좀 깊이 깊이 좀 생각해야 됩니다. 신앙은 구원은 나를 고치는게 구원이다. 연보 많이 하는 것, 성경 많이 읽는 것, 기도 많이 하는 것, 다 중요하고 좋은 겁니다. 그런데 그런 거 아무리 해도 자기를 안 고치면 그거 전부다 헛일입니다. 해봐도. 자기를 고쳐야 그 모든게 가치가 있고 그게 다 필요하게 되는 겁니다. 나 고치는 게 신앙입니다. 자신을 고치는게. 그러면 나 고치는게 신앙이면 내가 어디가 틀렸느냐? 나의 무엇이 잘못되었느냐를 말씀을 가지고 살펴봐야 됩니다. 그래야 구원이 이루어지고 자기를 고칠 수 있는 겁니다. 좀 깊이 좀 생각해보십시다. 이거는 뭐 항상 하는 말씀이고 끝도 없는 거니까.
자 여기 본문에서 거기 하나 더 빠진 거 좀 덧붙이면은 자기 고치는 거기에 오전에 빚지고 돈 모으는 예를 들었는데 사람이 희로애락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좀 다른 이야긴데, 어떤 신문에서 본건데 공직에 있다가 퇴직을 했는가 그랬는데 이분이 조용히 살고싶어서 서울 변두린가 어디 마을로 좀 조용한 곳으로 이사를 갔답니다. 이사 갔는데 이사 가서 첫날 자기 집앞에 골목에 보니까 악취나는 쓰레기가 골목 한가득 가득 들어있더랍니다. 아무도 안 치우더랍니다. 몇 날 며칠 지나도. 그래서 이분이 백리터짜리 쓰레기봉투를 자기 돈 들여가지고 사가지고 그걸 가따가 분리수거를 해가지고 싹 다 치웠답니다. 자기 돈 들여서 자기 노력으로 다 치웠답니다. 다 치우고 나니까 며칠 지나고 나니까 또 그래 또 모이더랍니다. 또 치웠답니다. 그래가지고 한 서너번 다 치우고 나니까 그다음부터는 골목이 깨끗하게 되더랍니다. 안 믿는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안 믿는 사람이 하는 일. 믿는 사람은 그보다 더 할 수 있는 희생이 복음 위해서라면 필요하면 해야 되겠지요. 예배당 청소할 때 제가 일주일에 한 두세번 이야기하니까 한번만 해도 됩니다 할때 제가 생각이 그 생각이 자꾸 났습니다. 예배당 주변 청소할 때 주변에 피해만 안되면 매일 새벽마다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래는 못해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하면 좋겠다 싶은데 한번만 해도 충분합니다 그런 말씀들 하실 때 제 마음속에 안 믿는 사람도 자기 돈 들여서 골목길을 그렇게 다 청소해서 새 동네를 만드는데 교회가 주변에 피해를 본의 아니게 끼치는데 새벽 일주일에 한두번 정도 세사람이 나가서 5분만 하면 요동네 깨끗해집니다 요 주변에. 제 혼자 나가서 주일날 새벽에 쓸면은 한 15분정도 20분정도 걸리면 어지간한 쓰레기 많지 않으면 깨끗하게 치웁니다. 그런데 한 세 사람이 나가서 5분만 하면은 요 주변 다 깨끗하게 됩니다. 그거 일주일에 두 번만 하면은 요 주변이 깨끗해지고 그 노력이 앞으로 우리 교회에 어떤 이점으로 돌아올지 모릅니다 복음 운동에. 그런데 다른 뜻도 있겠지만은 그걸 말할 때 한번만 해도 됩니다 그럴때 그 생각이 나더라 그말이지요.
좀 다른 경우였는데 사람이 천국을 누가 만드느냐? 천국을 자기가 만듭니다. 지옥을 누가 만드느냐? 지옥을 자기가 만듭니다. 어떤 사람이 그 집에 가면 그 교회 가면 그 모임에 가면 그 모임이 천국이 되고 천국된 거기에 그 사람이 빠져나가고 또 한 사람이 들어가면 그 모임이 지옥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그 모임에 가면 그 모임이 점잖은 그런 모임으로 변화가 되고 어떤 사람이 그 모임에 가면 그 모임이 타락해서 난잡한 그런 모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은 다 사람에 따라 되는 겁니다. 병이 들어서 곧 죽을 병이 들어도 얼굴에 웃음꽃이 피고 남에게 부담을 안주려는 그런 사람도 있고 눈꼽만큼 아파가지고 손가락만 살짝 베여도 온 집안 식구를 못살게 만드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 자기라는 사람에 달린 겁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냐. 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 끼치는 것은 열가지 백가지를 끼쳐도 하나도 기억이 안나고 남이 나한테 피해 끼치는 것은 한번만 피해를 입으면 평생 깽아리라 그러죠. 깨갱이를 딱 가지고 딱 걸어가지고 그걸 마음속에 담아놓고 평생 안 잊어버립니다. 자기 중심입니다. 내가 남에게 피해 끼친것은 열 번 백번을 끼쳐도 내가 그랬는가 기억이 없고. 네로가 그랬다 그러지요 네로가. 수많은 사람을 잡아죽이고 제 손이 베여서 피가 나니까 눈물 흘리니까 내 몸에서 피가 난다 그게 진짠지는 모르지만은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악한 인간 중에 악인입니다. 그게 가장 큰 악입니다. 내가 남에게 피해 끼친 것은 하나만 작은 걸 끼쳐도 잠을 못잘만큼 내가 남에게 피해를 끼쳤다 손해를 끼쳤다 힘들게 만들었다 그리 되야 되고 남이 나한테 피해끼친 것은 사람이 그럴 수 있지. 열 번 백번을 피해끼쳐도 다 품을 수 있는 그게 그것이 주님을 따라 가는 길입니다. 그게 신앙의 길이고. 그러면 나는 어떤가? 나라는 사람은 이 말씀을 가지고 보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자기 스스로를 살펴봐야 되는데 그런데 자기중심의 사람은 남에게 피해 끼친거는 모르고 자기 피해 입은거만 아는 그 사람은 자기를 돌아볼 줄 모릅니다. 그러니 큰 문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은 첫째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두 번째는 뭐라고요? 자기를 아는게 신앙입니다. 자기 모르면 신앙생활은 없는 겁니다.
본문에 잠깐 들어가보시겠습니다. 여기 본문에 보면 크게 두 단락으로 되있는데 세가지를 말씀드린 겁니다. 크게 말하면 두 단락인데 하나는 뭐냐?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을 하셨다 요걸 하나로 따로 땠는데 그 다음에 같이 연결됩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은 신앙생활할 때 항상 자기를 새롭게 하는 결심이 필요하다.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로 살기를 결심하고 어제보다 좀 더 나를 고쳐 온전한 사람 만들기를 결심하고 그래서 좀 어제보다 좀 더 게으름을 버리고 좀 부족함을 채우고 좀 더 열심히 살고 좀 더 나은 자기를 만들기 위해서 쉬지않고 자기를 살펴서 굳게 결심하는 신앙의 결심이 중요하다. 같이 한번 해보실까요? ‘결심’ ‘결심’. 결심이라 말은 마음을 다 잡는다 그 뜻입니다. 마음을 다 잡아서 나는 예배시간에 많이 존다고 목사님한테 지적을 많이 받았다. 이제는 예배시간에 한번 안 졸아봐야되겠다 마음을 다지면 그것도 결심입니다.
우리 중간반 학생들 주일학생들은 예배시간에 앉았다가 예배 보다가도 보면은 자주 나가고 예배당에 찬송하다 나가고. 볼일보러 나가겠지만은 예배당에 앉아있으면 찬송준비할때쯤되면 밖에 안 나가야 되고 예배시간에는 휴대폰을 받는게 아닙니다. 세상에 저는 예배보다가 휴대폰 받는 사람 보면 저는 도무지 이해를 못합니다. 저는 어지간히 이해성이 넓고 이해성이 넓다고 저는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어느 정도 사람들에게. 안 그런 면도 있지만은. 그런데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것중에 하나는 예배 보다가 전화받으러 나가는 분들 어른들도 있습니다. 여기 보면 다 보이거든요? 장년반들도. 세상에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다가 전화를 받아? 상식적으로 도무지 저는 상상을 못할 일입니다. 제가 오늘까지 모태신앙부터 믿어오면서 여기서 그 모습 처음 봤습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서. 서부교회. 시골에는 뭐 휴대폰이 없었으니까. 옛날에 또 없었으니까 그렇겠지만은. 예배보다가 휴대폰 받으러 나가는 모습을 여기서 처음 봤습니다. 그거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배 시간에 앉았다가 자주 들락날락했는데 이제는 내가 좀 그거는 안해야 되겠다 끊어야 되겠다. 이런것도 작정 결심을 하는 겁니다. 결심할 게 한가지 두가지 겠습니까? 굉장히 많지요.
신앙생활에 굳게 결심하시니라 중요합니다. 이것이 연결되는데 예수님께서 어디를 향해 가신다고요? 학생들? 예루살렘 향해 가십니다. 어디를 거쳐 가려 그랬습니까?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는데 어디를 통과하려고 했습니까 처음에? 사마리아인의 한 촌을 통과하려고 그랬습니다. 그랬는데 그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했다고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동네로 못 지나갑니다. 막았습니다. 왜 막았습니까? 사마리아인하고 유대인들은 서로 적대관계처럼 그리되어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런 유대인을 굉장히 싫어했고 그래서 아주 사이가 안좋아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니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야고보 요한이 감히 우리 선생님을 배척을 해? 어떤 분인지 맛을 보여주지. 하늘에서 불을 명해서 내려와서 이놈들 모조리 다 태워버리라고 할까요? 자비입니까 무자비입니까? 무자비이지요. 잔인입니다. 내 마음에 안드니까. 나를 해꼬지 하니까. 나를 때리니까. 나한테 피해입히니까. 나도 같이 너희들 너는 나 한 대 때렸으니까 나는 두 대 때리지. 너는 나를 손바닥으로 때리면 나는 너를 주먹으로 때리지. 너는 나를 손으로 때리면 나는 너를 발로 차버리지. 그게 무자비입니다. 세상법이고 지옥의 법입니다. 그래 말하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다고요? 혼을 냈습니다. 틀려먹었다. 그거는 안 믿는 사람의 법이지 내 법은 그게 아니다. 그래가지고 공연한 마찰을 피해서 다른 마을로 돌아서 가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운 것이 하나님의 능력, 불을 명해서 하늘에서 내려와서 태우면 이게 능력 아닙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어떤 사람에게 온다고요? 그 능력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되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싶어서 복을 주시기 위해서 부모님이 실력있는 부모님은 재산을 많이 가졌든지 자녀에게 주고 싶은게 많은 부모님은 자녀에게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고 속이 탑니다. 내가 지금 이만큼 많이 가졌는데 저 아이에게 좀 줘서 맡겨야 되겠는데 줬다가는 다 까먹어버리고 줬다가는 저걸 가지고 난리를 칠꺼니까 못주는 겁니다. 안타깝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우리 통해서 나타내서 하나님의 영광 드러내기를 얼마나 소원하고 계시는데 그럴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도 보면 잘못보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이 세상에는 학벌이 높은 사람 언변 좋은 사람 실력 있는 사람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 넘칠만큼 많습니다. 모든 면에. 믿는 사람 중에서도 인물도 좋고 학벌도 좋고 말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또 실천력도 있고 의지도 강하고 끈기도 있고 추진력도 있고 이런 사람이 꽉 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걸 보면 도무지 하나님이 붙들고 쓰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안 보이는가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런 교회들 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있는 것 같은데 들어가보면 아니고 그러니까 잘난 사람들이 믿음 가지고 잘하면은 일을 열배 백배는 할건데 그런 사람은 다 자기 주관으로 가버리고 못난 사람 붙들고 하나님께서 하시려니까 참 어렵지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감당할만한 실력만 되면 그래서 우리 반사 선생님 구역장도 그렇습니다. 학생을 보내줄 그만한 사람이 되야 보내주지 학생을 보내줄 사람이 안됐는데 보내줄 수가 있겠습니까? 복을 주고 싶어도 복을 주면 그 복에 갇혀서 하늘의 복을 던져버리던지 그 복에 치여서 큰 낭패가 날거니까 복을 주고 싶어도 못 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능력은 감당할만한 사람이 되야 주지 감당할만한 사람이 안되면 안되는 겁니다. 사람이 되는게 중요하다. 그러니까 일자리가 없다. 돈이 없다. 뭐가 없다. 전부 핑곕니다. 사람만 되있으면 지금도 필요한 인물은 인재가 없어서 세계 곳곳에 다 돌아다닌다 그러지요 인재가 없어서. 우리가 그걸 찾을 건 아니지만은. 하나님 앞에 사람만 되면 그 사람을 통해서 뭐든지 다 할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못하는 겁니다. 탄식입니다.
그 사람이 되는 결정적인 두가지 요소가 뭐냐? 첫째가 뭐라고요? 첫째가 뭡니까? 사람을 사랑하는 겁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은 사람을 아끼는 겁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요소가 사람을 아끼는 거. 그래서 성경에 위대한 인물은 하나같이 보면은 사람을 다 아꼈습니다. 아브라함도 롯을 그렇게 아꼈고. 다윗도 솔로몬을 참 아꼈고. 요셉도 사람을 참 아꼈고. 또 예수님 육신의 부친 요셉도 사람을 참 아꼈고. 사도바울도 그랬고. 성경에 위대한 인물은 사람을 굉장히 아낍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겁니다. 사랑하고 그다음에는 자기를 바로 아는 겸손입니다. 이 두가지를 가질때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된다. 이게 전부는 아니지만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두가지다 그리 볼 수 있습니다. 요걸 여기 크게 하나 말씀을 하고.
그다음에 크게 두 번째는 소망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가시니까 어떤 사람이 주님에게 찾아와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럴때 이 사람의 말이 좋은 말이고 좋은 소망입니다. 주님을 좇겠습니다 그 말은 주님을 따라가서 주와 같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아주 좋은 소망입니다. 그 소망을 말씀하실 때 본문에서 주님이 세가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네가 나를 따라오고 싶으냐. 나를 따라와서 나에게 와서 나처럼 되고 싶으냐. 주님같이 되고 싶으냐. 그러면 첫째는 뭡니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 그말은 나를 따라오고 싶으냐 가장 먼저 조심할 것은 뭘 하지 마라고요? 자기 위한 생애는 절대 금물이다. 나를 따라오고 싶으면 너 자신을 완전히 부인을 해야 된다. 자기를 위한 생애가 있으면 주님은 따라가지 못합니다. 참 어렵습니다. 천하 모든 사람이 다 자기 중심이고 자기만 위해서 사는데 이게 모든 사람인데 여기에 역항적으로 완전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아닌 하나님과 하나님 원하시는 인간 구원을 위해서 자기 한 몸 완전히 불살라 버리는, 십자가 지는 이 자세가 아니면 주님을 따라갈 수가 없다는 것을 첫째로 말씀했습니다. 그리 살 수 있겠습니까? 그리 사셨습니까?이게 주님 가신 걸음이고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이 걸어갈 걸음입니다. 우리들이 걸어가야 될 걸음입니다. 그런데 이런 걸음을 걸어가기 위해서 말 한 마디도 어떤 일 하나도 침 한번 삼키는 것도 눈 한번 깜빡이는 것도 자기 위해서는 할 수 없는 게 주님 가신 걸음인데 이 걸음을 걸어가는 우리들이 나를 좀 위하지 않는다고, 나 높여 주지 않는다고, 나 드러내서 영광스럽게 하지 않는다고, 나한테 억울한 누명을 씌운다고, 애매한 소리 한다고, 나 듣기 싫고 속 썩이는 말 한다고 분을 내고 시험에 들고 분을 삭이지 못하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주님 따라가는 길과 천리 만리 거리가 먼 겁니다. 너 자신 위한 생애는 하나도 할 수 없다, 예를 든 겁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집이 있고 다 그리 살지만 인자는, 주님은 머리 둘 곳이 없다,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다 당신 자신 위한 생애는 하나도 없다, 이는 주님이 가신 길이고,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서 주와 같이 되는 소망을 이루려면 먼저 요걸 가져야 합니다. 나를 위한 생애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먹어도 입어도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다, 이게 성도의, 구속 받은 성도의 걸음입니다. 어렵지만 걸어가야 되고 가는 분들은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는 주님이 어떤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라 하시니까 그 사람이 내가 먼저 가서,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마는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해 주옵소서 부친 장례는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사은의 마지막입니다. 마지막 사은, 사람이 사람인 것은 은혜를 알기 때문에 사람입니다.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갚는 생활을 사은이라 그러는데 사은 중에 가장 큰 사은은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것입니다. 임금님 섬기는 것보다 스승 존경보다 가장 먼저 할 일이 부모님께 효도입니다. 이 효도의 마지막이 부모님 장례입니다. 그래서 부모 장례를 아무리 간소하게 해도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어서 정성껏 장례를 치르는 게 부모님에 대한 사은의 도리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장례하고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그거는 죽은 자들이 하는 것이다,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 이 너라는 사람은 그러면 어떤 사람이라 말입니까? 이걸 지금 논리적으로 안 들으니까 자꾸 잠이 오지요. 나를 따라 오라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나로, 먼저라는 말이 있습니다. 먼저, 주님 따라가는 것보다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 대답이 그 할 일을, 먼저 할 일이니까 그 할 일이 뭐냐? 세상에 학교를 가야 됩니다, 학원을 가야 됩니다, 도장을 가야 됩니다, 출근해야 됩니다, 계약이 있습니다, 뭐 해야 됩니다, 그거는 아주 시시껄껄한 것이고 사람이 가장 아무도 반대할 수 없는, 사람의 탈을 쓰고 가장 중요한 아버지 장례입니다, 이거 반대하면 천하가 다 몹씁 사람이라 하겠지요. 그거는 반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버지 장례도 주님 따라가는 게 먼저고 그걸 위해서 하는 것이지 주님 따라가는 것 빼놓고 아버지 장례가 우선이면 주님 따라가는 것은 못한다, 그거는 죽은 자들이 하는 거다. 그러면 이 사람은 어떤 자라는 말입니까? 산 자라 말이지요? 산 사람은 어떤 사람을 산 사람이라 합니까? 성경에 산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택함 받고 중생된 사람, 믿는 사람, 여기 있는 우리는 산 사람 아닙니까? 주님의 대속을 입어서 중생된 산 사람, 너는 주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너 대신 주님이 죽으시고 그 죽음으로 너를 살려 준, 너는 죽음으로 빚진, 생명의 빚을 진 너다, 그렇게 살아야 할 너니까 그 대속의 공로 받지 못한 죽은 자들과는 다르다, 그러니 주님 따라가는 일을 먼저 하지 않고 다른 걸 먼저 하는 것은 죽은 자들이 하는 것이고, 대속을 받은 너는 그 사은이 첫째니까 주님 따라가는 그 일이 먼저고 그 일에 필요하여 장례도 치르고 그 일을 위해서 장례도 치르는 것이지 이것 끊어 놓고 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 따라가는 일, 말하자면 우리 소망입니다. 주님 같이 되는 소망, 이 소망보다 앞세울 것은 없고 이 소망보다 먼저 할 것이 없고 이 소망을 제쳐 놓고 세상에서 할 일은 없다는 것을 여기서 하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또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주를 따라가겠습니다마는 나로 먼저, 여기도 먼저가 나옵니다.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가족은 책임이지요. 사람의 가장 큰 두 가지가 하나는 사은이고 하나는 책임인데, 책임 중에는 가정을 보살피는 책임이 가장 큽니다. 남반들은 잘 기억해야 됩니다. 남반들은, 가정을 책임진 남자가 가정을 바로 돌보지 않으면 불신자보다 더 악하니라, 성경입니다. 가정에 책임을 지는데, 가정에 대한 남자의 책임, 가족을 작별케,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가족을 작별해야 됩니다. 마지막 책임인데, 주님 말씀하시기를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쟁기가 뭔지 압니까? 쟁기는 앞에 소가, 소 뒤에 묶어 가지고 큰, 그 뭐라 그럽니까? 기역자로 된 것으로 밭을 가는 게 쟁기입니다. 소가 끌고 가고 뒤에서 막 푹 파서 소 힘으로 밭을 갈아나가는, 옛날에, 요즘처럼 경운기나 트랙터 이런 게 없을 때 소 힘으로 할 때, 사람 힘으로 할 때 그때 밭을 가는 게 쟁기입니다. 쟁기를 잡고, 그때는 소가 앞만 보고 가니까 앞만 보고 가는 것이지 뒤를 돌아보면 이게 막 옆으로 이상하게 되니까 안 되는 것이지요.
주님을 따라가는 그 걸음은, 하늘나라 향한 걸음, 주님 향한 그 걸음은 앞만 보고 가는 것이지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걸 말씀합니다. 신앙의 걸음입니다. 신앙은 전진이지, 피곤하면 쉬어갈 수 있고 그렇지만 뒤로 돌아보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할 것이다,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크게 첫째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되려면 사람이 되어야 된다, 그 사람이 되는 데는 사람을 사랑하고 겸손해야 된다, 크게 하나, 그 앞에 결심은 부수적인 것이고, 그 다음에 하나는 주님을 향한 소망, 단일 소망에 기억할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님을 따라가는 소망을 이루어 가는 데 하나는 자기 위한 생애는 절대 금물이다, 두 번째는 어떤 중차대한 일이라도 주님 따라가는 것보다 먼저 있을 수는 없다 앞설 수 없다, 세 번째는 주님을 따라가는 걸음은 앞만 보고 가는 것이지 뒤를 돌아보면서, 두고 온 재산이 아까워서 뒤를 돌아보다가 뭐가 되었다고요?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처럼, 그게 딱 그겁니다. 믿는 사람이 주님을 따라가다가 두고 온 돈이 아까워서, 뭐가 아까워서 뒤를 돌아보면 주님 따라가는 걸음은 걸어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앞만 보고 달려갈 것이다, 세 가지를 말씀했습니다.
우리 소망과 우리 소망을 향해 걸어가는 걸음이 어떤 걸음인가? 참 어렵고 어려운 걸음입니다. 그래도 이것이 좁은 길이고 생명길이고 우리들이 걸어갈 구원의 길이라 기억하고 힘을 써보십시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다. 이것이 과연 구름 잡는 말이냐?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냐? 세상 땅의 말이냐 아니면 과연 하늘의 복음이냐? 깊이 좀 생각해 보십시다.